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37)

산의 밤은 손이 얼어 버릴 정도로 추웠다. 차갑게 몰아 닥치는 바람이 동굴 

안의 온도를 더욱 떨어트려 버렸다. 당장이라도 석상처럼 굳어버린다 해도 

이상한 게 없을 거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 열 명이 넘는 그들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누남천은 이상한 눈으로 여운휘를 봤다. 애초부터 그다지 두텁지 않게 옷 

을 입었던 여운휘가 겉옷마저 벗고 있는 것이다. 소매도 없는 윗옷을 입고 

겉옷은 허리에 묶었다. 지독한 추위 탓에 한 겹이라도 더 입는 것이 마땅한 

데 오히려 그는 그 반대로 행동했다. 

어깨까지 밖에 오지 않는 윗옷을 걸친 여운휘를 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부르 

르 떨릴 정도로 추워 보였다. 헌데 정작 당사자인 그는 다른 사람의 눈은 아 

랑곳하지 않고 검을 허리에 찼다. 

"겉옷은 왜 벗은 거냐." 

"불편해서." 

모용취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리고 그에 여운휘는 귀찮다는 듯 

이 대꾸했다. 아무도 더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도 않았 

다. 

그런 말을 순수하게 믿을 정도로 바보는 이 안에 없다. 

누남천은 여운휘가 막 발을 때는 순간 허리에 묶은 옷이 흔들리는 것을 보 

았다. 왠지 모르게 수상하다. 

'뭐지?' 

움직였으니 허리에 묶어둔 겉옷이 흔들린 것은 당연한 거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자꾸 저 겉옷에 눈이 간다. 그의 말대로 불편해서 묶은 거였다면 아 

예 허리에 동여맸을 거다. 그런데 실상은 옷의 끝 부분을 잡아 당겨 서로 묶 

은 후에 허리춤에 감았다. 

오히려 저렇게 해 두고 다닌다면 거추장스러울 거다. 

의아함은 가득했지만 누남천은 여운휘에게 그 묶은 겉옷에 무엇을 넣었느 

냐 고는 묻지 않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에서 저런 겉옷에 숨기면서 까 

지 가져갈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탓이다. 

'아니겠지. 여기서 무에 가져 갈 것이 있다고.' 

누남천은 고개를 돌리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절벽을 타고 올라가서 상황 

을 살펴야 하는 지금 누남천은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 

모든 일행이 나간 동굴 안에서 혀를 내민 뱀 한 마리가 혀를 내밀고 잠에서 

깨어났다. 

십 삼인 모두 절벽에 바짝 붙었다. 

마음만 먹고 올라간다면 금방이라도 도착할 거리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는 형편이다. 누남천의 몸이 절벽과 바짝 붙었다. 그의 손이 조심스 

럽게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더 걸릴지 모르지만 누남천의 손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위로 움직 

이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따라 그의 몸도 천천히 위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에 우리가 있다는 걸 들키면 바로 죽는다.' 

이야기 할 것도 없다. 이곳에 자신들이 있다는 것이 발각된다면 필사(必死) 

다. 도망칠 곳이 없다. 흑색 기마대로서는 이곳을 지키고 움직이지만 못하 

게 해도 굶어 죽게 될 문제다. 하루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할 테고, 식사도 

하지 못할 거다. 

스스슥. 

누남천의 옷이 절벽의 바위와 맞닿으면서 작은 소리를 냈다. 누남천은 잠 

시 그 자리에 멈춰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작은 소리였지만, 방심할 수 

는 없다. 

숨을 몇 번 몰아쉰 누남천은 아무런 소리가 없자 다시 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가 마침내 지상으로 향했다. 눈까지만 고개를 들어 올 

린 누남천은 사방을 훑었다. 

자그마한 발자국 소리도, 말의 울음소리도, 빛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몸에 

서 나는 땀 냄새까지. 모든 것을 살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확실해 졌다고 

느낀 순간 누남천은 아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절벽에 매달려 있던 나머지 십 이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남천과 다르게 그들은 서둘러 위로 올라섰다. 누남천이야 정찰을 하기 위 

해서였지만 주변에 적이 없다는 것을 안 지금 시간을 버리는 건 오히려 멍 

청한 행동이다. 급하게 위로 올라선 십 삼인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가 일찍 지는 산의 밤이기에 어두울 것 같지만 썩 그렇지만은 않았다. 아 

니, 평소라면 한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울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겨 

울이다. 그리고 땅에 쌓여 있는 눈. 달빛이 눈과 부닥치면서 눈부신 빛을 뿜 

어댔다. 

야광주(夜光珠)를 달은 것처럼, 깊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의 모습이 확 

연히 눈 안으로 들어왔다. 

'좋지 않아.' 

