소설리스트

88화 (88/137)

꽤나 긴 여정이었다. 갈 때의 설렘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연신 웃으면서 떠났던 

여정이었거늘 돌아올 때의 마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유설린은 유설린대로 여운휘는 여운휘대로 생각에 잠겼다. 마차는 빠르게 악양으로 

돌아왔다. 

미리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은 우문학이 문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 

서 내리는 유설린을 보면서 우문학이 인사를 건넸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아, 예. 그 동안 세가에 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지요?" 

"예. 그렇지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문학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항상 업무에 바쁜 그가 이렇게 와서 유설린 

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제 거처로 가지요." 

암황은 멀어지는 유설린을 향해 고개를 한참을 숙이고 있다가 말을 이끌었다. 지금 

우문학이 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같이 들어야 하는 입장이지만 마부로 변장한 이상 

그 일을 끝까지 맞춰야 한다. 

유설린의 거처에는 우선 셋이 모였다. 

우문학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모자라서 설마 여숙화를 노리는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우 대협이 아니라 그 누구였다 해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 

나저나 이야기 할 거라고 했던 게 뭐죠?" 

"삼일 전에…… 여가와 독고가가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뭐라고요?" 

여가라면 여숙화의 가문이고 독고가라면 독고유의 가문이다. 그 두 가문이 갑자기 

무슨 연유로 싸운다는 말인가. 

"원래부터 두 세가는 앙숙(怏宿)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의 혼인도 반대했었지요. 하 

지만 억지로라도 둘이 결혼하자 여가의 장문인은 딸을 위해서 억지로 독가가와의 싸 

움을 멈췄습니다. 그런데 여숙화가 죽자 그 분노와 함께 모든 화살이 독고가로 쏟아 

졌습니다." 

유설린은 멍하니 앉아서 중얼거리는 듯 말했다. 

"이게…… 그들이 원하던 거겠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조사해 보니 살령대에게 죽은 무인들 때문에 작던 크던 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도 같은 맥락인 듯 합니다만 그 크기가 여태까지의 

그 무엇보다도 엄청납니다." 

여태까지도 그 죽어 버린 무인들 탓에 싸움이 벌어지고 그 근방이 혼란에 휩싸였 

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마교에서 손을 쓴 것이다. 마교는 정파 무림을 혼란으로 

몰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힘이 약해지는 순간…… 그 이빨을 들이밀 게 

다. 

"후후, 우리는 지금 그들의 장단에 놀아난 건가요?" 

"죄송합니다. 이러한 것을 조금 더 빨리 알아내지 못해서." 

우문학이 재차 고개를 숙였지만 유설린의 마음은 씁쓸했다. 

쏟아 버린 물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혼란(混亂) 

아무도 이제 악양유가를 우습게 보지 않는다. 

호남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서도 유가라고 하면 모두가 상대하기를 꺼려한 

다. 그만큼 급성장을 한 세력도 드물고 또 그토록 재력이 대단한 곳도 흔치 않다. 

그렇기에 적으로 두기보다는 유가를 편으로 두려고 한다. 

철은 중요하다. 싸움이 난다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무기를 만드는 철이 

다. 

그 철을 잡고 있는 곳 또한 유가다. 당연스럽게 유가의 힘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 

다. 더불어 세력이 커지면서 점점 무인의 수도 늘어만 갔다. 고용할 능력도 되고, 

또 장사를 하면서 물품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인들이 있어야 한다는 명목 탓이다. 

하루도 수십 명에 달하는 낭인 무사들이 유가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개중에서 빼 

어난 자들을 골라내곤 했다. 

찾아오는 자들의 수가 많은 만큼 그들은 각양각색이다. 

실력이 빼어난 자도 있지만 그런 자의 수는 드물고 멋으로 검을 든 자들도 허다하 

다. 그들 중에서 일부는 탈락이라는 말을 들으면 당장에 쌍심지를 돋구고 오히려 화 

를 낸다. 

그러한 것을 관리하는 것이 능려운이다. 그가 상대하기 버거운 자가 일을 일으키면 

우문학이 나서지만 대부분이 그의 손에서 끝나게 된다. 

