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기수식을 취하듯이 검을 갈지(之)자로 그은 후 높이 치켜들었다. 어
깨 위까지 올라서 수평으로 눕혀진 검은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자신의 이빨
을 들이밀고 있었다.
하얀 검날이 부르르 떨렸다.
사무린의 얼굴에서 한 줄기 땀이 흘러 내렸다.
'마지막 기회야.'
더 이상의 기회는 오지 않을 거다. 사무린은 떨리는 검을 강하게 움켜쥐어
고정시키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사무린의 검 끝에 모든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진린
은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하나의 강맹한 기운이 피어오르
며 앞으로 터져 나갔다.
사무린의 검 끝과, 진린의 지력이 부닥쳤다.
퍼엉!
사무린의 검날이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박살이 난 검날은 하늘
로 솟구치더니 곧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무린은 공격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진린
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진린 또한 그녀를 바라봤다.
"큭, 큭큭!"
진린이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무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좋아, 내 수하가 되는 조건으로 네 목숨을 살려주겠다. 단, 함부로 배신을
한다면 바로 죽게 될 거다. 배신을 할거라면…… 완벽한 후에나 해라."
사무린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느꼈다.
애초부터 이기기 위해 검을 휘두른 것이 아니다. 사무린은 잘 알고 있다. 자
신이 저 자의 상대가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도박을 했다. 자신의 실력을 보여 줄 도박이었다. 그리고 그 도박
은 성공했다.
"오늘 일에 대해 함부로 발설하지 마라. 알겠지만 이 일에 대해 함부로 떠
들고 다닌다면 네 목숨은 사라질 거다."
사무린은 바보가 아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러한 짓을 범할 리가 없다. 사
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벌이지 않을 테니."
장강수로십팔채를 거쳐 누남천과 여운휘는 마침내 무림맹에 도달했다.
청삼과는 장강수로십팔채에서 벗어난 후 헤어졌기에 일행이 둘이 된 지는
오래였다. 여운휘가 무림맹에 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일전에 악양유
가를 만들었을 때 여운휘는 유설린과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있다.
그때는 불청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엄연히 무림맹 쪽에
서 초대를 한 손님의 입장이 되어 버렸다.
또한 예전에 여운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소졸(無名小卒)이었다. 하
지만 지금은 다르다. 가짜 이름이긴 하지만 진군휘라는 이름은 자신도 모르
는 사이에 무림 인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있다.
"아마 두 번째로 알고 있는데."
"맞소."
"기분이 색다를 것 같군. 예전과 지금이 엄연히 입장이 달라졌으니까."
누남천은 여운휘를 바라보다가 그가 아무런 말이 없자 문을 향해 다가갔
다. 무림맹의 문을 지키던 무인은 누남천의 모습을 보고 황급히 인사를 건
넸다.
"문을 열어라."
"아, 예."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수문위사는 문을 열었다. 누남천과 여운휘는 무림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지금쯤이면 누남천이 왔다는 소식을 무림맹의 수뇌
부들도 알았을 거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멀리서 몇몇
의 무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 대협 오셨소이까?"
"오랜만이외다. 용 대협."
막 누남천에게 말을 건 노인은 용천승(龍天昇)이라는 자다. 이미 무림맹 쪽
에서는 누남천에게 전서를 받았다. 그 탓에 그가 장강수로십팔채를 회유했
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장강수로십팔채와 좋게 이야기를 나누었더구려. 대단한 수완이오."
"감사한 말이구려."
"그나저나 그렇다면 지금 뒤에 있는 그 친구가 진군휘라는 신성이오?"
"그렇소."
여운휘는 용천승이 자신을 쳐다보자 포권을 취해 보였다.
"내 이름은 용천승이라고 하네. 자네의 이름에 대해서 일직이 들어봤지."
용천승은 여운휘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최근 무림에서 가장 큰바람을
일으키는 사내이자, 젊은 나이에 엄청난 무공 실력을 지녔다고 소문이 자자
한 자다. 더군다나 누남천에게 들은 바로는 수황과의 접전에서도 크게 밀리
지 않았다 하니 가히 미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다.
용천승은 여운휘를 보며 내심 욕심이 생겼다.
