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37)

행동(行動) 

해시정(亥時正). 

꽤나 늦은 시간이거늘 네 명의 무인이 한 걸인의 안내를 받아 산을 오르고 있었다. 

거친 경사를 마치 나는 듯 무인들은 움직였다. 

꽤나 단련되었다는 소리다. 

한 명 한 명이 마치 솔개 같다. 거친 산을 타면서도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모 

두의 눈이 앞서 달려가는 걸인의 등에 박혔다. 

걸인이 갑작스럽게 다리를 멈췄다. 

손으로 입 주변을 누른 채로 걸인은 소리를 뱉어냈다. 

우엉……! 우우엉! 

이번에는 부엉이 소리다. 

어제까지만 해도 산새소리로 밀마를 표시했는데 지금은 부엉이 소리다. 

철혈우는 고개를 돌려 씩 웃으며 말했다. 

"밤에는 역시 부엉이지." 

이미 누남천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방안에 들어선 오인은 모두 누남천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리를 잡고 나서야 누남천이 입을 열었다. 

"그래, 마음들은 정했는가?" 

"정했소." 

백산이 대답했다. 

누남천은 한 사람씩 일일이 바라봤다. 맨 처음 향한 것은 여운휘였다. 하겠다고 말 

은 했지만 아무래도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여운휘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남천은 변하지 않은 그의 마음을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 후로 나머지 삼인의 

말이 이어졌다. 

"하겠소." 

"저도 할겁니다." 

"저 까지 동참하면 전원이겠네요?" 

백산이 시작해서 모두가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누남천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 

다. 

"대략 너희의 밑에 들어갈 숫자는 이백 가량이다. 우리 또한 흑색 기마대와 비슷한 

체제로 너희들은 백부장 정도의 위치다.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림맹에 

서는 이 일에 전폭적인 지지를 할 것을 약속하마." 

"그럼 저희는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 거죠?" 

하을지가 물었다. 

누남천은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다." 

누남천의 손가락이 대파산을 가리켰다. 그리고 천천히 지도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사천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그의 손가락이 청해를 지나 신강에 이르렀다. 

"여기가 마교. 사천은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지만 마교와도 가깝지." 

"설마 마교를 공격하라는 거라면 난 방금 했던 말을 취소하겠소." 

"백산, 우리가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일 턱이 없지 않은가. 

백산의 말 대로다. 

아무리 정예라고 해도 이 백으로 마교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다. 몇 

만에 가까운 마교를 이 백이라는 숫자로 공격한다 한들 어떠한 피해를 줄 수 있겠는 

가. 

그건 개죽음이다. 

"너희들이 할 것은 마교와의 전면전보다는……" 

누남천의 손이 잠시 움직이다가 멈췄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 무엇이 있는 지 아나?" 

"만금산장이죠." 

"바로 맞췄네. 이곳에는 만금산장이 있지." 

하을지의 말에 누남천은 바로 대꾸했다. 그녀의 말대로 누남천의 손가락이 멈춘 곳에 

는 만금산장이 있다. 

"난 이곳과 많은 연이 있지. 내 가장 친했던 지기인 탈백검 장명이 이곳에서 죽은 

건 알고 있을 게야. 그리고 흑색 기마대를 만난 것도 이곳이었지." 

탈백검 장명이 만금산장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무림맹 

에서 보냈던 건곤대가 궤멸했던 일은 이미 무림에서 널리 알려졌다. 

누남천이 흑색 기마대와 조우했던 것은 어제야 안 사실이고. 

"마교와의 싸움은…… 이제 피할 수 없지. 흑색 기마대는 장강수로십팔채의 하나를 

쳤네. 그러니 우리 또한 마교의 힘을 줄여야 할 필요가 있지." 

"만금산장을 치시겠다는 말인가요?" 

"아니, 굳이 그건 아니지. 만금산장과 같은 마교의 수족(手足)들을 잘라 버리자는 말 

일세." 

누남천은 지도를 벽에 걸고는 하나씩 집기 시작했다. 

"이곳, 그리고 이곳. 그리고 이곳." 

청해에 하나 감숙에 둘이다. 

그곳은 마교의 뿌리들이 세력을 확장한 채로 나름대로 돈, 그리고 필수품들은 보급하 

고 있는 곳들이다. 

"이 세 군데를 성공적으로 잘라낸다면 마교에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게야." 

마교는 어마어마한 수의 무인을 보유하고 있다. 무림맹과 마교가 격돌한다 치면 승산 

은 육대 사다. 마교가 우세하다는 것은 누남천 또한 인정하는 바다. 

그렇지만 이 세 군데만 잘라낸다면 승산이 있다. 

운이 좋다면 오 대 오까지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우리들은 우선 이곳을 공략할 생각이야." 

감숙성에 있는 곳이다. 그곳은 세 군데 중에서 가장 마교와 위치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나름대로 첫 임무인지라 도주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쉽지는 않을 게야. 분명 마교 또한 우리의 움직임을 읽겠지. 최대한 모르게 다가가 

서 공격을 할 셈이네." 

누남천은 지도에서 고개를 돌리고 모두를 한 번씩 바라봤다. 

"이곳을 공격함으로 우리 부대의 창궐을 알리게 될 거다. 절대 패해서는 안 된다. 만 

약을 위해 도주로는 만들어 놨지만 그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흑색 기마 

대 같은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는 결코 패배를 해서는 아니 된다." 

누남천은 주먹을 쥐었다. 

해야 할 일은 많지만 시간은 없다. 조직을 제대로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기를 

놓쳐서도 안 된다. 

"선포한다. 우리 척마수호대(斥魔守護隊)는 오늘, 지금 이 시간부터…… 궐기한다." 

이야기가 끝난 후 누남천을 위시한 육 인은 이틀 가량을 움직여 어느 산에 이르렀다. 

산을 오르던 와중 반개 철혈우는 여운휘를 힐끔 바라봤다. 흑색 기마대에 대한 정보 

는 개방에도 없다. 개방이 가지고 있는 흑색 기마대에 관한 정보는 일반적으로 알려 

진 것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묻고 싶은 게 많다. 

알고 있는 게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으로도 족하다. 

어떠한 것 하나를 알게 되면 그것을 이용해 여러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작은 단서 

하나라도 개방의 손에 넘어가면 결코 작다고 볼 수 없다. 

결정이 내려진 순간 방에 있던 여섯 모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장에 움직이는 건 아니다. 흑색 기마대는 대주, 백부장, 십부장, 그리고 일반 적 

인 무인들로 나뉘어져 있다. 그들을 나누는 것은 바로 갑주 위에 새겨진 숫자인 셈이 

다. 

척마수호대 또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호칭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흑색 기마대의 대주라는 호칭은 척마수호대에서는 천객(天客)이다. 

백부장 정도의 무인들을 지객(地客). 십부장을 가리켜 풍객(風客)이라 하며 일반 적 

인 무인들은 월객(月客)이라 부른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그들에게 나누어줄 옷에는 천, 지, 풍, 월이라는 글자가 새겨지 

게 된다. 

