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사(結社)
날이 밝았다.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던 여운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허리에 차고, 짐은 어깨에 둘렀다. 여운휘는 힐끔 철비상을 바라봤다. 그는 아
직도 구석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듯 했다.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동굴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철비상이 완벽하게 나은 건 아니다. 아직 몸이나 간신히 움직일 정도로 몸 상태가 좋
지 않다. 하지만 여운휘는 철비상의 몸이 나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줘야 할 이유도,
시간도 없다. 그는 지금 급히 대파산(大巴山)으로 가야 한다.
“가는 겐가.”
갑작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여운휘는 당황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여운
휘는 고개만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있고 싶으나 자네 또한 바쁜 몸이니 내가 욕심을 부릴 수는 없
지.”
“상처가 나으려면 조금 걸릴 거다.”
“아아, 내 몸의 상태 정도야 나도 잘 알고 있네. 무리하게 움직이지는 않을 터이니
걱정 말게.”
“그럼.”
여운휘는 멈추었던 발을 다시금 움직였다.
동굴 밖으로 나간 여운휘가 나무 사이로 사라지려는 순간 철비상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이보게, 진군휘.”
이번에는 고개를 돌렸다. 철비상이 서 있었다. 동굴 입구에 몸을 기댄 채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철비상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지.”
“갚을 필요 없다. 어차피 지나가는 길에 도운 것뿐이니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일세. 이 철사자가 은혜를 지고도 갚지 않는다고 하면 얼마
나 우습겠는가. 이 철사자를 은혜도 모르는 망나니로 만들지 말아주게. 원한만이 중
요한 게 아닐세. 무림인들은 원한은 잊지 않으면서 은혜는 쉽게 잊지. 나 또한 그런
무인으로 만들 셈인가?”
철비상은 동굴의 입구까지 걸어오느라 상당히 힘든 모양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얼굴은 온통 땀 투성이에 당장이라도 쓰러지려는 몸을 억지로 일
으키기 위해서인지 입술은 강하게 깨물고 있다.
여운휘는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철비상은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그의 힘겨워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도 여운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때 철비상
이 말했다.
“이봐 진군휘. 난 자네가 맘에 드는 군. 우리 의형제를 맺는 게 어떠한가.”
“…… 관심 없다.”
“하하! 내 그럴 줄 알았지. 혹여나 하는 욕심에 뱉은 말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말게.
그럼 이만 자네는 가야 할 길을 가게. 나 또한 며칠 푹 쉬고 움직일 테니. 특별한 인
사는 건네지 않겠네. 어차피 우린……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아니, 그렇게 될 것
만 같군.”
끝까지 말을 들은 여운휘는 전방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후우……”
그제야 한숨을 내쉰 철비상의 몸이 쓰러졌다.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고 있는 사람의 발걸음을 잡을 짓을 철비상은 하고 싶
지 않았다.
간신히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철비상은 봄바람을 느꼈다.
봄이 온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거늘 막상 그렇게 느낀 건 지금이 처음이다. 철비
상은 기다시피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괜스레 밖에 있다가 누군가와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르는 탓이다.
걸었다면 모를까 기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까 전 떠나가는 여운휘를 잡기 위해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듯 싶다.
걸었다면 반 각도 걸리지 않았을 시간. 하지만 원래 있던 곳까지 오는데 걸린 시각
은 이 각에 가까울 정도였다.
벽에 몸을 맡긴 철비상은 땀을 닦았다.
온 몸의 근육들이 요동을 친다. 당장이라도 몸만 누인다면 잠이 쏟아질 정도로 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버렸다.
피와 흙으로 이미 걸치고 있는 의복은 옷이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다.
그 뿐이랴. 잔뜩 더러워진 몸에서는 악취까지 풍긴다. 동굴인 탓에 악취가 빠지지 않
아 이제는 머리까지 답답하다.
철비상은 배가 고프다고 생각했다. 뭔가 잡아 와야 하거늘 그럴 힘이 없다. 한끼 정
도 굶는다고 죽는 건 아니니 한숨 잘까 하던 그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여운휘가 있던 자리에 하얀 봇짐이 있다.
‘이런……!’
무엇인가를 놓고 갔다는 생각에 철비상은 천천히 다가가 짐을 들었다.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허나, 철비상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짐
을 옆에 내려놨다. 철비상의 코가 순간 움찔거렸다.
