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에서 벌어진 이변
마차가 잘 닦여진 길 위를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마차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사륜마차였는데, 마차의 앞에서 달리고 있는 말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명마 같아 보였다.
자르르하게 흐르는 윤기와 잘 다듬어진 말의 갈기, 그리고 잘생긴 외모와
쭉 뻗어진 다리는 확연하게 발달 된 근육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 마
리의 흑마는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렸다.
마차 안에는 세 명의 인물이 있었다.
유설린과 여운휘, 우문학이다. 그들은 검문에서 마차를 받고 이렇게 돌아가
게 된 것이다. 마차 안에는 없지만 암황 또한 이들과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부대(馬夫臺)에 마부와 함께 그 또한 앉아 있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바
보 같은 얼굴로 연신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예전과 전혀 변
함이 없었다.
그 날 암황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나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를 데려가게."
"데려가 달라고요?"
"이번 악양에다가 말을 기를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을 게야.
그 자리에 내가 따라가려고 하는 거란다."
유설린은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전혀 알지 못
한다. 하지만 유가가 마교의 세력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을 쥐
고 있는 거다. 굳이 거짓말을 해서까지 같은 편이 되려고 할 턱이 없다.
우선은 두고보자는 생각에 유설린은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라면, 그라
면 무엇인가 알지도 모른다. 유설린은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할아버지라고
알려져 있는 현 유가의 가주인 유운풍, 즉 적리환에게 서신을 보내기로 했
다.
암황이라고 자신을 밝힌 노인. 그가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폭
탄이 될 것인지 아니면 구명 줄이 될 것인지는……
유설린은 아무런 말도 없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여운휘가
앉았고 앞에는 우문학이 앉아 있었다. 오랜 마차 생활 탓에 눈이 감기기도
하련만 셋 모두 잠을 청하지는 않고 있었다.
잘 닦인 길이라서 그런지 빠르게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덜컹거리
지 않는다. 검문에서 내어 준 마차를 타고서야 왜 그들의 말이 그토록 유명
한지 알아버렸다. 속도가 다른 여타의 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빠르다. 더
불어 심폐기능이 뛰어난지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체력만이 아니다. 머리 또한 영특해서 주인의 생각을 알고 움직인다. 이 같
은 말이라면 탐낼 만도 하다.
유설린은 자신들이 검문에 오게 된 상황을 암황에게 들었다. 자신들을 부르
자고 정할 수 있는 사람이 검문 내에 문주와 뇌수신황만이 있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자신들을 검문으로 오게 한 것은 암황이었다.
검문에서 그는 바보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악양유가의 사람
들을 불러낸 것이다. 검문에서 말의 새끼의 수가 줄어 든 것은 습기와 비 탓
이라고 알려져 있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자잘한 것들의 말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기는 한
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암황이 손을 썼던 것이다. 그는 먹이에 간
단히 손을 썼고, 당연스럽게 말들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던 것이다.
검문 문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구간을 찾아왔을 때 바보인 척 하던 암황
은 넌지시 옆에 있던 다른 마사에게 악양의 이름을 들먹거렸던 것이다. 악
양만큼 좋은 환경으로 말을 기를 만한 곳이 없다고 그는 바보처럼 말했다.
다른 것에 대해 암황이 그리 말했다면 그냥 무시하고 끝났을 문제였다.
하지만 암황은 바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말에 관해서는 검문 최고였다. 당
연히 그런 그의 말을 쉽사리 흘려 들을 수가 없었고, 검문 문주는 암황에게
따로 물었던 것이다.
치밀한 계획이었다. 마교에 변괴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암황
은 오늘을 준비했던 것이다.
'무서운 사람……'
유설린은 속으로 되뇌었다. 팔 년을 바보짓을 했고, 오늘을 위해 이년 전부
터 말들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섬뜩하기도 하다.
같은 편이라면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셈이지만 적이라면 최악의 상대
일지도 모른다. 그 탓에 그녀는 암황을 바라보며 마음을 연신 불편했다. 전
혀 듣지 못했던 외숙부.
외숙부 하면 유설린은 안 좋은 기억부터 떠오른다.
추혈객 엄백린 그 또한 그녀의 외숙부였다.
