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호(臥虎)
쏴아아……
비가 마치 폭풍우처럼 쏟아진다. 봄이거늘 떨어지는 빗줄기는 꽤나 굵다. 우기(雨
期)에 쏟아지는 비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날씨도 꽤나 습하다. 연일 내리는 비 탓이다.
강하게 떨어지는 빗줄기들은 굵게 자란 거목(巨木)들을 때렸다.
두두두 하며 거목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북을 울리는 듯하다.
숲은 온통 나무로 가득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 보였
다. 그리고 그 비를 맞으며 한 무인이 서 있었다.
강한 빗줄기가 온 몸을 두드리는데도 사내는 즐거운 듯 해 보였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 눈을 가리자 사내는 천천히 쓸어 올렸다. 체구가 작은 사내다.
그런데 몸에서 풍기는 기도만큼은 결코 작지 않다.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당당하게 한발한발 내딛는 사내의 옆에는 아무도 없다. 아니, 아무도 없는 것이 아
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자들의 눈동자가 사내에게 박혔다. 그 빽빽한 거목들만
큼 사내의 주변에는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숨어 있었다.
사내는 아는 지 모르는 지 여전히 만면에 웃음으로 가득하다. 숨어 있는 모습들을
보면 제대로 훈련을 받은 자들일 게 분명하다.
아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까?
미소를 지은 채로 걷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다리를 멈췄다.
그의 입이 나지막하게 움직였다.
"일살(一殺)."
그리고 새어 나온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그런
데 그때 나무에 있던 인물 중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그는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기가 무섭게 사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명하십시오."
"내가 명한 일은?"
"거의 다 해결되었습니다."
"분명 오늘까지 해결 보라고 했을 텐데?"
"…… 죄송합니다."
"좋아.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사내는 말을 마치고 잠시 빗줄기에 몸을 맡겼다. 언제나 뜨겁게 달아오르는 몸이 차
가운 빗줄기 덕분에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기분이 좋다, 이 차가운 느낌이 너무나 좋다.
침묵하고 있던 사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간 놈들은?"
"삼살(三殺)은 이미 일을 끝내고 돌아왔고 사살(四殺)은 지금 오고 있다고 합니다."
"좋아. 그럼 육살(六殺)은?"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가 침묵했다. 쭉 이어질 듯한 침묵은 금방 깨졌다.
"실패해서 죽었습니다."
"쿡, 그래? 허기야 육살에게 철왕(鐵王) 장오를 죽이라고 한 건 무리였나?"
실패했다는데도 불구하고 사내의 웃음이 잠시 일그러졌을 뿐 곧 원래의 상태로 돌아
갔다. 세 명의 부하가 살행(殺行)을 나섰다. 그리고 두 명은 성공, 한 명은 실패했
다.
"상관없다. 어차피 두 명 이상은 성공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사내는 됐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일살이라고 칭해진 자는 다시 나무 위로 몸을 날
렸다. 먼지처럼 사내가 모습을 감췄다.
조용히 빗줄기에 몸을 맞기고 있던 사내가 손을 흔들었다.
해산을 하라는 사내의 손짓에 주변을 채우고 있던 수많은 자들이 사라졌다.
모두가 사라질 무렵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진자자는 자신의 어깨에 날아든 새
를 찬찬히 바라봤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매다.
사내는 천천히 매의 발에 묶인 종이를 풀었다. 무엇인가로 쌓아 둔 탓에 비에도 전
혀 젖지 않았다.
종이를 펼친 후 천천히 그 내용을 읽어 내리던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소가
사라지고 표정은 진중해졌다.
매가 하늘로 푸드득 날아 올랐다.
은연중에 사내의 몸에서 풍기는 살기 탓이다.
"재미있군."
사내는 종이를 와락 구겼다. 재미있다는 말과는 달리 눈빛에 살기가 짙어진다. 사내
가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빗줄기가 이제는 얼굴을 바로 강타했다.
"그토록 찾던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단 말인가."
얼굴을 때리는 빗줄기를 즐기며 사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유가의 소가주가 그토록 찾던 마교의 소교주라……'
사내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진군휘, 아니…… 여운휘.'
생각해보니 우습다. 이런 기막힌 우연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한 번은 패했지만 결국 이기는 건 나다. 여운휘.'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던 사내는 천천히 손을 양쪽으로 펼쳤다. 무방비로 쏟아
지는 비를 맞으며 마침내 대성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은 호남제일살수인 혈리추검(血釐追劍) 공청이었다.
여운휘와의 패배 이후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림이 시끄럽다.
무림맹과 마교의 일도 그렇고 이런저런 흉흉한 소문이 나돈다.
그 탓에 무림맹에서는 급하게 회의가 벌어졌다.
"이번 달에 셋이 죽었소."
"저번 달에도 다섯, 그 전에도 다섯이 죽었지."
하북팽가의 가주인 팽산후와 누남천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종남파의 장문인인 섬
도(閃刀) 엽송림(葉松林)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몇 달 전부터 갑작스럽게 죽은 무인들이 계획적으로 당한 거라는 말이
요?"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시기가 절묘합니다."
종리회연의 말에 좌중의 인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부터 혹시나 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의문의 죽음들이 겹치고 겹치자 슬슬
그것이 마교의 소행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보다 흑색 기마대에 대해서 들었는데……"
"흑색 기마대가 나타났다는 말은 나도 들었소. 그것이 정말이오 군사?"
