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37)

도미진은 아침부터 유설린을 찾아왔다. 여운휘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그녀 

로서는 일부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문을 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유설린뿐만이 아니었다. 

도미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냐?" 

여운휘는 아침부터 찾아온 도미진을 바라보며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도미진은 여운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시하는 듯이 말하고 있는 건 문 

제가 아니다. 상대가 무시한다면 당장은 기분이 상할지는 몰라도 언젠가를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이란 게 자신이 얕보는 상대는 경계를 쉽게 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 

운휘는 그렇지 않다. 깔보는 듯 말을 하고 있다. 침상에 몸을 기댄 채로 고 

개도 돌리지 않은 상태다. 그렇지만 손은 검에 다가가 있다. 

언제든지 발검(拔劍)을 할 수 있는 상태인 거다. 

빈틈이 없다. 도저히 파고 들어갈 틈새가 보이지 않기에 도미진은 여운휘 

가 껄끄러웠다. 

"검문 문주님이 뵙자고 하시는군요." 

"이런 이른 아침부터 말인가요?" 

"아니요. 정오(正午)쯤에 찾아오시라고 하시더군요. 중식(中食)이라도 같 

이 하시자고요." 

"예, 그리 하도록 하시죠." 

도미진은 방을 나가려다가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아, 긴한 이야기가 있을 테니 소가주님 혼자 오셨으면 해요." 

도미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난 따라간다." 

"미안하지만 극비의 대화라 당신이 올 자리가 아니야." 

"전 데려갔으면 하는데요." 

도미진은 유설린까지 나서자 이마를 찌푸렸다. 검문 문주는 소가주만을 원 

했다. 다른 자를 그 자리에 참석시키는 것은 내키지 않는 거다. 

"안 되는 문제예요. 문주님은 소가주님과의 조용한 대화를 원하시는 거니 

까요." 

"안에 들어가는 건 저 하나로 하죠.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정도는 괜찮겠 

죠?" 

유설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도미진은 고개를 돌렸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상대방의 의사가 너무나 확고하다. 

"그렇게 하세요 그럼." 

도미진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기가 무섭게 우문학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고개 

를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도미진이 무슨 일로 이리 이른 아침에 찾아온 겁니까?" 

"검문 문주께서 만나 뵙자고 하더군요." 

"지금 말입니까?" 

우문학은 갸웃하면서 물었고 유설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정오쯤에 중식이나 함께 하자고 하시더군요." 

"무슨 만나야 할 이유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까?" 

"전혀요. 그렇지만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 같더군요. 저를 제하고는 아무 

도 오지 못하게 하는 걸 보니 말이에요." 

"그래서…… 소가주님 혼자서만 가시겠다는 겁니까?" 

"네. 검문 문주께서 그리하는 걸 원하시는 모양이시더군요." 

"안 됩니다! 그건 위험합니다!" 

우문학은 목소리를 높였다. 안 될 말이다. 다른 곳이라도 소가주를 혼자 둔 

다는 것이 걱정스러운데 하물며 검문에서 그녀 혼자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목소리를 낮춰요."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알아요. 그렇지만 그쪽에서 그리 강하게 나오는데 저희 쪽의 입장만 밀고 

나갈 수가 없더라고요." 

안다,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하지만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같이 있어도 위험할지도 모르는 자리다. 

그런 곳에 유설린 혼자 보낸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안심이 되지 않는다. 

"크게 걱정하지는 마세요. 그래도 휘를 문 앞까지는 대동할 수 있거든요." 

"후우……" 

안심하라고 한 말이지만 오히려 걱정이 앞선다. 아무리 여운휘라 해도 검문 

의 문주는 쉽사리 상대할 자가 아니다. 하물며 안과 밖이라면 검문 문주가 

소가주를 죽이려 해도 막을 수 없다. 

가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만 크게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우문학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유설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문학은 급히 일어났지만 소가주의 

뒤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는 소가주의 뒤를 따라가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안과 밖인 이상 상대가 소가주에게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여운휘가 막는다 

는 건 불가능하다는 건 안다. 그래도 믿을 사람은 저 사내 밖에 없다. 

'무슨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소가주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상 우문학은 그저 빌 수밖에 없다. 

유설린과 여운휘는 검문 문주의 거처를 향해 걷고 있었다. 자신들이 머물 

던 곳과 검문 문주의 거처는 그리 멀지 않았던 탓에 특별한 길손이 필요하 

지는 않았다. 

유설린은 자신의 옆에서 따라 걷는 여운휘를 연신 훔쳐봤다. 우문학도 그토 

록 과민반응을 보였거늘 정작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없다. 

