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37)

색미호(色尾狐) 도미진

능려운과 도미진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우문학의 눈이 그녀의 전신을 훑

고 지나갔다.

갓 피어난 꽃봉오리가 아닌 탐스럽게 펴 버린 꽃잎 같은 느낌의 여인이다. 

하지만 외모만 봤다면 우문학은 결코 이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게다.

색미호 도미진이라는 이름 탓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가 가는 곳에는 항시 피바람이 분다. 도미진이 의도한 바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우문학은 후자라 생각한다. 아무리 재수가 없

다 한들 그런 모든 일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도미진의 등장과 함께 터

질 리가 없다. 

더군다나 갓 이십대인 외모와는 다르게 나이도 마흔에 가깝다.

"색미호라는 여자가 너인가 보군."

우문학은 대뜸 반말을 내뱉었다. 평소의 그를 잘 아는 능려운은 이상하다

는 듯이 우문학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면서도 반존대를 사

용하는 그다. 그런 우문학이 처음 보는 여인에게 대뜸 시비조를 말을 거니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다.

"날 아는 척 하는 당신은 뭐지? 난 당신을 처음 보는데."

"큭큭."

우문학은 웃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결코 곱지 않다. 입은 웃는 듯이 비틀고 

있지만 눈빛은 사납다. 결코 웃고 있는 게 아니다. 

그와 얼마간 동고 동락 하다시피 한 능려운이 눈빛은 결코 곱지 않다. 입은 

웃는 듯이 비틀고 있지만 눈빛은 사납다. 결코 웃고 있는 게 아니다. 

그와 얼마간 동고 동락 하다시피 한 능려운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우문학

은 이 여자를 맘에 들어하지 않고 있는 거다. 물론 그건 능려운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왜 여기 온 거요? 운문세가와의 일은 끝났는데 말이요."

"내가 운문세가 따위의 소속 무인이라고 생각해? 그냥 지나가는 길에 초청 

돼서 따라갔을 뿐이야."

"그럼 더욱 소저가 날 찾아올 일은 없다고 생각하오만?"

도미진과 만났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색미호를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찾아왔다.

"소가주를 만나러 왔어. 이곳에서 아는 사람은 너뿐이기에 널 부른 거지."

"무슨 이유로 당신이 소가주님을……"

"그건 네가 궁금해할 문제가 아니라고 보이는데. 네가 그렇게 대단해? 소가

주에게 할 말을 대신 들을 만큼?"

할 말이 없다. 도미진의 말대로 자신이 이 여인에게 그걸 물을 입장은 분명 

아니다. 자신은 그저 악양유가의 문을 지키는 무인일 뿐이다. 

능려운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우문학이 나섰다.

"소가주님을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넌 지금 찾아온 목적에 대해 이야기해

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악양유가를 관리하고 있는 건 나니까."

"당신이 악양유가를 관리하고 있다고?"

도미진은 이외라는 듯이 쳐다봤다. 소가주가 없으니 임시적으로 다른 자가 

세가를 맡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전혀 본 적도 없는 사내의 모습이 그

녀를 갸웃거리게 만든 거다. 본 적도 없는 사내인데 악양유가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도 호남제일세가인데 이런 무명의 인물이 운영하고 있다는 건 이해하

기 힘들다.

"이름이 뭐지?"

"우문학이라 한다."

혹 이름을 들으면 알까 해서 물었다. 하지만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

다. 오히려 낭인이었던 능려운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어도 우문학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다. 

"들어 본 적이 없을 거다."

"그래. 전혀 생소하군."

"네가 내 이름을 알 필요는 없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지. 소가주님은 이곳

에 안 계시니 나에게 용건을 말해라. 내가 소가주님이 돌아오시면 말씀드리

도록 하지."

"당신이 악양유가를 맡고 있다고 해도 이건 그리 쉽게 말할 문제가 아니

야. 소가주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기다리지."

우문학은 이마를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이 여인과 소가주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 이 여인은 사문을 

비롯해 배경 등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항시 피바람을 몰고 다

니는 주역이다. 그런 여인이 자신이 섬기는 소가주를 만나는 것이 좋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악양유가는 단순한 세가가 아니다. 아는 자는 극히 드물지만

이곳은 마교에 복수를 하기 위한 시발점이다. 모두의 눈을 속여야 한다.

이런 여우같은 계집이 무엇인가 물어버린다면 골치가 아프다. 아무리 소가

주가 영특하다 해도 이런 교활한 여인과 승부를 벌이게 된다면 승부는 장담

하기 힘들다.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평생 소가주님을 뵐 수 없을 거다."

"건방지군. 네가 뭐라고 생각하기에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을 마치며 도미진은 섭혼술을 펼쳤다. 

우문학은 자신을 바라보던 도미진의 눈빛이 순간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

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온 몸의 피가 흥분을 억제 못하고 온 몸을 돌고 있

다. 

