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황은 상대하기 꽤나 껄끄럽지."
"……"
"하나 말해 주자면 만약 네가 수황과 싸우게 된다면 물가에서는 싸우지 마. 수중전이라면 네가 필패(必敗) 할거다."
"물가가 아니라면?"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물가에서는 절대 그와 싸우지 말라는 거야."
여운휘는 풍운조의 말을 기억했다.
'물가에서 싸우지 말라고?'
피할 생각은 없다.
'재미있겠군. 물가라……'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물가에서 싸워 보고 싶다. 여운휘는 피할 줄을 모르는 사내다.
여운휘가 과거를 잠시 회상하는 동안 누남천은 차를 한 모금 더 들이킨 후
말을 이었다.
"걱정 말게. 나 또한 수황을 건드릴 생각은 없어. 다만 혁련우는 반드시 만
나봐야 해."
"무림맹의 일이요?"
"네가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그와 만날 수 있게
나 만들어."
"제길!"
왕풍묵은 욕설을 내뱉었다. 여태까지 해 왔던 일들도 어려웠지만 이번 일
은 그 어떠한 것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중대한 문제다.
두려운 건 수황뿐만이 아니다. 누남천의 말대로 그냥 아무 일도 없이 넘어
갈 수도 있다. 문제는 혁련우 또한 만만한 자는 아니라는 거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우두머리다. 결코 만만할 리는 없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분명 생명이 오락가락 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
다. 그렇지만 안 할 수도 없다. 다른 자라면 어느 정도 핑계를 대거나 해서
빠져나갈 수 있다.
허나, 이 앞에 있는 노인에게만은 예외다.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아도, 설령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이 노인이 시키면
해야 한다.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왕풍묵은 비에 젖은 것처럼 땀을 흘
리고 있었다.
그의 비대한 몸 탓에 원래 땀이 많은 체질이기는 하지만 이건 단순히 그 탓
이 아니다.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는 일 앞에서 아무리 그라도 이럴 수밖에
없다.
잠시 앉아서 묵묵히 차만 들이키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겠소. 해 주도록 하지."
"허허, 역시 자네가 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네."
어깨를 두드리며 누남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남는 것 있겠지?"
"물론이오. 몇 개가 필요한 거요?"
"한 개면 충분하네. 나 또한 자네의 장사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럼 저 놈을 따라가시오. 그리고 방에서 좀 쉬고 있으면 내 추후 연락하
리라."
아까 누남천에게 당할 뻔했던 점소이가 쭈뼛거리면서 다가왔다.
왕풍묵은 그에게 간단히 말했다.
"방 하나를 잡아 주고 이 일행이 이곳에 있다는 소문이 새어 나가지 않도
록 해라."
"아, 알겠습니다요 주인님."
점소이가 옆에 서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따, 따라 오십시오."
점소이의 말에 셋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고하게.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소식 있기를 바라네."
"걱정 마시오. 삼일 안에는 어떻게든 결말을 내려 줄 테니."
"훗, 좋은 소식이길 빌겠어."
누남천은 몸을 돌리더니 점소이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응시하던 왕풍묵은 머리를 감싸 안았다.
"망할 자식!"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번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다.
'앞으로 며칠 간 잠자기는 글렀군.'
왕풍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청삼은 며칠 동안 죽을 맛이었다. 도망을 치고는 싶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는 얼마 가지 않아 잡힐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게 이들이 만나러 가는 자가 장강수로십팔채
의 채주인 탓이다. 거기다가 수황이라는 이름을 들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가 없다.
이건 청삼이 사는 세계가 아니다. 비록 녹림도도 어떻게 본다면 무인에 속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수황 같은 자와는 격이 틀리다. 차이가 나
도 너무나 크게 난다. 이토록 거물들이 모이는 데 자신 같은 놈은 그저 갓난
아기 같이 무력하기만 할 뿐이다.
