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暗鬪)
가주의 거처 근방은 마치 무덤 속처럼 조용했다. 단지 가주의 생사가 불
분명 한다는 이유 탓에 항시 손질을 했을 전각의 문과 기둥이 처량한 느
낌을 풍겼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망한 장원이라 해도 이보다는 활
기가 넘칠 것 같을 정도다.
그러한 가주의 거처를 뒤로하고 유설린은 자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움직
였다. 세가 내부의 분위기 또한 침체 된 분위기다. 수많은 무인들의 얼
굴은 패색(敗色)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병사와도 같았다. 그만큼 세
가 내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 또한 풍문(風聞)이라도 들어 알고 있으리라. 세가 내부에서 암묵적
으로 두 세력간의 다툼이 있다는 사실을.
귀가 없다면 모를까 그런 건 으레 소문이 나기 마련이다. 사람이 있다
면 그 어떠한 작은 일이라 해도 소문이 나게 된다.
세치혀에 사람은 울고 웃는다. 어떻게 보면 이 혀라는 것은 어떠한 병장
기보다도 날카롭고, 더욱 효용적인 무기일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만
큼 조심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거다.
터벅터벅.
막 유설린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꽤나 당당
한 풍채(風采)에 남궁세가 내에서도 꽤나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 같다.
풍기는 기도가 그리 말해주고 있다.
재미있는 노인이다. 당당한 풍채와 기도와는 다르게 얼굴이 우습다. 매
기처럼 늘어진 수염은 그의 당당한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그 노인은 뭐가 그리 급한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급히 어딘 가로 향하고
있었다.
노인과는 달리 유설린과 여운휘, 우문학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급
할 것도 없다. 검문이 부탁한 말의 사육 또한 하루아침에 준비 될 일이
아니다. 검문을 떠날 때 연락을 취했으니 내일이나 모래쯤에야 소식이
닿을 게다. 그럼 마구간을 비롯한 이래저래 사육을 위한 걸 준비하는
데 최소한 닷새.
마지막으로 준비한 것들로 적당한 환경에 맞는 곳에 만들고 하는 것 또
한 열흘.
최소한 열 대여섯일 정도는 걸릴 일이다. 거기다가 검문에서 보내는 말
까지도 도착하려면 더욱 시간은 길어지게 될 거다. 아직 여유시간은 충
분하다.
거처에 도착해 맨 처음 안으로 들어선 우문학은 순간 꿈틀했다. 그의 눈
이 방 정 중앙에 있는 탁자에 향했다. 그곳에 하얀 종이 한 장이 놓여
져 있었다. 하지만 우문학이 꿈틀 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밖에 있는 나무에서 누군가가 움직였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게 누군지도 알겠고."
"누가 저 나무에 있었다는 소리야?"
우문학과 여운휘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유설린이 눈을 동그랗게 치떴
다. 그녀는 둘의 말로 밖에 있는 나무에 있던 누군가가 자신들이 들어오
는 걸 확인하고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 둘
이 같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건 결코 착각이 아닐 거다.
"누군지 알겠다고?"
"뻔하지. 거기다가 이 잊혀지지 않는 지독한 악취……"
"아아. 암황이로군."
우문학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풍긴다는 것
은 그 또한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사라진 상대 탓에 그 사실을 경시했
다.
"그가 왜 이런 식으로 서찰을 남긴 거지?"
"보면 알겠지. 하지만 암황은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숨기기를 원하고
있다. 그 탓에 지금도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것일 테고."
우문학은 코를 찡긋거렸다. 생선이 썩는 냄새보다도 오히려 지독하다.
문을 열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한다. 암황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까지 보
낸 서찰이라면 뭔가 중요한 일이 분명하다. 설혹 밖으로 새어나갈지도
모르니 문을 열 수가 없다.
방안은 역겨운 냄새로 가득했다.
"서찰을 열어보시지요."
우문학의 말에 유설린은 탁자로 다가가 그 위에 놓여져 있는 서찰을 들
어 올렸다. 종이에는 먹으로가 아닌 진흙으로 글이 써져있었다. 아니,
썼다기 보다는 진흙으로 눌러 붙였다고 보는 게 옳다.
유설린은 종이의 양끝을 잡아서 쫙 편 후 서찰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작야(昨夜:어젯밤)에 수상한 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거래하
더니 재빠르게 사라졌다. 밤에 마구간 근처로 와 조용히 거래를 하는 것
을 보고 수상케 여겨 따라가 보았다. 두 명인지라 그 거래 물품을 받은
자를 쫓았거늘 그 자의 정체는 남궁세가의 장로 중 하나인 남궁풍이었
다. 물품은 흰 보자기에 싸여 있었으며 그 크기는 열 살 정도 되는 사내
아이의 주먹만했다."
서찰의 내용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 이후로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써져
있지 않았다. 어떻게 하라는 말도,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도
없다. 모든 건 유설린이 결정하라는 의미인 거다.
