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학이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이 각 정도가 흐른 후였다.
이 대화는 유설린과 여운휘, 우문학만의 일이다. 능려운은 물론이고 풍운조
에게조차 이건 비밀이다. 풍운조는 모른다. 유설린과 여운휘가 마교에서
온 자들이라는 것을.
아무리 풍운조라 해도 그건 말해 줄 수 없는 비밀인 것이다.
"일급 사항으로 서찰이 왔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검문 때문인 것 같
은데 어째서죠?"
유가의 서찰은 크게 몇 가지로 분류된다. 십급에서 육급은 자잘한 것들이
다. 걸려도 상관없고, 이런 것은 애초에 특별한 재질로 글을 써 글자를 숨기
지도 않는다. 오급부터 삼급 까지는 중요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 또한 걸려
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고, 글씨 대신 간단한 암호로 대신한다.
그렇지만 이급과 일급은 다르다.
이건 중요하다기 보다는 비밀스러운 내역이 담긴다. 비밀 사항이라 해도 어
지간해서는 이급이다. 그런데 이 일은 일급이다. 그건 유가에서 함부로 사
용하지 않는다.
일급 사항이라는 건 그만큼 무게 감이 있는 일인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 일이 일급으로 분류 된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문학은 유설린의 물음에 답했다.
"검문은 유가에게 특별한 상대입니다."
"특별하다니 무슨 의미죠?"
"검문의 인물 중 누군가가…… 유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서, 설마!"
"예. 저희 유가가 마교의 뿌리라는 걸 아는 자가 검문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문학의 표정은 심각했다. 처음엔 가벼이 앉아 있던 유설린의 얼굴 표정
도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검문에 그러한 자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유가의 비밀을 안다는 건 곧
자신들의 명줄을 움켜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자가 조금만 손
을 써 소문이라도 낸다면 무림맹은 물론이거니와 마교 또한 손을 써 올게
분명하다.
"그, 그게 누구죠? 누군지 아시나요?"
"죄송하지만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유설린의 어조는 다급해졌다.
이토록 힘들게 달려왔는데 그러한 모든 고생이 물거품으로 돌아갈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당혹케 만들었다. 더듬거리면서 말을 내뱉던 유설린
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
"진정해."
유설린은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힐끔 뒤를 돌아봤다. 뒤에
있던 벽에 기댄 채로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여운휘가 어느새 다가
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다.
유설린은 차가운 듯 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진정
되기 시작했다. 여운휘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토록 다급했던 마음이 가라앉
는다. 유설린은 숨을 몰아쉬다가 자리에 앉았다.
"죄송해요. 제가 조금 흥분했군요."
"아닙니다. 당연하신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설린은 가까스로 마음은 다잡았지만 낯빛이 좋지 않다. 유설린을 대신해
벽에 다시 몸을 기댄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묻지. 그 자는 유가에 적의가 있는가 아니면 호의가 있는가?"
"그것도 모르지."
"그럼 또 하나 묻지. 그 자의 정체는 어떻게 안 거지?"
"팔 년 전쯤인가? 유가에 하나의 서신이 날아들었다. 처음 그 서신을 받고
매우 놀랐지."
"……?"
"서신의 맨 앞에 적리환이라고 적혀 있었거든."
놀랍다. 충분히 놀랄 만도 하다.
적리환은 현 유가의 가주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유운풍이라는 이름으로 알
려져 있다. 유가의 핵심세력들을 제하고 그의 진짜 이름이 적리환이라는 것
을 아는 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서찰에 적리환의 이름이 있었
다고 한다.
그것도 그 당시에는 활동도 하지 않고 그저 주주 지역에 처박힌 채로 있던
때가 아닌가. 지금이라면 몰라도 그 당시라면 유가라는 이름은 주주 지역
사람을 제하고는 아무도 몰랐을 때다.
그런데 적리환의 본명을 알고 있다. 적리환을 안다면 그들이 무슨 단체인
지 모를 리도 없다. 적리환의 정체도 알아낼 정도라면 그 밑에 있는 자들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할 리가 없다.