청삼은 왕풍묵이 할 수 없다는 말을 전했으면 했다. 그렇지만 그 꿈도 지금
방에 찾아 들어온 그의 한 마디에 모두 무너져 내렸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면 채주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거요.”
왕풍묵은 약 이틀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
다. 과장을 섞어 얼굴이 반으로 변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만큼 그의 고
초가 심했다는 것이다.
“허허, 내가 매번 신세만 지는 구나.”
“알면 제발 다시 찾아오지 마시오.”
“이런 섭섭하게 우리 인연을 여기서 끝내자는 소린가? 자네와 내가 어떤 사
인데 그럴 수 있겠는가. 내 종종 찾아옴세.”
누남천의 말에 왕풍묵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더 이상의 말싸움은
귀찮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왕풍묵의 말대로 밖으로 나오자 그곳에는 두 명의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
다. 험상궂은 얼굴이 말하지 않아도 정체가 뭔지 알 것만 같았다.
“당신이 누남천이오?”
“그래, 내가 누남천이지.”
“경고하겠소. 아무리 당신이라도 채주님 앞에서 함부로 행동한다면 목을
베어버리겠소.”
“허어, 수적놈들이 감히 나를 협박하겠다는 건가?”
“네 놈이……!”
“그만 해라!”
막 누남천에게 검을 뽑으려는 수적을 옆에 있던 사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
다. 검을 뽑으려 했던 사내보다 상관이었는지 그는 제지를 하자마자 행동
을 멈췄다.
행동을 제지한 사내는 포권을 취하면서 누남천에게 말했다.
“제 수하가 다혈질이라서 무례를 범했소. 광한검(光寒劍)께서 이해를 해 주
시길 부탁드리오,”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지. 그나저나 급한 일이니 어서 채주
에게 안내했으면 하는 군.”
“좋소. 그럼 날 따라오시오.”
그 사내는 옆에 있는 자신의 부하에게 눈짓을 하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가
볍게 발을 굴렀을 뿐인데 순식간에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간다.
“호오……”
놀랍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은 누남천은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한참을 달리던 두 사내는 물가에 이르자 준비 시켜 놓은 배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누남천을 비롯한 삼인이 모두 배에 올라서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
했다.
강은 고요했다.
삐꺼덕거리는 노 젓는 소리만이 가득히 사방을 에워쌌다. 추운 날씨 탓인
지 강의 군대 군대에는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그렇게 배는 천천히 강을 건
너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오래 걸리는 가?”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소. 하지만 또한 짧지도 않으니 눈을 붙이
는 게 좋을 거요.”
사내의 말에 누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편하게 늘어지게 만든 그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배는 조용히 강을 거스르며 목적지를 향해 물살을 갈
랐다.
“자네들은 누구인가?”
“아 저, 저는……”
청삼은 순간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 근방에서 도적질
을 하던 자라고 한다면 이들이 결코 곱게 대할 리가 없다. 이곳과 먼 곳이라
면 전혀 문제 될 일이 없지만 청삼은 근방에서 도적질을 하던 녹림도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진군휘라 하오.”
여운휘는 물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짧게 답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두 사내의 얼굴에 일순 놀람의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베일에 싸인 듯이 특별히 알려지지 않은 무인이다. 하지만 요즘 진군휘라
는 이름만큼 매력적인 것도 흔치 않다. 강호의 십대후지기수를 간단하게 꺾
어 버릴 정도의 실력자라면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앞에 있는 사내가 진군휘라고 하자 그들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진군휘라는 이름 들어봤지. 외모가 낯설다 했더니 요즘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는 진 소협이셨구려.”
“그렇소?”
무관심하다는 듯이 답한 여운휘는 여전히 강가에서 시선을 때지 않았다.
강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묵묵히 강을 바라보던 여운휘의 눈이 순간 꿈틀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이 배 뒷전으로 움직였다.
파앙!
물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잉어가 먹이를 잡기 위해 뛰어 오르듯 물 안에서
검은 옷으로 온 몸을 가린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덟에 달하는 그들
은 배의 가장자리에 모두 내려서며 재빠르게 검을 뽑았다.
