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휘는 창문을 열어제치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암황이 아래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여운휘는 위층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암황의 몸이 솟구쳤다.
이층으로 단숨에 도약한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이곳을 지켜주시오. 우리는 다른 일이 생겼소."
"무슨 일인데……"
"시간이 없소. 갔다 와서 이야기 해 주지."
암황은 시간이 없다는 말에 더 이상 아무런 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
휘는 유설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아."
"응."
고개를 끄덕인 유설린은 여운휘의 손을 잡았다. 그는 유설린을 안고는 아래로 뛰어
내렸다.
땅에 발이 닿는 순간 이미 여운휘의 몸은 앞을 향해 쏘아진 상태였다.
'너무 단순히 생각했어.'
여운휘는 그리 생각했다.
그의 생각대로 너무나 쉽게 판단했던 것이다. 여태까지 무인이었으니 지금도 그러려
니 했다. 멍청한 짓이었다.
아니…… 우문학이 그리 생각했다면 다른 사람도 그리 했을 게다. 여태까지 무인만
을 죽였다면 그 다음도 무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광동성의 패자 중 하나인 여가의 딸이라면 그 가치는 충분하다. 속 사정은 모르지
만 그 여인이 죽음으로 인해 광동에서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게 분명하다.
물론 억측일 지도 모른다. 오히려 지금 생각이 억측이면 한다. 아까 객잔을 떠난 그
녀를 찾는다는 일이 쉽지 않은 탓이다.
차라리 독고유를 노리는 자라면 어떻게든 암황이 손을 쓸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렇게 할 능력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여숙화의 옆에 있는 건 거지 소년인 유삼 하나 뿐이다. 아무리 영리한 아
이라 해도 살령대의 살수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여운휘와 유설린은 우선 사람들의 기척이 많은 곳으로 움직였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곳에 여숙화가 있을 확률이 높았던 탓이다. 유설린을 내려 놓은 여운휘는 주변
을 살폈다.
눈앞에서 불빛들이 어지러이 춤을 췄다. 축제를 알리기 위해 내놓아진 환한 등불이
다. 아름답고 오색찬란(五色燦爛)하다. 어두운 밤을 오히려 밝게 만드는 그들은 신
비 자체였다.
하지만 그러한 아름다운 정경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유설린 또한 그랬다.
오고가는 사람들, 시끄러운 소리들. 여운휘의 눈은 여숙화를 찾았고 귀는 그녀의 목
소리를 쫓았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여운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에 무엇인가가 얹힌
듯 답답하다.
"근방에 없는 모양이야. 이동하자."
유설린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여운휘를 바라봤다. 여운휘보다 먼저 이러한 상황을 생
각해 낸 여인이다. 그만큼 빼어난 머리를 가진 유설린이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모
를 리가 없다.
유설린은 손을 내민 여운휘를 바라봤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초조해 보인다. 그녀는
손을 뻗어 여운휘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의미였다.
막 유설린을 안고 달리려던 여운휘도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유설린
을 바라봤다. 여운휘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유설린을 발견했다. 안아 올리기
위해 들어올렸던 손을 여운휘는 천천히 늘어트렸다.
"평소 같지 않아."
"…… 그랬나?"
여운휘 또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유설린에게까지 보일 정도였단 말인가?
피식 웃을 뻔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며 여운휘는 고개
를 끄덕였다.
"걱정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유설린은 머리를 흔들었다. 흔들던 얼굴을 멈춘 그녀는 웃고 있었다.
유설린을 안아 든 여운휘는 다시금 달렸다. 누가 보던 말던 상관하지 않았다. 가능
하면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움직였지만 그래도 모두의 눈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눈, 그리고 귀. 오감이 모두 최고의 상태까지 끌어 올려졌다. 작
은 소리 하나까지도 여운휘의 귀는 놓치지 않았다. 수십 가지의 소리가 섞이며 여운
휘의 머리를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마을의 곳곳은 아이들과 여인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따라온 남자들로 가득했
다. 그리 많은 사람 중에서 여숙화와 유삼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운휘의 눈이 멈춘 것은 수많은 사람 중에서 이질적으로 보이는 자를 찾으면서였
다. 모두가 화려한 옷 일색인데 그 안에 누추한 옷을 입고 있는 자가 보였던 것이
다. 여운휘는 달리던 발을 멈추고는 재빠르게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 많은 인파를 단숨에 파고든 여운휘는 그 더러운 옷 주인의 소매를 붙잡았다.