솔직히 말해 저 정도 되는 인물은 만나기 힘들다. 그는 여운휘를 자신의 제
자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무상검제의 후손인 이상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딸이라도 있다면 사위라도 삼고 싶은 게 솔직한 지금의 심정이다. 그렇게
만 된다면 저 사내를 자신의 제자로 키운다 해도 크게 욕 될 게 없기 때문이
다. 하지만 용천승은 아직도 홀아비 신세다.
용천승은 태어나서 자신이 홀아비였던 것이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은 처
음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소. 군사와 만날 약속이 있어서 말이오."
"아, 이런 내가 바쁜 사람들을 잡아 놓고 괜한 시간만 축내게 했구려. 그럼
둘 모두 나중에 다시 뵙시다."
인사를 마친 용천승은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누남천은 잠시
멀어져 가는 그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군사를 만난다는 말에 여운휘는 종리회연이 생각났다. 여운휘 또한 무림맹
의 군사인 종리회연을 만난 적이 있다.
누남천을 따라 여운휘는 종리회연의 거처로 갔다. 일전에 와봤을 때와 크
게 변하지 않은 모습에 여운휘는 왠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았다.
문 앞에 선 누남천이 입을 열었다.
"군사."
"오셨습니까!"
종리회연이 급하게 문을 열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성공하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아, 그보다 안으로
드시지요."
종리회연은 누남천과 여운휘를 자신의 방안으로 들게 했다. 손수 직접 차
를 만든 그는 누남천과 여운휘에게 한 잔씩 따라주었다.
"진 소협도 오랜만이십니다."
"저 또한."
"여전히 말수가 적구려."
"저 녀석하고 여행을 다니는 내내 심심해 죽는 줄 알았네. 무슨 말을 해도
대꾸도 안 하니 원."
여운휘는 누남천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나서 여운휘는 종리회연에게 말했다.
"악양유가는 아무런 일도 없소?"
"아무런 일도 없으니 걱정하실 것은 없소. 어지간히 신경을 쓰시는 구려."
"……"
여운휘는 악양유가에 아무런 일도 없다고 하자 그 후부터는 아무런 말도 하
지 않았다. 그동안 누남천과 종리회연은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
를 나누었다. 여운휘는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그들의 이야
기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창 이야기를 하던 중 종리회연이 갑자기 슬쩍 여운휘를 바라봤다.
"진 소협은 피곤하신 것 같은데 이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제 수하가 쉬실
곳을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렇게 하겠소."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가 막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
이다. 역시 아직까지 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정도로 무림맹은 허술치
않다. 종리회연은 밖에 있는 자신의 수하를 불렀고, 그는 여운휘를 안내하
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예전에 쉬었던 곳과 다른 곳으로 안내되었다. 일인용 방인데도 불
구하고 안이 무척이나 크다. 호화로운 장식품들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무슨 일이 있으시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절 찾아오십시오."
고개를 꾸뻑한 그는 문을 닫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여운휘는 잠시 방안을
살폈다. 이상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완벽하게 믿지는 못하고 있지
만 의심하고 있지도 않다.
예전에는 뒤에 감시자를 붙였다. 헌데 지금은 아무도 그의 뒤를 따르지 않
았다.
여운휘는 침상에 몸을 기대고 앉아 검을 꺼냈다. 검의 이가 많이 무뎌졌다.
아무래도 조만간 검을 하나 더 마련해야 할 듯 싶다.
긴 여정 탓인지 여운휘는 침상에 몸을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의 왼손에는 검이 들려 있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여운휘는 문 쪽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눈
을 떴다. 처음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거늘 그건 아닌 듯 싶다. 문
바로 앞에서 떠들고 있고, 대화 사이사이에 진군휘라는 자신의 가명도 들어
가 있다.
여운휘는 짜증이 났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밤을 새고
떠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운휘가 문을 열자 그밖에 모여 있던 5명 가량의 사내들이 화들짝 놀라 그
를 쳐다봤다. 여운휘는 귀찮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아, 그게……"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안에서 들어서 알고 있다. 요즘 무림에 갑자기 나타난
젊은 고수인 자신을 보고 싶다고 떠드는 이야기를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듣
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운휘는 이런 자들에게 휩쓸려 다니고 싶지
않았다.
막 여운휘가 다시 문을 닫으려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멈추
게 했다.
