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再起)
살랑~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오는 봄바람이다. 봄바람은 이불을 덮고 침상에 누워있던 여운
휘의 얼굴을 스쳤다. 그의 눈썹이 잠시 움찔했다.
여운휘의 손가락도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던 여운휘가 마침내 침
상에서 일어났다. 온 몸이 붕대 투성이다. 간신히 침상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는 순
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온 몸을 엄습한다.
눈살은 찌푸렸지만 결코 다시금 침상에 몸을 맡기지 않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여
운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오시지."
여운휘의 말이 끝나자 삐거덕거리며 문이 열렸다. 녹포괴존이 그곳에 서서 여운휘
를 바라봤다.
"몸은 괜찮은가?"
"……"
여운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몸을 이렇게 만든 것이 바로 저 녹포괴존이 아니던
가. 물론 졌다는 이유 하나로만 그러는 건 아니다.
"내가 며칠이나 누워 있었던 거요?"
"사 일."
사일이나 누워 있었다는 말에 여운휘는 문득 유설린의 안위가 걱정됐다. 하지만 녹
포괴존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런 일도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좀 과했다는 건 인정하지. 내가 사과함세."
"가르쳐…… 줄 수 없겠소?"
"미안. 약속은 약속이니까."
여운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녹포괴존에게 오행검법에 대해 듣고 싶
다. 하지만 그건 이겼을 때나 가능했던 일이다. 패배해 버린 지금 구차하게 가르쳐
달라고 물고늘어질 수는 없다.
그녀는 문을 잡고는 몸을 뒤로 뺐다.
"이만 가려고 한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싶어서 네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지. 그
럼 잘 지내라."
"잠깐."
"응?"
여운휘는 고개를 돌려 녹포괴존을 바라봤다. 그녀 또한 여운휘를 향해 시선을 돌렸
다.
"난 꼭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오."
"그런 거 가지고 때를 쓸 놈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실망이군. 나름대로 패기가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가 지금 가르쳐 달라고 했소? 내 몸이 다 나은 후 다시 찾아갈 거요. 그리고 그
때…… 당신의 입에서 오행검법에 대해 말하게 만들지."
여운휘의 말을 다 들은 녹포괴존은 웃어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여운휘를 바
라보면서 웃고야 만 것이다.
닮았다.
녹포괴존은 여운휘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저러한 저돌적인 모습에 언제나 암
황과 도황이 그녀를 걱정하곤 하지 않았던가.
"좋아. 그거야 언제든지 환영이지. 내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는 암황에게 물어보
면 알 거야. 반드시 찾아와라. 기다릴 테니까."
말을 마친 그녀는 문을 닫고는 사라졌다. 녹포괴존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여
운휘는 눈을 감았다.
마음에서 울분이 솟구친다.
졌다. 물론 처음 패한 것은 아니다.
마교에 있을 때도 현 교주인 엄백린에게 패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만
큼 속수무책은 아니었다. 그때는 그래도 지고 나서 이처럼 분하지는 않았다.
여운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다.
쾅!
여운휘의 주먹이 침상의 모서리를 내려쳤다. 고통이 온 몸을 엄습했지만 여운휘의
눈빛은 잘 다듬어진 예검(銳劍)처럼 날카롭다.
쾅 하는 소리 탓에 놀란 얼굴로 유설린이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여운
휘는 고개를 돌려버리고야 말았다. 왠지 모르게 유설린의 얼굴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다.
고개를 숙인 여운휘는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더…… 강해지고 싶다.'
무겁게 그리고 빠르게.
중(重)과 쾌(快). 두 가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검 끝은 춤을 췄고, 그 끝을 따
라 나비의 날갯짓 마냥 우아한 그림이 그려진다.
미동하는 검은 한 사내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여운휘였다. 온 몸에 땀이 가득하다. 비라도 맞은 듯 옷조
차 흠뻑 젖어 버렸다. 어쩔 수 없다. 지금 여운휘의 몸 상태는 최악이다.
