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37)

백무량은 조용히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 남궁려희의 거처를 찾아왔던 자신 

의 수하가 조용히 옆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백무량은 시체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한쪽 눈이 나간 인물, 그 눈을 그토 

록 만든 게 바로 백무량 자신이었으니까. 

"언제지." 

"그제 저녁인 듯 합니다." 

"그럼 그 의원을 죽이러 잠입했을 때군." 

"예." 

"흐음……" 

그 의원이 이렇게 만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알아본 바로는 진자자라는 

의원은 흑색 기마대의 일인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 죽은 이 사내 

는 가슴에 일(一)자가 아닌 백(百)자를 달고 있는 백부장이다. 

백부장을 벨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는 남궁세가 내에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더군다나 죽이려 했던 상대가 진자자였다면…… 

"대주, 아무래도 그 사내인 것 같습니다." 

"…… 진군휘." 

백무량 또한 그리 생각했다. 그가 아니라면 수하를 죽일만한 자가 없다. 

"큭큭." 

재미있다. 남궁세가 내에서 그 어떠한 말도 들은 적이 없다. 소란이 일었다면 분 

명 무슨 소문이라도 있어야 할 터. 그런 것도 전혀 없으니…… 

흑색 기마대의 백부장이나 되는 자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소리다.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비밀스러운 곳에서 태워 버려. 멍청한 놈."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던 백무량은 갑자기 몸을 멈췄다. 그는 시체를 업으려는 수하 

를 향해 손을 뻗었다. 

"멈춰." 

"예?" 

"시체를 내려놔 봐라." 

수하는 의아해하면서도 황급히 그의 명령을 따랐다. 백무량은 몸을 굽히고 시체의 

상태를 살폈다. 사인은 제문혈을 강타한 주먹. 

그렇지만 백무량이 신경 쓴 것은 그게 아니었다. 

시체에는 긴 검상이 하나 나 있었다. 백무량은 조용히 그 흉터를 내려다 봤다. 그 

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 하하!" 

그의 수하는 갑작스럽게 백무량이 웃음을 터트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백무량은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수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이게 진정 네 검인 것이냐?' 

아까 본 쾌검, 분명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가 바라던 그 무 

엇인가가 검에서 빠져 있었다. 그런데 보았다. 이 시체에 있는 검상은 그토록 백무 

량이 보고 싶어하던 그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다. 

'솜씨를 숨겼다 이거지? 재밌군.' 

이 시체에 남겨져 있는 검상, 결코 아까 보여줬던 검으로는 불가능한 상처다. 

'네 놈이 전부 보여주지 않았듯, 네가 본 내 모습 또한 전부는 아니다…… 진군휘!' 

무풍(無風) 

살랑~ 

하얀 종이가 한 사내의 손을 떠났다. 종이는 부복해 있는 여인의 앞에 천천히 떨어 

져 내렸다. 여인을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 들고 서찰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읽었다. 

흠칫. 

여인은 순간 경직해 버렸다. 서찰 안에 있는 내용은 그녀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여인은 아름답다. 종이를 바라보며 살짝 깨문 입술이 그녀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앙다문 새빨간 입술이 사내의 마음을 울 

릴 정도로 고혹적이다. 

종이를 들고 있는 긴 손가락이 알게 모르게 조금씩 떨렸다.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내는 재밌다는 얼굴이다. 서 

찰의 내용을 확인한 후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우습기라도 한 걸지도. 

"경칩(驚蟄)까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정체를 걸려서는 안 되고 잡힐 시엔 자결해 

라." 

사내는 말을 마치고 여인을 내려다 봤다. 사내를 올려다보는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 

렸다. 그 모습을 본 사내가 피식 웃었다. 

"왜? 설마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사무린." 

"하지만 이건……" 

여인은 사무린이었다. 그녀의 종이를 든 손이 조금씩 떨렸다. 

불가능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불가능하다는 말 

을 내뱉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진린의 모습에 그녀는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이용가치가 없어진다면 그 순간부터 사무린은 죽은목숨이다. 진린은 실험을 하고 있 

는 거다. 사무린이 얼마나 되는 인물인지. 그 선에 맞춰져 사무린의 가치는 정해질 

것이다. 이번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실패를 한다면…… 그냥 그만한 인물이었 

던 거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말해라." 

"……" 

참기 힘든 먹이다. 진린은 그녀에게 먹이를 던진 것이다. 덥석 물어 버리고 싶다. 