짐 안에서 무슨 냄새가 풍긴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무슨 냄새지?’
익숙한 냄새다.
딱히 무슨 냄새라고 말을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익숙하다.
‘설마……’
무엇인가 생각나는 게 있어 철비상은 짐을 풀었다.
봇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철비상은 통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하하하!”
고통이 온 몸을 휩쓸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그렇게만 느껴
졌다.
짐 안에 있는 것은 음식들이었다.
‘이 친구 도대체 뭘 들은 거야?’
음식들을 바라보며 철비상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난…… 고기 밖에 먹지 않는다니까.”
그리 말을 하면서 철비상은 여운휘가 남긴 음식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여운휘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음식이라고 준비해 두었던 것 모두를 철비상에게 주고 온 것이다. 어차피 하루 정도
식사를 하지 않는다 해서 문제 될 거리도 없다.
오늘 중으로는 무리겠지만 내일이라면 분명 마을에는 도착할 수 있을 터. 그때 음식
이야 다시 마련하면 된다.
대파산을 향해 움직이던 여운휘는 철비상과의 대화가 생각났다.
‘혈무린……’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할 정도다.
사곡에 들어가고 나서 단 한 번 만난 것이 그와의 인연의 전부였다. 너무 얕았던 인
연 탓인지 지금까지도 잊고 지냈다.
그가 혈교의 교주라는 말에 여운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비록 마교와 무림맹에 비해 약한 힘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강하다. 같은 편만 되어
준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셈이다.
철비상을 이용했다면 보다 쉽게 혈무린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걸 모를 여운휘도 아니다.
조심을 하려는 것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혈무린은 마교를 떠났다. 그건 곧 그
때 교주였던 유백명과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고.
유설린은 유백명의 딸이다. 그녀에게 어떠한 앙금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건 곧 혈무린에게 대 놓고 정체를 밝힌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거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굴릴 수 있는 주사위의 숫자가 늘었다는 것.
유설린을 지켜 줄 방패가 될지, 아니면 찌를 창이 될지는 모른다. 방패라면 가져야
하고 창이라면 피해야 한다.
‘알아봐야겠군.’
여운휘는 이 일을 우선 자신만이 알기로 했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이다. 괜히 희망만 부풀려 두었다가 그것이 사라지게 된다
면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넓게 펼쳐진 평야를 달리는 여운휘의 몸은 화살과도 같았다.
여운휘는 나무들 사이를 조용히 걷고 있었다.
대파산은 넓다. 아니, 단순히 넓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구룡산맥이라고 까
지 불릴 정도니 말해서 무엇하랴.
그리 넓은 산이거늘 여운휘는 누남천을 만날 걱정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아래쪽
에 드문드문 보이던 거지들.
너무나 자연스러웠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상했다.
여운휘가 나타나자 그들 딴에는 모르게 한다고 했겠지만 순식간에 오고간 눈짓을 여
운휘가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뒤쪽에서부터 사방에 수많은 자들이 여운휘에게 따라 붙고 있다.
‘개방도인가.’
매듭을 보지는 못했지만 개방도임이 분명하다.
산을 올라서는 것은 쉬웠다. 대파산은 북쪽은 가파르나 남쪽은 완만하다.
호남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여운휘는 쉬운 남쪽의 길을 이용해서 대파산에 오르고 있
었던 것이다.
여운휘는 닦여진 길이 아닌 거칠을 길을 이용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밀스러워 보이는 일이었기에 여운휘 또한 최대한 배려를 해 주는 것이다.
어서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주변을 맴돌고 있는 자들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만큼 중요한 일인 것이다.
대파산의 봄은 왠지 모르게 쓸쓸했다.
아마 무엇인가 벌어지기 전이라는 느낌 탓에 여운휘만이 그리 생각한 것일 게다.
대파산에 들어선 지 다섯 시진 정도가 지난 후에서야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운휘의 바로 앞에 있던 나무에서 누군가의 신형이 떨어진 것이다.
이미 앞에 있던 나무에 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여운휘로서는 전혀 당황하
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뭔가를 느낀 여운휘는 검집 째로 검을 들어올렸다.
팍!
검집에 묵직한 충격이 온다고 생각한 순간 두꺼운 막대기를 휘둘렀던 걸인(乞人)은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땅에 내려섰다.
팔이 보통 사람에 비해 길다. 곱사등이에 사팔뜨기 거기다가 곰보…… 외모로만 본다
면 눈이 저절로 찌푸려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외향이다.