움직이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 터인데 여운휘는 검법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유설린은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몸을 혹사하는 듯한 여운휘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던 것이다.
여운휘의 몸이 비틀렸다. 쓰러질 것 같아 보였거늘 순간 여운휘의 몸이 공중으로 솟
구쳤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이끌고 여운휘는 억지로 검을 휘둘렀다.
너무 오랜 시간 검을 쉬게 했다. 검문으로 출발하고 그 후에 남궁세가. 몇 번의 싸
움은 있었으나 훈련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패배.
나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안일하게 자신을 풀어두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
병상에 누워 있기만 한다면 보름 이상을 그냥 멍하니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감
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더욱 더 마음을 독하게 먹기 위해 여운휘는 당장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만 같은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악 다문 이빨 사이로 피가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여운휘를 바라보는 유설린의 옆에 어느 샌가 풍운조가 다가왔다.
"오셨어요?"
"그렇소. 그나저나 왜 저토록 부상을 당한 거요?"
"일이 있었어요. 그나저나 부탁하신 일은 다 되었나요?"
"검문에 보낼 철은 일차적으로 준비가 끝났소. 내일이나 내일 모래쯤에 출발 할 예
정이오."
상황은 잘 돌아가고 있다. 점점 거래를 하는 곳이 늘어나면서 유가는 커져가고 있
다. 무림에서 이제 유가라는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유가가 강해지는 만큼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마교를 돌려 받아야 한다.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은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그
리고 그 틈을 이용해 유가는 마교를 장악해야 한다.
마교 내에도 유가의 손길이 천천히 뻗치고 있으리라.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다.
뭘까? 왜…… 이토록 답답한 걸까?
그러한 의문에 답을 내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설린의 옆에 있던 여운휘가 말했다.
"붕대를 풀어야겠다."
"다시 갈아달라고? 아침에 갈았잖아?"
"아니, 이제 더 이상 붕대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무슨 소리야. 부상이 그토록 심한데."
아침에 붕대를 갈아주면서 유설린은 봤다. 여운휘의 몸은 녹포괴존과 겨룬 지 십여
일 정도가 지난 지금도 성한 곳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몸이 제 상태로 돌아오려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더 요양해야 될 성싶다.
가뜩이나 몸을 학대하는 여운휘의 모습에 마음이 아픈 그녀이거늘 붕대까지 푼다니
기겁하고야 말았다.
"움직이는데 조금 불편하다."
"불편해도 참아. 그래야 빨리 낫는다고."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자세가 변한다. 계속 이러다가는 정작 중요한 순간
에 실수를 할지도 몰라."
여운휘에게 유설린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온 몸이 멍 투성이다. 붕대를 갈아
주면서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이 상처가 왜 생겼는지 아는 탓이다.
유설린은 침상에 앉아 있는 여운휘의 뒤에 앉아 붕대를 벗기기 시작했다. 아침에 그
토록 심했던 상처가 지금에 와서 나아졌을 리가 없다. 붉고, 거멓게 변해버린 피부
를 보던 유설린은 여운휘의 등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여운휘의 등을 적셨다.
"미안……"
"왜."
"이 상처 나 때문이잖아. 내가 복수를 하겠다고 해서 지금 이렇게 휘가 힘든 거잖
아……"
"바보 같은 소리. 네 탓이 아니야. 내가 약해서다. 미안하다. 내가 녹포괴존보다 약
해서 너를 이렇게 울게 만드는 구나."
"아니야, 아니야 미안한 건 휘가 아니고 바로 나야. 바로 나란…… 말야."
유설린의 눈에서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 내렸다. 여전히 고개를 파묻은 채로 그녀
는 울었다. 여운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등을 적시는 눈물이…… 너무나 따뜻하다.
'다시는, 다시는 울지 않게 해 주마……'
좌선을 하고 있던 여운휘는 갑작스럽게 찾아 든 손님을 바라봤다.
남자다운 얼굴에 균형 잡힌 몸매를 한 사내는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여운휘는
힐끔 그를 바라보고는 곧 시선을 돌렸다.