"현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은 틀린 정보가 아닌 듯 합니다."
"허어!"
그 순간 사방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자아냈다. 흑색 기마대는 원로 고수들과
각 문파나 세가의 장문인과 가주들조차 두려운 상대다. 직접 대하지 못했다 한들 귀
가 따가워라 들은 자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
"제안? 갑자기 제안이라니?"
"흑색 기마대처럼 우리 무림맹을 상징할 세력을 만드는 겁니다."
종리회연의 말에 모두가 귀가 솔깃했다. 그만큼 그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조용히 종리회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누남천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고수들을 모두 뽑아간다면 문파와 세가가 위험하지 않겠
소?"
"물론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마교의 기습을 받을지 모르는 지금 세가의 원로 고수
분들을 뺀다는 것은 분명 무리입니다. 하지만 제가 제안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어
느 정도 어린 나이의 무인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 후기지수들을 이용하자는 말인가?"
감탄하는 엽송림을 바라보며 종리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색 기마대 보다 강한 단체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도 없
는 지금 불가능한 일이다. 흑색 기마대들은 정체가 알려져 있지 않다. 나이 대는 물
론이거니와 대주와 대원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종리회연은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흑색 기마대가 나타났다는 그 말 하나에 정도 무
림이 얼마나 벌벌 떠는가.
기세(氣勢)다. 기세를 잃고서는 이길 싸움도 지게 된다. 흑색 기마대처럼 무림맹에
도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단순한 겉모습만이라도 있고 없고의 차이다.
종리회연은 모두를 한 번 훑어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일은 제가 맹주님께 말씀드리고 이야기를 드리도록 하지요. 그럼 다
음 안건은……"
무림맹에 긴급히 모인 수뇌부들의 회의는 그렇게 반 시진 정도 지속되었다.
서찰이 날아왔다.
우문학은 무림맹에서 날아온 서찰을 들고 유설린의 거처로 찾아갔다. 조금 이른 시
각이긴 했지만 이미 유설린과 여운휘 모두 잠에서 일어난 상태였다.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침 일찍 찾아온 우문학을 바라봤다. 우문학은 유설린
에게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무림맹에서 서찰이 날아왔습니다."
"서찰이요?"
"예."
"저에게 서찰이 왔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소가주님이 아니라……"
우문학은 대답 대신 여운휘를 바라봤다. 유설린은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였다. 우문학은 품속에 넣어 두었던 서찰을 꺼내서 여운휘에게 건넸다.
여운휘는 건네 받은 서찰을 펼쳐서 읽었다.
눈으로 서찰의 내용을 훑어 본 여운휘는 종이를 접어서 품안에 넣었다.
유설린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서찰이야?"
"누남천이 보낸 서찰이다."
"광한검 어르신이 무슨 일로?"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군. 서찰에는 왜 오라고 하는지는 적혀져 있지 않았으니까."
"오라고 한 거야?"
여운휘는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림맹의 서찰을 여운휘는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유설린을 놔두고 또
홀로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문학이 있고 풍운조가 있다.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힘을 지닌 유가도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외숙부라고 밝힌 암황까지 있다.
유설린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확률은 극히 미미하다. 그렇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가야겠네?"
"어."
유설린은 여운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웃기만 했다.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거절을 할 처지가 아니다. 이번에도 유설린의 옆을 떠나야만 한다.
"무림맹으로 가는 거야?"
"아니. 다른 곳으로 오라는 군."
이상한 일이다. 누남천이 보낸 서찰임은 분명한데 무림맹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오라
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림맹과 가까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말을 타고 삼일 정도
는 가야 하는 거리로 누남천이 그를 부른 것이다.
"다른 곳?"
"그래. 사천성에 있는 대파산(大巴山)으로 오라고 하더군."
"사천? 꽤 머네? 왜 무림맹이 아닌 그곳으로 부른 거지?"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지."
옆에 있던 우문학이 물었다.
"그래 언제쯤 오라는 건가?"
"서찰을 받는 즉시."
지금 즉시 움직여야 한다는 말에 유설린의 눈가에 걱정이 일었다. 몸 상태가 많이
좋아져 활동하는데는 불편이 없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제 상태가 된 건 아니다.
그녀 또한 여운휘가 가지 않았으면 하는 건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래서 안 된다는
걸 안다. 여운휘를 그냥 묶어 두기에는 그의 실력이 너무나 아깝다.
곁에 있고 싶지만 그녀 또한 유가의 소가주라는 직함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처지
다.
여운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겠군. 우문학, 내가 없는 동안……"
그는 유설린을 바라봤다. 유설린을 바라보던 여운휘는 우문학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탁하지."
"걱정 말게. 자네가 없는 동안 소가주님을 지켜 드릴 테니까."
여운휘는 우문학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우문학이 없었다면 이토록 움직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우문학이라면 어떻게든 유
설린을 지켜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우문학에게만큼은 유설
린을 맡길 수가 있다.
여운휘가 가볍게 행장을 꾸리는 것을 유설린과 우문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바
라봤다. 옷 몇 벌과 노잣돈을 챙긴 여운휘는 짐을 어깨에 맸다.