"그 서찰은 검문에서 날아든 거였다. 그건 곧 검문이 우리가 마교의 세력이
라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지."
"……"
여운휘마저도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큰일이다. 그것도 보통 큰 일이 아니다. 여운휘는 그것에서 대답을 찾기가
어렵자 다른 것을 물었다.
"그 서신의 내역은?"
"그것도 모르겠군. 그건 적 대협만이 알고 계시네. 물었지만 대답을 해 주
지는 않더군. 하지만 그 서찰을 보고 나서 적 대협 또한 보낸 자가 누구인지
는 알지 못했다고 하더군."
"빌어먹을……"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답을 내려졌다는 거다.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유설린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입
을 열었다.
"검문에 가야겠어요."
가야 한다. 상대가 이쪽의 숨통을 쥐고 있다. 그쪽에서 방문을 하지 않는다
면 그것을 가지고 어떠한 거래를 하고자 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를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검문을
찾아가야 한다. 그 숨통을 쥐고 있는 게 누구인지도 모르는 지금 단서를 얻
기 위해서는 검문을 가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유가의 비밀을 아는 자를 알기 위해서는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으니까요."
유설린은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이 앞서는 탓이다. 힘겹게 이루어 온 모든 것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
는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사라지는 게 두려운 거다. 여전히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여운휘가 천천히 유설린을 향해 다가갔다.
"걱정하지 마라. 범의 굴에 대가리를 들이미는 건……"
여운휘는 의자에 앉아 있는 유설린을 내려다 봤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표정은. 이런 기운
빠진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자신 또한 힘이 쑥 빠져 버리는 것 같다.
힘없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범을 잡기 위해서니까. 내가 그 범을 잡아주마.
그러니까 넌……"
여운휘는 잠시 멈칫했다. 뭔가 이런 말을 하기 쑥스럽다. 유설린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차마 다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는 몸을 돌려 창가로 다가가
며 잇지 못했던 말을 뱉었다.
"웃으란 말이야."
그거면 족하다.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는 여운휘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풋."
유설린이 실소를 흘렸다.
"뭐야, 바보 같이."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목소리다. 바보라는 말에도 여운휘는 아
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보든 뭐든 상관없다. 그런 말을 수백 번, 수천
번 듣는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상대가 호의를 지녔는지, 적의를 지녔는지. 그리고
검문 문주의 만나자는 말이 유가의 정체를 아는 그 자와 관계가 있는 일인
지도.
앞길이 막막하다. 온통 어두운 장막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기분이다. 한
발만 더 내딛으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수렁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렇지
만 망설임은 없다.
지켜 주리라. 반드시 지켜주고야 말리라.
목숨뿐만이 아닌 그녀의 꿈과 행복까지도 모두 지켜 주고야 말리라.
검문(劍門)
검문(劍門)은 소주(蘇州)에 위치하고 있다.
소주의 옛 이름은 고소(姑蘇)였다. 그러다 수나라 개황이 명칭을 개명한 후
로는 이곳은 소주라고 칭했다. 예로부터 소주는 수로가 잘 발달되어 있다.
쌀, 잠사, 차, 물고기가 양산되는 탓에 사람들은 소주를 어미지향(漁米之
鄕)이라 칭하기도 할 정도다. 검문은 소주에서 가장 유명한 문파다. 아니,
강소성 제일의 문파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검문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이백여 년에 가까운 역사 동안 천하제일고수
는 단 하나도 배출해 내지 못했지만 구파일방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은 무
인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무공을 닦는 것을 주 목표로 하지 결코 자
신들의 무위를 뽐내기 위해 강호에 나서는 일은 드물다.
그 탓에 검문은 구파일방에 비해 알려지지도 않았고, 많이 부족하다는 세간
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라 할지라도 검문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숨
겨진 만큼 그들의 저력은 드러나지 않았다. 무림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굳
힌 무인들이라면 검문을 무시하지 않는다.
