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37)

비밀(秘密) 

그 누구도 개방의 귀를 속일 수는 없다. 어느 집안의 숟가락 수가 몇 개인가 에서부 

터 여인들의 달거리 날짜까지 알 정도니 말할 나위도 없다. 

개방 문도의 수는 엄청나다. 단일 세력으로는 최고의 수라고 볼 수 있다. 

거지라고 해서 전부 무시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개방의 거지들은 무시는커녕 오히 

려 대접을 받는다. 특히 허리에 있는 매듭의 수가 많다면 더욱 그렇다. 

매듭이 없는 거지 중에서도 개방의 문도들이 있다. 그들은 백의개다. 

아무런 의결도 지니지 못한 개방의 제자들인 셈이다. 그들은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우 

지는 못한다. 

하지만 매듭이 늘어나면서 개방의 거지들은 무공을 배우게 되는데 그 위력이 만만 

치 않다. 특히 개방의 방주만이 사사 받을 수 있다는 타구봉법(打狗棒法)과 장력이 

거의 강기의 수준에 이른다는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은 개방에서도 특히 위력적인 

무공들이다. 

개방의 귀는 어디에나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거지가 없는 곳이 어디가 있겠는 

가. 

많은 문도 수가 개방의 귀를 만들게 한 장본인이다. 청해에서 일어난 일이 광동까 

지 알려지는데는 단 이삼일이면 가능하다. 개방이 있어서다. 

그만큼 개방의 정보망은 대단하다는 거다. 

그런데 그러한 개방의 정보망과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는 노인이 있다. 

그 노인은 지금 흥미로운 정보를 접하고 진린을 찾아온 상태였다. 

"무슨 일인가." 

"두 가지 소식을 말해주러 왔네." 

"그래?" 

진린은 좌운의 표정을 보고 그 두 가지 모두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좌운이 입을 열었다. 

"사무린이 정말로 이틀 전에 도황을 죽인 모양이야." 

"후후, 도박이었는데 성공했군." 

진린은 자신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는 기분 좋은 얼굴로 

다음 소식을 들었다. 

좌운은 아까 와는 달리 조금은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무린의 일도 중요했지 

만 이것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닌 정보다. 

"알아냈네." 

"뭘?" 

"도망친 소가주의 위치를 알아냈다는 말이야." 

"드디어…… 인가?" 

진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늘어졌던 온 몸의 근육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꿈틀거렸다. 

진린은 편히 의자에 몸을 묻고 있다가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만큼 그 일은 중요 

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디에 있나." 

"악양." 

"악양이라고?" 

"아주 귀여운 짓을 하고 있더군. 세가를 만들어서 힘을 키우고 있던 모양이야." 

"세가라……" 

진린은 세가라는 말을 되씹었다. 좌운은 진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진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선은 내버려두지. 힘을 키운다 해도 어차피 조무래기들이야. 잠시만 더 지켜보 

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 사실을 교주에게도 알릴 텐가?" 

"아니. 지금 악양에 있는 소교주를 놔두는 것도 교주가 모르게 하기 위해서야. 아직 

은 엄백린을 죽일 때가 아니야. 그렇다면 소교주의 위치를 모르게 해야지." 

진린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숙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느꼈다. 

하나씩 하나씩 모든 일들이 풀려지고 있다. 방해 세력들은 사라져 가고, 점점 마교 

를 장악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제는 걸림돌이었던 소교주의 위치도 알았다. 

모든 게 끝난 것이다. 이제는 때만 기다리면 된다. 그 후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 

행 될 것이다. 

막 진린의 거처에서 사라지려던 좌운이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아! 그 여운휘라는 놈이 지금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는 진군휘라는 자와 동일인물이 

야." 

좌운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져 버렸다. 

진린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조용히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한 마디에 진린 

은 피식 웃었다. 

'여운휘가 진군휘……' 

진군휘라는 이름을 진린이 모를 리가 없다. 현재 정파 무림 쪽에서 두각을 드러낸 

신예 고수가 아니던가. 강호십일객 중 일인인 수황과도 손을 겨루었다는 말에 흥미 

를 가졌었다. 