당산희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무섭다. 맘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버리고 싶다. 하지만 독 

지화(毒持花)라는 자신의 별호가, 그리고 살고자 하는 욕망이 그녀를 움직 

이게끔 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만월(滿月:보름달)일게 뭐냔 말이다. 

빛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용이했지만 흑색 기마대의 눈에 띄기도 쉬운 법이 

다. 당산희는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뒤에서 말의 울음 

소리와 함께 흑색 기마대의 창이 자신에게 날아 들 것도 같다. 

그녀는 그 상상을 하는 순간 아찔함에 머리가 핑 돌았다. 

순간 당산희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균형이 무너진 거다. 자신도 모르게 앞 

으로 쓰러지는 찰나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제야 당산희는 정신을 차렸다. 일순 뿌옇게 변해 있었던 시야가 한 순간 

에 밝아졌다. 실수를 한 사실을 안 당산희는 얼굴을 붉히며 뒤를 돌아봤다. 

쓰러지려던 그녀의 어깨를 잡은 것은 여운휘였다. 

"또…… 실수를 할 셈이냐?" 

일전에 흑색 기마대를 발견하고 도망치려던 와중에 당산희가 나뭇가지를 

밟았던 것을 이야기하는 거다. 그 때의 일을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창 

피하기도 해 더욱 얼굴이 붉게 변해 버렸다. 

"우, 웃기지 말아요. 어제 한 실수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번은 달라요. 저 

혼자서도 충분히……" 

"입이 살았군. 멀쩡한 모양이니 달려." 

그녀는 자신의 말을 봉해버린 여운휘를 한 번 노려보더니 다시 달리기 시작 

했다. 잠시 꼼지락 하는 사이에 거리가 조금 벌어졌다. 

'뭐야, 겨우 쓰러지는 걸 잡아 준 거 하나 가지고!' 

당산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날 여운휘에게 패한 이후로 그를 볼 때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패배를 인정하기에는 그녀의 자존심이 너무 

강했던 탓이다. 더군다나 지금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지 않는 

표정도 왠지 모르게 그녀를 화나게 했다. 

…… 아니, 모른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녀 또한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저 사 

내에게 자격지심(自激之心)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보다 강하고, 자신보다 침착하다. 여러 방면에서 자신이 그보다 나은 

것이 없어 보이니 짜증이 치미는 것은 당연한 거다. 더군다나 그녀 만한 자 

존심을 지닌 여인에게야 말해서 무엇하랴. 

꽤나 깊게 쌓인 눈 위를 달려가던 그녀의 귀에 그토록 두려워했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히이잉! 

말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일행 모두의 표정이 변했다. 그들의 발이 한결 

더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 들켰어!' 

말의 울음소리가 한 번 들리는 순간 사방에서 말의 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결코 적지 않은 수가 아니라는 것은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 

다. 귀를 기울인 그녀의 귀에 수많은 말발굽이 땅을 차는 소리가 들려온 것 

이다. 

눈 탓에 제대로 소리가 들리지 않아 거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근방인 건 분명하다. 

"전력을 다해서 달려!" 

더 이상 꺼릴 것이 없다고 생각한 누남천은 목청을 높여 외쳤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들은 무작정 앞을 향해 내달렸다. 눈에 길게 드리워진 

다리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토록 가까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거리는 상당 

히 떨어진 상태였다. 

모두의 머리 속에 순간 과연 저기까지 살아서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서 긴 창 하나가 날아들었 

다. 그리고 그것은 맨 선두에서 달리던 누남천의 바로 앞에 박혔다. 누남천 

은 급히 방향을 틀면서 움직이려 했지만 그 쪽에서도 흑마를 탄 무인 하나 

가 달려들고 있었다. 

누남천은 급히 검을 휘둘러 검기를 날렸다. 노리는 것은 무인이 아닌 그가 

타고 있는 흑마였다. 벨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인의 창대가 기이하 

게 휘더니 검기를 쳐냈다. 그리고 변함 없는 속도로 누남천을 향해 창을 내 

질렀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누남천은 움찔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창대가 그의 옆 

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피가 솟구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의 돌격에 

그는 상처를 돌볼 틈도 없이 무작정 옆으로 몸을 날렸다. 

간신히 옆으로 몸을 피한 그의 눈에 그 무인의 가슴에 써져 있는 숫자가 보 

였다. 

백(百). 

'배, 백부장!' 

백부장이라면 흑색 기마대에서 그들의 우두머리를 제외한다면 최고의 고수 

가 아닌가! 누남천은 달리는 말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옆으로 비켜 나간 

그와 그대로 달린 무인. 그것도 말까지 탔다면 결과야 뻔하다. 

바로 뒤에서 따르던 설혜주를 향해 그 무인은 창대를 내리 꼽았다. 

'막을 수 없다!' 