그 먹이는 사무린의 가치를 낮추면서 까지 물 정도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괜한 죽음 

을 당하는 것보다는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 아니요. 하겠어요." 

"크크, 그래?" 

진린은 다시금 재밌다는 듯 웃었다. 

사무린은 서찰을 품에 집어넣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진린의 손에서 움직이는 

장기(將棋)의 말일뿐이다. 

힘겹지만 진린이 던진 먹이를 물지 않은 건 그를 알아서다. 

먹이를 먹었다면 지금 당장은 편했을지도 모르지만 분명 죽게 된다. 훗날을 도모하 

는 것도 좋지만 채 그러기도 전에 목숨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 

"좋아, 네가 할 수 있다면 하게 해 주지." 

"그러죠. 그럼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사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주르륵. 

그녀의 입술에 깊은 이빨 자국이 새겨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 얼마나 강하게 깨물었 

는지 입술에서 흘러내린 피가 땅을 적셨다. 

문이 코앞에 있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그것이 진린의 명이라면 어떻게든 해내야만 한 

다. 

사무린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떠난 방에는 잠시간 정적이 스며들었다. 진린은 손을 뻗어 찻잔을 들어올렸 

다. 

막 차를 마시는 진린의 의자 뒤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훗."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진린은 놀라기는커녕 피식 웃었다. 이미 그 노인이 뒤에 있다 

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자 뒤에서 나타난 노인이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물론 안 되지." 

"그런데 왜 그런 명령을 내린 겐가. 아직 쓸모 있는 계집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 

야. 비록 버릴 장기의 말이라 해도 아직은……" 

"후후, 버릴 장기의 말? 좌운 자네도 착각을 하고 있군." 

좌운은 궁금해졌다. 진린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난 그 계집이 맘에 든다." 

"사무린이 말인가? 맘에 든다면서 그럼 왜 사지(死地)로 몬 것인가?" 

"글쎄……" 

진린은 내려놨던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이제는 식어 버린 차가 목구멍을 타 

고 몸 곳곳으로 퍼졌다. 진린을 바라보던 좌운이 움찔해 버렸다. 그의 눈이 웃고 있 

다. 실없이 웃지는 않지만 결코 웃음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사내다. 

하지만 진심으로 웃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지금 진린은 진심으로 웃고 있다. 

"보고 싶어서랄까. 그 계집이 얼마나 할 수 있을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 일은 사무린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무린이라면 어떠한 

계책을 써서라도 상대를 죽일 수 있을 것만 같단 말이야? 뭐, 실패한다면…… 그만 

한 그릇 이였구나 하면 그만이고." 

좌운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수긍하지 못했다. 사무린이 빼어나다는 건 그 

또한 인정하는 바지만 이번에 내려진 임무를 수행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라면 마교의 장로급이나 가야 간신히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다. 

"자네의 생각이니 내가 뭐라 할 말은 없네만 한편으로 이해가 안 가는 건 사실이 

네. 도대체 그 계집의 어디를 보고 그런 확신이 드는 건지 모르겠군." 

"그 반대야." 

"반대라니?" 

"사무린은 나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어."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내 밑으로 사무린이 들어온 지 얼마나 됐는지 아나?" 

좌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린은 운 좋게 살아났다. 원래 같았으면 진린의 손에 

죽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는데…… 

사무린이 진린의 밑에 들어온 지는 대략 반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런데 그 시간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반년 동안 자네는 사무린에 대해 무엇을 알았나?" 

"무엇을 알았냐고 물으니 딱하니 대답할 것이…… 음!" 

좌운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 

다.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진린이 지금처럼 이야기 해 주지 않았다면 평생을 몰 

랐을 지도 모르는 문제다. 

"알겠나? 내가 사무린을 기대하는 이유를." 

좌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진린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좌운은 개방에 맞 

먹는 정보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만큼 수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인물이라는 거다. 

좌운은 알아버렸다. 자신이 사무린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진린은 찻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기대를 하는 거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사무린은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종이를 꺼냈다. 

기한(期限)- 경칩(驚蟄). 도황(刀皇) 진홍(陳洪) 필사(必死). 

간단한 내역이 담긴 서찰이다. 경칩까지 도황 진홍이라는 자를 죽이라는. 간단한 서 

찰의 내용과는 다르게 그것이 주는 무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 

도황(刀皇) 진홍(陳洪). 