말이 없기에 오히려 더 불안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주면 좋으련만 여운휘 

는 입을 굳게 다물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심통이라도 난 어린 아이처 

럼 그는 침묵했다. 

간단한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둘은 검문 문주의 거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지켜야 할 호위무사도 보이지 않는다. 호위무사들까지 물러나게 할 정 

도로 중한 일인 모양이다. 

문 앞에 서자 둘은 다리를 멈췄다. 

여운휘는 밖에 남아야 하고 유설린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때부 

터 여운휘는 유설린을 지킬 수가 없다. 

유설린이 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여운휘가 손을 뻗어 그녀 

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유설린을 바라보던 여운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반드시 지켜주마." 

"…… 고마워." 

이 한 마디 말을 하고자 그토록 망설였던가. 여운휘는 힘겹게 잡고 있던 그 

녀의 소매를 놓았다. 말은 그리 했지만 완벽하게 지켜 줄거라 자신 할 수가 

없다.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유설린은 여운휘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 

다. 그녀는 문을 닫으면서 여운휘를 바라봤다.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어 보 

이지만 초조해 하고 있다는 걸 유설린은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재차 미소를 지은 그녀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여운휘의 모습이 유설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크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몸 

을 돌렸다. 그곳에는 검문 문주인 엽강청이 있었다. 

"어서 앉으시오." 

유설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에 와 앉았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 식사를 하도록 하지요. 중요한 이야기는 식사를 마친 후에 하도록 하 

고." 

말을 마친 검문 문주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엽강청을 예의 

주시하며 유설린 또한 음식에 입을 가져다 댔다. 

여운휘는 문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태연한 듯 하지만 속은 타는 듯한 상 

태였다. 그는 오감을 모두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렸다. 그의 신경은 모두 방 

안으로 향해 있었다. 호흡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젓가락이 움직이는 것과 음식을 씹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다. 눈으로 볼 수 

는 없지만 소리는 아니다. 설혹 움직이려 한다면 호흡이 흐트러질 거다. 그 

리고 발자국 소리, 결코 놓칠 수 없다. 

안을 향해 집중하고 있던 여운휘는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 

렸다. 

집중이 순간 깨졌다. 앞에서 다가오던 자를 본 여운휘의 눈동자가 흔들렸 

다. 상대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였다. 

'뇌수혈황.' 

강호십일객의 하나다.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 

다. 

그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여운휘는 여전히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 

하며 눈은 그를 향했다. 

뇌수혈황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여운휘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문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여운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비켜라." 

뇌수혈황의 목소리는 듣기 괴로울 정도였다. 갈라지는 그의 목소리는 온 몸 

에 소름이 돋게 하기 충분했다. 더불어 퍼렇게 빛나는 안광은 오금을 저리 

게 만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문에 몸을 기댄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비켜라." 

"미안하지만 아무도 들어갈 수 없소." 

"뭐야!" 

퍼렇게 빛나는 안광이 더욱 강해졌다. 마치 폭발이라도 할 듯이 타오르는 

뇌수혈황의 눈을 보고서도 여운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주 겁을 상실했구나." 

뇌수혈황은 손을 뻗어 여운휘의 목을 잡아채려 했다. 그러나 뇌수혈황의 손 

이 목을 잡아채기 전에 여운휘의 손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뇌수혈황은 자신의 손을 낚아챈 여운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안에 소가주가 있는 이상 그 누구도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오." 

"키키,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뇌수혈황은 다른 한 손을 들어올렸다. 

뇌수혈황의 기이하게 큰손이 번개같이 떨어졌다. 그의 손이 붉은 색으로 물 

드는 순간 여운휘는 이미 몸을 틀었다. 

콰앙! 

뇌수혈황의 손이 땅에 박혔다. 마치 벽력탄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땅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여운휘는 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손을 놓고 옆으로 

물러선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여운휘는 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비켜라. 그러지 않는다면 당장……" 

"어르신!" 

뇌수혈황의 말을 자르며 문을 열고 나온 검문 문주 엽강청이 입을 열었다. 

힐끔 그를 바라본 뇌수혈황은 손을 늘어트렸다. 

"어르신, 여기서 이게 무슨……" 

"건방진 녀석이 하나 있어서 혼좀 내주려고 했지." 

그는 말을 마치고 클클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흘리니 가뜩이나 날 

카롭게 찢어진 눈이 더욱 매섭게 변했다. 자글자글한 주름살이 미묘하게 꿈 

틀거렸다. 

