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포괴존(綠布怪尊)
악양유가가 오랜만에 시끌벅적했다. 오랜 시간 세가를 비웠던 소가주가 돌아온 것이
다. 그 동안 소가주를 만나기 위해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 탓에 그
날 유설린은 쉬지도 못하고 밀렸던 일을 해야만 했다.
일이 끝나고 밤이 깊었을 때 암황이 찾아왔다.
"그래 남궁세가에 있는 동안 별일 없었느냐."
"예. 검문에서 부탁한 일은 어떻게 진행되었죠?"
"특별한 문제는 없다. 풍운조라는 놈 꽤나 쓸만하더구나. 귀면신황이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어. 일전에 변장을 한 모습이라도 보지 않았다면 완전히 모를 뻔했어."
유설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했는데 역시나 였다.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암황은 풍
운조의 정체가 강호십일객의 하나인 귀면신황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암황처럼 베일에 쌓여 있는 강호십일객인 풍운조이거늘 용케도 알아차렸다.
"말의 사육에 대해서 저희 쪽은 완전히 몰라요. 어르신이 그쪽 일은 저에게 말해 주
세요."
"그렇게 하지. 그런데 왜 외숙부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게냐."
"……"
유설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전혀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
기 외숙부라고 나타났는데 그게 그리 쉽사리 될 리가 없다. 더군다나 외숙부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그녀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너무 급한 거 아닌가?"
"급하다?"
벽에 기대어 있던 여운휘를 향해 암황이 고개를 돌렸다. 처음엔 저런 젊은 놈이 유
설린을 지킨다는 생각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단 한 번의 격돌로 실력은 인정해 버렸다. 웬만한 자가 아니라면 저 사내를 뚫고 유
설린에게 손끝하나 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됨됨이는 모르겠다. 감정의 표현이 원체 드물다. 말을 걸만한 시간도 없
었거니와 건다 해서 일일이 대답해 줄 성격 같지도 않다. 저런 사내라면 뭔가 거리
감이 생길 만도 하련만 유설린은 그렇지 않다.
뭔가 믿을만한 게 있어서일 게다.
"좋아. 내가 성급했다는 걸 인정하지. 하지만 난 설린이 너에게 외숙부라고 불리고
싶단다. 이 외숙부의 마음도 이해해줬으면 하는 구나."
"알고…… 있어요."
안다, 그녀가 그것을 모르겠는가. 다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외숙부라는 단어가
증오로 변해버린 지금…… 다시금 외숙부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마. 무슨 일이 있거든 내게 말하거라. 난 네 외숙부니까
말이야."
유설린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난 후 암황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아직까지도 바보짓을 하는 중이다. 이곳에서 암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
만 검문에서 바보짓을 하던 그가 갑작스럽게 돌변한다면 당연히 이상한 일이다.
그는 휘청거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암황의 거처는 마구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그의 직책이 마사인 탓도 있지
만 암황은 하인의 신분이다. 그의 거처는 다른 하인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작고 초
라했다.
그의 발걸음이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하늘에 있는 별들도 천천히 움직였다.
'보름달이로구나.'
보름달이 하늘 중천에 걸렸다. 은은한 달빛을 잠시 바라보던 암황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암황은 거처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다.
방은 너무나 어두웠다. 불 하나 켜 두지 않은 탓에 안에 있는 사물조차 분간하기 힘
들 정도로 어둡다. 암황이 방안으로 발을 내딛고 올라서는 순간 방문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랜만이야."
암황은 놀라지 않았다. 그가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한 상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암황
은 태연히 문을 닫았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그는 불을 켰다.
불이 켜지며 방구석에 홀로 앉아 술을 기울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겉으
로 보기에는 마흔이 조금 넘은 듯하지만 실제로 그녀의 나이는 칠십에 가깝다.
"아직 안 죽고 살아 있군."
"웃기는 소리. 내가 너보다 일찍 죽을 턱이 없잖아?"
