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37)

차가운 당산희의 목소리였다. 그녀를 잠시 응시하던 누남천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지금 당장 말입니까?" 

"그래. 최대한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그리고 우리가 밖으로 나가는 걸 아 

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고. 그러기 위해서는 밤이 적격이지." 

누남천의 말에 모두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인에게 필요한 것이 검 

을 제하고는 무엇이 있겠는가. 옷이나 기타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온다는 

건 사치스러운 이야기다. 

"급작스러워 미안하군. 하지만 무림맹의 안위가 걸린 일이니 자네들이 조 

금만 양해해줬으면 하는 군." 

무림맹의 안위가 걸렸다는 말에 그 누가 반대 의사를 표명하겠는가. 모두 

의 침묵 속에 누남천이 전낭 하나를 걸치며 말했다. 

"그럼 슬슬 출발하지." 

누남천은 문을 열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미 움직일 방법은 머리 속 

에서 짜둔 상태다.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움직여야 한다. 누남천의 몸이 땅 

을 박차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 뒤를 여섯 명의 젊은 무인들도 따 

르기 시작했다. 

남궁진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여운휘에게로 향했다. 땅을 발로 밟고 도약 

하는 순간 그의 몸이 공중으로 손살같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다 

른 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대단한 움직임이다. 혈리추검 공청을 이겼다는 말이 결코 거짓은 아닐 거 

다. 

지금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현 무림에서 가장 각광 받고 있는 후기지수 

들이다. 같은 연배에서는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자들. 그런 그들의 앞에 새 

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그 이름은 진군휘라고 불리는 한 사내다. 

야음(夜陰)을 틈타 움직인 일곱 명의 무인들이 해가 뜰 무렵 근처의 객잔으 

로 들어갔다. 최소한 이 근방을 벗어날 때까지는 낮에는 움직임을 자제해 

야 한다. 무림맹의 근처이다 보니 마교의 간자들이 곳곳에 몸을 감추고 있 

을 것이다. 

그 간자라는 게 누구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평생동안 술만 마시던 술주정뱅이일지도 모르고, 한 사내만을 위해 살아온 

아낙네가 마교의 간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변에 있는 모든 시선을 주 

위 해야 한다. 그들이 마교의 간자라면 이 움직임은 마교의 귀로 넘어갈 지 

도 모른다. 

객잔에 두 개의 방을 빌린 그들은 서둘러 방으로 모였다. 모두가 자리에 앉 

자 누남천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피로를 풀게. 저녁 식사를 할 무렵이 되면 다시 움직여야 할 테니 

까. 최소한 하남을 벗어 날 때까지는 낮에는 잠을 자고 저녁에야 움직이게 

될 거다. 물론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 하지만 결코 우리의 행적을 들어내서 

는 안 돼. 다행히 겨울이라 밤이 빨리 오는 것이 위안이 되는 군." 

"밖에 나가는 것도 안 되는 겁니까?"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만 최대한 움직임을 사려야 하니 자제하는 게 좋겠 

지. 최소한 너희 모두 얼굴이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는가." 

누남천은 모용취에 말에 대답하면서 여운휘를 바라봤다. 유일하게 이 안에 

서 얼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름만 무림에 무성할 뿐, 그의 

이름을 아는 것이 과연 몇이나 될까? 

"최소한 하남을 벗어날 때까지는 큰 움직임을 보이지 말게." 

제갈군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은 이중에서 가장 부족한 제갈군이지만 이번 임무에서 그의 비중은 거 

대하다. 제갈세가의 인물답게 그는 기문진법(奇門陣法)과 역리(易理), 토목 

기관지술(土木機關之術)등에 능하다. 이번 일에 기관이나 진법이 섞여 있 

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누남천이 특별히 데리고 온 거다. 

여러모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한 그는 이번 여정에 반드시 필요한 일인 중 

하나다. 