당장에 손을 휘두른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무슨 일인가?" 

엽강청은 대답을 듣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여운휘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알기로 오늘 이곳은 우리 소가주와 검문 문주인 엽강청 당신만이 올 

수 있는 자리라 알고 있소. 그런 말을 들은 이상 다른 사람의 출입은 막을 

거요." 

"허허, 진 소협의 말도 일리는 있으나 애초부터 어르신은 이 자리에 참석하 

실 예정이었네. 또한 검문 내에서 어르신은 어떠한 회의에도 낄 수 있는 그 

러한 분……"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우리는 검문의 문도가 아니오. 마땅히 초대받아 

온 손님이요. 우리에게도 검문의 예법을 따지려 하지 마시오." 

"허! 이 새파란 애송이가!" 

옆에서 듣고 있던 뇌수신황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가 누구이던가. 강호에서 적이 없다고 알려진 강호십일객의 한 명이 아니 

던가. 그것도 팔황 중에서도 단 한 명을 제한다면 최고수로 손꼽히는 자신 

이 한낱 약관을 넘어선 무인에게 이 같은 대우를 받을 줄은 몰랐다. 

"어르신, 그만하십시오. 내가 잠시 허언을 한 듯 하이. 그건 내가 사과할 테 

니 이제 그만 진정하게." 

여운휘는 벽에 기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엽강청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 

아 올라 얼굴이 붉어진 뇌수신황을 한 번 바라보고는 여운휘에게 고개를 돌 

렸다. 

'이거야 원……'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은데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엽강청은 저런 부 

류의 인물들을 잘 안다. 결코 자신의 마음을 쉽사리 돌리지 않는다. 뇌수혈 

황이 나중에 뭐라고 할 게 분명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음, 어르신은 안에 들어야 하니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 어르신도 안으로 

들어오고 그 대신 자네도 들어오게." 

"좋소." 

여운휘는 엽강청이 말하자마자 수긍의 뜻을 비췄다. 아까부터 불안했다. 아 

무리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도, 상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미 늦은 후다. 

어떻게든 하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솔직히 확실하게 지켜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거절할 리가 없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정도로 여운휘가 원했던 일이다. 

안으로 들어서다가 문쪽을 바라보고 있던 유설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는 여운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막 그의 뒤를 따라 들 

어온 엽강청은 유설린을 보면서 웃으며 말했다. 

"하하, 큰 일은 아니었소. 걱정말고 식사를 들도록 하시오. 아, 자네도 식사 

를 들지 않았을 테니 같이 드는 게 어떤가?" 

"식사를 할 마음은 없소." 

말을 마친 여운휘는 유설린의 뒤로 가 섰다. 그 모습을 무섭게 노려본 뇌수 

신황은 자신의 자리에 가 털썩 앉았다. 

"그럼 식사를 마저 하고 나서 이야기를……" 

"귀찮게 그리 하지 말고 당장 이야기를 끝내거라. 지금 난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 

뇌수신황은 말을 가로채며 날카롭게 찢어진 눈으로 여운휘를 노려봤다. 

맘에 들지 않는데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했 

다. 적어도 지금 여운휘는 손님으로 온 거다. 그냥 단순한 호위무사였다면 

어떻게든 혼내줄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무림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내다. 그것도 무림맹 쪽에서 긴히 신경도 쓰고 

있다. 그런 사내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 

"흐음, 그러셔도 되겠소?" 

"예, 저도 이유를 알고 나서 식사를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유설린은 말을 마치며 바짝 긴장했다. 이 둘 중 한 명이 유가의 비밀을 알 

고 있을 거라 유설린은 생각했다. 하지만 우문학의 수하가 가져온 보고를 

보면 뇌수혈황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소." 

엽강청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는 표시인 듯 했다. 

"우리 검문은 말을 기르고 있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맞소?" 

"예, 어제 구경도 했지요." 

"그것 때문에 부른 거요." 

"말 때문이라고요?" 

조금 이외다. 뭔가 유가에 관련 된 말이 나오지 않을까 긴장하고 있던 유설 

린에게 말 때문에 부른 거라고 하자 힘이 쫙 빠졌다. 안심이 되면서도 내심 

궁금함이 치솟는다. 

"검문의 말은 다른 여타의 말보다 빠른 다리와 체력을 자랑하오. 그건 그 

말을 기르는 방법도 나르거니와, 새끼를 밸 때 주는 먹이 탓이오. 그런데 문 

제가 생겼소." 

"문제라니요?" 

"먹이와 기후의 문제요. 작년과 재작년 이 근방에 비가 많이 와 버린 탓에 

먹이가 제 효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소." 

