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백무량이다. 덤비고 싶다면 언제라도 좋아. 하지만 그 때는 나머지 한쪽 눈 또한 영영 빛을 보게 되지 못할 거라는 걸 각오하고 와라. 아, 그리고 방금 것은 구 초, 흑화승라(黑花昇羅)다."
그때 백무량의 눈빛을 그는 잊지 못하고 있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빛, 그런
데 흑의인은 앞에 있는 여운휘의 모습에서 백무량을 발견했다.
그 날이 떠올라 분노도 치밀지만 그것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열려 있는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토해냈다. 그저 창문이 삐
거덕거리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원체 조용하니 소름이 오싹 돋는다.
"누구의 시주로 왔나."
"대답 할 거라고……"
"아, 알고 있어. 대답하지 않겠지. 애초부터 대답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니
까."
여운휘는 더 이상 말도 하지 않고 검을 치켜들었다. 흑의인은 자신이 상대에게 끌려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든 말을 하다가 기회를 봐서 도망칠 생각이었거
늘 상대는 말을 할 거리조차 잘라버렸다.
흑의인은 알아버렸다. 애초부터 이자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형식상 물었고, 이제 본심을 드러내 베려고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죽이려 했던 거야. 제길, 실수했어. 차라리 아까 전에 이 늙은 의원을 베
고 문을 통해 도망쳤어야 했는데. 그것이 실수였어.'
검을 맞대어 보지 않았으니 상대방의 실력을 모른다. 그렇지만 흑의인은 이미 상대
가 자신의 적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엔 누군가 했지만 백무량의 얼굴
을 떠올리면서 저절로 사내가 누군지 알아버렸다.
'저 자가 정말 진군휘라면 필사(必死)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린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다. 흑의인은 한 발 뒤로 내
딛는다 싶더니 재빠르게 앞을 향해 몸을 퉁겼다. 도망치기 위해 창문 쪽을 향해 움
직였지만 역시나 여운휘가 그 앞을 막아섰다.
흑의인은 재빠르게 검을 꺼내어 들고 휘둘렀다.
차앙!
검과 검이 부닥치면서 맑은 검명(劍鳴)을 토해냈다. 뒤로 반 발자국 움직이며 흑의
인은 여운휘를 향해 재차 검을 움직였다.
서둘러 도망쳐야 한다. 시간을 오래 끌게 되면 주변에 있는 무인들 또한 이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검이 허공을 그었다.
흑의인은 순간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검이 아닌 창이었다면 하는 생각이 치솟았
다. 암습을 하러 오면서 창을 들고 온다는 건 조금 무리였다. 더군다나 상대는 무공
을 익힌 것 같지도 않은 노인이었다.
굳이 흔적을 남길 창보다는 어디서나 쉬이 볼 수 있는 검을 들고 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후회막급(後悔莫及)이다.
흑의인은 검을 쭉 앞으로 세웠다. 이길 자신이 없다. 그렇기에 그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일반적인 공격이라면 결코 이길 수 없다면 전혀 예상치 못한 길을 따
라 움직이면 된다.
검을 들고 창술을 쓰는 것이다.
검과 창은 투로가 다르다. 검이 불가능한 것을 창은 할 수 있고, 반대로 창이 불가
능 한 것을 검은 할 수가 있다.
백일도(白日刀) 천일창(千日創) 만일검(萬日劒) 이라는 말이 있다.
웃기지 말라 이거다. 무기에 높고 낮음은 없다. 얼마나 더 완벽하게, 더 깊게 익혔
느냐가 중요하지 병장기의 문제는 그 후의 일이다.
'좋아, 할 수 있다.'
백무량에게 당한 후 손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연습했던 초식이다.
흑화개천창법의 구 초식, 흑화승라.
백무량에게 당했던 초식이고, 지금은 그의 필살(必殺)의 초식이 되어 버렸다. 당했
던 초식이 지금은 그의 절초다? 우습기도 하지만 그만큼 각오가 독했기에 가능했다.
상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그는 꿀꺽 침을 삼켰다.
흑의인의 몸이 여운휘를 향해 솟구쳤다. 아래로 내려져 있던 검끝이 번개같이 위로
솟구쳤다. 목표는 여운휘의 한 쪽 눈. 베기만 한다면, 벨 수만 있다면 도망칠 기회
가 생긴다.
타앙!
'실패다!'