"어찌 할 생각이십니까?"
여운휘는 묵묵히 서 있었고 유설린은 서찰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우문학
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수상해요."
"예.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남궁세가의 장로 정도 되는 자가 자신의 거처를 피하면서까지 무엇인가
를 조심스럽게 받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암황이 봤다는 것은 곧 마구간 근처에서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깊은 밤에 마구간을 찾을 사람은 없다. 굳이 냄새가 풍기는 그러한 곳에
서 거래를 했다는 것은 그게 비밀스러운 일인 탓이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고서는 굳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리가 없다.
"수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남궁풍이라는 자의 거처를 정식으로 뒤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괜히 건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잘못해서 일이 커진다면 유가에
도 좋지 않을 겁니다."
"저 또한 그리 생각해요. 잘 모르는 일을 가지고 건드려 보는 건 어리석
은 일이겠죠."
"그럼 서찰은?"
"확인했으니 태워버리세요."
"예."
우문학은 서찰을 불을 붙였다. 그는 타오르는 서찰을 손으로 들고 바라
보고 있었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뜩였다.
파악!
우문학의 손이 재빠르게 서찰의 불붙은 부분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이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번 움직였고 서찰에 붙었던 불은 꺼져버렸다.
"뭐죠?"
"소가주님, 숨겨진 글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숨겨진 글씨요?"
"예,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문학은 이번에는 종이에 불을 붙이지 않고 불 위에서 살살 움직였다.
종이에 붙어 있던 진흙이 떨어져 내리며 숨겨져 있던 글씨가 나타났다.
"헛!"
"이건……"
우문학과 유설린이 동시에 탄성을 토해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여운휘
또한 놀랐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마치 외우기라도
할 것처럼 서찰의 내용을 읽었다.
"사라진 자는 마교의 신법인 천락마보(天落魔步)를 사용했다라……"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문제다. 마교의 신법, 그것도 천락마보라면 널리
익히게끔 알려진 신법도 아니다. 그 신법이라면 마교에서 어느 수준 이
상의 무인이 아니라면 결코 접할 수 없다.
그런 신법을 쓰는 자가 남궁세가 내에 나타났다. 그것도 남궁세가의 장
로 중 하나와 접해 무엇인가를 전해주고 사라졌다.
"소가주……"
"……"
유설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는 쉽사리 결정을 내렸다. 괜
히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으니 놔두자고 결정이 났었다. 그렇지만 지금
은 그럴 수가 없다.
마교가 개입 된 일이라면 결코 경외시 할 수 없는 문제다. 마교의 일이
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야 한다.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소가주님 어서 결단을……"
"알아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조금 무섭네요."
유설린은 웃었다. 웃고는 있지만 그 미소가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흔들
었다. 그녀의 모습은 우문학마저도 감상적으로 변해버리게 할 정도였다.
그녀는 두려웠다. 예전에 처음 마교에서 도망쳤을 때는 무턱대고 복수
를 하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철이 없었던 건지 멍청했던
건지 용기만 앞섰다.
유설린은 그 날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변해버렸다. 여운
휘의 말을 듣지 않고 들어갔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복수를 성공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녀는 세가를 운영하고 여
러 사람을 만나면서 마교의 힘을 알아버렸다. 마교라는 단체는 그녀 하
나로 인해 결코 흔들릴 단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유설린은 마교가 개입된 일과 부닥치게 된 거다.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리기도 했지만 막강한 그 힘을 생각
하면 두렵기도 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덜미라도 잡히면 그 날로 모든 것이 끝난다. 지금 또
한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그 탓이다.
유가의 힘이 강하다고는 하나 마교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
하다.
애초에 유가의 힘만으로 마교와 싸우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무리
유가를 키운다고 해도 마교를 이길 정도의 세력이 된다는 건 불가능하
다.
무림맹과 마교가 싸움이 붙어야 한다. 양쪽 모두 힘이 약해졌을 때, 기
회를 봐서 마교의 뒤를 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마교를 수복할 방법
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장대하게 짜여져 있던 계획들이지만 아직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림맹과 마교는 당장이라도 붙을 것처럼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고는 있
었지만 아직 제대로 싸움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이 잘만 된다면 어쩌면 무림맹과 마교의 대결을 조금이라도 더
앞당길 수 있다.
유설린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 주먹을 꼬옥 쥐었다.
"남궁풍인가 하는 자의 거처를 뒤져보도록 해야겠어요."
그녀는 정했다. 위험할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웅크려 있을 수는 없다.
결단이 내려지자 우문학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럼 거사는 오늘밤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죠. 굳이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요."
"누가 하는 게 좋을까요. 암황에게 부탁을 해 볼까요?"
"아서라. 암황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그 자가 나
타나면 악취로 당장에 들켜버릴 걸."