그런데…… 진군휘라는 사내가 여운휘와 동인인물이라…… 

무림맹 놈들이 듣는다면 까무러칠 정도로 놀랄 것이다. 

일전에 소교주를 데리고 도망을 친 것도 그 여운휘라는 사내가 아니었던가. 얼굴조 

차 본 적이 없는 사내다. 그토록 마교 내에서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던 자다. 

물론 지금도 크게 관심이 가는 건 아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마음만 먹는다면 그 

정도 무인이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으하하!" 

진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천천히 작아지면서 진린의 눈동자가 빛났다. 

'소교주……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어.' 

암황은 녹포괴존과 함께 유설린의 거처로 향하고 있었다. 

녹포괴존의 얼굴에서 전날 밤의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힘들어하던 그녀의 모습은 

어느덧 사라지고 평소와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속은 그렇지 않겠지만 적어 

도 겉보기만큼은 그랬다. 

암황이 녹포괴존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절대 사고를 일으키지는 마라."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암황은 다짐은 받았지만 쉽사리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금은 이렇게 말했지만 가 

서는 다른 행동을 취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거다. 오행검법에 쏟았던 녹포괴존의 열정을 암황이 

모를 리가 없다. 더군다나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그녀이기에 걱정은 더했다. 

오행검법을 다시 한 번 보자고 달려든다면…… 암황으로서는 막을 길이 없다. 

암황은 그저 녹포괴존이 그러한 행동을 취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어제 저녁 여운휘를 죽이려고 달려든다면 막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진정으로 그녀가 손을 쓴다면 결코 자신할 수 없다. 

비록 암황의 실력이 쌍존에 비해 모자라지 않다고들 하나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쌍존은 엄연히 쌍존이다. 녹포괴존과 잘 알고 지내는 암황으로서 무공이 더 빼어난 

것이 누군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있어야지 원……' 

녹포괴존은 능구렁이 같다. 항상 웃는 얼굴에 아직 철이 덜 든 것 같은 행동도 종 

종 한다. 그 탓에 처음에 많은 자들은 그녀를 우습게 봤다. 언제든지 이용해 먹을 

수 있고, 쉬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암황 또한 그러했다. 그도 마찬가지로 처음엔 녹포괴존을 우습게 봤다. 무공은 빼어 

나지만 머리가 없다면 적수가 아니다. 싸움에서 승산은 무공이 크게 좌우하게 하지 

만 사전에 준비만 한다면 머리가 없는 자를 죽이는 것은 식은 죽을 떠먹는 것 마냥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후에 알아 버렸다. 녹포괴존을 이용해 먹으려던 자 중에서 결코 성공한 자 

는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그녀가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던 자들을 가지고 논 셈이 

되어 버렸다. 

알아 버렸다. 그녀가 실없이 행동하는 것은 결코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녹포괴존은 유설린의 거처 앞에 이르자 갑자기 발을 멈췄다. 

암황은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는가?" 

"아니. 아무것도. 그럼 들어가지." 

녹포괴존은 앞장서서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제의 흔 

적이 간간이 보인다. 여운휘가 휘둘렀던 검과 녹포괴존의 장이 남긴 흔적이 나무와 

땅에 어지러이 새겨져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때던 녹포괴존은 열리는 문을 바라봤다. 

안에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어제 싸웠단 사내의 얼굴이…… 

여운휘 또한 그녀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어제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싸웠지만 그 여 

인이 쌍존 중 하나인 녹포괴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기분이 새롭다. 

무엇보다 쌍존 정도 되는 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이득이 

다. 

녹포괴존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여운휘를 보니 다시금 화가 솟구쳤다. 

간신히 죽여 놓았던 감정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건방지게 뭘 그리 쳐다봐?" 

"……" 

녹포괴존의 말에 여운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말을 듣고 기 

분이 좋을 리가 없다. 쌍존이라 해서 위축 될 여운휘가 아니다. 

여운휘의 눈을 바라보던 녹포괴존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아 올랐다. 우습다는 듯 

한 눈빛이다. 자신의 말에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웃는 듯 하다. 