원하던 소리가 아니다. 그가 듣기를 바랬던 소리는 이런 게 아니었다. 여태까지 백
에 가까운 사람을 죽였던 그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미세한 느낌이라도 놓치지 않
는다. 결코 몸에 닿지 못했다.
퍼억!
칼이 아닌 주먹이 흑의인의 제문혈(臍門穴)을 때렸다.
뭔가 다른 행동도 하기 전에 흑의인의 몸이 무너져 버렸다. 제문혈은 사혈이다.
흑의인이 털썩 쓰러지자 그제야 진자자가 움직였다.
"후우…… 자네 덕분에 살았군."
"혹 누군가가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미리 말을 해두려다가 당신이 그 사실 탓에
오히려 주변에 신경을 쓸까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소. 당신이 두리번거렸다면 이
자는 애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지도 모르지."
"후후, 내가 미끼였단 말인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기분이 상할 테니 아니라고 말하지."
여운휘는 죽어 버린 흑의인을 힐끔 내려다 봤다. 일부로 피 냄새가 풍기지 않게 하
려고 검이 아닌 주먹으로 상대를 죽였다.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지만 이 정도는 크
게 냄새도 배지 않을 것이다.
"전에 부탁한 건 어찌 되었소?"
"어느 정도 진전이 있네. 하나만 말하자면 정말 무서운 독이야. 생전에 그토록 무서
운 독은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돌세. 도대체 그런 뱀을 어디서 구한 겐가?"
"만금산장 주변에 있던 동굴에서 구했소. 어쨌든 더 수고해 주시오. 내가 전에 준
독이나 이번에 준 독. 두 가지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말을 마친 여운휘는 시체를 들고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진자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여운휘가 이곳을 지키지 않았다면 죽은 건 저 흑의
인이 아니라 바로 진자자 본인이었을 게다.
'십년 감수했군.'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지금 진자자는 크게 흥분한 상태였다.
악양유가에 온 이후로는 제대로 쉰 적이 드물다. 하지만 결코 불만은 없다.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두 개의 독을 만져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남을 가치가 있다.
'하나는 천천히 사람을 죽이는 독. 나머지 하나는 사람의 몸을 순식간에 녹여 버리
는 독……'
과정은 정 반대지만 결과는 같다.
'두 가지 모두 대단한 독이야.'
걸인 한 명이 길을 걷고 있었다. 팔을 마치 땅에 닿을 정도로 축 져져 있고, 등도
굽은 곱사등이다. 뭉툭한 코에 사팔뜨기인 눈을 지녔지만 그 눈빛만큼은 혼탁하지
않다. 얼굴에 무슨 상처가 그리 많은지 마치 곰보인 사람 마냥 보인다.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거지, 아니 거지보다도 더욱 못해 보이는 상거지였다.
옷인지 아니면 넝마인지 조차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찢겨진 옷은 이미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원래의 빛을 바래버렸다.
걸인은 무엇인가 찾는 듯 고개를 이리 저리 흔들어 댔다.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마치 살수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걸인은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다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걸인의 입에서 쉰소리가 새
어 나왔다.
"허……"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허허……"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이 넓은 공간이 피와 시체로 가득
하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시체가 산을 쌓았고, 피가 바다를 이루었다.
멀리서부터 혈향을 맡고 바짝 긴장했던 걸인은 자신의 앞에 있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걸인은 무엇인가가 움직였다는 말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인 개
방의 분타주 중 하나였다.
반개(瘢慨) 철혈우.
개방의 문도 중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으리라.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
손속만큼은 확실하면서도 잔인하다. 얼굴에 있는 수많은 상처들은 그가 걸어온 길
을 대변하고 있다.
"이걸…… 뭐라고 말하란 말이냐."
길게 펼쳐진 평원(平原). 그곳에 가득한 시체들.
한때는 꽤나 시끄러웠을 듯한 이곳이 지금은 혈향과 적막으로 가득하다.
수상한 무리가 보였다는 정보를 들은 것은 바로 어제. 서둘러서 움직인다면 뭔가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이곳에다가 서찰까지 날리지 않았던가. 뭔가
수상한 무리들이 접근한다고 조심하라는 전서구가 이곳을 이렇게 만든 자들보다 늦
게 도착했을 리가 없다.
전서구를 받았다면 방심하고 있지 않았을 거다. 뭔가 알 수 없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단단히 준비도 하고 있었을 터인데……
'방심하지 않았을 게야. 방심했을 리가 없지.'
