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 개입된 일인지는 몰랐다. 알았다면 오지 않았으리라.
그렇지만 너무 늦은 후회였다. 후회를 할 시간에 한 발자국 더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죽을힘을 짜내서 달렸지만 말의
움직임은 보통이 아니었다. 산이라 속도가 떨어졌다고는 하나 벌써 다섯
명 가량이 지척까지 따라 붙었다.
눈이 내린 탓에 움직임이 느려졌고, 흑마들 또한 훈련이 제대로 된 말답게
산에서도 민첩하게 움직였다.
여운휘는 달리면서 뒤를 힐끔 바라봤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긴 하
지만 이 속도라면 금방 따라잡힐 거다. 여운휘는 여유가 있었다. 강한 자라
도 지금 이곳에서는 자신이 더 유리하다. 말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창
이 길기에 나무가 많은 산에서는 움직임이 불편하다. 더군다나 실력도 자신
이 위일 테니 승산은 자신에게 있다.
물론 뒤에 따라붙는 자들까지 가세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테지만, 최소한
지금만큼은 승산이 있다.
"제길 낭떠러지!"
누남천은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아무런 방향을 잡고 치달렸거늘 하필이면
낭떠러지가 있는 곳을 향한 모양이다. 방향을 뒤로 틀고 내달려야 하거늘
그곳에는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흑색 기마대가 있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지금 앞으로 가면 사방이 낭떠러지기일 거
다. 살려면 뒤로 돌아서 가야만 한다. 비록 저 뒤로 바짝 붙은 다섯 명이 있
긴 하지만 그 정도는 이기는 데 무리가 없다. 그저 그 다섯을 해결하는 동
안 다른 자들이 길을 막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저 녀석들을……!"
누남천이 다섯 명의 흑색 기마대를 향해 검을 날리라고 하려는 순간 이미
여운휘의 몸이 공중으로 떴다. 여운휘는 뒤가 아닌 앞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나무 기둥을 발로 찬 그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옆쪽에 있는 나무를 재차 발로 찬 여운휘의 몸이 순식간에 흑색 기마대의
맨 앞에 있던 무인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자신의 앞에 올라탄 여운휘를 보
며 무인은 순간 당황해버렸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자가 자신의
앞에 있다.
그는 서둘러 허리에 있는 소도를 꺼내려 했다. 창으로 이렇게 붙어 있는 자
를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소도를 꺼내기도 전에 여운휘의 검이
투구 사이에 드러난 그의 입에 박혔다.
"크, 크륵!"
이상한 비명을 지르면서 그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순간 양쪽에서 스
쳐지나가던 두 명의 흑색 기마대의 창이 여운휘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여운휘가 급히 고개를 숙이자 그 창은 입에 검을 관통 당했던 무인의 목을
날려버리고 지나갔다. 스쳐 지나는 말 두 마리, 여운휘의 검이 오른쪽으로
날아가 마갑을 쓴 말의 드러난 부분을 찔렀다.
말은 비명을 토해내며 그대로 곤두박질 쳐버렸다. 길이 내리막길이었던 탓
에 무인 또한 말에서 떨어지면서 굴러버렸다. 목이 꺾여 버렸다. 완전히 꺾
여 버린 목을 보아하니 즉사임이 분명하다.
여운휘는 말에 검을 찔러 넣기가 무섭게 목이 잘려 버린 시체를 말 아래로
밀어냈다. 그리고 여운휘는 말등을 차고 왼쪽에 있던 흑색 기마대의 무인
을 향해 발을 뻗었다. 여운휘를 주시하고 있던 그는 창대를 들어 올려 공격
을 막아냈다.
"크윽!"
창대가 밀려나면서 균형이 무너졌다. 막았는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대단한
충격을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는 놀라서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하
지 못했다. 아니, 이미 땅으로 떨어졌으니 방심했다고 해야 옳다.
그런데 발로 창대를 걷어차고 떨어져 내리던 여운휘의 소매 속에서 비수
한 자루가 빠져 나왔다. 쏜살 같이 터져 나간 비수가 그 무인의 왼쪽 눈에
틀어 박혔다.
"아악!"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감싸 안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 무너졌던 균형
탓에 결국은 말에서 떨어져 버리고야 말았다.
"끄, 끄응……"
죽지는 않았지만 기절을 한 모양이다. 신음소리를 한 번 토해낸 그는 더 이
상 움직이지 못했다. 여운휘는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 두 마리가 지축을 울리면서 여운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두 무인
의 손에서 검은 색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꿰뚫으려는 듯이 창
은 검은 색 빛을 뿜었다.
여운휘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말을 향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죽으려고 하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던 여운휘는 말이 손에 닿
을 듯이 가까워지는 순간 다리를 움직였다.
발등 위에 올려 있던 방금 전 쓰러졌던 무인의 창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여
운휘는 그 창을 그대로 잡은 뒤 몸을 약간 굽히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창이 길었던 탓에, 그리고 여운휘를 노렸던 두 무인의 움직임 탓에 창대 하
나에 두 흑마의 다리가 걸려버렸다. 두 마리의 흑마는 앞으로 꼬꾸라졌고,
그 위에 타고 있던 두 무인은 공중으로 솟구쳤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여운휘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들은 여운휘를 따라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
방이 말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말발굽이 당장이라도 자신들을 짓누를 것
만 같았다.