검문의 말은 체력이 빼어나다. 그 탓에 많은 곳에서 미리 주문을 해두고 검 

문은 매년 그 수량에 맞추어 그것을 약속한 날짜에 지급하곤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 버린 거다. 날씨가 변하면서 먹이가 제대로 그 효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 탓에 태어나는 새끼 말의 숫자도 줄었을 뿐더러 그다 

지 빼어나지도 않았던 거다. 

말이 원체 비싼 탓에 돈이 많은 부호들이나, 관과의 계약이 대부분이다. 이 

번 년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숫자라도 맞춰서 보낼 수 있지만 다음 번은 어 

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그래서 말인데 알아본 바로 우리 검문의 말들이 자라기 가장 좋은 곳이 

그 악양 쪽인 듯 싶소. 기후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먹이의 공급이 수월할 

것 같아서 말이요. 그렇지만 악양 쪽에 전혀 기반이 없는 우리가 갑자기 그 

곳에 무엇인가 한다는 것도 우습고, 또한 그럴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는지 

라……" 

"도와달라는 말씀이신가요?" 

"도와준다면 사례는 녹녹치 않게 하리라." 

이제야 알 것 같다. 

유가의 정체를 안 자가 불렀을 거라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 

가 흘러갔지만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다른 건 몰라도 관과 계약된 상태라 

면 더욱 골이 아플 거다. 제때 기한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런 저런 소리를 들 

어도 대꾸할 말이 없다. 

검문 쪽에서는 자신들의 이러한 사실이 퍼지지 않기를 바랬을 거다. 치부 

를 들어내는 일이기도 하고, 관에서 거래를 하는 곳을 바꿀지도 모르지 않 

은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네요." 

"도와주겠다는 거요?"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말을 마치고 유설린은 웃었다. 생각이 빗나갔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도 나 

왔고, 말의 사육방법을 배울지도 모른다는 것이 마음을 끌기도 했다. 

"하하! 이리 수월하게 허락해 주니 고마움을 금치 못하겠소!" 

엽강청은 시원스럽게 웃었다. 한 가지 고민이 해결 된 탓인지 그의 표정은 

아까보다 개운해 보였다. 

"자 그럼 어서 식사를 하도록 합시다." 

그때 뇌수혈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아해 하는 엽강청의 시선을 받 

으면서도 그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여운휘와 한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대변한 것이다. 

"어르신이 화가 조금 나신 모양이오. 하지만 금방 풀리실 테니 괘념치 말 

고 식사나 합시다." 

가볍게 목례를 한 유설린은 다시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니 

마음도 한결 가볍다. 유설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흘렸다. 

우문학은 자신의 수하가 가져온 종이를 받아 들었다. 

일전에 자신이 알아보라고 했던 것을 지금에서야 알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팔호를 바라보며 종이를 넘겼다. 검문 문 

주와 도미진은 일전에 서로를 만나 놓고도 추후에 만났을 적에 서로를 처 

음 만난 듯 행동했다. 

그 사이 기간은 두 달. 

그랬기에 팔호에게 그 두 달 간 있었던 무림의 대소사를 알아보라고 했고, 

그는 명령에 충실했다. 

"힘들었을 텐데 수고했다." 

"아닙니다." 

종이 위를 가볍게 훑어 본 우문학은 팔 호를 바라봤다. 자신의 수하 중에서 

일 호와 이 호를 제한다면 가장 냉철하면서도 능력이 있는 자다. 이곳까지 

잠입해 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아무런 말도 없다. 

"특별히 이상한 것은 보이지 않는 군." 

"……" 

"그래, 그럼 가봐라." 

"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팔 호의 말에 우문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라면 들어둘 정도의 충 

분한 값어치가 있다. 

"이 종이에는 일부로 적지 않았습니다만 중요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있는데 적지 않았다? 왜지?" 

"소가주님 탓입니다." 

"소가주님 탓?" 

우문학은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보고서와 소가주가 무 

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전혀 없다. 이 보고서를 소가주가 굳이 보는 것 

도 아니고…… 아니다, 하물며 본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보고서를 보여주기 꺼려진다는 말은 상대에게 보여주기 뭐한 비밀이 있다 

는 거다. 하지만 소가주에게 보여서는 안 될 정보란 없다. 

"어서 말해봐라. 무슨 말이냐." 

"정확하게 그 두 달 사이에 소가주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뭐, 뭐야!" 

콰당! 

우문학은 본인도 모르게 흥분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흥분을 

했는지 의자마저도 뒤로 넘어가 버렸다. 