우문학은 여전히 능려운에게 무공을 전수했다. 능려운 또한 무골이었던 탓에 혈풍구 

룡검법의 삼분지 이 이상을 익힌 상태다. 능려운이 처음 이곳에 나타났을 때는 낭 

인 중에서 가장 강한 자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웬만한 고수와는 손을 겨룰 정도로 강해졌다. 놀라울 정도의 발전 

이었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여운휘라는 벽이 있는 탓이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읽는 우문학조차도 능려운이 유설린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몰랐 

다. 그리고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능려운만의 비밀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의 꿈이 있다. 많은 사람이 있는 만큼 그 꿈은 각양각색이다. 그리 

고……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몇몇의 인물이 있다. 꽤나 늙어 보이는 노인 하나가 찻잔을 들 

면서 말했다. 

"이렇게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신 건 참으로 오랜만인 듯 하군." 

"뭐 그런 듯 하오." 

노인은 풍운조고 대답한 것은 여운휘다. 여운휘가 세가에 있었던 시간도 별로 없었 

거니와 있다 한들 풍운조와 만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유설린의 옆에서 세가가 이만 

큼 크게 만든 게 바로 풍운조가 아니던가. 

이만큼 빠르게 세가를 발전시킨 게 단순히 풍운조의 힘뿐만이 아니지만 그의 노고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그렇지만 얼굴에 

는 왠지 모를 생기가 넘친다. 

"꽤나 늙어 보이는 군.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오." 

"후후, 그런가? 하지만 즐겁단 말이야?" 

풍운조의 겉모습은 더욱 늙어버렸지만 속은 오히려 그 반대다. 생기가 넘치고 뭔가 

더 몸을 움직이고 싶다. 조용히 지냈던 오랜 시간 탓일까? 이렇게 활동적으로 움직 

이는 게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풍운조는 앞에 있는 여운휘를 응시했다. 그 동안 여운휘를 보지는 못했어도 듣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귀가 아플 정도로 말이다. 

그 때문일까? 예전 처음 그와 싸웠을 때와 지금이 무척이나 달라 보였다. 

그때는 비등했거늘 지금은…… 

'이길 수 없을 듯 싶군.' 

수많은 경험 탓인지 풍겨 나오는 기운이 달라졌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날카롭게 다듬어진 검 같다. 

풍운조는 유설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예정대로 제조 된 철들을 계약된 곳들에 보냈소. 그리고 비밀리에 검문에도 철을 

붙였소이다.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말은 어떻게 되어가죠?" 

"그 또한 처음엔 조금 무리인 듯 했지만 지금은 잘 되어가고 있소. 아마도 내년이 

되면 큰 이문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더구려. 그리고 소금 또한 작년보다 반 정도 더 

많은 이득을 얻을 것 같소이다." 

수많은 이문을 남기는 장사들을 유가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껴안았다. 물론 호남에 

한해서지만 그것만해도 어디인가. 

"그리고 그 안건은 어떻게……" 

"아!" 

풍운조의 조심스러운 말에 유설린은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낮게 소리를 쳤다. 

그녀는 품에 든 서찰을 살짝 꺼내 보이고는 말했다. 

"무림맹이 부탁한 대로 해 줄 생각이에요." 

"하지만 꽤나 거금인데……" 

"아니에요. 지금 확실히 도와주는 게 오히려 낫죠. 비록 큰돈이긴 하지만 내년 말에 

서 얻을 수익과 이번에 더욱 크게 뻗어나간 소금을 생각하면 큰 무리는 아니죠." 

유가로 무림맹에서 연락이 날아왔다. 평소에도 철을 거래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다 

소 나른 내용이었다. 무림맹 쪽은 마교와의 일전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면서 돈을 빌 

려줄 것을 요구했다. 

꽤나 큰돈이었기에 유설린 또한 고민했다. 그 돈은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는 

유가라 해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할 정도였다. 반년에서 일년 정도 죽어라 해 

야 벌만한 돈. 하지만 유설린은 빌려주기로 결정했다. 

