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37)

격류(激流) 

아름다운 여인이다. 얼굴은 달처럼 희고, 입술은 앵두마냥 붉다. 길게 자란 머리카 

락은 윤기가 가득 흘렀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 있다. 

여인의 눈은 연못을 향하고 있었지만 눈동자에 생기가 없는 것을 보니 무엇인가 상 

념에 잠긴 모양이다. 

곧게 뻗은 긴 손가락이 연못의 수면 위를 툭 하니 건드렸다. 

일파만파로 작았던 파문이 커져갔다. 그러한 여인의 뒤를 한 사내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우문학이다. 

"소가주, 날이 찹니다." 

"…… 걱정 말아요. 이제 곧 들어갈 테니까요." 

연못 옆에 있는 돌 위에 앉아 있던 여인은 유설린이었다. 그녀는 치마에 묻은 흙을 

손으로 툭툭 털고는 거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얀 옷과 흰 얼굴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에 서 있는 유설린은 가히 절색이라는 말이 아깝 

지 않았다. 

우문학은 아무런 말도 없이 유설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는 왜 그녀가 그토록 

쓸쓸한 눈빛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여운휘 탓이다. 

연락이 올 때가 지났거늘 아무런 서신도 없다. 원래 여운가 무뚝뚝하기도 하지만 혹 

시나 하는 생각이 유설린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 때문에 요즘 유설린의 얼굴에는 수 

심이 걸렸다. 

우문학은 여운휘의 무신경함에 화가 났다. 그가 유설린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사내 

라는 건 안다. 세상에서 유설린을 가장 생각하는 것이 그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 

만…… 이런 세세한 것에는 너무나 무신경하다. 

'후, 그를 탓할 수는 없지.' 

여운휘의 성격을 보면 오히려 당연한 거다. 우문학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여운휘가 없는 동안 유설린을 지켜야 하는 것이 그의 임무 

인 탓이다. 

연못은 거처 안에 있었기에 유설린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낯익 

은 손님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 

우문학은 상대의 모습을 보고 놀란 듯이 말했다. 이곳에 와서 안 되는 자는 아니었 

지만 의외의 방문인 탓이다. 이 늦은 시간에 암황이 이곳을 찾은 적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중요한 일 때문이곤 했다. 

유설린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그래. 아주 커다란 일이 생겼지." 

암황의 표정은 침중했다. 목소리도 은근히 떨고 있었고 표정 또한 상당히 당황스러 

워 하고 있는 것이 내비출 정도였다. 

불편한 듯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진짜 배후를 알아냈단다." 

"그게 무슨……" 

"지금 마교를 이끌고 있는 자에 대한 이야기다." 

"엄백린이잖아요." 

암황의 말을 유설린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현 마교의 교주가 엄백린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혹시! 

유설린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재빠르게 물었다. 

"어, 엄백린이 죽은 건가요?" 

"아니." 

고개를 저으면서 암황이 대꾸했다. 유설린은 그제야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었다. 혹 

시나 그가 죽은게 아닐까 지레짐작하고 놀랐던 것이다. 그가 죽지 않았다고 하자 다 

른 의문이 꿈틀거렸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엄백린이 죽은 것도 아닌데 마교를 이끄는 자 

가 다르다고 하니 혼란스럽기도 할 게야. 그렇지만 들어야 해. 이건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니까." 

암황은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냈다. 유설린과 우문학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당사자인 암황은 이미 이 안의 내용을 수십 번 이상 읽어 본 후였다. 

"녹포괴존에게 온 서찰이지." 

"아……"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지만 그 실력 하나는 유설린도 인정해야만 했던 고수다. 여운 

휘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 탓에 호감은 없는 인물이었지만 분명 기억하는 인물이다. 

"이 서찰의 내용을 보고 처음에는 나도 믿지 못했어. 그리고 아마 네가 들어도 믿 

기 힘들 게야." 

암황은 뭔가 좀 말을 하기 꺼려하는 모습이었다. 바로 본론을 들어가지 않고 계속해 

서 말만 늘이고 있다. 그만큼 이 이야기가 쉽사리 꺼낼 수 없는 말이라는 것도 됐지 

만 유설린의 입장에서는 어서 그것에 대해 알고 싶었다. 

"이야기를 해 주세요." 

유설린의 말에 암황은 머뭇거림을 지웠다. 이야기를 듣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은 

그녀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녀는 이 일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는 거다. 

"엄백린이 마교의 교주라는 건 변하지 않아. 하지만 이래저래 너무 이상했지. 엄백 

린이 가만히 있어도 마교가 돌아간단 말야? 거기다가 내가 조사하던 것과 그것이 얻 

물려 돌아가다가 알아낸 거야. 마교는 지금 강호십일 중 최고 고수인 일마의 손아래 

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 

"이, 일마!" 

유설린과 우문학은 동시에 놀란 듯 표정을 굳혔다. 일마라 함은 현 무림의 최고고수 

가 아니던가. 

무림의 고수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유설린도 일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현 

무림의 최고 고수…… 

그런 그가 실적인인 마교의 힘이라니…… 

암황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유설린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혼란스럽겠지. 하지만 말이야…… 현실이란다." 

"그럼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가 단순히 엄백린이 아니라는 것이지. 아마 엄백린이 교주 

로 오르는 것 또한 그가 도왔을 게야." 

유설린은 고개를 숙였다. 

상대해야 할 적은 엄백린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외의 복병이 등장한 것이 

다. 

그것도 무림의 최고고수인 일마라는 벽이. 

"어찌하겠느냐? 상대가 엄백린이 아니라 일마라는 걸 알고서도 싸울 테냐?" 

