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교제일검(魔敎第一劍)
사무린의 거처가 변했다. 마교 내에서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녀답게 거처는 은밀
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변한 건 거처뿐이 아니다. 사무린에 대한 대우가 변했다.
사무린은 알았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변했다는 사실을.
도황을 죽인 후 마교에 돌아왔을 때 진린은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수고했
다는 한 마디 말만 하고는 더 이상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변해버린 거처
와 그 밖의 대우들은 사무린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진린에게 쓸모가 있다는 생각을 들게끔 했다는 증거니까.
사무린은 진린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렇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지금 당장 평
가가 어떻든 간에 사무린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을 여인이 아니다.
혈루검법(血淚劍法)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 중반에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하여 반 정도는 익혔다고 말할 수도 없다.
무공이던 재주던 익히는 것보다는 그것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지 않
는가. 마찬가지다. 사무린은 혈루검법을 중반까지 익혔으나 또 다시 난간에 부닥치
지 않을 거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
사무린의 일과는 연무장에 시작해서 연무장에서 끝났다. 아무런 임무도 없다. 마교
에서 나가 무엇인가 할 일도 있는 것도 아닌 그녀이기에 모든 시간을 무공 훈련을
쏟을 수 있었다.
무료할거라 생각할지도 모르나 사무린은 지금의 시간이 마음에 들었다.
고요하다. 온 주변에 신경 쓸거리가 전혀 없다.
무공, 무공만 파고들면 된다.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이고, 또한 하고 싶
은 것이기도 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있는 지는 모른다. 내일이라도 당장 진린의 명을 따라 누군가를
죽이려고 가야 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의 시간에 만족하는 것으로 족하다.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고서는 무엇을 하던 더디기 마련이다. 사무린은 무공에만 신
경을 쏟으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무공에만 신경을 쓰는 것 답게 사무린의 검은 날카로워졌다.
오늘도 사무린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고요한 연무장에는 오로지 검
의 울음만이 울려 퍼졌다. 종종 들리는 발소리, 그리고 공기를 자르는 검의 울부짖
음. 한창을 움직였는지 사무린의 얼굴에서 땀마저 흐른다.
슈욱! 티잉!
마지막으로 경련을 하듯이 떨기 시작한 검이 천천히 그 생기를 잃기 시작했다.
"후우……"
사무린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른 탓에 그녀마저도 지칠 정도
다.
사무린은 소맷자락으로 땀을 닦았다. 그녀는 오늘의 검무가 마음에 들었는지 씨익
웃었다.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는 사무린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드러난
하얀 이와 대조적인 붉은 입술은 고혹적이기까지 하다.
방금 전까지 무서운 정도의 칼바람을 일으킨 여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다.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던 사무린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등뒤에서 들린 탓이다. 방금 전까지는 듣지 못했는데 어느 사이에……
사무린은 뒤에서 다가오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 외모만큼은 확연할 정도로 눈에 들어
올 것만 같다.
키는 여태까지 그녀가 봤었던 누구보다도 컸고, 또한 펑퍼짐한 옷을 입었음에도 불
구하고 확연하게 느낄 정도로 깡마른 노인이다. 흰머리는 단정하게 하려는 듯 뒤로
묶었지만 큰 키에 어울리지 않는 몸 때문인지 섬뜩하게 보인다.
짝짝.
아무런 말도 없이 다가오던 노인은 손을 마주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사무린은 조심히 상대를 응시했다. 생면부지의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결코 만만한 자
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네가 사무린이냐."
"그래요. 제게 그걸 물어보시는 노부가 누구신지 궁금하군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노인은 사무린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마치 기루에 있는 기
녀를 고르는 듯했기에 그녀는 기분이 상했다. 그렇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
상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근골(筋骨)은 괜찮아 보이고…… 눈동자를 보니 쉽사리 마음이 읽히지도 않는군.'
노인은 사무린을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공을 익힌 게 열 살부터라고 들었는데 맞나?"
위협적인 어조였지만 사무린은 주눅들지 않았다. 상대가 범상치 않다고는 느꼈지만
그녀 또한 도황을 죽이면서 자신이 붙었던 것이다. 강호십일객 중 한 명을 죽인 자
신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쉽사리 당하지는 않을 게다.
담담한 어조로 그녀가 답했다.
"맞아요."
"무공을 익힌 지 이십 년도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 재미있군."
말을 마친 노인은 등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작은 소리가 들렸고,
쾅!
노인의 등뒤에서 떨어진 것이 지면과 닿는 순간 큰 소리를 터트렸다.
지면과 충돌한 것은 꽤나 무게가 나갈 것 같은 쇠사슬이었다. 더군다나 그 끝에는
쇠로 된 어른 주먹막한 추(錘)가 달려있었다.
촤르륵!
쇠사슬의 다른 끝이 노인의 왼쪽 소매에서 빠져 나왔다. 그 기이한 무기에 사무린마
저도 놀라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뭐죠?"
"아까 물었지? 내 이름이 뭐냐고. 이름은 잊은 지 오래고 사람들은 나를 뇌용(雷勇)
이라 부른다."
퍼엉!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날아든 쇠사슬 끝에 달린 추가 사무린이 있던 자리를 강하게
때렸다. 재빠르게 움직인 탓에 그녀는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지만 내심 놀란 것
은 사실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쉐엑!
쇠사슬이 꺾이면서 사무린의 상체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녀는 급히 몸을 뒤로 젖혔
다. 몸을 굽힌 사무린의 눈에 쇠사슬이 손살같이 스쳐지나갔다.
귀가 윙윙거릴 정도의 소리가 쇠사슬에서 터져 나왔다. 사무린은 모골(毛骨)이 송연
해졌다.
사무린은 급히 뒤로 물러섰다.
뇌용은 쇠사슬을 짧게 잡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 끝에 달린 추 또한 언제든
지 라도 움직일 것처럼 꿈틀거렸다.
"말이 너무 많군."
말을 끝낸 뇌용의 손이 재차 움직였다. 추가 일직선으로 사무린의 가슴을 노리고 날
아들었다. 제대로 맞는다면 가슴뼈가 함몰되는 건 문제도 아니다. 아니, 그것을 떠
나 살 수 있을지 조차도 의문이다.