적어도 검문의 무공인 천하이십삼변선풍검(天下二十三變旋風劍)을 본 자
라면 결코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용기도 일지 않으리라.
검문을 향해 악양유가에서 출발한 인원은 넷이었다.
풍운조가 남고 우문학이 대신 왔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유가와 관계 된 일
이다 보니 풍운조보다는 우문학이 동행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하에서였
다. 유설린이 가니 당연히 여운휘도 따랐다. 그리고 사자로 왔던 도미진 또
한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길 안내를 하기 위함이라고 나섰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악양과 검문은 각각 호남성과 강소성에 위치해 있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
면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거리다. 빨리 간다 해도 보름 가량은 걸리는 여정이
다.
그토록 혹하게 몰아치던 바람도 이제는 잠잠하다. 어느 덧 겨울이 가고, 다
시 봄이 왔다. 산들산들한 봄바람과 함께 소주에 네 명의 사람이 찾아 들었
다.
보름간의 여정 동안 특별한 일 없이 무사히 소주에 도착했다.
소주에 도착해서 반 시진 가량 움직이자 검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건물이
눈앞에 들어왔다. 설령 저 건물에 검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았다
해도 충분히 눈이 갈 정도로 그곳은 웅장해 보였다.
검문은 강소성 제일의 문파답게 꽤나 거대했다. 더불어 안을 훔쳐보지 못하
게 하기 위함인지 담도 성인 남자 세 명을 세워 놓은 것보다도 높아 보였
다. 길게 드리워진 담은 그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상상보다 크군요."
"그렇죠. 모두가 검문이라고 하면 다른 유명한 문파에 비해 한 수 아래라
고 생각하면서 으레 깔보는데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도미진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보름 정도 되는 여정동안 가까이 다가서지
도 않았고, 함부로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건 다 여운휘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날의 일을 잊기가 힘들었는지 유설린에게 조심스럽게 대했다. 평
소 그녀의 행동을 아는 자라면 놀라 자빠질 만한 일이다. 아무리 도미진이
라 할지라도 유설린에게 다가갔다가 여운휘의 간격 안에 들어갔던 일은 쉽
게 잊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동안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공포를 느껴버리니 자신도 모르게 행동이 움츠러든다.
도미진은 검문까지 오는 내내 유설린보다는 오히려 여운휘를 살폈다. 보름
에 달하는 시간 동안 도미진이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말수가 적다. 그 긴 시간 동안 말하는 것을 본 건 몇 번 되지 않는다. 더군다
나 그 적은 말조차도 소가주와 한 것이 대부분이다. 말을 걸어도 간단하게
대답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도미진이 알게 된 건 결코 소가주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
는다는 거다. 잠을 잘 때건 어느 때건 사내는 소가주의 옆을 지켰다. 심지
어 잠을 잘 때도 뜬눈으로 옆을 지킨다.
결코 허점이 없다는 점도 알았다. 그의 몸은 언제라도 사방을 향해 움직일
수 있도록 긴장되어 있다. 눈은 언제나 날카롭게 빛나고 있고, 손은 항시 검
을 향해 있다.
말이라도 많다면 내뱉은 말들을 조합해 이리저리 추리라도 해보련만 그것
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긴 여정 내내 여운휘를 살폈지만 정작 도미진이 안
것은 이런 것들뿐이었다.
도미진은 잠시동안 여운휘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검문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서 있던 무인은 고개를 숙였다.
무인은 이미 수차례 도미진을 봐왔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
다.
"오셨습니까?"
"안에 문주님 계시겠지?"
"예, 며칠 전부터 언제쯤 돌아오시나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항상 계시던 곳에 계시는 가?"
"예. 그리로 가시면 될 것입니다."
무인은 말을 마치고 급히 위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자가 걸어
두었던 빗장을 풀었는지 문을 밀자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안의 전경이 한 눈에 빨려 들어왔다. 검문은 방문하기가 쉽지
않은 문파다.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만약 몰래 들어왔다
가 잡힌다면 검문의 율법(律法)대로 처리된다.
그렇지만 유설린은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었다.