지금 뽑힌 네 명은 척마수호대가 정비되는 동안 같은 곳에서 지내야 한다. 긴 시간 

은 아니지만 그 기간은 결코 소홀히 보낼 수 없다. 

한 배를 젓는 사공들이 마음이 달라서는 안 된다. 

배를 젓는 사공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노를 젓는다면 그 배는 백 날이 지나도 그 

근처를 벗어 날 수 없다. 

전에는 어떤 사이였다 해도 한 배를 탄 이상 서로 도와야 한다. 

시간이 다소 늦긴 했지만 사람의 흔적이 없다. 근처에 마을도 없는 것을 보아 사람 

의 발길이 뜸한 산임이 분명하다. 

산을 타기 시작한 지 두 시진 가량이 지난 후에 누남천이 멈췄다. 

앞에는 한 채의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의 나무가 모두 잘려져 연무장의 모습 

을 하고 있었다. 

"다 왔군." 

"이곳이 우리가 잠시간 머물러야 한다는 그곳입니까?" 

운빈의 말에 누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변변치 않아 보이는 장소다, 운빈으로서는 지금의 거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어 

도 목숨을 거는 일을 맡게 된 지금 겨우 이런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울화도 치솟 

는다. 그것도 한 무리의 수장이 될 그가 아니던가. 

누남천은 운빈의 표정에서 나름대로의 생각을 읽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는 시비가 가져다 줄 게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건 다행이군요." 

운빈이 이죽거렸다. 

누남천은 그를 깨끗이 무시하고 해야 할 말을 다시금 하기 시작했다. 

"네 명은 이곳에서 내가 연락을 주기 전까지 머물러야 하네. 자네처럼 풍객과 월객들 

도 이미 대충 다 뽑아 두었으니까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게야. 지금쯤 대충 

가지치기도 되었을 테고." 

가장 중요한 지객을 뽑는 것은 누남천이 담당했지만 그 외의 일은 그의 소관이 아니 

다. 

"그 동안 너희들은 이곳에서 나름대로 친분도 쌓고 있으면 되는 게야. 무공 훈련 또 

한 게을리 하지말고. 그리고……" 

누남천은 말을 끌었다. 

한눈에 그가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희 넷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명령을 내리는 거야 우리 무림맹 쪽의 장문인 

이시겠지만 모두를 이끌 천객을 뽑아야 한다는 거야." 

"천객이라면…… 흑색 기마대로 치면 대주잖아요. 그런 자를 우리 중에 뽑는 건가 

요?" 

"애초부터 천객과 지객을 맡는 것이 너희 넷이었지. 한 명은 천객이 되야 하고 나머 

지 셋은 그 아래의 지객이 되야 해." 

"그걸 어떻게 뽑으라는 거죠?" 

"그거야 너희 마음이지." 

누남천의 말에 모두가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어떠한 대안도 제시해주지 않고 무턱대고 마음대로 라니. 말수가 적어 웬만한 일에 

는 끼여들지 않는 백산이 물었다. 

"아무런 방식도 괜찮다는 거요?" 

"그래. 이야기를 해서 하던지. 아니면 무공이나 지모(智謀)를 겨뤄도 되겠군. 정 안 

되면 주사위를 던져서 뽑는다고 해도 상관은 하지 않겠네." 

"…… 진담이오?" 

"내가 쓰잘데기 없는 농담이나 지껄인 사람으로 보이는가? 내 말인즉슨 어떤 식으로 

라도 좋으니 수긍할 수 있게 천객을 뽑으라는 말이네." 

천객을 뽑는 건 중요한 일이다. 무림맹 맹주의 지시를 받긴 하겠지만 척마수호대의 

최고의 직위를 가지게 되는 일이 아니던가. 

당연히 천객이 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누남천은 아무 

렇게나 하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다. 

누남천은 말했다. 어떤 식으로도 좋으니 수긍할 수 있게 천객을 뽑으라고. 

"그럼 난 이만 내려가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연락을 주도록 노력하겠네. 내가 없 

는 동안 필요하거나 급한 일이 있다면 이 친구에게 맡기면 될 게야." 

누남천은 반개 철혈우를 가리켰다. 

그는 씨익 웃었다.

방에 들어선 운빈은 침상에 짐을 던지며 몸을 날렸다. 

절묘한 몸놀림임이다. 그의 몸이 공중에서 몇 차례의 변화를 보이더니 침상으로 떨 

어져 내렸다. 고작 침상으로 움직이기 위해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빼어난 신법이다. 

뛰어 오르며 침상에 몸을 날렸건만 흔들림도, 조그마한 소리도 없다. 착지 또한 완 

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천히 여운휘와 백산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단 두 개다. 남자가 사용할 방과 여자가 사용할 방. 

여자는 하을지 뿐이니 그녀는 혼자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반면 남자의 수는 셋이 

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반개 철혈우가 이곳에서 지내지 않는다는 거다. 만약 그 또한 이 

방 안에서 생활하게 되어 있었다면 악취가 진동을 했으리라. 

운빈은 침상에 누운 채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자가 쓰는 방보다는 컸지만 이것 

도 성이 차지 않는다. 침상 세 개와 탁자가 전부인 방이다. 

'해도 너무 하는 군.' 

운빈은 사치벽이 있다. 그의 옷은 항상 호화스럽고, 숨겨진 부분에는 장신구 또한 

많다. 그 탓인지 이러한 곳에서 생활하게 된 지금이 운빈을 짜증나게끔 했다. 

"이거 너무 하는 것 아닌가?" 

운빈의 말에 여운휘와 백산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백산은 침상에 앉아 짐에서 꺼낸 책을 펼쳤다. 운빈은 백산을 곁눈질로 바라보고 여 

운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운휘는 침상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고 있는 상태였다. 

'제길 둘 다 무슨 장승도 아니고……' 

적어도 돌아오는 대답이 있어야 말을 할 것이 아닌가. 

운빈은 투덜거리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도착한 시간이 저녁 무렵이었던 탓에 식사가 들어왔다. 음식 또한 크게 변변치 않았 

다. 간단한 나물 반찬 몇 개가 전부였던 것이다. 

운빈은 깨지락거리다가 젓가락을 놓았다. 

"우리가 언제부터 소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온통 풀밭이라니. 그렇지 않소?" 

그는 둘을 바라보며 말했지만 이번에도 특별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참고 있던 

운빈의 화가 폭발했다. 

"남이 말하면 적어도 대꾸는 해야 하는 게 예의가 아니요?" 

"…… 난 원래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하오." 

백산의 대답에 운빈은 표정을 찡그리면서도 특별히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운빈의 

시선은 여운휘에게로 돌아갔다.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일언반구도 없다. 

"자네는 귀머거린가? 설마 내 말이 우습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던 여운휘가 마침내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운휘의 너무나 짙 

은 검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움찔하긴 했지만 운빈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운빈을 바라보던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반찬 투정이나 할 나이로 보이지는 않는데." 