사무린은 그곳에 서서 그대로 쇠사슬이 날아오는 것을 바라봤다.
추의 무게는 상당하다. 이 정도의 속도에 내력까지 실렸다면 검으로 쳐낸다 해도 쉽
사리 추를 막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사무린의 검은 추가 아닌 쇠사슬을 향해 움직였다. 쇠사슬의 마디와 마디 사이에 정
확하게 사무린의 검이 박혔다.
촤악!
쇠사슬은 사무린의 검 탓에 옆으로 흘렀고 그 순간 가슴뼈에 닿을 정도로 다가왔던
추 또한 옆으로 흘렀다. 재빠르게 쇠사슬을 회수하는 뇌용은 은근히 놀란 상태였다.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뇌용은 서둘러 추를 회수하려고 했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것
이 사무린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닌 탓이다.
서둘러 회수하려고 하는 순간 손에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움직여야 하는 쇠사슬이
검 때문에 옆으로 밀려난 탓이다.
여태까지 가볍게 대했던 마음이 급변했다.
그에 비하면 반도 살지 않은 계집에게 이같이 당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탓이다.
오기와 흥미가 동시에 인다.
사무린이 말했다.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말씀해주셨으면 하는군요. 살수를 펼치시는 건 아닌 것 같은
데."
그녀 또한 뇌용이 추가 가슴에 닿으려는 찰나에 회수하려고 했던 것을 알아차린 것
이다. 그렇지만 뇌용은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방비로 서 있던 아까 와는 달리 추를 고개 위까지 올려 빙빙 돌렸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알고 싶다면 검을 들어라. 네 실력이 이 정도인 것을 안
이상 중간에 추를 거둘 일은 없을 것이다."
부웅 부웅 거리는 소리가 섬뜩하다. 그렇지만 사무린은 검을 들어야만 했다. 결코
상대가 호락호락 대답해 주지는 않을 것 같은 탓이다.
사무린이 검을 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뇌용이 다시금 추를 날렸다.
쇠사슬이 번개처럼 날았다. 사무린과 뇌용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지만 긴
쇠사슬은 그 거리를 단숨에 줄이기에 충분했다.
촤라락!
무서울 정도의 쇠가 감기는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쇠가 감기는 소리가 사뭇 온 몸
을 긴장케 했다. 사무린은 다시금 쇠마디의 틈에다가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런데 날
아오던 쇠사슬이 갑자기 물결처럼 일렁였다.
'앗!'
사무린은 급히 고개를 비틀었고 공중으로 솟구치는 추가 사무린의 머리 옆을 스치
고 지나갔다.
주르륵.
피했지만 스친 탓에 피가 흘러 내렸다. 아주 가까스로 스친 것뿐인데 쏟아지는 피
의 양은 적지 않다. 사무린의 부드러운 얼굴 선을 타고 피가 흘러 내렸다.
사무린은 앞에 있는 뇌용이라는 노인을 응시했다. 다시금 위로 치켜든 추를 빙빙 돌
리고 있었지만 눈빛은 마치 조롱이라도 하는 것 같다.
사무린은 손을 들어올려 상처가 난 부분을 살짝 만졌다. 가볍게 스친 것 같은데 꽤
나 상처가 싶다. 아마도 저 추는 일반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따끔하는 감각이 손가
락을 타고 미묘하게 온 몸으로 전해졌다.
사무린의 눈빛이 변했다. 처음부터 방심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죽이기에는 뭔가 석
연치 않아 살검을 휘두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탓에 지금까지 그녀는 뇌용을 향
해 제대로 공격을 하지도 않았다.
사무린은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손가락에 묻은 피가 어느새 검 손잡이로 옮겨갔다.
"주의하지 않는다면 내 추에 당하게……"
"시끄러워요."
솔개처럼 사무린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뇌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갑작스럽
게 거리가 좁혀져오자 뇌용은 추가 아닌 손바닥을 휘둘렀다. 쇠사슬이 길게 연결
된 탓에 가까이 다가오는 자를 상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탓이다.
뇌용의 주무기는 추이긴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이 같은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
다. 길게 연결되었으니 근접전에는 약하다.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뇌용은 장법에
도 꽤나 조예가 깊다.
뇌용의 손에서 장력이 쏟아지는 순간 사무린의 몸이 공중에서 빙글 돌았다. 재차 뇌
용의 손바닥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연속되어 쏟아지는 장법. 그렇지만 사무린의 몸
또한 그에 맞추어 변화를 보였다.
여덟 번의 변화를 보인 사무린의 신형을 보며 일순 뇌용은 그녀가 펼친 신법이 운룡
대구식(雲龍大九式)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어느 문파나 세가를 떠올리
던 간에 검법, 도법, 장법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곤륜하면 떠오르는 이름
은 검법도, 도법도, 장법도 아니다.
운룡대구식. 구름속에서 용이 노니는 듯 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운룡대구
식은 지금의 곤륜을 더욱 더 위상 있게 만들어준 무공인 셈이다.
곤륜을 대표한다는 무공인 만큼 대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무린이 펼친 신법 또
한 왠지 모르게 운룡대구식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빼어났다.
뇌용은 장법을 모두 피하고 떨어져 내리는 사무린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검으로
내려치는 걸 잡을 수는 없고 그렇다면 검을 움직이는 손을 노려야 한다.
팍!
사무린의 손을 팔꿈치로 쳐내면서 뇌용은 발을 내질렀다. 사무린의 단전을 노린 공
격이다. 그러면서 쇠사슬이 감겨 있는 손도 잡아 당겼다. 뒤에서는 추가 날아들었
고 앞에서는 발이 다가왔다.
사무린의 몸이 앞을 향해 다가왔다.
'역시!'
뇌용은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졌음을 느꼈다. 추와 발이 다가온다면 어느 곳을 향
해 움직이겠는가. 백 명한테 물어본다 한들 대답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무린 또
한 그리했다.
그리고 그것은 뇌용이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가까이 다가온 사무린을 향해 뇌용은 발이 아닌 무릎을 이용해서 공격했다. 앞으로
몸을 굽히고 있는 탓에 턱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정확하게만 가격한다면 이 싸움
의 흐름은 뇌용을 향해 흐를 것이다.