산뜻하게 웃은 여인은 다시금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녀는 잔을 내밀었다.
"받아."
암황은 자리에 앉아 그 술잔을 받았다. 술잔을 받은 암황은 단숨에 그것을 들이켰
다.
술을 다 마신 후 암황은 인상을 찌푸렸다.
"독하군."
"당연하지. 내가 손수 제작한 술이니까."
"이런 술은 남자도 마시지 않아."
"훗, 그런 남자들과 나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
"그런…… 가."
술을 마시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긴 머리 사이에 드문드문 보이는 하얀 머리
는 그녀의 나이가 결코 적지 않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칠십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피부와 생기 있는 눈동자는 그녀가 얼마나 깊은 수련을 했는지 보여줬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여인이 입고 있는 녹색 옷이었다. 기이하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 여인의 외모와 녹색 경장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 듯 하다.
주거니 받거니 두 순배 가량 돌았을 즈음 암황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오랜만에 친구를 찾아온 게 무에 잘못인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짝!
여인의 손이 암황의 등을 찰싹 하고 때렸다.
그녀에게 맞은 암황도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고 여인 또한 웃고 있었다.
"아니라니까. 오래 된 친우를 만나는 게 무슨 이유가 있어서 해야 하나?"
암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술잔을 다시금 들이켰다. 여인은 방을 이리저리 살피
는 것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햐, 네가 이런 누추한 곳에서 머물고 참 우습군. 네가 생각해도 우습지 않아?"
신나는 듯이 이야기하던 여인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암황을 보고는 서서히 입
을 다물었다. 그녀는 암황의 손에 있는 잔을 빼앗듯이 가져왔다.
침묵에 빠져 있던 여인이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
"넌 항상 무슨 일이 있어지면 쓸데없는 말이 많아지지."
"후후, 내가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었나?"
"무슨 일인데 그래. 너답지 않다."
"이봐 그렇게 묻지 않아도 되잖아. 친구라면…… 모른 척 넘어가 줘."
암황은 침묵했다. 암황은 이 여인을 잘 안다. 말하지 않으려는 듯 하지만 결국은 말
할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항상 이랬다. 힘든 일이 생기면 찾아와 한풀이를 하
곤 하는 게 바로 그녀였다.
예상대로 여인은 본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봐."
"왜."
"그 녀석이 죽었데."
"그 녀석?"
암황은 반문을 하고 나서야 그 녀석이라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강호십일객
은 대부분 사이가 좋지 않다. 보지도 못한 경우도 다반사다.
암황은 자신과 친했던 다른 한 명을 생각해 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
다. 비록 약해졌다고는 하나 그를 죽일 자는 현 무림에 몇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
데……
"설마…… 도황?"
"그래. 그 놈이 죽었다고 하더군."
여인은 다시금 쓴술을 들이켰다. 남자조차도 마시기 힘들 정도로 독한 술이거늘 여
인은 쉽사리 그것들을 마셔댔다.
"…… 누구 소행이래?"
"몰라. 여산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등신 같은 새끼가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고 하더군."
"그 놈은 원래 바보였잖아."
"하하! 맞아! 그 놈은 언제나 바보였지."
씁쓸함이 얼굴 가득하거늘 마주보며 둘은 웃었다. 오래된 지기가 죽었는데 마음 한
편이 허전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암황은 여인을 바라봤다. 젊었을 적부터 여인은 녹색 경장을 즐겨 입었다. 아름다
운 얼굴과 빼어난 무공 덕에 여인은 무림에서 유명한 여협이었다.
여인은 장을 주로 썼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면 하늘이 흔들렸고, 땅이 무너졌다. 수
많은 남자 고수들도 그녀의 앞에서는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버렸다. 이름조차 알려지
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그녀에게 녹포녀(綠布女)라는 명칭을 붙였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강호십일객의 쌍존 중 하나인 녹포괴존(綠布怪尊)이라는 별호를 받
게 됐다. 현 무림에서 그녀의 적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녹포괴존은 벽에 기댄 채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앞에 앉아 있는 암황 또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일 뿐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한참을 조용히 앉아 있던 녹포괴존이 조용한 어투로 말했다.