밀폐된 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악취까지 풍긴다.
손에 들린 막대기는 이야기로 들었던 개방 방주의 신물이라는 타구봉(打狗棒)과 모습
이 흡사하다.
“네 놈이 진군휘냐.”
대뜸 반말이다.
여운휘는 걸인을 아무런 말도 없이 응시했다.
“네 놈이 진군휘냐고 물었다!”
걸인은 대답을 들으려는 듯 재촉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확답이 없었다면 움직이
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면서 묻는 그 고약한 심보는 무엇인지 모르겠군.”
“이, 이 고얀 놈!”
“난 분명 불러서 찾아온 손님이오. 당신이 원한다면 여기서 돌아가지.”
여운휘의 말에 걸인은 막대기를 내려트렸다.
마음 같아서는 손에 들린 막대기를 마구 휘두르고 싶었으나, 여운휘의 말 대로였다.
여운휘는 손님으로 찾아왔고 부른 쪽인 걸인은 그에게 무엇인가 부탁을 해야 하는 처
지였다.
“끄응. 알겠네. 내가 실수를 했다는 건 인정하지.”
여운휘는 말 없이 걸인을 바라봤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가볍게 내 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반개(瘢慨) 철혈우라고 하
네.”
“진군휘라 하오.”
반개 철혈우, 여운휘 또한 누구인지 아는 개방의 고수다. 사천성의 개방 분타주인 반
개 철혈우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갑자기 부른 이유에 듣고 싶소.”
“그건 내가 할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군. 날 따라오게. 누남천 어르신을 뵙
게 해 주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 분이 해 주실 게야.”
말을 마친 철혈우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그의 뒤를 따라 산 위로 오르
고 있었다.
여운휘의 주변에서 그를 살피던 무인들도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제는 완벽하게 철혈우와 여운휘 둘 뿐이다.
산 위로 걸어 올라가던 철혈우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의 입이 움직였다.
짹! 째짹……! 짹!
개방의 밀마다. 지금 철혈우는 산새의 소리를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산새 소리
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건너편에서도 소리가 들려왔다.
째짹! 짹!
철혈우는 여운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가지.”
안에서 들려온 밀마는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였다.
"잘 지냈는가."
"그럭저럭."
누남천은 여운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 오랜 시간 헤어져 있던 것도 아닌데
얼굴을 보니 무던히도 반갑다.
"갑자기 불러 미안하군. 아마 이유도 모른 채로 황급히 왔겠지."
"……"
누남천의 말 대로다. 아무런 것도 모른 채로 여운휘는 사천에 있는 대파산까지 왔
다.
이 거처에 있는 것은 누남천과 여운휘를 비롯해 다섯이었다. 한 명은 방금 전 여운
휘를 데리고 왔던 반개 철혈우.
오른쪽에 앉은 자는 표향천투(剽嚮天投) 운빈(雲彬)이라는 자다. 그의 손에 들리면
그 무엇이라도 무기가 되는 것으로 유명한 자다. 목표로 한 자를 절대 놓치지 않는
그의 무기는 비단 비수뿐만이 아니다. 돌멩이, 심지어 나뭇잎도 그의 손에만 들리
면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흉기가 된다.
나이는 서른 셋 정도인데 키는 땅딸막하고 팔이 긴 것이 반개 철혈우와 비슷한 외모
의 소유자다.
그에 반해 왼쪽에 앉은 무인은 하얀색 옷을 입은 채로 눈을 감고 있어 마치 학사와
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크게 잘생긴 외모는 아니지만 묘한 분위기를 풍기
며 사람을 끄는 인물이다.
좌리검(左釐劍) 백산(白山)이다.
그는 왼손을 기가 막히게 쓰는 자다.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펼치는 그의 검법은
때론 채찍처럼 기묘하게 휘어지며 사람을 압박해 들어간다.
나이는 운빈 보다 두 살이 많은 서른 다섯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걸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한 분이 오셨습니다."
"어서 안으로 모시게."
누남천의 말에 고개를 꾸벅하고 걸인은 사라졌다. 그리고 곧 여인 하나가 건물 안으
로 들어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습을 들어낸 여인은 아름다웠다.
그냥 아름답다고 말하기 뭐할 정도의 묘한 분위기가 그녀에게서 풍겼다. 붉은 경장
차림의 여인의 등에는 두 자루의 검이 걸려 있었다.