암황의 말에 유설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가 바삐 움직였다. 유설린의 얼굴에 짖은 어둠이 깔렸다. 암황은 그 모 

습을 보면서 어떻게 대안을 내놓을 수 없는 자신을 탓했다. 

그토록 도우려고 했는데 도대체 자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녹포괴존의 서찰의 내용대 

로라면 단순히 이건 마교를 되찾는 문제가 아니다. 천하의 패자를 겨루는 싸움이라 

고 봐도 무색할 정도라는 말이다. 

침묵하고 있던 유설린이 말했다. 

"휘, 휘에게 알리겠어요." 

"그가 안다 한들……" 

"아니에요. 휘라면 저에게 어떠한 답이라도 내려 줄 거에요. 지금 휘는 저를 위해 

싸우고 있어요. 그런 그의 노력을 헛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상대가 일마이던, 아 

니면 무림맹이던 상관 없어요. 꼭…… 이길거에요." 

암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설린의 믿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유설린에게 여운휘라는 존재가 어떠한 것인지 아는 탓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서찰을 보내도록 하지요." 

"예, 부탁해요." 

우문학은 고개를 숙이고는 급히 방 밖으로 빠져 나갔다. 암황이 있는 지금 그녀의 

곁을 굳이 지킬 필요가 없다 느낀 탓이다. 대신 그는 서신을 보내기 위해 어딘가로 

향했다. 여운휘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방에 남은 암황은 조용히 유설린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 그녀가 빠지길 바랬다. 일마라면…… 승산이 없다. 

그는 단순히 강한 것이 아니다. 영특하고 확실한 승산이 없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 

는 자다. 

너무나 잠잠했기에 그 존재를 잊고 있었는데 그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솔직히 말해 승산은 없네. 그자라면 그 누가 나선다 해도 이기는 건 힘들 게야." 

"…… 저는 할거에요. 휘가 있는 한 저는 반드시 마교를 되찾을 수 있어요." 

암황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토록 굳건한 그녀의 믿음을 부서트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일마…… 그자가 나타나다니. 일이 어려워졌어.' 

암황은 마교를 되찾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거라고 직감했다. 적어도 상대가 일마 

인 이상…… 목숨을 걸어야 한다. 

“무, 물……” 

들것에 누워 있던 사내가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다 

른 사내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그에게 물을 건넸다. 

분위기는 침울했다. 

잔뜩 가라앉은 공기, 드문드문 들려오는 신음 소리. 그리고 피 냄새…… 

부상자들로 가득하고, 사지가 멀쩡한 자들도 눈빛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간신 

히 몸을 숨긴 척마수호대다. 

전장을 벗어난 그들의 눈에는 생기가 일지 않는다. 

패했다. 그것도 엄청난 피해만 안았다. 마를 배척하기 위해 모인 그들이 너무나 어 

처구니없게 무너져 버렸다. 

누남천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흑색 기마대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나 그건 변명 

에 불과하다. 이유야 어쨌든 말해주는 결과가 이토록 참혹하니…… 

생존자의 수는 오십 이 명. 처음 왔을 때의 채 반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다. 그 뿐만 

이 아니라 그 중에서 몸이 멀쩡한 자는 양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그나 

마 양호한 상처를 입은 자들도 있지만 외팔이 된 자, 눈을 잃은 자, 다리 하나가 영 

영 불구가 된 자들도 적지 않다. 

그토록 당했다면 독기(毒氣)라도 일어야 하건만 오히려 그 반대다. 

너무나 완벽하게 당한 탓이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사냥을 당했다. 하늘에서 쏟아지 

는 화살과 가야 할 길을 막을 흑색 기마대. 척마수호대의 몸담은 대부분이 정의를 

수호하고, 자신의 이름들을 날리려고 참가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같은 패배 

를 당하게 되니 온 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누남천에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좌리검 백산이다. 그는 건량을 내밀며 

말했다. 

“드시지요.” 

“됐네.”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자들에게 조금씩 더 나눠주게. 무슨 면목으로 내가 그것을 먹는 

단 말인가.” 

누남천은 이 패배를 자신의 탓으로 생각했다. 너무나 성급하게 파고들었다. 보초가 

없는 걸 확인했다면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그 자리에서 물러섰다면 그래 

도 이만한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게다. 

면목이 없는 것이다. 수많은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어떻게 식 

사를 입에 넣느냔 말이다. 

백산은 미약하게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멀쩡한 상태였다. 그에 반해 운빈은 거의 들 

것에 실리다 시피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백부장에게 당한 탓에 그는 운신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그다. 

하을지 또한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싸우던 와중에 화살에 맞았다. 

허벅지와 등에 화살을 맞았지만 운신을 하는 것에는 큰 무리는 없었다. 

반면 여운휘는 멀쩡해 보였다. 화살에도 맞았고, 잔 상처들도 많다. 흑색 기마대의 

대주와 일대일 격전도 벌였으니 그 부상이 가장 심했어야 옳다. 이곳에 있는 모두 

는 알고 있다. 여운휘 단신으로 흑색 기마대 사이에서 격전을 벌였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하다. 분명 속은 그렇지 않겠지만 걷는 데 무리는 없어 보였 

다. 

생기를 잃은 척마수호대지만 여운휘를 볼 때만은 그렇지 않다. 경외, 부러움 등이 

섞인 시선으로 그들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그의 놀라운 무위 탓이다. 

누남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움직이세.” 

누남천의 목소리에서도 힘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가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큰짐 

이다. 누남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야 어떻게 되었든 지금으로서는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아직 완벽하 

게 마교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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