지금 자신들은 불청객이 아니다. 손님의 입장으로 온 것이니 들어가는 것
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최대한 감춘 채로 안으로 들
어섰다.
맨 뒤에 서 있던 우문학은 뒤통수를 긁으며 유설린의 뒤를 따랐다. 결코 괜
한 행동이 아니다. 우문학이 뒤통수를 긁은 것은 그의 수하들에게 알리는
신호였다.
우문학의 신호를 받은 자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뒷머리를 긁는 다는 건 그
곳에 멈추어 서서 다음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거다. 그들은 숨
소리마저 죽인 채로 주변 환경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맨 앞에 선 것은 도미진이다. 아무래도 검문 문주가 있는 곳을 아는 게 도미
진뿐이다 보니 앞장서게 된 것이다.
여운휘는 유설린의 옆에 바짝 붙었다. 유설린에게 안심하라고 했지만 자신
또한 그리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누가 적인지도 모르는 형편이다.
검문 문도 모두가 적일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도미진은 익숙한 듯이 걸어 어느 건물 앞에 이르렀다.
건물 앞을 지키고 있던 무인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
어가라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들을 지나쳐 네 명은 안으로 들어섰
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서재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커다란 둥근
상이 있었고 의자에 앉은 채로 사내는 책을 읽고 있었다.
검은머리 사이에 히끗히끗 돋아나 있는 흰머리는 그의 나이를 대변했다. 잠
시동안 책에서 눈을 때지 않고 있던 검문 문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
문 문주는 도미진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수고했다."
검문 문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더불어 눈빛은 무척이나 순해 보였다.
웃을 때 눈이 작아지니 인상이 좋아 보인다.
"문주님의 부탁인데 제가 거절할 수가 있나요."
"하하! 내가 항시 너에게 신세를 지는 구나. 아, 실례했소이다. 손님들이 오
셨다는 건 알았지만 너무 흥미로운 부분이라 그만 눈을 땔 수가 없더구려."
"아니요, 괜찮습니다."
유설린도 웃고 있는 검문 문주를 향해 미소로 화답했다.
검문 문주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대단한 미녀시구려. 내 살다 살다 이런 미녀는 처음이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뒤에 계신 두 소협은 누구인지 물어도 되겠소?"
검문 문주의 눈이 여운휘와 우문학에게로 향했다. 여운휘를 대신해 우문학
이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우문학이라 하고 이 사내의 이름은 진군휘라 합니다."
"오! 자네가 그 진군휘란 말인가? 혈리추검 공청이라면 나 또한 쉬이 상대
할 수 없는 자이거늘 약관 밖에 되지 않은 소협이 그런 자를 이기다니 대단
하군! 아, 내 이름을 여태 말하지 않았군. 내 이름은 엽강청(葉剛靑)이라 하
오."
무림에서 크게 활약한 적은 없지만 사람들은 검문의 문주를 선풍검(旋風
劍) 엽강청이라 칭했다. 그는 무림에서 단 일곱 번의 비무를 행했다. 그렇
지만 그 일곱 번의 비무만으로 그는 위명을 날리기 충분했다.
상대는 그 당시 무림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절정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엽강청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는 그때도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다음에 다시 붙어 보자는 말을 전하고는 검문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특별한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검문 내부에서 검문 문주라면
가장 높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머무는 곳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들어오
는 것은 분명 실례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여운휘는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문을 열어제치자 검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
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문은 열렸는데 아무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유설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가가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없다. 그
렇다면 바람의 탓일까? 유설린은 그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 밖
에 있었던 그녀로서는 문이 열릴 정도의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걸 안다.
"누군가가 온다."
여운휘는 문 밖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우문학은 옆에서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 장 정도 문으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그렇지만
단순히 누군가가 다가온다 해서 놀랄 리가 없다. 그건 그 자가 이 문을 열었
다는 것에 있다. 오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문을 열 수준의 무인이라면 놀
라기 충분하다.
"아아, 경계하실 필요 없소이다. 본 검문의 제일 어르신이자 현 강호십일객
의 한 분이신 뇌수혈황(雷手血皇) 이십니다."