평소였다면 냉정했을 녹포괴존이지만 지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검귀 천일혼이라는 이름이 앞에 있는 이상 그녀는 냉정할 수가 없었다. 

"죽고 싶어? 저번에는 내 본연의 실력을 다하지 않았어. 죽이려고 싸운 게 아니었으 

니까. 하지만 지금이라면…… 너를 죽일 수 있을 것만 같군." 

녹포괴존의 눈이 붉게 변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암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이 붉어졌다는 것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는 말이다. 

오랜 시간을 같이 한 지기로서 잘 알고 있다. 눈이 붉어진 녹포괴존에게는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는다.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급작스럽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한 쪽이 물러난다면 금방 사 

라질 터인데 양쪽 다 팽팽하다 보니 살기가 점점 짖어졌다. 

여운휘는 그토록 강한 살기를 뿜어대는 녹포괴존의 앞에 서서 마찬가지로 대응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상황을 종식시킨 것은 안에서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만해." 

그 순간 절대지지 않겠다는 듯 버티고 서 있던 여운휘의 살기가 마치 거짓말이기라 

도 한 마냥 사라져 버렸다. 

여운휘의 살기가 사라지자 녹포괴존 또한 방출했던 힘을 거뒀다. 

안에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유설린이라고 해요." 

"…… 녹포괴존이다." 

녹포괴존의 말투가 딱딱해졌다. 평소 유들유들한 그녀는 어딘 가로 사라지고 살기 

로 가득한 무인이 그곳에 있다. 

"안에 드시죠." 

녹포괴존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유설린의 옆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 

고 있었다. 

녹포괴존은 날카로운 눈으로 여운휘를 노려봤다. 

그때 옆에 있는 암황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들어가자는 

듯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녹포괴존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마음 한 가운데에 활활 타오르는 불이 생겨 버렸다. 

이 불은 쉬이 꺼질 것 같지 않았다. 

쉽사리 꺼지지 않을 것 같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뜨겁다. 당장이라도 분출하지 않으 

면 몸이 터져 버릴 정도로. 

"안에 들어갈 마음은 없다." 

옆에 있던 암황이 어깨를 잡아챘지만 녹포괴존은 그 손을 뿌리쳤다. 

암황이라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대충 알 터, 녹포괴존은 고개도 돌리 

지 않았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이건 결코 양보할 수 없다. 

"야. 내려와." 

녹포괴존이 가리킨 것은 여운휘였다. 여운휘는 쌍존 중 하나인 녹포괴존의 부름을 

듣고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여운휘의 모습에 녹포괴존이 재차 말했다. 

"내려오라는 소리 안 들려?" 

"싸우려고 만난 게 아닐텐데?" 

여운휘의 대꾸에 녹포괴존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반드시 싸워야만 

했다. 끓어오르는 열기가 몸을 삼켜버리기 전에. 

녹포괴존은 준비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싸우자. 어떠한 상황이라고 해도 내 승리가 당연하긴 하지만 그래도 싸우자." 

"당신이 쌍존이라 해도 내가 진다는 보장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하! 나를 네가 이길지도 모른다고?" 

녹포괴존이 키득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재미있다는 듯 웃고는 있지만 눈은 그렇 

지 않다. 오히려 날카롭게 변한 눈빛이 여운휘의 몸을 갈가리 찢어 버릴 것만 같다. 

"웃기지 마.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해. 오행검법의 전반부 밖에 익히지 못한 놈이 주 

제를 모르는 구나." 

"……!" 

여운휘는 놀라 버렸다. 오행검법을 알아차린 탓이다. 녹포괴존과 일전을 겨룰 때 오 

행검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얼굴이군 그래?" 

녹포괴존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여운휘의 얼굴에서 그의 미묘하게 변해버린 감정 

을 읽은 탓이다. 

"오행검법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건 바로 나니까. 나를 이긴다면 오행검법에 대 

해 이야기 해 주지. 네가 모르는 다른 오행검법에 대해서 말이야……" 

그 어떠한 말에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던 여운휘가 손을 내려 검을 꺼냈다. 옆 

에 있던 유설린이 여운휘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싸우지 마." 