탁!
무엇인가를 들고 있던 거지가 고개를 돌렸다.
"어? 안 오신다더니."
예상대로 유삼이었다. 여운휘는 소매를 붙잡은 채로 물었다.
"어디 있느냐."
"뭐, 뭐가요?"
"여숙화!"
여운휘의 고함에 가까운 말에 유삼은 흠칫 해서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타는 듯해
보이는 눈빛이 너무나 매서웠던 탓이다. 하지만 옷소매가 붙잡힌 탓에 그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 유삼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쪽에 계, 계신데요."
"안내해."
옷소매를 놓으며 여운휘가 말했다. 유삼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여운휘의 매서운 눈빛
을 마주하는 순간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유삼을 따라 움직이자 여숙화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사람이 뜸한 곳에서 앉아 쉬
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되자 유설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했지만 아
직 안전했던 탓이다.
이제는 여운휘가 곁에 있을 것이다.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게다. 아무런 문제도.
그때였다.
여운휘의 몸이 움찔했다. 그리고 여숙화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다가 갑자기 쓰러
져 버렸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그녀의 등 쪽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검 하나가 여숙화의 등을 꿰뚫은 그대로 가슴까지 빠져 나왔다. 일순 그 모습을 본
유삼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귀청을 때리는 소리에 정
신을 차렸다.
"아주머니!"
유설린이 쓰러져 버리는 여숙화를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을 바짝 여운
휘가 쫓았다. 그제야 유삼은 한 발자국씩 엉거주춤 다가서기 시작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꿈이길 바랬다. 하지만……
"정신 차려요! 아주머니!"
귀를 울리는 소리는 결코 꿈에서 듣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유삼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멍한 눈으로 여숙화를 바라봤다. 가슴에 박힌 검 때문에 쉬지 않고 피
가 쏟아져 나온다. 그러한 상처를 유설린은 어떻게든 막기 위해서 손을 쓰고 있었
다.
남자인 자신은 이렇게 무서워서 쓰러져 버렸는데……
유삼은 모른다. 유설린이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 그걸 모르는 그로서는 그저 유설
린이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운휘는 한 눈에 여숙화가 죽을 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완
전히 빠져나가고 있다. 소생은 불가능하다.
여운휘의 눈은 주변에 있는 모두를 향해 훑어보았다. 범인을 잡아야 한다. 이 근방
에 여숙화를 죽인 범인이 있다.
유설린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더욱 가까이 다가온 유삼은 아직도 멍한 얼굴이
다.
아직 마지막 한 숨이 남아 있었는지 여숙화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유언이라도 하려는 걸까? 유설린은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내, 내 아이…… 불쌍한 내 아이……"
태어나지 못하고 죽게 될 자신의 아이를 부르고 있다. 여숙화도 자신이 어떻게 될
지 아는 것이다.
그 목소리를 듣게 되자 여운휘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제길!'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중 하나가
떠올라 버린 것이다. 살기가 솟구친다. 덩달아 몸에서는 매서운 기운이 몰아친다.
무공을 아는 자라면…… 도망을 치리라.
유설린 또한 무공을 익힌 터라 그러한 여운휘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막 무슨 말을 하려는 유설린에게 여운휘가 말했다.
"잠시만.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줘."
"이곳에서?"
"그래."
여운휘는 검집을 들어 올렸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이미 알아차렸다.
유설린은 여운휘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결코 그녀를 혼자
두려고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유설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운휘가 그
렇게 말을 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설린은 무엇인가가 여운휘를 화나게 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유설린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유설린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여운
휘가 말을 이었다.
"금방. 정말 금방 돌아올게."
말을 마친 여운휘는 상대가 움직인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상당히 북적북적하다. 사람들이 많은 탓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나와서 축제를 즐긴다. 오늘만큼은 현실을 잊고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자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힘든 일들이 다 지난 가을이다. 가장 즐거우면서
도 또 추운 겨울을 보낼 생각으로 복잡한 계절.