두 달,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긴 시간은 분명 아니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 

소가주의 어머니가 죽었다. 마교 교주 유백명의 아내였던 엄여홍이! 

무슨 일인지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는다. 결코 그냥 넘길 문제는 아니다. 우 

연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너무 마음에 걸린다. 

"그 분이…… 그때 죽었단 말이지?" 

"예." 

우문학은 의자에 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이 일은 너무나 큰 사 

항이었던 것이다. 

교주의 아내인 엄여홍이 죽었다. 그것도 그 알 수 없는 두 달이라는 시간 안 

에. 

'겨우 육십일. 그 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우문학은 이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거늘 돌아온 답이 

너무 가볍다. 하지만 전혀 의심할 거리도 없는 것이 상황이 너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검문은 당장이라도 말을 사육할 수 있는 곳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천천히 기반을 쌓아서는 무리다. 이번 년에 관에 지급할 말의 수 

를 맞추기 위해서라면 급히 자신들을 부른 것도 이해가 간다. 

"그리 하시겠다고 약조하셨다고요?" 

"예, 오히려 이번이 기회라고도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우문학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의 수하가 방금 전에 알아온 정보에 대해 말 

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침묵해야 하는지. 

원래대로라면 어느 정도 중요하다 싶은 정보라면 유설린에게 말해야 옳다. 

하지만 이건 그리 쉽게 말을 꺼낼 문제가 아니다. 소가주의 슬픈 감정을 건 

드릴지도 모르는 일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그게 어떠한 사항이던 간에 언젠가 밝혀야 할 것이라 

면 차라리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낫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인가 보군요." 

"예." 

유설린은 우문학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것을 보고 이 일이 중요한 사항 

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문학의 눈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평소 그가 비 

밀리에 해야 할 말이 있을 때 취하는 행동이다. 

"일전에 도미진과 검문 문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죠." 

"그 두 달이라는 시간 안에 소가주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 그래요?" 

우문학은 소가주의 담담한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소리내어 울지는 않는 

다 해도 눈물 정도는 내비칠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잠시 낯 

빛이 흐려지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소가주는 냉혈한이 아니다. 오히려 자그마한 일에도 눈물을 흘리는 여린 마 

음의 소유자다. 그랬기에 소가주에게 큰 상처로 다가갈거라 생각하며 조심 

스레 꺼냈던 말이다. 

유설린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을 받아들인 건 그녀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 

억은 거의 없는 탓이다. 간간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만이 유설린이 알고 있 

는 어머니의 전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이기에 우문학의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그 

걸 우문학은 몰랐다. 

유설린은 분위기가 가라앉자 다른 말을 꺼냈다. 

"검문 문주는 저희에게 그 서찰에 관해서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제 생각인데 저희가 생각이 짧았던 것이 아닐까요? 그 서찰을 보낸 사람을 

그 둘로 국한했던 것이 너무 섣불렀던 생각이라는 판단이 드네요." 

"그것도 일리는 있으신 말씀이지만 검문에서 그 둘이 아니라면 저희를 이 

곳으로 오게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흐음……" 

것도 그렇다. 그 둘이 아니고서 자신들을 이곳으로 올 수 있게 만들만한 자 

가 누가 있단 말인가. 말을 이으려던 우문학은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문 앞에서 멈춘 기척의 주인은 문을 두드렸다. 

"누구…… 음!" 

문을 열던 우문학은 팍 풍겨오는 악취에 고개를 돌렸다. 그 냄새가 얼마나 

독했는지 당장이라도 코가 떨어질 것 같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던 

우문학은 문 앞에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낯이 익은 노인이다. 

옷은 애초에 무슨 색이었는지 판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변해 있고, 머리는 

산발을 한 채로 위를 향해 뻗쳐있다. 단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지만 우문학 

은 그 노인이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버렸다. 

"노인장이 무슨 일이요?" 

"……" 

노인은 우문학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몸을 비틀 

며 다시 마사 노인의 앞을 막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소." 

노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우문학의 양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우문학은 자 

신을 밀려는 듯한 행동을 하는 마사 노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정신이 멀쩡하지 않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거야 막무가내가 아닌가. 더군다 

나 거동도 하기 불편할 정도로 나이를 먹은 노인이 자신을 힘으로 밀어붙이 

려 하니 우습기까지 하다. 

"이보시오 노인장. 그만하고 돌아……" 

투욱! 

우문학의 어깨가 밑으로 쳐지며 몸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크흑!" 