여운휘는 상대가 강호십일객의 하나라는 소리에 이 건물 근처로 다다른 그
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결코 좋은 인상이 아니다.
쭉 찢어진 눈에 희게 변해버린 머리카락. 더군다나 얼굴엔 주름살이 가득했
고, 손바닥은 기이하게 컸다.
"아, 그러시면 우선 오늘은 돌아가서 푹 쉬십시오. 이야기는 내일이나 내
일 모래쯤 하도록 하지요. 어르신이 오셨는지라. 도미진 네가 안내해 주거
라."
"그리 하죠."
도미진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걷기 시작했다. 유설린 또한 검문 문주 엽
강청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 도미진의 뒤를 따랐다. 여운휘는 유설린의 뒤
를 바짝 쫓으며 문 밖으로 나섰다.
마침 안으로 들어서려던 뇌수혈황과 여운휘가 스쳐지나갔다.
여운휘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상대 또한 자신들을 쓰윽 훑어보면서 지나쳤
는데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잘 손질 된 예검을 보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또한 혈검을 보는 것 같기
도 하다.
여운휘는 왠지 모르게 그 노인에게서 피내음이 진동을 한다고 느꼈다.
다른 건 몰라도 위험한 자인 건 확실하다.
자신들의 정체를 아는 게 검문 문주이거나 뇌수혈황이라고 불리는 저 노인
일 거다. 웃고는 있지만 검문 문주 또한 만만치 않은 자다.
옆에서 지나가던 우문학이 여운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군."
그 또한 알아차린 모양이다. 여운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우문
학의 생각과 마찬가지였다. 검문 문주나 뇌수혈황이나 모두 느낌이 좋지 않
다.
검문의 무인들은 꽤나 깔끔한 느낌이다. 검은색 경장(輕裝) 차림으로 몸을
감싼 그들은 행동에 절제가 있어 보였다.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정작 없는 자들이 크게 떠
들기 마련이다. 이처럼 무엇인가 속으로 갈무리 된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들은 결코 자신에 대해 떠벌리지 않는다.
여운휘는 창 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방 안에는 검문에 온 삼인 모두 모여있었다. 행장을 푼 그들은 가벼운 옷차
림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운휘가 자리에 앉자 우문학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구일까요?"
"전 뇌수혈황이라고 생각해요. 문을 나설 때 저희를 바라보는 눈빛이 뭔가
날카롭달 까요?"
그 둘은 유가의 정체를 아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
운휘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아무런 단서가 없다. 우선 무작정 오기는 했지만 유가의 정체를 아는 자를
밝혀 낼 방법이 없다. 지금은 눈과 귀 모두가 막혀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안에 있는 이상 외부에서 연락을 받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대단한 고수가 아닌 이상 검문에 몰래 숨어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숨어드
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숨어드는 것도 그렇지만 나가는 것 또한 수월치 않
다. 또한 검문 안에서 움직일 때도 문제다.
검문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무래도 외지인 같은 자들은
보고가 올라가게 될 테고 그러다가 발각될 경우는 극형에 처해진다.
의자에 앉아 있던 우문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 젖혔다. 우문학이 슬쩍 몸을 앞으로 굽히는 순간 손살같이 방
안으로 한 명의 무인이 뛰어들어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무인은 유설린을 향해 급히 부복했다.
유가의 인물이자 우문학의 수하 중에서 가장 몸이 날렵한 이 호다. 우문학
이 아까 보낸 신호를 보고 이곳으로 급히 달려온 모양이다.
"알아봤느냐?"
우문학의 말에 이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학이 내렸던 명령은 그리 어
려운 것도 아니었다.
"뇌수신황은 유가에 서찰이 날아왔을 때까지 검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
니다."
"그럼……?"
"저희가 알아내지 못한 게 아니라면 뇌수신황과 검문이 연을 맺게 된 것은
오 년 전입니다."