모용취는 진정으로 놀라버렸다. 다섯 명의 흑색 기마대를 처리하는 데 걸
린 시간은 정말 눈을 몇 번 깜빡거릴 정도의 시간이었다. 마치 짜여져 있는
괴뢰사(傀儡師)의 연기를 보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저 사내가 짜 놓은 대
로 움직인다고 느껴질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처리. 설령 그 누구라 해도 지금 저 사내처럼 완
벽하게 끝내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놀란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누남천, 당산희, 제갈군, 설혜주, 남궁진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 저토록 완벽한 움직임은 사전에 이렇게 하라고 했다고 해
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여운휘가 검을 휘둘렀다.
카앙!
날아든 창의 창대가 여운휘의 검과 부닥치며 옆으로 빗겨나갔다. 앞에서는
세 마리의 말이 여운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짓밟으려는 듯
이 말은 맹렬하게 달려 들어왔다. 여운휘는 검을 쥐었다. 그리고 남궁진과
누남천이 그의 옆으로 따라 붙었다.
삼대 삼.
여운휘는 가운데에 있는 말을 향해 몸을 날렸다.
'벤다.'
흑마는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 기세는 가히 산을 짓누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런 말을 향해 여운휘의 몸이 번개처럼 다가갔다. 당장이
라도 말굽에 치여 날아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말의 숨이 가빠졌다. 그리고 말 위에 있던 자는 여운휘와 거리가 가까워지
자 창을 뻗었다. 창은 커다란 파공음을 터트리며 여운휘의 가슴을 터트릴
것 같이 다가갔다.
여운휘는 몸을 비틀어 말굽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창대를 움켜쥐었다. 그리
고 내공이 실린 다리를 들어 말의 옆구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순식간에 발
이 허공을 메우며 환영을 만들어 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스무 번에 달하는
발차기가 말의 옆구리에 박혔다.
말의 옆구리가 움푹해지더니 흑마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마치 혼이 빠져
나간 것처럼 말은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말의 입으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보이지는 않지만 내장이 모두 터져 버린 거다.
말이 쓰러지자 흑색기마대의 무인은 말에서 뛰어 내리며 재빠르게 몸을 비
틀며 검을 휘둘렀다. 검이 여운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여운휘는 잡고
있던 창대를 옆으로 잡아 당겼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무인은 자신 또한
강하게 창을 움켜쥐었다.
여운휘가 발을 내뻗는 순간 그는 검을 든 손으로 여운휘의 발을 내리쳤다.
검병으로 여운휘의 발을 쳐내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손을 움직이는 순간
그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손을 움직이는 순간 여운휘가 창대를 잡아당긴
것이다.
"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는 순간 발이 정확하게 복부에 틀어박혔다. 갑옷
을 입고 있었다. 온통 검은색 일색인 갑옷을 말이다. 하지만 여운휘의 각법
은 말의 내부를 모두 박살 내 버릴 정도로 위협적이다.
상대는 그걸 경시했다.
퍼억!
갑옷이 뭉그러졌다. 사내의 발에 그 단단하고 견고한 갑옷이 움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맞는 순간 몸이 공중으로 떴다. 그리고 땅이 발에 닿는 순
간 그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채 여운휘를 올려다보던 그의 입가를 타고 선혈(鮮血)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그게 그 무인의 마지막이었다.
고개를 떨군 무인을 본 여운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남천 역시 막 상
대를 제압한 상태였고, 남궁진은 다른 자들의 도움으로 쉽게 상대를 제압
한 모양이었다.
뒤에서 울리는 말소리를 들으며 일행들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는 탓에 걷는 것이 수월치 않다. 더군다나 흔적을 남
기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상대들 또한 그다지 좋은 형편
은 아닐 거다. 하지만 그들은 말을 타고 있다. 눈이 와서 손해를 본 건 양쪽
다 마찬가지지만, 그렇다 해도 말을 탄 그들에 비해 움직임이 더딜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마음은 급해지지만 움직임은 더딜 수밖에 없으니 속이 타는 건 어쩔 수 없
다.
히이잉!
뒤쪽에서 다시 한 번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흑색 기마대는 언어가 아닌 말의 울음소리로 상대가 여기 있음을 알렸다.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은 더 바빠져 버렸다.
'숨어야 해! 지금 당장 도망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눈이라도 없다면 산 아래로 쉬지 않고 달리기라도 해보련만.
누남천은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숨어야 하는데 특별히 그럴 만한 곳이 보
이지 않는다. 당장은 우선 숨어야 한다. 지금 이렇게 도망쳐 봐야 잡혀서 죽
게 될 거다. 지금은 아직 동원된 인원수가 적어서 이토록 버티고 있지만 곧
다른 자들도 들이닥치게 되면 상황은 더욱 급박해 질 게 분명하다.