막 뇌용의 무릎이 사무린의 턱에 닿으려는 찰나 그의 균형이 무너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뇌용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가오던 사무린의 뇌용의 손에
걸린 쇠사슬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뇌용의 몸이 앞으로 쏠렸고 그 순간 사무린의 손
이 움직였다.
빠악!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검이 아닌 손잡이의 모서리로 뇌용의 얼굴을 정확하게 찍어
내렸다.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뇌용의 입안에 있던 이빨 몇 개가 부러졌다.
동시에 코와 입에서 많은 양의 피가 공중으로 뿜어졌다.
"큭!"
뇌용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검 모서리에 정확하게 얼굴이 가격 당했다. 이빨이 나간 것도
그렇지만 눈앞이 캄캄하다. 검에 베인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이다.
휘청거리던 뇌용은 가까스로 검을 피해냈다.
정신이 없는 탓에 어떻게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감으로 뇌용은 사무린의 검을
피하고 있던 것이다. 오랜 시간 단련 된 무인의 감이다.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 혀로 입안을 훑으니 뭔가 허전하다. 방금 전까지 있던 이빨들
이 사라졌으니 허전한 것이 당연하다.
혀로 짭짤한 피 맛까지 느껴진다.
고통은 곧 분노로 변했다.
"계집!"
분노한 뇌용을 보면서도 사무린은 침착했다. 살기가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양손으
로 쇠사슬을 들어 올린 탓에 두 무기가 부닥치며 불똥이 튀었다.
비단 불똥이 튀는 건 무기에서 뿐만이 아니다. 사무린을 바라보는 뇌용의 눈은 당장
이라도 화염(火焰)을 토해낼 정도로 이글거렸다.
살아생전 수많은 싸움을 해봤다. 생과 사를 바꾸는 싸움을 해본 적도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렇지만 이렇게 모멸감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다.
검도 아닌 검 손잡이에 얼굴을 맞았다. 이빨이 부러지고, 온 정신이 혼미해 질 정도
의 강한 충격. 느껴지는 고통을 봐서는 코뼈도 내려앉았다.
뇌용은 쇠사슬을 길게 잡고 휘둘렀다. 순식간에 사무린의 코앞으로 다가온 쇠사슬
은 빠르게 이마 부분을 스치며 지나갔다.
쇠사슬을 간신히 피한 사무린의 눈앞에 추가 다가왔다. 무게가 있는 탓에 꺾이며 들
어온 것이다. 피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에 사무린은 우선 검을 들었다.
두둑!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만약 무공을 익히기 위해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움직이
기도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 몸을 풀어둔 탓에 뼈가 쉽사리 고통의 비명
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묵직한 무게는……
'거리를 벌려서는 안 돼.'
쇠사슬에 달린 추와 사무린의 검의 간격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단숨에 좁히기에도 그 거리는 상당히 길다. 둘 사이에 거리가 벌어지면 유리한 것
은 뇌용뿐이다. 사무린의 검은 닿지 않지만 뇌용의 추는 충분히 다가올 수 있다.
굳이 단점을 안고 싸울 필요는 없다. 상대가 만만한 것도 아닌 이상 더욱 그러하다.
사무린은 뇌용이 쇠사슬을 돌리는 틈을 이용해 상대를 자세히 살폈다.
분명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기지 못할 상대 또한 분명 아니다. 강하
다. 하지만 도황만큼은 아니다. 쉽사리 볼 수 없는 상대임은 분명하지만 최고로 강
하지는 않다.
'거리만 잘 들어간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혈루검법의 중반부를 거의 다 익힌 사무린은 상대의 실력을 확실히 보고 있었다.
자개안(自開眼)의 묘리.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뜨라는 말.
자신에게 눈을 뜬다는 건 곧 상대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신을 안다는 건 곧
상대에 대해서도 안다는 것과 매한가지다.
사무린은 자만하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최선을 다한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무린이 날아드는 쇠사슬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뇌용 또한
뻗어져 나간 쇠사슬을 급히 잡아당겼다. 이번에도 추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린의
등뒤에서 다가왔다.
사무린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 공격을 기다렸다는 것이 옳다.
그녀는 몸을 옆으로 비틀었고 순간 추는 그녀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성공이야!'
사무린이 뇌용을 향해 몸을 날리려는 찰나 그녀는 무엇인가를 보고 말았다. 일순 뇌
용의 눈동자가 떨린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사무린은 아무런 이유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옆으로 날렸
다.
샤샥! 퓌잇!
그녀가 피하기가 무섭게 추에서 작은 침들이 터져 나온 것이다.
침들이 허공을 갈랐다. 매서울 정도의 소리가 터져 나온 후 사무린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다리 쪽과 어깨, 그리고 팔에 침이 박힌 것이다. 옆으로 비켜난 것은 현명한 선택이
었다.
비키지 않았다면…… 당장에 온 몸에 이 침이 박혔을 것이다.
옆으로 물러나면서 사혈을 가린 탓에 망정이지 그대로 온 몸을 침에 드러냈다면 죽
었을 게 분명하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침이 터져 나왔지만 사무린의 몸에 박힌 것은 이십 여 개 정도였
다.
방금 전까지 사무린이 있던 연무장의 바닥은 빽빽한 침으로 가득했다.
사무린은 호흡이 다소 거칠어졌다. 무릎을 꿇은 것은 독 때문이다. 침에는 소량의
독이 발라져 있는 모양이다.
사무린은 뇌용을 재빠르게 바라봤다. 그는 쇠사슬을 회수하고 있었다.
'침을 뺄까 아니면……'
사무린은 고개를 저었다. 침에 뭍은 독이 온 몸으로 퍼지고는 있지만 위험한 정도
는 아니다. 대부분의 침을 피한 탓에 몸에 박힌 숫자도 적었고, 그 침들에 묻어 있
는 독 또한 소량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자 사무린은 방금 전에 죽을 수 있었다는
걸 다시금 알게 됐다.
침에 꼬치가 되는 걸 떠나서, 저 많은 침에 묻어 있는 독이 온 몸으로 퍼졌다면 즉
사는 면치 못했다.
아무리 소량이라고 해도 저 정도의 침에 있는 것들이 모인다면 그걸 결코 적지 않
은 양의 독이다.