말은 필요 없다는 듯이 그 여덟 명은 재빠르게 살초를 전개했다. 누워 있던
누남천을 향해 여덟개의 검이 이빨을 드러냈다.
파바박!
누워서 잠을 자고 있던 누남천은 순식간에 솟구쳐 오르며 선풍각을 펼쳤다.
수십 번의 발차기는 그 여덟 명의 손이나 어깨를 쳐냈다. 뒤로 한 걸음 물러
서나 했더니 다시 그들이 검을 뽑고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하는 놈들이냐."
"죽을 놈이 알아서 무엇하느냐!"
슈슈슉!
검이 뱀처럼 휘어지면서 누남천에게 다가왔다. 문제는 하나 뿐만이 아니라
는 거다. 사방을 에워싸듯이 다가오는 그들의 검은 아무리 고수라 할 지라
도 흠칫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누남천은 간단하게 그 모든 공격
을 피해냈다.
그는 몸을 비틀며 공중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검은 모두 허공을 갈랐고 그의
몸은 공중에서 수많은 변화를 보이며 떨어져 내렸다.
막 여운휘가 검을 출수하려는 순간 그는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물체를 발견
했다.
'뭐지?'
그 의문은 곧 해결 되었다.
배가 다가 오고 있었다. 약 십여 척에 달하는 배에는 지금 기습을 해 온 팔
인과 마찬가지의 검은 무복을 한 자들로 가득했다.
여운휘는 급히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 한 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둘은 기습을 당한 상황이에도 불구하고 침착했다. 아니, 오히려 웃고 있
었다.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
"무슨 짓인지 모르겠소?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지금 이 행동 죽고 싶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죽어 줄 수는 없지!"
사내의 말은 신호가 된 모양이다. 배 위에 있던 그 둘은 뒤를 향해 몸을 날
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다가오던 배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제, 제길! 이게 무슨……"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모양이야."
청삼은 누남천의 말에 머리가 피로 솟구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간다는 것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살려 준다는 말을 믿었기에
따라왔다. 그런데 기습을 당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장강수로십팔채
의 인물에게서부터.
살 수도 없을 테고, 산다고 해도 평생을 도망다녀야 할 거다.
배 열 척이 여운휘가 있는 배를 감싸 안고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배에 있
던 노 젓는 자 또한 동료였는지 그들이 등장하자마자 그는 강으로 몸을 던
진지 오래다.
한 사내가 높이 손을 들자 배에서 무인들이 활에 화살을 가져다 댔다. 그리
고 활을 하늘로 향하게 했다.
"쏴라!"
수십 개에 달하는 화살이 하늘을 덮었다.
피하고자 하면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지금 있는 곳이
땅이 아니라는 거다. 배 위다. 피할 공간도 없고, 강으로 몸을 던져서 피한
다면 바로 꼬치가 될 거다.
피했다고 또한 능사는 아니다. 화살은 배에 구멍을 뚫을 것이고, 곧 나무 배
는 물 속으로 잠겨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청삼이 당황한 것과는 다르게 누남천과 여운휘는 태연했다.
"동남(東南)!"
누남천의 외침을 청삼은 알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여운휘는 그 말이 무엇
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몸을 틀은 여운휘는 재빠르게 뱃전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들을 향해 자신의
검을 뽑아냈다.
채채챙!
화살들을 향해 여운휘의 검에서 검기가 뻗어져 나갔다.
날아들던 화살은 그 힘을 잃고 그대로 물로 떨어져 버렸다. 그건 누남천이
맡은 서쪽과 북쪽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화살을 쏘게 지시했던 사내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다시 한 번 신호
를 보냈다. 그 신호를 본 배들은 천천히 가운데에 있는 그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근접전인가?"
누남천은 피식 웃었다.
비록 강이라고는 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이 아니다. 혼자라면 버거웠을지
도 모르지만 지금은 누남천 혼자가 아니다.