'숨으려면 지금 뿐이야. 더욱 많아지면 숨는 것도 쉽지 않을 테니.'
그냥 숨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숨는 과정에서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그
리고 마땅히 숨을 장소도 찾아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숨을 곳을 찾게!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게야!"
누남천의 외침에 일행들은 달리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몸을 감출만
한 장소가 있나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몸을 감춘다 한들 걸리
는 건 금방일 거다. 숨는다 해도 눈에 쉽게 뜨일만한 곳이고 발자국이 남아
자신들이 간 방향을 가르쳐 줄 것이다.
달리던 와중에 모용취가 갑자기 멈추었다.
"싸워 봅시다! 우선 바로 뒤에서 쫓는 자들을 쓰러트린다면 도망치기 쉬울
것 같습니다!"
"멍청한 소리 집어치우게!"
그가 뱉은 말에 누남천은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 그런 누남천에게 모용취
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군휘 또한 저토록 쉽게 다섯을 보냈습니다. 저희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금방 삼사 십 명 정도야……"
"우리가 상대한 건 겨우 졸개들이었을 뿐이다! 닥치고 떠들 힘이 있다면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고 한 번이라도 더 주변을 살펴!"
누남천의 눈이 매섭게 모용취에게 박혔다. 그렇게 모용취를 잠시 바라보던
누남천이 말했다.
"조금이라도 더 살 확률을 높이고 싶다면. 알아들었으면 달려!"
말을 마친 누남천은 다시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모용취는 여운휘가 그토록 쉽게 다섯을 보내자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것
이다. 여운휘만큼 할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모용취 자신 또한 어느 정
도 승부를 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건 모르고서야 하는 소리다. 여태까지 상대한 자들의 가슴에는 일
(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가장 하수인 자들의 가슴에 붙는 무늬인 셈이다.
열 명을 관리하는 십부장에게는 십(十)자가, 그런 십부장 열 명을 관리하
는 백부장에게는 백(百)자가 붙어 있다.
백부장의 수는 다섯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건 곧 흑색 기마대의 수가 오백
가량이라는 걸 의미한다. 그것도 알려진 것만 그만큼이니, 알려지지 않은
자들까지 친다면 그 수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 많은 수를 베어 넘길 수 없다. 일개 흑색 기마대의
무인들이라면 결코 상대하기 껄끄럽지 않다. 하지만 그 숫자가 올라간다면
이야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지금 이곳에서 십부장 정도 되는 무인을 이길만
한 자는 누남천이 판단하기에는 자신을 포함해서 넷밖에 없다.
'진군휘, 남궁진, 모용취를 제한다면 십부장 정도도 이길 수 없을 게야.'
당산희의 실력은 제대로 본 적이 없어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암기를 기막히
게 사용하기 전까지는 이기기는 힘들 거다. 거기다가 웬만한 암기로는 그들
의 두터운 갑옷에 상처조차 주기 버겁다.
그리고 그 위인 백부장을 이길 수 있는 자는 그 반 밖에 되지 않는다.
누남천은 여운휘라면 백부장을 상대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판단했다. 혈리
추검 공청을 꺾었고, 수황과의 일전을 본 그로서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더군다나 방금 전 다섯 명의 흑색 기마대의 무인을 죽인 건 거의 신
기에 가까웠다.
비록 흑색 기마대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자들이라고는 하지만 다섯에
달하는 무인들은 간단하게 제압했다.
그렇지만 피해야 한다.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고는 하나 오백에서 그 이상
의 수에 가까운 기마대를 상대할 수는 없다. 그토록 만만한 자들이었다면
건곤대가 전멸 당하는 일도 없었을 거다.
아직 뒤를 흑색 기마대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점점 커져 가는
말발굽 소리와 말의 울음소리는 점점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것을 가르쳐줬
다.
무턱대고 걸은 탓에 이곳으로 가면 어느 곳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다. 그래도 걸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방도가 나올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
다. 그렇지 않다면 당장 두 다리가 풀려 땅에 주저앉고 말 테니까.
그렇게 앞을 향해 열심히 걸어가던 중 누남천은 다리를 멈추어 버렸다.
반대편 산이 보인다. 그리고 조금 앞에 꺾여 있는 길을 보고야 말았다. 아래
쪽에서 불어닥치는 바람, 그리고 눈이 쌓여 있는 모습.
누남천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앞을 향해 몇 걸음 더 내딛었다. 그렇게
다가간 누남천의 고개가 하늘을 향했다.
절벽이다, 그토록 움직였거늘 이번에 온 곳도 천길 낭떠러지다. 아래에서
는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고, 높이도 보통이 아니다. 뛰어 내린다면 당장
에 이 거센 바람에 휩쓸려 시체도 찾을 수 없이 망가지리라.
하늘을 바라보며 누남천은 탄식을 토해냈다.
'하늘이시여, 정녕 저희를 버리시는 겁니까?'
도망칠 길도 없다. 사방에서 말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눈에 들
어오지는 않지만 당장에 이곳에 들이닥쳐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토록 말
의 울음소리는 가까이서 들려오고 있었다.