'끝내야 해. 이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
사무린은 몸에 박혀 있는 침을 그대로 두고 뇌용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막 쇠사슬을
회수하던 그는 놀라 버렸다.
침을 먼저 뽑고 나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한 탓이다. 저 정도의 무인이라면 그것에
독이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독이 있기 전에 이기겠다는 거다. 아니면 이 정도 독은 끄덕도 없다거나. 아무래도
전자 쪽이 납득이 가지만 후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뇌용은 회심의 기회였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 순간은 분명 절호의 기회라고 밖에 표
현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추는 사무린 옆에서 바로 침을 토해냈다.
평소였다면 끝났어야 옳다. 특별히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죽이지 않으라는 명도 없
었다. 아마 그 분이라면 죽였다고 해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갈 것이다.
그래서 살수를 펼쳤다. 침을 맞고 나서 바로 치료를 한다면 살 수도 있다. 그렇기
에 뇌용은 자신의 비장의 한 수를 들어낸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근처에 있는 의원을 불러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달려드는 사무린을 보며 뇌용은 쇠사슬을 들어올렸다. 마치 날개처럼 손을 벌리고
뇌용은 사무린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녀의 검이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빛살처럼 빠른 베기다.
뇌용은 몸을 낮추어 그 검을 피했다.
뇌용은 그대로 사무린에게로 다가갔다. 날개처럼 손을 벌리고 쇠사슬을 잡고 있었기
에 뇌용의 손이 사무린의 반대 허리까지 닿았다.
쇠사슬이 사무린의 배에 다가가면서 묶기라도 하려는 모양인 듯 동그랗게 말렸다.
사무린은 검 손잡이로 뇌용의 머리를 내려쳤다. 쇠사슬에 포박된다면 승부는 끝나
버린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파고든 탓에 환히 드러난 뇌용의 머리는 사무린에게는 절호의 먹이감이었다.
'당할 줄 아느냐!'
뇌용은 이미 그러한 공격을 예측했다. 또한 방금 전 이빨을 날려 버렸던 공격 또한
검 손잡이로 인해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뇌용은 자신의 몸으로 사무린을 밀어버렸다.
손을 휘두르려던 사무린은 공격이 실패할 거라고 느꼈다.
검을 움직이는 것 대신 그녀는 뇌용의 손을 올려쳤다. 그렇지만 쇠사슬을 감듯이 잡
고 있었기에 손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사무린의 배에 일순 충격이 몰려왔다.
강하게 조여오는 쇠사슬을 느끼며 사무린은 다시금 팔을 올려 찼다.
방금 전에는 실패였지만 이번에는 성공이다.
노렸던 부위가 달랐던 탓이다. 처음엔 쇠사슬을 놓치게끔 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그게 아니었다.
뇌용의 왼쪽 손과 오른쪽 손의 위치가 어긋나는 순간 틈이 생겼다. 사무린은 몸을
아래로 숙였다.
'아차!'
뇌용은 급히 쇠사슬을 다시금 조였지만 사무린의 머리카락 끝 부분을 잡는 게 고작
이었다.
'간신히 잡았…… 어?'
머리카락이긴 하지만 분명 잡았다. 그랬기에 한숨을 몰아쉬려던 뇌용은 아랫배에 무
엇인가가 틀어박히는 것을 느꼈다.
쇠사슬로 조이는 것과 동시에 사무린의 검이 닿을 수 없는 위치로 움직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붙들린 탓에 움직일 수 없었어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을 보고
야 말았다.
사무린은 머리카락이 잡히는 순간 전혀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비단 같은 머리카락
을 잘라 버린 것이다.
길었던 머리카락이 폭풍처럼 일렁거렸고, 기회를 잡은 사무린은 뇌용의 아랫배에 검
을 박아 넣은 것이다.
머리카락과 목숨,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는 자체가 우스운 거
다. 머리카락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목숨만 하랴.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에 그토록
쉽게 머리를 잘라 낼 줄은 몰랐다.
목숨이 머리카락보다 귀한 건 사실이지만 그토록 찰나에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
은 결코 쉽지 않다는 거다.
"흐……"
뇌용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사무린이 천천히 검을 뽑아냈다. 뇌용은 아무
런 말도 없이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봤다.
사무린은 일부로 검을 깊게 찔러 넣지 않았다. 상대를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
르는 상황인 탓이다.
사무린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 정도라면 누가 이겼는지 굳이 말할 필요가 없
다는 것을 표현으로 보여준 것이다.
뇌용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사무린이 깊이 검을 찔러 넣었다면 지금 허리
를 부둥켜안고 땅을 뒹굴어야 했을 것이다.
"왜 이러한 짓을 했는지 말해요."
"흐흐."
뇌용은 그저 계속해서 웃었다. 사무린은 검을 뽑아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 그의
목에 가져다 댔다.
"대답할 의사가 없다면 죽이죠."
사무린은 검을 들어올렸다. 뇌용은 사무린이 목을 단숨에 날려버리려고 하는데도 불
구하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순순히 목을 내어줄려는 듯 한 모습이다.
사무린은 대답할 것 같지 않자 그대로 목을 내려치려고 했다. 그녀의 검이 움직이려
고 할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사무린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연무장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놀라
지 않았다. 분명 기척도 느끼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는 탓이다.
사무린은 고개를 돌려 고개를 숙였다.
예상대로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린이었다.
"그 놈은 내가 보낸 놈이다."
"…… 어째서죠?"
"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었으니까. 도황을 죽인 것이 우연은 아닌 모양이
군. 뇌용을 이리도 쉽게 제압하는 것을 보니."
진린은 말을 마치고 사무린을 바라봤다. 무릎을 꿇고 있는 뇌용 또한 그를 올려다봤
다. 힐끔 뇌용을 바라본 진린은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볼 필요 없다. 널 죽이려고 한 건 아니었으니까."
"아까부터 보고 계셨겠죠?"
"그래. 처음부터 끝까지."
"그럼 아실 텐데요? 피하지 못했다면 전 죽었어요."
진린은 피식 웃었다. 사무린은 그러한 그를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죽었으면 네가 모자란 것이다. 그거 가지고 나에게 불만이라도 있다는 건
가?"