그녀의 눈에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강호십일객 중 쌍존이라는 이 

름이 가져다 주는 무게를 아는 탓이다. 

여운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만큼은 결코 물러날 수 없을 것 같다." 

여운휘는 유설린에게 한 마디 하고는 아래로 내려섰다. 

여운휘는 검을 강하게 잡았다. 온 몸의 신경들이 쭈뼛 쭈뼛 고개를 치켜든다. 

'다른 오행검법……' 

분명 끌린다. 녹포괴존 정도 되는 자가 거짓말을 하는 건 분명 아닐 것이다. 더군다 

나 제대로 펼치지도 않은 오행검법을 알아봤던 것까지 생각하면 오히려 믿음이 간 

다. 

여운휘가 유설린의 부탁까지 거절하면서 내려선 것은 이유가 있다. 

더욱 강해지고 싶다. 그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 쌍존에게도 밀리는 본인의 실 

력에 여운휘는 회의를 느낀 것이다. 

강해져야만 한다. 그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정도로. 

그래야…… 그녀를 지킬 수가 있다. 

다른 오행검법, 뭔지는 몰라도 반드시 들어보고 싶다. 녹포괴존의 말대로 여운휘는 

오행검법의 전반부 밖에 익히지 못했다. 애초에 책에 적힌 것이 전반부의 내용뿐이 

니 어쩔 수가 없다. 

'더 강해질 지도 모른다……' 

여운휘는 앞에 있는 상대를 바라봤다. 

녹포괴존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재미있는 일을 하는 어린아이 마냥 행복 

해 보였지만 몸에서 뻗어져 나오는 살기는 보통을 넘어선다. 

'쉽지 않겠군.' 

녹포괴존을 이기고 오행검법에 대해 듣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저번에 부닥친 

것이 본연의 실력이 아님을 감안하면…… 쉽지 않음을 넘어서 불가능에 가깝다. 

"와봐. 애송아." 

녹포괴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운휘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녀를 향해 몸 

을 날리는 여운휘의 검에서 새파란 검광이 터져 나왔다. 

분노(憤怒) 

섬광처럼 날아든 여운휘와는 달리 녹포괴존의 움직임은 왠지 모르게 느긋함을 풍겼 

다. 손을 들어올려 여운휘의 검을 향해 뻗을 때까지. 그 행동에는 여유가 넘쳤다. 

파앙! 

검과 손바닥이 부닥쳤다. 그런데 여운휘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바닥에 실린 

내력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채 머릿속에서 가시기도 전에 어느새 녹포괴존이 여운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퍼퍼펑! 

연속적으로 쏟아진 세 번의 장법이 여운휘의 가슴을 향해 쏟아졌다. 급히 검을 세우 

면서 뒤로 물러선 덕분에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지만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의 충격 

이 온 몸을 감쌌다. 

여운휘는 재차 다가올 것은 생각하며 오행검법을 펼쳤다. 

녹포괴존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주변을 온통 나비가 감쌌다. 마치 나비가 춤을 추 

듯 검 끝이 요동친다. 그녀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공격을 하려고 한다면 지금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를 않는다. 그토록 익히고 싶었던 오행검법, 실제로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쒜엑!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던 녹포괴존은 날아드는 검의 소리를 듣고 몸을 비틀었다. 나 

비들이 꿀을 찾아 꽃에 날아들 듯이 검들이 쏟아져 내렸다. 

녹포괴존은 떨어지는 나비들을 향해 옷소매를 휘둘렀다. 일순 그녀의 소매가 바람이 

라도 찬 듯 부풀어 지더니 날아들던 나비들은 모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이게 다냐?" 

"칫!" 

여운휘는 입술을 깨 물으면서 검을 움직였다. 

이토록 쉽게 오행검법의 변검이 깨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단 한 번 소매를 휘두 

른 것으로 모든 공격을 상쇄시켰다. 