얼마나 대단하면 황짜가 붙겠느냐를 떠나서 진홍은 강호십일객의 하나다. 팔황 중 

중간쯤의 위치에 있는 자로 도법으로는 현 무림에서 마땅한 적수가 없다는 자. 

말년에 병을 얻어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강호십일객이다. 지금의 사무린에 

게 강호십일객은 너무나 벅찬 상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솔직히 말해 이길 자신이 없다. 진린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기에 이 임무 

를 맡기는 했지만 상대는 현 무림의 최고 고수인 강호십일객 중 하나다. 

예년에 비해 약해졌다는 건 알지만 늙어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도황을 죽일 일도 문제지만 궁금증이 없다고는 말못하겠다. 진린에 대한 궁금증이 

이번 임무에 의해서 다시금 치솟았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강호십일객의 하나인 도황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일까. 마 

치 장난처럼 던진 명령이 아니던가. 사무린이 실패한다면 그 임무를 대신 할 자가 

분명 있을 것이다. 사무린은 진린의 성격을 안다. 실패할 일이라면 결코 이를 들어 

내지 않았을 거다. 

그건 곧 진린의 수하 중에 도황을 죽일만한 자가 있다는 말인데…… 

도대체 누가 현 무림의 최고고수인 강호십일객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휴우." 

사무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떠나느냐는 사무린의 맘이다. 오늘 떠나도 되고, 

보름 정도 후에 떠나도 된다. 경칩까지만 그를 죽이면 되는 것이다. 

'할 수 있을까?' 

이토록 막막해 보기는 오랜만이다. 그 어떠한 임무라고 해도 해 낼 자신이 있었는 

데 지금 이 명령만큼은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사곡에서 여운휘와 싸우게 되었을 때, 그때도 이처럼 막막했었다. 도저히 이길 자신 

이 없었던 여운휘. 

뿌드득. 

여운휘를 생각하니 사무린은 식었던 피가 달아올랐다. 그녀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 

다. 지금 이렇게 바보 같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그토록 강해졌다고 생각하지 않 

았던가. 이빨이 빠진 호랑이를 두려워한다면 언제 위에 올라설 수 있단 말인가. 

사무린은 자신만의 연무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늦지 않으려면 넉넉잡고 십일 후에는 떠나야 한다. 십일동안 얼마나 강해지겠냐 만 

은 그냥 주저앉은 채로 있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그 사내라면…… 지금 같은 상황이라고 해서 포기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베어 줄 거야. 반드시 너만큼은 내 손으로 벨 테야.' 

사무린에게 여운휘는 걸림돌이다. 앞을 막고 있지 않다고 해도 베어야만 한다. 그 

를 베지 않고서 사무린은 앞을 향해 걸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사무린의 호적수이기도 했다. 그만 생각하면 가슴이 끓어오른 

다. 늘어지려는 몸도 여운휘만 생각하면 바짝 조여진다. 

'너를 베지 않는 한 결코 최고라는 명칭을 달 수 없을 테니까.' 

사무린에게 최고의 적은 당장 눈앞에 다가온 도황도, 다른 강호십일객의 그 누구도 

아니다. 그녀에게 천하제일인은 여운휘다. 

마교를 벗어나는 사무린의 다리는 무거웠다. 무거운 건 비단 다리뿐만이 아니다. 몸 

도 마음도 너무나 지쳐 버렸다. 마치 홀딱 젖은 옷을 입고 억지로 걷고 있는 기분이 

다. 

십 일 동안 무던한 노력을 했다. 십 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발전을 한다는 

게 욕심이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그 십 일이 전부였기에 막혀 버린 

혈루검법(血淚劍法)을 어떻게든 이해하려 했다. 

수많은 비급들을 참조했고, 또한 고문서들도 뒤져보았지만 전혀 풀리지 않았다. 

혈루검법의 초반부분은 쉽사리 익혔다. 많은 고생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생으로만 

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이다. 혈루검법이 막혀버렸다. 중반 부분 

에 들어서면서 검법을 수련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점점 느려지던 검법의 성과도 급기야는 아예 멈추어 버렸다. 그러던 차에 지금 도황 

을 죽이라는 명을 받은 것이다. 

노력이 부족해서는 결코 아니다. 자질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 

다. 자질이 부족했다면 지금까지 살아 남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뿐이다. 

