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37)

진퇴(進退) 

협곡에서는 녹림도들이 활을 들었고, 유일한 퇴로는 흑색 기마대가 막아섰다. 

누남천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협곡에서 활을 쏘아대는 녹림도들만 해도 껄끄러 

운 상대인데 흑색 기마대까지 가세하자 누남천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원군이 올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흑색 기마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 

다. 애초에 제대로 된 원군이 오기 전에 처리하려고 이토록 급히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는가. 

끽 해야 근방에 있는 자들이나 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계산 착오였다. 

흑색 기마대가 근방에 있었거나, 아니면 이미 움직임을 읽혔다는 소리다. 아무래도 

전자는 너무 우연스럽다. 그렇다면 후자라는 말인데…… 

'제길,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내부에 배신자가 있던, 아니면 마교의 정보망이 그토록 촘촘하던 지금은 그것이 문 

제가 아니다.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것,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 

이다. 

누남천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퇴로를 찾으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흑색 기마대가 막고 있는 곳을 뚫을 자 

신이 없다. 이곳의 지리를 안내 해 주던 사내의 말이 불연 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 

다. 누남천의 눈이 급히 퇴로로 삼았던 곳의 반대편을 살폈다. 

'있다!' 

소로(小路)긴 하나 분명 길은 길이다. 문제는 그 길이 너무 좁고 험해서 쉽사리 움 

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시간을 끌 시간이 없다. 어느새 말을 타 

고 나타난 흑색 기마대와 쏟아지는 화살 탓에 정파의 후기지수들은 반항도 하지 못 

하고 나자빠졌다. 

흑색 기마대만을 막아내는 것도 버겁다. 그런데다가 쏟아지는 화살까지 있으니 아무 

리 빼어난 무인들이라 해도 버텨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누남천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달려나가면서 외쳤다. 

"선두는 길을 막아서고 후미는 뒤로 빠져 소로를 따라 도망쳐라!" 

우왕좌왕하던 탓에 들려온 누남천의 일갈에 정파의 후기지수들은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흑색 기마대에게 밀리고 있던 후미는 뒤로 빠지기 시작했고, 뒤 

에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던 자들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히이잉! 

퍼억! 

"크악!" 

등을 보이고 달려가던 자의 가슴이 두 쪽으로 쪼개졌다. 등을 뚫고 지나간 창이 가 

슴까지 열어 버린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운빈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개 같은 새끼들!" 

운빈의 손에서 빠져나간 비수 하나가 가슴을 쪼갠 흑색 기마대를 향해 날아갔다. 노 

리는 곳은 몇 안 되게 드러나 보이는 눈이다. 

타앙! 

막 눈을 꿰뚫으려던 비수가 옆에서 달려든 다른 흑색 기마대의 일원에 의해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말을 타고 비호처럼 날아든 그의 손에 들린 창이 눈과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까지 다가선 비수를 쳐 낸 것이다. 

비수를 쳐 낸 자는 말머리를 돌렸다. 발을 잠시 치켜 든 말은 운빈을 향해 머리를 

향했다. 

'배, 백부장……' 

비수를 쳐낸 것은 가슴에 백(百)자를 새기고 있는 자였다. 그건 곧 흑색 기마대 내 

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라는 소리다. 운빈은 소매를 흔들 준비를 하고 상대를 노려봤 

다. 

다소 간격이 좁다고 생각하는 순간 말이 그를 향해 내달렸다. 

'망할!' 

몸을 던지면서 운빈은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비수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쏟아 

졌다. 그리고 날아드는 비수를 향해 백부장은 창을 휘둘렀다. 원을 그리며 빙빙 도 

는 창에 비수들은 힘을 잃고 떨어졌다. 

찔러 들어오는 창, 운빈은 급히 몸을 비틀었다. 그렇지만 그 창은 변화를 보이며 운 

빈의 뒤를 쫓았다. 

찌익! 

운빈은 다시금 몸을 틀었지만 창의 변화가 너무나 많았기에 옆구리 쪽의 옷이 찢겨 

져 나갔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창은 피해냈지만 뒤따르는 말은 두려울 정 

도로 빨랐다. 

콰앙! 

운빈은 최대한 몸을 움츠렸지만 말에 부닥치면서 뒤로 날아가 버렸다. 

삼 장 이상을 날아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그는 무릎으로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크르륵……" 

숨이 턱 하니 막혀온다. 온 몸의 뼈마디도 비명을 지른다. 뼈가 전부 박살이라도 

난 것일까? 그게 아니라고 해도 온 몸의 기혈이 들끓는 것만은 확실하다. 

참으려고 했지만 입안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말발굽의 소리를 들으며 운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확실히 죽이겠다는 듯 

백부장이 운빈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피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운빈은 질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쌍검이 허공을 갈랐다. 

카강! 

새처럼 공중을 날아온 하을지다. 그녀의 붉은 쌍검이 백부장의 창과 말을 동시에 공 

격했다. 

백부장은 창날로 하나를 막아내고, 창 끝으로 말을 노리던 나머지 검을 쳐냈다. 운 

빈을 향하던 말이 고개를 돌려 하을지를 향했다. 

주변은 온통 병장기 부닥치는 소리와 고함소리,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백부장은 말 

에서 뛰어 내렸다. 

창을 든 그는 하을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하을지 또한 쌍검을 쥔 채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였다. 

휘익! 

날아든 창을 하을지는 쌍검을 휘둘러 쳐내면서 안으로 파고들었다. 창이 검보다 간 

격이 길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안으로 파고들면 창보다는 오히려 검이 유리하다. 

하을지는 비어버린 백부장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그렇지만 하을지는 흑색 기마대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창의 간격으로는 분명 힘든 

거리였다고 하지만 빠르게 비틀린 창은 공격을 막아냄과 더불어 오히려 반격까지 가 

해왔다. 

하을지는 급히 피해냈지만 창 끝은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이를 악 물고 

쌍검을 휘두르며 거리를 벌렸다. 스친 상처라고는 하지만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쿡 

쿡 쑤셔온다. 

흐름이 완전히 흑색 기마대의 백부장으로 넘어갔다. 하을지는 공격을 막아내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고, 백부장은 그런 그녀의 몸에 하나 둘씩 잔 상처를 만들어 냈 

다. 