"이봐 진군휘!"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다. 여운휘는 닫으려던 문을 다시 열고 옆으로 고개
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일전에 만나 본 적이 있는 한 사내가 웃으면서 여운
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일세!"
여운휘는 그 사내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순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
른 자들이 찾아왔을 때는 문을 닫으려 했던 그로서는 상대방에게 충분히 호
감을 가졌기에 한 행동이다.
문을 닫은 여운휘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남궁진."
남궁진은 여운휘에게 다가와 호탕하게 웃으면서 어깨에 손을 걸쳤다.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궁진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대했다.
"요즘 꽤나 이름을 날리더군."
"그보다 어깨에 올린 손이나 치우지 그래."
여운휘는 차갑게 말했지만 남궁진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알았네, 알았어. 여전하군 그 성격."
"내 성격에 대해 네가 알 정도로 우리 사이가 가까운가?"
"네 성격이 차갑다는 건 잘 알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라도 한 잔 하러
가는 게 어떻겠는가."
남궁진은 여운휘가 너무나 반가웠다.
일전에 남궁진은 남궁세가 가주인 남궁철의 말을 전하기 위해 운문세가에
찾아 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궁진은 여운휘를 만났다.
남궁진은 여운휘에게 패했다.
그것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했다. 그건 남궁진에게 좋은 경험이 되
었다. 자신과 동년배 중에서는 적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만을 버렸
다. 그리고 호적수가 생겼다. 호적수가 있다면, 그 상대를 보면서 무공을 익
힌다면 보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거다.
그 탓에 남궁진은 여운휘와 만난 적은 단 한번뿐이지만 평생의 지기처럼 친
근하게 느껴졌다.
여운휘 또한 남궁진이 싫지는 않았다. 강한 자존심과, 지지 않겠다는 오기
도 마음에 든다. 그 탓에 여운휘는 남궁진을 보고 문 밖으로 나선 것이다.
"자꾸 빼지 말고 따라오게!"
남궁진은 여운휘의 소매를 잡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남궁진을 따라 걸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주
루였다.
"어서 들어와."
"……"
여운휘는 장막을 걷으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일전에 하북팽가의 팽산위와
싸웠던 주루다. 시간이 지났다고 한들 잊을 리가 없다. 시간이 흘렀거늘 변
한 건 없다. 아니, 몇몇의 무인들이 일어서 자신의 옆에 있는 남궁진을 향
해 포권을 취한다는 것만 변했다.
"저 쪽으로 가서 앉자고."
남궁진은 간단한 목례로 그들에게 답하고 주루의 구석을 가리켰다.
이 주루에 있는 대부분의 자들은 남궁진을 알고 있다. 남궁진이라는 이름
이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강호십대후지기수, 다음 대 남궁
세가의 가주가 될 지도 모르는 사내. 그리고 그 뛰어난 무공 실력으로 현 무
림에서 두각(頭角)을 나타내는 사내를 모를 리가 없다.
"그래, 그간 잘 지냈나?"
"그럭저럭."
"자네가 온다는 말을 듣고 며칠 전부터 무림맹에서 기다렸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군."
남궁진은 점소이에게 안주와 술을 시키고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 남궁진은 남궁세가에서 무공을 익히는 데 열중이었다. 여운휘
에게 패한 것이 그에게 무공 수련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그러던 와중
남궁진은 여운휘가 무림맹에 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남궁진은 하던 모든 수련을 덮어두고 무림맹을 향했
다.
그리고 며칠 기다리다가 지금 이렇게 여운휘를 만난 것이다.
"소가주님은 잘 계시나?"
"헤어진 지 조금 됐다. 군사에게 들어보니 아무 일도 없다고 하더군."
"자네 아주 유명인이 되었어."
남궁진은 웃으면서 말했다.
수많은 강적들과 싸워 이긴 여운휘였지만 무림에서 그 이름은 그리 크게 알
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운문세가의 격전에서 혈리추검 공청을 꺾었
다. 그건 결코 젊은 나이의 무인이 벌일 만한 일이 아니다.
당연스럽게 그 일은 크게 회자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여운휘가 여태까지
했던 행적들이 무림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북팽가의 팽산위를 일수
에 꺾었고, 단비쌍조 여험을 꺾었으며 호북제일살수인 공청마저 눕혔다.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무림에 엄청난 신성이 탄생한 것이다.