제갈군은 한아름이나 되는 나뭇가지를 들고 일행에게 다가왔다. 

하남을 빠져 나오고 난 후부터 움직임이 바뀌었다. 밤에만 움직이던 그들 

이 이제는 낮에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남을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큰 

길을 피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다 보니 객잔을 잡기가 힘들었고, 오늘 

은 급기야 노숙을 해야만 했다. 

제갈군이 나뭇가지를 내려놓자 옆에 있던 남궁진이 불을 붙였다. 설혜주와 

여운휘는 음식을 다듬고 있었고 당산희는 자신의 암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독을 사용하는 암기가 대다수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제때 관리를 

해주지 않는다면 막상 중요한 순간에 그 위력은 반 이하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당산희의 눈이 꼼꼼하게 자신의 암기를 훑고 지나갔다. 

"당 소저, 그 고운 손에 독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 

당산희의 눈이 무섭게 변하며 모용취에게 향했다. 당산희의 눈이 자신을 향 

하자 모용취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아니 그냥 그 고운 손과 독이라는 게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 말인데 

그토록 노려 볼 필요는 없잖소?" 

"내 별호를 잊은 건 아니겠죠?" 

날카롭게 한 마디 쏘아준 그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모용취는 당산희가 고 

개를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때지 않았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의 시선은 당산희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암, 알지. 독지화(毒持花)라는 별호를 모를 리가 있나. 하지만 말이야 그 

별호 때문에 네가 더 매력적이라는 건 아나?' 

쉽사리 꺾일 꽃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현 무림에서 가장 상대하기 힘 

든 꽃을 꼽는다면 대부분 독지화 당산희를 꼽을 거다. 모용취 또한 그러한 

그녀에게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미모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업고 있는 사천당문이라는 이름 또한 매력적이 

다. 

사천당문은 오대세가의 하나다. 모용취가 끌리는 건 당연하다. 그 둘의 모 

습을 바라보던 제갈군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보게 모용취." 

"왜 부르지?" 

제갈군이 자신을 부르자 모용취는 짜증이 난다는 듯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다들 자기 할거라도 하는데 자네는 뭐 하는 건가? 적어도 일 

을 하려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피식. 

제갈군의 말에 모용취가 웃음을 흘렸다. 

이미 이 무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알았을 거다. 모용취는 제갈군을 무시하 

고 있다. 특별히 대단한 무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느 정도 무림에서 알려 

지긴 했지만 그다지 유명한 편도 아니다. 

제갈군은 제갈세가(諸葛世家)에서도 천시 받는 인물이다. 

그는 제갈세가의 현 가주인 제갈문의 네 번째 자식이다. 위에 세 명의 형과 

는 달리 제갈군은 두 번째 아내의 자식이다. 그 탓에 가뜩이나 세가 내에서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자랐거늘 급기야 어머니마저도 죽고 말았 

다. 

그 후부터 제갈군은 제갈세가 내에서도 있으나 마나한 인물이 되어 버렸 

다. 

모용취는 그러한 제갈군을 무시하고 있었다. 피식 웃는 그의 얼굴을 본 제 

갈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싶지만 자 

신의 실력이 그보다 훨씬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탓에 제갈군 

은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참으려던 제갈군에게 모용취가 화를 돋구는 한 마디를 날렸다. 

"네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정도로 컸던가?" 

"함부로 말하지 말게!" 

제갈군이 목청을 높이자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모용취를 노려보고 있었다. 항상 하얀 옷을 입고 성품 또한 맑 

아 백의서생이라 불리는 그이지만 이런 모욕을 참고 넘기기는 힘든 일이다. 

그 둘의 모습을 보고 누남천이 막 중재(仲裁)를 하려는 순간 여운휘의 입 

이 열렸다. 

"둘 다 시끄러워. 우리가 유람이라도 온 거라고 생각들 하는 건가?" 