하을지로서는 어떻게든 이 자를 베고 퇴로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퇴로를 선봉이 지키면서 후미부터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인데 지객으로 수하들을 이 

끌어야 할 그녀가 지금은 오히려 묶여 있다. 

이번에도 간신히 창을 쳐낸 그녀의 귓가에 운빈의 전음이 새어들었다. 

[내가 비수를 날리겠소. 목표는 왼쪽 눈. 창이 움직이는 순간 드러나는 옆구리를 베 

시오.] 

하을지는 전음을 보낼 여유조차 없었지만 분명히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운빈 또 

한 그러한 그녀의 상황을 알았는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행동에 옮겼다. 

무릎을 꿇고 있던 운빈은 가슴을 움켜쥐면서 기침을 해대다가 갑작스럽게 비수를 내 

던졌다. 하을지와의 싸움에 열중하고 있던 백부장은 날아드는 비수를 향해 창대를 

휘둘렀다.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을지 또한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백부장은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그는 창대 끝으로 다시금 하을지의 검을 막아냈다. 그런데…… 

"컥!" 

투구로 감춰진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을지의 다른 검 하나가 창대를 비집 

고 들어가 옆구리에 박혀 버린 것이다. 쌍검이었던 탓에 가능했던 움직임이다. 

그녀는 옆구리에 박힌 검을 더욱 강하게 밀어 버렸다. 

뼈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백부장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검을 뽑아냈다. 

애초에 붉었던 하을지의 검이지만 지금은 한층 더 붉은 것이 요사스럽기까지 하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드는 흑색 기마대를 향해 검을 휘두르면서 운빈을 향해 다 

가갔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상태였다. 

"괜찮아요?" 

"괘, 괜찮소." 

말은 그러했지만 다리조차 움직이기 힘들다. 말에 치인 것은 온 몸을 마비시킬 정도 

의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운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술을 깨물어 피까지 나는데 

도 불구하고 그는 애써 태연한 모습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을지는 운빈의 옆에 서서 검을 휘두르며 누남천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백부장 하나를 벴다. 그렇지만 백부장 한 명을 죽였다 하여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 

다. 

그녀의 눈에 쓰러져 있는 수많은 무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종종 흑색 기마대의 모습 

도 보였지만 대부분이 정파의 후기지수들이다. 하을지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 

을 쳐냈다. 

조금만 긴장을 풀고 있었더라면 당장에 목을 꿰뚫었을 것이다. 

'안 돼. 지금 이 상태로 가다가는…… 모두 죽어.' 

하늘이 돕기 전까지는 가망이 없다. 

급히 방향을 튼 누남천은 소로의 옆에 서서 급히 아래를 살폈다. 안내인에게 들었 

던 대로 길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의 경사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다. 피하지 않고 싸운다면 흑색 기마대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줄 수는 있겠지만 전멸은 피할 수 없다. 차라리 다소 피해를 입더라도 하나 

라도 더 살리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더 중요한 일이다. 

“이쪽으로!” 

누남천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면서 외쳤다. 

선봉은 뛰어난 무인들이다. 앞장서서 싸워야 하는 자들이다 보니 척마 수호대 중에 

서도 나름대로 빼어난 자들로 뽑았다. 그런데 후미부터 공격을 당하니 추풍낙엽처 

럼 밀리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선봉과 후미가 엇갈리면서 일순 혼란이 야기 됐다. 누남천은 선봉대 맨 앞에 있는 

백산을 향해 손짓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날아올랐다. 

“따라라!” 

백산의 외침과 함께 어영부영 하게 서 있던 선봉이 움직였다. 그들은 흑색 기마대 

를 향해 돌진했다. 

여운휘는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척마 수호대가, 앞에는 흑색 기 

마대가 공간을 채운 상태였다. 

막 말 하나가 여운휘를 짓뭉개기 위해 다리를 치켜들었다. 전장의 가운데에 있는 여 

운휘를 단숨에 뭉개려고 한 것이다. 말을 탄 흑색 기마대의 실수였다. 그는 여운휘 

의 겉모습만 보고 만만하게 생각했다. 

단박에 끝내 버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운휘의 몸이 환영처럼 흐릿해 지더니 말의 

옆에서 나타났다. 

빠악! 

여운휘의 발이 말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내공이 실린 공격에 말의 다리가 꼬였다. 

휘청이던 말의 몸이 옆으로 무너졌고, 위에 타고 있던 자는 땅을 굴렀다. 그는 갑작 

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재빠르게 창을 들었다. 

위에서 올려다봤을 때는 몰랐는데 아래에서 보니까 뭔가가 달랐다. 

피를 보면 흥분을 하게 된다. 그게 공포던, 나름대로의 쾌락이던. 사람을 죽일 때 

도 마찬가지다. 온 몸을 흔드는 감정들은 사람을 반쯤 미치게 만든다. 

그런데 그러한 전장에서 너무나 태연하다. 검을 들고 있지만 않다면 지금 상황을 전 

혀 이해 못하는 백치라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렇지만 백치는 결코 아니다. 

가타부타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죽여야 할 자, 상대가 뭐든 간에 죽여야 한 

다면 베면 그만이다. 

쾅!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로 진각을 밟자 땅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창이 여운휘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가슴 쪽으로 다가오던 창이 어느 순간 비틀렸다. 아래로 떨어진 창은 단전을 노렸 

다. 그는 이 일격으로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흑화개천창법의 초식 중 하나로 그 변화는 갑작스럽고 예측하기 힘들다. 그 탓에 

이 일수를 받아내지 못하고 당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있었는데 한순간에 그것이 무너져 버렸다. 

여운휘의 검이 훑듯이 지나가면서 창대를 밀어낸 것이다. 그리고 가슴을 향해 발을 

내뻗었다. 갑옷을 입고 있었거늘 천하 역사가 망치로 내려친 것 같다. 

그는 뒤로 물러나면서 창을 휘둘렀다. 여운휘가 다가올 것은 견제하기 위함이다. 그 

는 창을 휘두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없어!’ 

눈 앞에 있어야 할 여운휘가 보이지 않는다. 판단을 내리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 

다. 예상대로 빛처럼 파고든 여운휘의 모습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채 반항도 하기 전에 여운휘의 검이 갑옷 사이에서 드러난 흑색 기마대 일원의 목 

을 날려 버렸다. 