날아드는 검을 녹포괴존은 손바닥으로 재차 쳐냈다. 

검을 막아내던 그녀는 훌쩍 몸을 뒤로 띄우면서 손바닥을 휘둘렀다. 

여운휘는 순간 움찔했지만 녹포괴존의 손에서는 아무런 것도 방출되지 않았다. 막 

안심하려던 여운휘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서둘러 몸을 뒤로 움직였다. 

직감은 적중했다. 움직였기에 망정이지 가만히 있었다면 이번 공격으로 승패가 결 

정 났을 지도 모른다. 

가만히 서 있던 여운휘의 입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보이지 않으려 했다. 상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빨 사이로 피가 세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보이지 않았다……' 

장법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무형의 기운. 어느새 다가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은밀했 

다. 더군다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위력…… 폭발하듯이 터져 버린 장법을 생각하 

며 여운휘는 깨달았다. 

'격공장(隔空掌)!' 

말로만 들었지 실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격공장은 발경법의 하나다. 임의의 한 점에 이르기까지는 아무런 위력도, 영향도 없 

어 전혀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것이 목표지점에 닿는 순간 마치 폭발하듯 

이 터져 버린다. 그 때가 된다면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겉으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여운휘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애초부터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쌍존의 하나인 녹포괴존은 그를 진지하게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심한다면 정말로 죽게 될 지도 모른다. 아니…… 죽게 될 거다.' 

녹포괴존의 손이 다시금 움직였다. 이번에도 격공장일 거라고 생각했던 여운휘는 가 

슴에 장법을 맞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입안에 머금고 있던 피가 마침내 전부 터져 나왔다. 

실수를 해 버렸다. 격공장이 올 거라고만 생각한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녹포괴 

존은 이번에는 격공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장법을 날린 것이다. 위력은 

그다지 있지 않았지만 그 속도만큼은 가히 천하제일이라 부를 만 했다. 

여운휘는 피를 쏟은 후에 녹포괴존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양손 

을 들어 올린 채로 서 있었다. 눈가에 짙게 깔린 살기는 여전하다. 

"너 같은 놈에게…… 오행검법은 사치다!" 

녹포괴존과 검귀와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여운휘로서는 그녀의 분노가 이해되지 않 

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허리를 편 그 

는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녹포괴존의 화를 다시금 돋게 만들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지금 여운휘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들어했을 거다. 그토록 피 

를 쏟아 내고도 저토록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무인. 녹포괴존은 패기가 있는 사람 

을 좋아했다. 

평소라면 술이라도 한 잔 하자며 싸움을 멈췄을 그녀지만 지금만큼은 아니다. 오히 

려 그 모습에서 녹포괴존은 더욱 더 큰 분노를 느꼈다. 

"주제도 모르는!" 

여운휘를 향해 달려든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들여 올려진 녹포괴존의 손이 마치 바다의 물결인 마냥 꿈틀거렸다. 

여운휘는 폭풍처럼 쏟아지는 장법에 연신 뒤로 물러섰다. 수 천개의 화살이 마치 여 

운휘를 노리는 듯 하다.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암황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하지만 너무나 

진지한 둘을 보니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유설린 또 

한 아까 와는 달리 조용히 둘을 지켜보고 있으니 그가 나선다는 것도 우습게 느껴진 

다. 

'이건 애초부터 승패가 결정 난 싸움이야.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건 아니야.' 

녹포괴존은 장법 하나로는 천하제일이다. 그녀는 검귀 천일혼과는 달리 장법의 고수 

다. 물론 장법의 고수라 해서 검을 못 쓴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전 그녀는 장 

법이 아닌 검법을 사용했다. 

녹포괴존이 검을 놓은 것은 오행검법 보다 나은 검법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 탓이 

다. 검귀 천일혼을 넘어서고 싶었던 그녀는 검을 버렸다. 그때 주변에 있던 수많은 

무인들은 녹포괴존을 비웃었다. 

여태까지 사용하던 검을 버리고 장법으로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겠다는 그녀의 말은 

너무나 어리석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해냈다. 단 십 년 만에 녹포괴존은 

검법이 아닌 장법으로 더 유명해졌다. 