"그다지."
여운휘는 그다지 탐탁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 자신의 이름 값이 올
라가야 한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이토록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여운
휘는 익숙지 않다.
날아온 음식과 술을 받아든 남궁진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남궁비룡 아닌가. 왔다는 소리는 들었거늘, 이제야 보는 군."
남궁진에게 말을 건 것은 그와 동년배로 보이는 사내였다. 덩치는 호리호리
한 편에 얼굴은 미남형이다. 그렇지만 약간 올라간 눈꼬리와 미묘하게 비틀
린 입술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줬다.
그는 모용세가의 모용취였다.
"오랜만이군."
"요즘 무공에 빠졌다고 하던데 무슨 일로 이 먼 무림맹까지 온 겐가."
"자네 보러 온 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무슨 말을 그리 섭하게 하는가. 그나저나 자네 앞에 있는 저 분은 뉘신가."
모용취는 여운휘를 힐끔 바라보며 남궁진에게 물었다. 모용취는 강호십대
후지기수의 하나다. 그리고 모용세가 가주의 외아들답게 성격 또한 편협
(偏狹)하다. 그 탓에 남궁진은 평소부터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모용취는 겉멋만 잔뜩 든 팽산위와는 또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편
협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자이기도 했지만 남궁진 또한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무인이기도 했다.
"내 친구네. 됐는가?"
"호오! 자네의 친구? 자네 같은 자가 친구라고 부를 만한 자도 있군 그래.
그리고 내가 물어본 건 저 자의 이름이네 이름."
자꾸 재촉하는 모용취의 말에 남궁진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아
미가 찌푸려진 것을 보고 여운휘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다.
"저 친구의 이름은 진군휘라고 하지."
"진…… 군휘라는 그 사내가 저 자라고?"
모용취는 진정으로 놀랐다. 말로만 듣던 사내다. 현 무림에서 갑자기 나타
나 이름을 날리고 있는 무인으로 일전에 팽산위를 꺾었던 자다. 팽산위를
꺾었을 때는 그다지 대단치 않게 봤다. 팽산위 정도야 자신도 이길 수 있는
상대이지 않은가.
그토록 겉멋만 든 자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수치다. 그렇기에 얕봤
다. 강하다고 해 봤자 어느 정도일 거라 생각했다. 헌데, 그렇게 얕봤던 사
내가 혈리추검 공청을 꺾었다. 혈리추검 공청은 모용취로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다.
모용취는 몸을 돌려 여운휘를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뵙게 되어 반갑구려 진 소협."
여운휘는 귀찮은 탓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포권을 취해주고는 다시 주
저앉았다. 모용취는 남궁진과 여운휘를 번갈아 바라봤다.
도대체 둘은 어떤 사이일까?
자신이 아는 바로는 남궁진이 저 사내와 만날 기회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
면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나 하는 궁금증에 물었다.
"둘은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나 보군."
"아니,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지. 그런데 자네는 할 일도 없나? 가서 일이
나 좀 보게."
여운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잔에 찬 술을 들이켰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술잔으로 저 시끄러운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 귀가 따가
울 정도로 떠드는 사내를 여운휘가 좋게 볼 리 없다.
한편 모용취는 남궁진의 마지막 말에 화가 솟구쳐 비웃듯이 말했다.
"후후, 무공을 좋아하는 자네와 진 소협이 싸운다면 재미있겠군 그래. 과
연 누가……"
"내가 졌네. 됐나? 그럼 좀 가게. 이 친구와 조용히 술 좀 마시고 싶으니까."
"……"
모용취는 일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설마 싸워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
았다. 그저 자존심을 건드려 보려고 뱉은 말인데 끝나기도 전에 남궁진이
대답했다. 그것도 너무나 태연하게 자신이 패했다고 말한다.
모용취가 아는 남궁진은 자존심이 강한 자다. 자신의 패배를 그토록 쉽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쉽게 대답했다. 그건 곧 그 싸움에서 자신이 진 것을 인정했다는 거
다. 그건 웬만해서는 안 된다. 깔끔한 패배가 있었을 테고 그 탓에 인정한
거다.