여운휘는 자신이 죽인 자의 모습을 보기도 전에 몸을 움직여야 했다. 

어느새 질풍처럼 날아온 흑색 기마대의 하나가 여운휘를 향해 창을 휘두른 것이다. 

여운휘는 힐끔 다가오는 창을 확인하고는 창대를 잡고 뛰어 올랐다. 

솔개 같이 솟구친 여운휘의 발이 말 위에 타고 있던 그자를 땅으로 떨어트렸다. 말 

을 타고 있는 자는 상대하기 껄끄럽다. 그들의 창뿐만이 아니라 타고 있는 말도 무 

기가 될 수 있는 탓이다. 

여운휘가 말 위에서 떨어트린 자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또 다른 자가 창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말을 타고 있었기에 그 움직임은 비호같았다. 

슥! 

창날이 여운휘의 팔을 잘라 버리기 위해 다가왔지만 미리 움직인 탓에 옷깃을 베는 

것으로 그쳐야만 했다. 여운휘는 창을 피한 후에 주변을 살폈다. 척마 수호대가 점 

점 뒤로 물러서고 있는 모양이다. 

사방은 온통 검은 색 일색이다. 

흑색 기마대의 대원들이 어느새 사방에 가득했다. 사방이 온통 적인데도 불구하고 

여운휘의 얼굴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모두 벨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도망을 치는 

건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멀리서 고함을 지르는 누남천의 모습도 보이고 동료들을 격려하며 앞으로 나오려는 

백산도 보인다. 평소라면 의당 물러서야겠지만…… 

‘이곳에 그 놈이 있다!’ 

흑색 기마대가 나타났다면 그 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반드시 있을 거라는 보 

장은 없지만 여운휘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렜다. 마치 사랑하는 님을 만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운휘의 마음은 기쁨으로 떨렸다. 

무인으로서 그토록 가슴이 설렐 정도의 적수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더군다 

나 강호십일객들과도 손을 겨루는 여운휘로서 그런 자를 찾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 

은 일이고. 

여운휘는 흑색 기마대의 대주를 생각하며 검을 움켜쥐었다. 

‘와라, 적이 백 명이던 천 명이던 베어버리고 네 놈 앞으로 간다. 잠시만 기다려 

라 내가 널 만나러 갈 테니. 그땐…… 너의 목숨도 끝이다.’ 

여운휘는 흑색 기마대 사이에서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구릉 위에서 사내 하나가 전장을 살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색 일색인 무인들 여럿 

이 보필 하듯 서 있었고, 녹림도로 보이는 자들도 몇 있었다. 

“헤헤, 곧 끝날 것 같습니다.” 

이곳의 2인자였던 서혁이 말했다.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굽실거리는 것으로 유명 

한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자가 흑색 기마대의 대주라는 사실에 조심스럽게 말을 걸 

었다. 

백무량은 그저 묵묵히 전장을 살폈고 그를 대신해 옆에 있던 수하 하나가 서혁의 뺨 

을 후려쳤다. 묵직한 갑옷을 입고 있는 자의 손에서 괴력이 터져 나왔다. 

빠악! 

서혁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가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이빨이 댓 개는 나갔고, 결코 

적지 않은 피가 입 안에서 흘러 나왔다. 서혁은 두려운 눈으로 자신의 뺨을 올려붙 

인 자를 바라봤다.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온 몸이 흑색인 탓에 특이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서혁으로서는 고개를 굽혀야만 했다. 

“아이고, 제가 무슨 잘못을……” 

“네 놈 따위가 말을 걸 분이 아니다. 닥치고 있지 않으면 네 놈의 목숨도 성치 않 

을 게야. 대주께서는 너 같이 입만 나불거리는 놈을 가장 싫어하신다.” 

서혁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흑색 기 

마대의 대주이거늘 어찌 그것에 대해 가타부타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그때 백무량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곳.” 

“옙?” 

“저곳만 왜 전진이 없는 것이냐.” 

“그럴 리가……” 

그는 옆에 있는 수하에게 가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무릎을 꿇고 있던 두 명은 재빨 

리 백무량이 말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둘은 다리가 빠르고 무림의 정보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자들이다. 그 탓에 이러한 임무에 선발 되어 있는 것이고. 

그로부터 반 각 정도가 지나자 둘 중 한 명이 먼저 돌아와 부복했다. 

“무슨 일이더냐!” 

“저 그게……” 

상관의 호통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어떠한 놈 하나가 길을 막고 있는 바람에 제대로 전진을 못하는 모양입니다.” 

“지금 그 말이 사실이더냐?” 

“제가 어느 분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 한 놈에게 죽은 대원의 수가 이 

십 가량 되는 듯 합니다. 그것도 제가 봤을 때가 그 정도니 지금은……” 

“닥쳐라!” 

일갈을 내지른 그는 백무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찰 같이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조차도 백무량을 향하는 순간 스승을 모시는 제자처럼 다소곳이 변해 버렸 

다. 

“대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흐음.” 

그때 아까 같이 전장을 향해 달려 나갔던 자가 돌아왔다. 그는 급히 부복하면서 외 

치듯 말했다. 

“지, 지금 3번조를 이끄는 백부장님이 그 자에게 죽었습니다.” 

“뭐, 뭐야! 백부장까지 죽었다는 말이냐!” 

“예,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보고를 전해 들은 그는 급히 백무량을 향해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 

는 다급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대주! 서둘러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 놈 때문에 흑 

색 기마대의 손실이 이만 저만이 아니게 될 겁니다.” 

“백부장까지 죽일만한 놈이 이곳에 있었던가. 아아, 좌리검 백산이라면 이겼을 지 

도 모르겠군. 좌리검 백산 정도라면 네가 가도 문제는 없을 터. 가서 해결 하고 오 

거라.” 

그때 먼저 와 있던 자가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대주! 좌리검 백산이 아닙니다.” 

“…… 그럼 그가 아니고서 척마 수호대 중에 백부장을 죽일만한 놈이 있다는 말인 

가?” 

“예. 3번조를 이끄는 백부장님을 벤 것은 진군휘라는 자입니다.” 

전장만을 바라보던 백무량이 고개를 돌리더니 말을 한 자에게로 다가왔다. 투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백무량은 지금 흥분한 상태였다. 