여운휘의 말에 제갈군은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고개를 숙였다. 그 

또한 흥분해서 고함은 질렀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 

동이었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다. 

모용취는 순간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곧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입을 열었 

다. 

"자네 말대로 내가 좀 실수를 한 모양이야." 

며칠 간의 여행으로 모용취는 여운휘에게 은근슬쩍 말을 낮췄다. 처음 만났 

을 때 불렀던 소협이라는 말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자자. 중요한 일로 이렇게 뭉쳤는데 언성들 높여서 무엇하겠는가. 그만들 

하세." 

남궁진이 삭막해진 분위기를 깨트리기 위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더 이 

상 다툼의 말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한 번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사리 나아 

질 줄을 몰랐다. 그 탓인지 식사를 하는 내내 입을 여는 건 모용취와 남궁 

진, 설혜주 정도였다. 

누남천은 그러한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모용취를 뽑은 건 그의 무공 실력뿐만이 아니라 만금산장의 부근에 대해 알 

고 있는 탓이었다. 그래서 다섯으로 잡았던 수를 여섯으로 늘렸던 거고. 그 

렇지만 이렇게 되면 오히려 데려오지 않느니만 못하다. 

저런 성격이라면 연신 서로가 부닥칠 거다. 확실하게 잡아 줄 게 없다면 일 

이 귀찮아진다. 

식사를 마치자 여운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처를 한 바퀴 돌고 오겠소." 

여운휘는 누남천에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휘, 나도 같이 가세!" 

여운휘의 말에 남궁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따라 붙었다. 여운휘 

가 반대 의사를 보이지 않자 남궁진은 웃으면서 그의 옆에서 걷기 시작했 

다. 

남궁진이 아는 여운휘는 끊고 맺음이 분명한 사내다. 싫었다면 지금 바로 

말했을 거다. 

산중이라 걸어도 보이는 건 나무뿐이다.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자신의 손 

을 뻗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걷던 중 남궁진이 입을 열었다. 

"모용취 덕분에 분위기가 말이 아니야. 예전부터 모용취는 제갈군을 무시 

해왔지. 버려야 할 사람은 깨끗이 무시하고 도움이 될 자들에게는 친근히 

대하지. 그게 모용취야." 

"그 자가 누구를 무시하던 말던 나와는 상관없다. 난 남의 일에는 신경을 

안 쓰니까." 

"하하! 그래. 아무리 모용취라도 자네는 무시 못할 테니까." 

남궁진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시원한 웃음이 여운휘는 싫지가 

않았다. 조용히 남궁진을 바라보던 여운휘가 발을 멈췄다. 

여운휘가 그리 행동하자 남궁진 또한 덩달아 다리를 멈췄다. 그리고는 의아 

하다는 눈으로 여운휘를 바라봤다. 

"자네 왜 그러는 가?" 

"뒤." 

그 말을 듣는 순간 남궁진 또한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여 

운휘에 비해서는 부족하지만 그 또한 뛰어난 무인이다. 여운휘는 미동도 하 

지 않았지만 남궁진은 몸을 돌려 누가 따라 온 것인지 확인했다. 

"아, 당 소저."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당지화 당산희였다. 그녀는 예의 감정 

없는 눈으로 그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드러난 그녀의 얼굴 

은 사내라면 모두 넋을 잃어버릴 정도로 대단했다. 

차가운 표정 또한 이런 달빛 아래라면 더욱 매혹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궁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부탁하실 거라도……" 

"남궁 소협이 아닌 진 소협에게 볼 일이 있어요." 

당산희의 말에 남궁진은 말을 멈추고 여운휘를 바라봤다. 여전히 몸도 돌리 

지 않은 여운휘가 천천히 말문을 텄다. 

"무슨 일이지." 

"보고 싶어서요." 

"……?" 

"혈리추검 공청을 꺾었다는 당신의 실력을 보고 싶다는 말이에요." 

펄럭. 