침묵하고 있던 여운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여운휘
의 말은 틀리지 않다. 체온과 숨소리마저도 죽여야 하는 마당에 그의 몸
에서 풍귀는 악취는 치명적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말의 대소변 위를 굴
렀으니 가볍게 씻는다 하여 사라질 냄새가 아니다.
"내가 가지."
"자네가?"
우문학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운휘는 한시라도 유설린의 옆
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유설린의 옆에서 그녀를 지키려고만 한
다. 그런데 그런 그가 스스로 소가주와 떨어지겠다는 말을 내뱉을 줄은
몰랐다.
"이번 일은 중요하다. 실력이 위인 내가 가는 것이 낫지."
"큭큭, 반박도 못하겠군."
우문학은 여운휘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자신
보다 여운휘가 한 수 위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곳이 남궁세가가 아니었다면 이번 일이 중요하다 해도 너를 가게 했
을 거다. 하지만 이곳이 남궁세가니까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사방
에서 무인들이 도와주러 올 수 있겠지."
"나보고 살려달라고 소리라도 치라는 건가?"
"실력이 안 된다면 그렇게 라도 해야지."
"하하! 이 우문학을 바보로 보지 말게. 내 비록 자네에 비해 모자라다
고는 하나 그래도 그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는다 자부 할 수 있으니."
우문학은 여운휘보다 약하다. 하지만 그건 여운휘가 강해서지 우문학이
약해서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 우문학은 상대가 그 누구라 해도 소가주
가 도망칠 시간 정도는 벌 자신이 있었다.
"지켜주지. 자네가 없는 동안 내 혈풍구룡검법(血風九龍劍法)으로 소가
주님을 지키겠다. 그러니 자네는 그 일에만 신경을 써."
우문학의 말에 여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 사내가 없었다면 소가주를 혼자 두는 일은 없었을 거다. 말
은 그리 하고 있지만 여운휘는 우문학의 실력을 믿는다. 적어도 그는 유
설린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던질 수 있는 사내이니까.
밤이다. 그것도 대부분의 사람이 잠드는 축시(丑時)다.
사방이 온통 어둡다. 어둠은 남궁세가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합쳐지
며 하나의 기류를 형성하는 느낌이다. 착 가라앉은 남궁세가에 한 인영
(人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영의 모습은 검은색 일색이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온통 거멓
다. 복면 사이로 드러나는 눈빛은 더하다. 새카맣다 못해 칠흑 같은 눈
동자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인영의 몸이 솔개처럼 하늘로 솟구쳤다. 사라졌다고 느낀 순간 인영의
모습이 건너편 건물 위에서 나타났다. 엄청난 신법이다.
후우……
인영의 호흡이 길어졌다. 길게 호흡을 한 후 재차 몸을 날리는 인영은
여운휘였다.
남궁풍의 거처는 이미 알고 있다. 암황의 서찰을 본 후 밤이 될 때까지
는 많은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그 틈에 그의 거처를 알아봤었다.
여운휘는 지붕 위에 다시 착지하고는 사방을 살폈다. 이곳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다. 여운휘가 아무리 빼어나다 해도 남궁세가 내부를 마음놓고
활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 한 명에게도 움직임을 들켜서는 안 된
다.
여운휘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기에 직접 본인이 온 것이 아니던가. 이번 일
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그냥 놔둘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것보다 절
대 들켜서 안 된다는 거다.
남궁세가를 밤에 이런 옷차림으로 활보를 한다? 결코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현재 남궁세가 내부에서 많은 자들의 눈이 여운휘를
감시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굳이 복면을 쓰지 않고 남궁철의 거처 근
처로 갔을 게다. 그리고 복면은 그 후에 쓰면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감시의 눈빛을 보내는 남궁혁련의 수하들 탓에 여운
휘는 그러지 못했다. 거처에서부터 온 몸을 검은 옷으로 휘감은 여운휘
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빠져 나왔다.
다행히 따라오는 자는 없는 것 같았다.
여운휘의 눈이 어딘가에 멈추었다.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건물
이다. 겉보기엔 전혀 특출나 보이는 게 없어 보이는 바로 저곳이 남궁풍
의 거처다. 여운휘는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려 주변을 살폈다.
남궁풍의 거처를 향해 움직이려 했던 여운휘가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셋? 아니, 넷인가?'
남궁풍의 거처를 기점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두고 한 명씩 몸을 감
추고 있다. 여운휘는 확인은 했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상대들의
실력이 얕볼 수 없는 수준이다. 이 정도로 몸을 감출 줄 아는 자들이라
면 하수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어디에 가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빼어
난 무인들이다.
'쉽지는 않겠군.'
말과는 다르게 여운휘는 어둠 속에 몸을 감추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살육의 시작이다.
한 사내가 나무 위에서 조용히 건물을 살폈다.
위에 건장한 사내가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뭇가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
다. 사내의 놀라운 경신술 탓이다.