무림맹의 힘이 커질수록 마교를 향할 그들의 칼이 날카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돈을 주었기에 무림맹 쪽에서도 저희를 대우해 줄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받을 돈, 그냥 어딘가에 맡겨둔다 셈치면 되겠지요." 

풍운조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유설린의 말 대로이기는 했지만 만약 무림맹이 마 

교에게 패한다면 계획이 완전히 일그러질 게 분명하다. 빌려준 돈을 돌려 받지 못하 

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마교 쪽에서 무림맹에 전폭적인 지지를 한 유가에게 철퇴 

를 내려칠 게 분명하다. 

무림맹에서 재력을 도와 달라는 서찰이 온 지 열흘. 오늘쯤 이 종이를 무림맹에 보 

낼 생각이다. 

그렇게 차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유설린과 풍운조는 고개를 돌렸고, 여운휘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덜컥! 

문을 열어제치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우문학이다. 그의 얼굴이 상당히 상기되어 있 

었다. 

"무슨 일인가요?" 

"소가주님!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 일이라니요?" 

"무림맹이 마교에게 선전포고를……!" 

자리에 앉아 있던 유설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토록 벌어질 것만 같았던 정사대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유설린은 주먹을 꼭 쥐 

었다. 이제부터 시작 된 것이다. 

그녀의 모든 계획은 정사대전을 기반으로 벌어질 것이다. 

되찾고 말 것이다. 유설린의 아버지였던 유백명의 마교를. 

'됐어. 드디어 때가 온 거야.' 

여운휘와 유설린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가 쪽에서 무림맹이 마교에게 정사대전의 시작을 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 새로운 서찰 하나가 날아들었다. 

돈에 관한 것도, 그 외에 어떠한 재력에 관한 것도 아니다. 

여운휘를 찾고 있다. 

그가 무림맹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서찰이었던 것이다. 바로 척마신풍대를 위하여. 

천객인 백산보다 오히려 척마신풍대의 얼굴로 알려진 여운휘가 그들에게는 필요했 

던 것이다. 

마교와 무림맹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여야 할 자들 중 하나가 바 

로 척마신풍대다. 많은 수의 대원들이 죽은 탓에 새로운 인원들을 보급했고, 조금 

더 체계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로 했다. 

돌아온 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건 아니지만 여운휘는 움직여야 한다. 척마신풍대 

에서, 아니 무림맹 자체에서도 이름난 무인이 된 여운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입 

장이다. 

서찰을 본 여운휘가 짧게 말을 내뱉었다. 

"내일 간다." 

"하지만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림맹은 나를 필요로 하고 우리는 그들을 이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 밖 

에 날 필요는 없지." 

여운휘는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유설린의 말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유설린 또한 여 

운휘의 말에 동감하고 있지만 그러한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옆에 있고 싶은데, 항상 보고 싶은데 또 다시 떨어져야 한다. 

유설린은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여운휘는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 

고 그러한 둘의 모습을 우문학이 안타까운 얼굴로 쳐다봤다. 서찰을 가지고 오는 바 

람에 이곳에 서 있어야 했던 그로서는 뭔가 씁쓸한 게 사실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무척이나 모호하다. 적어도 우문학이 보기에는 그러했다. 

감정이 풍부하지만 남녀간의 애정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유설린과, 감정의 표현 

이 극히 드문 여운휘. 

'쯧쯧, 저래서야 원.' 

다른 사람이 본다면 둘은 세상에 다시없을 만한 연인이다. 서로를 위하는 둘의 모습 

을 보면 저절로 그리 생각하게 될 게다.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인 둘은 아무런 생각 

도 없는 듯 하다. 아니면 서로 말을 꺼내기를 꺼려하는 것이나. 

우문학은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평소 그들을 생각해보면 아마 여운휘가 이곳을 떠 

날 때까지 계속 이렇게 뚱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소가주 계시오?" 

"아, 풍 노야." 

문을 열고 풍운조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는 최근 있을 수많은 거래들에 대해 유설 

린에게 이야기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다. 