유설린에게 인사를 건넨 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 무슨 일이지."
"다쳤다는 말을 들었기에 편히 쉬라고 일부로 찾아오지 않았었소."
"몸은 다 나았다. 용건은?"
찾아온 사내는 능려운이었다. 그는 본인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예의 이 성격은 전혀 변하지 않은 듯 싶다. 여전히 딱 부러지고 괜스러운 대화를 싫
어한다. 용건만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물러서라는 것인 걸 능려운이 모를 리가 없
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듯한 여운휘의 모습에 본인도 모르게 웃음을 흘려 버리고
만 것이다.
"몸이 나았다면 다행이오. 오랜만에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어서 왔소. 일전에 언제든
지 상대해 준다고 해서 이처럼 몸이 안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발걸음을 옮
긴 거요. 혹 아직 몸이 안 좋다면 후에 오겠소."
"능 소협, 지금 휘의 몸이 제대로 나은 게 아닌지라……"
"됐다. 나가자."
유설린의 말을 끊어버린 여운휘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녹포괴존에게 당한 지
이십 여일 정도가 지났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거늘 쉽사리 낫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능려운의 도전을 받아 들였다. 일전에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여운휘가 밖에 나가서자 유설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상처
조차 제대로 낫지 않은 여운휘가 걱정스러운 것이다.
여운휘의 앞에 선 능려운의 눈가에 이채가 인다. 이길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건 아니
다. 일전에 우문학에게 들었던 대답처럼 설령 십 년이 지난다 해도 이길 자신이 없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반드시 보여주고 싶었다.
그 또한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혈풍구룡검법을 나름대로 깊이 익혔다는 자신감.
우문학에게 배운 혈풍구룡검법은 대단한 검법이다. 어떻게 이러한 검법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화려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다. 괜한 초식들인 것 같지만 실상 쓸모 없는 것은 전
혀 없다. 겉만 본다면 단순히 화려하기만 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토록 실전
을 위한 검법도 없다고 생각한다.
능려운은 검을 뽑았다. 순간 검과 하나가 되는 듯한 모습이다.
능려운을 바라보던 여운휘의 눈동자가 약하게 흔들렸다. 다시금 검을 맞댄 지 채 반
년도 되지 않았거늘 예전과는 다르다.
'과연 우문학.'
우문학의 실력은 단순히 무공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그가 기르는 수하들 모두 대단
한 능력들을 지녔다. 그건 단순히 우연이 아니다. 그러한 우연이 겹친다는 것은 있
을 수 없는 일이다.
우문학은 제자를 기르는 소질이 있다. 짧은 시간 내에 장단점을 파악하여 그것을 고
쳐준다. 그 탓인지 지금 능려운의 실력은 일취월장(日就月將)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
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여운휘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가볍게 손목을 비튼 후 여운휘가 말했다.
"와봐."
기다렸다는 듯 능려운이 다리를 움직였다. 한 번 움직이는 순간 그 긴 거리가 단숨
에 좁혀졌다.
검 끝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생명이라도 있는 생물처럼, 하늘을 나는 벌의 날갯짓
과도 같다. 그토록 절묘한데도 불구하고 여운휘는 가볍게 검으로 밀어냈다.
검은 여운휘의 옆을 스쳐 지나갔고, 재차 능려운은 다리를 움직였다. 검 끝이 부르
르 떨리니 맞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여운휘는 다시금 쉽게 검을 밀어냈
다.
능려운은 이번에는 뒤로 물러서 여운휘를 바라봤다. 제대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는데
너무나 쉽게 무위로 돌아가니 흥이 일지 않는다. 마치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빼먹
는 듯한 기분이다.
안 된다면 물러서라.
우문학이 말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면 뒤로 피해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현명한
자라는 것이다. 괜스레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다.
쉭! 쉬이익!
재빠르게 두 번 검을 내질렀거늘 다시금 검이 검로(劍路)를 막아냈다.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은 빠르다는 말이다.