'섭혼술이군.'

이 여인은 지금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우문학은 웃고 싶었

다. 비록 도미진이라는 이름이 껄끄럽기는 하나 실력으로 보면 결코 자신

의 위가 아니다.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여고수이기는 하지만 그

래도 이길 자신이 있다.

우문학은 천천히 온 몸에 있는 진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안으로 파고들었

던 사이한 기운들이 천천히 밖으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도미진은 놀라 버렸다.

섭혼술로 유명한 자신이다. 물론 자신의 섭혼술에서 버텨냈다고 해서 놀란 

건 아니다. 전신의 내력을 다한 건 아니지만 낭인으로 알려졌던 능려운 또

한 섭혼술에서 버텨 냈다. 지금 또한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닌지라 어

느 정도 사정을 봐주기도 했다.

문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거다.

자신이 추측한 우문학의 실력이라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경련이라도 

일으킨 듯이 떨었어야 옳다. 그런데 전혀 그런 점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아

까 자신과 만났을 때처럼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다. 

자신의 판단이 빗나간 게다. 너무 상대를 얕봤다. 자신이 생각했던 우문학

이라는 자의 실력은 실제와 많이 달랐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우문

학을 보면서 도미진은 다시 한 번 그의 몸을 위에서부터 찬찬히 내려보기 

시작했다. 얼굴력은 실제와 많이 달랐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우문

학을 보면서 도미진은 다시 한 번 그의 몸을 위에서부터 찬찬히 내려보기 

시작했다.

얼굴에서부터 발끝까지 뜯어보면서 특징이란 특징은 모두 보았다. 뭔가 있

다면 연상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도저히 모르겠어. 누구지? 우문학이라……'

낭인들 사이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고, 그렇다고 무림에서 들어

본 것도 아니다. 이 정도나 되는 인물이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게 이상하

다. 이 정도라면 능히 무림에서 알려지고도 남았을 실력이다.

알아봐야 한다. 이런 실력자라면 그럴 가치는 충분하다.

"좋아. 말해주지."

"이제야 입을 열 생각을 하나 보군."

"자세한 것은 소가주가 오면 이야기하고 우선은 간단하게 말해줄게."

도미진은 우문학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마치 안기듯이 우문학의 품으로 다

가가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난 사자야. 소주(蘇州)의 최고 권력자이신 분의 사자 말이야."

도미진은 품안에서 빠져 나오더니 우문학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마치 안으

로 들어올 것을 허락이라도 받은 듯한 당당한 발걸음이다. 능려운은 갑자

기 그녀가 악양유가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우문학을 바라봤다.

무슨 조처를 내리기를 바래서였다. 그런데 우문학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

고 있었다.

"우문학 어떻게 합니까?"

우문학은 고개를 돌려 능려운을 바라보더니, 곧 멀어져 버린 도미진을 향

해 시선을 돌렸다. 우문학이 입을 열었다.

"가서 객들이 쉬는 곳으로 데려다 주십시오. 방 하나 내 주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그리 하도록 하죠."

능려운은 갑작스러운 우문학의 변화에 이상하다는 표정은 지었지만 묵묵

히 그의 말을 따랐다. 우문학은 능려운이 사라지자 어딘 가로 걷기 시작했

다. 그는 걸으면서 실성이라도 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삼 호와 사 호, 그리고 팔 호는 저 여자의 주변을 살펴라. 결코 걸려서는 

안 되고 또한 놓쳐서도 안 된다."

슈슉!

뭔가가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무 위에는 분명 누군

가가 있었다. 우문학은 말을 이었다.

"육 호와 칠 호는 도미진에 대해 최대한 알아봐. 쓰잘데기 없는 자료라도 

좋다. 모두 다 긁어모아."

지붕 위에서 알겠다는 듯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쪽에 몸

을 숨기고 있던 두 명의 무인 또한 몸을 날렸다.

"오 호, 너는 당장 일조로 돌아가 비상상태라고 알려. 잘못하면 피바람이 

불 거다."

이번에는 멀리서 땅을 쓸고 있던 장정이 갑자기 방향을 틀고는 걷기 시작했

다. 경공을 펼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향하는 곳은 1조가 있는 건물이

다. 우문학은 그대로 걸었다. 주변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지금 전서를 보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소가주에게 알려야 한다. 지

금 이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자신이 

해결 할 문제는 아니다.

'연락을 해야 해……'

우문학의 마음은 상당히 급했다.

'소주의 그곳에서 연락이 왔다고.'

여운휘는 유설린과 같은 방을 쓰지 않았다. 

악양유가에 있을 때는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무림맹이다. 남자와 여자가 같

은 방에서 하루 종일 있는 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여운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던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유

설린은 아니다. 여인에게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아는 여운휘는 밤에는 결

코 그녀의 방 안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여운휘는 유설린의 곁에서 떨어지

지도 않았다. 방 안이 아닌 밖에서 그는 유설린을 지켰다.