모용취가 또 무엇을 물으려 하자 남궁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술을 들었다.
그는 모용취를 쏘아보다가 말했다.
"난 이만 나가 보겠네. 나가게 군휘."
여운휘 또한 저 시끄러운 사내와 같이 있을 생각이 없었던 차에 자리에서
일어나 남궁진의 뒤를 따랐다.
"나중에 봅시다 진 소협!"
모용취는 문 밖으로 나가는 여운휘에게 말했다. 모용취에게 여운휘는 매력
적인 인물이었다. 현 무림에서 가장 주목받는 자 중 하나이니 당연하다. 뽐
내기를 좋아하는 그로서는 여운휘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여운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남궁진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이미
밖은 어두워 져 있었다.
나가기가 무섭게 남궁진은 뒤를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시끄러운 새끼. 뭐 저리 조잘대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안 그런가?"
고개를 돌려 주루를 바라보던 여운휘가 남궁진의 말에 답했다.
"…… 죽이려다가 참았지."
"푸하하! 역시 자네는 말을 참 재미있게 한단 말이야. 그나저나 술을 샀으
니 마시기는 해야 될 테고, 저 곳에는 시끄러운 놈이 있으니 주변에 전경 좋
은 곳에 가서 한 잔 하는 건 어떤가."
"마음대로."
"그럼 저기로 가세."
남궁진은 여운휘를 데리고 무림맹 내부에 있는 정자로 향했다.
정자 주변에 고여 있던 물이 달빛과 별빛에 의해 빛을 터트렸다. 그 정자 위
로 남궁진은 조용히 오르고 있었다.
"여기 앉게. 경관이 좋지 않은가? 내가 무림맹 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네."
"…… 좋군."
"사람들은 참 바보란 말이야. 다른 자들은 이곳을 점심 무렵에 와서 배를
띄우고만 논 다네. 밤에 이토록 아름다운 빛을 뿌리는데 그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
남궁진은 정자의 구석으로 다가가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의 눈이 아래에
서 반짝이는 물로 향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관리를 하는 탓인지 특별
히 얼지 않았다.
"…… 진군휘."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남궁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남궁진과 마찬가지
로 물을 바라보던 여운휘는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난 이곳에 오면 항시 다짐하는 게 있지. 저기 보이는 가?"
남궁진은 반대편을 물 가운데를 가리켰고, 그곳에는 돌로 만들어 놓은 상
이 서 있었다. 여운휘는 고개를 돌려 상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석상은 만들어 진지 오백 년 가량 된 물건이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
혀 그 모습이 변하지 않았지. 대단하지 않은가?"
여운휘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말을 이었다.
"저 석상에는 전설이 있지. 간절히 소원을 빈다면 그 소원을 이루어 준다
는 전설. 그 탓에 예전에는 많은 자들이 이곳에 와서 저 석상을 보고 기도했
지.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러지 않아. 하지만 난 아직도 버릇처럼 이곳에
와 기도를 한다네."
남궁진은 여운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꿈은 말이야, 아무런 생각 없이 검 한 자루를 들고 세상을 도는 거야."
"하면 되는 일이잖아."
"난 말이야 족쇄가 너무 많아. 남궁세가라는 족쇄, 강호십대후기지수라는
족쇄…… 진군휘, 자네의 꿈은 무엇인가."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남궁진을 바라봤다.
꿈이라…… 특별히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다. 꿈이란 것을 가져 본 적이 언
제이던가. 그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그렇기에 사곡에서도 살기 위해
싸웠던 거다.
"……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지."
"그래, 찾았는가?"
여운휘는 남궁진을 바라봤다.
달빛에 취했는지, 별빛에 취했는지 여운휘는 입을 열었다.
"찾았지. 지켜 줄 사람이 생기니 살아야 할 이유도 생기더군."
"후후, 그 여인이로군."
누구인지 지명하지 않았지만 남궁진은 알고 있다.
그는 술병을 하나 여운휘에게 건넸다. 나머지 병 하나를 손에 든 남궁진이
술병을 올렸다.
"마시게."
말을 마친 남궁진과 여운휘는 술병을 들이켰다.
여운휘가 방을 나가자 종리회연은 누남천에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누 대협."
"말하시오 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