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마수호대(斥魔守護隊)
뚝, 뚝.
초록빛이 감도는 나뭇잎에 위태하게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마침내 떨어져 버렸다.
아래에 고여 있던 물 위에 떨어진 물방울은 작은 파문을 일게끔 만든다. 폭풍처럼
비가 쏟아지고 난 후의 대지는 왠지 모르게 생기가 인다.
잎은 더욱 초록빛을 발하는 듯 했고, 땅도 숨을 쉬는 듯 부드럽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하을지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서울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닥쳤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치 며칠 간의 폭풍우가 거짓이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 날씨가 좋다.
모든 화를 뿜어낸 하늘은 푸르렀다.
"소저, 잘 주무셨소?"
외침에 가까운 소리에 하을지는 고개를 돌렸다. 운빈이 문을 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날씨가 개인 것이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하하! 그렇소? 날씨가 개니 왠지 마음도 환해지는 기분이라서 말이오."
"다른 분들은요?"
"뭐, 다들 일어나 있소. 특히 진군휘 그 자는 도통 자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무
슨 괴물도 아니고."
말을 마친 운빈은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비가 심하게 쏟아지는 오일 가량을 계속해서 같이 보냈거늘 자는 것을 본 적이 없
다. 운빈 또한 잠이 많은 편이 아니다. 그는 한동안 떠돌이 무인이었다. 습격을 받
은 적도 많았던 탓에 항시 긴장을 해야만 했다. 물론 잠을 많이 잘 여유 따위도 없
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그만한 수준이 아니다. 운빈이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언제나 그도
깨 있었다.
독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편히 쉬어도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몸을
편안케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무공을 연습하기 위해 밖
에 나가는 것은 그 뿐이다.
아니, 그러한 여운휘의 모습은 가만히 있던 백산 또한 빗속으로 뛰어들게끔 했다.
가만히 서서 밖을 바라보던 두 무인은 순간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스럭거
리는 소리에 둘이 반응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추레한 거지 한 명이 나타났
다.
이곳에 있는 동안 그들을 책임지는 반개 철혈우다.
"무엇들 하는 가."
"아, 날씨가 좋아서 잠시 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 어쨌든 잠시 모여야겠군. 광한검 누남천 어르신이 오고 계시네."
"오신 건가요?"
"그래. 금방 도착하실 듯 하더군. 비 때문에 조금 늦어지신 모양이야."
말을 마친 철혈우는 성큼 위로 올라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밖을 살피고 있던
운빈과 하을지 또한 문을 닫고 그의 뒤를 쫓았다.
반개 철혈우는 거침없이 걸어가더니 백산과 여운휘가 있는 방문을 열어 젖혔다. 안
에 있는 두 사람은 모두 담담하게 그를 바라봤다.
'똑같은 놈들.'
둘 다 무신경하게 힐끔 철혈우를 바라보고는 곧 신경을 끊어 버린 것이다. 아, 그나
마 백산이라는 자는 가볍게 인사라도 건넸으나 여운휘는 그렇지 않았다.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에 잠시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철혈우는 입을 열었다.
"곧 누남천 어르신이 올 게야."
둘은 짜기라도 한 듯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한 둘을 바라보던 철혈우가 잠시 머뭇
거리며 물었다.
"넷 중 누가 천객이 되었나?"
"내가 됐소."
백산이 말했다. 낮은 저음의 목소리다. 뭔가 침울한 듯 해 보였지만 철혈우는 그것
에 대해 더 묻지는 않았다.
"그럼 다들 날 따라오게. 꽤 많이 움직여야 할 거야."
방 안에 있던 백산과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둘은 밖에 있는 운빈과 하을
지와 함께 철혈우를 따라서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거처를 벗어나 철혈우는 산 아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취팔선보(醉八仙步)가 그의
발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그런 철혈우의 뒤를 네 명의 무인이 바짝 쫓았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신법을 펼쳤지만 그 누구도 뒤쳐진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비를 잔뜩 머금은 탓인 지 땅은 부드러웠다. 그들의 몸이 마치 바람이라도 된 냥 부
드럽게 움직였다.
약 한 시진 가량을 달렸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호흡이 가빠질 정도였지만 다섯 모
두 일정 수준 이상의 무인 이였기에 얼굴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멈춘 것은 산 아래에 있는 어떤 장원이 있는 곳에서였다. 장원은 거대했다.
온 몸이 위축될 정도로 그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철혈우가 고개를 돌려 넷을 순서대로 바라봤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제부터 조심해서 따라오게."
말을 마친 철혈우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쉬익! 쉬익!