방 문 앞에서 몸을 기대고 앉아 있는 여운휘는 무림맹 내에서도 화젯거리

다. 혈리추검 공청을 꺾은 그가 문이나 지키는 무사라니.

유설린은 여운휘가 밖에서 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랬기에 안으

로 들어오라고 수차례 권했지만 여운휘는 요지부동이다. 그녀 또한 여운휘

가 왜 그리 행동하는지 잘 알고 있다.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함이 앞선다. 항상 아무런 대가도 없이 자신을 지

켜주는 여운휘를 보면 유설린은 뭔가 마음이 답답하다. 준 건 아무것도 없

는데 받기만 한다. 뭔가 답례를 하고 싶은데 마땅히 해 줄게 없다. 

'날씨가 추울 텐데……'

유설린은 침상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굳게 닫힌 창문도 덜커덩거린

다. 바람이 꽤나 세차게 분다. 안은 그런 대로 따뜻하지만 밖은 무척이나 날

씨가 쌀쌀할 게 분명하다.

유설린은 침상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문 쪽을 바라봤다. 문에 몸을 기대고 

있는 여운휘의 그림자가 보인다. 유등이 흔들리자 그림자도 따라서 춤을 춘

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설린은 다시 침상에 누웠다.

여운휘가 어떠한 사내인지 누구보다 잘 알지 않던가. 결코 이 안으로 들어

오지 않을 거다. 유설린에게 그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한 그의 행동은 전

혀 변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녀는 이불을 꼭 껴안았다. 

여운휘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가주라는 이름 탓인지 거처

는 꽤나 좋은 편이다.

밤을 길다. 그 긴 시간 동안 여운휘는 유설린을 지킨다. 물론 여운휘 또한 

잠을 자기는 하지만 그건 한 시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외의 시간에 

여운휘가 할거라고는 몇 없다. 종종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살피는 것을 제한

다면 그는 항시 하늘을 본다.

오늘 또한 그러한 행동이 크게 변한 건 아니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던 여

운휘는 어깨에 걸쳐놓았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냐."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이렇

게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자는 처음이다. 더군다나 이 사내는 일 각 정도 전

부터 같은 자리에 숨어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여운휘는 알면서도 기다렸다. 그 자가 다가오기를.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옷은 꾀죄죄했고, 몸에서는 좋

지 않은 냄새가 풍겼다. 꽤나 어수룩해 보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천박한 농

민이다.

"헤헤, 못난 놈이 인사드립니다."

사내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여운휘는 상대를 살폈다. 이 지독한 냄새는 말

의 오물 냄새다. 특별히 마구간에서 뒹굴지 않은 이상 이런 냄새가 날 이유

는 하나밖에 없다. 

"마사(馬事:말을 돌보는 사람)로군."

"대단한 눈썰미를 지니셨습니다요."

"마사가 무슨 일이냐."

"헤헤, 그게 말입니다……"

마사는 대답을 하지 않고 품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여운휘는 살짝 검을 

위로 올렸다. 그렇지만 마사는 품안에서 서찰을 슬며시 꺼내더니 다시 집어

넣었다.

서찰을 본 여운휘는 이 사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유가에서 숨겨 놓은 자

가 분명하다. 서찰에 적혀 있는 밀마는 분명 유가의 것이었다.

여운휘는 슬며시 아래로 내려가 사내에게서 서찰을 건네 받았다. 아무도 몰

라야 한다. 그 탓에 여운휘의 눈이 사방을 살폈다. 

"제가 모시는 아씨가 전하라는 서찰은 전했으니 소인은 이만."

말을 마치고 마사는 물러났다. 

이것을 여인이 보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마사는 만약 있을지도 모르는 귀

를 생각해서 이러한 말을 내뱉은 것이다. 그리고 그 마사의 상관은 여인일 

것이다. 그리고 유가와 어떻게든 끈이 닿아 있는 인물일 테고.

남을 속이려면 완벽해야 한다. 아씨가 보내라고 했다면서 서찰을 건넸는데 

그 마사가 모시는 사람이 남자라면 이 일은 이상하게 꼬이게 된다.

여운휘는 서찰을 펼쳤다. 서찰의 내용은 역시나 연서였다. 

실제 내용을 보기 위해서는 종이에 특별한 약제를 발라야 한다. 그러면 글

자는 지워지고 실제 내용이 나올 것이다. 여운휘는 태연하게 서찰을 품안으

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문에 몸을 기댔다.

겉모습은 태연했지만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림맹에 있는 자

신들에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서찰을 날린 것은 중요한 일이 있다는 증

거다.

날이 밝고 나서 유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올 때까지 여운휘는 안으로 들

어가지 않았다. 