누남천은 자신이 휘두른 검이 허공을 긋는 순간 느껴버렸다. 저 무인을 막 

을 만한 자는 지금 자신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막을 수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그 녀석이 있다!' 

창대가 막 설혜주의 가슴을 관통하려는 찰나 그녀의 옷깃을 뒤로 잡아당기 

며 누남천이 떠올렸던 사내가 검을 움직였다. 

창은 검에 막혀 옆으로 비켜 나갔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운휘는 말 위에 

있는 무인을 향해 발을 뻗었다. 왼발로 균형을 무너트리고 바로 오른발을 

움직이던 여운휘의 발을 흑색 기마대의 무인이 움켜쥐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패대기칠 듯이 여운휘를 들어 올렸다. 말 위에서 아래를 

향해 여운휘를 내려치는 순간, 여운휘의 다른 쪽 발이 그의 목덜미를 감았 

다. 

"흡!" 

투구 안에서 사내의 건장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운휘의 다른 발 또한 

재빠르게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균형을 무너트렸다. 몸을 비튼 탓에 그는 

버티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같이 말에서 떨어져 내리면서 여운휘는 빠르게 비수를 던졌다. 일전에 흑 

색 기마대 중 하나를 죽였던 수법과 비슷했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 못했 

다. 

눈을 파고들려던 비수를 향해 그가 손을 내 뻗은 것이다. 손을 들어 올려 눈 

을 막은 그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등뒤에 있는 창을 꺼내 들었다. 

창 끝이 떨리더니 갑작스럽게 여운휘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여운휘 

는 정확하게 계산을 하고 움직였다. 창날을 확실하게 피했다고 느낀 순간 

창대가 낭창낭창 휘어졌다. 

휘익! 

급하게 고개를 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눈이 베였을 게다. 창 

은 여운휘의 눈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더불어 이마에 생긴 얇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여운휘는 상대가 예전에 상대했던 자들과는 다 

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여운휘는 상대의 가슴에 붙어 있는 무늬를 보았다. 

'흑색 기마대의 백 명을 이끄는 자.' 

결코 그 실력이 일전에 상대했던 흑색 기마대와 같았을 리가 없다. 그들은 

군인으로 치자면 하찮은 병졸이었고 지금 이 사내는 장군인 셈이다. 그것 

도 대장군의 바로 직속의. 여운휘는 일행들을 향해 소리쳤다. 

"먼저 가시오!" 

움칫했지만 일행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여운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자를 베고 금방 쫓아갈 테니 가시오. 혼자가 더 도망치는 데 편하오." 

"알겠다. 그리 하지." 

일행들을 대표해서 누남천이 나섰다. 여기서 이렇게 얼쩡거려봤자 좋을 거 

하나 없다. 이렇게 뭉쳐 있다면 모든 흑색 기마대의 무인들이 이곳으로 향 

할 것 아닌 가. 차라리 이렇게 두 패로 나누어지는 것이 오히려 나은 방법일 

지도 모른다. 

누남천이 여운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빨리 따라 와야 한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누남천은 말을 마치며 급하게 손짓으로 뒤에 있는 무인들도 따르게 했다. 

남궁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잠시 여운휘를 바라봤지만 그 또한 곧 앞에 

서 달리고 있는 누남천을 따라 움직였다. 

무인은 창대를 세워들고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강철 투구처럼 굳건하게 닫혀 있던 사내의 입이 열렸다. 그 목소리는 무척 

이나 낮았다. 

"용기가 가상하군. 일행을 보내고 혼자 나와 대적하려 하다니." 

"웃기는 소리하는 군. 내가 그들을 보낸 것을 그들을 위해 라고 생각하나?" 

일행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여운휘의 기도가 일순 변했다. 검을 잡고 서 

있는 모습도 바뀌었고, 눈빛도 바뀌었다. 주변을 훑고 지나가던 차가운 바 

람마저도 여운휘를 피해 가는 듯 했다. 

이 자가 휘두른 창에 여운휘는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그 공격 하나로 여운 

휘는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베려고 한다면 벨 수는 있다. 하지 

만 그냥 싸우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그래서 일행들을 보냈다. 그건 

지금 자신이 써야 할 힘을 보여서는 안 되는 탓이다. 

이 검법은 지금 아무에게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검을 쥔 여운휘가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넌 죽어." 

"미쳤군. 나는 흑색 기마대의 백부장 중 하나로……" 

"네 놈이 누구라 해도 변하지 않아. 내가 이 검법을 쓰는 한…… 넌 죽는다." 

필살(必殺)의 검법이다. 쓰는 한 반드시 상대를 죽여야 한다. 

여운휘의 눈빛이 한없이 차갑게 변했다. 그건 지금 이 산을 얼리고 있는 차 

가운 바람보다도 더욱 차가웠다. 여운휘의 검이 기염(氣焰)을 토해냈다. 