모두가 허탈한 표정으로 절벽 아래를 살펴보고 있을 때 여운휘는 검을 꺼
내 들었다.
단신으로 금천멸문대와 싸웠던 적도 있다. 그때에 비해 지금의 상황이 좋
다, 나쁘다를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죽어 줄 마음은 없다. 그건
상대가 누구라 해도 변하지 않을 거다.
저들과 함께가 아니었다면 애초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경공이 엄청나다기
보다는 여운휘는 몸을 감출 줄 알았다. 흔적을 죽이고, 은밀히 움직인다. 사
곡에서 배운 것들이다. 그것은 지금 여운휘에겐 아주 중요한 뼈와 살이 되
어버렸다.
"무엇을 하려고 그러나!"
남궁진은 검을 빼들고 앞을 향해 걸어나가려는 여운휘의 소매를 잡으며 물
었다. 그러자 여운휘는 고개를 돌려 남궁진을 바라봤다. 남궁진을 바라보
던 그의 입이 열렸다.
"상대가 있다면, 그것도 베어야 할 상대라면 베어야지. 적들을 베러 간다."
"진군휘 자네……"
처음엔 미쳐 버린 게 아닌가 생각했다. 죽음을 앞두고 정신이 돌아버리는
사람이야 부지기수로 많다. 미치지 않는다 해도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다.
남궁진은 여운휘의 눈을 바라봤다.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눈동자, 결코 미
친 자가 내뱉는 말이 아니다.
"이쪽으로 오기 전에 우리가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저들이 우리를 포위하
고 난 후면 도망치는 게 어려울 테니까. 차라리 우리가 먼저 방향을 잡고 뚫
은 후 그 방향을 향해 도망치는 게 낫겠지."
하늘을 향하고 있던 누남천의 고개가 여운휘에게로 돌려졌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도망칠 방도도 없는 지금 이곳에 있다가는 완벽하게
둘러 쌓여 버린다. 더군다나 뒤는 절벽. 완벽하게 궁지에 몰리는 꼴이 되어
버린다. 차라리 여운휘의 말대로 방향을 잡고 그 곳을 무너트리는 것이 살
확률이 높다.
적어도 도망칠 곳이 없어 절벽 아래를 살펴보며 한숨짓는 지금보다야 나을
게다.
"진군휘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남천은 옆
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지나온 길을 타고 오는 흑색 기마대의 수가 많을 거
라고 판단한 것이다.
"좌측으로 가세. 그나마 사람이 적을 것 같군."
말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
누남천은 살 거라는 생각을 버렸다. 솔직히 말해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한 명
이라도 살아난다는 건 하늘의 도움일 거다.
막 누남천이 발을 때려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십시오!"
누남천은 뒤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건 비단 누남천뿐만이 아니었
다. 그 모습에서 누남천은 자신이 헛것을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벽 아래입니다!"
절벽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설혜주는 아래쪽을 바라봤고, 그곳에서는 어떤
사내의 고개가 보였다. 그 사내는 설혜주가 자신을 바라보자 급히 입을 열
었다.
"이쪽으로 오도록 하세요!"
설혜주는 급히 고개를 돌려 누남천을 바라봤다. 그 또한 어느새 설혜주의
옆으로 다가와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상처를 입어 얼굴을
붕대로 감싼 한 사내가 들어왔다. 누남천은 어떻게 해야 하나 순간 고민에
빠졌다.
누군지도 모르는 자들이 내려오라고 하는데 쉽사리 그럴 수가 없다. 아래쪽
에 동굴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문제는 저들이 적이면 어쩌란 말인가. 그거야
말로 완벽하게 잡힌 꼴이 되지 않는가.
그 순간 아래에 있던 사내가 목청을 높여 외쳤다.
"말발굽의 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어서요!"
그 말은 듣는 순간 누남천은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가 결국 말을 내뱉었다.
"내려가도록 하세."
일행들은 서둘러 절벽에 매달려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바
람이 당장이라도 그들을 지옥 같은 절벽 아래로 끌어당겼다. 더불어 지축
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는 점점 천둥처럼 커다랗게 변해서 다가왔다.
실상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무릎의 약간 아래까지 올라온 눈 탓이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그들의 귓가로는 말의 발굽에서 나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긴장한 탓에 그 소리가 마치 천둥치는 것과 같이 들린 거다.
한 명, 한 명씩 절벽에 파여져 있는 동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 다행스럽게
도 동굴이 있는 바로 위쪽은 가파르기는 했지만 울퉁불퉁한 탓에 손에 잡
을 것이 있었다. 더불어 약간 튀어 탓에 아래에 있는 동굴의 모습이 보이지
도 않았다.
여운휘는 자신을 잡아주려는 손을 뿌리치고 동굴 안으로 내려섰다. 그 안에
는 여섯 명의 무인들이 있었다.
모두가 남자였고, 그들의 얼굴은 오랫동안 힘든 생활을 했는지 무척이나 수
척해 보였다.
막 내려선 누남천이 입을 열려는 순간 한 사내가 입가로 손가락을 치켜세웠
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다. 그것도 모를 정도로 누남천은 어리석은 자가 아
니다.