순간 인 바람 탓에 그녀의 옷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당장이라도 전 

신을 난자할 것 같은 비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당 소저! 지금 그게 무슨……" 

"말했다시피 남궁 소협은 나서지 마세요. 제가 볼 일이 있는 건 남궁소협 

이 아니니 상관 할 권리는 당신에게 없어요." 

"하지만 지금 이건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남궁진은 목소리를 높혔다. 

정파인이라면 정파인 다워야 한다. 지금 이런 행동은 분명 예의에서 어긋나 

는 행동이다. 정 비무를 겨루고 싶었다면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찾아와 

정식으로 말했어야 옳다. 하지만 정작 당산희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보여 주실 건가요, 아니면 꽁지를 내리고 도망가실 건가요?" 

여운휘는 처음 한 마디를 내뱉은 이후로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는 조용히 

당산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미모에 혹해서도, 사천당가라는 이름 

의 무게 탓도 아니다. 긴 침묵을 깨고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넌 혈리추검 공청보다 강한가." 

"그는 현 무림에서 오십대 고수 안에 들어가는 자에요. 제가 상대할 수준 

은 아니죠." 

"그럼 나한테 질 건 뻔한거 아닌가?" 

"솔직히 난 믿지 못하겠어요. 당신이 혈리추검 공청을 어떻게 꺾었는지. 그 

리고 운 좋게 이겼을지도 모르는 당신 보다 내가 낮게 평가된다는 사실도 

맘에 들지 않아요." 

당산희는 숨길 줄을 모르는 여인이다. 어느 정도 돌려서 말할 수도 있는 사 

실을 그녀는 있는 그대로 털어 놓았다. 

솔직히 당산희는 진군휘라는 이름을 듣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의 이름이 나오면 으례 거론되는 것이 자신 강호십대후기지수들의 이름이 

었다. 그리고 항시 자신들은 진군히라는 자보다 낮게 평가 받곤 했다. 그리 

고 그건 자존심이 강한 당산희에게는 참기 힘든 모멸감을 주었다. 

"당신의 실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부닥쳐 보면 알 거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의 실력이 진짜라면 굳이 저와 손속을 겨루지 않을 이유도 없죠." 

다시 한 번 바람이 그녀의 옷을 흔들고 지나갔다. 남궁진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여운휘의 표정을 보고 나서지 않고 있었다. 산처럼 무겁게 

닫혀 있던 여운휘가 입술을 움직였다. 

"…… 보여주지." 

"그 말을 기다렸어요!" 

당산희의 양손에 어느새 옷 안쪽에 있던 비수가 들려있었다. 

비수는 비수인데 보통의 것과는 다르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품 

은 분명 아니다. 아마도 당문에서 제작한 물건인 듯 싶었다. 

"비무지만 방심하지 마세요. 전 절대 비무라 해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으 

니까요." 

"그런 걱정은 네가 할 필요 없어." 

여운휘는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당산희를 향해 한 발 다가갔다. 당 

산희는 품 안으로 손을 넣으며 순식간에 비수들을 날렸다. 그 수는 여섯 개 

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선 움직임을 멈추게 하기 위해 

날린 비수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당산희의 손이 뻗어지기가 무섭게 여운휘 또한 품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던져낸 것이다. 

타타탕! 

비록 위협용이라고는 하나 당산희는 지금의 상황에 쉽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날린 비수를 쳐낸 것은 마찬가지로 비수였다. 

"당신…… 비수도 사용할 줄 알았던 건가요?" 

"말이 많아." 

여운휘의 몸이 순식간에 당산희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사라졌다고 느낀 순 

간 코앞에서 나타난 여운휘를 발견한 그녀는 놀라 버렸다. 자신의 눈으로 

잡지도 못했다. 이렇게까지 품을 내줄때까지 다가오는 걸 몰랐기에 반응하 

지도 못했다. 당산희는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여운휘 또한 이번 일수로 당산희의 혈도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 

다. 