즐겁지만 마음 한편에는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게 되는 때다. 하지만 지금 만큼은 웃
는다. 적어도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까.
수많은 사람 사이를 여운휘가 걸어가고 있었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
음걸이다. 그렇지만 눈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그저 축제를 즐기려는 다른 사람들
과는 달리 무엇인가를 쫓고 있다. 그리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 속에서 은연중에 살기
가 뿜어져 나왔다.
‘놓치지 않아.’
눈은 누군가의 등 뒤에 박힌 상태다. 그리고 그가 걷는 길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태
연하게 축제를 즐기는 듯 하지만 여운휘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무인이고 살수다.
그리고 아까 전 여숙화에게 검을 날린 자가 틀림없다. 이미 그곳에서 몸을 감추는
저 자를 봤던 것이다.
단숨에 달려들어 검을 날리고 싶지만 여운휘는 애써 분노를 속으로 삭였다. 분명 지
금이 기회이기는 하지만 꼭 그래야만 할 필요도 없다. 지금은 주변에 눈이 너무 많
다. 이런 곳에서 살인을 벌인다면 눈에 안 뜨인다는 건 불가능하다.
조용하게 해결해야 한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그 탓에 여운휘는 사내의 뒤만 쫓을 뿐 특별히 눈에 뜨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여운휘가 잡은 자는 마치 축제를 즐기는 듯 했다. 이런 저런 구경거리에 얼굴을 이리
저리 내비췄고, 재미난 공연을 보면서 신나게 웃기도 했다. 이리저리 먹을거리까지
사먹는 그자의 모습은 영락없이 축제를 즐기는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운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저 자가 범인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다른 것에는 눈도
주지 않고 그 자를 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마을 주변을 서성이던 자가 천천히 외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져 나가려고 하는 모양이다.
여운휘는 오히려 지붕 위를 달려 그 자를 추월해 버렸다. 그리고 납작이 엎드려서 기
다렸다. 마치 지붕을 이룬 돌이라도 된 마냥 여운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엎드려 있던 여운휘는 점점 가까워지는 상대를 응시했다. 이제야 앞모습
을 제대로 보게 됐다. 변장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꽤나 젊어 보이는 사내다. 나이는
갓 삼십 정도? 그리고 얼굴은 훤칠하다. 어딜 가나 대장부라는 소리를 들을 것만 같
다.
키도 약간은 큰 편이고 이목구비도 뚜렷해 여인들의 심금을 꽤나 울렸을 듯한 외모
다. 지붕 위에서 기다리던 여운휘의 몸이 사내가 지나가자마자 움직였다.
투욱!
걷고 있던 사내의 몸이 움찔했다. 사내의 등 뒤를 잡은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멈춰.”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퍽!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뻗은 여운휘의 발이 사내의 복부에 틀어 박혔다. 아무런 내
공도 실지 않은 순수한 발길질이었다. 일반 사람이라면 몰라도 무인이라면 충분히 피
하고도 남을 공격이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런 반항 없이 그대로 발에 맞고 땅을 나뒹굴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사내가 기침을 토해냈다.
“켁켁! 당신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연극 따위 집어치우지 그래. 네 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겹군.”
“그게 무슨……”
“살행을 펼쳤다면 그에 대한 각오도 했겠지?”
“무, 무슨 소리요! 내가 살행이라니!”
사내는 놀란 듯 외쳤다. 말을 할 때의 모습에서 크게 당혹하는 것이 진정 살행이라
는 말에 놀란 듯 보였다. 하지만 여운휘는 검을 뽑아 들었다.
거짓된 말과 행동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확신이 있는 이상 검을 넣을 생각은 없다. 감을 믿는다. 그리고 그곳부터 이곳까지
도망쳐온 사내를 쫓지 않았던가.
“네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니까. 네 놈은…… 여기서 죽
는다.”
사내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두렵다는 듯한 눈빛이다. 그러한 모습이 오히려 여운
휘의 화를 돋웠다. 여운휘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여인이었다. 그것도 아이를 가진.”