유설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운휘는 태

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나면서 그의 눈은 사방을 예의주시

하고 있었다.

여운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막 잠에서 일어난 유설린

이 침상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춥던 것 같은데 잘 잤어?"

"그래. 그리고……"

여운휘는 말을 흘리면서 전음을 보냈다.

[유가에서 서찰이 왔다.]

[유가에서?]

유설린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유가쪽의 연락망으로 서찰이 온 적은 여태

까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 풍운조가 깔아둔 연락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알아보곤 했다.

그 탓에 유가라는 말에 유설린이 그러한 표정을 지은 것이다.

[가지고 있겠지?]

유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휘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굳이 말하지 않

아도 알고 있다. 그녀는 품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하얀 액체

가 담긴 채로 흔들리고 있었다. 유설린은 옆에 있는 지필묵(紙筆墨) 중에

서 붓을 꺼내 들고 병 안으로 집어넣었다. 붓의 끝 부분을 적신 후에 유설린

은 종이를 서찰 위에 한 겹 덮었다.

그 후 그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붓은 종이 위를 움직였고, 천천히 숨겨

진 넣었다. 붓의 끝 부분을 적신 후에 유설린

은 종이를 서찰 위에 한 겹 덮었다.

그 후 그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붓은 종이 위를 움직였고, 천천히 숨겨

진 글씨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운휘와 유설린은 종이를 바라봤다. 

처음엔 흐릿했던 글씨가 물기가 마르면서 점점 또렷하게 변했다. 

'우문학?'

유가에서 보낸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서찰 맨 위에는 우문학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황급히 돌아오라는 것이 서찰의 내용의 전부였

다.

[돌아오라는 내용뿐인데? 왜 이런 게 분류가 일급이지?]

[잠시만.]

여운휘는 유설린의 말을 가로막았다. 종이 아래쪽에 흐릿했던 글씨가 점점 

그 모습을 확연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검문(劍門).

"검…… 문."

검문은 무림에서 크게 두각(頭角)을 드러낸 문파는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

도 그곳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적어도 그곳에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

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해 할 수가 없다. 검문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니 그곳과 관계된 

일인 건 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검문과의 일이 일급 사항으로 분류가 되

었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그 종이를 불에 태워버리고 난지 얼마 되지 않아 풍운조가 안으로 들어왔

다.

"편히 주무셨소?"

"예, 그나저나 풍 노야. 악양유가로 돌아가야겠어요."

"갑자기 돌아간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이곳에 온 것은 여운휘만을 보러 온 것이 아니다. 무림맹 내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굳히기 위해 일부로 이곳까지 걸음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온지 얼마

나 되었다고 다시 악양유가로 돌아가자고 하는 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급한 일이 생긴 거요?"

"네, 우문학에게 연락이 왔어요. 급한 일이라고 하는군요."

"도대체 무슨 일인지……"

"가기 전까지는 정확히 알지 못해요. 서둘러 가 봐야겠어요."

유설린의 말에 풍운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기회가 아쉽긴 하지만 우문

학이라면 결코 멍청한 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세가도 맡기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닌가. 그가 그렇게 서찰을 보낼 정도였다면 분명 중요한 문제일 게

다.

"그럼 서둘러야겠구려. 어서 준비를 시키도록 하겠소."

"잠깐. 나도 가겠다."

"하지만 휘는……"

"이번엔 네가 뭐라고 해도 따라가야겠다.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아. 이런 급

한 서찰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어차피 한동안 무림맹 내에서 할 일도 없을 

것 같아 보이니까 가도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저번엔 무림맹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였기에 유설린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이번은 뭔가 다르다. 어차피 할 일도 없을뿐더러 뭔가 찜찜한 기분

이다. 그냥 그녀를 혼자 보낸다면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광한검에게 악양유가에 잠시 갔다가 돌아온다는 말을 전하고 오지."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설린은 여운휘가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아

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여운휘가 옆에 있어줬으면 했다. 그게 욕

심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러고만 싶다.

풍운조는 멀어지는 여운휘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는 유설린을 보며 피

식 웃었다.

재미있는 남녀다. 뭐라 딱히 정의 지을 수 있는 관계는 결코 아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돌아가야 한다. 풍운조가 알아본 정보망으로는 아

무것도 걸린 일이 없는데 도대체 세가 내부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얼마 후 여운휘가 돌아와서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응."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하고 일어나는 소가주를 보며 풍운조는 다시금 실

소(失笑)를 흘렸다. 어느 정도 선에서 더 이상 다가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저 둘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은.

풍운조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서둘러야 할 것 같다.

도미진은 조용히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분홍빛 옷이 침상 위를 어지럽

힌 상태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도미진은 문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며 능려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소가주님이 근방에 이르셨소."