연달아 다른 넷의 몸 또한 철혈우를 따랐다. 밖에서 봤을 때도 거대했지만 전각(殿
閣) 위를 달리며 바라보니 그 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전각들 위를 넘으
면서 다섯은 은밀히 움직였다.
깊이까지 들어간 철혈우의 신형이 갑작스럽게 뚝 떨어져 내렸다.
철혈우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손짓했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
지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들도 전각 위에서 아래로 내려섰다.
"이 안에 계시네."
말을 마친 철혈우는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네 명은 천
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고 철혈우는 모두가 안으로 들어서자 문을 닫았
다.
방 안은 어두웠다. 그렇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확 하고 사방이 밝아졌다.
"왔는가."
불이 밝혀지는 순간 보인 것은 누남천이었다.
누남천의 양옆에는 흑색 옷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두 명의 무인이 있었다. 이 안
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은밀한 자들이다.
백산은 그 둘을 보며 만만치 않다고 느꼈다. 복면을 한 탓에 누구인지는 모르겠지
만 저만한 실력자들이라면 결코 쉽게 볼 수 없다.
"그래 천객은 누가 되었는가?"
방금 전 반개 철혈우가 물었던 질문이다. 이번에도 백산이 답했다.
"나요."
"백산 자네가 천객이 되었는가? 어떤 식으로 정했는지 물어도 되겠나?"
"무공으로 정했소."
"무공으로?"
의외라는 듯한 눈이다. 누남천은 자신도 모르게 여운휘를 바라보고야 말았다. 무공
으로 정했다면 누남천의 생각대로라면 여운휘가 되었어야 옳다. 백산 또한 강한 무
인이기는 하지만 누남천이 보기에는 결코 여운휘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수황과의 일전, 흑색기마대와의 조우에서 결코 밀리지 않았다. 부끄럽지
만 누남천 또한 겨루어 이긴다고 자신 할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무공 대결으로 했는데 여운휘가 아니라 백산이라? 선
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백산이라는 자가 여운휘를 이길 정도의 고수였나 하는 의문
이 누남천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런 누남천의 생각을 알아차린 백산이 먼저 말했다.
"진 공자는 애초에 천객을 뽑는 자리에 끼지 않았소."
"끼지 않았다고?"
"천객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 하여 지객을 하겠다며 겨루지도 않고 물러섰소."
"하하! 역시 진군휘 자네답군 그래!"
누남천은 이해가 갔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 또한 여운휘가 천객을 하지 않으
려 할거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누남천은 여운휘를 보며 말했다.
"진군휘 자네는 앞으로 백산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데 그걸 감수(甘受) 할 수 있겠
나?"
"걱정 마시오."
짤막하게 대답한 여운휘는 누남천의 앞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누남천의 양옆
에 있던 흑의인들이 움찔했지만 누남천이 조용히 손을 들어올리자 그들은 아무런 행
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 둘은 내 명령만 듣는 직속 수하들이네. 정체는 말해주기 뭐하고…… 어쨌든 믿
을 수 있는 자들이라는 건 확실하지."
누남천은 양옆에 있는 두 흑의인에 대해 소개하고는 서 있는 나머지 셋을 향해 손짓
을 했다.
"자네들도 와서 앉게. 앉으라고 이토록 의자도 숫자에 맞추어 준비했는데 그토록
서 있으면 무엇들 하는가."
셋은 포권을 취해보이고는 의자에 다가와 앉았다.
누남천은 네 명 모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모든 게 준비가 됐네. 이제 곧 자네들은 움직여야 할 게야."
"벌써 말이오? 준비가 모두 끝나기에는 시간이 조금 이른 것 같은데……"
"백산 자네의 말 대로네. 아직 완벽하게 모든 게 끝나지는 않았지. 지금 자네들의
밑으로 들어갈 숫자는 칠십 여명 정돌세. 그리고 일이 진행됨에 따라 거사를 치를
때쯤 되면 백 명 정도는 될 것이야."
방안에 있는 그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만큼 무게가 있는 이야기였
던 것이다. 누남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거사는 보름 후. 척마수호대(斥魔守護隊)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자네들은……
정파 무림의 희망일세."
찌르르. 찌르륵!
산새의 울음소리가 온 산에 가득하다. 귀청이 따가울 정도로 각양각색의 새들이 울
어댔다. 산 또한 초록빛 물이 넘실거린다. 봄이다. 아니, 이제는 여름이 더 가깝다.
어쩔 때는 땀이 날 정도로 덥기까지 하니.