"왜 이곳에 있는 거야?"
"이곳의 소가주가 내 동생의 딸이야."
"그래? 재미있는 이야기네?"
"꽤나 치열한 싸움이 있을 것 같아. 마교를 되찾으려고 하고 있으니 혈전은 결코 피
할 수 없지."
"너도…… 고생이겠네."
암황이 피식 웃었다.
한동안 다시금 방안은 침묵이 가득했다. 뭔가 어색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도 불구하
고 둘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야."
"왜."
"넌…… 죽지 마라."
"알잖아. 난 도황 그 녀석처럼 멍청하지 않아."
"풋, 그래. 넌 우리 셋 중에서 가장 영리했지."
암황을 보며 미소를 지은 녹포괴존이 또 다시 입을 열었다.
"야."
"왜 또."
"하루만 신세 좀 지자."
"…… 여전히 뻔뻔하군."
"사람이란 게 하루 이틀만에 변하는 게 아니잖아?"
그녀는 도황의 일은 완전히 잊은 듯 밝게 웃었다. 암황 또한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
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암황은 그녀를 잘 안다. 결코 잊어서 밝게 웃는 게 아니다. 마음에 오랫동
안 담아 둘 것이다. 녹포괴존은 그러한 여인이다.
수호령(守護靈) (167) 녹포괴존(綠布怪尊)
잠들어 있던 암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젯밤 꽤나 거나하게 마신 술 탓인지 온
몸에서 술 냄새가 풍긴다. 옆에서는 세상 모르는 듯 녹포괴존이 잠들어 있었다.
그 누가 이 여인을 보고 칠십에 가까운 노인을 생각하겠는가.
암황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다. 그 또한 어려 보이는 편이긴 하지만 녹포괴존과
함께 있다면 아버지와 딸 뻘 정도로 보일 것이다.
'우리도 늙는 구나.'
무림을 휘저으며 강호십일객이라 불리던 그때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이제는 언
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늙어 버렸다.
'설린아……'
죽기 전에 단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엄여홍에게 해주지 못했던 오라비의 사
랑을 그녀의 딸인 유설린에게라도 주고 싶다.
암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바보 연기를 해야 한다.
암황이 막 나가려는 찰나에 머리를 비비며 녹포괴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먼저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암황을 보고 말을 걸었다.
"일어났어?"
"당연하지. 마사는 지금부터 일해야 해. 말의 먹이를 줘야 하거든."
"킥킥, 네가 말의 대소변이나 치우고 있다고 생각하니 우습네."
"아무렇게나 생각해. 난 이만 나가볼 테니까 함부로 설치고 다니지 말고. 괜한 문
제 일으키는 건 사양이다."
"누굴 천덕꾸러기로 아는 거야?"
암황은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방안에는 녹포괴
존만이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꽤나 강렬하다. 그 작은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 또한
부드럽다. 녹포괴존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으라차!"
그녀는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연 녹포괴존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악양유가의 내부 지도 정도는
이미 구한 지 오래다. 당연히 소가주의 거처가 어딘지도 알고 있다.
"한 번 봐야겠지?"
엄여홍은 그녀 또한 잘 알고 지내던 동생이었다. 수줍음이 많았던 아이였는데……
"흐음, 저 쪽이었겠다?"
녹포괴존이 발을 구르는 순간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라졌던 녹포괴존의 몸이 순식간에 삼 장 정도 건너에서 나타났다가 다시금 사라졌
다. 그러기를 수차래 마침내 그녀는 소가주의 거처에 모습을 드러냈다.
녹포괴존은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차에 문이 열리자 급히 나무 뒤로 몸을 감췄다.
여인 하나와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눈이 여인에게로 향했다.