우문학은 마침 풍운조가 이곳에 오자 여운휘를 향해 말했다. 

"시간 있으면 나와 이야기 좀 하지." 

"?" 

"소가주님은 풍 노야와 함께 계실 테니 잠시 자리를 비우지. 자네와 둘이서 하고 싶 

은 긴한 이야기일세." 

여운휘는 유설린을 힐끔 바라봤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그녀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이지만 풍운조가 곁에 있는 한 든든한 것이 사실이다. 그는 조용 

히 문 밖으로 나가는 우문학의 뒤를 쫓았다. 

우문학은 얼마 걷지 않아 다리를 멈췄다. 

소가주의 거처에 있는 연못이다. 방과의 거리도 불과 오 장도 되지 않는다. 

진한 어둠이 흐르는 밤, 숨소리조차도 없다. 풀벌레 소리가 간간이 귓가를 울릴 뿐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문학이 연못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일 가겠다고?" 

"아까 들었을 텐데." 

"아아, 물론이네. 나도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그것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알면서도 그것에 대해 묻는 저의가 뭐지?" 

우문학이 이렇게 까지 부르면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분명 중요한 이야기일 

게다. 그것도 유설린이 없는 곳에서 하는 것을 보니 그녀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일 

것도 같고. 

우문학은 콧잔등을 슬쩍 긁었다. 

"뭐 남의 연애 문제에 끼여드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말이야 할 말은 해야겠네. 자네 

가 없을 때 소가주님이 얼마나 쓸쓸해 하는 지 아는가?" 

"그럼 내가 이곳에 있기라도 하라는 건가? 난 그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자네는 다 좋은데 그런 점이 모자란단 말이야. 물론 소가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는 지금 자네의 행동이 옳지. 하지만 그 커다란 꿈 하나를 위해 그 동안은 불행해 

도 된다는 말인가?"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자네와 소가주님은 무슨 사이인가?" 

우문학의 말에 여운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우문학을 바라보 

기만 했다. 그러자 천천히 우문학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소가주님의 작은 행복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가? 마…… 교를 되찾겠다 

는 것은 꿈일 뿐이야. 그것이 반드시 행복이라는 보장은 없는 법일세." 

마교를 되찾는다는 부분에서 우문학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변에 듣고 있는 사람 

은 없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었던 것이다. 

"자네 뿐이야. 소가주님의 얼굴에 웃음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떠난다고 해 

도 적어도 소가주님의 얼굴에 미소가 걸리게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문학은 여운휘의 옆을 스쳐지나가면서 어깨를 툭툭 쳤다. 그토록 완벽해 보이는 

사내인 여운휘도 여인 문제에서는 전혀 힘을 못 쓰니 우습기까지 하다. 

말을 마친 우문학은 소가주의 거처를 향해 움직였다. 

여운휘는 홀로 서서 연못을 바라봤다. 연못에 달의 모습이 비춘다.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기에 당장이라도 물 속에 들어가 그 달을 퍼내고 싶다. 그렇 

지만 불가능하다. 달은 하늘에 떠 있는 것이지 물 안에 잠겨 있지 않다. 

여운휘는 유설린을 그리 생각했다. 가까이 있지만 또한 가질 수는 없는. 

'나 같은 놈에게 설린이는 어울리지 않는다.' 

더럽혀진 자신과는 다르다. 유설린은 언제나 밝은 것만 보게 해 줄 것이고 행복하 

게 해 줄 것이다. 

'나는, 나는 그녀를…… 지켜줄 뿐이다.' 

여운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림맹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림이 울려 퍼졌고 수많은 사람들 

이 바쁘게 움직였다. 개중에서 역시 가장 바쁜 것은 무림맹의 군사인 종리회연이다. 

무림맹에 있는 대소사를 모두 관리해야 하고 그에 합당한 지시도 내려야 한다. 수많 

은 무인들도 문제다. 그들 중에서는 구파 일방과 같은 명문에서 온 자들도 많지만 

그 외에 이곳 저곳에서 끌어들인 자도 많다. 