노인의 손이 움직이자 우문학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우문학은 상대를 너무 얕봤다. 만약 상대가 이런 노인만 아니었다면 이토 

록 방심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거다. 우문학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검을 뽑아 들기 위해 검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게 불 

가능했다. 

어깨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어깨뼈가 탈골이라도 됐는지 마치 자신 

의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이다. 

침상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던 여운휘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유설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지어 여운휘마저도 노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 

었다. 그랬기에 노인이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침상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태연하게 문을 닫고는 안으로 한 발 더 내딛었다. 여운휘는 검을 뽑 

았다. 

"멈춰." 

"……" 

노인은 한 발 더 다가왔다. 여운휘의 입도 따라 열렸다. 

"경고했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벤다." 

노인은 멈추어 섰다. 하지만 여운휘는 알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의 경고가 

두려워 멈춘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마사 노인의 눈이 유설린에게 박 

혔다. 

"무슨 일이죠?" 

유설린의 어투도 상당히 굳어 있었다. 그녀는 마사 노인의 눈을 살폈다. 결 

코 바보 노인이 아니다. 그때 봤던 노인의 눈동자는 마치 백치와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상하지만 유설린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동자는 따 

뜻했다. 

"이야기를 나눴으면 해서 찾아왔으니 두려워하지 말게." 

"당신…… 바보가 아니었군요." 

"그래. 팔 년간 바보짓을 하기는 했지만 바보는 아니었지." 

유설린뿐만이 아니라 여운휘마저도 등골을 흐르는 싸한 전율을 느꼈다. 

팔 년이란다, 그 긴 시간 동안 바보짓을 했단다. 제대로 된 실력을 본 것은 

아니지만 우문학을 제압하는 실력을 보면 대단한 고수다. 분명 어딘가에서 

이름을 날리던 고수였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자가 마사 같은 하찮은 

일을 했다. 

말똥 위를 구르며 바보짓을 해 두드려 맞기도 하면서 자그마치 팔 년을 보 

냈다. 

팔 년간 모두를 속인 것이다. 놀랍기도 하지만 그 전에 두려움이 앞선다. 말 

은 쉽지만 그 누가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가까이 다가가도 되겠느냐?" 

"웃기는 소리." 

"난 적이 아니네. 그러니……" 

"시끄러. 지나갈 테면 날 베어봐라." 

"어쩔 수 없군." 

마사 노인의 몸이 순식간에 갈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노인의 몸이 십여 

개로 나뉘어 지는 듯 하더니 그들의 몸이 여운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눈에 

착각일까 아니면…… 

여운휘는 뒤로 물러서려다가 마음을 바꾸고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그의 

손이 노인의 행동을 읽고 움직였다. 

찰나지간에 여러 가지 행동이 벌어졌다. 

노인의 손은 여운휘의 목 바로 앞에서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조금 

만 더 손을 움직인다면 당장이라도 목젖을 움켜 쥘 수 있을 것 같은데 노인 

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던 거다. 

노인의 손목을 여운휘의 손이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내뻗은 여운 

휘의 손 또한 마찬가지로 노인의 손에 잡혀 있었다. 여운휘의 손에 검이 들 

린 것만 제한다면 거울의 양면이라도 된 듯 둘의 모습은 일치해 있었다. 

노인은 자신의 손과 여운휘의 손을 번갈아 바라봤다.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 

는 것과 동시에 검을 뻗었다. 막힐 거라고는 예상치 못해 당황하긴 했지만 

가까스로 노인 또한 여운휘의 손목을 잡아챘다. 

무승부다. 하지만 패한 것과 다름없다.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노인은 자신의 앞에 있는 사내를 

새삼 다시 보게 됐다. 그때 뒤로 물러섰다면 채 반응하기 전에 제압할 수 있 

었을 터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사내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노인은 뭔가 말을 꺼내려 하다가 급히 다리를 들어 올렸다. 다리에 묵직한 

충격이 실렸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우문학이 노인을 향해 자신의 발을 내지 

른 것이다. 

우문학의 발이 재차 움직였다. 노인의 가슴팍을 향해 그의 발이 움직였다. 

노인은 우문학의 행동을 예측도 못했던 탓에 급하게 발을 뻗었다. 우문학보 

다 노인이 빨랐다. 노인의 발이 우문학의 가슴을 때렸고 그는 뒤로 물러나 

며 한 사발은 될 정도로 많은 피를 토해냈다. 

노인은 앞에 있는 여운휘를 힐끔 바라본 후 재빠르게 뒤를 살폈다. 

가슴을 맞고 피를 토해낸 우문학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허! 손이 없다면 발이라는 것인가!' 