사람의 출입이 드문 듯 산에서 인적을 찾기란 상당히 어려웠다. 그러던 중 풀과 나
뭇잎처럼 녹색 경장을 입고 있는 여인 하나가 산 가운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근처 개울가로 가 가볍게 얼굴을 씻어냈다. 녹색 경장을 입은 여인은 주변
을 둘러보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 전 악양유가에 갔다가 돌아온 녹포괴존이었다.
그녀가 거처에 돌아온 지 대략 보름. 녹포괴존은 보름 간 아무런 생각도 없이 푹 쉬
기만 했다. 여운휘의 오행검법을 보고 흥분했던 마음도 이제는 누그러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과한 반응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니 확실히 시간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다.
"날씨 한 번 좋군."
하늘을 올려다보며 녹포괴존이 말했다. 답답한 마음도 한순간에 날려 버릴 정도의
날씨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비틀었고 그때마다 뼈마디들이 비명을 질렀다. 우두둑거리는 소
리를 한참 내던 녹포괴존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발을 돌려서 걷기 시작했다.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녹포괴존이 사는 곳은 바로 이 산이다. 그리 크지는 않은 산이지만 산세(山勢)가 험
하지 않고 그 모습 또한 절경이다. 여름에는 산새들이 가득하고 겨울에는 소복하게
쌓인 눈이 아름답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탓에 근방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제하고는 아무도 이 산을 찾
지 않는다. 그것이 녹포괴존을 이곳에 머물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산 중턱에 집 한 채가 있었다. 방 하나에 주방이나 딸린 정말 작은 집이었다. 녹포
괴존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겉에서 본 것처럼 안 또한 간략하기 그지없었
다. 녹색 경장 몇 벌과 간단한 물품들만 방안에 있는 게 고작이다.
녹포괴존은 다시 문을 열고 주방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무림에서는 한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지만 실상 녹포괴존의 생활은 평범한 사람
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가 원체 사람들이 많은 곳에 섞여 사는 것을 싫어하
는 탓도 있었지만 이것저것 해야 할 것도 있는 탓이다.
식사를 마친 녹포괴존은 밖으로 걸어나왔다.
펄럭.
녹포괴존의 긴 소맷자락이 펄럭였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장법이 있다. 천하제일
의 장법이라고 칭해지는 것 또한 몇 가지 있다.
개방에는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이 있고 소림에는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이 있
다. 무당의 장법인 십단금(十段錦)은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우면서 또한 파괴적인 장
법으로 유명하다.
그 뿐이랴. 다른 문파들과 세가들 또한 자랑스럽게 선보이는 장법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십단금이 파괴력이 있다고 하지만 녹포괴존의 마화혈장(魔火血掌)은 그에 못지 않
다. 오히려 빼어나다고 그녀는 자부한다.
한동안 녹포괴존은 미친 듯 움직였다. 소매만 펄럭이더니 급기야는 옷 전체가 바람
이라도 가득한 것처럼 팽팽해졌다.
미친 듯이 움직이던 녹포괴존의 몸이 멈췄다. 그리고……
스르륵!
움직임이 매우 부드럽다. 은밀하면서도 빠르다. 녹포괴존은 누군가가 주변에 있다
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구냐."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됨이 없다. 당당하게
어느 한 곳을 녹포괴존은 바라봤고, 그곳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녹포괴존은 상대를 보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중?'
우습게도 상대는 중이었다. 그런데 얼굴이 상당히 붉다. 중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다혈질 스러웠기에 녹포괴존은 흥미있는 듯 상대를 바라봤다.
"호오, 요즘에는 중도 사람을 죽이고 다니나?"
"녹포괴존이오?"
"그래. 내가 녹포괴존이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을 하는 녹포괴존을 보며 붉은 얼굴의 중은 내심 감탄했
다. 그 또한 무공을 익힌 자답게 상대가 어느 정도의 무인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
가 본 녹포괴존은 끝이 없다는 거다,
전혀 굽히지 않을 듯한 당당함 또한 마음에 든다.
"용건이나 말하시지. 날 죽이러 온 거라면 살수를 펼치던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난 당신에게 해를 끼치러 온 것이 아니오."
"그런데 왜 쥐새끼처럼 남의 무공 훈련을 훔쳐 본 거지?"
"이곳에 당신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는데 마침 그때 무공을 훈련하고 있었던 것
이니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하오이다."
녹포괴존의 날카로워졌던 눈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중이 살심
(殺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던 탓이다. 겉보기에는 다혈질적으로 보이나
그리 쉽게 흥분하는 편도 아닌 듯 했다.
녹포괴존은 퍼뜩 무엇인가가 생각나 물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누구에게 들었다고 했는데?"
"그렇소. 내가 아는 지기가 당신이 이곳에 있다고 말해주었소."
"뭐?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 사람은 없을 텐데."