여운휘의 말에 운빈의 얼굴 표정이 확 하니 붉어졌다. 

운빈은 내려놓았던 젓가락을 재차 잡았다. 그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죽고 싶은가 보지? 네가 진군휘든 뭐든 난 표향천투 운빈이야. 네 놈의 검이 빠를 

지 나의 손이 빠를지 시험해 볼까?" 

"굳이 보고 싶다면 보여 줄 의향은 있지. 해 볼까? 네가 죽을지 아니면 내가 죽을 

지." 

여운휘의 얼굴을 바라보던 운빈은 그도 모르게 서서히 위축됨을 느꼈다. 왠지 모르 

게 지금 젓가락을 던진다 해도 성공할 확률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느낀 것이 

다. 

하지만 운빈은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았다. 

차마 들어올린 젓가락을 그냥 내려놓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그만. 우리는 싸우러 모인 게 아니오." 

백산의 한 마디에 운빈은 젓가락을 내려놓을 명분을 얻었다. 그렇지만 성이 풀리지 

않은 그는 여운휘가 있는 쪽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그것을 날렸다. 

퍽! 

파공성을 내며 날아간 젓가락은 벽에 박혀 버렸다. 그것도 일부분만이 박힌 게 아니 

다. 젓가락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박힌 것이다. 

운빈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여운휘를 바라봤다. 

"앞으로 함부로 입을 놀리면 네 놈 또한 저 꼴이 될 거다." 

말을 마친 운빈이 자리에 앉고 나서 바로 하을지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녀는 가 

벼운 경장 차림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소저와는 무관한 일이니 신경 쓰실 필요는 없소이다. 아, 그리고 마침 잘 왔소 소 

저. 천객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봐야 할 듯한데……" 

하을지는 나가려다가 천객이라는 말을 듣고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백산은 식사를 마치고 다시금 책을 읽기 시작한 상태였고 여운휘는 검날을 바라보 

고 있었다. 하을지의 시선이 책이 아닌 검을 들고 있는 여운휘에게로 향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검으로 향했다. 

'검의 상태는 좋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경을 쓴 게 분명해. 하지만 청강검. 그것 

도 시중에서 몇 푼 주면 살 수 있는 가장 싸구려 중에서 하나.' 

진군휘라는 이름만 두고 본다면 굉장한 검을 쓰는 것이 오히려 어울린다. 그렇지만 

정작 그는 굉장한 검은커녕 시중에서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청강검을 사용한다. 

운빈은 하을지의 시선이 여운휘에게로 향해 있자 다시금 살심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외모에 큰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 

운빈도 자신의 외모가 상당히 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탓에 어렸을 적에 

는 동네에서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던 그다. 

그 탓인지 운빈은 여운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외모도 그렇고 아무런 고생도 없 

이 무엇인가를 이룬 듯 하다. 

'암, 고생을 하고 자랐다면 결코 저런 얼굴이 될 수 없지.' 

지레 판단을 내린 운빈은 헛기침을 했다. 여운휘를 바라보던 하을지가 그제야 고개 

를 돌렸다. 

하을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운빈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 만난 것이지만 과연 천하삼절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다른 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을지만 봐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유명한 무인이 되면서 그는 수많은 여인들을 안아봤다. 

돈이 있고 명성이 있다. 그의 추한 외모도 돈과 명성을 등에 업으니 매력적으로 변 

해 버렸다. 운빈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인들과 사랑을 속삭이곤 했다. 

그러다가 하을지를 봤다. 생전 처음 저런 미녀를 본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들었다. 품에도 안고 싶다. 문제는 하을지는 여태까지 순수히 안겨온 여인과 

는 다르다는 거다. 그녀의 명성은 운빈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지 않다. 

어려운 만큼 매력적이다. 운빈은 하을지를 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빼앗길 수는 없지. 저런 기생오라비 같은 놈에게.' 

운빈은 여운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을지가 입을 열었다. 

"천객을 뽑으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죠?" 

"뽑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 방법을 정하는 게 문제요." 

"그렇죠. 차라리 어떻게 하라고 했다면 모를까 아무렇게나 하라 시니……" 

하을지는 운빈이 아닌 나머지 두 사람을 쳐다봤다. 관심도 없다는 듯 자신의 일에 

만 열중이다. 나름대로 사내다운 멋이 풍기는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야기 

를 나눠야 할 때다. 

"죄송하지만 두 분도 대화에 참여를 하셨으면 하는데요." 

"듣고 있으니 이야기하시오." 

백산은 대답했고 여운휘는 그저 고개만 까닥였다. 

하을지가 운빈에게 물었다. 

"공자는 무슨 생각이 있으신가요?" 

"음…… 모두에게 공평한 것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럼 정말 누남천 어르신의 말대로 주사위를 굴릴까요?" 

"하하! 하 소저는 농도 잘하시오." 

그때 조용히 앉아 이야기만 듣고 있던 백산이 말했다. 

"무공으로 하는 게 가장 나을 듯 하오." 

"무공이요?" 

"그렇소. 무공이 가장 뛰어난 자가 천객이 되고 나머지 셋은 깨끗이 지객이 되는 거 

요. 자신이 패했다면 불만은 없을 거요." 

"저도 그게 가장 나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을까요?" 

"내가 보기에 그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소." 

하을지는 백산의 말에 동의했다. 

정말로 주사위를 굴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 해서 아무나 천객으로 올리기에 

는 아직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인간 됨됨이나 그 무엇도 모르면서 천객을 만들었다 

가 나중에 맘에 들지 않는다고 서로 충돌이 생길지도 모른다. 

차라리 깨끗하게 무공으로 승부를 짓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리라. 

하을지는 운빈을 바라봤다. 

"어떤가요?" 

"나야 상관없소." 

"그럼……" 

하을지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백산이야 그가 제안한 것이니 반대할 의사는 없을 거 

다. 그녀 또한 그것이 좋다고 생각했고 운빈 또한 그렇다고 했다. 남은 건 여운휘뿐 

이다. 

"진 공자 대답을 해 주세요." 

여운휘는 검날을 만지면서 말했다. 

"난 됐다." 

"됐다고요?" 

"무공으로 겨루던 말던 상관은 없다. 그렇지만 난 하지 않겠다는 거다." 

"……?"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하을지가 여운휘를 바라봤다. 무공으로 천객을 정하는 건 

상관이 없다면서 하지 않겠다니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못 알아들은 거냐? 천객은 셋 중에 뽑아. 난 지객으로 있을 테니." 

"설마 싸우는 게 겁이라도 나는 거냐?" 

운빈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가 후회했다. 고개를 돌린 여운휘의 눈을 보는 

순간 사지가 굳은 기분이다. 

"천객이 되고픈 마음도 없고, 귀찮게 천객이 돼서 이래저래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도 싫다. 내 적성에 맞지 않으니 셋 중에서 알아서 정해." 

말을 마친 여운휘는 다시금 입을 닫고는 검을 살피는 데 열중했다. 