검집 또한 붉은 탓에 그녀의 옷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비단 붉은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머리카락마저도 붉은 기가 감돈다.
순수한 중원인이 아닌 모양이다.
앵두 마냥 붉은 입술과 타는 듯한 눈동자를 보니 마치 붉다는 것이 그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을 정도다.
가장 늦게 나타난 여인은 여운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
다.
"들어보니 제가 가장 늦었다고 하는군요."
"아니네. 그리 늦지는 않았으니 어서 앉게."
여인은 우선 자리에 앉아 있던 모두에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어린 제가 가장 늦어 기다리게 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모두 하해와 같은 마
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오. 미녀를 만나는 일인데 이 정도 기다리는 게 어떻소. 늦은 것도 아니고 말
이오. 더군다나 그것이 천하삼절의 하나인 적미쌍검(赤美雙劍) 하을지(霞乙芝) 소저
를 말이오."
"그리 말해 주시나 감사합니다."
붉다는 것이 너무나 어울리는 그녀는 남궁려희, 당산희와 함께 천하삼절이라고 불리
는 하을지였다.
남자도 쓰지 않는다는 쌍검을 귀신처럼 휘두르는 여인. 그리고 그 날카로운 검술과
는 다르게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인 하을지는 꽤나 유명한 인물이다.
천하삼절 중 누가 가장 아름답냐는 것에 대해서는 답을 내리지 못하지만 가장 강한
것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서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적미쌍검 하을지는 나머지 둘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무공의 고수다.
"모여야 할 사람은 대충 모인 듯 싶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미리 말하
도록 하지. 말을 다 듣고 나서 빠지고 싶은 분은 빠져도 좋네. 강요를 할 일은 아니
라 생각하여 본인의 판단에 맡기기 위함이야."
누남천은 철혈우를 제한 나머지 넷을 한 번씩 쳐다봤다.
이 넷 모두 현재 이만한 나이대의 무인 중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자들이다. 그
리고 그 중에서도 누남천이 믿을만한 자들로 넷을 뽑은 것이고.
"우선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소."
학자풍의 무인인 좌리검 백산이 말했다. 누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남천은 이들을 이곳에 모은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풍문을 들어서 알고 있을 게야. 흑색 기마대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는 것을."
누남천의 말에 네 명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운휘는 물론이거니와 나머
지 셋 또한 그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던 탓이다.
"솔직히 말해……"
표향천투 운빈이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쑥스럽다는 듯
긴 팔로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저 또한 흑색 기마대에 대해서는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강하다 강하다
하지만 솔직히 그 실력에 의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대세를 그토록 바꿀 정도의 무력이 있다는 건 믿기 힘듭니다."
누남천은 운빈의 말을 끝까지 듣고 여운휘를 바라봤다. 여운휘는 누남천이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봤다.
누남천이 입을 열었다.
"운 공자의 말을 들었으니 한 마디 해 보게."
"특별히 할 말은 없소."
"그래도 이곳에서 흑색 기마대와 겨루어 본 것은 자네 뿐이잖는가."
누남천의 그 말에 앉아 있던 모두의 눈에 놀람이라는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반개 철
혈우 조차도 그러한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운휘의 정체조차 모르는 나머지 삼 인의 놀람은 철혈우에 비해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무인이거늘 흑색 기마대와 싸웠다니……
여운휘의 옆에 앉아 있던 하을지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공자의 존함을 알 수 있겠는지요."
누남천을 힐끔 바라본 여운휘는 하을지의 물음에 답했다.
"…… 진군휘."
"헛!"
여운휘의 대답이 나오는 순간 운빈은 자신도 모르게 경탄성을 내질렀다.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아 무엇인가 한 가닥 하는 무인인 것 같았지만 그 정체를 몰라서 궁
금했었다.
또한 내심 그 깨끗한 얼굴에 시기도 했다. 무인인 것 같지는 않았다.
검을 차고는 있지만 볼품이 없었고, 무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유약해 보였다.
그래서 문사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거늘 그렇게 유약해 보이던 자가 진군휘였던 것
이다.
"공자가 정말로 진군휘라는 말인가요?"
"남의 이름을 말할 정도로 형편없어 보이던가?"
"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죄송해요. 말만 듣던 분을 갑작스럽게 뵙게 되어서 실수
를 해 버렸네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누남천이 나섰다.