뒤로 물러나서 피한 그녀 또한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당산희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붉게 변해 버렸다. 

'내가 저런 자에게 이토록 수모를 당하다니……' 

봐줬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큰 수치로 다가왔다. 당산희는 입술을 

꽉 물었다. 

비록 비무라고는 하지만 사용할 수만 있다면 당문의 최고최후의 초식인 만 

천화우(滿天花雨)라도 펼쳤으리라. 

하지만 아직 그녀는 제대로 된 만천화우를 사용할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 

지 못했다. 

당산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순간 고민에 빠졌다. 단 한 번의 움직임이었지 

만 솔직히 말해 다시 본다 해도 잡을 자신이 없다. 부닥쳐 봤자 패하는 건 

피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자존심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질 거라는 

것을 안다 해도 멈출 수는 없다. 그건 당산희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독하게 마음 먹고 검을 꺼내들었다. 검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 

다. 허나 이것은 당문에서 자랑하는 암기 중 하나다. 

막 검을 꺼내드는 순간 여운휘는 몰랐지만 남궁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 

차렸다. 

검은 분명 독특하긴 했지만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외부적인 

모습만 보고 섣부른 판단을 내린 거다. 문제는 검이 아니라 검병(劍柄)에 

숨겨져 있는 암기다.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남궁진은 참지 못하고 나섰다. 

"그만! 그만하시오!" 

"남궁소협은 나서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요?"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겨우 비무에서 그것을 사용하시려는 겁니 

까?" 

남궁진의 말에 당산희는 순간 움찔했다. 앞에 있는 사내는 알아차리지 못했 

는데 남궁진은 알아 버린 모양이다. 

여운휘는 사천당문의 사람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들이 무슨 암기를 쓰는 

지에 관해서도 잘 모른다. 하지만 남궁진이 흥분을 하면서 나서는 순간 그 

의 머리속을 스치고 한 개의 암기 이름이 스쳐지나갔다. 

'검저유혼(劍底遊魂).' 

무공을 모르는 자라도 검저유혼을 이용하면 무인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 

다. 물론 사용하기 전에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지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 

다. 

"이 싸움을 그만두시오!" 

"그만 두지 못하겠다면요?" 

"그럼 내가 손수 멈추게 해 주지." 

남궁진의 말에 당산희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 웃음은 마치 자신을 네 따 

위가 무슨 수로 막겠냐는 듯이 건방져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진 

은 침착했다. 

"절 막겠다고요? 그럼 어디 한 번 막아보시죠. 어떻게 막을 건가요?" 

"당 소저가 검저유혼을 쓰기 전에 그걸 막아내면 내가 이기는 거고 그러지 

못하면 내가 지는 걸로 하겠소. 물론 내가 지면 이 싸움에는 끼지 않도록 하 

지. 하지만 내가 성공한다면 소저 또한 검을 거둬야 하오." 

당산희는 남궁진에 대해 잘 모른다. 몇 번 만나서 얼굴 정도나 알고 있지 그 

의 무공에 대해서 아는 건 거의 전무하다. 모용취 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않 

을 정도의 무공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직접 보기 전에는 모르 

는 거다. 

더군다나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검저유혼을 막아보겠다는데 호승심 

이 이는 건 당연하다. 

"좋아요. 당신이 검저유혼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죠. 

하지만 지금 당장 누르기만 하면 검저유혼은 발사 될 텐데 어떻게 막으실 

생각이죠?" 

그 순간 남궁진의 몸이 회전하면서 당산희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다가 

온 남궁진의 움직임에 당산희는 어느 정도 놀라면서도 서둘러 검저유혼을 

발사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막 장치를 건들였고 검저유혼 

은 당연스럽게 터져 나갈 상황이었다. 

'내가 이겼어!' 

남궁진의 몸이 멈췄다. 그리고 당산희의 눈 또한 커졌다. 