손을 못 쓰게 했다는 생각에 방심한 것도 사실이지만 발을 이용한 공격은 

매서웠다. 더군다나 지금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피를 뿜을 것처럼 요기(妖 

氣)가 넘친다. 

"잠시만, 잠시만요." 

우문학은 노인을 향해 다가가다가 유설린의 목소리를 듣고 멈추어 섰다. 유 

설린은 노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분의 말을 들어 보고 싶어요." 

"하지만!" 

"단 거기서 이야기를 하셔야 해요. 그 이상 다가오는 건 이 둘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군요." 

노인은 유설린을 바라봤다. 지금의 상황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다. 팔 

년간 정체를 숨겼다. 지금 또한 조용히 일을 해결했으면 한다. 그렇지만 이 

두 사내의 실력을 보니 결코 쉽사리 이길 상대들이 아니다. 그 전에 이길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믿기 힘들었지만 이 둘의 합공이라면 버틸 수 없다고 노인은 느꼈다. 

마사 노인은 한 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리 하지." 

여운휘는 잠시 노인의 손목을 더 움켜쥐고 있다가 유설린이 바라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놓아버렸다. 노인 또한 여운휘의 손을 놓았다. 

방안은 정적이 감돌았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당장 베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여운휘는 검을 든 채로 노인을 경계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설린아." 

"……!" 

그 한 마디에 안에 있던 세 명의 몸이 순간 굳어 버렸다. 유설린의 이름을 

노인이 부른 것이다. 모두가 그녀를 유소화라고 알고 있는 지금 노인은 유 

설린이라는 이름을 불렀다. 

여운휘는 강하게 검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당장이라도 검은 뻗어 질 것처럼 미묘한 움직임을 보 

였다. 

베어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는 거다. 노인의 움직임을 보면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다. 쉽게 벨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그래도 베어야 

한다. 

필사(必死)다. 베지 못한다면 이쪽이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휘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베기에 앞서 뭔가 꺼 

림직 한 것이 있는 탓이다. 자신들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온 자였다면 

차라리 밤을 틈타 기습을 해왔어야 옳다. 

쉬운 길을 굳이 놔두고 돌아 올 정도로 노인은 멍청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자였다면 팔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토록 완벽한 연기는 불가능했을 터 

다. 

"무슨 소리죠? 설린이라니요?" 

놀란 건 마찬가지였지만 유설린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얼굴빛이 변할 정도 

로 놀라 버렸지만 곧 원래의 상태를 회복했다. 

여운휘가 점점 무림에서 알려지는 것처럼 유설린 또한 예전의 그녀가 아니 

다. 아버지의 죽음에 슬피 울고만 있었던 유설린은 더 이상 없다. 그녀 또 

한 여운휘와는 다른 의미로 강해졌다. 

눈동자조차 떨리지 않는다. 유설린의 강한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마사 노 

인이 입을 열었다. 

"경계할 필요 없다. 팔 년 전 유가에 날아간 서찰에 대해 알고 있나? 그건 

내가 보낸 서찰이었지.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 굳이 숨기려 할 필요 

가 없어." 

"당신은…… 누구죠?" 

더 이상 속이려 한다 한들 괜한 시간 끌기에 불가하다는 것을 유설린은 알 

아버렸다. 이 노인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팔 년을 모두를 속인 자다. 

이런 자가 확실하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떠보는 행동을 취할 리는 없다. 

무엇인가가 있기에 팔 년을 속여왔을 거다. 연기를 했다는 것을 들어냈을 

때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노인을 바라보던 여운휘의 귓속으로 우문학의 전음이 흘러들었다. 

[노인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내가 신호를 보낼 테 

니 소교주님을 모시고 도망치게. 내가 뒤는 막도록 하지.] 

여운휘는 우문학을 바라봤다. 그는 살짝 고갯짓을 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본 여운휘 또한 전음을 날렸다. 

[당신은 죽을 거야.] 

[죽는 게 무서웠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걸세. 사람은 누구나 

죽지. 까짓 거 조금 일찍 죽는다 해서 무엇이 문제인가. 다만 소교주님께서 

마교를 되찾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게…… 아주 조금 억울할 뿐일 

세.] 