하을지는 여운휘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천객이라는 자리는 매력적이다. 흑색 기마대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력이라면 

분명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훗날 무림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결코 척마수호대가 빠지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 

곳의 우두머리라는 건 충분히 탐하고 싶은 자리다. 

모두가 하고 싶어하는 자리를 귀찮다는 이유로 차 버린 것이다. 

"정말 천객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말인가요?" 

"너…… 두 번 말하게 하는 취미라도 있나?" 

"아뇨. 너무 의외라 다시금 물은 거예요. 분명 그 자리는 모두가 눈독이 갈만한 자 

리니까요." 

검을 닦으며 여운휘가 말했다. 

"세상 모두가 같은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명예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자가 있고, 

돈을 위해 살아가는 자도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자 중에서 나 같은 자도 있지." 

여운휘의 말을 다 듣고 나서야 하을지는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백산과 운빈 또한 한 가지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 여인을 지킨다고 했지?' 

놀라운 무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 여인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준다 하여 많은 사 

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던 적도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해가 간다. 

저 정도 되는 사내라면 분명 무림에서 이름을 떨치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다. 그렇지 

만 그는 부와 명예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유가의 소가주라는 여인의 옆만 지켰다. 

애초에 부와 명예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 자였다면 소가주라는 여인을 지키며 시간 

을 보내지도 않았을 거다. 

"그럼 진 공자는 천객을 뽑는데서 탈락하신 걸로 간주하죠." 

"그렇게 되면 셋이서 무공의 우위를 가려야 한다는 말이구려." 

"아무래도." 

말을 마친 하을지는 웃음을 흘렸다. 

"그럼 전 방에 가서 제 쌍검을 가지고 오죠. 어떻게 할 지는 그 후에 이야기해요." 

그녀는 옷도 갈아입고 방에 두고 온 검을 가져오기 위해 방을 나서려 했다. 

하을지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여운휘가 말을 건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 가지 충고를 하지." 

하을지는 여운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누구에게 한 말인지 모르는 탓에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저에게 말인가요?" 

"그래." 

"충고라니 궁금하군요." 

"무인은…… 손에서 검을 놓고 다니는 게 아니야. 앞으로 같이 싸워야 할 입장이니 

미리 말해두지. 갑작스러운 공격에 죽고 싶지 않다면 절대 검을 놓고 다니지 마라." 

"저 또한 평소에도 검을 두고 다니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안전하다? 그 말이 하고 싶은 거냐?" 

하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무인이다. 그것도 이 자리에 뽑힐 만큼 빼어난 무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 

녀가 함부로 검을 두고 다닐 리가 없다. 그냥 이 자리에서 기습을 당할 일이 없다 

고 생각해서 편안히 온 것뿐이다. 

"내가 지금 널 죽이려든다면 어쩔 것이냐." 

"그럴 리가 없잖아요. 왜 진 공자가 저를……" 

"사람을 죽일 때…… 모두가 죽이겠다고 말하고 죽이지 않아. 시체가 되어 쓰러져서 

도 떠들 수 있다면 나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지. 하지만 말이야 네가 죽으면 그 자 

리의 일부를 내가 맡아야 한다. 내게 그런 귀찮은 일을 안기게 하지 마라." 

"알겠어요. 잘 새겨듣죠." 

대답을 하는 그녀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하을지는 표정이 변하지 않도 

록 주의를 기울이며 방을 나섰다. 

기분이 상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인정은 한다. 이제부터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검을 두고 다닌다면 기습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가 없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쌍검을 가지고 오기 위해서다. 

운빈은 여운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을지에게 한 그의 말 때문이다.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싫어지는 법이다. 여운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기니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불 

만스럽다. 

천객의 후보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것조차도 왠지 운빈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 

다. 

자신이 천객이 될 확률이 올라가서 좋아해야 할 일이지만 기분이 나쁘다. 마치 될 

수 있는 데 준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것이 운빈만 그리 생각한 걸지도 모 

른다. 다른 사람이 아무런 말도 없는 걸 보면 오히려 그게 맞는 것도 같다. 

여운휘에 대한 생각은 하을지가 다시 방 안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붉은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의 등뒤에는 가지런히 검 두 자루가 걸려 있었다. 그녀 

는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가죠." 

"그럽시다." 

운빈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백산도 보고 있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을지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는 여운휘에게 말했다. 

"천객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여운휘는 하을지를 힐끔 쳐다 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걸어 나가는 여운휘의 옆에 그녀가 붙었다. 

"진 공자의 충고 잘 알겠어요. 이제부터 이 검을 제 몸에서 때어놓고 다니지 않죠." 

"알아들었다면 다행이군." 

"언제나 그래요?" 

"……?" 

"언제나 그렇게 틱틱 거리냐고요."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우리 둘이 친했던가?" 

말을 마친 여운휘는 성큼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직 완전히 해가 지지는 않았다. 산이라 밤이 일찍 오 

기는 하지만 겨울이 지나고 봄이다. 이제는 여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그 탓인지 낮이 길어졌다. 

비가 오려는 지 구름이 짖다. 그 탓에 해는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아직은 지 

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여운휘는 연무장 구석에 있는 나무에 가서 앉았다. 그로서는 관전자의 역할만 하면 

그만인 셈이다. 

운빈은 백산과 하을지를 바라봤다. 

셋이다. 한 번에 셋이 싸우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한 명은 상대가 없 

을 터인데…… 

"나와 운 공자가 싸우고 이긴 사람이 하 소저랑 붙는 걸로 합시다." 

고민하고 있을 때 백산이 말했다. 하을지에게 유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운빈은 고개 

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인 탓이다. 

백산은 검집을 오른쪽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일반적으로는 왼쪽 허리춤에 검집을 고정하지만 백산은 좌리검이라는 별호를 지니 

고 있는 자다. 왼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무인이다. 

반면 운빈은 주변에 있는 돌들을 줍기 시작했다. 적당하게 주웠다고 생각했는지 운 

빈은 백산의 앞에 가서 섰다. 

"가도 좋겠소?" 

운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악! 

좌리검이라는 별호답게 왼손으로 재빠르게 검을 뽑아들며 백산은 몸을 날렸다. 그 

는 운빈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머리 속에서 수십 번 이상 싸워봤다. 

승산은 있다. 

거리를 좁히려는 백산을 피해 운빈은 뒤로 물러섰다. 운빈 또한 자신의 약점을 모르 

지 않는다. 원거리에서는 효과가 있지만 가까워진다면 위력이 반 이상 줄어버린다. 

근접전을 위해서 권각지(拳脚指)를 배우기는 했으나 결코 좌리검 백산을 이길 정도 

가 아니다.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이것 밖에 없다!' 

백산의 간격에서 물러나며 운빈은 손안에 있는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가 번개처럼 날아갔다. 백산은 검을 세워 돌멩이를 퉁겨냈다. 순간 검이 흔들 

렸다. 

'엄청난 내력!' 