그 순간 동굴 위가 천천히 울리고 있었다. 흑색 기마대가 바로 이 위에 있
는 거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는 숨소리까지 죽였다. 여운휘는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려온 길이를 생각해 보면 대충 어느 정도
위쪽에 적이 있는 지 알 수 있다. 검을 찔러 넣는다 해도 반도 미치지 못할
게다.
말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근처에서 분산되기 시작했다. 찾지 못하니 주변
을 수색하기로 한 모양이다.
말발굽 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자 설혜주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야 말았
다. 여기까지 달렸던 이유가 사라지자 다리의 힘이 쫘악 풀려버렸다. 주저
앉은 그녀의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떨리고 있었다.
흑색 기마대, 말로만 들어봤지 자신이 이처럼 직접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
도 못했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일행들은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약 반 시진 정도가 흐른 후에야 석상처럼 굳어져 움직일 줄 모르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광한검 어르신."
"자네는 누구인가?"
"건곤대의 생존자인 백서립이라고 합니다."
누남천은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반 시진 동안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이 여섯의 무인들이 누구인
지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 건곤대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기에 놀라지는 않
았다.
하지만 막상 이들의 입으로 건곤대라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울렁거린다. 누
남천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친구. 장명 그 친구는 어찌 되었는가."
"탈백검 어르신은…… 돌아가셨습니다."
"정녕인가? 죽은 걸 확인했는가?"
그때 자신을 백서립이라고 소개했던 자의 옆에 있던 사내가 대신 대답했다.
"제가 보았습니다. 그 날 저희가 도망치던 와중에 장명 어르신이 검을 쥐
고 홀로 뒤돌아서 걸어가시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주변을 흑색
기마대가 감쌌지요. 그것도 일개 병사가 아닌 십(十)자와 백(百)자가 적혀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다. 아무리 장명이라 해도 그런 자들과 싸
웠다면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저 정도면 기정사
실화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는 상황인 셈이다.
"그래도 그 분이 아니었다면 우리 여섯 또한 살지 못했을 겁니다. 장명 어
르신이 그렇게 나서지 않았다면 흑색 기마대의 포위망은 결코 얇아지지 않
았을 겁니다. 저희를 쫓던 그들 또한 장명 어르신과 싸우느라 이렇게 목숨
을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 친구는 그럴 친구지."
누남천은 동굴 밖을 바라봤다. 반대편 산 또한 눈이 꽤나 쌓여 있었다. 이
넓고 깊은 절벽의 건너편에 있는 산은 이곳보다 오히려 커 보였다.
"행색을 보아하니 꽤나 오랫동안 이곳에 있던 모양이군. 왜 돌아오지 않았
던 겐가."
그들은 모두 옷이라고 보기 힘든 옷을 걸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얗던 옷
이 이제는 넝마처럼 변해버렸다. 그들의 단정했던 머리는 헝클어진지 오래
였고, 외향은 개방의 거지들과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한달 가량의 시간이 있었다면 충분히 도망갈 기회가 있었을 터인데."
"저희 또한 도망치려고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처음 이 동굴
에 몸을 감춘 건 열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살피려 나갔던 자 중에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갔던 자들은 모두 돌아오지 않았고, 그
후부터는 나가려는 시도를 포기한 겁니다."
"그 탓이었는가."
흑색 기마대의 반응이 너무나 빨랐다. 한 명이 신호를 보내는 순간 마치 기
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특별한 일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흑색 기마대의
그 많은 인원이 밖에 있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그들
은 아직도 이 생존자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누남천은 그들을 바라봤다. 퀭하게 들어간 눈과 여윈 듯한 얼굴을 보고서
야 불연 듯 입을 열었다.
"식사들은?"
"이런 곳에서 제대로 했을 리가 없지요."
이곳은 뱀의 동굴이었다. 동굴 벽에 있는 수많은 구멍들이 모두 뱀의 집이
었던 셈이다. 건곤대의 생존자들은 운이 좋았다. 만약 지금이 겨울이 아니
었다면 이곳은 온통 뱀 투성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동굴에 들어서
는 순간 날카로운 독니를 빛내며 다가갔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었다. 뱀들은 겨울잠을 자고 있었고, 잠에 든 뱀들은
위험거리가 아닌 중요한 식량으로 변했다.
불을 피우려 했지만 나뭇가지도 없었고, 주변 여건도 마땅치 않았다. 불을
피운다면 연기가 동굴 입구로 빠져나갈 테고 그건 곧 여기에 자신들이 있다
는 걸 흑색 기마대에게 알리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은 독뱀을 골라냈다. 날로 먹을 때 독이 있는 뱀은 치명적이다. 그렇게
고르고 골랐지만 한 명이 독뱀을 먹어 버렸다. 그는 입에 거품을 물로 쓰러
졌지만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치료할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채 무엇
인가를 하기도 전에 목숨이 끊어져 버렸다.
그 뱀의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극독이었음이 분명
하다.