전음을 끝맺은 우문학은 보일락말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슬퍼 보이는 미 

소였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우문학은 노인을 바라보며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노인은 소가주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입이 열리면 어느 정도 노인의 정체가 드러날 거 

다. 적인지 아군인지…… 

적이라면 그리고 소가주에게 위험한 일이 벌어지게 될 것 같다면 당장이라 

도 몸을 날릴 거다. 양팔은 늘어져 검을 쓸 수는 없지만 발은 멀쩡하다. 많 

은 양의 피를 토해내긴 했지만 오히려 정신은 멀쩡해졌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자신 할 수 없다. 노인은 우문학이 제 상태였다 해도 이길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보였다. 하물며 양팔을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 이길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여운휘와 같이 싸운다면 능히 이길 수 있는 상대일 거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노인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소가주의 

안위다. 이곳에서 저 노인을 꺾는다 해도 검문의 문도들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소란이 일게 되면 검문의 문도들은 물론이거니와 문주 마저 

도 올 거다. 그 상태에서 유설린의 정체가 알려진다면 빼도 박도 못할 문제 

가 벌어진다. 

그때가 되면 도망치는 건 힘들다. 검문의 전 문도들과 싸워야 할 지도 모르 

기 때문이다. 차라리 도망치려면 지금 도망쳐야 한다. 그게 현명한 선택인 

것이다. 

"…… 설린아, 내가 널 어찌 알아보았는지 아느냐?" 

"……?" 

밑도 끝도 없이 노인은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유설린마저도 고개를 갸웃했 

다.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그녀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노인은 유설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는지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네 어미인 엄여홍, 넌 그녀를 너무 많이 닮았어. 그래서 한 눈에 네가 유설 

린이라는 것을 알아봤지." 

유설린은 분명 엄여홍을 닮았다. 하지만 노인 정도가 아니었다면 그리 쉽 

게 알 수는 없었을 거다. 닮기는 닮았지만 본인이 아닌 이상 완벽하게 같을 

수는 없는 거다. 쌍둥이도 아니고 모녀간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그것처럼 유설린과 엄여홍 또한 비슷하기도 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유설린 

은 청순해 보이지만 엄여홍은 지적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외모 또한 엄여 

홍보다는 유설린이 빼어나다. 둘이 옆에 서 있지 않는 한 모녀지간이라는 

사실을 알기도 힘들 거다. 

노인이 유설린을 단 한 번에 알아본 것은 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외모도 

분명 어느 정도 닮았지만 무엇보다 분위기가 같다. 풍기는 분위기 하나만 

은 유설린과 엄여홍은 비슷하다 못해 일치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저희 어머니를 아시나요?" 

"그래. 네 어미는…… 내 누이동생이었다." 

노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지지 않고 바라보고 있던 우문학마저도 그 순간 

만큼은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엄여홍을 누이동생이라고 칭했다면 노인은 곧 유설린의 외숙(外叔)이라는 

말이 된다. 

"네가 바로 나의 질아(姪兒)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당신이…… 저의 외숙이라는 말인가요?" 

"그렇다." 

유설린은 고개를 가로젓었다.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다. 어머니에게 오 

라비가 있었다는 말은 아버지였던 유백명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말이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남이 갑작스럽게 자신의 외숙이라 하자 그녀는 제대 

로 상황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믿을 수가, 믿을 수가 없어요. 전 아버지에게조차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럴 수밖에…… 나에 대한 이야기는 너의 아비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었 

을 테니까." 

유설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유백명이 왜 외숙부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 

야기를 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그는 마교의 교주였다. 그 누가 그의 입을 막 

을 수 있다는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군." 

노인 또한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쉬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설 

린이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노인은 이미 그녀의 마음을 안다. 그녀는 믿 

지 못하고 있는 거다. 

"네 아비가 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느냐 하는 것은 내 정체를 알 

게 되면 해결 될 일이지." 

노인의 말대로 그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금지 된 일에 가깝 

다. 노인은 무림에 널리 알려진 무인 중 하나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얼굴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름은 강호의 그 누구보다도 많이 거론되지만 아무도 얼굴을 모른다. 

사람들은 그를…… 

"암황(暗皇). 사람들은 날 그리 부르지." 

"아, 암황!" 

우문학은 홀로 덤비려던 자신의 행동이 만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반각, 홀로 싸운다 해도 그 정도는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 

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상대가 암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암황, 강호십일객의 팔황의 하나이자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자.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차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암황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알려진 것은 거의 없지만 사람들은 그를 은연중에 팔황의 일인자로 놓고 있 

다. 심지어 일부의 사람들은 그를 쌍존과 같은 급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 그가…… 유설린의 외숙부였던 것이다. 

"암황이라면 강호십일객?" 

"그래. 내가 팔황 중 제일이라고 알려진 암황이란다. 보고 싶었단다…… 설 

린아." 

암황의 얼굴에 다시금 따뜻한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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