철혈우가 이곳까지 오는데 하루가 걸렸으니 상대가 아무리 빨리 움직였다 해도 반나
절 이상은 차이가 나지 않을 터.
반나절만에 이곳이 이토록 피로 물들어 버린 것이다. 고작 반나절만에.
코를 찌르는 피 냄새가 철혈우의 심기를 건드렸다. 머리에 힘줄이 솟는다. 꽉 쥐여
진 손을 부들부들 떨린다.
"우리 개방이…… 우리 개방의 정보가 무용지물이었다니."
정보가 빨랐다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을 터다. 그렇지만 욕심이 난다. 한 시진만
빨랐다면, 적의 정체에 대해 알기라도 했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만 같
다.
철혈우는 붉게 물든 대지 위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장강수로십팔채 중 하나인 수어채(水魚寨)는 괴멸이다.
우문학이 상기 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비록 감정에 충실한 우문학이지만 그가 당황해 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는 뜨거
운 가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냉철하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쉽게 당황하지 않
는다.
유설린은 상기 된 얼굴을 하고 있는 우문학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놀라운 소식이요?"
우문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놀라운 소식이라는 것을 접하고 나서 한달음에 달려
온 모양이다.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다급하게 문을 열어제치고 들어온 것
이다.
"장강수로십팔채 중 하나가 완벽하게 박살이 난 모양입니다."
"역시…… 마교의 소행인가요?"
"예. 아마도 무림맹 편에 붙은 장강수로십팔채에게 본때를 보여줌으로서 본보기로
삼으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
인 혁련우가 남궁세가에게 분노를 한 모양입니다."
"남궁세가에게요? 왜죠?"
"그게 말입니다……"
사정은 이러했다.
개방에서 알 수 없는 세력들이 다가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수어채의 채주는 근방에
있는 세력인 남궁세가에게 지원병을 요청했다. 물론 그 지원병이 움직였다 한들 도
착하기 전에 괴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궁세가에서는 단 한 명의 무인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라혈수 혁련우는 그 말을 듣고 화를 터트렸다. 피해를 감수하면서 까지 무림맹과
손을 잡았다. 그런데 원조 요청을 깨끗하게 무시하다니……
혁련우로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왜 그런 거죠? 어느 정도의 병력만 보냈어도 이렇게 까지는 일이 커지지 않았을 텐
데요."
"정확한 이유야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는 남궁철의 몸 상태입니다. 그 탓에 결단이
느려졌다고 남궁세가 쪽에서는 답변했지요. 혁련우 또한 그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은
하는지 크게 반발은 하지 않습니다만……"
기분이 나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만큼 수하들을 아끼던 그가 아니던가.
장강수로십팔채의 내부는 혼란스러워 질 것이고 총채주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자들도 생길 것이다.
"아, 그러면 장강수로십팔채를 괴멸시킨 자들이 누구인지는 알려졌나요?"
"그게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흑색 기마대인 걸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여운휘의 눈빛이 변했다.
흑색 기마대라는 말에 그는 누군가를 생각했다. 그 먼 거리를 단숨에 잘라버리며 창
을 날렸던 흑색 기마대의 대주.
"흑색 기마대라면 저도 어렸을 적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어요."
유설린의 아버지이자 전 교주였던 유백명이 여러 번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마교내
비밀 무력 집단인 흑색 기마대에 대하여. 특별한 것은 듣지 못했지만 흑색 기마대라
는 이름이 어떠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
"지금은 이 일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만간 무림에 알려지게 된다면 큰 혼란
이 일겁니다."
흑색 기마대란 그러한 존재다.
마교에게는 마지막 보루, 정파 무림인들에게는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지는.
일전에 있었던 정사대전을 생각한다면 흑색 기마대는 공포의 대상이자, 증오의 상대
다.
흑색 기마대가 다시 움직였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정파 무림인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
됨은 분명한 일이다.
"흑색 기마대와 조우해 봤다고 들었는데……"
"한 번."
화살이 여운휘에게 돌아갔다. 여운휘는 딱딱한 어조로 대꾸하고는 관심 없다는 표정
을 지어 보였다.
"정말 듣던 대로 강하던가?"
"별 볼일 없더군."
"아마 자네가 아니라면 아무도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걸세."
결코 만만할 리가 없다.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만에 완벽하게 장강수로십팔채의 하
나를 없애고 사라졌다. 또한 정말 별 볼일도 없었다면 여운휘가 저 정도로 이야기하
지도 않았을 거다.