혈풍구룡검법은 빠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비의 날개마저도 잘라낼 정도로 빠르다.
검법이 빠르다고 다가 아니다. 빠른 검에 맞추어 줄 날랜 신법도 필요하다. 그 탓
에 얼마나 노력했던가……
쉬익! 탕!
이번에도 능려운이 물러섰다. 단순히 검을 막아낸 것뿐인데 안으로 파고 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우문학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그라면 분명
조언을 해주었을 터인데……
능려운은 나약해지려는 자신의 모습을 다잡았다. 우문학은 이곳에 없다. 그리고 앞
으로도 수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항상 우문학이 옆에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힘으
로 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여운휘를 바라보며 천천히 돌던 능려운은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단
한 번의 공격도 없었고 견제를 받은 것도 아닌데 왠지 두렵다.
섣불리 파고 들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여운휘의 몸에서 풍긴다.
혈풍구룡검법을 익혔기에 어느 정도 검을 겨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
이다. 차라리 예전이 나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때는 적어도 여운휘가 검을 휘두르게 했고, 피하게끔 만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이냔 말이다.
"성장했군."
그 모든 고민을 지우게끔 하는 여운휘의 한 마디였다.
능려운은 여운휘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일방적으로 밀리
는 것 같은데 성장했다니.
비꼬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 한 번 휘두르지 않은 상대에게 그런 말
을 들으니 왠지 놀리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섣불리 달려들 던 게 사라졌어. 때론 저돌적인 공격이 필요하지만 지금 같을 때는
조심히 기회를 엿보는 것이 좋지."
여운휘의 충고에 능려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성장했다는 말이 그제야 진실 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우문학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
었다. 공격을 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저돌적이라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많이 노력
했다.
능려운은 늘어졌던 검을 다시 곧추세웠다.
여운휘 또한 능려운의 마음을 안 듯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다시 가겠소."
능려운이 재차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작은 상처 하나라도 내기 위해서. 그것을
목표로 능려운은 검을 휘둘렀다.
반 시진 가량 검을 들고 휘두르던 능려운의 손목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쉬
지 않고 무거운 검을 휘두른 탓이다. 온 몸이 땀에 절어 호흡도 길어졌다.
능려운은 억지로 검을 들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한 발자국 움직일 힘조차 없다.
그렇지만 능려운은 억지로라도 검을 들어야만 했다.
오랜만의 대련인 탓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
은 그래서가 아니다.
'단 한 번도 검조차 휘두르게 하지 못했다……'
우습게도 그랬다. 능려운은 그렇게 미친 듯 검을 휘둘렀지만 당사자인 여운휘는 지
친 기색조차 없다. 그리고 검조차 휘두르지 않았다.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능려운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이 밉
살스러워 보인다.
분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분하다.
"그만 하지."
능려운이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여운휘는 몸을 돌려 건물 안으
로 들어갔다. 능려운은 유설린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장원을 나갔다.
능려운은 장원을 나서자마자 연무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문학이 있다면 오늘
의 일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다시금 검을 휘두를 생각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여운휘를 따라 들어간 유설린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오늘 뭔가 이상해."
"뭐가?"
"아직 검을 맞댈 정도로 상처가 낫지 않은 거 아니야? 오늘 휘의 모습은 평소 같지
않았어."
"그런가."
가볍게 말한 여운휘는 다시금 좌선을 하기 위해 앉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로 앉
아 있던 여운휘의 입이 열렸다.
"기본으로 돌아가려고."
"기본?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오늘 능려운과의 대련은 그 탓에 그리 이뤄진 거다. 기본이 튼튼했다면 녹포괴존에
게 그리 쉽게 밀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운휘는 강해져야만 한다. 오행검법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녹포괴존을 꺾어야만
한다. 그러나 분하게도 지금의 여운휘는 그녀를 이길 수가 없다.
특별한 비급도 없는 이상 여운휘는 기본을 탄탄히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거친 폭풍우에도 쉬이 넘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