"그 청년이 진군휘라는 것은 내가 보장하지. 또한 흑색 기마대와 겨루었던 것도 보
장할 수 있고. 그 자리에는 나 또한 있었으니까."
"어르신께서 보장을 하신다는 데 의문이 있겠냐만은 제가 궁금한 것은 왜 갑자기 흑
색 기마대한 언급을 하시냐는 겁니다. 결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꺼내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소저의 말 대롤세. 이번 우리가 모인 건 흑색 기마대와 긴한 관련이 있어서네."
하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긴한 자리에서 꺼낸 말이니 만큼 결코 허튼 말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거늘 그게 맞는 모양이다.
누남천은 모두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교에는 금천멸문대와 흑색 기마대가 있지."
안다. 이걸 모르는 자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다. 무림에 몸을 담은 자 치고 이 사실
을 모르는 자가 과연 누가 있겠는가.
그만큼 지금 누남천이 말한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적이었던 것이다.
"금천멸문대는 그 수와 나름대로 그들에 대한 정보가 파악이 되었네. 그래서 대처
방안도 있고 말일세. 문제는 흑색 기마대인데…… 아시다시피 알려진 것은 극소수
지."
"한 번 조우해 보셨다면 뭔가 알아내신 건 없으십니까?"
개방의 분타주인 철혈우가 누남천에게 물었다. 정보를 우선시하는 개방으로서는 하
나라도 더 흑색 기마대에 대해 알고 싶었다.
누남천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정말로 그곳에서 알아낸 것은 아무런 것도 없었던 탓
이다.
"안 것은 아무런 것도 없네. 하지만 들었던 바대로 그들은 흑색 갑주에 흑마를 타
고 귀신같이 창을 쓰더군. 그들은 강해.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은 말할 수 있
지. 또한 흑색 기마대의 대주라는 자의 무공은 가히 상상도 못할 정도라네."
흑색 기마대의 대주의 무공을 머리에 담아 두었던 것은 비단 여운휘뿐만이 아니었
던 모양이다. 누남천 또한 그 긴 거리를 단숨에 날아든 그 창을 아직도 잊지 못하
고 있었다.
"이제부터 본론을 이야기하지."
모두의 눈빛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누남천이 계속해서 말했다.
"비밀에 쌓인 흑색 기마대가 나타나면 정파 무림의 사기가 떨어지게 되네. 예전에
도 그랬고 몸으로 겪어본 바 지금 또한 그러할 것이야. 그래서 무림맹에서는 회의
를 하였지. 이것을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에 관해서. 그러다가 종리 군사께서 한
가지 제안을 하셨네."
모두가 귀가 솔깃한 듯 했다. 시선은 누남천에게로 쏟아졌고 그의 입에서 나올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우리 또한 흑색 기마대와 마찬가지의 단체를 만들자고 말일세. 물론 흑색 기마대처
럼 강한 부대를 만드는 것은 무리라는 건 잘 알고 있네. 그리고 그러한 부대를 단시
간 내에 만들자는 말도 아니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아는 것은 바로 나니까 말
일세."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우리도 만들자는 것이지. 흑색 기마대가 나타나면 정파의 사기가 떨어지네. 사기에
서 밀린다면 그 싸움은 힘들어지지. 마찬가지네. 우리 또한 흑색 기마대만큼은 아니
라고 해도 상대편의 사기를 떨어트릴 만한 부대를 만들자는 게지."
하을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는 간다. 그리고 누남천이 한 말이 타당성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런 중요한 일에 이토록 젊은 무인들이 불려온 것이 의문이다.
"그럼 저희들을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런 부대를 만들려면 원로 고수분들이
더 적격이실 텐데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은 건 아니었네. 하지만 지금 마교와 무림맹의 상태는 언제 싸
워도 이상할 것이 없네. 문파에서 중요한 위치를 맡고 있는 그들을 빼는 건 다소 무
리일세. 그래서 우리는 후기지수들을 이용하기로 했지. 그리고 그러한 후기지수들
을 이끌 무리의 장으로 자네 넷을 뽑은 것이고. 물론 자네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다른 사람이겠지만 후기지수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은 자네들이라는 말
이지."
누남천의 긴 설명이 끝났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누남천의 말을 이해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은 어깨에 갑작스럽게 눌러 앉은 짐 때문이다.