"아마 반드시 부닥치게 될 거야."
"물론."
마교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부닥치지 않을 수가 없다. 흑색 기마대는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산인 셈이다.
여운휘는 설산(雪山)에서의 도주가 생각난다. 그때 약속했다. 흑색 기마대의 대주만
큼은 자신의 손으로 죽여주겠다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 치밀한 작전 없이 그냥 부닥치게 된다면 이 쪽
의……"
유설린은 여운휘가 검지를 치켜들고 입술 앞에 가져다 대자 말을 멈췄다. 말을 멈추
니 미약하지만 발자국 소리가 이곳으로 향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자는 남궁진이었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이리 일찍 찾아오셨죠?"
"아, 손님이 오셔서 말입니다. 그 분이 진군휘를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휘를요?"
유설린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뭔가 아는 게 있냐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여운휘는 어
깨를 으쓱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그 분이 누구인지 물어도 되나요?"
"남궁세가에서 가까운 백무장(白武墻) 장주의 외아들이십니다."
"백무장의 장주의 아들? 난 그런 자를 모른다."
"하하! 자네는 물론 모르지. 일전부터 려희 누님을 사모하던 사내 분 중 하나이네.
알겠지만 려희 누님을 사모하는 많은 사내들이 죽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그 분은 무
공이 뛰어난 탓에 수차래 암습에서도 멀쩡하신 분이지. 무공에 관심이 많은 탓에 자
네가 이곳에 있다니 한 번 만나 보고 싶다고 하더군."
백무장은 남궁세가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집안이다.
예전에는 무공으로 꽤나 이름을 날렸지만 대부분의 무공을 소실한 지금은 그저 이름
만 유지하는 가문 중 하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백무장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비록 무공을 소실한 지금 무가로서
의 이름은 잃었지만 다른 것까지 그런 건 아니다. 백무장은 무공 대신 장사 쪽을 향
해 손을 뻗쳤고 지금은 근방의 상권을 휘어잡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 백무장의 소장주는 뛰어난 장사 능력으로 상계에서도 크게 주목받는
인물이다.
"백무장의 소장주라면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어요. 대단히 영특한 분이라고 하시던
데 이름이……"
"그 분의 이름은 백무량이라고 하지요."
유설린의 말을 남궁진이 이었다.
백무장(白武墻)의 장주는 영특한 사람이다. 젊었을 때부터 호탕한 기상으로 유명했
던 백무장의 장주 백산(白山)은 아까운 인물이었다.
백무장에 어느 정도 내세울만한 무공만 남아 있었다 해도 결코 그 정도의 인물로 끝
내버릴 자가 아니었다. 백무장의 무공은 꽤나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렇듯이 시
중에 널려 있는 무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백무장은 문도들을 크게 나눴다. 아래쪽에 있는 자들은 결코 수준 높은 무공을 배
울 수 없었고, 뛰어난 재능이나 엄청난 노력이 없다면 상승 무공은 손에 접하기도
힘들었다.
그렇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백무장에는 많은 문도들이 보여 들었다.
그만큼 어려운 대신 그 후에 가지게 될 능력 탓이다.
입맛이 당긴다. 백무장에 입문하는 것은 특별히 어렵지 않고, 노력만 한다면 고수
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뒷배경도 없고, 돈도 없는 자들에게 백무장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무림에서 손꼽아 주는 절학(絶學)을 자신들도 배울지도 모른다.
그 한 가지 사실에 백무장은 빠른 속도로 부흥하며 오대세가에 필적할 만큼 커버렸
다. 심지어 한때는 육대세가라고 칭해질 정도로 번창했을 정도니.
문제는 그거였다. 백무장에서 상승무공을 익히고 있는 자의 수는 채 백도 되지 않았
다. 다른 세가에 비한다면 한참이나 부족한 숫자다.
더군다나 장주만이 안다는 백무장의 백로무상검(白鷺舞上劍)과 백로육합장(白鷺六合
掌), 백로혈뢰지(白鷺血雷指)……
백무장의 쇠락에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세 가지의 무공의 소실 때문이다.
이 무공은 가주만이 알고 있다. 백무장에서 아무리 대단한 위치에 있다 해도 이 무
공은 전수 받지 못한다. 오직 가주만이 배울 수 있다.
가주는 이 세 가지의 무공을 전수해주는 순간 이미 가주가 아니게 된다. 바로 그 순
간부터 그 무공을 배운 자가 가주다.