그의 손에서 오행검법이 펼쳐졌다. 

흑색 기마대의 백부장의 눈이 꿈틀했다. 갑옷으로 두른 온 몸에서 뭔지 모 

를 소름이 끼친다. 갑자기 변한 기도, 폭풍처럼 몰아치는 바람. 모든 것이 

자신의 앞에 있는 저 사내에게서 뿜어지는 기분이다. 

백부장은 날아드는 검을 몸을 낮춰서 피해냈다. 갑옷을 입은 탓에 움직임 

이 더딜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어깨로 여 

운휘의 몸을 박으려고 했던 백부장은 머리를 울리는 충격을 받고 뒤로 네 

댓 걸음 서둘러 물러났다. 

안으로 파고드는 순간 무릎으로 찍어버린 거다. 투구를 쓰고 있었거늘 머리 

가 울린다. 뇌가 강한 충격에 흔들린 기분이다. 백부장은 피가 섞인 침을 뱉 

어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채 잇기도 전에 여운휘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엄청난 쾌검이다. 

백부장은 황급히 뒤로 움직였다. 검을 본 것이 아니다. 검이 움직이는 순간 

그저 따라서 뒤로 물러났다. 검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다고 생각하면 될 

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검은 자신의 갑옷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도 갑 

옷과 갑옷의 이음새 사이만 노리고 있다. 

갑옷 위를 공격한다면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달려들겠는데 그것 

도 아니다. 이음새 사이라면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은 기본이고 생명까지 

지장을 받을 거다. 

검이 갑작스럽게 변했다. 

하늘에는 수많은 나비가 그려졌다. 빠르던 검이 현묘(玄妙)한 변화를 보이 

며 이번에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셀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백부장은 급히 창을 휘둘렀다. 창에서는 하얀 색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부 

웅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창이 나비의 형상을 베어 버렸다. 

카카캉! 

팔이 떨어지는 기분이다. 피하지 못한 나비들이 내려앉은 곳에서 피가 터 

져 나왔다. 

'무, 무엇이냐! 이건!' 

말도 안 된다. 이건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 이런 검법을 펼칠 수 있 

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음새 사이사이에서 터져 나온 피가 갑옷을 

붉게 적셨다. 

흑색 기마대 중에서도 서열 십 위 안에 드는 자신이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 

하고 이토록 밀리고 있다. 검조차 받아내지 못하고 있는 건 수치다. 

"크아압!" 

백부장은 힘이 빠지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창 끝이 수십 개로 변했다. 그 

리고 그 창 끝들은 전신 요혈을 노리고 여운휘에게 날아들었다. 검 끝에서 

하얀 색 기운이 터져 나왔다. 수십 개의 기운들이 당장에 하늘이라도 박살 

낼 듯이 휘몰아쳤다. 

'제길! 제길! 제기랄!'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숨이 가빠졌다. 그 

래도 멈출 수는 없다. 이음새 사이사이에 난 상처가 벌어지면서 더욱 많은 

피를 토해냈다. 

알고 있다. 자신의 몸이 제 상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지금 당한 상처는 

저 사내에게 처음 당한 게 아니다. 얼마 전 무림맹의 수뇌부 중 하나였던 탈 

백검 장명이라는 자와 싸웠을 때 그는 어깨를 베였다. 

그의 현란했던 검무(劍舞). 아직도 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수십 기의 기마대 안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던 그 모습을 어찌 그리 쉽게 잊 

겠는가. 

그때 당했던 상처가 다시 이 사내로 인해 벌어져 버렸다. 흐려지려는 눈을 

백부장은 최대한 부릅떴다. 흑색 기마대의 백부장이 갓 약관을 지난 듯한 

알지도 못하는 무인에게 질 수는 없다. 

창을 휘두르면서 기회를 엿보던 그의 눈에 여운휘의 옆구리가 보였다. 그 

부분에서 빈틈을 발견한 것이다. 빈틈을 발견한 이상 망설임 따위는 없다. 

파악! 

위쪽을 집중 적으로 찌르던 창이 방향을 비틀며 옆구리를 향해 떨어졌다. 

그때 여운휘는 앞으로 움직였다. 창대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흘렀고, 여운휘 

는 그것을 옆구리에 껴 버렸다. 

창이 봉쇄됐다. 

'이런!' 

급히 창을 놓고 물러나려고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창을 앞으로 밀기 

까지 했다. 그런데 이미 다가온 검을 자신의 눈을 찔러버렸다. 

"아악!" 

눈을 감싸 안으며 백부장은 뒤로 물러섰다. 앞이 갑자기 보이지 않으니 그 

공포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순간적인 공포 탓에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그 

는 흑색 기마대의 무인이다. 결코 약한 무인이 아니라는 거다. 