흑색 기마대를 견제할 목적으로 만들 무리의 수장들이 되라는 소리인데 그것을 쉽사
리 대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목숨이 두렵기도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만약 중요한 일에서 실수라도 한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갈 것인가.
누남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대답을 줄 필요는 없네. 내일 해시정(亥時正)에 이곳으로 다시 와서 대답을
하면 되네. 돌아간다 해도 아무도 욕할 사람은 없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하게.
그럼 난 이만 가지."
밖으로 나가는 누남천을 향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들을 스쳐지나가던 누남천은 여운휘를 힐끔 쳐다봤다.
여전히 무표정이다. 지금 들은 이야기가 결코 가벼운 게 아니거늘 표정은 여전히 얼
음장 마냥 차갑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운휘만큼은 이 일에 참여해야 한다.
[오늘 자정에 찾아가지.]
누남천은 여운휘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그 말을 들었을 텐데도 여운휘는 전혀 내색
도 하지 않았다.
'저 녀석은 도대체 속마음을 모르겠단 말이야?'
말은 그러했지만 이 네 명 중에서 가장 믿음이 가는 것 또한 그라는 것을 누남천은
부인하지 못했다.
반개 철혈우에게 안내되어진 거처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마치 어디서나 볼 수 있
는 듯한 객잔의 모습이었다.
침상 위에 짐을 놓은 여운휘는 자리에 앉았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이 제안은 꽤나 당혹스러웠다. 그러한 부대에 들어선다
는 건 곧 무림맹의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사항
들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분명 여러 가지 면에서 효과적이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지만 선뜻 대답을 내리기도
힘들다.
'설린……'
무림맹의 일에 깊이 관여할수록 유설린의 옆을 지키는 시간은 적어진다.
그녀가 애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이제는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일어서는 여인
이라는 것도 안다.
일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오히려 그녀의 옆에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이러다가 가
장 중요한 때 유설린의 옆을 지키지 못하지는 않을까 그것이 걱정인 게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있던 여운휘의 귓가에 쥐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찌직! 찍! 찌직!
소리가 들려온 것은 창 밖.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나무에 있던 누군가가 방 안으로 몸을 날렸다. 여운휘는 태연히 상대가 들어온 후에
창문을 닫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아는 탓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것은 누남천이었다.
그는 웃으며 여운휘를 바라봤다.
"용케 알아차렸군."
"그렇게 들으라고 하는 걸 모를 리야 있겠소."
"오늘 밀마를 들었을 거라 생각해서 혹시나 해서 사용해 봤는데 알아차리다니 용하
군."
"굳이 창문을 넘어 올 필요가 있었소?"
여운휘의 말 대로다. 누남천이 여운휘에게 할 말이 있다 한들 그냥 문으로 찾아오면
될 일이다. 그런데 누남천은 번거롭게 창문을 이용해서 안으로 들어섰다.
웃고 있던 누남천이 답했다.
"네가 내 밀마를 알아듣지 못했다면 정문으로 오려고 했지. 하지만 알아들었지 않는
가."
장난처럼 말을 내뱉은 누남천은 곧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한 사람의 방에만 찾아온다면 다른 자들이 나름대로 시기를 하지 않겠는가. 너만 편
애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애초에 문젯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 생각
해서 이리 행동한 것이네. 나름대로 밀마에 재미도 붙였고 말이야. 하하!"
여운휘는 다시 침상에 걸터앉았다. 누남천 또한 웃음을 멈추고 옆에 자리를 잡았다.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같소만."
"물론."
누남천은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뭔가 말을 하기 미안한 듯 그는 어기적거렸다.
"음, 미안한 말이네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이 일에 합류했으면 한다."
"본인의 의사에 맡긴다고 들었소 만?"
"그래. 원래는 그렇지. 또한 그리 할 것이고. 하지만 너는 좀 달라."
"뭐가 다르단 말이요?"
"넌…… 흑색 기마대와 싸웠으니까. 그리고 흑색 기마대의 사이에서 모든 일행을 살
리고 도망을 치게 한 장본인이니까."
"날 이용하겠다는 거군."
여운휘는 알아차렸다.
무림맹에서 원한 것은 진군휘라는 이름이다.
아직 무림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흑색 기마대와의 싸움에서 단신으로 그들과 맞서면
서 모두를 도망치게 한 그다.