"널 데리고 오기를 잘 한것 같군."
"그런 말은 이 싸움이 끝난 후에나 하시오."
배가 천천히 흔들렸다.
여운휘는 이토록 강 위에서 흔들리는 배 위에서 싸워 본 적이 없다. 반면 그
들은 이런 싸움에 이골이 나는 자들이다.
하지만 여운휘는 뽑아든 검을 천천히 아래로 향하게 했다.
물 위에서의 싸움이면 어떻고 뭍에서의 싸움이라면 어떠한가.
기본은 같다. 어차피 물이나 뭍이나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오기가 두려운 모양인데, 내가 가마."
상대들의 조심스러운 반응에 여운휘가 옆 쪽에 있는 배를 향해 몸을 날렸
다.
그의 검이 번뜩였다.
다섯 장 이상 떨어져 있는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도약으로 여운휘
는 그 배에 착지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복면인들은 여운휘의 움직임에 놀
라버리고야 말았다. 아무런 것도 없이 단순한 도약만으로 다섯 장 이상을
뛴다는 건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며 휘두른 여운휘의 검을 맨 앞에 있던 사내가 몸을
던지며 막아냈다.
'좋아! 막았……'
빠악!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여운휘의 검을 막았다. 그렇지만 검이 막히는 순
간 여운휘의 발이 그자의 얼굴에 정확히 박혔다. 이빨이 깨지면서 그는 게
거품을 물었다.
땅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여운휘의 발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수적들은 여운휘가 착지하는 순간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허나, 여운휘가
한 발 빨랐다.
그의 발이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어, 어어?"
그 한 번의 움직임은 나무 배를 완벽하게 반 조각을 내버렸다. 균형을 잃은
그들은 모두 물에 빠져 버렸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뱃전으로 몸을 날린 여
운휘는 다시 한 번 도약했다.
"저 놈을 놓치지 마라! 화살을 싸라! 절대 배에 올라타게 하지 마!"
여운휘로 인해 완벽하게 배가 반 조각이 나 버리자 이 무리의 대장으로 보
이는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그런 그의 고함을 들은 몇몇의 복면인들은 재
빠르게 활에 화살을 재더니 여운휘를 향해 날렸다.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여운휘였기에 피하는 건 상당히 어려워 보였
다.
화살이 그를 고슴도치라도 만들 듯이 매섭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여운휘의 몸이 공중에서 빙글 돌았다. 그 움직임은 마치 물과도 같았다. 공
중에서 몸의 방향을 바꿨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화살을 피하며 그대로 떨어진 그의 검이 바로 아래에 있는 배에 박혔다.
촤악!
여운휘는 배에 박힌 검을 앞으로 밀어서 더욱 크게 구멍을 만들어 버렸다.
복면인들이 채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는 뱃전을 밟고 뒤로 몸을 날렸다. 이
배에 있는 자들도 아까의 그들과 마찬가지로 강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여운휘의 모습을 보며 청삼을 놀라버리고야 말았다.
그의 모습은 가히 신출귀몰(神出鬼沒)이었다. 뱃전을 밟으면서 다른 배로
도약하는 그의 모습은 천신(天神)이 강림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강호의 고수라면 다 저런 것일까?
청삼은 내심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비록 산에 처박혀서 지냈지만
자신의 무공 실력으로 무인들과도 어느 정도 손속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
다. 그렇지만 여운휘의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쑥 들어가 버렸다.
빠각!
그때 막 한 대의 배가 여운휘의 검에 의해 강으로 잠겼다.
'내가 미쳤지. 저런 놈의 전낭을 털렸고 했다니……'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만약 저 자가 죽이려 했다면…… 이미 자신은 이
곳에 없었을 게다. 저 자는 그러고도 남을 충분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분하지만…… 백 번, 아니 천 번을 싸운다 해도 단 한 번도 이길 수 없다.
누남천이 있던 배를 포위하려던 배가 이제는 오히려 뒤로 물러서고 있다.