공포는 잠시, 정신을 차린 그는 서둘러 여운휘가 어디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멀쩡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보이지…… 않아.' 

어디 있는지 여운휘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가슴 

쪽에 충격이 일었다. 

"크……" 

가슴뼈가 함몰 됐다. 숨을 쉬기도 힘들다. 입을 통해 피가 쉬지 않고 쏟아 

져 내렸다. 버티려는 듯이 가슴을 움켜쥐었지만 버틸 수가 없다. 

이 단단한 갑옷을 뚫고 충격을 줬다. 이건 분명 주먹을 이용한 공격이다. 주 

먹으로 이 두터운 갑옷을 부수면서 가슴뼈까지 함몰 시켰다? 그건 아닐 거 

다. 

'격산타우(隔山打牛)……' 

쓰러진 그의 입에서 피가 다시 흘러 나왔다. 숨은 점점 가빠졌고 눈도 흐려 

졌다. 

믿을 수가 없다. 저런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내가 격산타우의 수법을 

썼다니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격산타우란 어떤 물체에 힘을 가해 그 뒤에 있는 대상에 타격을 입히는 발 

경법의 하나다. 믿을 수가 없었기에 그는 눈조차 감지 못했다. 백부장의 눈 

은 멀어져 가는 여운휘의 등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막을 수 없었던 그 검법도, 그리고 격산타우라는 발경법도. 

그는 마지막 남은 생명을 쥐어짜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런 건…… 말도 안 된다고……" 

여운휘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흑색 기마대 

의 백부장의 고개가 완전히 떨구어져 있다.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손이 갑 

옷에 닿는 순간 여운휘는 상대가 어떻게 될지 알아 버렸다. 

죽은 상대에게 더 이상 시간을 할애 할 생각은 없다. 더군다나 사방에서 들 

리는 말발굽 소리를 보아 점점 이쪽으로 많은 자들이 모이고 있다. 귀찮게 

그들까지 모두 상대할 마음은 없다. 

여운휘는 미리 달려간 일행들이 향했던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아까 전보다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 정도 속도를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여운휘는 천천히 움직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걸림돌이 없 

었기에 그는 본연(本然)의 실력을 내면서 경공을 펼칠 수 있었다. 

일행을 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산 위에 찍혀 있는 발자국은 그들이 

간 방향을 알려줬다. 그리고 그 위에 겹치듯이 있는 말발굽의 모습. 

여운휘는 달리면서 검을 빼들었다. 지금 바짝 쫓기고 있거나 아니면 벌써 

조우해서 접전을 벌이고 있을 거다. 

'귀찮게 됐군.' 

숫자를 보아하니 한둘이 아닐 거다. 다른 방향에서 올 자들까지 생각한다 

면 최소 열 명 이상이다. 금방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 

갔다. 여운휘가 혹시나 자신이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아닐까 하는 순간 자신 

이 건너려고 했던 다리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더불어 여운휘의 눈에 수많은 말과 그 안에서 싸우고 있는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누남천의 활약 탓인지 일행은 어느 정도 버티면서 그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미 말에서 떨어진 흑색 기마대의 무인의 수도 숱하게 보였다. 다리 부근 

에도 흑색 기마대가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로 앞이 다리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흑색 기마대에 막혀 옴짝달싹 못하 

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나타난 여운휘는 밖에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검에서 하얀 검광이 일었다. 그가 밖에서 나타나 검을 휘두르자 흑색 

기마대의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쪽에 있던 일행들은 그 기회 

를 놓치지 않았다. 

안과 밖에서 몰아치니 흑색 기마대는 일순 혼란에 빠져 버렸다. 하지만 그 

들 또한 숱한 전투를 해왔던 자들답게 곧 능숙하게 대처하기 시작했다. 창 

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한 사내의 가슴을 관통했다. 

"커헉!" 

건곤대의 생존자 중 한 명이 흑색 기마대 한 명의 창에 목숨을 잃고 나뒹굴 

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격에 일행들은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누남천의 옷은 이미 피로 물들어 버렸다. 얼굴에는 땀과 비가 범벅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숱하게 베었거늘 그 수가 줄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많 

아지는 느낌이다. 이제는 십부장들까지 나타나 가세를 하는 바람에 전투는 

더욱 힘들어 졌다. 

백부장이 나타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만 같았다. 

'백부장까지 나타나면 더 이상 길이 없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그의 앞에 여운휘가 나타났다. 

여운휘는 한 번 힐끔 그를 바라본 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을 움직이 

면서 그의 입도 덩달아 움직였다. 

"다리 쪽으로." 

여운휘의 말을 누남천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비틀었다. 그가 길을 뚫고 뒤에서 여운휘가 달려오는 무인들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막고 있었다. 