“진군휘? 확실하나?” 

“예, 분명합니다. 일전에 알아보시라고 제게 명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제가 그 

를 잘못 볼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백무량은 고개를 돌려 전장을 바라봤다. 지형 탓에 유독 나아가지 못하는 곳의 모습 

이 보이지가 않는다. 

“진군휘도 척마 수호대의 일원인가?” 

“예, 조사된 바로는 지객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백무량으로서는 의문이 들었다. 

‘분명 천객은 백산이라 했는데…… 여운휘가 백산보다 약할 리는 없을 텐데.’ 

백무량은 여운휘의 정체를 알고 있다. 일전에 사무린과 처음 만났던 날 회의에서 진 

군휘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정말로 어떤 자인지에 대해서 알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더욱 흥미가 인다. 여인 하나 때문에 그토록 힘든 길을 걷는 

모습을 보면서 백무량은 더욱 더 그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 또한 남궁려희라는 사랑 

하는 여인이 있으니까. 

왜 천객이 여운휘가 아닌 백산이 되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흐, 으하하!” 

백무량이 신이라도 난 듯 웃었다. 

지금 저곳에 그가 있다. 이토록 피비린내 나는 이 장소에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여운휘가 있다. 

긴 웃음을 끝낸 백무량은 처음처럼 전장을 응시했다. 그가 검은 망토를 펄럭이면서 

몸을 돌렸다. 

“내 창을 준비해라.” 

“예? 서, 설마!” 

“출전이다. 오랜만에…… 피 향기를 맡고 싶어서 말이지.” 

말을 마친 백무량은 뒤쪽에 있는 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유독 더 빼어나 보이는 흑 

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을 향해 울음을 터트렸다. 

마치 두근거리는 주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터져 나오는 검명, 비릿하게 풍기는 피내음. 

달궈진 몸과 함께 터질 듯 뛰어 대는 심장…… 전장이다. 혹시나 죽지나 않을까 하 

는 공포가 온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들고, 사람의 몸을 꿰뚫을 때의 느낌은 두렵기 

도 하지만 또한 나름대로의 쾌락을 던져 준다. 

피아(彼我)가 구별이 가지 않는다. 주변은 그저 검은색 일색이다. 누가 적이고 같 

은 편인지 따위를 생각할 정신은 이미 날아가 버린 지 오래다. 그저 검은색을 보면 

여운휘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타앙! 탕! 

연신 검과 창이 부닥쳤다. 몇 명을 베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셀 정신도 없었 

고, 굳이 그런 것을 기억한다는 것이 무의미했던 탓이다. 

어느새 주변이 고요해졌다. 비명과 병장기가 부닥치는 이곳에서 고요하다는 말이 우 

스울 지도 모르겠지만 여운휘에게는 그랬다. 피에 젖어 버린 옷, 그것은 비단 적들 

만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여운휘라 한들 상대는 흑색 기마대다. 그들에게 둘러 쌓인 채로 이 각 정도 

를 싸웠다. 창은 수많은 작은 상처들을 만들어 냈고, 등과 허벅지에는 꽤나 깊은 상 

처가 있다. 

오히려 몸이 제 상태가 아니거늘 적들의 태도는 오히려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섣불 

리 덤벼드는 자들이 없다. 주변을 에워싼 채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의 발걸음 

이 무거워 보였다. 

그것은 여운휘의 주변에 쌓인 시체들 탓이다. 흑색 기마대들이다. 삼 사십명 정도 

나 되는 흑색 기마대가 숨이 끊어진 채로 주변에 누워 있었다. 

여운휘를 포위하고 있는 자들도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평범한 

무인들도 아니고 흑색 기마대다. 그 누가 흑색 기마대의 대원들을 이토록 도륙(屠 

戮) 할 수 있단 말인가. 

달려든다면 당장이라도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아무도 그러지 못했다. 

공포다. 

여운휘의 무위에 감탄을 하면서도 움직이면 자신 또한 땅에 누워 있는 싸늘한 시체 

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탓이다. 그러한 생각은 그들의 다리를 붙잡았고, 여운휘에 

게는 호흡을 가다듬을 기회를 주었다. 

'흑색 기마대……' 

일전에 싸웠을 때도 느꼈지만 강하다. 더군다나 오행검법을 보여서는 안 되는 지금 

은 더욱 그러하다.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도 이들은 상대하기 껄끄러운 자들이다. 

온 몸에 힘도 쭉 빠졌다. 이 각에 달하는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검을 휘둘렀다. 몸 

이 무쇠로 됐다 한들 힘이 빠질 만 하다. 

검을 던져 버린 지 오래다. 그의 청강검은 오랜 혈전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이 나 버 

렸고, 급히 땅에 있는 다른 검을 주워서 사용해야 했다. 피가 진득하니 묻어 버린 

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여운휘는 한 발 내딛었다. 

주변은 온통 요란스러운 소리로 가득한데 그의 주변만은 고요하다. 숨 죽인 채로 모 

두가 여운휘를 바라보고만 있는 탓이다. 

여운휘는 할 발 내딛고는 힐끔 뒤를 돌아봤다. 아직 제대로 빠져나가지는 못했지만 

대부분이 샛길이 있는 곳으로 물러선 상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도 이곳이 아 

닌 샛길 근처로 향했다. 

그 탓에 여운휘는 보다 편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모두가 빠져나간 것은 아니다. 쓰윽 둘러봐도 죽거나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척마 수호대 무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반 이상은 죽었다. 그리고 살아서 돌아 

간다 한들 처음의 목표를 잊게 될 것은 분명하다. 

'척마 수호대, 흑색 기마대…… 비교가 되지 않아.' 

척마 수호대의 탄생은 흑색 기마대 탓이다. 기세를 북돋울 만한 부대를 만들기 위 

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척마 수호대다. 물론 이곳에서 흑색 기마대를 만날 거라고 

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만나지 않았다면 애초의 목적대로 무림맹의 중요한 부대로 쓰였을 지도 모른 

다. 

하지만 이제 이들에게는 흑색 기마대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일방적인 싸움, 싸움이 

라기 보다는 학살에 가까웠다. 쏟아지는 화살과 흑색 기마대의 공격은 단숨에 척마 

수호대를 무너지게끔 만들었다. 