그토록 믿고 따랐는데 아버지를 죽인 자……
힘차게 달리던 마차가 덜컹 하더니 멈추어 섰다. 우문학은 천천히 고개를
밖으로 꺼내더니 목청을 높혔다.
"무슨 일이요?"
"어르신, 슬슬 저녁 식사를 하고 쉬어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요. 말
들 또한 지쳤고 더 가면 쉴만한 곳 또한 없는 지라……"
"알겠소."
마부는 이곳에서 저녁을 나기를 요청했고 우문학은 알겠다는 의사를 전했
다. 이 정도 속도라면 금방이라도 악양유가에 닿을 수 있을 듯 싶다. 떠난
지 채 며칠도 되지 않아 벌써 안휘성이다. 이 정도라면 오륙 일만 더 움직인
다면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채 십일도 걸리지 않고 도착하는 셈이다.
우문학은 문을 열고 먼저 땅으로 내려섰다. 주변을 한 번 살핀 그는 안을 향
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설린이 내리고 그 뒤를 바짝 쫓아 여운휘가 따라 움
직였다.
봄이 거의 다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날씨가 꽤나 쌀쌀하다. 마부는
급히 주변을 돌아다니며 불을 지필만한 나뭇가지들을 긁어모았다. 우문학
은 간단하게 식사할 거리들을 짐에서 챙겼다. 암황은 여전히 바보 같은 표
정을 지으며 땅을 나뭇가지로 쑤시고 있었다.
만약 그의 정체를 몰랐다면 지금 또한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리라.
우문학이 간단하게 준비한 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모두 자신이 할 일을 하
기 시작했다. 마부는 말을 살폈고 암황은 나무에 기대어 멍하니 하늘을 올
려다보고 있었다.
우문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볼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그는 유설린에게 말하고는 나무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하늘을 바라보던 암
황의 입가에 스치듯이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소피를 보겠다던 우문학은 조금 떨어진 곳에 이르자 몸을 멈췄다. 그의 앞
으로 한 장의 종이가 떨어져 내렸다. 그는 종이를 받아 들고 그 내용들을 읽
기 시작했다.
우문학의 눈이 종이 위에 어느 부분에서 일순 멈췄다.
'호오……'
나머지들은 다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유독 눈을 끄는 사항이 하나 있었다.
잠시 우문학은 그 사항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
태연하게 종이 위에 적힌 내용을 모두 읽은 그는 종이를 공중으로 던졌다.
그 순간이었다.
화악!
공중으로 떠올랐던 종이에 불이 붙더니 땅으로 채 떨어지기도 전에 재로 화
해버렸다. 그런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문학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온 길을 걸어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모두가 잘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문학은 소가주가 있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으로 들어선 그는
마부와 암황을 힐끔 쳐다보고는 작게 말했다.
"특별한 사항은 없습니다만 재미있는 일이 하나 벌어진 듯 합니다."
"재미있는 일이라고요?"
"예, 남궁세가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여운휘의 귀가 솔깃했다.
남궁진은 여운휘가 무림맹을 떠나기 전에 먼저 남궁세가로 떠났었다. 남궁
진은 아쉬운 얼굴로 여운휘에게 작별을 고했다. 더 같이 있고 싶지만 가주
의 급히 돌아오라는 서찰을 받았다며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었다.
그런데 남궁세가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남궁세가 내에서 다음대 가주의 일 때문에 이런저런 일이 벌어진 모양입
니다."
"다음 가주라니요? 지금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철 대협이 있는데 벌써 그
게 무슨 말이죠?"
"최근 가주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
해 지금 두 명의 가주 후보를 두고 상당히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남궁철은 오십이 조금 넘은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은 무인이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그리 건강하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몸의 상태가 악화된 모양이
다.
"두 명의 가주 후보가 누구죠?"
"남궁비룡 남궁진과 옥룡신검(玉龍神劍) 남궁혁련입니다."
"둘 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네요. 그래서 현 추세는 어떻죠?"
"예. 남궁진이 사람 됨됨이나 무공 면으로는 빼어나지만 가주인 남궁철이
자신의 친아들인 남궁혁련을 너무 사랑하는 지라 아무래도 남궁진은 힘들
것 같습니다."
"아……"
유설린은 그렇냐는 듯이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운휘는 그렇지 않았
다.