'닮…… 았네.'
엄여홍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녹포괴존은 재밌다는 듯 계속해서 유설린을 바라봤
다. 옆에 있던 사내에게 눈이 간 것은 그 후였다.
호위무사라고 보기에는 왠지 너무 유약해 보였다.
'암황 그 바보 녀석 차라리 자기가 지켜줄 것이지.'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저 둘 뿐이다. 차라리 많은 수의 무사들이 유설린을 지키
고 있었다만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을 터인데 지금은 걱정이다.
그때였다.
'응? 저 녀석……'
녹포괴존이 있는 곳을 향해 사내가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
이 일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부정했다.
'설마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았을 리는 없을 텐데.'
가만히 서서 사내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뭐야. 정말로 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거야?'
사내는 미동도 않고 계속해서 그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냥 무턱대고 이러한 행
동을 취하는 것은 분명 아닐 터.
녹포괴존은 결국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럽게 모습을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놀람이 없다. 오히려 눈에서 날카로
운 기운이 폭발한다. 당장이라도 검은 뽑을 수 있도록 앞으로 당겨져 있다.
섣불리 움직이면 당장에 검을 출수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호오?'
녹포괴존의 눈이 빛났다. 유약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저 자세에는 빈틈이 없다. 쌍
존의 하나인 그녀조차도 허점을 찾을 수 없다면 웬만한 사람으로서는 저 기세 하나
만으로 압도당할 것이다.
"누구냐."
사내의 입에서 말이 빠져 나왔다.
온 몸을 꽁꽁 얼릴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다. 녹포괴존은 당장이라도 칼이 날아올
것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웃고 있었다. 이 상황이 너무나 재미있는 탓이다.
사내와 녹포괴존의 거리는 오 장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사내
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태연한 척 서 있지만 사내의 검이 더욱 더 편하게 잡
을 수 있도록 움직였다.
"설마 정말로 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거야?"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녹포괴존이 입을 열었다.
사내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누구냐고 물었다."
"이봐, 나이 많은 사람이 물었으면 먼저 대답해야지."
"마지막이다. 누구냐."
"이것 참……"
녹포괴존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대답을 듣지는 않았지만 이미 들은 것과 진배없다.
그녀가 이런 젊은 호위무사에게 숨어 있었던 사실을 들킨 것이다. 그건 곧 그녀의
실력이 무뎌졌거나, 상대가 빼어나다는 것인데 전자는 결코 아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는 순간 여운휘의 검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파악!
"엇!"
녹포괴존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몸을 뒤로 굽혔다. 검을 간신히 피한 그
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빨라.'
사내의 검이 재차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이번에는 쉬이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
각에 그녀는 양손에 내공을 불어넣고는 검을 후려쳤다.
파앙!
'내력 또한 보통이 아니군.'
녹포괴존은 손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느낌에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눈을 찌푸렸
다. 상대 사내 또한 순간 얼굴에 놀라운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물러가야 하려나.'
암황이 그토록 아무런 일도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물러나기로 마음먹고 천천히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물러서는데 사내가
앞으로 다가왔다.
"어딜 도망치려고."
녹포괴존은 그 말에 움칫 해 버렸다. 도망이라는 말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마
치 자신이 질 것 같아 꼬리를 내밀고 물러서는 강아지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 것이
다.
'그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거 물러설 수는 없겠군.'
그녀는 도망치려던 마음을 버렸다.
태도를 바꾸고 정식적으로 공격을 할 기세를 취하자 사내는 검을 치켜들었다.
"한 번 받아보거라."
녹포괴존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여운휘는 앞에 있는 여인의 손에서 뻗어지는 장력에 기겁했다.
가까스로 검으로 받아 내기는 했지만 그만큼 녹포괴존의 장법은 위력적이었다. 문제
는 그 일격을 받아 낸 후였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손에 여운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구지?'
고수다. 생전 이처럼 현란하면서도 위력적인 장법을 쓰는 자는 만나 본 적이 없다.