여운휘는 누군가의 모습을 찾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흑색 기마대의 대주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주변에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여운휘는 땅 아래 떨어져 있는 창대를 들어 올렸다. 한 손에는 검을, 다른 손에는 

창을 들었다. 특별히 창을 배운 적은 없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검 하나만 들고는 사 

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받아 내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창은 방어를 제하고도 여러 가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여운휘의 손이 움직였다. 

슉! 

그는 창을 한 바퀴 돌리는 듯 싶더니 갑작스럽게 뒤를 향해 내던졌다. 창은 여운휘 

를 바라보던 자에게 날아갔고 그는 재빠르게 그것을 쳐냈다. 그런데 그 창을 쳐내 

는 것과 동시에 그는 신음성을 터트렸다. 

"윽!" 

여운휘의 발이 땅에 널브러져 있는 창 중 하나를 걷어 찬 것이다. 던지는 것과 거 

의 동시에 이루어진 행동이 목덜미를 꿰뚫었다. 목에 창이 꼽히자 잠시 부르르 떨 

던 그는 천천히 쓰러졌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잠시 멈췄던 싸움이 다시금 시작됐다. 

사방에서 창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여운휘의 몸은 마치 비조(飛鳥)라도 된 듯 날아 

올랐다. 기다렸다는 듯 튀어 오른 창이 여운휘의 손에 잡혔다. 번개처럼 쏟아지는 

여운휘의 양 손과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발에 흑색 기마대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내뻗었던 창 탓에 낭패를 봐야했다. 

"으윽!"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와 함께 흑색 기마대들은 다시금 물러섰다. 한 명의 목이 순 

식간에 날아갔지만 결코 그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재빠르게 대열은 다시금 정리 됐 

고 창은 여운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여운휘의 몸이 굽혀졌고 창은 등줄기를 향해 다가갔다. 

방금 전 입었던 깊은 상처 옆을 창대는 스치고 지나갔고, 가느다란 혈선 하나가 동 

시에 피를 뿜었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멈추지 않았다. 상처의 고통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한 발 내딛었다. 

낭창낭창 휘어지는 창대가 가까이 다가왔던 흑색 기마대를 물러서게끔 만들었다. 

여운휘는 흐르는 땀을 닦아내면서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나타나지 않은 흑색 기마대의 대주. 여운휘는 슬슬 물러나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 

다. 그와의 결전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 유설린을 지키는 것이 아니던가. 

마음을 정하자 창과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또 다시 이렇게 조우 할 날이 언제가 

될 지는 모르나 지금은 물러서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미 피하려고 했던 자들은 나름대로 물러난 상태. 그리고 여운휘가 굳이 그들의 목 

숨까지 챙겨 줄 이유는 없었다. 

거리를 벌리고 나서 여운휘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대로 천천히 뒤로 물러설 생 

각이었다. 하지만 여운휘는 도망치려던 마음을 접었다. 둘러싸고 있던 흑색 기마대 

가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흑마를 탄 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마는 다른 말 보다 훨씬 

더 위엄이 넘쳤고 그 말 위에 타고 있는 자 또한 보통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 

다. 

여운휘는 말 위에 올라타고 있는 자를 바라봤다. 투구에 감쳐진 상대의 눈도 여운휘 

를 향했다. 

여운휘는 창대를 집어 던지고 검을 움켜쥐었다. 

표정의 변화는 없지만 여운휘는 신이 난 듯 보였다. 그는 흑색 기마대의 대주를 응 

시하며 말했다. 

"늦었군." 

"……" 

대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말에서 내려 뒤에 있는 수하에게 자신 

의 흑마를 내맡겼다. 그는 손에 낀 쇠로 된 장갑을 어루만지며 여운휘의 앞으로 다 

가왔다. 

투구 사이에서 쉰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도 나서지 마라. 이 놈은 내 먹이다." 

그는 말 옆에 달려 있던 창을 들고는 여운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질리도록 봐 왔 

던 갑옷이다. 이 갑옷을 입었던 수많은 자들을 벤 여운휘지만 지금 앞에 있는 상대 

는 그렇지 않다. 

여태까지와는 그 무게가 틀리다. 

백부장, 십부장, 평범한 대원. 그러한 자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자만 할까. 

가슴에 새겨져 있는 흑(黑)자가 유독 눈에 띈다. 

그는 창을 꼬나 쥐고는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렸다. 네 놈을 만날 날을……" 

여운휘는 그 말 한마디에 흑색 기마대의 대주 또한 자신과 같은 심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운휘가 그를 유의 깊게 본 것처럼 대주 또한 그랬던 것이다. 

대주가 말을 이었다. 

"네 무덤은 바로 이곳 자달목이 될 것이다." 

앞에 있는 상대의 몸 상태는 분명 최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변하지 않는 

다. 

‘최고의 적수다.’ 

백무량은 그리 생각했다. 설령 제 상태가 아니라 해도 그를 이토록 떨리게 만든 자 

는 여태까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전혀 떨림이 없 

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꼿꼿해서 의문이 들 정도다. 

백무량의 눈이 여운휘의 몸 곳곳을 살폈다. 꽤나 오랫동안 검을 휘둘렀을 게다. 거기 

다가 온 몸에 있는 상처들은 결코 우습게 넘길 수준이 아니다. 그런데도 오연하다. 

그리고 자신이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눈까지 빛낸다. 

응당 저런 자에게는 보답을 해야 한다. 백무량의 흑색 창이 그리 할 것이다. 

백무량은 크게 호흡을 내쉬었다. 투구 속에 감추어진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비틀렸 

다. 너무나 즐겁다. 바로 이러한 긴장을 원했던 것이다. 

넝마처럼 변해 버린 옷을 입고 여운휘는 검을 든 채로 백무량을 응시했다. 이제는 다 

른 적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의 우두머리인 백무량이 물러서라 

고 했다. 그리고 물러선 그들은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둘은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루 해 보일 지도 모이지만 

그 속은 결코 그렇지 않다. 서로 빈틈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둘의 격돌은 쉽게 이루 

어졌다. 

“큭!” 