머리 속에서 싸워왔던 것 이상이다. 그리 급하게 던진 돌멩이에 이 정도 내력이 실 

릴 줄이야…… 

백산은 놀라면서도 결코 운빈을 놓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간격을 준다면 불리해지 

는 것이 누구인지 잘 아는 탓이다. 

운빈의 투석술을 상대로 거리를 둔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소매가 흔들렸다. 

'피해야 해!' 

백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경풍이 이는 순간 백산의 몸은 공중으로 솟구쳤다. 

파파팍! 

돌이 매섭게 땅에 박혔다. 비단 땅뿐만이 아니다. 나무, 돌 그 무엇도 운빈의 투석 

술을 피해가지 못했다. 돌멩이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박혔다. 

땅에 내려선 백산은 살짝 양미간을 찌푸렸다. 

재빠르게 움직였지만 원체 빨랐던 탓에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백산은 왼손에 들고 있는 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빙글빙글 돌았다. 살기가 서로를 옥죄기 위해 꿈틀거렸다. 

먼저 움직인 건 백산이었다. 거리를 단숨에 자르며 그의 검이 현묘하게 움직였다. 

운빈 또한 그냥 멍하니 서 있지 않았다. 백산이 움직이는 순간 그의 손 또한 움직였 

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꼽혀 있던 돌들이 백산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백산의 눈이 번뜩였다. 

타탕! 탕! 타탕! 

백산은 놀라운 무위를 펼쳤다. 그토록 강력한 내력이 실린 돌들을 가볍게 검끝으로 

쳐내며 앞으로 달려 든 것이다. 

강이 아닌 유다. 강으로 부닥쳤다면 하나 하나를 힘겹게 밀어냈을 테지만 유의 힘으 

로 움직이니 쉽사리 돌멩이들이 밀려났다. 

단숨에 좁혀 들어온 백산을 향해 운빈은 발을 날렸다. 

귀추각(鬼追脚)이라는 운빈의 각법이다. 발을 내뻗는 찰나에 다리는 수십 개가 되 

고 그 하나 하나에 만만치 않은 위력이 담긴다. 

운빈이 익힌 권각지 중에서 가장 그가 믿는 무공인 셈이다. 

빠악! 

하나가 정확하게 백산의 무릎을 때렸다. 막 공격을 이으려던 운빈은 앞머리를 훑고 

지나가는 검을 느꼈다. 

등골이 오싹하다. 순간적으로 온 몸이 굳어 버릴 정도다. 만약 발이 백산의 움직임 

을 더디게 하지만 않았다면 이번 공격에서 승패는 갈라졌을 게다. 

'역시 거리를 벌려야 해! 좌리검 백산에게 근접전은 미친 짓이야.' 

원빈의 자랑은 투석술 뿐만이 아니다. 

단순히 투석술만 잘한다 하여 고수라는 소리를 들은 건 아니다. 

투석술로 무림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순간적인 판단 능력.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하고 나서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다. 실수한다면 목이 떨어지기 십상이다. 

신법과 보법에 능해야 한다. 

몸을 가벼이 하는 경신술, 빠르게 움직이는 경공술, 그리고 싸움의 투로를 밟는 보 

법. 

세 가지가 절묘히 버물러 져야 한다. 

투석술은 거리를 잡는 무공이다. 가까워서도 안 되고 그렇다 해서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 그렇지만 상대 또한 머리가 있다. 멍청하게 다가올 리도 없고, 기회만 생 

기면 다가와서 승부를 걸려고 한다. 

운빈은 신법과 보법 또한 무림에서 알아줄 정도로 익혔다. 

그 중에서 운빈은 경공에 가장 능하다. 

그는 경공을 펼치며 뒤로 물러섰다. 일순 거리가 벌어졌기에 안심한 그였지만 몸을 

날린 백산의 몸이 거의 코앞까지 따라 붙었다. 

쉐엑! 

미미한 검풍(劍風)까지 인다. 몸을 비틀며 용케 피해내고는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소 

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들어오는 검은 하나도 없었지만 천천히 운빈의 

옷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붉은 핏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제길!' 

백산의 검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고 경공을 펼치던 운빈은 무엇인가에 다리가 걸 

려 균형이 무너지고야 말았다. 

무너지면서도 운빈은 일침을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다!' 

실수였지만 균형이 무너져 버렸다. 지금 이 한 수로 제압하지 못한다면 패하는 건 

피할 수 없다. 

돌멩이들이 허공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방향도 하나가 아니다. 사방팔방의 길을 막으며 날아든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운빈이 예상했던 방향으로 백산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운빈은 그제야 무엇 하나를 깨닫고는 자신을 탓했다. 

'아차!' 

백산의 검이 채찍처럼 휘어지더니 어느새 운빈의 코앞까지 다가와 멈췄다. 

그는 조용히 운빈을 내려다 봤다. 

운빈 또한 자신을 내려다보는 백산을 올려다봤다. 이토록 어처구니 없게 패배를 했 

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패배의 요인은 운빈에게 있었다. 

발을 헛디딘 것? 그것도 그랬지만 더 큰 실수를 범했다. 

'멍청한…… 왼손잡이라는 것을 까먹다니.' 

운빈이 돌을 날린 건 오른손잡이들의 경우에 움직였을 방향을 향해서였다.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가 무슨 큰 차이가 있냐고들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지껄이는 소리다. 왼손과 오른손, 그냥 보면 큰 차이가 없다 

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아니다. 오른손과 왼손이 바뀐다면 대응하는 모든 게 

바뀌어야 한다. 

운빈은 그런 면에서 실수를 범했다. 

무림의 대부분의 무인들은 오른손잡이였다. 지금까지 운빈이 대적해 본 상대 중에 

서 왼손잡이는 특별히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소한 싸움이었다. 왠지 모르게 초반부터 말려 들어간다고 생각했는데 그 탓인 듯 

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상대가 왼손잡이이거늘 대응은 오른손잡이에게 하는 것과 동일 

케 했다. 

운빈은 패했다. 그러나 패한 만큼 그는 값진 것을 얻었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 

속으로 뇌까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하고 화가 치솟지만 운빈은 웃었다. 

"대단하시오. 역시 좌리검 백산이라는 이름이 무색치 않았소이다." 

"아니오. 만약 운 공자가 왼손을 쓰는 무인과 경험이 제대로 있었다면 상황은 바뀌 

었을지도 모르오." 

운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백산 또한 그가 행한 실수를 알고 있는 것이다. 

"하하! 어쨌든 한 수 잘 배웠소." 

포권지례를 취해 보인 운빈은 연무장에서 성큼 물러섰다. 

천객이 되었다면 엄청난 명성이 당장이라도 쫓아왔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아쉽기 그 

지없다. 운빈은 그저 쓴 입맛만 다셨다. 이미 승패가 난 이상 추한 꼴을 보일 수는 

없다. 

이번에 나선 건 하을지였다. 

창!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그녀의 두 손에 검이 들렸다. 

검의 손잡이만 붉은 줄 알았는데 검날 또한 적광(赤光)을 띤다. 보통 검은 아닌 모 

양이다. 