백로무상검, 백로육합장, 백로혈뢰지는 그렇게 가주에게만 내려지는 일인비전(一人
秘傳)인 셈이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백산의 조부(祖父)가 이 무공을 전수하기도 전에 죽어버리
고 만 것이다. 구두(口頭)로만 전해지는 탓에 관련 된 비급이 없다는 것이 백무장
의 두 번째 불행이었다.
그 후로 백무장은 하루가 다르게 몰락해 가기 시작했고, 결국 백무장은 무공을 버리
고 상계 쪽으로 발을 넓혀 지금의 성세를 이루었다.
이 모든 것은 백산이 이룬 것이다.
무공으로는 전혀 유명하지 않다.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돈은 무공과는 다
른 의미의 힘이니까.
백무량은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사향화(死香花) 남궁려희.
별호에서 물씬 풍기는 짙은 피의 냄새와는 다르게 그녀는 곱디곱다. 긴 손가락에 하
얀 피부, 나이는 조금 많은 편이지만 전혀 부족하지 않은 미모. 꽃이라도 가을이 되
면 시들시들해져 그 생기를 잃건만 이 여인은 그렇지 않다.
언제나 봐도 항상 막 물이 오른 꽃봉오리 같다.
그녀는 결코 겉모습만 화려하지 않다. 많은 여인들은 겉모습만을 치장하기 바쁘다.
겉모습이 아름다우면 그것이 모두인 줄만 안다.
남궁려희는 다르다. 겉모습이 빼어나다고 하여 그것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서예(書藝)를 잘한다. 난을 잘 그리며 서책을 읽는 것을 즐겨한다. 그 어떠한 상황
이라고 해도 예의에서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백무량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백무량이 처음 그녀를 본 것은 약 팔 년 정도 전이다. 흑색 기마대의 대주가 되기
도 전의 일이니 꽤나 오래 전인 셈이다.
긴 암흑의 시간을 보내고 이제 슬슬 날개를 펴기 시작한 백무량은 백가장의 소장주
라는 것을 이용해 남궁세가를 찾아왔다. 백무장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현 정파 무림
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
보고 싶었다.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있는지.
실망이었다. 분명 빼어난 인물들은 많았지만 결코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
았다. 그렇게 남궁세가를 떠나려던 백무량은 남궁려희를 만나 버렸다.
한 눈에 반한 건 아니다. 아니, 그 때는 그 감정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
다.
그냥 그렇게 지나쳤던 사이,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한동안은 아예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삼 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백무량은 남궁려희
를 만나게 됐다.
막 흑색 기마대의 대주가 되었을 무렵이다.
사천의 성도(成都)에서 백무량은 남궁려희가 다른 무리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보는 순간 알아차렸지만 그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궁려희가 자신을 기
억할 턱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말 한 마디 한 적도 없고, 특별히 대면을 한 것
도 아니다. 그냥 백무장으로 돌아가던 와중에 스치듯이 본 게 다였던 그런 만남.
조용히만 있는 다면 그냥 그렇게 식사를 하고 가면 그만이다.
백무량에게 그녀는 그러한 존재였다.
그런데 식사를 하던 백무량의 뒤에 그녀가 다가왔다.
'큭큭, 그때 내 이름을 불렀지.'
남궁려희가 자신의 이름을 알자 백무량은 순간 놀랐다. 하지만 곧 태연하게 대꾸를
하며 그녀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단 하루 같은 객잔에서 머물며 조금 이야기
를 나누었다.
그리고 헤어지던 때 남궁려희는 백무량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모르는 척 하지 말라고.
얼마나 웃었던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것이
다.
그 이후 남궁려희는 백무량에게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부정하지 않는다. 백무량은 남궁려희를 사랑한다.
백무량은 남궁려희에게 접근하는 사내들을 죽였다. 그건 그의 수하인 흑색 기마대
의 대원 중 일부가 행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호감 또한 내비친 적이 없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
은 그녀에게 그럴 말을 할 수가 없다.
언제쯤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건 영원히 할 수 없는 말이 될지도 모르는 상
황이다.
오랜 침묵을 남궁려희가 깼다.
"오랜만이네요."
"그간 잘 지냈는지 모르겠소."
"특별한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예전 당신을 밖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세가 내에서 조용히 지내는 걸요."
백무량은 남궁려희를 바라봤다. 지금은 오히려 조숙한 분위기가 풍기지만 예전에는
어느 정도 발랄한 느낌도 가지고 있었던 그녀다.