과거의 모습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어미를 죽이고 나온 아이……
그게 바로 여운휘다.
그 탓에 쓸쓸했다. 많은 경멸 어린 시선과 홀로인 고독감이 어린 그를 괴롭게 했었
다. 그 탓에 얼마나 울었던가. 그렇게 한참을 우니 이제는 눈물도 마르더라. 그리고
웃음도 사라지더라.
“나, 나는 정말 살수가……”
“시끄러워.”
반쯤 몸을 일으킨 채로 말을 하는 사내를 향해 여운휘가 발을 움직였다. 발이 내밀어
진 턱을 걷어찼다. 사내의 입에서 하얀 이빨 몇 개가 깨져서 튕겨져 나왔다.
사내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죽어도 자신이 살수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려는
듯 했다. 여운휘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살령대 살수. 여숙화를 죽이기 위해 이곳까지 온 자. 더 필요한가?”
“……!”
피를 흘리는 입을 감싸 안은 채로 고개를 치켜 들은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무
나 자세한 사항에 놀란 듯 했다.
“아직도 가만히 당하지는 않겠지?”
사내의 몸이 뒤로 튕기듯 움직였다.
여태까지 무공을 전혀 모르는 듯 행동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사내의 눈이 차
가워졌다. 어수룩해 보이던 지금과는 달리 지금은 오히려 냉기가 뚝뚝 떨어진다.
사내의 양 손에 짧은 단도가 하나씩 잡혔다.
말은 필요 없다. 사내의 눈은 오로지 살기로 번뜩였고 여운휘 또한 마찬가지다.
사내의 몸이 빠르게 여운휘에게 다가왔다. 어느 정도 위험한 상대라고 생각한 탓인
지 단숨에 안으로 파고들었다.
일격필살(一擊必殺).
손에서 빙글 돈 단도가 여운휘의 목덜미와 허리를 동시에 노렸다.
여운휘의 검이 사선으로 움직였다. 단도가 밀리는 순간 소매에서 침들이 터져 나왔
다. 그 침들에는 극독이 묻어 있다. 몸에 박힌다면 단숨에 독기가 온 몸을 휘감을 만
한 치명적인 독이.
여운휘의 몸이 뒤로 물러섰다. 잔상만 남을 정도의 신법이 여운휘의 발에서 펼쳐졌
다.
휘리릭!
여운휘의 발이 휘몰아쳤다. 감아 차듯 뻗어진 다리를 사내는 피하기 위해 옆으로 움
직였지만 여운휘의 검도 빛살처럼 쏟아졌다.
검은 어깨 죽지를 스쳤고 이어지는 무릎이 턱을 올려쳤다.
“큭!”
짧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던 사내의 가슴에 여운휘의 발
이 다시 다가왔다.
퍼퍼퍽!
일격 일격이 소의 머리를 단숨에 으깰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다. 사내는 쓰러지지 않
았지만 마치 땅에 붙기라도 한 것처럼 뒤로 주르륵 물러났다.
꼭 다문 입에서는 피가 새어 나왔다.
사내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서 있다기 보다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다고 해
야 옳을 것이다. 다리의 감각이 단숨에 사라졌다.
최악이다. 지금 이곳은 특별히 몸을 감출만한 곳도 없다. 살수로서는 정말 좋지 않
은 장소다. 더불어 상대 또한 그러하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 자가 여태까지 상대해 본 적이 없는 최고의 적이
라니.
살수라면 아까 전에 피했어야 한다. 도망쳤다고 해도 자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오
히려 그게 나았을 게다.
여운휘가 다가오자 사내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몸의 감각은 죽어 버렸지만 살수로서
의 감은 남아 있다. 분명 상대는 상대할 수 조차 없는 고수다. 그 증거로 그가 이토
록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거다.
살아오면서 자신이 이토록 당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이제는 현실이다. 결코 부정 할 수가 없다.
촥!
몸은 버티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사내는 손을 움직였다. 하늘로 솟구친 침들이 땅을
향해 떨어져 내렷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오히려 앞으로 달려들었다.