나무와 동화라도 된 것 같다. 호흡소리, 체온도 느껴지지 않는다. 애초
에 그곳에 없다 해도 믿을 수 있으리라.
무심한 눈빛을 하고 있는 사내는 임무를 지니고 이곳에 있는 것이다. 그
를 제외하고도 삼 인이나 더 되는 인원이 저 건물을 에워싸고 있다. 세
명 모두 같은 이유에서 이 건물을 지키고 있다.
근 반년이나 이 자리를 지켰다. 반 년 동안 아무런 일이 없었으니 긴장
이 풀어질만도 하련만 사내는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그건 나머지 삼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다. 수상한 자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낌새가 있
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기분이 뭔가 이상하다. 평소와 딱히 다르지 않
음에도 불구하고 떨떠름한 느낌이다.
그 탓인지 사내의 신경은 다소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다시금 주변을 살핀 사내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
는다. 자신이 이처럼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우습
기까지 하다.
무엇이 무섭다고…… 사내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은
신술과 추적술만큼은 자신이 속해 있던 부대에서도 최고가 아니었던가.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이군. 피곤한 탓인가? 오늘 들어가면……'
쉐엑!
사내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무너지는 사내의 뒤에서 순간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흑의인이 사라진 자리에는 혈향(血香)이 진동했
다.
'이상하군.'
서쪽을 지키고 있던 묵관필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남쪽을 바라봤다.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고 있는 그들은 일각(一刻)마다 신호를 보내야 한
다. 특별한 훈련을 받기 전에는 아무도 맡을 수 없는 냄새를 풍기며 그
들은 서로의 상황을 알렸다.
냄새에는 종류까지 있어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을 때, 위급할 때, 아무
런 일도 없을 때로 분류한다.
그런데 지금쯤 와야 할 연락이 없다. 뭔가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는 연락
도 받지 못했다.
'소피라도 보러 간 건가?'
그리 생각하려 했지만 평소에 남쪽을 지키던 그자는 결코 그럴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연락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묵관필은 서서히 움직였다.
'확인해 봐야겠어.'
묵관필이 막 나무에서 내려서는 순간 그의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멈춰라."
묵관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쳐지나갔다.
등을 잡혔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이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등뒤에 있는 자가 말을 꺼낼 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뒤를 누군가에
게 잡혔다는 사실보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훨씬 수치스러
웠다.
"누구냐."
"섣불리 움직이면 벤다."
"크흐흐, 네 놈이 내 뒤를 점했다는 사실에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실수
한 것이다."
묵관필은 처음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당황하긴 했지만 곧 태연
스레 소매를 움직였다. 소매에서는 위급함을 알리는 냄새가 사방으로 흩
어졌다.
세 명이 도착하는 것은 금방일 것이다. 그들이 도착만 한다면 뒤를 잡
은 건방진 놈을 당장이라도……
"네 놈이 믿는 세 명은 이미 당했다."
"……!"
묵관필은 뒤에 있는 자의 말에 놀라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제외한 세 명
이 모두 죽었단다. 서쪽에 있는 자신에게 가장 늦게 온 건 남쪽, 동쪽,
북쪽 순으로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쪽에 있는 녀석에게부터 연락이 끊긴 건 일각 반 정도.
일각 반도 되지 않는 시간에 그 긴 거리를 움직이며 모두를 죽였다는 말
이 된다. 아니, 굳이 한 명이라 생각하는 것도 우습다.
묵관필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지금 뒤에 있는 자 정도 되는 놈들
이 여럿 있다면 승패는 보나마나다.
필패(必敗)는 피할 수 없다.
"두리번거릴 필요 없다. 나 혼자니까."
묵관필은 생각이 간파된 사실에 놀라면서도 혼자라는 말에 희망을 느꼈
다.
'선공(先攻)을 한다면 승산이 있다! 더군다나 쾌속의 그 검법이라
면……'
그는 소매 속에 들어 있는 검을 확인했다. 예전부터 묵관필은 자신의 검
을 소매 속에 숨겨 두고 지냈다. 길이는 다소 짧지만 대신 완벽하게 감
출 수 있다.
묵관필은 뒤에 있는 자 또한 검이 소매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를 거라
고 추측했다.
선수필승이라 했다. 묵관필은 그것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파악!
그의 몸이 급작스럽게 비틀렸다. 뒤를 점한 이상 불리한 것은 묵관필 본
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익힌 이 검법이라면 승산은
분명 있다.
소매에서 뻗어 나온 검이 흑의인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엄청난 빠르
기의 검이 당장이라도 머리통을 꿰뚫기라도 할 것처럼 다가갔다.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던 여운휘는 자신을 향해 다가드는 검을 보
고 놀라버렸다. 그 빠르기에 놀랐다기 보다는 너무나 익숙한 이 검법 탓
이다.
'전살세!'