남궁려희는 여행을 좋아했다. 무림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즐겼
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백무량은 내심 미안한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버리게 된
것에 백무량 또한 무관하지 않아서다.
남궁려희는 자신과 가까이 지내는 남자들이 죽게 되자 세가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
다. 그녀는 자신 탓에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요즘 바쁘신 것 같아요. 종종 서찰을 보냈는데 답신이 하나도 없더군요."
"아, 서찰을 보냈다는 것도 몰랐소. 백무장에서 나와서 돌아다닌 지 조금 시간이 흘
러서 말이오."
"그래요? 아무런 서찰도 없어서 이제 그만 보내려던 참인데 계속 보내야겠군요."
말을 마치고 웃는 남궁려희의 모습을 보며 백무량은 침묵했다. 저 미소를 볼 때마
다 미안한 마음이 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장주께서는 잘 지내시는지요."
"저희 아버님이야 항상 정정하잖소. 그보다 소저의 아버님이신 가주님께서 몸이 편
찮다는 말을 들어서 걱정을 많이 했소이다."
"곧 쾌차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백무량은 아무런 표정도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씁쓸했다. 그는 남궁세가의 가주가
왜 그리 되었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가 어떻게 될지도 안다.
'그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거요.'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는 흑색 기마대의 대주이니까.
가볍게 근래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묻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남궁진이 들어섰다.
"백 소협. 보고 싶다고 하셨던 진군휘가 왔습니다."
"지금 바로?"
"예. 제가 오는 길에 따라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유가의 소가주님과 다른 한 분
도 같이 오셨습니다."
"호오, 그런가?"
백무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 건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언뜻 스쳐지나간다.
이곳에 몇몇의 인물들이 오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자신이 만나려 했던 자일 줄
은 몰랐다.
남궁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하자 세 명의 인물이 안으로 들어섰다.
한 명의 여인과 두 명의 사내.
아름다운 외모 탓에 여인에게 고개가 돌아갈 만도 하련만 백무량의 눈은 사내 둘
중 하나에게로 향했다.
여운휘의 눈 또한 백무량을 향해 꼽혔다. 순간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운휘는 백무량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흑색 기마대의 대주라는 건 모르
지만 그 얼굴은 결코 잊지 않았다. 그저 객잔에서 한 번 스쳐지나가듯이 만난 게 다
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기억난다.
"이거 이거 본 적이 있으신 분이군."
백무량은 마치 지금 알았다는 듯 말했다.
"만금산장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본 적이 있었지."
"예? 그곳에 가셨었습니까?"
"그랬지."
남궁진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운휘를 그곳에서 보았다면 남궁진 본인
또한 그곳에 있었을 때가 아니었겠는가.
"그게 이번 겨울이셨습니까?"
"그렇네만."
"아! 그때 이 친구의 옆에 저도 있었는데……"
"그랬나? 이거 진군휘라는 소협은 봤지만 너는 보지 못했구나."
거짓말이다. 그때 들어왔던 모든 사람을 확인했던 그다. 안면이 있는 남궁진을 결
코 놓쳤을 리가 없다.
여운휘는 묵묵히 백무량을 바라봤다. 그때 다가왔던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었다.
제대로 된 무공을 잃어버린 가문의 일원이라기에 그저 그런 무인일 거라고만 생각했
다. 그렇지만 아니다. 긴장을 놓고 있던 때라고는 해도 그토록 완벽하게 접근한 것
은 이 사내가 처음이었다.
여운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진…… 군휘라 하오."
"백무량이라 하네."
가볍게 대꾸하는 백무량의 눈 또한 여운휘를 향해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변하지 않았군.'
일전에 밖에 있는 여운휘를 내려다 본 적이 있다. 고개를 돌렸던 여운휘는 마치 지
금처럼 백무량을 바라봤다.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겁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
빛이 얼마만 인지 모르겠다.
처음 흑색 기마대의 대주가 되었을 때 수많은 자들이 저토록 백무량을 쳐다봤다. 우
습기만 했다. 실력도 안 되는 놈들이 그런 눈으로 쳐다본다 한들 달라질 게 없다.
오히려 화만 치솟게 할 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찬가지의 눈빛일지는 모르지만 그걸 느끼는 당사자인 백
무량에게는 너무나 다르게 다가온다.
'암, 그래야지. 내가 점찍은 사냥감이 한낱 늑대 정도라면 우습기만 하지.'