검이 사내의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가뜩이나 상처 탓에 피가 흐르던 손이 잘려나갔
다.
“흐으!”
사내는 잘려져서 땅을 나뒹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신음성을 토해냈다. 고통이
온 몸을 엄습했지만 살수가 되기 위해 수많은 고통을 받아 봤다. 그래서 고함은 지르
지 않았지만 그 탓에 고통은 한결 더했다.
얼굴은 붉어지고 온 몸은 땀으로 가득하다. 적어도 자신의 손이 잘려서 나뒹구는 것
을 보는 게 기분 좋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잘린 팔목에 손을 가져다 대자 질퍽한 피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
여운휘는 공격을 하지 않고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고통이 오래가기를 원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평소의 여운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적어도 상대를 죽일 때는 깔끔하게 죽이는 게 바로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직 멀었어. 그 정도로 기절하는 건 아니겠지?”
여운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피 냄새가 짙게 묻어 버렸다.
'비릿하군.'
칼을 든 이후로 셀 수도 없이 피를 봐왔지만 지금처럼 이 붉은 색이 기분 나빴던 적
은 없다. 잔혹하게 검을 휘두른 탓도 있지만 역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은 한 여
인이 생각나서일 게다.
검을 든 손이 부끄럽다. 마치 그 여인을 죽인 것이 자신이라도 된 것 마냥 미안한
마음이 솟구친다.
여운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주변을 피바다로 만든 주범이 누워 있다. 준수했던
외모도, 이제는 사람이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로 형체가 변해 버린 자다.
살령대의 살수라는 것만 알 뿐 이름도 모르는 자다. 질긴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고
하던가? 양팔이 절단되고 가슴에 긴 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숨을 쉬
고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오래 가지는 못하리라.
여운휘는 흐르는 피를 대충 털어 버리고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사람의 피가 묻
어 있으면 검날이 상하겠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다. 어차피 찜찜한 기분 탓에 이 검
은 유가로 돌아가는 그 길로 버려 버리려고 했으니까.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살령대의 살수를 향해 여운휘가 몸을 낮췄다.
"기다려라. 곧 네 놈의 친구들도 따라갈 테니."
그 말을 듣고 이해를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고통 탓인지 그는 몸을 비틀어 댔다. 여
운휘는 손을 뻗어 그의 혈도를 짚었다.
천극혈(天隙穴)이라는 사혈이다. 그러자 온 몸을 비틀어 대던 살령대의 살수의 움직
임이 잦아들었다.
그가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고 여운휘는 몸을 날렸다. 유설린이 있는 곳으로 가
기 위함이다.
유설린과 헤어졌던 부근에 다가가자 꽤 많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
음에 여운휘는 발을 빨리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유설린의 모습이 언뜻 스쳤다. 그
제야 여운휘는 그녀가 무사하다는 걸 알았다.
그는 경공을 멈추고는 걸어서 유설린에게 다가갔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 잔혹
한 현장을 보면서 혀를 찰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운휘는 시체
옆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유설린에게 다가갔다.
유설린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한 줄기의 눈물이 얼굴 선을
타고 흘렀다. 그녀의 손은 피투성이였다.
"손은 왜……"
"애라도 살리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낮은 목소리로 유설린은 여운휘의 말을 가로챘다. 여운휘는 유설린의 말을 듣고 대
충 상황을 짐작했다. 죽어 가는 여숙화를 대신해 그녀의 아이라도 살리기 위해 손
을 썼던 모양이다. 꽤나 많은 책을 읽은 유설린으로서는 한 번쯤 도전을 해봄직 했
을 게다.
그렇지만 결과는 눈에 보이는 대로 실패한 모양이다.
마음이 여린 여인이다. 얼마나 모진 마음을 먹었으면 죽어 가는 산모에게서 아이를
빼내려고 했겠는가.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은 알만하다. 여운휘는 무릎을 꿇고 앉
아 있는 유설린을 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정신 차려."
"알아. 하지만……"
유설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이 하나씩 죽어 나갈 때마다 그
녀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번 일도 그렇다. 전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안다.
이곳에 그녀가 오지 않았다 해도 이런 일은 벌어졌을 게다.