오 년 전부터 검문과 연을 맺게 된 거라면 적어도 뇌수신황은 유가의 정체
를 아는 자가 아니다. 서찰이 날아온 것은 팔 년 정도 전의 일이다. 그 이후
에 검문과 연을 맺게 된 거라면 아무래도 뇌수신황을 그자라고 판단하는
건 무리다.
그렇다면 답은 내려진 게 아닌가. 뇌수신황이 아니라면 검문 문주일 게 분
명하다.
아니…… 그렇게만 생각할 수도 없다. 그렇게 단순히 추리해 내기는 석연치
않다. 그렇게 상대하기 쉬운 자였다면 여태까지 유가에서 알아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유가에서도 분명 검문에서 서찰을 보낸 자를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
봤을 거다. 그리고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을 테고. 그런 상대가 이처럼 쉽
게 밝혀질 자였다면 여태까지 몰랐을 리가 없다.
뭔가 더 물어보려던 우문학은 급히 창문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 우
문학이 신호를 보내는 찰나 이 호라 불렸던 사내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
치 애초부터 그곳에 없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완벽하게 자신의 흔적을 없앴
다.
이호가 나서자마자 우문학은 창가 밖으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주변의 풍경
을 감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눈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문이 열렸다.
"다들 모여 계시네요."
도미진이다. 옷을 갈아입었는지 예전에 비해 화려해진 것 같다. 애초에 농
염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가 타오를 듯한 붉은 경장을 입자 색기가 더욱
강력해진 기분이다. 유설린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죠?"
"아, 검문 내부를 간단하게 안내해 드리라는 문주님의 말이 있으셔서요."
"일일이 신경까지 써 주시니 송구하군요."
유설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설린과 도미진이 풍기는 분위기는 완벽하
게 다르다. 한 쪽은 농염하고, 한 쪽은 청순하다. 옷차림 또한 마찬가지다.
타오를 듯한 붉은 옷을 입은 도미진과 단아하면서도 깔끔한 흰옷을 입은 유
설린은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성격을 드러냈다.
검문은 강소성에서 제일가는 문파답게 내부에는 세기도 힘들 정도의 전각
들이 있다. 유설린을 비롯한 삼 인은 도미진의 안내를 받으며 검문 안을 구
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검문 또한 사람이 사는 곳이다 보니 그다지 다른 것은 없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건물들을 보면서 특별한 감흥이 일리도 없다. 헌데 연
무장을 구경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 검문 무인들은 그곳에서 무공을 익히
고 있었다. 오랜 시간 서서 구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
의 감상으로도 충분히 머리에 남을 만 하다.
말로만 들었던 검문의 무공을 눈으로 봤다. 그들의 행동은 절제가 있다. 무
공의 끊어짐과 이어짐이 확실하고, 또 그것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다.
"지금 본 사람들 대단하네요."
"검문의 고수들이죠."
"꽤나 실력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로군요."
"무공을 배우셨나 봐요?"
도미진의 말에 유설린은 흠칫 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놓고 있었다. 이
곳은 적진이다. 이 안에 있는 자 중에서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형편이다.
한 명이 적일지도 모르지만, 최악의 경우 검문 모두가 적이라 생각해도 무
방하다.
"조금요. 재질(才質)이 부족해서 깊게는 익히지 못했지요."
"흐음, 그래요?"
도미진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녀는 걸으면서 주변에 있는 건물들을 소개하
기 시작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건물들뿐이다. 한참을 걷던 도
미진이 한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곳은 말을 놔두는 곳이에요."
"꽤나 크군요."
"검문은 말로도 유명합니다, 소가주."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우문학이 입을 열었다. 유설린은 검문이 말로도 유
명하다는 말을 오늘 처음 들어봤다.
그곳은 멀리서 봐도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컸다.
"검문에서 만들어내는 말은 중원에서도 비싼 가격에 거래되곤 하죠."
말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리고 그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다. 검문의 말은 최
상급이다. 군에서 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돈 꽤나 있는 자들이 사려고 줄
을 선 상태다.