"무슨 일인지 모르니까 언제 돌아온다고 정확한 기약은 힘들겠군. 그렇지만…… 최
대한 빨리 돌아오마."
"아냐. 괜히 나 때문에 신경 쓰지 마. 난 더 이상 애가 아니잖아. 나 휘가 돌아오
기 전까지 혼자서라도 열심히 할게."
"알고 있다. 네가 애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여운휘는 몸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배웅을 할 필요는 없다. 무슨 일인지 알게 되면 서찰을 날리지."
말을 마친 여운휘는 주저 없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설린 또한 멀어져 가는 여운휘를 보며 단 한 마디
도 남기지 않았다. 여운휘의 모습이 완벽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유설린은 입술을 들
썩거렸다.
"다치지 마……"
우문학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
어버렸다.
타닥타닥.
불이 붙은 나뭇가지들이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주변은 온통 어둡다. 꽤나 깊은 밤인 탓이다.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 밤이 꽤나 긴
편이다. 여운휘는 타들어 가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불에 휩싸이는 듯 하더니 다시 사그라 든다. 불꽃이 마치 신이라도 난 듯
이 미친 듯이 춤을 춘다. 나뭇가지를 태우면서 신이라도 난 것처럼.
하루 종일 달렸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그다지 피곤하지 않은 모양이다. 대파산에 도
착하기 위해서는 대략 이틀 정도는 더 움직여야 한다고 계산해야 한다.
대파산은 사천과 섬서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가벼운 식사를 한 여운휘는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었다.
부스럭.
상념에 잠겨 있던 여운휘의 귓가에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였지만 항시 주
위의 모든 것에 신경을 쏟고 있는 여운휘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넘실거리는 불꽃을 바라보던 여운휘는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린 소리다. 사람인지 아니면 동물인지도 확실히 답을 내리기는 힘들지만
그 이후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가볼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정하지 못했을 때 다시금 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운휘는 마음을 굳혔다.
발로 흙을 밀어 불을 끈 여운휘는 천천히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이 꺼지니 순식간에 주변은 어두컴컴해졌다.
어둠 속에서 여운휘의 검만이 찬란하게 검광을 토해냈다.
한 발 한 발 내딛으면서 여운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움직이지 않아.'
천천히 나무 사이를 움직이던 여운휘가 멈춘 것은 깊게 파진 동굴을 보고였다. 방
금 전 근방을 돌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동굴이다.
동굴을 보는 순간 여운휘는 자신이 들었던 소리가 동물의 것이라고 판단했다. 동굴
안에서 살고 있는 동물이 부스럭대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과민반응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 여운휘는 몸을 돌렸다.
그때,
"끄응……"
정말 작은 소리였지만 여운휘는 들어 버렸다.
몸을 돌렸던 그는 다시금 동굴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신의 귀가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 들은 것은 분명 동물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다. 사람의 신음소리였어.'
여운휘는 검을 든 채로 동굴의 입구에 다가갔다. 안은 꽤나 깊은 지 끝이 보이지 않
았다.
칠흙 같은 어둠이 공포를 주기 충분하다. 그런데 여운휘는 그 안으로 성큼 발을 들
이밀었다.
사방은 온통 어두웠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발을
내밀고 있는데 호흡은 고르다. 평소 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이 숨을 들이키고 내뱉
어냈다.
그렇지만 움직임은 다소 더디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평소보다 더뎠고, 들고
있는 검이 마치 나뭇잎 마냥 흔들거린다.
동굴은 외길이었다.
꺾이는 곳 앞에 이른 여운휘는 검을 치켜들었다. 동굴 내부에 들어와서 들은 신음소
리는 이 근방에서 터져 나왔다.
여운휘는 벽에 몸을 바짝 기댔다. 건너편 쪽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하다. 기척은 확연하게 느껴지는데 그 움직임은 크지 않다.
피 냄새까지도 풍긴다.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지만 여운휘는 그것을 알아차
렸다.
검을 든 채로 여운휘는 동굴 옆으로 몸을 돌렸다.
동굴의 끝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한 사내를 보았다.
"…… 헉헉."
누워 있는 사내는 호흡이 상당히 거칠었다. 거기다가 얼굴 표정은 마치 썩은 간 마
냥 거멓다. 여운휘는 혹시나 모를 일 때문에 검을 들고 누워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
다.
가까이 다가간 여운휘는 상대가 제대로 미동도 하지 않자 손으로 그를 흔들었다.
사내는 실눈을 뜨고 여운휘를 바라봤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입술을 들
썩거리고 있지만 입안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열이 상당하군.'
몸을 만지다 보니 알아차렸다. 사내의 몸에서 나는 열기가 보통을 넘어섰다.
사내는 꽤나 나이를 먹은 듯 해 보였다. 사십대는 넘어 보이는 외향에 턱은 수염으
로 가득하다. 하지만 다부진 턱이 그의 외향을 꽤나 강하게 보이게끔 만든다.
허리에는 검도 차고 있다. 장식용 검은 아니다. 실전용 검…… 무인이다.
여운휘는 상대가 연극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맥을 집었다.
맥이 불규칙 적으로 뛰고 있었다.