'깨달아야 해. 혈루검법의 중간부분을 익히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깨닫지 않는다면 

불가능해.' 

고문서를 뒤진 건 그 탓이다. 

사무린은 천천히 다리를 멈추며 멀리를 내다보았다. 아직은 봄의 따스함보다 겨울의 

쌀쌀함이 더욱 맘에 와 닿는다. 

혈루검법의 중간 부분만 어떻게 깨닫는다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터인데…… 

사무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들을 떨치기 위해서다. 벌써부터 

질 생각만 해서 어쩌란 말인가. 

'아직 진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질 거라는 보장도 없고 말이야. 이길 길이 있을 거 

야 분명히.' 

사무린은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탓에 주저앉을 정도로 그녀는 약하지 않다. 한치의 두려움도 

없다면 그건 거짓말일 게다. 하지만 사무린은 안면에 있던 어두운 표정을 지웠다. 

마치 일상과도 같이 변한 사무린의 표정은 그 누가 봐도 반할 정도로 아름답다. 

십 일간의 여정 끝에 사무린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염호촌(廉浩村)이라는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하루거리에는 여산(驪山)이 있으며, 여 

산릉(驪山陵)이 있다. 

딸깍. 

사무린은 객잔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객잔 안은 조용했다.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의 적은 인원들만이 객잔 안을 채우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점소이가 그녀 

를 보고 급히 일어났다. 

그다지 빼어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이다. 점소이는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일이신 지……" 

"방 있겠죠?" 

"물론이지요." 

"가장 구석방으로 하나 주세요." 

말을 마친 사무린은 위층으로 올라서 가장 구석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그럭저럭 깔끔 

한 편이었다. 사무린은 짐을 내려놓으며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거의 쉬지도 않고 움 

직인 탓인지 한 순간 피로가 온 몸을 엄습해 들어왔다. 

털썩. 

사무린은 그대로 침상에 쓰러진 채로 눈을 감았다. 

목적지는 이제 코앞이다. 남겨진 기간은 팔 일. 팔 일 안에 도황을 죽여야 한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사무린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아까 전에 봤던 

점소이다. 점소이를 본 사무린이 조금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죠?" 

"식사는 하셨나 하고……" 

"특별히 허기지지는 않군요." 

"아, 그렇습니까?" 

막 나가려는 점소이를 향해 사무린은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앞으로 제 방에는 안 들어와 줬으면 하는군요. 저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거 

든요." 

"죄, 죄송합니다." 

점소이는 급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사무린은 다시금 침상에 몸을 

맡겼다. 점소이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는 안다. 처음 봤을 때 바라보던 눈빛이 

어떠한 것인지 모를 사무린이 아니다. 

'재수 없게……' 

가뜩이나 심란한데 점소이 따위가 시간을 방해하니 짜증이 치솟는다. 야망도, 패기 

도 느껴지지 않는 남자에게 사무린이 관심을 가질 턱이 없다. 

사무린은 좌선에 들어갔다. 도황을 죽일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가 그보다 강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로서는 불가능하다. 혈루검법의 중반부 

에 들어선다 해도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지만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조금이 

라도 더 강해진다면 그만큼 살 확률도 높아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계책. 처음 것보다는 확률이 있는 일이다. 계책을 잘 쓴다면 도황을 죽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문제는 아무리 계책이 치밀하다 해도 지금의 실력으로는 아무 

래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강호십일객이라는 위명이 주는 무게감은 보통이 아니다.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들이 교차한다. 어떻게 해서든 단서를 얻어 한 단계 더 무공 

을 발전시키고 싶다. 

혈루검법의 비급에 적혀 있는 단 하나의 단서는 목개안(目開眼)이라는 글자다. 뭔가 

말이 되지 않는다. 목자는 눈을 가리키고 개자는 연다는 의미다. 문제는 안이라는 글 

자다. 안 또한 목(目)이라는 글자처럼 눈을 가리킨다. 

이어보면 뭔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단 하나의 단어 탓에 사무린은 더 이상 강해지지 못하고 있다. 

긴 좌선의 끝에 사무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짐 안에서 혈루검법의 비급을 

꺼냈다. 사무린의 눈이 빠르게 비급을 훑고 지나갔다. 뭔가 놓친 게 있지 않을까 했 

지만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다. 

이 하나의 단어 탓에 수백 번 이상 읽었던 부분이다. 