"아니요. 그런 건 없어요. 제가 이겼으니까요. 져서 죽었다면 모르지만 이겼잖아
요? 불만은 없어요."
"큭큭! 죽었다고 해도 불만을 가지지는 못했을 게야. 죽었으니까."
말을 마친 진린은 뇌용을 다시금 바라봤다. 그는 진린이 자신을 쳐다보자 고개를 돌
렸다.
"멍청하군."
"죄, 죄송합니다."
겉보기에는 진린의 나이가 훨씬 어려 보이는데 오히려 뇌용만이 존대를 했다.
진린은 자신의 품안에 있는 짧은 소도를 꺼내 사무린에게 던졌다. 갑작스러운 행동
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진린이 말했다.
"죽일 거냐, 살릴 거냐."
"예?"
"선택은 너에게 달렸다. 죽여도 되고 살려도 된다."
"……"
사무린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뇌용이라는 자를 죽이느냐 살리느냐를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닌가.
'왜?'
시험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문제다. 답을 도저히 모
르겠다. 죽이는 것이 답일까, 아니면 살리는 것이 답일까.
지금까지는 죽이는 것이 답이었다. 하지만 그건 문제라기 보다는 명령이었다.
"답을 내려. 벨 것이냐, 말 것이냐."
사무린은 계속해서 망설였다. 이것이 시험이라고 생각하니 그리 쉽게 답을 내릴 수
가 없었다. 진린은 망설이는 사무린을 보며 말했다.
"이 문제에 답은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것이다. 죽여도 좋고, 살려도 좋
다."
사무린은 검을 힐끔 바라봤다. 진린이 건네 준 소도는 뭔가 특이했다.
크기는 일반 적인 소도와 다를 바가 전혀 없는데 손잡이가 뭔가가 다르다.
그곳에 모양이 있다. 황금으로 그려진 용. 용이 또아리를 트고 하늘로 승천하려는
듯 한 모습이 검 손잡이에 새겨져 있다.
"…… 베죠."
말을 마친 사무린은 그 소도를 무릎을 꿇고 있는 뇌용을 향해 내려쳤다.
뇌용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검은 뇌용의 정수리에 있는 백
회혈에 꼽혔다.
그의 몸이 무너졌다.
사무린은 백회혈에 꼽은 소도를 다시 뽑아냈다. 피가 기다렸다는 듯이 솟구쳐 올랐
다.
"베었어요."
"냉혹하군. 후후. 좋다. 날 따라와."
진린은 몸을 돌려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무린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디를 가는지, 방금 전 그 뇌용이라는 자를 왜 죽이라고 했는지.
물어보고자 한다면 끝도 없을 거다. 그렇지만 그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입도 뻥긋하
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 마냥, 시키는 것만 하는 하인 마냥 그냥 그렇게
따랐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생각이 있어도 뜻을 표명한 적도 없다. 아
니, 못했다고 해야지 더 옳을 것이다.
무인의 긍지, 자부심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딴 것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목숨만 할까.
사무린은 그리 생각했다.
자존심을 세우던, 복수를 하던, 평생을 부귀롭게 살던 우선은 살아야 한다. 죽어서
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사무린은 그렇기에 진린에게는 무조건 수긍했다. 그가 무슨 명을 내리던 간에 사무
린은 그것에 따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무런 것도 묻지 않는 사무린처럼 진린 또한 아무런 것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진린은 그저 묵묵히 걸었다.
사무린은 긴장하고 있었다.
진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무린은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진린
이 이토록 어디를 데리고 간 적이 있었던가.
거처로 부른 적은 있어도 직접 어딘가로 데리고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묘한 일이다. 자신에게 뇌용이라는 노인을 보내어 싸우게 한 후 그를 죽이게끔 했
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다.
그저 어쩌다가 일어난 일이라고 보기에는 억지가 많다.
계획된 일일 게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가는 이 길이 그 계획의 종착점일 테고.
마교가 워낙 넓은 탓에 사무린이 가본 곳은 그 중 일부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
다 해도 마교의 구조 정도는 이미 도면(圖面)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사무린은 도면에 있는 주요한 곳들을 모두 외웠다. 그리고 이제는 눈을 감고도 마교
의 구조 정도는 어느 정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그렇지만 지금 진린이 향하는 곳은 도통 어디인지 모르겠다.
근처에 중요한 건물이 없는 탓일지도 모르지만 지도에서도 이 같은 부분은 보지 못
했다.
'이 부분은 지도와 나오지 않았어.'
조금의 오차라고 생각해도 될 게다. 이 정도의 차이라면 지도에서 약간의 오차가 난
다 해도 크게 트집 잡힐 문제는 아니다. 그렇지만…… 진린이다. 다름 아닌 이곳으
로 온 것이 진린이었던 것이다.
사무린은 이곳을 머리에 새기기라도 할 듯이 주변의 풍경을 하나도 빠짐 없이 담았
다.
건물이 없고 나무가 꽤 많다. 은근히 나무가 가리는 틈 사이에 공간도 있다.
그렇지만 뭔가 빽빽하다는 느낌이다. 사무린의 눈이 반짝였다.
'은밀하면서도 그렇지 않아. 진린이 가려고 하는 건 분명 이 근처야!'
사람이 없는 곳을 거닐던 진린은 근처에 있는 건물로 다가갔다.
집 크기는 그다지 크지도 않았고 또한 은밀할 거라는 생각과 많이 달랐다.
'내 생각이 틀렸나?'
뭔가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린은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안으
로 들어섰다.
전혀 조심하지 않는 행동을 보며 사무린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본
다면 그저 술이나 한잔하자는 듯한 모습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아니야. 내 생각이 틀렸을 리는 없어.'
술을 마시면서 이러한 곳에 올 턱이 없다. 비록 다른 곳에 비해 은밀하다고는 하지
만 겨우 그러한 것이라면 다른 곳에서 해도 충분하다. 정말 중요한 말이라면 전음
을 사용해도 될 것이고.
진린이 문을 열고는 사무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와라."
사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사무린은 주변을 살폈다. 별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방이
다. 간단히 생활할 물품 정도가 있고 침상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두리번거리는 사무린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진린이 말을 걸어왔다.