구파 일방의 제자들이 그들을 얕보는 탓에 내부에서 싸움도 벌어지고 있다. 

"군사님! 며칠 전 사고를 벌인 그 녀석들이 또……" 

"제길!" 

종리회연은 머리를 감쌌다. 얼마 전 싸웠던 무리들이 오늘도 또 문제를 일으킨 모양 

이다. 차라리 빨리 마교와의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이런 자잘한 문제들은 많이 사라 

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바로 마교를 향해 진격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준비는 끝났지만 아직 모든 게 다 된 것은 아니다. 

종리회연은 보고를 하러 온 수하에게 지시 사항을 내렸고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 

다. 앞에 놓여져 있는 수많은 서류들을 보면서 종리회연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에 한 시진도 자지 못하면서 강행군을 하거늘 아직도 채 준비를 끝내지 못했 

다. 

'멀지 않았어. 며칠 후면 우리는 마교를 향해 진격한다.' 

지금 이 상태라면 승산은 마교 쪽에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 

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파 쪽에서 명망 있는 무인들이 죽어나갔으니까. 오히 

려 지금이 기회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채주인 혁련우가 마교에게 이를 갈고 있는 지 

금이야말로 그들의 힘을 최대한 빌릴 수 있는 때인 것이다. 

'장강수로십팔채와 무림맹이 손을 잡는다면 승산은 있다.' 

자잘한 소란은 척마신풍대를 피해가지 않았다. 

수많은 대원이 죽으면서 척마신풍대는 새롭게 조직됐다. 새로운 얼굴들이 모습을 드 

러냈고, 각양각색의 환경에서 지내던 자들이 하나로 뭉치게 됐다. 그나마 구파 일방 

이나 오대세가의 사람들은 서로 섞일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무인들과의 마찰은 적지 

않았다. 

누가 더 강한가. 

무공을 익히는 무인으로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구파 일방과 오대세가의 무인들 

은 은연중에 다른 자들을 무시했고 그러한 태도는 쌍방의 화를 돋구었다. 

그나마 척마신풍대라는 단체가 무림맹에서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탓에 서로가 참고 

는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골은 깊어져만 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이 벌어졌다. 

천객인 백산, 지객인 운빈과 하을지가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내 말이 말 같지도 않다는 거냐!" 

한 젊은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계속해서 자신의 말이 무시당한 탓에 화 

가 나 버린 것이다. 그는 검을 빼들고 화를 돋구게 한 상대를 향해 겨누었다. 

그러자 그 검끝이 향한 곳에 있던 사내가 피식 웃었다. 준수한 외모에 깔끔한 백 

의. 그는 들고 있던 부채를 다른 편 손으로 탁 쳐서 접었다. 

"네깟 놈이 나에게 검을 겨누겠다는 게냐? 무형파(無形派) 따위의 무인 주제에 건방 

지군." 

"가, 감히 사문(私門)을 모욕하다니! 오냐, 네 놈의 목숨이 몇 개인지 보고야 말겠 

다." 

"겨우 무형십이변(無形十二變) 정도의 변검으로 나에게 덤비겠다? 푸하하! 우습구 

나!" 

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고개를 돌렸다. 

신나게 웃던 사내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 여기에 있는 사람 중 구파 일방과 오대세가의 무인을 제하고는 거의 

떨거지라 해도 다름없다. 너희들은 그저 머릿수 채우기에 불과할 뿐이야. 너희는 그 

저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으면 되는 게야. 화살받이들 주제에 건방지긴……" 

그 말에 구파 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무인이 아닌 자들은 발끈했다. 그들도 나름대로 

죽을 각오를 하고 이곳에 왔다. 그런데 화살받이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사내의 한 마디에 척마신풍대가 머무는 거처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하나 둘씩 자리 

에서 일어났고 그에 맞추어 구파 일방과 오대세가 쪽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검을 들고 죽이려고 싸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당장이라도 피바람이 불 것 같은 분 

위기다. 구파 일방과 오대세가의 무인 중에서는 이런 일이 귀찮다는 듯 밖으로 나가 

는 자들이 많았지만 성격이 급하거나 싸움을 즐기는 자들은 자리에 남았다. 