"그래? 마침 지루했는데 잘 됐군."

도미진이 악양유가에 도착한지 벌써 십일 가량이 흘렀다. 일이 있어서 온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지루했다.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니 좀이 쑤신

다. 항시 자유롭게 사는 그녀로서는 지금 같은 상황이 그다지 탐탁지 않았

다.

검문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애초에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 뿐만이 아니

다. 지금 앞에서 있는 저 능려운이라는 사내에 대한 궁금증도 이곳으로 발

걸음을 향하게 하는데 일조 했다.

낭인 주제에 혈산랑 좌청의 검을 받았던 자. 뿐만이 아니

다. 지금 앞에서 있는 저 능려운이라는 사내에 대한 궁금증도 이곳으로 발

걸음을 향하게 하는데 일조 했다.

낭인 주제에 혈산랑 좌청의 검을 받았던 자. 그리고 결국엔 혈산랑 좌청을 

죽음으로 몰기도 했다. 낭인 따위의 검에 실수로 죽을 좌청이 아니다. 실력

이 없었다면 그런 행운도 따를 수는 없는 거다.

분명 자신이 아는 능려운은 그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아 능려운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실력은 결코 소문과 같지 

않았다.

그건 곧 악양유가에 있을 때 강해졌다는 소리다. 자신이 알아본 바로는 악

양유가에 들어오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결코 그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뭔가가 있다. 능려운을 강하게 만들어 준 그 무엇인가를 도미진은 보고 싶

었다.

그녀가 보기에 우문학은 대단치 않은 인물이다. 뭔가가 있으니 세가를 맡겼

겠지만 왠지 모르게 전혀 대단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 들어오기 이전부

터 이곳에 대한 정보를 끌어 모았다. 

모두의 대답은 같았다. 술주정뱅이라는 말이 마치 그를 위해 존재했다는 착

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결코 우문학은 술주정뱅이만은 아니다.

만약 처음 악양유가에 들어서서 우문학에게 섭혼술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그대로 믿어 버릴 뻔했다.

"일어나시죠."

도미진은 재촉하는 능려운을 힐끔 바라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증은 

우선 뒤로 미뤄야 한다. 지금부터는 일을 해야 할 때다.

우문학은 사방이 막힌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창문은커녕 문 틈새도 잘 막은 탓에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다. 스무 

뼘 남짓한 방에는 책상과 의자 하나를 제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

다. 그런데 집의 구조가 이상하다.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은데 그 높이는 보

통이 아니다.

일반적인 집의 두 배 이상 높다. 밖에서 본다면 이층으로 된 구조라 착각을 

할 정도다. 하지만 분명 지금 이 안은 단층(單層)으로 되어 있다. 우문학은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조용했던 방 안에서 우문학의 목소리가 울렸다.

"삼 호. 말해."

"넵. 도미진에 대해 알아본 것에 대해 전하겠습니다."

방 안에는 분명 우문학뿐이거늘 목소리는 둘이다. 이 방 안에 있는 건 우문

학뿐이 아닌 듯 하다. 우문학은 더욱 깊숙이 의자에 몸을 묻었고, 그 다른 

목소리의 주인공이 재차 말했다.

"태생 절강성(浙江省) 소흥현. 현재 나이 서른 여덟. 첫 살인은 알려진 바로

는 열 네 살 때입니다. 절강성 쪽에서 유명한 철검문(鐵劍門)의 무인인 곽

표가 그녀를 범하려다가 오히려 죽었습니다. 곽표에 대한 설명도……?"

"아니, 됐다. 계속 해 봐."

"강호에서 섭혼술로 유명하고 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홀리고 다녀 색미호라

는 별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의 손에 죽은 유명한 무인은 매풍검, 금검

비룡, 패천일도 등입니다."

우문학은 다시금 침묵에 잠겼다. 첫 살인이 열 네 살이라는 말에 내심 놀랐

다. 그 나이라면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다. 열 네 살이라면 갓 피어오르는 

나이가 아니던가. 어느 정도 심성이 독한 게 이해가 간다. 

이어 우문학은 말했다.

"사 호. 네가 알아본 것은?"

"삼남 사녀 중 삼녀로 태어나 여덟 살 때 흑묘선녀(黑妙仙女)를 만나 그녀

의 제자로 들어갔습니다. 흑묘선녀의 유일한 제자로 매우 빼어난 기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 외 자잘한 사항은 이 서찰에 있습니다."

천장 쪽에서 종이 한 장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가벼운 종이니 어지러이 

움직이는 게 당연하거늘 전혀 그렇지 않다. 마치 무거운 돌이라도 묶어 놓

은 것처럼 종이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우문학의 수하 중 정보를 물어오는 자는 도합 셋이다. 그들은 각기 다른 분

야로 파고든다. 누구는 행적을 쫓고, 또 다른 자는 상대의 어린 시절부터의 

개인적인 신상을 파해 친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파해 치니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색을 가진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우문학은 종이를 들어 올려 잠시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팔 호. 다른 물어온 것이 있나."