"너를 왜 이곳에 데리고 왔는지 아느냐?"
"…… 전혀."
"하나도 묻지 않더군."
"묻는다 해도 대답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더군다나 오면서 물어보
기에는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실 것도 같고요."
"큭큭, 여전히 말 하나는 잘 하는 군. 영리한 계집. 네 년의 그 세 치 혀는 정말 일
품이다."
진린은 사무린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던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 진린은 사무린을 죽이려 했지만 살려달라며 조건을 걸었던 그녀의 말 때문에
검을 거두었었다.
물론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그 이야기는 우스웠을 게다. 하지만 사무린은 무
공 또한 빼어났다. 그래서 진린은 그녀를 살려준 것이고.
"이걸 받아라."
진린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사무린에게 휙 하고 던졌다.
그녀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채고는 일순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황은 잠시, 사무린은 날아드는 그 물건을 받았다.
'이건……'
방금 전 뇌용을 죽일 때 사용한 소도다.
"갑자기 이걸 왜 주시는 거죠?"
"이 소도는 아까 네가 죽인 그 뇌용의 것이다."
"그게 무슨……"
사무린은 이 소도가 뇌용의 물건이라는 말에 의아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무기를 왜 자신에게 준다는 말인가.
"왜 그걸 네게 주냐고 묻고 싶은 게냐? 그럼 대답해 주지. 지금 네가 가야 할 곳은
그 소도가 없으면 출입을 할 수 없는 곳이지. 만약 그 소도도 없이 그곳을 출입하
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사무린이 아무런 대답도 없자 진린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즉사(卽死)다."
사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해 버렸다. 진린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
리고 또한 그녀의 예상대로 지금 어딘가를 가려고 하는 모양이다.
진린은 문 쪽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슬쩍 돌렸다.
문을 여는 듯 싶었는데 진린은 다시 사무린이 있는 침상 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는 침상 옆에 있는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드르륵.
그다지 크지도 않은 소리다. 설마 하는 순간 침상이 돌아갔고, 진린은 다시 문 쪽
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방금 전 슬쩍 만졌던 문고리를 다시금 건드렸다. 그러자 전
혀 이상이 없어 보이던 바닥이 약간 비틀려졌다.
진린은 문에서 손을 때고 걸어왔다.
"따라와라."
"그러죠."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사무린은 지금 상황을 놀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문고리를 수차례 만진 건 이유가 있어서였다. 아마 문고리를 만지지 않았다
면 바닥이 갑자기 뒤틀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래에는 꽤나 긴 계단이 있었다.
어두웠지만 앞은 분간이 갈 정도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일을 향해 다가가는 탓인지
숨이 턱하니 막힌다. 공기도 뭔가 텁텁하다. 지하인 탓인지 습기도 많다.
진린이 멈춘 곳은 벽이었다. 사방이 막힌 벽. 이곳에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그러는
건가 했거늘 다시금 진린의 손이 벽 옆면을 만졌다.
그르릉!
벽에 옆으로 밀려났다.
그리고는 길게 이어진 길 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진린은 말 없이 걸었고 사무린은 다시 그의 뒤를 쫓았다.
지하에다가 만들 길 치고는 상당히 긴 듯했다. 그렇게 아주 잠시 걷던 진린은 천천
히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에서 따라오던 사무린을 바라봤다.
"이곳에 들어온 후부터는 네 운명이 변할 것이다."
사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전혀 모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떠
한 다른 행동을 취할 수도 없다.
"부귀가 좋으냐? 네가 어렸을 때 가난했던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도 좋
다."
진린의 말에 사무린은 움찔했다.
'나에 대해서 조사를 했어!'
움찔했던 사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강해지고 싶겠지?"
"물론이에요."
"날 따른다면 그 모든 걸 주지."
"여태까지도 전……"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다. 너 같은 영특한 계집이라면 어느 정도는 알았을 텐데?
내가 너를 시험했다는 것을."
사무린은 서서히 진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여태까지는 견제를 하며 이용만 해 먹었지만 이제부터는 진정한 수하로 거두어들인
다는 말인 것이다.
그러한 사무린의 예상은 정확했다.
"원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얻게 해 주지. 돈, 명예, 권력, 힘. 원한다면 무엇이라
도 할 수 있게 해 주지. 이제부턴 넌 내 진정한 수하다."
"호호!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네가 배신을 하지만 않는다면."
"전 당신을 잘 알아요. 미치지 않고서는 배신을 할 리가 없죠."
"내 실력을 알면서도 배신을 하는 미친놈이 있어서 한 말이야. 방금 전 네가 죽였
던 뇌용도 그랬지."
"방금 제가 죽였던 그 노인이요?"
진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끊었다.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지."
말을 마친 그는 앞에 있는 문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댔다. 진린의 손에서 강한 내력
이 터져 나오는 순간 문이 소리를 토해내며 밀려났다.
그리고 열리는 문 틈새에서 빛이 쏟아졌다.
안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사무린이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 육십 이상은 먹어 보이는 노인들이다.
"호, 뇌용이 아니라 사무린이로군."
정말 평범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어 보이는 노인이 말했다.
그는 진린의 귀 역할을 하고 있는 좌운이다. 평범하게 생겼지만 적수를 찾기 힘든
무공과 엄청난 정보망을 지니고 있는 자.
안에 있는 사람의 총 숫자는 사무린과 진린을 제하고 다섯 명.
개중에서 사무린의 눈에 유독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나이가 많은 자가 대부분인
이곳에서 유일하게 사무린과 동년배로 보이는 무인이 한 명 있었던 것이다.
누군지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내다. 물론 이 안에 있는 사
람 모두 그건 마찬가지였지만.
좌운이 사무린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잘 듣거라. 이 안에서 있었던 그 모든 것은 극비다. 물론 알겠지?"
"알고 있어요. 저 또한 목숨을 함부로 버릴 바보는 아니니까요."
"잘 아는 군. 만약 입만 조금 꿈틀거린다면 그 다음날 넌 죽을 게야. 그건 자신할
수 있지."