검을 허리에 찬 그녀는 계단을 내려서 객잔 밖으로 나왔다. 문 옆쪽 의자에 앉아 있 

던 점소이의 눈빛은 모르는 척 받아 넘겼다. 

도황은 이 근방에 있는 여산에서 머물고 있다. 아직은 섣불리 여산에 갈 생각은 없 

다. 알아내야 한다. 도황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란 정보는 모두 끌어들여야 한 

다. 자주 가는 곳이 어디인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술은 무엇인지…… 

술은 다른 의미로도 중요하다. 술은 사람의 긴장을 느슨하게 한다. 도황 또한 술을 

좋아한다고 알려진 무인이다. 잘만 이용한다면 한결 수월하게 일을 마칠 수 있을 지 

도 모른다. 

사무린은 마침 옆을 지나가는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처음 보는 아가씨네요. 이 마을 사람이 아닌 가 봐요. 허기야 이 정도 미모라면 마 

을에서 소문이 나고도 남았을 것 같네요." 

"예. 어쩌다가 이 근방에 들르게 되어서 잠시 머물고 있답니다. 그나저나 이 근방에 

유명한 무인이 계시다고 하던데……" 

"아! 도황이라는 분이요?" 

"예, 제가 물으려는 게……" 

사무린은 갑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앞에 있 

는 여인을 바라봤다. 앞에 있는 여인을 의아스럽다는 얼굴로 사무린을 쳐다보고 있었 

다. 

"…… 그 분이 있는 산이 여산이 맞나요? 온천이 그토록 좋다면서요? 그 산이 여산 

이 맞나 해서요." 

"여산이야 당연히 좋은 산이죠. 온천이 워낙 좋아서 피부에도 좋고요. 어머, 샘나 

네. 아가씨 같은 미인이 더 예뻐지면 우리 같은 아낙네들은 어쩌라고." 

사무린은 교묘히 말을 돌렸다. 도황에 대해 물으려던 것을 그가 머물고 있는 산으로 

화제를 돌린 것이다. 

'안 돼. 결코 도황에 대해 이토록 대놓고 물어서는 안 돼.' 

아무도 모르게 죽여야 한다. 도황을 죽인 자가 사무린이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건 

큰 문제다. 첫눈에 사무린을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작은 마을인 탓 

이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간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대놓고 묻고 다닌다면 이야기 하다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것이 겹쳐진 

다면 분명히 의심을 받게 된다. 단서를 남겨서는 안 된다. 꼬리를 밟힐 일은 피하는 

게 좋다. 

'큰일이야. 어떻게 하지?' 

아는 사람이 있어 비밀리에 정보를 구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보가 전 

혀 없는 상태에서 상대해야 한다는 말인데…… 

'불가능해. 개죽음을 면하기 힘들 거야. 뭔가 정보를 수집할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필패(必敗)야.' 

정보 없이 상대할 정도로 만만한 자가 아니다. 사무린은 다른 수로 정보를 구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 방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객잔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의 옆에서 

아까 그 점소이가 인사를 했다. 

"잘 다녀오셨어요?" 

귀찮다는 듯 힐끔 점소이를 바라봤던 사무린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다 멈 

칫했다. 

사무린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 점소이가 들어왔다. 전혀 볼품도 없고, 쓸 만 

한 가치도 없는 자다. 하지만 사무린에게 없는 것을 그 점소이는 가지고 있다. 그것 

도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그 무엇을. 

"저기 잠시만요.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 제 방으로 잠시 와주실 

수 있나요?" 

"무, 물론이지요!" 

사내는 척 봐도 감정을 알 수 있었다. 이 점소이는 감정을 숨길 줄을 모르는 모양이 

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용해 먹기 딱 좋지만 깊게 까지는 알려주면 안 되는 부류다. 

사무린은 뒤를 쫓아오는 점소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위층으로 올라섰다. 사무린이 가 

장 절실히 필요해 하는 것을 점소이는 뱉어 낼 것이다. 

점소이에겐 사무린이 필요로 하는 이 마을 사람들과의 인맥이 있다. 

조금의 언급만 준다면 이 사내는 사무린에 대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도황에 대 

한 정보를 마을 사람들에게서 물어 가져다 줄 것이다. 

사무린은 웃었다. 이 바보 같은 사내는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라 하고 있지만 조만간 

그 미소가 사라질 것이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이번 일을 알고 있는 건 사무린과 지금 뒤를 따라오는 점소이 뿐이다. 