배 위에서 신호를 보내던 자는 급하게 손을 흔들었다. 누남천을 상대한다
고 생각했기에 이런 일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자신들의 배를 박살내는 것이 누남천이 아닌 젊은 사내
라는 거다. 누남천과 저 젊은 사내 둘이라면 이 인원의 갑절이 와도 이길
수 없다.
'급해. 서두르지 않는다면 모두 강에 빠져 버리고 말 거다.'
죽고 살고의 문제가 아니다.
총채주는 누남천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막아
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저지해야만 하는 거다.
그게 총채주의 명이라면 지켜야 한다.
뒤로는 빠졌지만 도망치려는 게 아니다. 지금 물러서지 않고 욕심을 부린다
면 궤멸할 게 뻔하다.
'정면으로 부닥치면 승산이 없다. 그렇다면……'
정면 대결로 이길 수 없다면 다른 수를 쓸 수밖에 없다. 만약 이곳이 물가
가 아니었다면 실행 할 수도 없었을 일.
하지만 이곳은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물 위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자를 만났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 건 당연하다.
'이것도 실패한다면 더 이상의 방법은 없어.'
파팡!
그는 허리에 달려 있는 긴 철쇄(鐵鎖)를 꺼내들었다. 그의 그러한 행동을
본 다른 복면인은 급하게 그에게 갈고리를 건넸다.
철컥!
철쇄와 갈고리가 하나로 합쳐졌고, 그 모습을 본 다른 배에 있는 자들도 모
두 같은 무기를 꺼냈다.
그 젊은 사내는 다른 배를 박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복면인
의 대장이 손을 흔들었다. 하나가 되어 버린 무기 수십 여 개가 누남천이 있
는 배로 날아들었다.
누남천은 재빠르게 검을 뽑았지만 무기들은 그에게가 아니라 타고 있는 배
를 향해 이빨을 들이댔다.
텅! 터텅!
철쇄의 끝에 걸린 갈고리가 나무 배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옥죄었다. 배는
사방에 걸린 채로 힘을 가하고 있는 갈고리 탓에 당장이라도 사방으로 비산
(飛散) 되며 박살이 날 것만 같았다.
이대로 조금만 힘을 준다면 당장이라도 나무 배는 사방으로 조각 조각이 나
버리고야 말리라.
배를 막 박살내기 위해 힘을 가하던 복면인들의 대장은 여운휘를 보며 피
식 웃음을 흘렸다. 멍청하게 박살을 내려는 배로 다시 올라섰다. 아무리 강
해봤자 물에 빠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사냥감에 불과하다.
"허억!"
막 힘을 가하던 그는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 사내가 움직였다. 먼 거리라 단 한 번의 도약으로는 불가능 할 거라 생각
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가오고 있다.
갈고리를 박기 위해 뒤에 달아 놓은 철쇄를 밟으며 그 사내가 달려오고 있
었다.
두 배의 거리는 근 이십여 장에 이를 정도였다. 분명 도약으로는 불가능했
을 거리다. 그런데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철쇄가 오히려 저 자에게 길을 내
줘버렸다.
"피해라!"
재빠르게 갈고리와 철쇄를 분리했지만 이미 공중으로 솟구친 후다.
여운휘의 검에서 검기가 이는 것을 본 그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물 안
으로 뛰어 들었다.
퍼엉!
물방울이 하늘로 솟구쳤다. 여운휘의 검기가 강에 흐르고 있는 물과 함께
배를 이등분했고, 그 탓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떨어져 내린 여운휘는 그 나무의 파편 중 하나에 가볍게 올라섰다.
정상적으로는 당장이라도 물 속에 가라앉아야 했다. 하지만 작은 파편 위
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누남천의 눈이 조금 커졌다.
'대단한 경신법(輕身法)이군.'
무력답수(無力踏水)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저 정도로도 충분히 대단
한 거다. 입장이 바뀌어 저기에 서 있는 게 자신이라면 저 정도로 해낼 자신
이 없다.