숨어 있는 사실을 늦게 알아차리면서 고수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
상도 못했다.
잠시 밀리던 여운휘는 정신을 집중하고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물러선 것은
녹포괴존이었다.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빈틈을 정확하게 파고드는 일검 탓에 그녀는 물러서야만 했다.
"대단한데?"
말을 하면서 녹포괴존은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흥미가 이는 싸움을 하는 탓이
다. 전혀 이름도 모르는 사내가 그녀와 대등하게 손을 섞고 있다.
"이제 봐 주지 않아."
녹포괴존의 몸이 수십 개로 변하며 그 모든 환영들이 손을 내리쳤다.
"칫!"
여운휘는 검막을 펼치며 뒤로 물러섰다. 헌데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손바닥이 그의
옆구리를 빗겨 지나갔다.
검에 베인 듯한 기분이다. 여운휘는 상대를 바라봤다. 겉보기에는 사십대 초반 정도
로 보이지만 분명 무공이 깊은 탓에 외향이 그리 된 것일 게다.
'오행검법을 펼쳐야겠군.'
여운휘의 마음이 정해졌다. 상대는 본연의 실력을 다하지 않고서는 결코 상처조차
주기 힘들 정도의 고수다. 여태까지 상대했던 그 누구보다 내공이 빼어났고, 그것
을 응용하는 방식 또한 능수 능란했다.
녹포괴존은 여운휘의 몸에서 무엇인가가 변한다고 느꼈다. 검법을 바꾸려는 모양인
데 왠지 모르게 섬뜩하다.
'대단해. 온 몸이 떨릴 정도로. 그런데……'
이상하다. 온 몸이 떨릴 정도로 흥분이 되는 건 이해가 가는데 알 수 없는 감정이
오묘하게 섞여 있다. 그리움, 낯익음.
왜? 어째서 그런 감정이 지금 고개를 치켜드는 것일까.
그것을 알게 된 건 여운휘의 검이 뻗어졌을 때다. 엄청난 속도의 쾌검이 녹포괴존
의 이마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놀란 탓인지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멈칫.
검이 그녀의 이마에 닿기 바로 직전에 멈췄다. 비록 오행검법을 펼쳤다고는 하나 녹
포괴존이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더불어 방금 전까지 일었던 투기가 사라지는 순간 여운휘는 검을 멈췄다.
"뭐냐."
"그만 하자."
"뭐?"
"싸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 내가 누군 지는 암황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지금
은 우선 물러나지."
녹포괴존은 여운휘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소가주의 거처에서 벗어났다.
암황의 이름을 언급한 탓인지 여운휘는 녹포괴존의 뒤를 쫓으려 하지 않았다.
암황의 거처로 돌아가는 그녀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녹포괴존은 손톱을 입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분명해. 내 눈이 틀렸을 리는 없어.'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을 봐 버린 것이
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 놈이 펼친 검법…… 오행검법이야.'
암황은 소가주인 유설린의 부름을 받고 그녀의 거처로 왔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어떠한 여인이 자신에 대해 알고 싶다면 암황 어르신에게 물으라고 해서요."
"여인?"
퍼뜩 머리에 한 사람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혹시 그 여인이 녹색 경장을 입고 있더냐?"
"그렇더군. 겉보기엔 마흔 정도로 보이지만 훨씬 더 나이가 많아 보였고."
암황은 여운휘의 대꾸를 들으며 머리가 아파 옴을 느꼈다. 그토록 조용히 있으라 했
거늘 결국 또 뭔가 일을 벌인 모양이다.
"실례를 한 모양이군."
"큰 일은 아니었어요."
"그 녀석은 내 오래된 지기야. 사람들은 그녀를 녹포괴존(綠布怪尊)이라 부르지."
"혹시 쌍존의 하나라는 녹포괴존인가요?"