그가 선택한 사냥감이 우습다는 건 백무량에겐 수치다. 실력 좋은 사냥꾼은 맹수를
잡는다. 맹수를 잡는 건 실력이 좋기만 해서는 안 된다.
담력.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날 기억하는가?"
"얼굴 정도는."
악 다문 이빨 사이로 실소가 흘러나온다. 백무량 본인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
었다. 상대방 또한 백무량을 기억하고 있다.
"아, 내가 자네보다 나이가 많아 말을 좀 낮추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말하게.
내 고치도록 할 터이니. 아니면…… 자네도 말을 놓던지."
"그러지."
백무량의 눈가에 이채가 일었다. 말을 놓으라는 말은 형식에 가까운 말이었던 것이
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상대가 말을 놓았다.
손이 근질근질하다. 반드시 죽이고 싶은 상대가 앞에 있는데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몸이 달아오른다.
찻잔보다는 창을 들고 대면하고 싶었다. 입이 아닌 창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
만 그럴 수가 없다.
백무량은 어쩔 수 없이 이런 가면을 써야 하는 상황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백무
량은 짐작했다. 피가 가득한 전장(戰場)에서 결국 만나게 될 것이다.
정적이 감돌았다. 뭔가 오고가는 말이 있어야 할 터인데 특별히 그런 게 없다. 바
뀐 게 있다면 남궁진의 안내로 새로 온 사람들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는 것뿐이다.
시녀가 차를 가지고 들어올 때까지도 오고간 말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야기를 하는 것도 유설린과 남궁려희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여운휘는 백무량을 살폈다. 그때 놀랐던 날을 잊
어 본 적이 없다. 아직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했던 일이 아니던가.
백무장의 소장주. 무공으로는 크게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렇지만 안다. 여운휘
는 자기의 눈을 믿는다. 결코 소문 만한 자가 아니다. 십대후기지수에 조차 끼지 못
한 인물이지만 결코 그들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라고 여운휘는 생각했다. 적어도 그
가 보기에는 그랬다.
여태까지 그토록 가까이 다가왔는데 알아차리지 못했던 상대는 백무량이라는 사내
가 처음이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백무량은 자신의 무공을 제대로 선보이지 않은 게 분명하다. 만
약 그가 본연의 실력을 보였다면 이토록 잠잠할 턱이 없다.
차를 마시던 백무량이 여운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문이 어디지?"
"특별히 사문이랄 건 없고, 그저 가전무공을 하사 받았다."
"가전무공이 대단한 모양이군."
"무상검제 진군악의 쾌검이니까."
"호오? 무상검제의 후손이라는 말이로군 그래."
여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을 들은 백무량의 눈에서 이채가 일었다. 전
혀 근본을 알 수 없는 무인이라 궁금했거늘 무상검제 진군악의 후손이라니 흥미가
인다. 적어도 쾌검하면 무림에서 활동했던 무인 중 한 손가락에 꼽는 인물이 아니던
가.
상대가 강한 것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갑작스럽게 백무량이 한 가지 제의를 했다.
"검을 펼치는 걸 한 번 보고 싶은데 괜찮나?"
"아, 백 소협은 유명한 분의 무공을 견식해 보는 걸 좋아하세요. 혹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으면 하는군요."
남궁려희는 여운휘의 미간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백무량을 대변했다. 여운휘는 묵
묵히 앉아 백무량을 바라봤다.
일전에 백무량을 만나보지 않았다면 그냥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대의
실력이 결코 자신보다 하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저 무공을
보고 싶다는 것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아.'
밑지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다 해서 이 기분이 풀릴 것 같지도 않다. 오
히려 실력을 보여주고 싶다. 오행검법은 무리지만 무상검제의 쾌검이라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보여주지."
"화끈한 친구로군."
"어떻게 보여줄까? 원하는 걸로 해 주지."
여운휘의 말에 백무량은 주변을 살폈다. 뭔가 보여줄 만한 것이……
"이게 어때?"
백무량은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궁진이 품에서 동전 한 닢을 꺼
내 들고 있었다. 남궁진은 동전을 꺼내 들고 백무량을 바라봤다. 그의 대답을 기다
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휘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고 남궁진 또한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남궁진은 여운휘가 검손잡이에 손을 얹자 손가락을 퉁겼다.
피잉!
파공음을 내며 동전이 여운휘를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극히 작은 동전이 여운휘
의 눈에 잡혔다.
파앗!