암황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둘의 싸움을 보고 있다가 뭔가를 알아 

챘다. 

'…… 뭐야?' 

파팍! 카앙-! 

녹포괴존은 쉬지 않고 공격을 쏟아냈다. 그리고 여운휘는 그 공격을 피해내기 급급 

했고. 하지만 암황은 그 모습에서 아까 와는 다른 것을 느꼈다. 

'똑같이 뒤로 물러서긴 하지만…… 아까 와는 다르다.' 

속수무책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뭔가 다르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까보 

다 사뭇 여유가 넘친다. 제대로 들어가던 녹포괴존의 장법의 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처음엔 의아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에는 놀라운 감정이 솟구친다. 승기(勝 

機)를 쥐고 있는 것이 녹포괴존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여운휘의 움직임이 좀 

전보다 부드러워진 것이다. 

암황이 알 정도니 당사자인 녹포괴존이 모를 리가 없다. 

공격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고는 있지만 연신 흐름이 끊긴다. 가볍게 움직이는 여 

운휘의 검이 이상하게도 그리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오행검법인가.' 

녹포괴존은 손을 멈추더니 뒤로 성클 물러섰다. 

그녀의 표정이 급기야는 차갑게 변했다. 흥분했던 것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서 이 

제는 냉정한 상태가 된 거다. 

녹포괴존의 소매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양손에 휘몰아치듯이 내공이 모였다. 멍하니 바라보던 암황은 녹포괴존이 무 

엇을 하려는 지 알아버렸다. 

'서, 설마!' 

말려야 한다. 이것은 상대를 죽이려 하는 것과 다름없다. 

'저 녀석!' 

절초를 펼치려 하는 거다. 

채 암황이 말리려고 하기 전에 녹포괴존의 몸이 솔개라도 된 냥 여운휘를 향해 날아 

들었다. 

활시위에서 떠난 활처럼 쏘아져 나간 그녀의 양손이 순간 검은 색으로 물들었다. 바 

람에 휩쓸리는 녹색 경장과 검게 타오르는 손은 너무나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허나 그 위력을 아는 암황으로서는 결코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운휘 또한 마찬가지다. 

손이 검게 물드는 순간 모여든 내력을 아는 탓이다. 일격에 태산이라도 부술 정도 

의 기백이다. 

여운휘는 그 다음은 생각하지도 않고 우선 이 일장을 피해내기 위해 몸을 날렸다. 

녹포괴존의 검게 변해 버린 손이 빠르게 움직였고 여운휘는 그것을 가까스로 피해냈 

다. 피하고 나서 여운휘는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아홉 번? 아니, 열 번인가?' 

엄청난 빠르기다.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손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미리 공격을 들어올 것을 알았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다면…… 

"피해서 안심하고 있느냐?" 

"……" 

여운휘는 갑자기 말을 거는 녹포괴존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에 비 

웃는 듯한 조소가 걸렸다. 

"몇 번을 움직였는지 아느냐." 

"열 번." 

"그게 바로 너의 한계라는 것이다. 내 손이 움직인 것은 총 스무 번이다." 

녹포괴존의 말에 여운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실력 차이가 날 거라고는 생 

각했지만 이토록 심할 줄은 몰랐다. 

고작 반이다. 반 밖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운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잡고 검을 들어올렸다. 

그때 녹포괴존이 다시금 말했다. 

"또 하나 이야기 해 줄까? 빠른 게 다가 아니야. 지금 보여 준 것은 아무런 위력도 

주지 않았지. 단순한 빠르기, 그것만 보여줬던 거야. 이제부터 보여주마. 왜 나의 

이 마화혈장(魔火血掌)이 무림에서 가장 무서운 장법인 줄을." 

여운휘는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강하다. 쌍존이라고 해도 팔황에 

비해 강하다 뿐이지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다시는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다. 눈으로 제대로 확인도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다고 

는 하지만 큰 위력은 없어 보였다. 그 탓에 그나마 안심하고 있었거늘 그것 또한 아 

닌 모양이다. 