그렇지만 그래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
"유삼인가 하는 놈은?"
"독고유를 불러오라고 보냈어."
여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경꾼들이 조금씩 늘어간다. 조금만 더 있으면 관에 관련 된 자들도 빼꼼 고개를
내밀 것이다. 원래 관원들이 부자가 아닌 자들에게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자들
의 대부분이고 또 축제이다 보니 누군가가 부르러 갔다 해도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
다.
그 탓에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일 테고.
"관에서 관원들이 오기 전에 우리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알아."
유설린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여운휘는 유설린을 바라보다가 누군가의 급한 발
자국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하나의 인영이 하늘을 날면
서 이곳으로 다가왔다.
마을 사람들로서는 그러한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두려움을 느꼈는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 독고유가 내려섰다.
"이, 이럴 수가……"
유삼에게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것이다. 막상 들었던 일이지만 눈으로
보니 더욱 믿어지지 않는다.
털썩.
독고유의 몸이 무너졌다.
아내가 죽었다는 말에 독고유는 유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더 이상 개소리를 지껄
이면 죽여버린다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그때 만약 마부가 소란에 놀라 들어오지
만 않았다면 유삼은 숨이 막혀서 죽었을 지도 모른다.
놀란 유삼을 뒤로하면서까지 달려왔다. 유삼이 농담을 한 것이길 바랬다. 차라리 그
렇다면 유삼을 가볍게 혼내고 끝내면 될 일이다. 아니…… 알고 있었다. 유삼이 비
록 거지이고 장난기 많은 아이라고는 하지만 그러한 것으로 장난을 치지 않는 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유삼이 거짓말을 한 것이기를 간절히 바랬다.
"으, 으흐흑!"
무릎을 꿇은 채로 아내의 시신을 바라보던 독고유는 오열(嗚咽)을 터트렸다.
"왜, 왜 내 아내가 이렇게 죽어 있는 것입니까?"
우는 얼굴로 고개를 치켜든 독고유가 물었다. 여운휘가 아내를 죽인 자를 쫓아갔다
는 말을 유삼에게 들었던 탓이다. 여운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유는 모르겠소. 하지만…… 무공을 익힌 자였소."
"무인이 왜 이 여인을 죽인단 말이오. 나에게 원한이 있다면…… 차라리…… 차라
리 나를 죽이면 될 것을."
독고유는 주먹으로 땅을 내려쳤다. 눈에서는 쉬지도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연신
주먹으로 땅을 내려치니 손도 터져 나가 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독고유
는 자신의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수십 번 주먹질을 하던 독고유가 모든 행동을 멈추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났다.
볼을 타고 흐르는 그 눈물이 마지막이었다. 고개를 든 독고유의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눈물 대신 그 자리를 증오와 분노라는 감정이 대신했다.
독기가 일렁거리는 눈으로 독고유가 입을 열었다.
"제 아내에게 검을 날린 자를 죽였습니까?"
"간신히 뒤를 잡아 싸우긴 했지만 중간에 다른 조력자들이 나타나는 탓에 잡지를 못
했소."
"다른 조력자?"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나 싸움 방법. 살수가 분명하오."
"살수……"
여운휘는 거짓말을 했다.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없으니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다.
뒤쪽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관원이 온 모양이다.
여운휘는 유설린을 힐끔 쳐다봤고 그녀는 독고유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내 분의 일은 안 되셨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한동안 이곳에서 있고 싶은데 관원
들과 만나서 지금 귀찮아지면 안 돼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가시지요. 제 아내의 일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토록 흐느끼던 독고유였거늘 지금은 전혀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의젓해 보여서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의심이 든다. 하지만 오히려 그 모습
이 슬픈 독고유의 마음을 더욱 더 잘 표현했다.
그는 다시금 돌아가 버린 것이다.
무인으로.
아마도 복수를 하려고 하리라. 아내를 죽인 자를 잡아서 죽이려 할 것이다.
가만히 서 있는 독고유에게 인사를 건네고 여운휘와 유설린은 객잔을 향해 움직이려
고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구석에서 마차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시지요."
유설린과 여운휘가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미리 움직인 암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