그들은 큰 고민에 빠졌다. 죽어 버린 그의 몸에서 악취가 풍기기 시작한 것
이다. 견디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땀 냄새마저 위험한 형편이
다. 이토록 심한 냄새는 자신들에게도 고역이었지만 항시 주변을 뒤지고 있
는 흑색 기마대에게 꼬리를 잡히게 할 위험이 있었다.
보통 시체 썩는 냄새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독 때문인지 악취가 훨씬 더 심
했다. 결국 그들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절벽 아래로…… 던졌습니다."
백서립은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전우였던 자
의 시체를 절벽 아래로 내던졌다. 용서받기 힘든 일임이 분명하다.
"잘했다."
"예?"
누남천의 말에 백서립은 고개를 들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큰 호통
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잘했단다. 이해가 가지 않는 답변이었
던 것이다.
"죽은 자네의 전우 또한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하여 여럿을 살린 게야. 장명
도 마찬가지지. 자기 몸을 버려 너희를 살린 거니까. 그런데 한 가지만 묻
지. 넌 죽은 그에게서 무엇을 남겼는가?"
백서립은 조심스럽게 품안에서 머리카락을 꺼냈다. 한 움큼 잘려진 머리카
락이 끈에 묶인 채로 그의 품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 밖에는 챙길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에라도 묻어 주고자……"
"됐다. 그거면, 그거면 충분하다. 혜주가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거라."
누남천의 말에 설혜주는 가지고 왔던 모든 음식을 꺼내서 그들에게 내밀었
다. 처음엔 자신들만 먹어도 되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들도 곧 허기
를 이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최소한의 음식을 가져온 탓에 그들의 주린 배를 채
우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한 탓인
지 한결 얼굴이 편하게 변했다.
누남천은 고개를 돌렸다. 동굴의 입구 근처에서 여운휘가 밖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는 이곳에 도착한 이후 계속 저 근처에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다들 갑작스러운 지금의 상황에 당황해 하면서 대응하지 못하고 있거늘 저
사내만은 아니다. 마치 유람이라도 온 듯 그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무엇을 하는가?"
여운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
렸다. 누남천이 여운휘를 응시하고 있었다.
"퇴로를 찾는 거요."
"퇴로를 찾는 것도 좋지만 피로를 푸는 것도 중요하지. 지금 이 중에서 자
네가 가장 격하게 움직였어. 쉬는 게 좋을 게야."
"그다지 피곤하지 않소.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서 퇴로를 찾아야 하오."
여운휘는 동굴 내부를 바라봤다.
천장은 여운휘의 머리가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였다. 그리고 동굴 끝 부분
에는 자잘한 구멍들이 있다. 그 넓이는 사람 열 명 정도가 누우면 거의 꽉
찰 정도였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바람 또한 보통이 아니다. 차가운 바람이
동굴 안을 한 바퀴 휘젓고 다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곳에 계속 있다 보면 몸만 상할 거요. 그리고 하루 이틀 정도야 어떻게
참을 수 있겠지만 소피는 어떻게 해결 할 거요? 지금까지는 다 사내라 상관
없다지만 이제는 여자도 있소."
살았다는 생각에 늘어져 있던 당산희와 설혜주는 여운휘의 말을 듣고야 그
런 문제를 생각해 냈다. 이 좁은 동굴에서 소피를 보게 된다면 냄새는 둘째
치고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닐 것인가.
"그리고 이 찬바람, 아래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보통이 아니오. 계속 이 바
람을 맞으면서 지내면 몸만 상할 거요. 차라리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게 낫
소."
여운휘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이곳에 계속 있는 다 해서 특별한 계책
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포위망이 좁혀진 지금 동굴이 걸릴지도 모
르는 형편인 것이다. 문제는 지금 흑색 기마대가 짜고 있을 포위망이라는
거다. 이 근처까지 달라붙었는데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당연히 이 근방을 완벽하게 감싸고 있을 거다.
도망을 치려면 그들을 뚫어야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다면 분명 포위망이
야 느슨해지겠지만 식량이 없다. 흑색 기마대의 포위망이 약해질지, 이쪽
이 모두 굶어 죽을지 도박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좋다, 다 좋다고 치자.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들이 그것을 몰랐을까? 아니
다, 이들 또한 이곳에 계속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랬기에
주변을 살필 사람을 보냈던 거다. 비록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이곳에
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어디로 도망을 쳐야 할까? 장소를 알 수가
없다. 이곳에서 나가 뚫고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도망칠 수 있
을까? 그들이 쫓을 수 없어야 한다. 아니면 그들이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멀
리까지 도망가야 한다.
문제는 두 개 다 불가능하다고 봐도 된다는 거다.
"방법이 없소. 방법만 있다면 우리가 이토록 이곳에서 있었겠소?"
"그래, 네 말도 옳지만 확실한 준비 없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조금 힘들더라
도 완벽한 계획 후에 움직이는 게 나을 게야."
여운휘는 말 없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을 따라간 누남천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건너편 산이었다. 온통 눈으로 덮여 있는 산.
하지만 그 산과의 거리는 넉넉잡고도 삼십 장 이상은 되어 보였다.