암말이 임신을 하는 것은 봄과 여름이다. 말의 임신기간은 인간과 달리 차
이가 크다. 이백 팔십 칠일에서 사백 십팔일.
지금은 봄이 오고 있기에 검문의 마사(馬事)들 또한 한창 바쁠 때다.
검문이 문을 개방하지 않은 이유가 이 말을 기르는 방법이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검문에게서 말의 비중은 대단하다.
그때 어떤 노인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노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머리
는 손질을 하지 않은 지 한참이라도 됐는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고, 얼굴
또한 씻은 지 오래 된 티가 역력했다.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당장이라도 속을 게워낼 정도로 지독했다.
노인은 꾀죄죄한 모습으로 도미진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우헤헤……"
"가죠."
도미진은 노인이 자신을 향해 웃음을 흘리자 고개를 돌렸다. 익숙하다는
듯 도미진을 옆으로 비켜가려고 했지만 노인은 끈덕지게 따라 붙었다. 그녀
가 튼 방향의 앞을 막은 노인은 다시 웃음을 흘렸다.
"헤헤……"
"당장 꺼지지 못해! 이 비렁뱅이 같은 자식!"
도미진은 검집 째로 노인의 무릎을 때렸고, 그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버
렸다. 당연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노인이 도미진의 공격을 받고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노인은 아팠는지 손으로 무릎을 감싸안고 땅을 때굴때굴 굴렀다. 얼마나 지
저분한지 땅을 때굴때굴 굴렀는데도 불구하고 옷이 더러워진다는 것을 느
낄 수도 없을 정도였다.
"무슨 짓이죠?"
"이 자가……"
"노인 분인데 무릎을 치다니요!"
유설린이 목청을 높이자 도미진은 움찔해 버렸다.
도미진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화를 속으로 삭이며 다른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던 유설린은 노인을 향해
무릎을 굽혔다.
"괜찮으세요?"
"우아, 아프다. 아프다!"
노인은 머리가 모자란 사람인 듯 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땅을 구르는 노
인을 향해 유설린이 손을 뻗었다. 유설린은 더러운 노인의 다리를 손으로
잡았다. 다리를 이리저리 만지던 유설린이 웃으면서 말했다.
"다행이네요. 다리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어요."
"우어, 아프다!"
노인은 아프다는 말만 연신 뱉어댔다. 이곳을 떠나려던 도미진은 유설린이
계속해서 그곳에 있자 목청을 높였다.
"어서 오지 않고 뭐해요!"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봐요."
유설린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멀리서 이곳을 바라보는 한 사내를 발견
하고 손짓했다. 그자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유설린이 자신을 부르자 멈칫했
다. 잠시 멈칫하던 그자는 천천히 다가왔다.
"이 분을 어서 모시세요. 다리뼈는 멀쩡합니다. 하지만 어찌 될지는 모르
니 푹 쉬시게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요."
사내는 고개를 꾸벅하고는 급히 노인의 어깨를 부축했다. 노인은 눈에 눈물
을 그렁그렁하게 달고 유설린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착하다, 착하다."
"어서 가셔서 쉬세요."
유설린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뒤에 서서 소가주를 바라보
던 우문학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품안에서 비단을 꺼내 유설린에게 내밀
었다.
"예? 왜 갑자기 비단을……"
"손이 더럽혀지셨습니다."
"아……"
유설린은 그제야 알았는지 우문학이 준 비단으로 손을 닦았다. 겨우 다리
를 몇 번 만졌던 것뿐인데 비단은 금새 더러워졌다.
유설린은 저 노인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누구이기에 이곳에 있고 도미진에
게 저토록 두들겨 맞는지.
"저 노인 분이 누구죠?"
"마사죠."
"말을 돌보는 사람이라는 저도 알아요. 그런데 제 정신은 아닌 것 같은
데……"
"맞아요. 저 사람은 바보예요."
바보인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도미진의 입에서 들으니 오히려 의문이 커
진다. 바보라면 이곳에 그대로 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사 일을 하는 거죠?"
"저 노인은 다른 건 몰라도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관리해요. 지금 검문의
마사 중에서 최고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죠."