피가 산에 있는 하얀 눈을 붉게 물들였다. 죽은 건 흑색 기마대뿐만이 아니 

었다. 건곤대의 생존자 여섯 중에 셋은 이미 죽었고, 하나는 제대로 운신하 

기조차 힘든 중상이다. 간신히 업혀서 움직이고 있는 그 조차도 금방이라 

도 목숨이 떨어질 것 같았다. 

무림맹에서 온 그들 또한 그다지 멀쩡한 건 아니었다. 

특히 제갈군의 부상은 심했다. 오른쪽 다리가 창에 찔렸는지 그의 허벅지 

는 피투성이였다. 늘 하얀 옷만 입는 제갈군의 하의가 피 때문에 붉은 색으 

로 변해 버렸다. 그는 숨까지 가빠진 상태였다. 절뚝거리면서 간신히 움직 

일 수나 있는 형편이었다. 

다리 근처까지는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가 또 문제였다. 

"어서 건너지 않고 뭐 하는 겁니까!" 

모용취가 다리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누남천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 또 

한 어깨에 당한 부상이 꽤나 심했다. 치료를 하지 않는다면 출혈 과다로 죽 

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누남천이 조용히 일행을 둘러봤다. 

"이곳을 모두 건너갈 수는 없네." 

모용취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 급한 때 무슨 장난이십니까! 서둘러 건너야지……" 

"그럼 다리는! 이 다리를 잇고 있는 이 밧줄은 누가 자를 테냐?" 

그 말에 모용취는 멈칫 해 버렸다. 중요한 사실을 하나 잊고 있었다. 그저 

도망만 간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곳에서 그냥 도망을 간다면 흑색 기마대의 무인들이 뒤를 쫓을 거다. 물 

론 먼저 건넌 후에 다리를 자르면 그들은 모두 아래로 떨어져 죽을 거다.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 좋으랴.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라는 게 문제다. 자 

신들이 이 다리를 건너는 사이에 그들이 다리를 그냥 놔둘 리가 없다. 줄만 

자르게 된다면 그 위에 있던 자신들은 모두 저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 

박질 칠 게 분명하다. 

모용취는 꿀꺽 침을 삼켰다. 결론은 이곳에 한 명이 남아야 한다는 거다. 그 

리고 그 사람은 물어보나 마나 죽음은 면치 못한다. 

그때 누남천이 입을 열었다. 

"내가 남겠다. 너희들은 모두 다리를 건너거라." 

"안 됩니다 어르신! 대인은 우리 무림맹에 반드시 필요하신 분입니다! 차라 

리 제가!" 

검을 휘두르면서 흑색 기마대를 막던 남궁진이 그 말을 들은 모양이다. 그 

는 검을 말에 박아 넣으면서 말을 그쳤다. 누남천은 남궁진의 뒷모습을 바 

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저 사내를 볼 때마다 그 녀석이 생 

각이 난다. 

그 녀석이 여기에 있었다면 저리 말했을 거다. 자신이 하겠다고. 

누남천은 남궁진이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안 된다. 그저 이곳에 있기만 해서는 안 되지. 저들을 막을 수 있는 실력이 

어야 해. 미안하지만 너는 저들을 일행 모두가 건너갈 때까지 막을 수 없 

어." 

남궁진은 그 말에 검을 휘두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힘이 부족함 

에 눈물이라도 뿌리고 싶은 기분이다. 

"그러니 내가 남아야지. 안 그렇겠는가? 그럼…… 어서들 가게!" 

누남천은 다리 바로 옆에 서서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씩 누남 

천의 옆을 스쳐지나가 다리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모용취는 가볍게 고개 

를 끄덕였다. 설혜주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누남천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내달렸다. 당산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 

만 그녀 또한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한 명, 한 명씩 뒤로 빠져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누남천의 부담이 커져 가 

기 시작했다. 싸우는 자들의 수가 줄어드니 점점 사방에 적들이 늘어나고 

있다. 

백서립은 제갈군을 업고 내달렸고 급기야 전장에는 세 명의 무인만 서 있었 

다. 

"그 다음엔 남궁진 가게!" 

남궁진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뒤로 성큼 물러섰다. 누남천은 옆을 지 

나가는 남궁진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옆을 스쳐지 

나 가는 순간 누남천이 그를 향해 말했다. 

"그거 아나? 넌 말이야 내 가장 소중했던 지기와 많이 닮았어. 결코 그 의기 

를 꺾지 말게." 

누남천의 말에 남궁진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다리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 

다. 맨 처음 출발했던 모용취는 이미 건너편에 도착한 상태였다. 

누남천은 마지막으로 여운휘를 바라봤다. 여태까지 본 약관의 무인 중에서 

최고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사내다. 

"자네도 어서 가게!" 