사무린은 문을 열고는 점소이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는 뭐가 그 

리 기쁜지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으며 방안에 들어섰다. 

사무린은 침상에 걸터앉으며 사내를 바라봤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이 밉살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옆집에 사는 친근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푸근한 느낌을 풍긴 

다. 

"저기 앉아요." 

"예." 

의자에 앉는 점소이를 사무린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일이 끝난 후에…… 죽어 줘야겠어.' 

살려둘 이유가 없다. 비밀이라는 건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거니까.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사무린은 좌선을 하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얼마 

나 급하게 달렸는지 숨까지 몰아쉬는 사내가 문 앞에 있었다. 

"알아왔나요?" 

"하하, 예. 부탁하신 것에 대해서 알아왔습니다." 

점소이의 표정은 밝았다. 사무린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사내가 지금만큼은 그 어떠한 누구보다도 가치가 있어 보 

인다. 사무린에게 다가온 점소이가 말했다. 

"도황은 여산 중턱에 있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주 가는 곳은 여산에 있는 

온수사(溫水寺)입니다. 그는 그곳에 있는 중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답니다. 둘 

이서 자주 술을 마시는 모양이던데…… 하하. 중이 술이라니 우습지 않습니까?" 

목구멍까지 쓸 데 없는 말은 하지 말라는 말이 치솟았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점소이 

의 말을 들어 주었다. 몇 마디 더 지껄이던 그는 곧 본론으로 돌아갔다. 

"도황은 그 중을 만나러 갈 때를 제하고는 거의 자신의 거처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합 

니다." 

"자주 만나나요?" 

"예,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만나는 모양이더군요." 

이틀에 한 번…… 기습을 감행할 기회가 몇 번 있는 것이다. 그것도 술까지 마신다 

고 하니 적긴 해도 승산이 있는 것이다. 

사무린은 묵묵히 앉아 사내에게 다른 이야기들을 들었다. 혹시나 도움이 되는 다른 

것이 있나 하고 들었지만 그 후부터 나오는 말들은 전부 쓸모 없는 것들이다. 사무린 

은 대충 얼버무리며 점소이를 방밖으로 쫓아냈다. 

문을 닫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용해 먹어야 해서 가까이 지내는 척 하고는 있지만, 천성적으로 맞지 않는 자다. 

그녀는 짐 안에 있는 혈루검법의 비급을 꺼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사무린 

은 점소이 사내를 생각했다. 자기 주제도 모르는 것일까? 자신의 주제만 안다면 지 

금 이러한 행동은 하지도 않았을 터인데. 

'자기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놈들은 다치기 마련이야. 자기에 대해 모르는 건……' 

비급을 바라보던 사무린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도저히 풀지 못했던 문 

제인 목개안(目開眼). 두 개의 눈이 뭐인지 심하게 고민했었다. 사무린은 서책을 다 

시금 뚫어져라 바라봤다. 

목이라는 글자가 일반적인 크기보다 작으며 옆으로 퍼졌다. 

사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큼 이 일은 엄청났다. 

'서, 설마!' 

실수였다. 너무나 작은 실수 탓에 오랜 시간을 버려 버렸다. 

'목개안(目開眼)이 아니었어. 자개안(自開眼)이야!' 

위에 부분이 희미해져 자를 목으로 봐 버렸다.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사무린은 그 

한 가지 문제가 풀리자 눈이 확 뜨이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막혔던 그 많은 것들이 

한순간 해결되어 버렸다. 

우습게도 단서를 준 것은 그토록 경멸했던 점소이 사내였다. 이름도 모르는 사내, 자 

기 주제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차에 혈루검법의 비급에서 보이는 목자와 자라는 글자 

가 비슷하게 생겼다는 걸 생각해 버린 것이다. 

'자개안. 자신에 대해 눈을 뜨라는 거였어. 그렇다면 이건……' 

목개안이 아닌 자개안이라는 것을 안 후 보니 내용이 새롭다. 자신이 해석했던 것은 

목개안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 상태로 억지로 익혔다면 주화입마에 빠져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러면 이건……' 

깨달음은 많은 것을 얻게 해 준다. 사무린의 머릿속은 텅 빈 듯 아무런 잡념도 일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의 아이처럼 그녀는 빠르게 혈루검법의 중반 부분 

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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