옆쪽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리는 순간 서로가 움찔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 

에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무겁게 날아드는 흑색 창이 무섭도록 여운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여운휘는 몸을 틀 

어 창을 피하면서 즉시 검을 내질렀다. 그렇지만 채 검이 목표한 곳에 닿기도 전에 

백무량의 검은 손이 여운휘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비어 있는 여운휘의 가슴을 향해 백무량은 그대로 발을 날렸다. 

갑옷을 입은 탓에 그 발차기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 따라 올 것은 분명했다. 

팔목이 잡혀 버렸기에 여운휘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몸을 띄워 발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비어 있는 겨드랑이를 향해 각법을 펼쳤다. 

오진각(五進脚)이라는 각법이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다섯 번의 공격이 가해지게 된 

다. 백무량은 손목을 잡았던 손을 놓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행동은 민첩했지만 다리 

가 갑옷 위를 두드렸다. 

타타탕! 

‘세 번! 하지만 빗나갔다!’ 

여운휘는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다가가면서 검을 휘둘렀다. 

무상검제 진군악의 쾌검이다. 

쒜엑! 

빛보다도 빠르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쾌검이다. 잠시 멈칫 했던 백무량의 두 눈이 붉 

게 빛났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검날을 오히려 잡아 버렸다. 

콰직! 

쇠로 된 검이 한 사내의 손에서 박살이 나 버렸다. 여운휘는 재빠르게 물러서서 주변 

을 살폈다. 다른 검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다. 

백무량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 육중해 보이는 주먹을 날렸다. 

‘칫!’ 

여운휘는 살짝 고개를 틀었지만 주먹이 뺨을 스쳤다. 뺨에 생긴 얇은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몸을 돌린 여운휘는 검을 하나 쥐었다. 

‘너무 빨라.’ 

대처가 너무나 빠르다. 오진각이 제대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하나 그래도 세 번이다. 

적어도 비틀 거릴 정도의 시간은 충분히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무상 

검제의 쾌검. 

무상검제의 쾌검을 확실하게 보고 잡았다는 것은 그 전의 공격이 상대에게 별 피해 

를 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일말이라도 충격이 있었다면 그토록 빠르게 대처 하기는 

어려웠을 터다. 

여운휘는 백무량에 대해 몰랐다. 

그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른다는 사실을. 

백무량이 한 발 내딛었다. 

그가 움직이자 마치 태산(泰山)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웅장한 느낌이 사 

방을 채웠다. 무거워 보이는 검은 갑옷과 그의 몸에서 풍기는 강렬한 기세 탓이다. 

백무량의 검은 창이 번개처럼 위로 솟구쳤다. 흑화개천창법의 구 초인 흑화승라다. 

재빠르게 몸을 뒤로 뺐지만 또 다시 창끝이 미간을 스쳤다. 일순 새어 나온 피가 시 

야를 가렸고 여운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는 사이 이미 시야는 검은 색 창으로 가득 찼다. 

여운휘는 급히 검에 내공을 불어 넣고 뒤로 잡아 당겼던 검을 앞으로 내리 쳤다. 하 

얀 빛이 기다렸다는 듯 여운휘의 검에서 터져 나갔다. 수많은 창이 그의 몸을 찢어발 

기기 위해 다가왔고 여운휘는 뒤로 신형을 날리면서도 바삐 손을 움직였다. 

타앙! 탕! 탕!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여운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너무 오랜 시간 싸운 탓에 내력이 많이 소갈 된 탓이다. 더군다나 앞에 있는 상대는 

최고의 상태라 해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 할 수 없는 자다. 그리고…… 피하고 싶지 

도 않은 상대다. 

‘오행검법이라도……’ 

오행검법이라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럴 수가 없다. 사방에서 보는 눈 때문이다.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너의 전부냐.” 

“우스운 소리……” 

말은 그리 했지만 지금 보다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는 힘들다는 것을 여운휘는 알 

고 있었다. 지금도 운이 좋았기 때문에 동류라도 이룬 것이다. 

백무량은 지금 여운휘가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전에 남궁세가에서 죽었던 흑색 기마대의 하나의 시체에서 발견 된 상흔으로 여운 

휘에게 다른 검법이 있다는 것을 아는 탓이다. 

‘왜 쓰지 않는 거냐.’ 

그것이 보고 싶다. 그토록 갈증이 났던 마음을 한순간에 풀어 주었던 그 검이. 

살검(殺劍). 반드시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검. 그 검을 보고 싶다. 

“한 가지 청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여운휘는 결단을 내렸다. 

"다른 자들을 조금 더 뒤로 물러나게 해." 

"……" 

백무량은 여운휘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일전에도 여운휘는 자신의 진짜 검을 숨기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다. 백무량은 직감적으로 지금 그가 그토록 숨겨 왔던 검을 보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백무량은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모두 삼장 뒤로 물러서라!" 

"대, 대주!" 

백무량의 가까이에 있던 자가 무엇인가 반문을 제기하려는 듯 다가왔다. 그 순간 백 

무량은 고개를 돌려 그 자를 바라봤다. 투구 사이에서 드러난 붉어 보이는 듯한 눈 

을 보는 순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여운휘로서는 너무나 쉽게 백무량이 자신의 요청을 받아 들이자 의아할 수 밖에 없었 

다. 그렇지만 여운휘로서는 바라던 바, 특별히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 

은 없었다. 

백무량은 삼장 밖으로 벗어나는 자신의 수하들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이 부닥쳤다. 

백무량은 아무런 말도 없이 창을 쥐었다. 

'어서 보여줘라. 그 살검을!' 

백무량의 마음을 모르는 여운휘는 그저 검을 쥐고는 앞으로 다가갔다. 다소 고민이 

됐었지만 펼치려고 결정한 것이다. 

'보여주마. 오행검법을.' 

여운휘는 검을 꺼내든 채로 백무량을 응시했다. 마찬가지로 여운휘를 바라보고 있던 

백무량은 서서히 변하는 그의 기세에 감탄했다. 

백무량은 창을 휘두르더니 어느새 뒷짐 진 듯 자세를 잡았다. 

흑화개천창법을 펼치기 전에 잡는 기수식이다. 

'만만치 않겠어.' 