여운휘는 상황이 최악으로 흐름을 느꼈다. 녹포괴존의 손이 너무나 크게 보인다. 

파아악! 

뭔가가 다가오는 소리에 여운휘는 급히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크윽!" 

양쪽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뼈가 모두 박살이라도 난 것 같다. 신음 소리가 새어 나 

오는 것과 다리에 충격이 인 것은 동시였다. 여운휘는 무너지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 

켜 세웠다. 

아직 뼈가 박살나지는 않은 모양이다. 

녹포괴존은 마치 가지고 논 다는 듯이 여운휘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방금 전 

에 바로 공격해 들어왔다면 승패가 갈렸을 것을 그녀는 일부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 

지 않은 것이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피한다고 피했거늘 완벽하지 못했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다리가 죽어 버렸다. 검 

을 휘두를 손도 중요하지만 발보다는 아니다. 발이 죽었다는 것은 싸움에 있어서 

육 할을 잃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볍게 다가온 녹포괴존의 손이 여운휘의 가슴팍을 때렸다. 여운휘는 상대가 자신 

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도 분명히 끝낼 수 있는 기회였거늘 그 

러지 않았다. 

여운휘는 다시금 가슴을 노리고 다가오는 녹포괴존의 손을 양손을 들어 막아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녹포괴존은 여운휘보다 빠르다. 손뿐만이 아니라 다리도 여운휘보다는 한 수 위인 

것 같다. 더군다나 다리까지 묶여버린 지금 여운휘에게 승산은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절묘한 순간을 이용해서 단 일격에 끝내야 한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 

지만 그것 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 더군다나 지금 녹포괴존은 여운휘를 가지고 놀 

고 있다.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퍽! 퍼억! 

여운휘는 연신 녹포괴존의 손에 몸을 맡긴 채로 두드려 맞기만 했다. 파도에 휩쓸리 

는 것 마냥 이리저리 쓸려 다니기만 했다. 

녹포괴존은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겨우 이만한 놈이었던가.' 

녹포괴존은 양손에 내력은 더욱 집중했다. 원래 색으로 변했던 손이 다시금 거멓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만 끝내주마! 나의 이 마화혈장으로!' 

그녀가 여운휘를 향해 검게 물든 손을 휘두르기 위해 달려들었다. 

여운휘는 얼굴을 감싼 팔 사이로 녹포괴존의 손이 검은 색으로 변한 것을 발견했 

다. 순간 기회는 이번뿐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몸이 정말로 가까워지는 찰나 여태까지 묶어 두었던 다리가 움직였다. 채 손 

이 움직이기도 전에 여운휘의 발이 그녀의 팔을 올려 찼다.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다리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녹포괴존은 일순 당황 

했다. 그리고 비어 있는 그녀의 어깨를 향해 여운휘가 검을 내질렀다. 

녹포괴존은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으로 몸을 뒤로 뉘었다. 젖힌 신형을 발뒤꿈치의 

회전력을 이용해 일어서려던 그녀의 다리를 여운휘의 다리가 걷어차 버렸다. 

몸의 균형이 무너진 녹포괴존은 땅을 뒹굴어 버렸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가 화끈거린다. 아까 여운휘가 내지른 일검 

에 어깨가 스쳐 버린 것이다. 그녀의 녹색 경장이 찢어졌고, 땅을 뒹구는 바람에 더 

럽혀졌다. 

"후…… 후후! 그래, 내가 널 너무 얕봤군." 

단숨에 그녀의 손이 검은 색으로 변했다. 방금 전 일격은 녹포괴존 본인도 모르게 

방심한 탓에 벌어진 일이다. 아무런 반항도 없이 맞기만 하니 너무 얕보고야 말았 

다. 

지금은? 그런 게 있을 턱이 없다. 

뚜두둑! 

손가락의 관절이 비명을 토해냈다. 손을 치켜올린 녹포괴존은 웃음까지 흘렸다. 

"간다." 

파팍! 

땅을 발로 강하게 밀자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여운휘의 근처까지 다가갔다. 