구파 일방이나 오대세가가 아닌 세력에서 온 무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탓이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 자 중 하나가 향하는 곳은 누남천이 있는 곳이다. 그는 누남천 

이 심어 놓은 자였다. 

지금 백산과 운빈, 하을지는 누남천의 명에 따라 이래저래 일을 수행하는 중이다. 

그 탓에 척마신풍대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고, 그들을 대신해 이 사내를 심어 놓은 

것이었다. 큰 일이 벌어지면 자신에게 알리러 오라고. 

그리고 그는 지금 이 상황을 큰 일로 분류했다. 

누남천의 거처에 온 그가 조심스럽게 기척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누남천은 처음 보는 사내와 함께 자리에 앉아 차를 즐기고 있었다. 문을 연 그가 부 

복했다. 

"누 대협을 뵙습니다." 

"네가 어인 일이냐. 내 척마신풍대를 지켜보라고 하지 않았더냐." 

"지금 척마신풍대가 시끄러워져서 알리러 왔습니다. 구파 중 하나인 점창파의 무현 

이라는 자가 무형파의 구궁현의 사문을 욕한 탓에 싸움이 벌어질 듯한 분위기입니 

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싸움을 피하려고 하지만 몇몇의 무인들은 그냥 넘어갈 것 같 

지 않아……" 

"싸움이라도 벌어질 것 같다는 말이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척마신풍대가 머물고 있는 곳과 누남천의 거처가 멀지 

않다고 하나 벌써 싸움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리고 무림맹 내에서 피 

를 보는 싸움이 벌어진다면 그 일이 미칠 파문도 적지 않다. 

누남천은 고개를 돌려 앞에 앉아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자네가 가서 해결하게." 

"그렇게 하겠소." 

말을 마친 사내는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고 부복하고 있던 그는 고개를 들었 

다. 그는 누남천을 보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누 대협, 저 자가 누구이기에……" 

"후후. 궁금한가?" 

"처음 보는 자입니다. 그런데 척마신풍대 내의 싸움을 말리라고 보낼 정도라면 대단 

한 자일 테인데……" 

"암, 대단하지. 대단한 인물이고 말고." 

말을 마친 누남천은 내려놓았던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차의 맛 

을 음미하듯 마시고는 자신 있는 말투로 말했다. 

"앞으로 척마신풍대 대원끼리의 싸움은 보기 힘들 게야. 지객 중 나머지 일인이 왔 

으니까 말이야." 

"아!" 

지객 중 나머지 일인이라는 말에 부복하고 있던 사내는 탄성을 터트렸다. 방금 전까 

지 이곳에 있던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버린 탓이다. 

"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사내 하나가 땅을 뒹굴었다. 방금 전까지 점창파의 무현에게 눈 

을 부라리던 구궁현이다. 

싸움이 커질 것 같자 무현은 구궁현에게 제안을 했다. 다른 사람은 다 물리고 일 

대 일로 무공을 겨뤄보자고. 무현 또한 일이 커지는 것은 원치 않았는지 그것에 수 

긍했다. 

비록 무현에게 덤비긴 했지만 그의 실력이 자신보다 빼어나다는 것을 구궁현은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무현은 척마신풍대 중에서도 손으로 꼽을 만한 고수다. 간신 

히 척마신풍대에 들어온 구궁현과는 차이가 크다. 

평소였다면 싸움을 피했겠지만 눈이 뒤집혔던 탓에 그는 싸움을 받아들였다. 

결과는 너무나 처참한 패배였다. 

온 힘을 다해서 뻗은 무형십이변은 점창파의 신법인 유운신법(流雲身法)을 잡지 못 

했고 이어지는 자모이혼수(子母離魂手)에 온 몸을 격타 당했다. 

핏물을 토해내면서 구궁현은 땅을 나뒹굴었다. 

몇 차례 더 일어나 덤볐지만 그때마다 무현은 장난치듯 그를 쓰러트렸다. 