남궁진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탓이다. 그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남궁세가의 다음대 가주가 누가 되던 여운휘는 상관없다. 남궁진
또한 자유롭게 검 한 자루를 들고 강호를 유람하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남궁진을 가주로 하자는 쪽도 만만치 않아 한바탕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보이지 않는 암투(暗鬪)까지 오고가는 모양입니다.
제가 듣기로 지금 남궁진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처지에 처해져 있다고 하더
군요."
여운휘는 암투가 오고간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꿈틀거렸다. 다른
사람에 관계된 일이었다면 그냥 무시하고 넘길 문제였지만 남궁진이 관련
된 일이다.
신경이 쓰인다. 비록 같은 길을 걸을 자는 아니지만 여운휘는 그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적어도 그만큼은……
남궁진과 남궁혁련은 나이가 많지 않다. 한 문파를 이끌기에는 너무나 어리
다. 그 둘 중 그 누가 남궁세가의 가주가 된다 할 지라도 섭정(攝政)은 불가
피한 문제일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무런 문제거리가 아닌 듯 싶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렇네요. 그럼 그 일은 추후에 생각해 보도록 하죠."
"예, 그럼 전 이만."
우문학은 인사를 건네고 마차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나가자 마차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여운휘는 마차 밖을 바라보고만 있었
다.
내심 마음이 불편하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특별
히 상관할 필요도 없는 문제이고. 하지만 그냥 두기에도 개운치가 않다.
'맘에 들지 않아……'
맘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약해져 버린 마음이. 그냥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
면 될 일이거늘 무엇이 그리 여운휘 본인을 잡는지 도통 모르겠다.
망설였지만 여운휘는 말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이 말을
할 기회를 놓쳐 버리게 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곤혹스러운
일에 처했다고 한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남궁세가에 갔으면 한다."
"응?"
막 잠을 자려던 유설린은 갑작스러운 여운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만큼 여운휘의 제안이 의외였던 것이다.
유설린은 자신의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그의 이런 모
습은 또 처음이다. 항시 거침이 없는 그이거늘 무엇인가를 망설이고 있다.
잠시 의문을 품었던 그녀는 상황을 알아버렸다. 여운휘가 무엇 때문에 그러
한 말을 했는지 유설린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짓궂게 웃었다.
"왜 그러는데?"
"너도 알겠지만 남궁진을 그냥 두기가 그렇다.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고 하
니 특별한 문제만 없으면 잠시만 들렸으면 한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그렇게 하자."
"고맙다."
남궁진과 만난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여운휘는 그를 깊게 생각하
고 있었다.
지기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오히려 언젠가 베어야 할 지도 모르는 적이다.
그렇지만 지금 만큼은, 지금만큼은 지켜주리라.
적어도 같은 편에 있는 지금만큼은……
남궁세가(南宮世家).
안휘성에 위치한 중검(重劍)으로 유명한 세가로 오대세가의 중추적 세력이
다. 정파의 기둥 중 하나로 거론되는 그곳이 지금은 온갖 암투로 가득했다.
남궁세가 내의 대부분이 남궁혁련을 따랐다. 가주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남궁혁련이 그의 뒤를 잇게 될 것은 거의 기정사실화 된 일이다. 그에 반해
남궁진은 아무런 것도 없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몇몇의 노
인들은 아직도 남궁진을 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궁진은 자신의 방에서 창문을 통해 멀리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미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은 터라 머리가 아프
다. 그들의 생각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남궁진은 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일인 줄 알았더라면 그냥 무림맹에 있을 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남궁진은 가주가 될 마음이 없
었다. 하지만 주변의 상황들이 그를 그리 놔두지 않았다. 남궁진 또한 남궁
혁련을 잘 알고 있다. 대 놓고는 함부로 대하지는 않지만 남궁혁련은 예전
부터 자신을 싫어했다.
'남궁혁련……'
남궁혁련은 그가 생각해도 가주의 재목이 아니다. 그의 편협한 성격과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남궁려희의 모습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그녀
는 가주인 남궁철의 첫째 딸로 천하삼절(天下三絶) 중 하나다. 남궁려희는
동생인 남궁혁련보다 남궁진에게 더욱 신경을 써줬다. 그 탓에 더욱 미안하
다. 남궁진 덕분에 그녀는 남궁혁련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에게 말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