여운휘 또한 잘 알고 있는 검법이지 않던가. 사곡에서 배웠던 검법이 바
로 금계검법과 전살세였다.
묵관필의 회심의 일격이 여운휘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허공을 갈랐다. 여
운휘는 진각을 밟으면서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
그 일수에 묵관필의 입에서는 피가 터져 나왔다. 회심의 일격이었던 만
큼 다음에 공격이 이어진다면 막기 또한 어려웠다. 그 탓에 묵관필은 자
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도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여운휘는 시체를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놓아둔 후 남궁풍의 거처를 바
라봤다.
경신술을 보았을 때부터 어느 정도 느꼈지만 이제는 확실하다. 지금 죽
인 네 명은 마교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
여운휘가 건물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그
리고 그 안에서 한 명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길!'
여운휘는 노인이 남궁풍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문제는 그가 주
변을 지키고 있는 네 명을 확인할 경우에 그들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거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은 철수해야 한다.
여운휘는 땅에 바짝 엎드린 채로 남궁풍을 바라봤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탓에 온 몸이 긴장으로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땀이 온 몸을 덮을 것처럼 쏟아질 것 같다. 마음은 그랬지만 여운휘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부동심(不動心)은 본래 상태
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흠!"
노인은 깡마른 체구의 소유자였다. 그는 헛기침을 토해내더니 가슴까지
길게 기른 흰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주변을 한 바퀴 쓰윽 둘러본
남궁풍이 발을 옮겨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순간 망설였다.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중대한 문제였지만 결정은 빨랐다.
여운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남궁풍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휘이잉……
바람이 무척이나 거세다. 몰아치는 바람은 흙먼지를 일게끔 만들었다. 분위기가 무
척이나 침중하다. 쓸쓸해 보이는 남궁세가에 몰아닥치는 바람이었기에 더욱 그러했
는지도 모른다.
스쳐 지나가는 연무장(演武場) 또한 마찬가지다. 낮이라면 무인들로 바글바글하며
쉬지 않고 고함소리가 터져 나올 장소이거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낮과의 대
조적인 모습 탓인지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연무장은 무덤 같은 느낌을 풍
긴다.
남궁풍이 사라지는 자리에 여운휘의 모습이 일순 나타났다. 어디에서 모습을 드러냈
을 지 알 수조차 없다. 그토록 여운휘의 신법은 대단했다. 표홀하달까?
남궁풍은 태연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걷고는 있었지만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듯 하지는 않았다.
한참을 걷던 그가 멈춘 곳은 음식을 만드는 장소였다. 주방의 근처에 이르자 남궁풍
은 지금과는 달리 날카롭게 주변을 살폈다. 그는 근처에 누군가가 있는지 확인을 하
고는 수상한 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여운휘는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근처에 있는 지붕 위에 몸을 감추었다. 밖이라면 모
를까 안까지 따라 들어갈 수는 없다. 하물며 주방이라면 그 크기가 그리 크지도 않
아 몸을 숨긴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약 반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주방 안으로 들어갔던 남궁풍이 모습을 드러냈
다. 그의 신형이 사라지는 순간 여운휘는 지붕 아래로 뛰어 내렸다.
땅에 몸이 닿았다는 걸 확인도 하기 전에 그의 몸이 어느새 주방 앞까지 움직였다.
쾌속한 움직임을 보인 여운휘는 주방 안으로 한 발 들이밀기가 무섭게 공중으로 솟
구쳤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은밀한 움직임이다.
주방 위쪽에 있는 나무에 몸을 숨긴 여운휘는 아래를 살폈다.
아무리 민첩하게 움직였다 해도 한정된 공간이니 만큼 위험부담 또한 크다. 혹시나
해서 아래를 살폈지만 주방 안에는 한 나이 어린 시녀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
는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겉보기로 모든 걸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하지만 시녀의 발걸음
과 드러난 손목은 결코 무공을 익힌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는 작위적인 느낌은 결코 풍기지 않는다.
주의해야 할 상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운휘의 눈은 시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
녀의 손에 들린 어떠한 물건 탓이다.
'흰 보자기에 쌓인 열 살 정도 된 사내아이의 주먹만한 크기의 물건……'
암황이 했던 말이다. 그리고 저 시녀의 손에 들린 물건이 바로 그리했다. 정확하게
일치하는 물건이 바로 저 여인의 손에 들려있었다. 시녀는 눈에 보일 정도로 황급
히 움직였다. 그릇들을 전부 꺼낸 그녀는 구석에다가 그 보자기를 집어넣었다. 보자
기를 집어넣은 후 시녀는 다시금 그릇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시녀의 행동을 하나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봤다. 여운휘
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릇을 전부 정리한 시녀가 밖으로 나가고 부터였다. 밖으
로 나간 시녀가 다시 안으로 들어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여운휘는 아래로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보고 있었기에 그 시녀가 숨겼던 물품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눈감고도
참을 수 있다. 소리가 일지 않게 그릇을 치운 후 안을 살피자 아까 전 시녀의 손을
떠난 흰 보자기가 있었다. 여운휘는 그것을 끄집어냈다.