사무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기습을 가하긴 했지만 도항까지 죽인 사무린이다. 그런 그녀를 쉽게 죽일 수
있다는 말을 앞에 있는 노인은 서슴지 않고 내뱉고 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평범하긴 하지만 그 노인의 몸에서는 강한 위압감이 터져 나왔다.
'고수야. 이 노인은.'
도황 못지 않은 고수다. 직접 손을 맞대면 도황보다도 강할 지도 모른다.
"내 이름은 좌운이라 한다. 알아두거라."
거칠어 보이는 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노년기에 접어드는 모습이지만 아직
은 장한의 호탕함이 더 두드러진 사내다. 그는 사무린을 보자마자 마음에 드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미모 탓이다.
"으하하! 내 이름은 장국광이라 한다. 생긴 거 하나는 마음에 드는 구나. 그렇지만
실력이 외모만큼 안 돼서는 안 될 게야."
장국광이라는 이름을 듣고 사무린은 무엇인가 문득 떠오르는 듯 했다.
어디에서 들어본 이름인 것 같은데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추요광부(芻撓狂斧)라 하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사무린은 놀라 버렸다.
연약하게 생긴 것과 달리 도끼를 휘두른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그게 다가 아
니다.
'추, 추요광부!'
미친 듯 도끼를 휘두르기로 유명했던 무인이 아니던가. 마교의 장로로 지금은 무림
에서 모습을 감췄다고 들었는데……
그제야 장국광이라는 자가 누구인지도 생각났다. 그 또한 마교의 장로 중 하나로 화
가 나면 얼굴이 붉어지기로 유명했던 무인이다.
남은 한 노인은 비대하게 뚱뚱했다. 지금도 무엇인가를 먹는지 입을 오물거리던 그
는 사무린이 쳐다보자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암영기(暗影氣)야."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무린은 좌운을 제하고는 전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
다.
비대한 몸집과는 달리 암영기는 은신술과 암기를 사용하기로 유명한 무인이다. 전
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그 위명만큼은 녹록치 않다.
'암영기가 저토록 뚱뚱할 줄이야……'
은신술이 빼어난 자가 뚱뚱하니 어쩐지 우습다. 오히려 차가운 듯해 보이는 추요광
부가 암영기에 어울렸고, 비대한 몸집의 암영기가 도끼로 유명한 추요광부에 어울렸
다.
현실은 반대였지만 척 보는 느낌으로는 그러했다.
대답을 하지 않은 건 사무린과 비슷해 보이는 연배의 사내뿐이었다.
그는 마교의 장로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사내는 찬찬히 입을 열었다.
꽤나 무거운 목소리가 입에서 빠져 나왔다.
"백무량이라 하지."
들어본 적이 없다. 사무린은 백무량이라는 이름은 전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좌운
은 은거기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지만 저 사내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
도 자신과 크게 나이 차가 나 보이지 않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습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마교의 장로나 알 수 없
는 위압감을 떨치는 자들이 아니던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백무량이라는 자는 실력이 입증 된 자다.
무공, 아니면 지략?
상계를 휘어잡은 사내라고 보기도 뭐하고……
날카로운 외모에 왠지 모르게 강하게 풍겨 나오는 기백.
무인이다. 무인이 아니고서야 이러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그렇지만 저러한 나이
에 이곳에 참여하고 있었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나이가 어린 건 나도 그렇지만……'
분명 둘 모두 나이가 어린 건 마찬가지다. 사무린은 채 서른이 되지 않았고, 그녀
가 보기에 백무량 또한 많아 봤자 삼십 살 전후일 것이다. 진린을 제외한 넷과 확연
한 차이가 보일 정도로 나이 차가 심하다.
그런데 흐르는 기류가 다르다.
사무린을 대하는 그들의 모습과 백무량을 대하는 모습이 다르다.
백무량은 이곳에 처음 온 것이 아닐 거라고 하지만 그 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사무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 공자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여쭈어 봐도 되겠나요?"
백무량은 사무린을 바라봤다. 사무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백무량의 눈을 보며 흠칫했
다. 별다른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인형이기라도 한 것처럼 표정도 없
다.
백무량은 진린을 힐끔 바라봤고, 그의 눈빛을 받은 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무량
은 진린의 대답을 듣고서야 말했다.
"흑색 기마대를 맡고 있다."
"다, 당신이 흑색 기마대의 대주라고요?"
"그래. 내가 흑색 기마대의 대주인 백무량이다."
숨이 턱하니 막혀온다.
사무린이 흑색 기마대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녀가 마교에 대해 알아보며 가장 흥
미로워했던 것이 흑색 기마대가 아니던가. 일반적인 무인들과는 달리 말을 타고 창
을 휘두르는 부대. 놀라운 건 그 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정식적으로 나서서 패한 싸움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교의 최후의 보루
라는 흑색 기마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금천멸문대보다 아래라고 평가되지만
마교의 수뇌부들은 오히려 흑색 기마대를 으뜸으로 친다.
더군다나 흑색 기마대의 대주는 마교의 교주조차도 정체를 모르기가 허다하다는
데……
그러한 사내가 지금 사무린의 눈앞에 있다. 사무린은 진린에 대해 생각하며 다시금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도대체 어떠한 자이기에 이 같은 인물들을 모아 둘 수 있다
는 말인가.
마교의 장로들도 그렇거니와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흑색 기마대의 대주까지……
"자 그럼 간단히 서로에 대한 통성명은 마쳤으니 이야기나 시작해 보지."
좌운의 말에 약간은 술렁이는 듯했던 분위기가 완벽하게 가라앉았다. 사무린은 좌운
이 가리키는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알다시피 이제 뇌용을 대신해 사무린이 저 자리에 앉게 되었네. 배신자의 말로는
죽음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되네."
사무린은 좌운의 말을 곰곰이 되씹었다. 아까 진린도 그런 말을 했었다.
배신을 하는 미친놈이 있다며 뇌용이라는 자를 지적했다. 뇌용은 배신을 하려던 모
양이다. 그는 그래서 사무린을 시험하라는 명목으로 왔다가 죽은 것이고.
그제야 왜 뇌용이라는 자를 그렇게 죽이라고 시켰는지 이해도 갔다. 그만한 자를 겨
우 그 정도 이유로 죽인다는 게 이상했던 것이다.