"산? 하지만 저 산으로 어떻게 간다는 말이냐. 이 정도 먼 거리를 날아서라
도 가자는 거냐?"
불가능하다. 중간에 딛을 무엇인가가 있다고 해도 불가능한 거리다. 도대
체 무슨 생각으로 이리 말했는지 누남천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굳이 하늘을 날아서 갈 필요는 없소."
여운휘는 다리를 손으로 만졌다. 그는 누남천은 보면서 입을 열었다.
"걸어서, 걸어서 가면 되는 거요."
"뭐? 걸어서…… 가자고?"
누남천은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여운휘의 표정은
진지했다.
누남천 또한 여운휘의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고 느꼈다. 만난 지 그리 오
래 된 건 아니지만 워낙 여운휘의 성격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싫은 건 싫
다, 좋은 건 좋다 똑 부러지게 말하는 사내다. 그리고 결코 가벼이 입을 놀
리지 않는 사내이기도 하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게냐?"
"저기를 보시오."
여운휘는 다시 손을 들어 올려 어딘가를 가리켰다. 하지만 누남천에게 보이
는 건 하얀 눈뿐이었다. 누남천의 의아한 표정을 본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저 쪽 산과 산의 간격이 조금 좁아지는 부근을 잘 보시오."
여운휘의 말을 듣고서야 누남천은 그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그제야 누남천
은 멀리 무엇인가가 두 산을 잇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후에도 한참
을 더 본 후에야 누남천은 그것의 정체를 눈치챘다.
"저건 혹시……"
"다리요."
누남천은 고개를 돌려 여운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복잡했다. 살길을
찾았다는 기쁨과 여러 감정이 섞인 듯한 느낌이다.
"저게…… 보였단 말인가?"
"안력이 빼어나서 보였을 뿐이요. 운도 좀 따랐고. 아까 내려오면서 발견했
소."
누남천은 여운휘의 말을 듣고도 쉬이 생각을 접지 않았다. 단지 안력이 좋
다고 해서 볼거리가 아니다. 자신이 뚫어지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야
반신반의하면서 말을 꺼낼 정도였는데……
"대단하군."
누남천은 짧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는 안으로 들어와 건곤대
의 생존자의 우두머리 격인 백서립에게 물었다.
"저 사내가 저리 말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거리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습니까?"
"대략 이백 여 장?"
"이동 거리는 그것보다 많을 것 아닙니까?"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산은 평평하지 않다. 들어가는 곳이 있고, 올라가는 곳이 있다. 거리가 그
정도라 할지라도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가다 보면 원래의 거리보다 갑절은
기본이다. 대략 아무런 방해가 없다 해도 가는 데 일각 이상은 족히 걸릴 거
리라는 거다.
"걸릴 게 분명합니다."
"그럼 여기서 가만히 있을 건가?"
"그건 아니지만……"
여운휘의 말에 백서립의 목소리가 가면 갈수록 작아졌다. 그 또한 좋은 방
법을 생각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도망을 치기 위해 퇴로
를 찾았다. 하지만 나간 자 중에서 돌아온 자는 없다. 마땅한 퇴로도 찾지
못했고,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 거리는 너무 위험해. 너무 길단 말일세."
"저 다리를 건너기 전까지의 거리가 이 산을 내려가는 거리보다 짧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진군휘의 말대로 다리를 건너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
까."
남궁진의 말에 백서립을 뒤를 돌아봤다. 뒤에서는 건곤대의 생존자들이 자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들의 얼굴은 수
심으로 가득했다. 깍지 못한 수염이 얼굴을 덮었고, 고생이 많은 탓에 얼굴
들도 수척하게 변했다.
비록 임시이긴 하지만 이 무리를 이끄는 건 자신이다. 자신의 판단에 동료
들의 목숨이 걸린 셈이다.
'내일 이 중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가 있을 지도 모른다.'
얼굴이나 몸 상태를 본다면 그래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백서립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사내
다. 누남천과 그 외의 모든 자들은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상태다. 먼발치에
서라도 본 유명한 후기지수들. 그런데 유독 이 사내만은 정체를 알 수가 없
다.
남궁진이 진군휘라고 불렀는데 들어본 기억이 없는 듯 하다. 그런데도 불구
하고 백서립의 눈은 여운휘에게로 향했다. 이런 일이 닥쳤는데도 불구하고
태연한 모습이 그를 놀라게 한 것이다.
"당신 말대로 하지. 그럼 언제쯤 움직일 텐가?"
"저녁."
"조금 급한 게 아닌가? 이것저것 준비한 후에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내일이면 더 힘들어져. 그들의 포위망이 완벽해 지기 전에 움직여야 한
다. 지금은 포위망이 넓어. 찾을 곳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
수록 그 포위망은 좁아질 거다."
백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 탓이다. 그 둘의 대화
를 보고 있던 누남천은 대화가 끝나가자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저 다리 쪽을 향해 움직이도록 하지."
누남천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챙겨야 할 것은 없지만 그래
도 만약을 대비해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다. 간단한 준비가 끝나자 누남
천은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녁에 움직여야 하니 그 전까지 자두는 게 좋을 게야. 저녁이 되려면 꽤
나 시간이 남았지만 그래도 자도록 해봐."