맥을 집기 위해 손을 든 여운휘는 그제야 사내의 등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여운휘는 사내의 몸을 천천히 엎드리게끔 했다. 등을 본 여운휘는 눈살을
찌푸렸다.
'심하군.'
피 냄새를 풍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 사내는 옷을 찢어 지혈을 했다. 하지만 지
혈을 하던 옷은 이미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드러난 상처는 꽤나
깊다.
한 두 사람에게 당한 흔적이 아니다. 어깨죽지에 나 있는 상처는 조(爪)로 인해 난
상처고, 가장 심한 등을 그은 상처는 검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적어도 세 명 이
상이 검을 날렸다. 상처도, 검로(劍路)도 제각기 다르다. 전혀 다른 세 가지의 검법
인 것이다.
여운휘는 사내의 옷을 벗겼다.
옆구리 쪽에 새파랗게 멍이 들었다. 마치 봉에 당한 흔적 같다.
그냥 두고 갈 수도 있지만 어차피 지금은 쉬려고 했던 시간이다. 조금 수고스럽기
는 하지만 이곳에 두고 간다면 백(百)에 백(百) 죽음은 불가피하다.
여운휘는 가부좌를 틀고 사내의 몸에다가 손을 가져다 댔다.
진기는 멀쩡하게 몸 안을 돌고 있다. 약해지긴 했지만 진기는 확실히 살아있다.
'살릴 수 있겠군.'
여운휘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워 있던 사내가 잔 경련을 일으켰다.
울컥.
마침내 입이 열리며 사내는 검은 피를 토해냈다.
"크헉!"
고통스러운지 사내는 비명을 토해내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들이 안으로 굽었
다. 그 상태로 경련을 일으키던 사내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허억, 허억……"
순간적으로는 고통스러워했지만 호흡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한동안 조용히 누워서
숨을 몰아쉬던 사내의 입이 열렸다.
"고…… 맙네."
목소리는 떨렸지만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아까 와는 천차만별의 차이다. 여운휘
는 벽에 몸을 기댔다. 치료가 끝냈으니 잠시 쉬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산중에서 무슨 연유로 이토록 당했는지 궁금했지만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던 여운휘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누워 있던 사내가 억
지로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려고 하는 것이다.
"누워 있는 게 좋을 텐데."
"일어났는가?"
아까보다도 더욱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이런 산중에서 큰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
던 사람인데 목소리가 밝다. 천성적으로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인 듯 싶었다.
낑낑거리면서 사내는 마침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벽에 몸을 기댄 채로 거칠
게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이거야 원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군."
사내의 몸은 꽤나 컸다. 상처를 치료하면서 여운휘는 이 사내가 많은 훈련을 거쳤다
는 것을 알아차렸다. 몸을 메우고 있는 상처들도 그렇지만 잘 만들어진 몸 때문이
다.
비대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는 거대한 몸에 군살이 없다. 거기다가 내상을 치료하려
다가 알게된 바로는 내공도 일정 수준 이상이다.
사내는 땀을 흘리면서 여운휘를 바라봤다.
"자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군. 정말 고맙네."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었으니 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
사내는 아직도 말하는 것이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웃으면서 여운휘에게 말을
건넸다.
"아닐세. 그래도 자네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난 죽었을 테니 고마운 건 고마운 게
지. 아, 이름이 무엇인가?"
여운휘는 사내를 바라봤다. 굳이 대답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랬다가
는 말만 길어질 뿐이다.
"진군휘."
"음?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사내는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무엇인가가 생각났는지 양
손을 마주치려고 했다. 하지만 어깨에 있는 상처 탓에 그는 신음소리만 토해냈다.
잠시동안 약하게 신음 소리를 토해내던 사내가 말했다.
"생각났네. 자네가 혈리추검 공청을 꺾었다는 바로 그 진군휘인가?"
"그런 자와 싸운 적이 있긴 했지."
"허! 자네 유명인이었군."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내를 바라보던 여운휘의 눈동자는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뭐지?'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사내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을 듣고 난 후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 철비상(鐵庇霜). 내 이름 석자네."
여운휘는 이름을 듣고서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
았다. 순간 표정이 변했던 철비상이지만 지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안한 부탁인데 식사 한끼만 해 줄 수 없는가? 원래대로라면 내가 식사를 대접해
야겠지만 몸이 이래서 말이야."
철비상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미안하지만 고기로 좀 부탁하네."
"당신은 환자야."
"고기를 먹지 않으면 먹은 것 같지 않아서 그러네. 부탁하이."
대꾸도 하지 않고 여운휘는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시진 정
도가 흐른 후 여운휘는 양손에 세 마리의 토끼를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목숨이 끊어진 토끼를 구석에 던져두고 여운휘는 나뭇가지들을 가지고 와 불을 붙였
다.
자리에 앉은 여운휘는 천천히 토끼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철비상은 묵묵히 불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토끼가 불 위에 올라섰고 노릇노릇하게
익기 시작했다.
철비상은 토끼 하나를 건네 받자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여기에 술 한잔 있다면 정말 좋을 터인데 아쉽군."
술 이야기를 하면서도 허기가 졌던지 철비상은 허겁지겁 토끼 고기를 뜯기 시작했
다. 여운휘는 이미 식사를 했던 탓에 토끼 고기에 손도 대지 않았다.