"미안하군. 조만간 자네가 흑색 기마대와 벌였던 일전에 대해 무림에 소문이 날 걸
세. 정 원치 않는다면 지금 말하게. 무림맹에서는 반드시 너만은 합류시키게끔 하라
고 했지만 그래도 인연이 있는 나로서는 그리 말할 수만도 없구나."
여운휘는 침묵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하겠소."
"정말인가?"
"다시 내 말이 듣고 싶은 거요?"
"괜히 너에게 짐을 짊어지게 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어서 그러는 게야."
"그 정도를 짐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소. 그리고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차라리 순
순히 받아들이겠소."
누남천은 여운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라고 해서 미안한 마음이 없을 리가 없다.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래도 꽤
나 인연이 깊지 않던가. 더군다나 그가 없었다면 지금 누남천은 살아 있을 수도 없었
다.
분명 여운휘가 없었다면 누남천은 흑색 기마대의 창 아래에서 이미 오래 전에 숨이
끊어져 있을 게다.
어떻게 본다면 여운휘는 누남천의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말을 더 이으려던 누남천은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창문을 통해 다시 밖으
로 나갔다. 누남천이 나가자마자 여운휘는 창문을 닫았다.
달칵.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들이 민 것은 추레한 외모의 소유자인 표향천투 운빈이다.
"역시 자지 않고 있었군 그래."
"무슨 일이지?"
"지금 모두가 모일 예정이네. 자네도 오게."
여운휘는 고개를 돌렸다.
'귀찮아.'
굳이 다른 세 명을 만나면서까지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픈 마음은 없다.
이미 고민을 하다가 이 일에 적극 가담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꼭 가야 하는 건가?"
운빈의 낯빛이 변했다.
말을 낮추는 거야 어느 정도 비슷한 연배이니 그렇다고 치지만 그래도 뭔가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자네가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말이야 너무 곧은 대나무는 일찍 부러지는 법
이야. 안 와도 상관은 없네만 만약 같이 일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서로에게 앙금이
생기겠지. 올 거면 좌리검 백 공자의 거처로 오게."
말을 마친 운빈은 문을 쾅하니 닫고 나갔다.
여운휘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언제나 홀로 움직이던 여운휘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마
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의식하고, 그에게 어떻게 비추기 위해서 맘에도 없는 행동을 하고.
짜증이 치민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싶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마쳤을 때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귀찮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지만 해야 한다.
여운휘는 문을 열고 좌리검 백산의 방으로 움직였다.
안에는 세 명의 무인이 모여 있었다.
좌리검 백산은 예의 그 모습처럼 단정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묘한 기품이 몸에
서 풍기고 있었다.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사람들과 비슷비슷한 외모이거늘 그 기묘
한 분위기 탓에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그에 반해 운빈은 너무 추레하다. 어딜 가나 단숨에 주목받을 수 있는 외모지만 그
건 결코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다.
반면 하을지는 운빈과는 정 반대다.
등뒤에 찬 쌍검부터 해서 그렇다. 쌍검을 쓰는 무인이, 그것도 미모가 삐어난 여인이
다. 눈이 가는 건 당연하다.
조용히 앉아 있던 좌리검 백산이 입을 열었다.
"그 자는 안 오는 거요?"
전부 자신보다 어린 나이거늘 백산은 온말을 사용했다. 그는 상대가 나이가 많던 적
던 무조건 온말을 사용하는 자다.
그리고 그 말투에서는 학자의 기품이 풍겼다.
"오지 않으려는 듯 하더이다."
"그럼 셋이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여운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셋의 얼굴에 일순 다른 감정들이 스쳐지
나갔다. 여운휘가 와서 그런 것이 아니다.
'대단하군. 언제 다가온 거지?'
백산은 그랬다.
'내, 내가 기척조차……!'
운빈은 놀라면서도 뭔가 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호오!'
하을지는 감탄과 동시에 싸우고 싶다는 투지를 발했다. 그녀는 강한 무인이라고 하
면 당장이라도 검을 섞으려 드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인지 여운휘를 바라보는 하을지
의 눈빛은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가진 어린 아이처럼 초롱초롱했다.
"왔군."
"……."
운빈의 말에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여운휘는 빈자리에 앉았다.
좌리검 백산은 여운휘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그는 여운휘를 보며 알게 모르게 싸
움을 벌이고 있었다.
'공격을 할거라면……'
백산은 여운휘를 다시금 살폈다.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빈틈이 없다. 만약 싸워야 한다면…… 차라리 검을 놓고 물러서야 한다.'