"시작하겠습니다. 도미진이 검문과 연을 맺게 된 것은 십 일 년 전 입하(立

夏) 무렵입니다. 당시 무림을 떠돌던 검문 문주와 도미진이 만나게 되면서 

연을 맺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요."

"알려져 있다? 그럼 실상은 다르다는 말로 들리는 그래."

"그렇습니다."

우문학은 흥미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팔 호라 불린 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도미진은 입하가 되기 두어 달 전 검문 문주를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그 날 처음 만난 것처럼 인사를 나눴습니다."

"꽤나 좋은 정보로군……"

우문학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두어 달 정도의 기간에 

무슨 일인가 벌어졌을 거다. 

"팔 호. 너에게 중요한 명령을 내리겠다."

"하명(下命)하십시오."

"그 두 달 정도 안에 무림에 있었던 대소사(大小事)를 알아봐."

"그리 하겠습니다."

"그럼 가라."

그 이후로 팔 호라 칭해졌던 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때 위에서 다

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가주님이 오신 모양입니다. 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럼 난 이만 나가도록 하지. 모두들 바짝 긴장하고 있거라. 이번 

검문의 일은 뭔가 냄새가 좋지 않다."

말을 마친 우문학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햇빛이 무척이나 강하게 쏟

아져 내린다. 아니, 그건 어두운 방 안에서 두 시진 이상 있다가 나와서 순

간적으로 일으킨 착각일지도 모른다.

우문학의 눈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딘 가로 걷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들

어왔다. 그 둘의 정체는 능려운과 도미진이었다. 저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

는지는 듣지 않아도 뻔하다. 소가주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문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리라.

우문학의 눈이 도미진에게 박혔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내 목숨이 사

라진다 해도 악양유가는 지키고야 말 거다. 그것이 나를 살려주신 전교주님

에게 드릴 수 있는 내 전부이니까.'

우문학은 조금 더 발걸음을 빨리 했다. 

열린 문 건너로 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세 사람의 태도는 제각각이었다. 도미진은 그 셋이 누구

인지 파악하기 위해 힘썼다. 그리고 곧 그 셋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의외

의 인물이 껴 있다. 분명 저 젊은 사내는 한창 무림맹 내부에서 이름을 알리

는 진군휘라는 사내다.

이곳을 떠났다기에 한동안 신세를 졌던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측이 빗나

간 모양이다.

능려운이 놀란 것도 여운휘 탓이다. 그의 얼굴을 보니 반갑기도 했지만 뭔

가 얹힌 기분이 동시에 느껴진다. 

우문학은 여운휘의 등장이 반가웠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시기에 여운

휘와 같은 고수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입장이다. 더불어 우문학이 악양유

가 내에서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았다.

개중 하나가 바로 여운휘다. 

자신이 마교의 전 교주였던 유백명에 대한 충성으로 움직인다면 여운휘는 

그렇지 않다. 그는 소가주인 유설린을 위해 움직인다. 비록 충성하는 인물

은 다르다 해도 결론은 같다. 그렇기에 여운휘는 믿을 수 있다.

셋이 문 안으로 들어오자 우문학은 일단 포권을 취해 보이고는 다가왔다.

"자네도 온 모양이군. 꽤나 오랜만인 것 같군 그래."

"그다지."

"크큭, 재미없는 건 여전하군."

여운휘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

다. 사람을 끌어당길 듯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다.

'누구지?'

본 적이 없다. 저런 여인이라면 분명 기억을 하고도 남을 정도인데 전혀 생

각나는 바가 없다. 적어도 악양유가 내에서 저런 여인은 없었다. 

그렇지만 낯이 익다. 얼굴이나 외모가 아닌 풍기는 분위기 같은 것이 낯이 

익다는 말이다. 잠시 여인을 바라보던 여운휘는 곧 알아차렸다.

저 여인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자가 있었다. 그 탓에 처음 보는 사람인데

도 불구하고 낯이 익은 기분이 든 거다.

'사무린. 그녀와 비슷하군.'

그 여인은 사무린과 비슷했다. 

넘치는 색기와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나 유사했다. 

사무린하면 그다지 기억나는 게 없다. 사곡 내에서 항상 자신의 옆에 있던 

여인이지만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사곡에서 만났던 자들 중 유

독 아직까지도 머리에 남은 인물은 사무린뿐이다.

그 여인은 결코 죽을 것 같지 않았다. 그토록 사무린은 삶에 대한 집착이 강

했다. 그렇지만 사림을 돌파하기 바로 직전 사무린은 죽었다.

직접 시신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리라. 

유설린은 우문학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후에 입을 열었다.