여운휘가 손을 움직이자 손잡이가 매끄럽게 미끄러져 나왔다. 검병이 움직인다고 생
각한 순간 이미 검날은 동전을 향했다.
타앙!
번쩍 하는 순간 동전이 반으로 갈려 버렸다. 백무량은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그
는 떨어진 동전을 주워들었다.
'호오.'
단순히 동전을 자른 게 아니다. 완벽하게 반으로 잘렸다. 검의 속도뿐만이 아니라
시신경 또한 다른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빼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
고 무엇보다 동전의 절단면이 깔끔하다.
뭉그러짐은 전혀 없다. 마치 일부로 그렇게 만들기라도 한 듯한 모양이다.
동전을 바라보던 백무량이 박수를 쳤다.
"대단하군."
"저 친구의 무공은 같이 있는 제가 잘 압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그래?"
여운휘는 자리에 다시금 앉았다. 남궁진은 여운휘와 만금산장에서 싸웠던 이야기를
하며 그의 무위를 칭찬했다. 백무량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가 슬슬 길어질 무렵 누군가가 문 근처로 다가왔다.
"소장주님!"
"음? 내 손님인 모양이군."
백무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실례하겠소."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백무량이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
아 그가 다시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를 비워야겠구려. 여기 모이신 분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십시오. 남궁 소
저 일이 끝나면 다시 찾아오겠소. 그럼 이만."
가볍게 포권을 취한 후 백무량은 다시금 밖으로 나갔다.
백무량이 나가자 유설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가시게요?"
"예. 저희도 슬슬 세가에 돌아가야 할 테니 준비 할 게 많아서요."
"그렇다면 잡아두고 있을 수는 없네요."
남궁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설린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렇게 가볍게 미소로 인사
를 대신하고는 유설린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옆에 여운휘가섰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유설린은 용케 여운휘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여운휘와 꽤 긴 시간을 보냈다. 감정
을 표현하지는 않지만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아까 그 백무량이라는 남자는 조심해야겠다."
"밑도 끝도 없이 조심하라니?"
유설린은 여운휘의 말을 의아스러워했다. 특별히 말을 나눈 건 아니지만 겉으로 보
기에는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는다. 무뚝뚝하긴 하지만 여운휘와 오랫동안 함께 하
다보니 그리 크게 흠될 것 같아 보이지도 않다.
"뭔가 숨기고 있다. 정확하게는 말해 줄 수 없지만 그건 확실해. 무엇인가를 숨기
고 있는 상대를 가까이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지."
"뭔가 본 게 있나 보네?"
"……"
대답하지 않지만 굳이 말해야 아는 게 아니다. 유설린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였다.
거처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여운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그 대신 골똘히 백
무량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백무량이 어떠한 자인지
판단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여운휘는 우문학을 생각했다.
알고 있다. 그 사내의 능력은 비단 무공뿐만이 아니다. 그의 밑에 있는 자들. 그들
이 물어오는 정보는 결코 얕볼 수 없다. 많은 수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그 물어오
는 정보들의 값어치는 계산하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그런 인재를 모은 것 또한 우문학의 능력인 셈이다.
'부탁해야겠군.'
유가의 정보망을 돌릴 정도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보망을 넓은 대신 개개
인의 실력은 부족한 편이다.
백무량이 토끼인지, 호랑이인지 모르는 지금 잘 다듬어진 보검을 꺼내들 필요는 없
다.
우문학의 수하들이라면 백무량의 뒤를 어느 정도는 캘 수 있을 것 같다.
막 거처에 도착하자 우문학과 진자자가 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알아냈습니다!"
진자자는 상기 된 탓인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 약의 정체를요?"
"네. 알아냈습니다. 남만에는 그 종류를 셀 수도 없을 정도의 많은 뱀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청혈사(靑血蛇)라는 뱀이 있는데 이 놈은 참 신기한 놈입니다."
"신기하다고요?"
"예. 남만에서도 깊은 오지(奧地)에서 살고 있는 뱀인데 처음엔 아무도 독을 가진
뱀인 지 몰랐을 정돕니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뱀에게 한 번 물렸을 때
는 아무렇지 않았던 사람이 두 번 물리게 되자 그 순간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죽게
되었지요."
일반 적인 상리(常理)를 어긋났다. 한 번 물렸을 때는 괜찮고, 두 번 물리면 죽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확실한가요?"
"그 독이 아니라면 전 이것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밝혀 낼 수 없습니다."
말은 그리 했지만 그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