세 마리의 토끼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포만감에 젖었는지 철비상은 벽에 몸을 기대고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렇게 웃고 있던 철비상은 여운휘의 눈이 계속해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천천
히 웃음을 거두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철비상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술이 비록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배도 불렀겠다, 자네 같이 좋은 사람을 만나 기분
도 한껏 좋으니 이제 원도 없네. 나를…… 죽이게."
갑작스러운 철비상의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낮
은 목소리로 그의 말에 답했다.
"알아차렸나."
"물론."
"왜 속이지 않았지? 진짜 이름만 밝히지 않았다면 되었을 텐데."
"그 전에 내 얼굴 표정이 변하는 걸 자네가 보지 않았는가. 생명을 살려준 은인에
게 이름을 속이는 건 예의가 아니지. 비록 그 은인에게 목숨을 빼앗긴다 해도 말이
야. 원망 따위는 하지 않겠네."
"철사자(鐵獅子) 철비상. 듣던 대로 대단한 몸이더군. 몸만 멀쩡했다면 나 또한 쉽
사리 상대할 수 없었을 거다."
철비상의 별호는 철사자다. 무림에서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하다. 특히 정
파 무인들에게 철사자 철비상은 증오의 대상이다.
수많은 정파 무림인들이 그의 손에서 죽어 나자빠졌다. 무림맹에서 임시적으로 만
든 단체를 단신으로 궤멸시켰던 적도 있다.
그 탓에 무림맹에서 그를 공적(公敵)으로 선언한 상태였다.
그는 대단한 외공의 소유자이기도 하지만 내공 또한 빼어난 고수다.
그의 일권(一拳)은 천지를 울린다.
실제로 그와 비무를 한 자 중에서 철비상의 주먹을 오 초 이상 받아낸 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강호십일객에는 끼지 못했지만 결코 그들보다 하수가 아니라는
평을 받는 무인이 바로 철사자 철비상인 것이다.
"몸에 난 상처는 누구에게 당한 거지."
"무당파 말코도사들 열 놈. 소림사 땡중 다섯 놈. 살수라고 나불거리는 놈들 세
명. 종남파 세 명. 알 수 없는 놈들 스물 두 명."
마흔 세 명이다. 철사자 철비상은 그 마흔 세 명을 격살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게 목숨을 잃을 정도의 심각한 상처를 입었던 것이고.
"왜 죽였지?"
"날 죽이려고 했으니까. 그냥 죽어 줄 정도로 난 호인이 아니거든."
"그런데 나에게는 죽이라 하지 않았나. 그냥 죽어 줄 호인은 아니라면서 나에게는
죽어주겠다는 건가?"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
사방은 온통 어두웠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발을
내밀고 있는데 호흡은 고르다. 평소 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이 숨을 들이키고 내뱉
어냈다.
그렇지만 움직임은 다소 더디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평소보다 더뎠고, 들고
있는 검이 마치 나뭇잎 마냥 흔들거린다.
동굴은 외길이었다.
꺾이는 곳 앞에 이른 여운휘는 검을 치켜들었다. 동굴 내부에 들어와서 들은 신음소
리는 이 근방에서 터져 나왔다.
여운휘는 벽에 몸을 바짝 기댔다. 건너편 쪽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하다. 기척은 확연하게 느껴지는데 그 움직임은 크지 않다.
피 냄새까지도 풍긴다.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지만 여운휘는 그것을 알아차
렸다.
검을 든 채로 여운휘는 동굴 옆으로 몸을 돌렸다.
동굴의 끝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한 사내를 보았다.
"…… 헉헉."
누워 있는 사내는 호흡이 상당히 거칠었다. 거기다가 얼굴 표정은 마치 썩은 간 마
냥 거멓다. 여운휘는 혹시나 모를 일 때문에 검을 들고 누워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
다.
가까이 다가간 여운휘는 상대가 제대로 미동도 하지 않자 손으로 그를 흔들었다.
사내는 실눈을 뜨고 여운휘를 바라봤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입술을 들
썩거리고 있지만 입안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열이 상당하군.'
몸을 만지다 보니 알아차렸다. 사내의 몸에서 나는 열기가 보통을 넘어섰다.
사내는 꽤나 나이를 먹은 듯 해 보였다. 사십대는 넘어 보이는 외향에 턱은 수염으
로 가득하다. 하지만 다부진 턱이 그의 외향을 꽤나 강하게 보이게끔 만든다.
허리에는 검도 차고 있다. 장식용 검은 아니다. 실전용 검…… 무인이다.
여운휘는 상대가 연극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맥을 집었다.
맥이 불규칙 적으로 뛰고 있었다.
맥을 집기 위해 손을 든 여운휘는 그제야 사내의 등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여운휘는 사내의 몸을 천천히 엎드리게끔 했다. 등을 본 여운휘는 눈살을
찌푸렸다.
'심하군.'
피 냄새를 풍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 사내는 옷을 찢어 지혈을 했다. 하지만 지
혈을 하던 옷은 이미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드러난 상처는 꽤나
깊다.
한 두 사람에게 당한 흔적이 아니다. 어깨죽지에 나 있는 상처는 조(爪)로 인해 난
상처고, 가장 심한 등을 그은 상처는 검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적어도 세 명 이
상이 검을 날렸다. 상처도, 검로(劍路)도 제각기 다르다. 전혀 다른 세 가지의 검법
인 것이다.