"백 공자와 운 공자가 겨루실 때 저는 쉬고 있었으니 삼 초를 양보하지요." 

"그럴 필요 없소. 내가 소저 보다 나이가 몇 살이나 많으니 의당 내가 삼 초를 양보 

해야 옳은 것이오. 허나, 소저 또한 삼 초를 양보한다니 그냥 없었던 것으로 하면 

될 듯 하오." 

"알겠습니다. 뜻이 그러시면 그렇게 하죠." 

하을지가 쌍검을 들고 있는 건 만약에 있을 일을 대비해서가 아니다. 

하을지는 쌍검술(雙劍術)의 달인이다. 익히기도 까다롭고, 익힌다 해도 대성하기 힘 

들지만 그녀는 쌍검술을 익혔다. 

제약이 많지만 익힌다면 다른 무엇이 아쉽지 않다. 그녀의 쉬지 않고 이어지는 검 

과 빈틈을 노리는 공격은 가히 일품이다. 

하을지의 왼손에 들린 검이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백산이 검을 치켜들어 막는 순 

간 다른 손에 있는 검이 비어 있는 옆구리를 향해 다가갔다. 

백산은 그녀를 밀면서 옆으로 비켜섰다. 검은 아무런 것도 건드리지 못하고 허공만 

갈랐다. 그렇지만 그 검이 회수되기 전에 머리를 내려쳤던 검이 재차 움직였다. 

막 호흡을 들이키려던 백산은 다시 검을 움직였다. 어깨를 방어하자마자 이번에는 

가슴팍으로 다른 검 하나가 다가왔다. 

손바닥에 급히 내공을 실으며 검날을 후려쳤다. 

서둘러 취한 행동이었지만 효과가 있었다. 검은 백산의 어깨 쪽을 스치며 지나갔 

다. 

간신히 쉴 틈이 생겼나 생각했지만 역시나 하을지의 검은 백산에게 달라붙었다. 백 

산은 채 호흡도 가다듬지 못하고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쌍검술의 달인이라 더니 과연!' 

운빈 뿐만이 아니라 하을지 또한 상상에서 싸웠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 

백산의 검이 왼쪽 어깨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검을 들어 방어를 하려던 하을지는 다른 검으로 급히 허리 쪽을 막았다. 

카앙! 

금속성이 터진 것은 어깨 쪽이 아닌 허리 부근이었다. 분명 어깨를 향해 날아들었는 

데 검이 기묘하게 꺾이더니 허리 부근으로 다가온 것이다. 

놀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백산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하을지의 쌍검술이 오히려 맥을 못 쓰고 있다. 

검의 움직임이 일반적인 검술과 다른 탓이다. 휘어지듯 다가오는 검이 맥을 끊어 버 

린 것이다. 

그렇지만 하을지는 침착했다. 너무나 변화무쌍한 검로에 놀랐을 뿐이지 실력이 부족 

한 것은 아니다. 

파팡! 

하을지의 쌍검이 원을 그렸다. 백산의 검은 방향을 바꾸다가 튕겨져 나왔다. 

파앗! 

백산은 검을 서둘러 회수하고 거리를 벌렸다. 하을지의 쌍검이 계속해서 원을 그리 

는 탓이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백산은 서서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원을 그리는 하을지의 주변을 백산은 빠르게 돌았다. 앞에서는 도저히 돌파구가 보 

이지 않았던 탓이다. 이번에는 싸움을 바라보고 있던 여운휘마저도 흥미 있는 표정 

을 지어 보였다. 

'빈틈이 없다.' 

백산은 그리 생각했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하을지에게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은 다른 그 무엇의 침입조차 허용치 않을 것만 같다. 

빈틈을 만들기 위해 몇 번 검을 찔러도 넣어봤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튕겨 나왔다. 

그녀가 그렇게 움직이니 붉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 하다. 

옷자락은 펄럭였고, 검은 쉬지도 않고 춤을 췄다. 

광풍(狂風)이다.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백산의 검을 그녀는 수차래 두드렸다. 맑은 검명이 주변을 울렸다. 검을 들고 있는 

손이 욱신거린다. 천성적으로 여자인 탓에 하을지는 신력이 빼어나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검을 받고 있자면 소마저 단숨에 잡을 만한 천하 역사가 쇠망치로 연 

신 두드리는 기분이다. 

연신 검 위를 두드리는 탓이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검을 받고 있으니 아무리 백산 

이라도 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천객이라는 이름이 하을지에게 가는 듯한 분위기였다. 백산은 간신히 방어에만 급급 

하며 그녀에게 끌려가는 듯 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하을지는 승리를 직감했다. 연속되는 싸움과 일전에 운 

빈의 공격으로 인해 움직임이 무뎌졌다. 무릎을 가격 당한 탓에 처음의 날카로움을 

잃었다. 

이길 거라는 생각을 모두 무너트린 것은 그때였다. 

휘익! 

아래에서 올라오던 검이 마치 연검처럼 휘어졌다. 

'어?' 

하을지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검은 가슴 부분을 스치면서 공중으로 솟구쳤다. 몸 

을 접었던 그녀는 섬뜩함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고야 말았다. 

'채찍처럼 휘어진다더니……' 

여태까지의 공격도 기기묘묘(奇奇妙妙)했지만 지금의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다. 연검도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러한…… 

하을지는 가슴을 스친 백산의 검을 느꼈다. 만약 이것이 실전이었다면…… 열에 아 

홉은 죽었을 게다. 실전이 아닌 비무였던 탓에 백산이 손에 여유를 둔 것일 테고. 

세 치. 단 세 치만 더 깊이 들어왔어도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었음은 부인할 수 없 

다. 

하을지는 백산의 모습을 살폈다. 가벼운 상처들로 인해 그가 입은 백의가 붉게 변했 

다. 드문드문 검게 더러워진 곳도 보인다. 

가볍게 검을 나눈 것 같은데 주변의 모습 또한 처음과는 조금 다르다. 

'응?' 

하을지는 머리에 떨어지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차갑고, 부드럽다. 뭔가 축축하면서 

또한 기분이 좋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하을지는 곧 알게 되었다. 눈앞으로 물방울들이 천천히 떨 

어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 비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백산의 몸에서 하얀 김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뜨겁게 달궈진 몸 탓이다. 

비가 옴으로 인해 잠시 멈칫했던 둘이 동시에 움직였다. 하을지는 오늘따라 쌍검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비 탓일까 아니면 앞에 있는 사내가 주는 위압감 때문일까. 

'아직은 내 상대가 아니야.' 

하을지가 쌍검을 내렸다. 호흡을 가다듬고 있던 백산으로서는 의아스러운 상황이었 

다. 

그녀는 백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졌어요."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소." 

"아뇨. 제가 진 걸 인정할게요." 

두 사람의 결투를 보고 있던 운빈 또한 의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본다면 

하을지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검을 내린 것 또한 그녀다. 