암황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녹포괴존은 무림에서 유명하다. 그 현란한 장법도 그렇거니와 녹색 경장만 입는 것
으로도 신비한 인물로 소문이 났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은 그녀를 녹포괴
존이라고만 부른다.
그녀는 괴이하다. 녹포괴존 중 괴(怪)자가 있는 건 그녀의 성격 탓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다. 정(正)도 사(邪)도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설령
하늘이 쪼개진다 해도 결코 하지 않는다.
무림에서 그녀를 건드리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한 것 이상으로 되 갚아 주는 성
격 탓이다.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모르겠어요. 휘와 싸우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사라졌어요."
암황은 고개를 돌려 여운휘를 바라봤다. 겉보기에는 전혀 부상을 입은 것 같지 않
다. 그녀와 싸웠다면 살의가 없었다 한들 결코 쉽게 끝나지 않았을 터다. 적어도 이
삼일은 제대로 운신하기도 힘들어야 정상이다.
"…… 멀쩡하군."
"뭐요?"
"그녀와 싸우고도 이렇게 멀쩡한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군."
여운휘는 평소와 달리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상대의 실력이 대단하다고는 생
각했지만 쌍존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여운휘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오행검법을 쓰기는 했지만 쌍존이었다면 솔직히
승산을 자신할 수 없다. 팔황보다도 위인 쌍존이 아니던가.
"왜 쌍존이 이곳에 있는 거죠?"
"오래된 지기 녀석이 죽어서 나와 한 잔 하려고 온 게야."
"친한 사이신가 보군요."
"그래 죽은 녀석도 우리와 같은 강호십일객의 하나였지. 도황이라는 녀석인데 며칠
전에 의문의 살해를 당했다더군."
강호십일객의 하나가 죽었다는 말에 유설린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도 다
른 자에게 당했다는 말에 놀람은 더욱 컸다.
"흐음, 그건 그냥 그렇게 넘어가고 만약 녹포괴존이 지금도 내 거처에 있다면 내일
즈음해서 정식으로 인사를 시켜주지. 오늘 있었던 일은 용서하고 넘어가 주었으면
하는 구나."
"그렇게 할 게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 그럼 난 지금 거처에 한 번 돌아갔다 오마."
암황은 유설린의 거처에서 나와 자신이 머무는 곳으로 발을 돌렸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언제나처럼 사고뭉치 녀석이라는 건 나이가 먹어도 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도 좋은 것이지. 변하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무인들에게는 신념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힘과 돈, 권력에 부닥쳐 결국은 그 신
념을 꺾게 되어 버린다. 당연한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고, 또한 앞으로도 모
두가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녹포괴존은 그렇지 않다.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다 싶으면 아닌 거고 맞는 거다 싶으면 그
런 거다.
암황은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거처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탓에 일 각 정도를 걸어야만 했다. 바보 같은 연기를 하
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처 앞에 이르러서 암황은 아직도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
을 알아차렸다.
"흠흠."
굳이 기침소리를 내고서야 암황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녹포괴존은 구석 자리에 앉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암황이 그녀
의 앞에 앉았다.
"이봐. 내가 조용히 있으라고 했잖아."
"뭐야? 네 놈 벌써 듣고 달려 온 거냐?"
"그래. 일을 하는데 호출을 하더군."
"킥킥, 벌써 알 줄 알았다면 아까 전에 도망치는 건데……"
말은 그리 했지만 녹포괴존이 이곳을 떠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암황은 알고 있
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댔다.
암황은 따지려던 마음을 접었다. 왜 하지 말라는 짓을 한 거냐고 몇 마디 핀잔을 주
려 했지만 지금 녹포괴존의 모습을 보니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뭔가 일이 벌어
진 듯 하다.
"뭐야 이번엔 또."
"믿기 힘든 걸 봐서 말이야."
"……"
"다시는 생각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암황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녹포괴존이 주먹을 말
아 쥐고는 말했다.