노인은 이상한 인물이다.
검문에 들어온 지도 팔 년 가량이 된 노인이다. 분명 멍청한 자다. 식사를
하고 나서 몸을 돌린 후 밥을 달라고 할 정도로 바보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멍청한 자가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관리한다.
그가 마사가 된 이후로 매년 태어나는 망아지의 수가 급격하게 늘었다. 말
들은 그 노인을 따랐다.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팔년 동안 노인은 갖은 핍박을 받았다. 죽기 바로 직전까지 두드려 맞기도
했고, 누군가의 장난으로 말 뒷발에 치여 몇 달을 침상 신세를 진 적도 있
다. 그런데 노인은 꿋꿋하게 일어나서 다시 마사 일을 보곤 했다.
그토록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노인은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름조차 모르는 노인. 사람들은 그를 무명 노인이라고 불렀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아무도 캐묻지 않았다.
그는 바보니까 과거를 물어서 대답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말은 겁이 많다. 사람들은 모른다. 말은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피하지만 뒤
에 있다면 발로 강하게 찬다. 그 탓에 말의 뒷발에 치여 쓰러지는 사람은 많
아도 앞발에 치이는 사람은 드물다.
그건 자신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해서 말이 지레 겁을 내는 탓이다.
말의 뒷발에 치이면 가슴뼈가 함몰되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한다. 더욱
이 나이가 많거나 몸이 약한 사람이 말의 뒷발에 차이면 죽게 되거나 몇 달
간 침상 신세를 져야 한다.
오늘도 무명 노인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고 있었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갈색 말은 기분이 좋은 지 하늘을 바라보며 울음소리
를 토해냈다.
마구간은 악취로 가득했다. 원체 크기가 크다보니 마구간을 한 번 씻는 것
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무명 노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
무 오랫동안 함께 해서인지 악취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말을 쓰다듬던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멀리 하늘에 걸려 있는 달이 어렴풋
이 보인다.
더불어 그 아래에 펼쳐진 수많은 건물들은 화려하기까지 하다. 여태까지 어
수룩해 보이던 노인의 눈빛이 변했다.
팔 년. 자그마치 팔 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별반 대단하지도 않은 삼류무사
들에게도 두드려 맞았고, 꼬마아이들의 치기 어린 장난도 알면서도 당했다.
심한 장난에 뼈가 부러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노인정도 되는 자라면 겨
우 그 정도 장난에 다칠 리가 없다. 하지만 다치지 않으면 안 된다.
검문에서 노인은 마사 일을 제하고는 무능력한 바보가 아니던가.
그런 자신이 말의 뒷발에 치이고, 삼류무사의 몽둥이 찜질을 받고도 멀쩡하
다면 오히려 의심만 받게 된다.
뼈가 부러져야 한다. 온 몸에 상처가 나게 해야 한다. 의식을 잃고 게거품
도 물어야 했다. 그것은 모두 단 한 가지의 일을 위해서였다.
이제는 실력이 입증 돼 검문 내에서도 무명 노인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기
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예전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노인은 유심히 한쪽 방향을 바라봤다.
'너무 오래 쉬었어.'
쉬기는 정말 원 없이 쉬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쉬었다고 보기는 뭐하지만
무림에서 몸을 뺀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 동안 많은 걸 알아냈
다.
문제는 어느 정도는 알아냈지만 그 곳에서 더욱 깊게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거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벌써 팔 년이다. 더 이상 이곳에 있
어 봤자 얻을 게 없다는 건 오래 전부터 알았다.
하지만 마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해서 더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만났다.
처음엔 무척이나 놀랐다. 도미진을 따라서 오던 두 사내와 한 여인. 처음 보
는 자들이었기에 주위 깊게 살폈다. 무덤덤하게 두 사내는 스쳐지나갔지만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명 노인은 그녀의 정체를 알아버렸다.
닮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남을 배려하는
착한 마음씨마저도 닮았다는 거다.
'많이, 아주 많이 컸구나! 설린아……'
노인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