맥을 끊어 버린 마지막 단 일격에 두려움을 느끼고 검을 내렸다는 것인가? 

"승패가 완전히 나지 않는다면 승복하기 힘들 터인데……" 

"아니요. 말했다시피 제가 졌어요. 상관으로서 깎듯이 모실게요. 그럼 됐죠?" 

하을지의 말에 백산 또한 검을 허리춤에 꼽아 넣었다. 비를 피하며 상황을 보고 있 

던 운빈이 성큼 그 둘을 향해 다가갔다. 

"하하! 그럼 천객은 백 공자겠구려." 

"운이 좋아 천객을 맡게 되었소. 앞으로 잘 부탁하오." 

백산은 여운휘를 힐끔 바라봤다. 여전히 여운휘는 나무 아래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아래에 있는 여운휘 또한 흠뻑 젖은 상태였다. 

싸움이 끝났다.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싸움이 끝난 지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만. 이야기를 할 게 있소." 

백산의 목소리에 여운휘는 고개를 돌렸다. 거리도 상당히 멀고 빗줄기도 강해져서 

듣지 못했을 만도 하련만 용케 들은 모양이다. 

그는 포권을 취해 보이며 옆에 있는 둘에게 말했다. 

"둘이 긴히 할 말이 있소. 물러나 주었으면 하오." 

백산이 굳이 포권을 취하지 않았다 해도 그 둘은 그래야만 했다. 인정을 한 이후부 

터 백산은 천객, 그 둘은 지객이다. 상관인 이상 그 명령은 철저하게 따라야 한다. 

고개를 끄덕인 둘은 여운휘를 스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내는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백산이 천천히 여운휘에게로 다가왔다. 

타닥! 타닥! 

굵어진 빗줄기가 둘의 얼굴을 연신 두드렸다. 폭우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빗 

줄기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는 쏟아져 내렸다. 

백산은 여운휘에게 포권을 취했다. 

"보셨을 거요. 분에 넘치지만 제가 천객이 되었소. 그리고 당신은 지객이고." 

"굳이 그것을 상기시키려고 부른 건 아닐텐데?" 

"그렇소. 내가 부른 건 위계질서 탓이오." 

"……?" 

"당신과 겨루고 싶소." 

"그런 말이라면 사양하지." 

말을 마친 여운휘는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야기 할 필요도 없다고 느꼈다. 여운휘 

는 백산과 겨루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멈추시오! 이건 명령이오!" 

"…… 함부로 명령을 내리지 마라." 

"전장에서 장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인 줄 아시오!" 

"네가 말한 질서라는 건가?" 

"아니오. 그것도 중요하지만 장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오. 바로 수하들 

의 능력을 아는 것이오. 수하 개개인의 능력을 알아야 그에 합당한 곳에 위치하게 

할 수 있는 거요. 수하들의 능력을 아는 것. 그게 우두머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오." 

백산의 말에 여운휘는 발을 멈췄다. 

비가 차갑다. 

우중충하던 하늘이 마침내 천둥소리를 토해냈다. 

꾸르릉! 쏴아! 

천둥소리가 천지(天地)를 울린 후 비는 더욱 더 쏟아졌다. 이제는 한치 앞도 분간하 

기 힘들 정도다. 입을 연다면 당장이라도 비가 입안을 가득 메울 것만 같다. 

몸도 돌리지 않은 채로 여운휘는 입을 열었다. 

"싸우는 거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난 천객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소. 이미 천객은 나로 정해졌고, 또한 당신이 날 이길 거 

라고 생각하지도 않소." 

빗방울이 두 사내의 옷을 완전하게 적셔버렸다. 딱 달라붙은 옷은 두 사내의 몸의 

윤곽을 드러나게 했다.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비가 쏟아져 내렸지만 백산은 여운휘 

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 모습은 무인이라기 보다는 절개를 지키려는 문인의 모습과도 같이 당당했다. 

창! 

여운휘는 검을 뽑아들고 몸을 돌렸다. 빗방울은 검신을 두드리며 천천히 땅을 향해 

흘러내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백산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백산 또한 쓸데없는 

말을 하는 무인이 아니다. 그도 여운휘처럼 아무런 말도 없이 집어넣었던 검을 꺼내 

들었다. 

꿈틀. 

백산의 몸이 움찔했다. 여운휘가 움직인 것도 아닌데 단지 마주선 것만으로도 뭔가 

모를 오한이 몰아닥친다. 

'비 탓인가?' 

왠지 모르게 상대의 몸이 크게 보인다. 그리고 들고 있는 싸구려 검 또한 왠지 모르 

게 날카로워만 보인다. 

백산은 자신에 떠올린 생각에 그조차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피식 웃어버리고야 말았 

다. 비 때문에 상대가 커 보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것 또한 백산 본인이다. 

'하을지보다 조금 나은 수준일 거라고 예측했거늘……' 

오판이었다. 하을지와 운빈보다 한 단계 위의 무인이라고 생각했거늘 그건 아니다. 

혈리추검 공청을 꺾고, 수황과 손을 겨루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직접 부닥치기 전에는 상대의 진정한 실력은 알 수 없다. 

강한 자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마주보게 된 지금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강하다 

라는 게 아니다. 

핑! 

물방울이 튀기는 순간 백산은 검을 휘둘렀다. 

카앙! 

여운휘의 발이 움직였고, 그 찰나 땅에 고여 있던 물방울들이 튀었다. 잠시 상념에 

잠겼던 백산은 소리를 듣고서야 간신히 그 공격을 막아냈다. 

"으음!" 

백산은 맞물린 상태에서 자신이 밀리자 신음을 토해냈다. 겉보기에는 호리호리한 사 

내가 이같은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버텨보려고 했던 백산은 몇 걸 

음 뒤로 물러서다가 힘으로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앞에 여운휘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가 봐도 빼어난 용모다. 상처하나 없는 얼굴. 순탄한 길을 걸어 

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검을 겨루어 보니 알겠다. 

이 사내가 얼굴이 깨끗한 것은 결코 편한 길을 걸어서가 아니다. 너무나 강했기에 

그만한 상처를 입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흐압!" 

백산은 고함을 지르며 여운휘를 밀어냈다. 틈이 벌려졌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산 

은 뒤로 물러섰다. 

후우, 후우! 

호흡이 거칠어졌다. 쏟아지는 비 탓에 격하게 움직이면서 호흡이 고르지 못했다. 

촉각(觸覺)도 곤두섰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 하나 하나마저도 모두 느낄 정 

도다. 그 정도로 긴장을 했다는 소리다. 

아무리 봐도 빈틈이 안 보인다. 가만히 서 있는 것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허점을 

찾으려도 찾을 수가 없다. 

여운휘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백산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버렸다. 

쏟아지는 비 건너편에서 여운휘의 입이 열렸다. 

"아직도…… 이길 거라고 생각하나?" 

"……" 

백산이 살아생전 이처럼 무게가 있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가볍게 던진 한 마 

디였지만 당사자인 백산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위축되어서는 이길 수 없다.' 