해가 뜬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려면 대여섯 시진 가량은 기다려야
한다. 산이라 해가 빨리 질 거다. 그리고 사방이 어둑어둑해 져서야 움직일
테고.
건곤대의 대원들은 그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누남천의 말이 떨어지
자마자 곧 곯아떨어졌다. 피곤한 건 다 마찬가지였다.
모용취는 구석자리로 가서 드러누웠다. 그들 또한 밤을 새서 산을 올랐었
다. 눈 때문에 고생하고 흑색 기마대를 만나 목숨을 걸고 달렸다. 그 동안
몰랐던 피로가 수면을 취하라는 누남천의 말에 갑자기 쏟아졌다.
모용취가 눕자 하나 둘씩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자리는 비좁
았지만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누우니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여운휘는 동
굴 입구 근처에서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잠을 청하지 않고 밖을 바라보
고 있었다. 그러한 그에게 남궁진이 다가왔다.
여운휘의 옆에 주저앉은 그 또한 밖을 바라봤다.
"뭐 볼 거라도 있나? 내 눈에 보이는 건 눈 뿐인데 말이야."
"너에게 보이지 않는데 나에게 별게 보일 리가 없지. 나에게도 보이는 건
눈 뿐이야."
"자네는 졸리지도 않는가? 밤을 새서 달려 놓고도 어찌 그리 멀쩡하게 있
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이야. 자네 몸은 무쇠로 된 겐가?"
남궁진의 농담에도 여운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밖을 바라보던 여운
휘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 사이에 남궁진은 고개를 떨구고 잠에 들어 있었
다. 그 또한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여운휘는 자리
에서 일어나 남궁진의 다리를 쭉 펼 수 있게 해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동굴 제일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남궁진을 편한
자세로 자게 해 주기 위해서다. 동굴 가장 안 쪽은 바람이 적게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누워있지 않았다. 그건 셀 수도 없이 뚫려 있는 뱀의 굴 때
문이었다.
아무리 겨울잠을 자고 있다고 한들 사람을 바로 골로 보내는 맹독을 가지
고 있는 뱀도 있다. 그 옆에서 잠을 청한다는 건 아무리 대단한 배짱을 지니
고 있다 해도 힘든 일이다.
벽에 기댄 여운휘는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이가 많이 상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청강검이다. 처음 샀을 때는 꽤나
날카로웠는데 지금은 그 날카로움을 많이 잃어 버렸다. 오늘만 해도 그렇
다. 보통 검으로 견디기 힘들 정도의 충격을 수 차례 받았다.
'이번에 검을 바꿔야겠군.'
무림맹으로 돌아가면 검 먼저 바꿔야겠다. 이 상태라면 싸움 중에 부러져
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그렇게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여운휘의 눈에 무
엇인가가 들어왔다.
검날에 무엇인가가 아른거리는 순간 여운휘는 몸을 비틀었다.
파악!
무엇인가가 여운휘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그의 손이 자신을
스쳐지나간 것을 향해 뻗어졌다. 손이 닿기 전 여운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뱀!'
일직선으로 몸을 뻗었던 뱀이 갑자기 입을 돌렸다. 뱀의 이가 여운휘의 손
을 물려고 다가왔다. 뱀의 이가 닿으려는 찰나 여운휘의 손이 갑작스럽게
뚝 하니 아래로 떨어졌다. 방향을 바꿨던 여운휘의 손이 퉁기듯이 아래에
서 위로 솟구쳤다.
뱀의 머리가 여운휘의 손에 정확하게 잡혔다.
꼬리가 급하게 비틀렸지만 그것이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여운휘는 자신
을 향해 이빨을 내민 뱀을 바라봤다. 초록색 몸뚱이에 드문드문 검은 반점
이 있는 뱀이다. 특별히 뱀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이름 따위는 모른다.
여운휘는 그냥 그렇게 뱀의 머리통을 터트려 버리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뱀의 이빨에서 작은 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넘기려 했
는데 물방울이 떨어진 땅에서 타는 소리가 일었다.
여운휘의 눈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땅이 타고 있다. 흙이 타들어
가며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여운휘의 눈에 놀람의 감정이 스쳐지나갔
다. 뱀독에 대해서는 들어봤지만 이런 독이 있다는 건 듣지 못했다.
물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니 여운휘조차도 등골이 써늘해짐을 느꼈
다. 여운휘는 뱀의 머리통을 누르려던 생각이 변해버렸다.
아직 겨울이 다 가지도 않았는데 뱀이 움직인 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이곳
에서 꽤나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았다. 체온 덕분에 주변의 온도가 올라갔
고, 그러다 보니 뱀이 조금 일찍 눈을 뜬 모양이다.
건곤대의 생존자 중에서 뱀을 잘못 먹고 죽은 자가 있다고 했다. 여운휘는
직감적으로 이 뱀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니라고 해도 분명 이 뱀과 비슷한
수준의 맹독을 지녔을 것이다.
'독…… 이라.'
여운휘는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찾은 듯이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