처음 만지는 순간 느낌은 딱딱하다 였다.
딱딱하다, 마치 돌멩이라도 되는 것처럼 단단한 느낌이다. 하지만 돌은 분명 아니
다. 돌의 울퉁불퉁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탓이다. 오히려 쭉 빠진 것이 돌이라기
보다는 정련(精鍊)된 쇠의 느낌이다.
여운휘는 흰 보자기를 풀어냈다. 안에서 드러난 것은 돌도, 그렇다고 쇠도 아니었
다.
'병?'
그랬다. 흰 보자기에 고이 쌓여 있던 것은 병이었다. 여운휘는 병의 마개를 열고 냄
새를 맡으려다가 곧 그러한 생각을 접었다. 독이라면, 그것도 냄새만으로 라도 사람
을 죽일 수 있는 맹독이라면 문제가 생긴다. 병을 슬슬 흔들어 보니 안에서 찰랑거
리는 소리가 들린다.
액체가 들어있는 건 분명하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전부 가져가자니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병째로 가져간다면 당연히 남궁풍의 귀
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일은 당연히 중단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다
잡은 꼬리를 놓치게 된다.
액체이다 보니 어떻게 처리하기가 힘들다.
여운휘가 어떻게 해야 하나 병을 바라보며 고심에 잠겨 있던 순간,
불쑥.
땅에서 솟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나타난 인영의 손이 여운휘의 천령개(天
靈蓋)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몸을 굽히고 있던 여운휘는 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뒤
로 돌렸다.
상대의 손이 여운휘의 천령개에 막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고수다!'
밖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탓이기도 했지만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나 늦었다. 상당
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상대라는 것이다. 여운휘는 병을 들고 있는 우수가 아닌 좌
수를 움직였다. 엄청난 내력이 실린 공격이었지만 멈춰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여운휘의 무공이 빼어난 탓이다.
손을 내려친 것은 다름 아닌 남궁풍이었다. 그의 입 꼬리가 비틀렸다. 비틀림과 동
시에 이죽거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쥐새끼가!"
콰앙!
다시금 내려친 손이 땅을 울렸다. 여운휘는 어느새 병을 손에 들고 몸을 일으켜 세
웠다. 당장에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부른다면 위험해지겠지만 남궁풍은 그러지 않았
다. 여운휘가 들고 있는 그 물건은 결코 들켜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그 탓에 남궁풍은 혼자서 여운휘를 상대하려 했다.
"네 놈은 누구냐."
여운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싸워야 할 것인가, 아니면 도망쳐야 할 것인가.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들키지 않
았으니 도망쳐도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피해야 하는 것인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꼴이라니 딱 쥐새끼로구나! 그 복면 속에 숨겨진 네 놈
의 얼굴을 보고야 말겠다!"
남궁풍의 몸이 재차 움직였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창궁무애검
법(蒼穹無涯劍法)임이 분명하다. 검이 여운휘의 옷깃을 베며 지나갔다.
공중으로 솟구친 남궁풍은 거침이 없었다. 여운휘는 반격도 하지 않고 기회를 엿봤
다. 피하기만 하니 수세에 몰리는 것을 금할 수는 없다.
피하려던 여운휘는 마음을 바꾸었다. 남궁풍을 굳이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여운휘는 마교의 인물이다. 남궁풍을 죽인다 하여 변하
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다 다른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면 곤혹스러워
지는 것은 여운휘 본인이다.
여운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남궁풍의 검을 피했다. 피함과 동시에 그는 검
을 들었다. 남궁풍은 상대의 검을 살폈다. 무슨 특징이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공격
을 피하는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 전신무공을 다 발휘하
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꾸라지처럼 쏙쏙 빠져나간다.
이런 자라면 능히 무림에서 이름이 나가도 남을 자다. 그렇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
에 검을 살폈다. 의당 이름을 날리는 자 중에 명검을 지니지 않은 자는 많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무공을 뽐냄과 동시의 상징적으로 명검을 가진다.
그 탓에 검의 이름이 별호가 되는 자도 있다. 도룡검(刀龍劍)을 지니고 있다 하여
무천이라는 사람은 도룡검객(刀龍劍客)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 예다.
그런데…… 이 자는 뭔가 이상하다. 그토록 빼어난 무공에도 불구하고 손에 들린
건 고작 시중에서 돈 몇 푼 정도 쥐어주면 구할 수 있는 청강검이다. 무공이 빼어나
면 나뭇가지 또한 보검이 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고작 청강검이라니……
이 정도 되는 자가 돈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살수!'