"만약 그랬다면 내가 어떻게 이곳을 찾아올 수 있겠소?"
녹포괴존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곳에 거처를 두고 있다는
걸 아는 건 암황과 도황 뿐이다. 하지만 이미 도황은 죽었고 암황 또한 만난 지 얼
마 되지 않았는데……
그 두 개 모두 아니라면 답은 하나 뿐이다. 누군가가 녹포괴존을 찾기 위해 정보망
을 가동시킨 것. 그녀를 찾을 정도의 자면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다.
녹포괴존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가 가르쳐줬는지 대답해 줄 수 있겠지?"
"물론이오. 당신도 잘 아는 도황이 이곳을 가르쳐 줬소."
"뭐, 뭐라고? 도황?"
녹포괴존이 되묻자 적안(赤顔)을 가진 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알기로 도황이 죽은 지는 꽤 오랜 시간
이 흘렀다. 그런데 그가 이곳을 가르쳐주다니……
"도황은 얼마 전에 죽었다."
"알고 있소."
"그런데 죽은 그가 가르쳐줬다? 나랑 지금 농담짓거리나 하자는 거냐!"
쾅!
그녀의 소매에서 터져 나온 바람이 중의 바로 옆에 있는 나무를 때렸다. 장정 두셋
은 달라붙어야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나무가 천천히 뒤로 넘어지기 시작
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이실직고하렷다. 네 놈이 도황을 죽인 놈이냐?"
"아니오. 나는 부처를 모시는 몸. 살생을 하지 않소."
"그렇다면 도황에게 들었다는 건 무슨 말이지?"
"그가 나에게 전해 준 서찰이 있소.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녹포괴존에게
전달해 달라던 서찰이 말이오."
"서…… 찰?"
그 말은 곧 도황은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
리 이 중에게 서찰을 건네 두었다는 말이고……
누군가가 노리는 걸 알면서도 도황이 당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방심을 해서 당
한 것도 아니고 알면서도 당하게 될 정도라면 상대의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의
미한다.
중이 품안에 있는 서찰을 꺼내 녹포괴존을 향해 뻗었다.
잠시 상대를 응시하던 녹포괴존이 중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서찰을 받아들어 펼
쳤다.
천천히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 이럴 수가!'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렸다. 온 몸에 소름이 오싹 돋는다. 그리고 도황이 죽은 것 또
한 이해가 가버렸다.
서찰에서 눈을 땐 녹포괴존은 중을 바라봤다. 서찰에 이 중에 대해서도 가볍게 적
혀 있었다. 붉은 얼굴을 가진 중이 이 서찰을 전해줄 거라는 말.
"적불…… 윤개?"
"그렇소."
"그럼 당신이 바로 그……"
"부끄럽소만 혈불(血佛) 나한(羅悍)이 바로 나요."
"죽은 줄 알았는데."
"나무아미타불. 부처님의 자비로 목숨만은 건졌지요."
혈불 나한이라면 현 무림에서는 죽은 걸로 알려진 마두 중 하나다. 손속이 잔인하
며 중이면서도 살생을 하여 파계승(破戒僧)이라 불리던 그는 우습게도 소림의 제자
였다.
그 탓에 소림에서 그를 죽였다고 들었는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안 되는 군."
"운이 좋았소이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나는 혈불 나한이 아니도. 적불 윤개라 불
러주시오."
"좋아. 도황이 아무나 사귈 녀석은 아니니까. 혈불 나한이던 적불 윤개던 당신 또
한 뭔가 사귈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그나저나…… 당신은 이 서찰의 내용을 읽어봤
나?"
"읽을 리가 없잖소.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소. 그 서찰에는 엄청난 내용이 적혀 있
다는 것 정도는 보지 않아도 알 듯 하오. 녹포괴존이라는 당신 또한 놀랄 정도라면
그 무게가 결코 적지 않을 터니까."
적불 윤개가 쉽사리 알 정도로 녹포괴존은 서찰을 본 후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놀랄 수밖에 없다. 그 서찰의 내용을 읽었다면 그녀가 아닌 그 누구라 할지라도 마
찬가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암황에게 연락을 넣어야겠어.'
시급한 문제다. 암황이 안다해도 당장에는 해답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 서찰의
내용이 정말 사실이라면 마교를 되찾는다는 건 꿈 같은 소리에 불과하다.
서찰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고 있지만 결코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도황
이 죽을 이유 또한 없다.
녹포괴존을 이토록 놀라게 하고 도황이라는 강호십일객 중 하나를 손쉽게 죽여버린
자.
천하에 그럴만한 자는 단 하나 밖에 없다.
'일마(一魔), 결국 이빨을 들어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