백산은 강해 보이는 상대를 보면 항상 머릿속에서 그자와 싸우곤 한다. 때론 이기
고, 때론 패한다. 패하고 나서는 그 요인에 대해 분석하고 재차 그와 싸운다.
그 전에 패했다 해도 십에 팔은 승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반복하면 그때는 십에
십 거의 승리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처음으로 검을 놓고 물러서야 한다는 생각이 든 상대
가 나타났다.
너무 빠른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단련 된 백산의 직감은 저자와는 결코 싸우
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비단 저 자 뿐만이 아니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상대하기 껄끄럽다.
운빈은 무엇인가 던지는 것에 능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이라고 해도 결코 방
심할 수 없다.
공격 거리도 기니 상대하기 까다롭다.
그렇지만 단점도 있다. 원거리에는 분명 강하다. 허나 가까이 다가서면 오히려 반대
가 된다. 무엇인가를 던지는 운빈에게 근접전은 상당히 분리하다.
그리고 저 여인 하을지는……
"정식으로 소개나 하죠? 제 이름은 하을지라고 해요. 적미쌍검이라고 불리죠."
백산의 생각이 깨졌다. 하을지의 소개가 끝나자 운빈이 일어섰다.
"표향천투 운빈이오."
"좌리검 백산이오."
"진군휘요."
소개가 끝나자 하을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이곳에 모인 건 오늘 누 대협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이죠.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모르겠지만 이 일은 죽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에요."
흑색 기마대가 개입되는 일이다.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시작하는 것이 옳다.
"다들 어쩌실 생각인가요? 지금 당장 대답을 하시는 건 힘드시겠지만 나름대로 생각
은 있으실 테니까요."
"한다."
모두의 눈이 한다고 대답한 여운휘에게로 쏟아졌다.
하을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을 했다. 망설임이라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
다.
하을지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단호…… 하시네요."
원래부터 붉은 그녀의 눈이 한층 더 붉어졌다. 흥미가 돈 것이다.
"이유가 있으신가요?"
"……"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유설린을 위해서라고 말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누남천의 부
탁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아, 한 가지가 있다. 개인적인 사정 딱 한 가지가.
"죽여야 할 놈이 있거든."
"……?"
"흑색 기마대의 대주. 그 놈은 내가 죽인다."
"다, 당신!"
하을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처음 죽여야 할 놈이 있다는 말에 그것과 이 일이 무슨 상관이 있나 했다. 그렇지만
그 대상이 흑색 기마대의 대주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흑색 기마대의 대주를 죽이
기 위해서라면 이 무리에 들어오는 것이 충분히 설명이 된다.
"그 자는 강해요."
"강하니까 죽이려 하는 거다. 약한 자였다면 애초부터 죽이려는 마음도 들지 않았
지."
"호호! 맞는 말이긴 하군요."
하을지는 급기야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사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와 더불어 싸워보고 싶은 생각도 치솟았
다.
흑색 기마대의 대주의 실력을 하을지가 알 턱이 없다. 하지만 예전 정사대전에서 활
약하던 흑색 기마대의 대주는 마교의 교주보다도 훨씬 강했다고 한다.
지금 또한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장문인 정도가 아니라면 상대하기 힘든
수준이라는 건 예상할 수 있다.
용기일까 아니면……
"나도 하겠네."
좌리검 백산이다. 그 또한 이 일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웃고 있던 하을지도 말했다.
"전 애초부터 할 생각이었어요. 저도 하죠."
운빈은 이토록 쉽게 답을 내리는 셋을 보며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목숨이 달린 일이다. 그러한 일을 어떻게 이리 쉽게 답을 내린단 말인가.
모두의 눈이 운빈에게로 향했다.
답을 내리지 않은 것은 그 뿐이니까.
"끄응……"
운빈은 신음성을 토해냈다. 분위기가 어서 네 의사를 말하라는 듯이 흘러간 탓이다.
조금 더 진중하게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리려고 했거늘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뭐, 나도 하겠소."
떨떠름하게 운빈 또한 이 일에 합류하겠다고 말했다.
하을지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저희 넷 모두 앞으로는 동료가 되겠군요."
"그렇게 되겠구려 소저! 앞으로 사이 좋게 지내봅시다! 하하!"
하을지의 말을 받으며 운빈이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지만 여운휘와 백산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