살수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자신만의 보검을 들고 다니는 살수가 있다면 그건 열
에 아홉은 멍청이다. 죽으려고 환장을 하지 않은 이상 그러한 짓을 벌일 리가 없
다. 살수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당한 사람의 가족과 친족
들이 살수를 용서할 리가 없다.
수십, 수백의 인원이 그 살수 하나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보검을 들고 살수행을 하면서도 무림을 횡행(橫行)하는 자가 있
다. 실력이 엄청나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살수.
하지만 그런 살수는 온 무림을 통틀어도 열이 되지 않고, 그들 중 진짜 보검을 들
고 다니는 자 또한 많지 않다.
남궁풍은 여운휘를 살수라 생각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러 온 건 아니지만 이
런 은밀한 일에 살수가 고용되는 일 또한 적지는 않다. 살수만큼 은밀하면서도 걸린
다 해도 뒤끝이 깨끗한 존재는 없으니까.
'누가! 도대체 누가 이 일을 알고 살수까지 보냈단 말이냐!'
남궁풍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누군가가 알고 있기 전에 살수가 올 턱이 없다. 정체가 발각되었다는 소리다. 남궁
풍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당장이라도 앞에 있는 살수나부랭이를 박살을 내고야 말리라.
남궁풍의 눈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발각되었다. 이곳에 있다가는 언제 당할지 몰라.'
눈앞에 있는 살수 따위는 이미 관심 밖이다.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
따위 것이 중요할 턱이 없다. 남궁풍은 상대를 얕봤다. 유일하게 드러난 눈 부위를
보니 주름이 없다.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다는 증거다.
많아 봐야 사십,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상대라 생각하니 안중에 들어올 리가 없다. 여운휘의 검이
움직인 것은 그 순간이었다.
방심하고 있던 남궁풍은 얼굴을 흩고 지나가는 검에 놀라버리고 말았다. 자신도 모
르게 뒤로 물러섰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머리가 두 조각으로 나뉘어버렸을
거다.
피하긴 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얼굴에 긴 검상과 함께 입으로 피가 잔뜩 흘러
들어갔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다. 베어 버린 상처에서 피가 쉬지 않고 흘러내린
다. 상당히 깊은 상처인 듯 싶다.
남궁풍은 자신의 앞에 있는 복면인을 바라봤다.
한바탕 피를 흘리니 그제야 상대가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보이는 것은 눈뿐이다.
그렇지만 그것 하나로도 충분했다.
왜 여태까지 몰랐을까? 왜 방심하고 있었을까……
상대의 눈은 어느새 살의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 눈빛은 마치 맹수의 그것과도 같
았다. 상대를 그저 살수나부랭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될 성싶
다. 이제는 입안으로 들어온 피의 비릿한 맛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새 살수나부랭이에서 태산으로 변해 있는 복면인을 보며 남궁풍은 검을 쥐었
다. 남궁세가에서 도망치는 것은 다음 문제다.
그것보다 먼저 남궁풍은 목숨을 건져야 했다.
도망쳐야 한다. 정체가 들켜 버린 이상 더 이상 남궁풍은 남궁세가에서 머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여운휘를 꺾어야 한다.
남궁풍이 여운휘의 뒤를 잡은 건 우연이었다. 누군가가 쫓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
지만 정작 그 느낌이 사실일지는 남궁풍 스스로도 자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거
처에서 나왔을 때 사방에 있어야 할 네 명에게서 신호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했지만 그 넷이 없다는 건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혹
시나 하는 마음에 평소대로 물건을 전한 후 남궁풍은 밖에 숨어 주방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의 눈에 떨어지는 그림자가 언뜻 스쳤고, 그 후부터 그는 거의 기다시피 해서 주
방까지 다가간 것이다.
'그때 알았어야 했어……'
그때 여운휘가 주방 안으로 들어갈 때의 움직임만 주의 깊게 생각했었더라면 안으
로 들어오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게다. 오히려 당장 남궁세가를 벗어나 멀리까지
도망치고 있었으리라.
가뜩이나 깡마른 남궁풍의 얼굴이 더욱 핼쑥해 보인다. 시린 달빛 아래 붉은 피로
얼굴을 적신 그의 모습은 마치 살인귀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토록 살벌해 보이는 남궁풍의 턱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살인귀처럼 보이는 그가 지금은 오히려 사냥감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검을 곧추세운 그는 천천히 옆으로 돌기 시작했다. 조용히 상대해야 한다. 소란이
일어 다른 자들이 몰려온다면 앞에 있는 적을 이긴다 해도 도망치기가 어렵다. 아무
런 소란도 일지 않도록 베어야 한다.
또그르르……
땀이 마치 구슬처럼 얼굴을 타고 흘러 내렸다.
일촉즉발의 상태. 여운휘 또한 검을 세우고 남궁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악!