여운휘는 검을 휘두르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장소가 협소하다 

고 생각했는지 흑색 기마대의 무인들의 대부분은 말에서 내려와 창을 휘두 

르고 있었다. 숫자는 대략 이십 여 명이다. 

누남천은 여운휘가 다리에 와서도 검만 휘두르자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 

봤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여운휘의 입이 열렸다. 

"가시오." 

"뭐……?" 

"내가 막을 테니 가란 말이오." 

"이곳에서 너 같은 뛰어난 후기지수를 죽음으로 몰 수는 없다! 어서 가라!" 

"바보요? 누가 죽는다고 했단 말이요?" 

창이 막 여운휘의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여운휘의 가슴에 채 

닿기도 전에 상대의 몸이 뒤로 밀려나 버렸다. 여운휘의 손에서 뻗어져 나 

간 장력이 그의 가슴을 쳤다. 갑옷이 안으로 함몰되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다면……" 

"살 방법이 있으니 귀찮게 하지말고 어서 가시오. 당신이라면 나에 대해서 

알 텐데? 난 아직 죽을 마음이 없다는 것을." 

누남천은 말을 마치면서 연신 손과 발을 움직이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도대 

체 무슨 수가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누남천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 

이 이렇게 있는 것이 여운휘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탓이다. 

"그럼 약속대로 반드시 와야 하네." 

여운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어느새 누남천의 앞으 

로 가 길을 막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행동 하나에 누남천은 자신도 모 

르게 모든 걱정을 떨쳐 버렸다. 이 사내가 한 말이라면 결코 허튼 말은 아 

닐 거라는 생각이 머리에 각인 된 탓이다. 

누남천은 몸을 날렸고 여운휘는 다리의 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누남천은 있는 힘을 다해 경공을 펼쳤다. 최대한 자신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그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탓이다. 

여운휘는 힐끔 뒤를 바라봤다. 누남천이 거의 다리 끝 부분까지 도달했다. 

누남천을 지금 죽게 할 수는 없다. 단순히 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이런 행 

동을 취한 게 아니다. 누남천은 자신과 무림맹을 잇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 

런 자를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힘들겠어.' 

조금 벅찰 거다. 다리가 떨어져 내리는 속도를 계산해 본다면 세 번의 도약 

으로 저곳까지 도달해야 한다. 여운휘는 완벽하게 누남천이 다리 건너로 

간 것을 확인하는 순간 검에 내공을 쏟아 넣었다. 

"하압!" 

여운휘는 힘차게 검을 휘두르고는 뒤도 보지 않고 다리 위를 치달리기 시작 

했다. 채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흑색 기마대의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 

다. 반대편에서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일행의 모습이 언뜻 여운휘의 

눈에 스쳐지나갔다. 

여운휘는 검을 들어 올려 앞에 있는 밧줄을 잘라냈다. 꽤나 두터웠지만 검 

기를 이용하니 잘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다리가 균형을 잃고 아래로 무너 

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누남천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빠져 나오 

고 말았다. 

"안 돼!" 

이곳과 저곳의 거리는 언뜻 봐도 삼십 여 장에 달한다. 이 정도 거리를 도약 

하는 건 강호십일객의 일마라 해도 가능할까 말까 하는 문제다. 

그 순간 여운휘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의 몸은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십여 장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발을 구른 여운휘의 몸이 또 다시 십여 

장 앞으로 쏘아졌다. 

순식간이었다. 다리가 무너지는 속도보다 여운휘의 도약 속도가 더욱 빨랐 

다. 다시 한 번 끝 부분을 밟는 순간 여운휘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쳇!' 

무너지는 순간 밟는 바람에 제대로 힘을 주지 못했다. 여운휘는 손을 뻗었 

다. 

여운휘의 모습을 보고 있던 일행들은 처음엔 놀랐고, 곧 경탄했다. 엄청난 

경공이다. 단 한 번의 발구름으로 십여 장을 이동한다. 그런 그들의 경탄은 

곧 비명으로 바뀌었다. 마지막 도약을 했던 여운휘의 몸이 거의 다 와서 절 

벽 아래로 사라진 것이다. 

"아악!" 

"군휘!" 

남궁진은 여운휘의 이름을 부르며 절벽 근처로 내달렸다. 모두가 놀란 눈으 

로 그저 절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앞으 

로 달리던 여운휘가 다리를 자신의 검으로 자르고 세 번의 도약으로 근처까 

지 다가왔다. 

움직임으로 보고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와서 절벽 아 

래로 몸을 감춘 것이다. 모두가 멍하니 절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작스럽 

게 머리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이, 이! 망할 녀석!" 

남궁진은 무릎을 꿇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여운휘 

의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쏟아 버렸다. 

절벽 근처로 달려갔던 남궁진은 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고 위로 끌어 당겼 

다. 절벽 위로 올라온 여운휘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옷을 툭툭 털었 

다. 