여운휘는 사내의 옷을 벗겼다.
옆구리 쪽에 새파랗게 멍이 들었다. 마치 봉에 당한 흔적 같다.
그냥 두고 갈 수도 있지만 어차피 지금은 쉬려고 했던 시간이다. 조금 수고스럽기
는 하지만 이곳에 두고 간다면 백(百)에 백(百) 죽음은 불가피하다.
여운휘는 가부좌를 틀고 사내의 몸에다가 손을 가져다 댔다.
진기는 멀쩡하게 몸 안을 돌고 있다. 약해지긴 했지만 진기는 확실히 살아있다.
'살릴 수 있겠군.'
여운휘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워 있던 사내가 잔 경련을 일으켰다.
울컥.
마침내 입이 열리며 사내는 검은 피를 토해냈다.
"크헉!"
고통스러운지 사내는 비명을 토해내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들이 안으로 굽었
다. 그 상태로 경련을 일으키던 사내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허억, 허억……"
순간적으로는 고통스러워했지만 호흡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한동안 조용히 누워서
숨을 몰아쉬던 사내의 입이 열렸다.
"고…… 맙네."
목소리는 떨렸지만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아까 와는 천차만별의 차이다. 여운휘
는 벽에 몸을 기댔다. 치료가 끝냈으니 잠시 쉬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산중에서 무슨 연유로 이토록 당했는지 궁금했지만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던 여운휘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누워 있던 사내가 억
지로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려고 하는 것이다.
"누워 있는 게 좋을 텐데."
"일어났는가?"
아까보다도 더욱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이런 산중에서 큰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
던 사람인데 목소리가 밝다. 천성적으로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인 듯 싶었다.
낑낑거리면서 사내는 마침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벽에 몸을 기댄 채로 거칠
게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이거야 원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군."
사내의 몸은 꽤나 컸다. 상처를 치료하면서 여운휘는 이 사내가 많은 훈련을 거쳤다
는 것을 알아차렸다. 몸을 메우고 있는 상처들도 그렇지만 잘 만들어진 몸 때문이
다.
비대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는 거대한 몸에 군살이 없다. 거기다가 내상을 치료하려
다가 알게된 바로는 내공도 일정 수준 이상이다.
사내는 땀을 흘리면서 여운휘를 바라봤다.
"자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군. 정말 고맙네."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었으니 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
사내는 아직도 말하는 것이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웃으면서 여운휘에게 말을
건넸다.
"아닐세. 그래도 자네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난 죽었을 테니 고마운 건 고마운 게
지. 아, 이름이 무엇인가?"
여운휘는 사내를 바라봤다. 굳이 대답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랬다가
는 말만 길어질 뿐이다.
"진군휘."
"음?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사내는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무엇인가가 생각났는지 양
손을 마주치려고 했다. 하지만 어깨에 있는 상처 탓에 그는 신음소리만 토해냈다.
잠시동안 약하게 신음 소리를 토해내던 사내가 말했다.
"생각났네. 자네가 혈리추검 공청을 꺾었다는 바로 그 진군휘인가?"
"그런 자와 싸운 적이 있긴 했지."
"허! 자네 유명인이었군."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내를 바라보던 여운휘의 눈동자는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뭐지?'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사내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을 듣고 난 후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 철비상(鐵庇霜). 내 이름 석자네."
여운휘는 이름을 듣고서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
았다. 순간 표정이 변했던 철비상이지만 지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안한 부탁인데 식사 한끼만 해 줄 수 없는가? 원래대로라면 내가 식사를 대접해
야겠지만 몸이 이래서 말이야."
철비상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미안하지만 고기로 좀 부탁하네."
"당신은 환자야."
"고기를 먹지 않으면 먹은 것 같지 않아서 그러네. 부탁하이."
대꾸도 하지 않고 여운휘는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시진 정
도가 흐른 후 여운휘는 양손에 세 마리의 토끼를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목숨이 끊어진 토끼를 구석에 던져두고 여운휘는 나뭇가지들을 가지고 와 불을 붙였
다.
자리에 앉은 여운휘는 천천히 토끼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철비상은 묵묵히 불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토끼가 불 위에 올라섰고 노릇노릇하게
익기 시작했다.
철비상은 토끼 하나를 건네 받자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여기에 술 한잔 있다면 정말 좋을 터인데 아쉽군."
술 이야기를 하면서도 허기가 졌던지 철비상은 허겁지겁 토끼 고기를 뜯기 시작했
다. 여운휘는 이미 식사를 했던 탓에 토끼 고기에 손도 대지 않았다.
세 마리의 토끼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포만감에 젖었는지 철비상은 벽에 몸을 기대고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렇게 웃고 있던 철비상은 여운휘의 눈이 계속해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천천
히 웃음을 거두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철비상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술이 비록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배도 불렀겠다, 자네 같이 좋은 사람을 만나 기분
도 한껏 좋으니 이제 원도 없네. 나를…… 죽이게."
갑작스러운 철비상의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낮
은 목소리로 그의 말에 답했다.
"알아차렸나."
"물론."
"왜 속이지 않았지? 진짜 이름만 밝히지 않았다면 되었을 텐데."