백무량은 여운휘의 검끝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여운휘는 상대 또한 자신에게 대응하기 위해 기수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여운휘가 보는 백무량에게는 빈틈 따위는 없었다. 그 어느 방향으로 움직인다 

해도 막아낼 것만 같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더욱 강하게 검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검에 믿음이 없다면 설령 천하제일의 무공이라 해도 삼류무공 밖에 되지 못 

한다. 여운휘는 오행검법을 믿는다. 또 자신의 검도 믿는다. 

여운휘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검법을 쓴 이상 반드시 상대를 죽여야만 한다. 여운휘의 눈이 더욱 차갑게 변했 

다. 

백무량은 확연하게 변한 여운휘의 기도에 즐거움과 놀람을 동시에 느꼈다. 한 사람 

이 이토록 다른 기세를 뿜어낸다는 것도 그렇고, 그러한 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그렇다. 

터져 나오는 검. 백무량의 몸이 움찔했다. 

극쾌! 

여태까지의 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쾌검이 터져 나왔다. 

백무량은 간신히 몸을 비틀어 검을 피해냈다. 갑옷을 스치고 지나간 검을 보면서 백 

무량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가 쫓지 못한 검은 생전 처음이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백무량의 갑옷이라 해도 꿰뚫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눈을 부릅 

뜨고 여운휘의 검을 살폈다. 

몇 번을 스쳤고, 중간 중간 위험한 고비도 넘겼다. 그렇게 안력을 집중하다 보니 천 

천히 검의 검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검의 속도가 떨어진 탓이다. 아마도 부상 때문이리라. 

여운휘의 검이 재차 움직이는 순간 백무량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창을 휘둘렀다. 

흑화개천창법의 3초식인 흑화진양격(黑花振陽擊)이다. 검이 날아드는 길목을 차단함 

과 동시에 마치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는 초식으로 공격과 방어가 거의 한 동작이라 

봐도 된다. 

여운휘는 백무량의 창의 움직임을 보고 급히 검의 방향을 선회했다. 이대로 간다면 

쉽사리 막힐 거라고 생각한 탓이다. 그렇지만 검의 방향을 비틀었음에도 백무량의 

창은 끌리기라도 하는 듯 따라붙었다. 

여운휘가 안 되겠다 싶어 검을 빼는 순간 백무량의 창이 번뜩였다. 

빛살처럼 날아든 창이 여운휘의 왼쪽 어깨를 노렸다. 찌르는 공격이 아닌 베기 공격 

이다. 분명 빨랐지만 여운휘는 그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헌데…… 

“흡!” 

여운휘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왼쪽을 빠르게 세 번 두드린 창이 어느 

새 오른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것도 빠르다기 보다는 현묘한 변화를 보이면서 날 

아든 창은 여운휘를 뒤로 물러나게끔 했다. 

왼쪽을 빠르게 세 번 공격한 것은 흑화좌삼쾌(黑花左三快), 그리고 급작스럽게 방향 

을 비틀면서 기기묘묘한 변화를 보인 것은 흑화우삼변(黑花右三變)이다. 각각 흑화 

개천창법의 10초와 11초로 중요한 것은 두 개의 초식이 너무나 절묘하게 연계가 된 

다는 것이다. 

땅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여운휘의 발이 바삐 움직였고, 땅에는 깊이 파인 자국 

이 남았다. 

가까스로 피했나 싶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흐압!” 

고함을 내지르며 백무량이 앞을 향해 창을 내뻗었다. 

시야를 덮을 정도로 무수히 많아지는 창의 모습들. 가히 만개의 형상들이 여운휘의 

눈 앞에 나타났다. 눈에 띌 정도로 여운휘의 안색이 변했다. 

‘위험해!’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다. 우선은 피해야 한다. 

여운휘의 머릿속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생각이 나는 순간 몸이 따라 

움직였다. 

어떻게 거리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운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깨에 이는 화끈 

한 통증. 

땅에 발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여운휘는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다시금 다가서려던 

백무량은 그 공격에 뒤로 성큼 물러섰다. 

여운휘는 검을 든 손으로 어깨를 움켜쥐었다. 피가 샘솟듯 쏟아져 나왔다. 상처는 

분명 깊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상처를 향해 눈도 돌리지 않았다. 

단 한 숨의 호흡이 승패를 바꿀 정도의 싸움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상처를 본다? 우 

습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날아든 백무량의 창이 여운휘의 머리통을 으깨 버릴 것이 

다. 

어깨를 움켜 쥔 손가락 사이로 피가 쉬지도 않고 쏟아졌다. 온 몸에 있는 상처들도 

그렇지만 이번에 입은 것은 결코 작지 않다. 

이대로 간다면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죽거나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 

여운휘는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손을 때었다. 

주변의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니, 비명소리와 병장기 부닥치는 소리는 분 

명 들린다. 하지만 관심이 가지 않는다는 게 옳을 것이다. 신경은 온통 앞에서 자신 

을 바라보는 한 무인에게로 향했다. 

비명소리, 전장에서 으레 나올만한 여러 가지 소음들…… 아무것도, 아무것도 들리 

지 않는다. 앞에 있는 흑색 기마대 대주의 호흡, 미세한 움직임은 들리고 보여도 그 

토록 커다란 것들은 마치 먼나라의 이야기 마냥 현실감이 없다. 

‘벌써부터 정신이 혼미해지는 건가?’ 

눈앞이 뿌옇다. 너무 오랜 시간 싸웠고 피도 만만치 않게 흘렸다. 만약 바로 저자 

와 만났다면 더 좋은 대결을 펼쳤을 지도 모른다는 욕심이 문득 솟구쳤다. 그렇지 

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죽을 수는 없지.’ 

유설린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마 자신이 죽는다면 그녀는 눈이 퉁퉁 불어 버릴 정도 

로 울겠지. 

‘보고 싶지 않아.’ 

그러한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약속도 지켜야 하고 그녀도 지켜야만 한다. 

물러서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물러나고 싶지도 않다. 유설린을 지켜야 

한다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눈 앞에 있는 자에게서도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지막이다.’ 

여운휘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단 한 수다. 이 한 수에 모든 것을 걸려고 하는 것 

이다. 실패하면 물러선다. 

욕심은 나지만 최우선은 유설린을 지키는 것이다. 

팔을 들어 올리기 조차 힘들었지만 여운휘는 상처가 난 손을 들어올렸다. 