이 정도라면 싸움이라기 보다는 어른이 일방적으로 아이를 괴롭힌다고 봐도 좋을 정 

도였다. 더 이상 일어날 힘도 남지 않은 구궁현은 엎드린 채로 주먹으로 땅을 내려 

쳤다. 

분했다. 하지만 그 분함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둘의 차이는 극명했다. 

"이제는 일어날 힘도 남지 않은 거냐?" 

무현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토록 건방졌던 상대가 땅을 나뒹구는 것도 기분 좋고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 

들의 눈 또한 마음에 든다. 대부분의 자들이 자신의 무공을 놀랍다는 듯 보고 있지 

않는가. 

무현은 어깨를 쭉 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덤벼 보고 싶은 자가 있다면 덤벼 

보라는 듯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싸움은 이제 끝났다. 

몸을 돌리는 무현은 갑자기 이는 살기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검을 뽑아든 사내 

하나가 쓰러져 있는 구궁현의 옆에 서 있다. 

저 사내의 이름이…… 

'구문지라 했던가?' 

구궁현의 남동생으로 무공도, 지략도 크게 빼어나지 않은 자다. 척마신풍대의 대원 

도 아닌데 이곳에 온 것을 보니 누군가가 이러한 대결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린 모양 

이다. 

"감히 형님을 이 꼴로 만들다니…… 죽여버린다!" 

무현은 자신을 향해 검을 곧추 세우고 달려드는 구문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구궁 

현 또한 빼어난 자는 아니지만 구문지는 더 어리석은 자다. 그래도 그의 형은 살수 

를 펼치지 않았다. 이러한 싸움에서 살수를 펼쳤다는 게 소문나면 어떠한 일이 벌어 

질지 아는 탓이다. 

'단순한 애송이.' 

구문지는 쉽게 흥분하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촤락! 

부채가 펴짐과 동시에 구문지의 어깨를 내려쳤다. 

"악!" 

검을 잡은 손이 아래로 떨어졌고 부채는 구문지의 턱을 올려쳤다. 마치 실이 끊어 

진 연처럼 구문지의 몸이 허공을 날다가 떨어져 내렸다. 

"이, 이노옴!" 

입안에서 피가 터져 나왔지만 구문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를 후들거렸고 검을 든 손도 위태위태해 보였다. 아무리 구문지를 높게 

평가해도 무현은 그의 상대가 아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열리고 닫혔던 문이지만 무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 

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사내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누구지?' 

안면이 없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화산파의 무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습을 

드러낸 사내를 응시했다. 화산파 무인의 눈에는 경외감이 가득했다. 

갑자기 나타난 상대를 바라보던 무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구문지를 느끼고 다시 

금 고개를 돌렸다. 검을 든 구문지가 살기를 폭살 시키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막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 다 멈춰." 

작은 목소리인데 귀에 똑똑히 들린다. 엄청난 내력이다. 

구문지는 침을 퉤 하고 뱉었다. 피가 섞인 침이 그의 입에서 뱉어져 나왔다. 사내 

의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검을 휘두를 모양이다. 

반면 무현은 조심스럽게 상대를 바라봤다. 이만한 내력을 저토록 젊은 사내가 지니 

고 있다는 게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구문지는 무현이 고개를 돌리자 기회라는 듯 앞으로 내달리려고 했다. 그때 모습을 

드러낸 사내의 몸에서 무서울 정도의 살기가 뿜어졌다.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갔던 구문지 조차도 멈칫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다리가 마치 땅에 붙기라도 한 것처럼 땔 수가 없다. 그런 

데…… 다리가 떨린다. 아까 충격을 입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멈추라는 내 말이 우습나?" 

무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구문지도 그러했지만 그 또한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 

다. 억지로 움직이려고 한다면 가능은 하겠지만…… 

'지금 움직이면 죽는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몸은 그리 말했다. 지금 억지로 움직이면 죽게 될 지도 모른다 

고. 

사내의 몸은 점점 가까워져 왔지만 그 둘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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