"이봐, 이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네가 잘 만드는 매화주(梅花酒) 한 병이라도 꺼내
와."
"무슨 이야기가 그리 비싸."
"그만한 가치가 있어. 듣고 싶지 않다면 꺼내 오지 않아도 좋고."
암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매화주 담아 놓은 것이 조금 남아 있다. 그
가 말 없이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녹포괴존을 잘 아는 탓이다.
'마음을 정리하고 있군.'
말을 하려고는 하는데 감정이 너무 격한 모양이다. 어떠한 일이기에 그녀가 그 같
은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매화주를 병에 담은 암황이 다시금 방안으로 들어갔다. 녹포괴존은 기다렸다는 듯
이 병을 빼앗아 들고는 잔에다가 술을 따랐다.
잔에 따르기가 무섭게 그녀는 입안으로 쏟아 부었다.
"…… 좋군."
"슬슬 말할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래. 해야지……"
녹포괴존의 입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엄여홍의 딸을 지키는 사내 알지?"
"그래. 잘 알고 있지."
"내가 그 자랑 겨루어 봤거든?"
"그것도 들어서 알고 있다. 네가 상대와 싸우다가 먼저 물러섰다는 말을 듣고 놀라
기도 했지."
"하하! 그럴 수밖에 없었어. 너무 놀랐거든."
암황은 녹포괴존을 쳐다봤다. 그 무엇이 강호십일객의 쌍존 중 하나인 그녀를 놀라
게 했다는 말인가.
"그 놈…… 오행검법을 쓰더군."
"뭐, 뭐라고!"
암황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그만큼 그는 놀라 버린 것이다.
오행검법이라니 그것이 무엇인지 암황 정도 되는 자가 모를 리가 없다.
무림 사상 최고의 고수라고 알려진 검귀 천일혼의 검법이 아니던가. 그 실전 되었다
는 검법이 지금에서 나타난 것이다.
암황이 놀란 건 비단 그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검귀 천일혼의 검법이 다시금 세상
에 나온 일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 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암황이 놀라는 이유의
전부가 아니었다.
녹포괴존의 얼굴에 어느 때부터인지 쓴 미소가 스며들었다.
한참을 서서 녹포괴존을 내려다보던 암황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 확실해?"
"내가 그것도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해?"
"아니.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모를까 녹포괴존의 눈은 결코 틀릴 리가 없다. 오행
검법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암황은 녹포괴존을 찍을 것이
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녀가 그것이 오행검법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오행검법
인 것이다.
"그걸 익히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니었던가?"
"모르겠어."
"그건 너도 익히지 못했잖아."
"후후, 자질이 부족했나 보지."
자조스러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렸다.
녹포괴존 또한 오행검법을 익히려 했다. 그녀는 자신만이 그러한 자격이 있다고 믿
었던 인물이다.
그녀의 자질은 천부적이다. 이 쌍존이라는 위명을 얻을 때까지 무던한 노력도 물론
있었지만 천부적 재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문일지십(聞一知十) 정도의 재능으로는 택도 없다. 녹포괴존은 암황이 아는 한 최고
의 기재였다. 그러한 그녀도 오행검법을 익히지 못했다.
십 년 이상을 쏟아 부었지만 오행검법의 일부분조차도 익히는 게 불가능했다.
그녀는 좌절했다. 다른 그 누구보다도 크게 상심해 버렸다.
녹포괴존은 술을 들이켰다.
씁쓸하다. 그토록 하고자 했던 성취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보는 것이 기분
이 좋을 리가 없다.
"…… 뭐가 부족했을까?"
"이봐……"
"도대체 나에겐 없고 그 놈에게 있는 게 뭐기에 나는 안 되고 그 놈은 되냔 말이
야!"
녹포괴존이 처음으로 목청을 높였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잔이 순식간에 녹아버
렸다. 흥분을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녹포괴존의 숨이 거칠어졌다.
당장이라도 흐느끼며 눈물이라도 터트릴 것만 같다.