"우 대협, 서찰을 받고 왔는데 무슨 일이죠?"

"아, 그건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저 여인은 

색미호 도미진이라고 하는 자입니다."

"어리다는 말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하네요? 뭐, 뵙게 되어서 반갑다는 

인사나 하죠. 속으로는 어쨌든 말이에요."

도미진의 말에 능려운은 강하게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뭐라고 하고 싶건만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자신이 그러기도 뭐하다. 

여기 있는 자 중에서 가장 직위가 낮은 자신이 나선다는 것이 너무나 우습

기 때문이다.  함부로 나설 자리가 아니기에 능려운은 침묵했다.

"어쨌든 그럼 들어가기로 하죠. 이야기는 들어가서 해요."

유설린은 힐끔 도미진을 쳐다본 후에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했다. 유설린이 

앞장섰고 그 뒤를 여운휘가 바짝 따라 붙었다. 도미진은 유설린의 옆에 다

가가려 했다.

그런데 유설린에게 다가가는 찰나 몸에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다리가 멈

춰 버렸다. 도미진의 눈이 여운휘에게로 향했다. 도미진이 갑작스럽게 멈추

자 유설린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그 탓에 도미진은 여전히 움직

일 수가 없었다. 유설린을 따라 여운휘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탓이다.

간격 안에 들어와 버렸다. 

지금 저 사내가 검을 움직인다면 자신은 분명 피할 수 없다. 지금 이 공간

은 저 사내의 것이다. 그 누구라 해도 이 안에서 여운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움직이면 죽을 거야.'

사자로 온 자신을 죽일 리는 없다는 건 잘 안다. 지금 이러한 생각이 자신

의 착각이라는 것도 안다. 문제는 알지만 몸이 움직이지를 않는다는 거다. 

여운휘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무형의 기운이 그녀에게 무언의 경고를 주고 

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그 이상 다가온다면 베어버리겠다고.

이런 호위는 난생 처음이다. 난다 긴다 하는 호위무사나 보표들을 봐 왔지

만 이런 경우는 생전 처음 겪어 본다. 간격 안에서는 검을 휘두를 용기조차 

나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죽음에 직면한 것만 같은 공포가 온 몸을 엄습한

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의문

이 앞선다.

도미진은 억지로 웃었다. 한 발자국 나아가는데 온 몸에 있는 힘이 다 빠져

나가는 기분이다.

"어서 가죠."

웃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하기도 벅차다. 

유설린은 잠시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곧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걷

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다시금 묵묵히 유설린의 뒤를 따랐다.

도미진은 이번엔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따라가기 시작했다. 간격 안에 

들어간다면 또 여운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기운이 전신의 힘을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탓이다.

여운휘는 일부로 도미진의 접근을 막았다.

느낌이 좋지 않은 여인이다. 그녀의 눈은 사무린을 빼다 박은 듯이 닮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언제라도 남을 희생시킬 수 있는 자다. 

애써 태연한 척 하려고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당황하고 있을 터다. 

도미진과 사무린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사무린이라면 결코 저런 허점을 

들어내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태연자약하게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여인이다. 

여운휘는 저런 부류의 여인이 어떠한지 잘 안다. 눈빛만 봐도 그 사람의 성

품을 알 수 있다 한다. 저 여인은 사갈(蛇蝎)이다. 곁에 두었다가는 언젠가 

무슨 일을 벌이고야 말 인물……

기분이 좋지 않다. 저런 여인이 사자로 온 만큼 이번 일에서는 위험한 냄새

가 풍긴다. 검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가 없다. 도미

진만 없다면 우문학에게 물어 라도 보겠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다.

우선은 기다려야 한다. 서둘러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우문학은 분명 무

엇인가를 알고 있을 거다. 도미진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알아야 할 일이 

있었다면 분명 미리 무엇인가 언급을 했을 것이다.

아무런 말도 없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유설린은 가장 외딴 곳에 있는 객방(客房)으로 향했다. 

객방을 관리하고 있던 관리인은 소가주를 보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출타 

를 했다고 들었는데 어느 사이에 돌아왔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급작스럽다. 

"안에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하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게." 

"알겠습니다 어르신." 

풍운조의 말에 관리인은 고개를 굽실거리면서 주변에 있는 무인들을 불러 

모았다. 

일행은 모두 안으로 들어갔고, 밖에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나 멈칫거리 

던 능려운을 향해 우문학이 말했다. 

"어서 들어오지 뭐 하는 거요?" 

"아, 알겠습니다." 

능려운은 마지막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고 나서 잠시 방안은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 선뜻 먼저 말 

을 꺼내는 사람이 없던 와중에 유설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인사하도록 하죠. 유가의 소가주인 유소화라고 해요." 

"색미호 도미진이라고 하죠. 색미호라 부르시던, 도미진이라 부르시던 마 

음대로 하세요." 