남궁풍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앞으로 다가감과 동시에 남궁풍은 가장 자신 있어 하
는 대연검법(大衍劍法)을 펼쳤다. 까딱하면 기회를 엿보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
남궁풍은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대연검법
은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무공이다. 그는 근 십 년 간 아예 이 검법에만 몰두했
다고 봐도 좋다. 처음부터 절초를 펼쳤다. 방심을 하고 있다면…… 승산이 있다.
파파팍!
검은 꿈틀거렸고 목표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 끝을 보던 남궁풍의 입가에 미소
가 걸렸다.
'실력은 대단해 보였지만 역시 애송이!'
하지만 성공하리라 생각했던 검은 어느새 옆으로 비껴 나갔다. 그의 손에서 대연검
법이 칠 초식까지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휘의 근처까지 이르지도 못했다.
'제길 붙어야 한다. 붙지 않으면……'
근접전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와 붙어야 한다. 일반적인 것보다 짧은 검을 들
고 있는 남궁풍으로서는 근접전을 벌여야 유리한 상황이었다.
다가서던 남궁풍은 성큼 뒤로 물러섰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쳐버렸다. 분명
조금만 더 안으로 들어간다면 벨 수 있었을 터인데……
'뭐지?'
남궁풍은 그걸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무림인으로 산지 사십 년이다. 이미 잔뼈가
굵은 몸이라는 거다. 감을 무시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상대는 살수일지도 모르는
자다. 살수라면 몸 어디선가 암기가 터져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남궁풍은 검을 쥔 손을 움직였다.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설령 이 한 걸음이
지옥으로 향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내딛어야만 한다.
차앙! 차차창……!
부닥친 두 검 탓에 파란 불똥이 튀었다.
남궁풍의 눈이 여운휘의 전신을 훑었다. 쉽사리 이길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아까부터
알아차렸다. 이기려고 했다. 문제는 그것이 다였다는 거다. 이만한 상대에게 아무
런 대가도 없이 이기려 한 건 욕심이었다.
'오냐, 주마. 내 이 오른팔을 주지. 그 대신 네 놈은 목을 내 놓아야 할 게야!'
남궁풍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공격을 읽어야 한다. 한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면 이 승부는 진 것과 진배없다.
'상상중(上上中)이냐, 아니면 상상하(上上下)!'
대부분이 그렇다. 위쪽을 공격하다가 점차 아래로 내려간다.
남궁풍은 여운휘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확답을 내렸다. 한 손이 아깝긴 하지
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목숨을 위해서라면 손 따위는 버릴 감수를 해야 한
다.
'지금이다!'
내려치던 검을 막을 남궁풍은 손을 뻗었다. 최대한 내력을 실어 검을 쳐낼 생각이
다. 물론 손이 망가지는 건 불가피하다. 알지만 남궁풍은 손을 움직였다.
손에 강한 충격이 밀려 올라왔다. 손이 완벽하게 뭉그러졌다. 고통이 새어 나오려
는 입을 꽉 치닫은 그는 왼손에 들린 검을 내려쳤다. 이 상태라면 정수리를 부수는
것도 가능하리라.
손을 파고들은 검으로 막는 건 불가능할 거라 생각한 남궁풍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
었다. 그 순간 남궁풍은 잔 경련을 일으키며 그대로 멈춰 버렸다.
부르르……
그의 눈은 허탈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그런 그의 눈에 조금씩 피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앞이 붉어지는 것과 동시에 남궁풍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여운휘는 액체가 담겨 있던 병을 품안에 넣었다. 이미 남궁풍까지 죽인 지금 굳이
이것을 남겨둬야 할 필요는 없다.
여운휘는 남궁풍을 힐끗 바라봤다. 눈을 치켜 뜨고는 있지만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다. 흰자위로 가득한 그의 눈은 마치 억울하다고 호소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
'멍청한 놈.'
남궁풍은 실수를 해버렸다. 여운휘를 살수라고 생각했으면서도 그의 무기가 검 하나
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니, 살수라 해도 그런 상황이라면 분명히 이길 수 있었다
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남궁풍의 위명을 생각해 보면 후자가 맞으리라.
남궁풍의 미간에 박힌 한 자루의 비수가 달빛에 비추며 더욱 환하게 빛났다. 그토
록 긴박한 상황에서도 비수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의 미간 중앙에 박혀있었다.
여운휘는 남궁풍의 미간에 박힌 비수를 뽑지 않았다. 손수 제작했던 비수를 썼다면
모를까 지금 사용한 것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일반적인 물건이었다. 흔적을 남기
지 않기 위해 일부로 저 비수를 준비해 왔던 것이었다.
'어쩌면 실수를 한 걸지도 모르겠군.'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로 죽어 있는 남궁풍을 보니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그게 나을 거라는 생각에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찜찜할 정도로 이번 일은 중대한
일이었다.
너무 섣불리 행동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여운휘는 더 이상 그곳에
서 망설이지 않았다. 병을 챙긴 이상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다.
여운휘의 몸이 밤의 어둠과 함께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