여운휘는 다가오는 녹포괴존의 손을 보면서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방금 

전 그 일검이 실패한 이상 다른 수는 없다. 

'제길! 다리가……' 

마음은 움직이거늘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녹포괴존의 마화혈장이 여운휘의 몸에 고 

스란히 쏟아졌다. 

퍼벅! 

너무나 빠르기에 격타음 마저도 하나로 들릴 정도다. 하지만 불쑥 공중으로 솟아 오 

른 여운휘의 몸이 순식간에 핏덩어리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녹포괴존의 손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여운휘의 몸은 무려 삼장 밖으로 날아 

갔다. 

간신히 건물에 부닥치고 나서야 여운휘는 날아가던 것을 멈췄다. 

싸움이 끝나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숨소리마저도 천둥소리 마냥 크게 들릴 정도다. 

암황이 나섰다. 

"이봐! 너!" 

"미안. 이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그래도 너를 생각해 

서 힘을 줄이고 휘둘렀으니까 죽을 정도는 아닐 거야. 얼마간 쉬어야 하긴 하겠지 

만……" 

녹포괴존은 암황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유설린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을 보니 꽤 

나 매섭다. 녹포괴존은 피식 웃었다. 

"미안하게 됐구나." 

그때였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하다는 거냐."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결코 녹포괴존이 그것을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 목소리 

를 듣는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일어…… 섰어?' 

말도 안 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다. 비록 힘을 줄였다고는 하지만 마화혈장 

은 녹포괴존의 절기다. 힘을 줄였다 한들 제대로 맞고서 바로 일어날 정도로 녹록치 

는 않다. 

여운휘는 온 몸이 피투성이인 채로 일어섰다. 다리는 물론이거니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벽을 집은 손마저도 후들거린다. 

당장이라도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일어섰다. 성한 곳이 한 군데도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여운휘는 일 

어선 것이다. 

"실수를 했어." 

여운휘의 말에 녹포괴존은 조용히 침묵했다. 다시 일어선 그의 모습이 그토록 놀라 

웠던 것이다. 

"죽이려고 검을 휘두르는 자에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운 여운휘는 벽에서 손을 땠다. 여전히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여운휘는 한발 한발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제부터 죽이기 위해 싸워주지." 

말을 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한 눈에 봐도 당장에 쓰러질 것 같이 애처롭다. 

피투성이인 상태로 여운휘는 힘겹게 자신의 검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 그것을 들어올 

렸다. 

"다시 와라." 

오기다. 이건 죽으려고 하는 행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멀쩡한 상태에도 그토록 

당했거늘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싸우려고 한다. 

녹포괴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웃으면서 여운휘에게 다가가 

고 있었다. 이 미소는 지금까지의 미소와는 다르다. 

"그래 난 여태까지 덤비라는 자에게 등을 보인 적이 없다. 그토록 당하고도 다시 일 

어난 패기 하나는 인정해 주지. 하지만 내 손에 자비는 없다." 

그녀는 여운휘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검을 들고 있는 여운휘는 이미 반쯤 무릎이 

굽혀진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검으로 몸을 지탱하지 않았다. 꿋꿋하게 자 

신의 발로 땅을 박차고 서 있었다. 

녹포괴존은 단 일장을 더 날릴 생각이었다. 그거면 충분할 것이다. 지금 여운휘의 

상태로는 가볍게 날린 일장을 버티지 못할 거다. 

그때 녹포괴존의 앞을 유설린이 가로막았다. 

"그만해요." 

"비켜줬으면 하는데? 저기 저토록 날 기다리는 사내가 있잖아." 

"싫어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겠다면 저도 싸울 거예요." 

"뭐? 하, 하하!" 

유설린이 덤비겠다는 말에 녹포괴존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알기로 유설린 

의 무공은 변변치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덤비겠단다. 문제는 유설린의 눈빛이 진 

지하다는 거다. 

여운휘에게 다가간다면 정말로 덤빌 기세다. 

"그만해라." 

암황의 목소리도 들린다. 녹포괴존은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만하지." 

녹포괴존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여운휘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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