"괜찮은가?" 

"멀쩡하다." 

보고 있던 그들의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거늘 당사자인 여운휘는 아무 

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그의 놀라운 경신술과 경공에 일행들은 할 말을 잃 

고 있었다. 

"사, 살았다……" 

설혜주는 자리에 철퍽 주저앉았다. 다리가 없어진 지금 저들이 이곳까지 쫓 

는 건 불가능하다. 다른 쪽에도 다리가 없다는 보장은 할 수 없지만 결코 가 

깝지는 않을 거다. 

모용취 또한 자리에 앉아 자신의 상처를 지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눈 

은 여운휘에게 향해 있었다. 상처를 치료하고는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그에 

게 쏠렸다. 저토록 대단한 무위를 봤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누운 채로 백서립에게 상처를 치료받고 있던 제갈군이 여운휘를 보면서 입 

을 열었다. 

"자네 정말 대단하이! 인간이라고는 믿어져지지 않을 정도란 말이야! 아 

야!" 

제갈군은 여운휘의 신위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 움직이다가 상처 

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놀람은 멈출 지를 몰랐다. 

누남천은 여운휘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네 덕분에 이 늙은 목숨 조금 더 살게 되었군. 고맙다고 해야 할까? 하지 

만 말이야…… 음?" 

막 여운휘에게 앞으로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하려던 누남천은 탄성을 토해 

내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은 건너편을 향하고 있었다. 

"어르신 왜 그러십니까?" 

남궁진은 갑작스럽게 표정이 변한 누남천을 보며 불안한 감정을 담고 물었 

다. 누남천의 눈은 여전히 건너편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건너편 

을 가리켰다. 

"저기 말이야 유독 큰 흑마를 타고 있는 자가 보이는 가?" 

"잘은 보이지 않지만 형체는 어느 정도 보입니다." 

"가슴에 흑(黑)자가 새겨져 있네." 

"흐, 흑자라면 흑색 기마대의 우두머리의 가슴에 붙는 무늬 아닙니까." 

"그래. 이곳에 저자도 있었다는 소리로군. 우리는 운이 좋았던 모양이야." 

여운휘 또한 누남천이 가리킨 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흑색 갑옷을 입고 

있고 가슴에는 잘은 보이지 않지만 흑이라는 글자가 분명히 새겨져 있었 

다. 그런데 그 자는 창을 들고 서 있었다. 

"흐음, 물러나는 군." 

그 쪽에 관심을 주고 있던 누남천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뒤로 물러섰던 흑 

마가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누남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자의 손에 있던 창이 직선으로 날아왔 

다. 여운휘는 몸을 비틀고 내달렸다. 그의 몸이 당산희에게 날아갔다. 

당산희는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다가 여운휘가 갑자기 자신에게 달려들자 

움찔했다. 

"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운휘는 그녀를 안고 앞으로 움직였다. 

콰아앙! 

그녀가 있던 바로 옆자리에 틀어박힌 창 때문에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모 

두 쓰러져 버렸다. 당산희는 처음엔 자신을 갑작스럽게 안은 여운휘를 뺨이 

라도 한 대 올려붙이려 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봐 버리자 그녀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여운휘는 그녀를 팽개치다시피 내려놓고는 건너편을 바라봤다. 거대한 흑 

마에 몸을 싣고 있는 자의 눈 또한 왠지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여운휘는 생 

각했다. 

이 먼 거리까지 창을 내던졌다. 그것도 힘도 잃지 않은 채로 말이다. 말의 

힘이 더해졌다고는 하지만…… 

"괴, 괴물이군." 

누남천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재차 이런 공격이 들어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곳에 있을 마음이 사라진다. 

"조금 힘들더라도 이동을 하도록 하지. 어서들 서두르게." 

모두가 그 생각에 동의했는지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걷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맨 뒤에 서서 건너편을 바라봤다. 그 자 또한 아직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말을 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우게 된다면……' 

방금 전 날아든 창을 생각하니 여운휘는 자신도 모르게 몸에 소름이 돋았 

다. 

생전 처음 상대의 강함에 경탄했다. 이토록 상대에게서 공포를 느껴 보기 

는 생전 처음이다. 

'재밌군. 네 놈은 반드시 죽는다. 바로 나에게.' 

여운휘는 몸을 돌려 일행들이 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음을 틈탄 도주는 성공했다. 

몇 명의 목숨이 떨어졌고, 대부분이 부상을 입었지만 그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서 그곳에서 벗어 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될까. 

그 정도로 흑색 기마대의 위명은 대단했다. 

제갈군은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 봤다. 약간만 옆이 찔렸다면 평생 앉은뱅 

이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게다. 다리를 찔리는 순간 그는 죽음을 직감했다. 죽 

을 거라고, 이곳에서 결코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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