암황은 녹포괴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천…… 류희."
그는 녹포괴존의 이름을 불렀다. 무림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녀의 이름이지만
암황과 도황은 본래 이름을 알고 있다.
녹포괴존 천류희.
그녀는 검귀 천일혼의 유일한 핏줄이다.
검귀는 살아 생전 단 한 명의 아들을 낳았다. 물론 그가 은거한 후의 이야기로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자식이 장성하여 마침내 낳은 딸이 바
로 녹포괴존 천류희다.
원체 천일혼이 늦게 자식을 낳은 탓에 그녀는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본적이 없다.
녹포괴존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천일혼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렸을 적 그녀는 너무나 병약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에서 보낼 정도로 몸이 약
했던 그녀다.
녹포괴존의 아버지는 무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문인에 가깝다면 가깝지 결코 무인으
로 볼 수 없는 자였다. 천일혼은 한 눈에 자기 자식이 무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봤
고, 전혀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은 것이다.
완벽하지 못한 것은 배우지 않느니만 못하다.
천일혼은 그리 생각했다.
검귀 천일혼의 검법이라면 무수히 많은 자들이 노릴 게 분명하다. 그 탓에 천일혼
은 애초부터 그녀의 아버지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녹포괴존은 침상에서 항시 천일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밖으로 나가 건강하게
지내고 싶은 그녀를 위한 아버지의 배려였다.
그녀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무림을 횡단하던 이야기에서부터 그 많
은 자들이 무릎을 꿇은 이야기.
어느덧 녹포괴존에게 천일혼은 존경하는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때를 써서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녹포괴존은 아버지
와는 달리 빼어난 무골일 뿐만 아니라 천부적인 머리까지 지녀 대단한 무인으로 성
장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강해졌다 한들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다.
오행검법.
검귀 최고의 절기.
그에게 천하제일인이라는 명칭을 붙게 했던 검법.
할아버지의 뒤를 쫓아 걸어온 녹포괴존이었기에 그녀는 오행검법을 원했다. 그렇지
만 그녀는 그것을 익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법을 익히지 못해서다.
오행검법을 익히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한동안 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부정당한 느낌이다. 마치 잘못 된 길을 오랫동안 걸어왔다는 생
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던 시절이다.
그러다가 녹포괴존은 정신을 차렸다.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할아버지를 뛰어넘겠다는 일념 하에서였다. 그렇게 해서 한동
안 오행검법을 잊고 지냈다.
그런데 잊고 지냈던 오행검법을 한 사내가 펼친 것이다.
충격이었다. 모두가 익히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익혔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녹포괴존이 고개를 들었다.
웃음을 짓고는 있지만 억지라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녀는 묵묵히 앉아 있
는 암황에게 말했다.
"한심해 보이지?"
"…… 아니."
암황에게 그리 보일 리가 있겠는가. 녹포괴존이 오행검법 탓에 겪었던 고통을 그 또
한 모르지 않는다.
"한 번 만나볼래?"
"…… 누굴?"
"그 사내."
"제길. 보면 죽일지도 몰라."
"내가 막아주지. 지금 설린이에게 그 녀석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니까."
"좋아. 만나보지. 나 또한……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으니까."
그 말을 마치고 녹포괴존은 자리에 누워버렸다. 더 이상 말도 하기 귀찮다는 듯 그
녀는 벽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난 잘 테니까 방해하지 마라."
"그래."
암황은 일어나 마구간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한동안 방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콰앙!
녹포괴존의 주먹이 벽을 때렸다. 순간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
그녀의 주먹이 때린 벽은 멀쩡한데 이상한 것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 마침
밖에선가 무슨 소린가가 새어 들어왔다.
"어머! 이게 갑자기 왜 깨진 거지?"
"조심하라고 그리 말했잖아!"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녹포괴존은 눈을 감았다.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던 울화
가 가라앉으며 한없이 자신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망할…… 이런 기분 정말 짜증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