"이, 이럴 수가! 왜……" 

검저유혼이 발사 되지 않았다. 

남궁진을 향하던 시선을 당산희는 자신의 검병을 향해 내렸다. 그리고 자신 

의 손 바로 아래 부분을 누르고 있는 남궁진의 검병을 보고야 말았다. 애초 

부터 노렸던 건 이거였다. 자신의 검저유혼을 사용하기 전에 제압할 거라 

고 판단했다. 그런데 오판이었다. 

남궁진은 자신의 검병으로 당산희의 검병을 내리 눌렀다. 힘이 애초에 막히 

니 그것이 뻗어져 나갈 리가 없다. 

순간 당산희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이렇게 한다면 검저유혼이 발사 되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다. 남궁진이 자신 

을 공격할 거라고만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검저유혼이 발사도 되지 못 

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무서운 판단력이다. 자신의 생각을 읽고 행동하지 않았다면 이런 식은 무리 

였을 게다. 

당산희는 왜 모용취가 남궁진에게만은 함부로 대하지 않는 지 알아버렸다. 

남궁세가의 가주를 이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용취는 남궁진에게만은 항 

시 조심히 대했다. 

그 이유를 당산희는 자신의 몸으로 직접 느껴버렸다. 

'졌어. 그것도 둘 모두에게……' 

상상도 못한 일이다. 자신이 패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있던 두 명의 사 

내에게 모두. 그것도…… 너무나 완벽하게. 

이렇게 맥없이 당하니 할 말이 없다. 약속은 지켜야 하니 물러서야 하는데 

그러자니 도저히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약속은 지키겠지요?" 

"…… 그러죠. 약속이었으니까요. 한 가지만 물을게요. 제가 당신이 절 제 

압해서 검저유혼을 사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걸 어떻게 안 거죠?" 

"그저 감이었을 뿐이오." 

"감이었다고요?" 

"그렇소." 

그 말을 듣고 나서 당산희는 더 이상 들을 말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당 

산희로서는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 나고 싶었다.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그 

녀는 홀로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당산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궁진은 혀를 차면서 입을 열었다. 

"휴~ 한 배를 탄 동료끼리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좋은데 말이야. 안 

그런가 휘?" 

"…… 진짜 감이었나?" 

"이봐, 자네까지 왜 대답한 걸 또 대답하게 하나. 그런 걸 거짓말 할 필요 

도 없는데 내가 뭣 하러 그리 말했겠나." 

여운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돌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 봤다. 그리 

고 그런 여운휘의 옆에 남궁진이 털썩 주저앉았다. 

눈은 하늘로 향하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남궁진이 갑자기 끼어들어 손도 봐주기 전에 끝난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건 큰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남궁진이다. 

이 사내는 여운휘에게 조차 놀람을 주고야 말았다. 

'감이라……' 

여운휘였다고 해도 방금 그것은 성공했을 것이다. 물론 여운휘는 검병으로 

막는 게 아닌 당산희의 목으로 검을 가져다 댔을 것이다. 남궁진은 불가능 

하다, 하지만 여운휘는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오히려 남궁진 

의 수법에 감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었고,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었기에 그토록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일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남궁진은 결코 우습게 볼 수 있는 사내가 아니다. 

여운휘는 남궁진이 마음에 들었다. 전혀 사심이 없는 듯한 눈빛과, 사람에 

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 정중함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점점 사이가 친해지 

면서 여운휘는 그와 가까이 하기 꺼려졌다. 

지금은 같은 편이지만, 결국 여운휘와 남궁진은 적이다. 

'결국 나와 이 자 둘 중 한 명은 다른 사람을 베야 할 거다.' 

벨 수 있을까? 남궁진이라면 자신을 베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운휘 

는 반드시 베야 한다. 유설린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남궁진을 바라보며 여운휘는 고개를 돌 

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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