도미진은 한층 침착해졌다. 

유설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지요? 긴한 일 같은데." 

"아, 전 검문에서 왔어요. 검문 문주님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지라 지나 

가는 길에 전해 달라는 말이 있어서요." 

"검문에서 저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는 거죠?" 

"문주님이 한 번 뵙기를 청하셨어요." 

"검문 문주님이 저를요?" 

유설린은 의외의 말을 들은 냥 고개를 갸웃했다. 검문 문주와는 전혀 안면 

식이 없다. 더군다나 강소성(江蘇省)과 호남성은 거리도 가깝지만은 않다. 

특별한 연도 없는데 굳이 만나려고 한다는 건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걸 의미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만날 이유가 없다. 

유설린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하는 찰나에 우문학의 전음이 그녀의 귀 

로 새어 들어왔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대답을 내일로 보류하십시오.] 

순간적으로 들려온 우문학의 전음에 내심 놀랐지만 겉보기에 유설린은 아 

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마치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있 

었지만 그녀는 이미 답을 내리고 있었다. 

"바로 확답은 무리이고 내일쯤 답변을 드리도록 하죠. 그럼 저는 긴 여정 

탓에 잠시 들어가서 쉬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죠. 내일이라면 저도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유설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나 길어질 대화일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간 

단히 끝났다. 아니, 유설린이 그리 되게 만들었다. 우문학에게 이 일에 대 

해 듣기 전에는 함부로 대화를 할 수가 없다. 

검문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 어째서 우문학이 일급으로 분류했는지 지금으 

로서는 이해도 가지 않는다. 우선 우문학과 이야기를 해 봐야 될 성싶다. 

유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운휘도 따라서 움직였다. 막 나가려는 유설 

린의 귀에 우문학의 전음이 재차 날아들었다. 

[거처에 가 계시면 제가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여운휘와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갔다. 

꽤나 사람이 많다. 

여운휘는 악양유가에 사람이 많아졌다고 느꼈다. 자신이 무림맹으로 가고 

나서 일거리가 많아졌다고 들었다. 당연히 오고가는 손님도 많아졌을 테고 

일거리가 많아졌으니 일을 할 손들도 늘어났을 게다. 

세가가 시끌벅적 하다. 

최근 들어 무림맹과 마교의 사이에 차가운 기류가 흐르면서 철의 가격이 대 

폭 올랐다. 철을 생산하고, 가공하여 파는 유가에게 그것은 큰 이문을 남겼 

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정사대전 탓에 세가나 문파들은 병장기들을 재정 

비했고, 당연히 철의 가격이 뛸 수밖에 없다. 

여운휘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문학이 언제 온다고 했지?" 

유설린은 놀란 눈치다. 전음을 들었을 리는 없고, 자신도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유설린은 여운휘의 질문에 대답했다. 

"거처에 가 있으면 금방 오겠다고 하더라. 근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 

데 어떻게 안 거야?" 

"굳이 들어야 아는 건 아니지." 

유설린이 질문을 내일로 미룰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그 

전에 도미진이 검문 문주가 만나자고 했을 때부터 우문학이 무엇인가 전음 

을 넣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예상이 빗나가지 않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왜 이게 일급으로 분류가 된……" 

"쉿." 

여운휘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듯 하자 유설린은 움직이던 입을 멈췄 

다. 주변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다. 분명 둘이서만 알아들을 정도로 작은 

말로 말하고는 있지만 모르는 일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晝話雀聽:주화작청),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한다(夜話鼠 

聽:야화서청). 아무리 작은 목소리라 해도 듣지 못한다는 보장은 없다. 유 

설린도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는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거처의 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은 갑작스러운 유설린의 등장에 황급히 고 

개를 숙였다. 몇 달 정도 자리를 비울지도 모른다고 한 것 치고 너무 빨리 

돌아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군다나 유설린의 옆에 있는 여운휘의 모습도 

그들의 눈을 끌었다. 

현재 악양유가의 최고 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내다. 무림에서 악양유 

가 하면 맨 먼저 나오는 이름이 진군휘가 아니던가. 

"그간 아무런 일도 없었겠지요?" 

"무, 물론입니다, 소가주님." 

"그럼 계속 수고해주세요." 

무인 중 하나가 급히 문을 열어 유설린과 여운휘를 안으로 들어가게끔 했 

다. 

아무리 봐도 저 소가주는 선녀다. 이제는 축 쳐져 버린 자신의 아내와는 비 

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미녀다. 

더불어 그 옆에 있는 저 사내 또한 어디 가도 빠지지 않을 용모다. 더군다 

나 그토록 대단한 무공까지 지녔다고 하니 웬만한 여자들은 한 눈에 반할 

만도 하다. 

'에잉, 끼리끼리 논다더니……' 

내심 무인은 여운휘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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