좌운은 그 말을 시작으로 이러저러한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현 무림의 정세에서 마
교에 대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사무린으로서는 낯선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좌운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좌운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때 진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내가 하지."
좌운은 진린이 일어나며 자신이 말을 하겠다고 뜻을 표명하자 자리에 앉았다. 진린
이 일어나자 모두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이 자리에 처음 참석하는 사무린은 모
르지만 다른 자들은 알고 있다.
그가 직접 말을 시작하겠다고 나섰다는 건 이 일의 경중이 대단히 무겁다는 말이라
는 것을.
진린이 입을 열었다.
"도망쳤던 소교주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 말에 사무린의 눈이 번쩍였다. 여태까지 들었던 대부분의 것들은 왠지 모르게 거
리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정작 그녀와 전혀 상관이 없을 듯한 이야기 였던 것이
다. 그런데 지금 것은 그렇지 않다.
마교의 소교주가 도망친 사건 또한 사무린도 잘 알고 있다.
"정말이십니까?"
먹는 것을 멈추고 암영기가 물었다. 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악양에서 악양유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더군. 아마도 엄백
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힘을 키우는 모양인데…… 후후. 우습지."
진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무량이 입을 열었다.
"악양유가라 하셨습니까?"
"왜. 관심이라도 있느냐."
"예. 재미있는 놈이 그곳에 있어서 말입니다."
"호오, 네 관심을 끄는 놈이 그곳에 있단 말인가?"
진린이 아는 백무량은 남에게 쉬이 관심을 주는 자가 아니다. 그런 그가 관심을 가
지는 자라니 궁금증이 치민다.
"그게 누구더냐."
"진군휘라는 잡니다."
"진…… 군휘란 말이지."
진린은 익숙한 이름에 천천히 말을 곱씹었다. 여운휘, 진군휘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것도 좌운에게 들어서 알지 않았는가.
소교주를 데리고 도망칠 때까지만 해도 이름도 몰랐던 자, 그렇지만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들으니 이제는 은연중에 진린 또한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떠한 자이기에 백무량까지도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왜 그러십니까?"
백무량은 진린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물었다. 진린은 피식 웃었다.
"그 진군휘라는 놈은 소교주의 일개 호위무사였던 놈이지. 원래 이름은 여운휘라 하
고. 마교에서 무공을 익힌 놈이야. 소교주가 마교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그놈
때문이지."
백무량은 몰랐던 사실에 흥미가 돌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것은
백무량 뿐만이 아니다.
사무린, 그녀는 여운휘라는 이름이 나오자 귀를 쫑긋 세웠다.
'역시 죽지 않았어!'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도망을 쳤다고 했으니까. 마교에서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
으니까. 그렇지만 반드시 살아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다음날 죽어서 나뒹굴 수도 있는 게 무림이 아니던가.
믿었지만 확답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살아있단다. 아직도 여운휘가 살아서 무
림을 횡행하고 있단다.
'호호! 죽어서는 안 되지. 암, 네가 그렇게 죽어서야 절대 안 되고야 말고.'
살아있다는데 신이 난다. 온 몸이 근질근질하는 것이 방금 전에 무공 훈련을 마쳤는
데 다시금 검을 휘두르고 싶을 정도다.
그 뒤로는 그 어떠한 내용도 듣지 못했다. 앞으로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이
야기를 나눴지만 사무린의 귀에 그러한 것들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여운휘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무린이 흥분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럼 이번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지."
말을 마친 진린이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사무린도 따라서 나가려 했지만
그때 옆에 있던 백무량이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어라."
"……?"
궁금했지만 사무린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진린이 나간 후부터 방안에 있는 사람
중 입을 여는 건 아무도 없었다. 진린이 나가고 일 각 정도가 흐르자 이번에는 좌운
이 나섰다.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정적.
다시금 일 각 정도가 지난 후에 추요광부가 나섰다.
그제야 사무린은 알아차렸다. 이들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하는 것이라는 것
을. 한 사람씩 일 각 간격으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그것을 의미했다.
암영기가 나가자 안에 남은 건 백무량과 사무린뿐이었다. 시간이 점점 흘러갔다. 그
리고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한 순간 백무량이 일어섰다.
그는 사무린을 보고 말했다.
"일 각 정도 후에 나와라. 그 전에는 나와선 안 돼."
"저기 잠시만요."
밖으로 나가려던 백무량은 고개를 돌렸다. 사무린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아까 뇌용이라는 자를 죽이던지 말던지 그건 자유라고
했어요. 전 그때 그를 죽였죠. 그런데……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죠?"
백무량은 품에서 소도 하나를 꺼냈다. 사무린에게 진린이 주었던 소도와 똑같은 물
건이다.
"네가 들고 있는 금혈검(金血劍)은 뇌용의 것이었다. 그건 알겠지?"
진린도 그리 말했는데 모를 리가 없다. 사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금혈검은 뇌용이 들고 이곳에 왔겠지. 그리고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금혈검 없이 참석한 자는…… 죽인다."
사무린은 말 없이 백무량을 바라봤다.
"이 정도 말해줬으면 알 것이다."
충분하다.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고, 또 그럴 맘도 없다. 진린은 시험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것 자체가 시험이었던 것이다.
백무량이 나가고 사무린은 계속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부터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여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길.
그렇지만 사무린은 이 길이 썩 마음에 들었다. 여태까지는 잘 닦여지지 않은 길을
걸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다. 든든한 뒷배경도 생겼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들
이라면 마교를 뒤집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 각 정도가 지났다고 생각한 사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긴 길을 통해 건물까지 이동한 사무린은 침상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진린을 발견
했다.
"무슨 하명(下命)하실 거라도……"
"더 강해지고 싶다고 말했지?"
"예. 물론이죠. 무인으로서 강해지려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좋아. 그럼 한 가지 제안을 하지. 내 제자가 되거라."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 진린의 입에서 빠져 나왔다. 사무린은 눈을 크게 떴다.
놀라운 탓이다.
"원치 않다면 제자가 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내 제가가 된다면 마교제일검(魔敎
第一劍)이 되게 해 주지. 어떠냐."
사무린은 진린을 바라봤다. 이 앞에 있는 자가 도대체 얼마만한 인물인지 감을 잡
을 수가 없다.
사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