여운휘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대가 지금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아마도 상처 탓이리라. 저만한 상처들이라면 지금은 서 있는 것조차 고역일 터. 

애초부터 상황이 너무나 백무량에게 유리했다. 제대로 된 상태에서 겨루지 못한 것 

은 아쉬웠지만 백무량은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이유야 어쨌든 지금 여운휘는 검을 쥐고 있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쏟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대에게 동정심을 갇는 다는 건 무례다. 

‘후후, 그래. 오너라. 얼마든지 받아주마.’ 

백무량 또한 창을 들어 올렸다. 여태까지와는 미묘하게 다르다. 같은 기수식이지만 

풍기는 기세를 비롯해 그 모든 게 다르다. 여운휘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다소 굳 

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백무량은 절초를 선보이려는 거다. 흑화개천창법의 제 12초. 

실전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흑화개천창법의 12초까지 쓸만한 상대 

를 만나지 못한 탓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자신한다. 흑화개천창법의 12초는 여태 

까지의 무공의 상식을 벗어날 정도의 위력이 있다는 것. 

여운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 또한 필살의 초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탓 

이다. 그렇지만 생각의 변화는 없다. 여운휘는 그대로 검을 휘두르기 위해 백무량 

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여운휘의 발걸음 하나 하나에 힘이 실렸다. 

‘난 죽지 않아. 아니, 죽을 수 없다!’ 

백무량 또한 여운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잡고 있는 창은 

기회를 노리고 있다. 

‘동정 따위 하지 않는다. 네 놈은 분명 강하니까. 넌…… 이곳에서 죽게 될 거 

다.’ 

여운휘는 살기 위해, 백무량은 죽이기 위해 자신의 병기를 들었다. 

백무량은 온 몸을 감싸는 흥분에 흥에 겨운 듯 부르르 떨었다. 막 둘이 격돌하려는 

순간 뒤가 소란스러워졌다. 

병장기 부닥치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울렸다. 문제는 너무나 가까웠다는 거다. 

백무량은 고개를 돌렸다. 

무림맹의 잔당들이 도망친 곳에 있던 흑색 기마대의 대원들이 쓰러져 버린 것이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오십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한 부분을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온 

모양이다. 

맨 앞에 서 있는 노인이 외쳤다. 

“진군휘! 어서 도망치게!” 

노인은 누남천이다. 그는 우선 뒤로 물러서서 부대를 정비했다. 그는 여운휘가 홀 

로 남아 흑색 기마대와 싸운 것을 정파 무림을 위해 그리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는 부대를 정비하자마자 여운휘를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왔다. 

다른 모두 또한 여운휘의 행동을 정파 무림과 연관지었고, 그의 의협심에 많은 자들 

이 감동하며 이곳에 오는 것을 자진한 것이다. 심한 부상자를 제하고 거의 전원이 

온 거라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다. 

누남천의 목소리에 여운휘는 그쪽을 바라봤다. 

수많은 자들의 눈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 이곳에서 오행검법을 펼칠 수도 없거니 

와, 굳이 도망 칠 수도 있었는데 흑색 기마대의 대주와 싸워 무림맹의 피해를 늘리 

게 되면 좋을 일은 없다. 

잠시 흑색 기마대에 혼란이 일었지만 곧 그들은 오십 명의 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 

다. 어느새 산 아래로 내려온 녹림도들도 가세하려는 듯 그쪽을 향해 움직였다. 

누남천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어서!” 

여운휘는 백무량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무래도 우리의 결투는 후로 미뤄야겠군.” 

“큭큭.” 

미루겠다는 말에도 백무량은 웃음만 흘렸다. 

그때였다. 

검을 내려트리던 여운휘의 몸이 갑자기 날아오르더니 백무량을 향해 날아갔다. 긴장 

을 풀고 있던 백무량으로서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급히 손을 들어 얼굴을 보호하 

는 것이 다였다. 

빠악! 

손에 끼고 있는 보호대가 여운휘의 발을 막았지만 비어 있는 가슴을 여운휘의 다른 

발이 내질렀다. 백무량은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땅에 내려선 여운휘가 말을 내뱉었다. 

“아까 일격에 대한 보답이다.” 

말을 마친 여운휘는 미련도 없다는 듯 몸을 돌리고는 누남천이 있는 곳을 향해 몸 

을 날렸다. 여운휘가 무리에 합류하자 누남천은 급히 손을 들어 신호를 했다. 사전 

에 미리 언질이 되어 있었는지 일행은 빠르게 진을 짜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백무량의 옆으로 수하가 달라붙었 

다. 

“어찌 할까요? 추격이라도 해서 전멸을……” 

“됐다.” 

“하지만 지금 추격을 한다면 분명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대주 추 

격 명령을……” 

“저 따위 패잔병들이 두렵나.” 

“무, 무슨 말이십니까! 저 따위 놈들이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두렵냐는 말에 그는 목청을 높이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대주, 죄송합니다.” 

“아니. 네 말 대로다. 나 또한 저들이 두렵지 않아. 지금 움직이는 자들은 놔두고 

특별히 추격조를 편성할 필요는 없다. 살 놈은 살 것이고 죽을 놈은 죽겠지. 그리 

고 그 산 놈들도…… 언젠가 다시 전장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백무량의 말에 감복이라도 한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백무량은 멀어지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투구 속에 감춰진 입에서 미소가 지어졌다. 

제 상태가 아닌 최고의 상태로 대적해 보고 싶다. 그랬기에 오늘도 죽일 수 있으면 

서도 놓아주었다. 

‘다음엔 반드시 죽여주마. 진군휘. 아니, 여운휘……’ 

백무량은 몸을 돌려 자신의 흑마 위로 올라탔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마음은 없 

다. 그는 미련이 남기라도 하는 듯 뒤를 돌아봤다. 이제는 여운휘를 데리고 도망친 

자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큭큭!” 

낮게 실소를 흘린 백무량은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이랴!” 

흑마는 백무량의 명령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운휘가 향하는 방향과는 정 반대 방 

향이다. 

점점 두 사내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지만 백무량은 여운휘가 마치 바로 옆에라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그게 운명이라면 내가 널 베어주지. 큭 

큭…… 전장에서 만나자.’ 

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백무량은 자신의 의사가 전해졌기라도 한 마냥 즐 

거운 듯 웃음을 토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