"그 전에 내 얼굴 표정이 변하는 걸 자네가 보지 않았는가. 생명을 살려준 은인에
게 이름을 속이는 건 예의가 아니지. 비록 그 은인에게 목숨을 빼앗긴다 해도 말이
야. 원망 따위는 하지 않겠네."
"철사자(鐵獅子) 철비상. 듣던 대로 대단한 몸이더군. 몸만 멀쩡했다면 나 또한 쉽
사리 상대할 수 없었을 거다."
철비상의 별호는 철사자다. 무림에서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하다. 특히 정
파 무인들에게 철사자 철비상은 증오의 대상이다.
수많은 정파 무림인들이 그의 손에서 죽어 나자빠졌다. 무림맹에서 임시적으로 만
든 단체를 단신으로 궤멸시켰던 적도 있다.
그 탓에 무림맹에서 그를 공적(公敵)으로 선언한 상태였다.
그는 대단한 외공의 소유자이기도 하지만 내공 또한 빼어난 고수다.
그의 일권(一拳)은 천지를 울린다.
실제로 그와 비무를 한 자 중에서 철비상의 주먹을 오 초 이상 받아낸 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강호십일객에는 끼지 못했지만 결코 그들보다 하수가 아니라는
평을 받는 무인이 바로 철사자 철비상인 것이다.
"몸에 난 상처는 누구에게 당한 거지."
"무당파 말코도사들 열 놈. 소림사 땡중 다섯 놈. 살수라고 나불거리는 놈들 세
명. 종남파 세 명. 알 수 없는 놈들 스물 두 명."
마흔 세 명이다. 철사자 철비상은 그 마흔 세 명을 격살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게 목숨을 잃을 정도의 심각한 상처를 입었던 것이고.
"왜 죽였지?"
"날 죽이려고 했으니까. 그냥 죽어 줄 정도로 난 호인이 아니거든."
"그런데 나에게는 죽이라 하지 않았나. 그냥 죽어 줄 호인은 아니라면서 나에게는
죽어주겠다는 건가?"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
철사자 철비상은 몸을 똑바로 세웠다. 정자세로 앉은 그는 양팔을 무릎 위에 가지런
히 올려놓았다. 고통스러운지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는 눈을 감았다.
"당신이 정말 진군휘라면 단숨에 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네."
말을 마친 철비상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
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에 철비상의 단단해 보이는 목이 보였다. 어깨부터 이
어지는 근육이 상당히 잘 발달되어 있다.
사람의 목을 단숨에 날리는 것은 어렵다.
사람의 목을 날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도부수들도 단숨에 목을 날린다는 것
은 힘든 일이다.
여운휘는 정자세로 앉아 있는 철비상을 향해 말했다.
"난 단 한 번도 당신의 목을 벤다고 한 적이 없다. 굳이 당신의 목을 벨 이유도 없
고 말이야."
정자세로 앉아 있던 철비상이 눈을 떴다. 그는 여운휘를 조용히 응시했다.
"날 살려주겠다는 말인가?"
"당신이 내 앞길을 막지 않는 한 죽일 이유는 없다."
"…… 크, 크하하! 그렇다면 자네는 내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주게 되는 거군."
철비상은 미친 듯이 웃었다. 광기에 젖은 듯 웃어젖히던 그가 천천히 웃음을 멈췄
다.
그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철비상은 흥미가 일었다.
정파의 무인이기에 목숨을 가져갈 거라고 생각했다. 진군휘라면 현재 무림에서 알아
주는 신진 고수가 아니던가. 무림맹과도 꽤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무인이
라고 들었거늘 그런 자가 공적으로 분류 된 자신을 놓아 줄 줄은 몰랐다.
그가 호탕하게 말했다.
"천하에서 이 철사자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준 것은 자네가 처음이네."
"……"
여운휘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철비상은 여운휘의 말이 진심임을 느끼고 다시
금 편하게 자세를 취했다.
한동안 동굴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습기가 꽤나 짖다.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지만 뭔가 우중충하고 기분도 불쾌하게끔
만든다. 그것뿐 만이랴?
꽤나 깊은 탓에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다.
요리를 하던 불이 꺼지자 동굴 안은 어둠으로 변해버렸다. 여운휘는 천천히 나뭇가
지들을 다시 놓고 불을 켜기 시작했다.
어두워졌던 동굴이 다시 빛으로 가득 찼다.
여운휘는 이 침묵이 아무렇지도 않았건만 철사자 철비상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
다.
그는 이 답답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가?"
"몰라."
"모른다고? 이곳에 오는 이유도 모른단 말인가?"
"이유 따위는 듣지도 않고 왔다. 일이 있어서 부른 모양이지 하고."
"일? 무슨 일이기에 이곳……"
말을 하다가 철비상은 입을 닫았다. 그와 여운휘의 처지가 다르다는 것을 잠시 망각
했다. 비록 죽이지는 않았다 한들 상대는 정파의 인물이다. 그들의 사정에 대해 철
비상은 물은 것이고.
입을 닫았던 철비상이 다시금 말했다.
"미안하군. 혹 실례가 됐는지 모르겠네."
"전혀."
여전히 차가운 여운휘의 말투에서 철비상은 상대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정말
말대로 상관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속으로 숨기는 것인지를.
'대단한 자다.'