백산은 대답대신 검을 날렸다. 허점이 보이지 않는다 해서 보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 

을 수는 없다. 

검 끝이 흔들렸다. 백산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백산의 검은 기기묘묘한 변화를 보이 

는 것이 묘미다. 그리고 쏟아지는 빗줄기. 

시야를 혼동시키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상태다. 

발이 땅을 밟는 것과 동시에 물방울들도 튀겨 올랐다. 검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여운휘를 이등분이라도 하려는 듯 매서운 기세로 검은 떨어져 내렸 

다. 일반적으로 검을 들어 상단을 막아야만 했다. 그렇지만 여운휘의 검은 옆구리 

를 향해 움직였다. 

차앙! 

그리고 울리는 경쾌한 금속음. 백산의 눈에 놀랍다는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애초부터 백산은 여운휘에게 절기를 펼쳤다. 

환각팔로(幻角八路). 

환각을 이용한 듯한 공격으로 애초에 공격한 곳과는 전혀 다른 팔방을 노리고 날아 

든다. 어디를 공격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건(乾)감(坎)간(艮)진(震)손(巽)이(離) 

곤(坤)태(兌)의 여덟 방위를 모두 방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이 절기 

는 백산보다 강한 상대와 싸울 때도 그의 목숨을 몇 차례나 구해준 최고의 절기였 

다. 

막았던 자는 있었지만 애초에 움직일 길을 알고 막은 것은 여운휘가 처음이다. 

그것도 빗줄기까지 이용해서 완벽한 기회였다고 느꼈는데…… 

'어떻게 이런 자가……' 

백산은 자신의 무공에 대해 자만한 적이 없다. 언제나 본인이 최고라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그랬을까? 은연중에 비슷한 연배 중에서는 상대가 없다고 자만한 적이 없었을까? 

있었다. 아까 까지, 아니 여운휘와 검을 섞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자만이 남아 있 

었다. 운빈과 하을지의 무공이 대단했기는 하지만 결국 이긴 건 백산이었다. 자신감 

이 붙었다. 무림에서 유명하다고 알려진 동년배의 무인들 모두보다 백산 그가 더 강 

했다. 

'자만을 했다. 겨우 동년배의 무인을 이기고서 만족하고야 말았어. 멍청한 짓을 해 

버렸군.' 

자만만큼 무인에게 적이 되는 건 없다.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을 백산은 자신도 모 

르게 가까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산은 검을 내리고는 숨을 들이쉬기 시작했다. 고개를 치켜 든 탓에 빗줄기가 코 

와 벌려진 입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이었다. 여운휘는 

백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 

다. 

눈을 감은 채로 호흡을 하던 백산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다시금 검을 가슴 근처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눈빛마저도 변했다. 

초심으로 돌아가리라. 좌리검 이라는 별호도, 백산이라는 이름도 버리고 처음 검을 

잡았던 풋내기 무인으로 돌아가리라. 

그의 모습이 한층 진지해지자 여운휘 또한 검을 고쳐 잡았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갈 것이오." 

"이제야 할 마음이 들게 하는 군." 

"아까 당신이 날 이길 수 없을 거라고 했던 말 사과하겠소. 내 자만이었소. 하지만 

이제는 내가 당신을 이길 거라는 생각을 버렸소. 그렇지만…… 진 공자를 꺾겠다는 

마음에 일말의 변화도 없다는 것도 알아주시오." 

말을 마친 백산은 여운휘의 주변을 돌면서 검을 찔러 넣기 시작했다. 검은 기묘한 

변화를 보이며 여운휘의 몸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기본적인 공격이었지만 그랬기에 

날카로웠다. 

챙! 채챙! 

연달아 검끼리 부닥쳤다.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비틀림을 보이며 다가오는 검이었지 

만 여운휘는 용케도 그것들을 쳐냈다. 

스윽! 

마침내 백산의 검이 여운휘의 어깻죽지를 스쳤다. 가느다란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 

는 비와 섞이며 여운휘의 옷을 적셨다. 

빠르게 원을 그리며 도는 백산의 손은 쉴 줄을 몰랐다. 여운휘는 원 밖으로 빠져나 

가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빠져나갈 수 있을 터인데 여운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원 안에서 날아드는 검을 막을 뿐이었다. 

백산은 계속해서 공격을 하고 있었지만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 

다. 

간간이 터져 나오는 검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쏟아지는 빗줄기보다 

도 오히려 검이 빠르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러했다. 빗줄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검은 빨랐다. 

'이 상태로는 안 돼. 이렇게 해서는 나만 지칠 뿐이야.' 

여운휘는 몸만 돌리면서 검을 막아내는 게 고작이다. 종종 검을 찔러 넣기는 하나 

크게 힘이 빠지지는 않는다. 반면 백산은 그렇지 않다. 경공을 펼치면서 그는 검을 

날리고 있다. 날아드는 검을 피하기 위해서는 보법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경신술도 

무시할 수는 없다. 

내공의 소모가 다르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멸하게 됨은 불 보듯 뻔하다. 

백산은 여태와는 다른 공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한 번 믿어보자.' 

그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하게끔 했던 환각팔로(幻角八路)를. 

빙글빙글 돌던 백산은 검을 가볍게 찔러 넣고는 도약했다. 발이 땅을 박차는 순간 

백산의 몸이 여운휘의 근처까지가 다가갔다. 

'환각팔로!' 

쒜엑! 

날아드는 검 끝을 여운휘가 쫓았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기도, 폭사되어 나오는 기 

세. 

파앙! 

백산은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 환상이 끝나는 순간 백산의 눈앞에 있는 물방울 

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여운휘의 검 끝을 보았다. 

검을 막으면서 다가온 여운휘의 검이 빗방울을 부수는 것을 백산은 똑똑히 보았다. 

물방울은 마치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갈라지며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멈춰져 있는 검을 보며 백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검은 여운휘의 검에 

막혀 어느 정도 나아가다가 멈춰 버린 후였다. 

여운휘가 천천히 검을 때자 백산은 그 상태 그대로 서서 상대를 응시했다. 

"…… 졌소." 

백산은 머뭇거리다가 말해버렸다. 싸움은 끝났다. 

"내가 보기에 천객은 당신이 더……" 

"말했을 텐데? 천객이 될 마음은 없다. 천객은 너야. 난 지객이지." 

여운휘는 검집에 검을 회수하고는 건물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비를 

피해 안으로 들어선 여운휘를 잠시 응시하던 백산 또한 건물을 향해 걸었다. 안에 

들어서자 운빈과 하을지가 백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둘은 백산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을지는 그에게 젖은 몸을 닦으라고 수건을 건넸다. 간단하게 얼굴과 손을 닦던 백 

산이 입을 열었다. 

"내가 졌소." 

"헛! 백 공자가 말이오?" 

"그렇소. 그러니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마시오." 

말을 마친 백산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을 바라보던 운빈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길, 그럼 천객은 진군휘라는 자야 아니면 백공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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