궐기(蹶起)
푸르륵.
흑마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소리를 내고 있는 말은 대단히 잘생긴 명마였다. 생
긴 것뿐만이 아니라 강인해 보이는 다리는 그 누가 본다해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일게끔 할 정도였다.
그 흑마 위에 흑색 갑주를 입은 무인이 앉았다. 긴 창을 등허리에 메고 있는 데 그
를 향해 어떤 자가 다가왔다. 그 또한 흑색 갑옷을 입고는 있었으나 투구는 하지 않
은 상태였다.
드러난 얼굴은 오십이 조금 되지 않은 듯 했다.
말에 타고 있는 자와 지금 나타난 자의 차이는 가슴에 새겨져 있는 무늬뿐이었다.
지금 다가온 자의 가슴에는 백(百) 그리고 말 위에 타고 있는 자는 흑(黑).
말 위에 타고 있는 것은 백무량이다.
다가온 사내가 백무량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철커덩.
갑옷이 무거운 소리를 뱉어냈고 백무량은 천천히 투구를 벗었다.
투구가 벗겨지면서 예의 표정 없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백무량이 말했다.
"무슨 일이냐."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대주."
백부장의 일인인 그는 고개를 숙였다. 외모만 봐도 조카뻘조차 되지 않을 터인데 그
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쉬운 일이 아니다.
윗사람인 탓도 있지만 진심으로 승복한 탓이다. 완벽하게 상대를 인정하기 전에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마음가짐이다.
"중요한 정보?"
"예. 좌운 어르신께서 긴히 전해달라는 말인지라 무례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리 말씀
을 전하러 왔습니다."
"해봐라. 만약 중요치 않다면 목이 날아가도 원망은 하지 마라."
누군가가 듣는다면 형식적인 말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내는 알고 있
다. 앞에 있는 흑색 기마대의 대주라는 자는 결코 빈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출전하시려는 걸 방해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좌운 어르신께서 전하
라는 말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말이 어서 달리자는 듯 다시금 울음을 터트렸다. 백무량은 손으로 천천히 말의 목덜
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흑마는 잠시 더 푸르륵 거리다 곧 잠잠해졌다.
말이 진정하자 그제야 백부장이 말했다.
"무림맹 쪽에서 흑색 기마대에 대항하기 위하여 척마수호대라는 세력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흐음."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기에 백무량의 안색이 슬쩍 변했다가 돌아왔다. 사내는
계속해서 말했다.
"삼십대 정도 되는 젊은 무인들을 주축으로 만들었고, 그들의 우두머리는 좌리검 백
산이라고 합니다."
"좌리검 백산……"
이름은 분명 들어봤다.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무인이라고 무림에서 이름 또한 쟁쟁
하다. 그렇지만 관심이 갈 이유는 없다.
'백산 따위가 내 상대가 될 리가 없지.'
오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상대를 따위라 치부하
며 반드시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행동이다.
하지만…… 백무량은 예외다. 만나지 않았어도 이미 승패는 나 있다.
백산의 상대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백무량인 탓이다.
"좌운 어르신이 얼마 후에 연락을 줄 테니 그때 처리를 하라고……"
"처리? 어떠한 처리라고 하시더냐."
백부장인 사내는 자신의 상관을 올려다봤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묻는 것
이고.
"전부…… 죽여버리라고 하셨습니다."
"후후, 좋아. 그거야 쉽지. 좌운을 찾아가서 전부 죽여버리겠다고 전해라."
히이잉!
말이 울부짖었다. 다리를 높이 들면서 몸을 비튼 말은 앞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씩 내딛기 시작했다. 백무량은 다시 투구를 썼다.
검은 투구가 그의 얼굴을 가렸다.
얼굴 중 유일하게 드러나는 눈이 번쩍였다.
'척마 수호대? 큭큭, 웃기고 앉았군. 감히 흑색 기마대에 대적을 하려 하다니. 그것
도 겨우 좌리검 백산 정도 되는 자로 말이야.'
천천히 걸어 나가는 백무량의 흑마 뒤에 하나 둘씩 다른 자들이 따라 붙기 시작했
다. 나무 사이사이에서 흑마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모두의 눈에서는 살기가 번들거렸다.
말의 호흡 소리가 꽤나 거칠다. 처음엔 백무량 한 명뿐이었는데 지금 그의 뒤에는
백기 이상의 기마대가 서 있다.
맨 앞에서 말을 타고 걸어나가던 백무량이 말했다.
"달린다."
차앙!
앞에 있는 자들이 창을 높이 세우자 흑마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땅이 거칠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