표정은 변화가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목소리가 떨리지 않으며 눈동자조차 흔들리
지 않는다.
심계(心界)가 깊다는 소리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진군휘라는 무인이 나타나 수많은 무림 고수들을 꺾었다는
말을 철비상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한편으로는 붙어 보고 싶었고, 또한 그 정도 나이의 무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실력이
니 소문이 과장되었다고도 생각했다.
이렇게 직접 만나게 돼서 목숨까지 도움 받게 될 인연일 줄은 정말 몰랐다.
인연인 셈이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만나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만나려 해도 만나지 못하는 것이 무림이다.
"자네와 난 인연인가 보군.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을 보니 말이야."
여운휘는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철비상은 그런 여운휘가 밉살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것이 결코 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형님께 보여드리고 싶군.'
철비상이 이토록 부상을 입고 쓰러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너무나 많은 무
인들이 그의 목을 노렸다. 물론 대부분 우스울 정도로 싸움은 끝났다.
별 같지도 않은 무공 하나 들고 도전하는 자들을 보면 오히려 웃음마저 나왔다.
죽을 줄도 모르고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들.
단 일격에 그들은 뼈가 부러졌고 허공을 날았다.
그렇지만 항시 그런 건 아니다. 정말 드물지만 고수들 여럿이서 합공을 하는 경우
가 있는데 오늘이 그랬고 일전에도 그랬다.
그때는 오히려 상황은 더욱 나빴다. 아직도 수많은 무인들이 주변에 남아 있었지만
철비상은 온 몸의 힘이 빠진 상태였다. 간신히 두 다리로 온 몸을 지탱하고는 있지
만 그마저도 이제는 힘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허공을 날으며 한 무인이 나타나더니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그 무인들을 순식간에
쓸어 버렸다.
운이 좋았다. 그 사내 덕분에 목숨을 건진 셈이다.
철비상은 자신을 구해준 자에게 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며칠을 같이 지내다가 철비
상은 그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의 철비상은 그가 만든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다.
철비상은 여운휘를 형님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솟구쳤다. 형님이라면 분명
이 사내를 마음에 들어 할 것만 같았다.
"자네 시간이 있는가? 시간이 있다면 내 형님을 소개 시켜 드리고 싶은데……"
"남는 시간은 없어.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하더군."
"이런…… 형님이 자네를 본다면 분명 맘에 들어 하실 터인데."
철비상은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뭔가 셋이 모인다면 즐거울 것 같았는데 아쉽게
도 그러한 자리는 연이 아닌 모양이다.
"우리 형님은 대단한 분이시지. 내가 어디 소속인지 아는가?"
"아니."
여운휘는 철사자 철비상을 안다. 이름을 들어봤고 어떠한 무인인지에 대해서도 안
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그 이상 그에 대해서 아는 건 전혀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철비상과 여운휘는 전혀 연이 없던 사람들이었던 탓이다.
"나는 혈교 소속이라네.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형님에게 반해서 혈교에 들어간 것이
지만 그래도 뭐 그게 그것 아니겠는가. 아, 혈교에 대해서는 알겠지?"
여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혈교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탓에 아는
건 이름 정도뿐이지만 분명 들어는 봤다.
"이름은 다소 섬뜩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 오히려 인간적인 정이 넘치는 곳이지."
여운휘는 말을 들으면서 귓등으로 흘렸다. 그다지 흥미가 돌지 않는 이야기인 탓이
다.
"우리 형님은 말이야 혈교의 교주시지."
"당신이 말한 형님이 혈교의 교주?"
"그래."
여운휘는 조금 흥미가 일었다. 혈교라면 무림맹이나 마교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
름대로 힘이 있는 세력이 아니던가.
적어도 혈교라면 장강수로십팔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단체다.
그렇지만 그들은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사파이긴 하나, 마교와는 다른 길
을 걸으며 조용히 세월을 보낸다. 그 탓에 무림맹이나, 마교나 혈교에 대해서는 그
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내 생명을 구해 주신 것이 우리 형님이셨지. 그게 인연이 되어 지금은 형님, 동생
하고 지낸다네."
"강하겠군."
"물론이지. 형님은 나보다도 강하시네. 한때 마교의 교주가 될 수도 있었는데도 불
구하고 자리를 양보하신 분이 아니던가."
"…… 그게 무슨 소리지? 마교의 교주가 될 수도 있었다니?"
여운휘는 철비상의 말을 듣고 되물었다. 마교라는 말이 언급 된 탓이다.
철비상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혈교의 교주이신 우리 형님이 한때 마교의 부교주였지 않는가. 무림에 있는 웬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인데 자네는 몰랐나 보군."
여운휘는 조용히 철비상을 응시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이름이 뭐지?"
"우리 형님의 존함은 혈무린(孑無潾)이라 하지. 왜? 무슨 일이 있는가?"
잊고 있었다. 혈무린이라는 존재를.
사곡에서 나왔을 때 마교의 부교주가 엄백린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었지만 그 후
로는 단 한 번도 혈무린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없었다.
혈무린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마교 부교주였던 혈무린이…… 지금의 혈교 교주다.
"좋다, 네가 만일 살아서 이곳에 나온다면 어떠한 소원이라도 들어주마. 나 마교 부교주 혈무린의 이름을 걸고."
그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