'역시 무상검제…… 대단한 놈을 길러냈어. 범의 후손다워. 대단해, 아주 많
이.'
한편 물 속에 빠져 버린 복면인들의 대장은 고개를 들자마자 자신의 목에
닿아 버린 검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예의주시 했다."
"……"
"네가 이 무리의 두목이라는 건 아까부터 알았다. 뭐냐? 뭐 때문에 너희 장
강수로십팔채가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 총채주님이 너희들을 만나는 걸 원치 않는다. 적당히 혼내서 돌려보
내라는 총채주님의 명(命)이 있었다. 난 그것을 따른 것뿐이고."
여운휘는 고개를 돌려 누남천을 바라봤다. 누남천은 옆에 있던 청삼을 툭
툭 쳤다.
"이봐 노 좀 저어봐. 저기까지 가야지."
이미 주변에 있던 다른 배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장이
당해 버렸다. 움직이게 할 구실점을 잃어버린 거다.
누남천의 말에 청삼은 내심 투덜거리면서 노를 젓기 시작했다. 익숙지 않
은 탓에 움직임이 더뎠지만 반 각 정도 움직이자 여운휘의 옆까지 배가 다
가왔다.
"어떻게 할거요?"
"만나야 해."
"만나기 싫다는 것 같은데 어떻게 만나겠다는 거요?"
"아무렴 어때. 난 반드시 총채주를 만나야 한다."
누남천은 물 위에 떠서 주위를 살피는 사내에게 말했다.
"말해. 총채주가 어디에 있는지."
"웃기지 마. 말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웃음이 걸렸다. 누남천은 웃으면서 그의 잠겨 있
는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크윽!"
누남천이 손을 들어올리자 그는 얼굴이 붉어지며 들어올려졌다. 얼굴에서
핏줄이 튀어나왔다. 당장이라도 온 몸에 있는 혈관이 터져 죽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말해라."
"우, 웃기지……"
"말해! 네 놈 입에 몇 천명의 목숨이 달렸다!"
항상 웃고 다니던 누남천의 얼굴이 매섭게 변했다. 그리고 평소의 장난기
어린 듯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지금의 그는 진중 했다. 몇 천명의 목숨이 달
렸다는 대목에서 그의 눈은 그토록 진지할 수가 없었다.
"말해……"
이제는 말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목이 잡힌 그는 거의 죽기 직전
이었다. 눈이 뒤집혔고 컥컥 대기 시작했다.
누남천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여운휘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주먹을 옆으로 내질렀다.
주먹은 누남천의 옆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여운휘는 조용히 자신의 손을 들어올렸다. 급하게 친 것이라고는 하지만 손
이 까져버렸다. 뼈가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우습게 볼 상처는 결코 아니다.
암기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반 적인 무공은 아니다. 피와 함께 손에 뭍어
있는 물이 그것을 증명했다.
누남천은 목을 잡고 있던 상대를 배 위에 팽개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마치 배 위에 탄 것처럼 노인은 물 위에 둥
둥 떠 있었다.
누남천과 마찬가지로 여운휘 또한 그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너 같은 애송이가 내 공격을 막은 거냐?"
여운휘는 자신을 애송이라 칭하는 노인을 보면서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감
정 표현이 지극히 적은 여운휘에게 그건 화가 났다는 표시다. 평소였다면
함부로 자신에게 공격을 했다며 길길이 날뛰었을 누남천이 조용 하자 여운
휘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런 여운휘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누남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수황이야."
누남천의 말을 들은 여운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봤다.
누남천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현 무림의 최고 고수 중 하나인 수황이다. 그 이름을 가벼이 볼 사람은 현
무림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은 나의 영역이야. 함부로 설친다는 건 곧 나를 우습게 봤다는 소리
지."
수황이 물 위를 천천히 걸으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누남천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여운휘가 검을 들었다. 그
리고 박살이 난 파편을 이용해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수황은 움직임을 멈췄다.
"설마 네 놈 나와 싸우겠다는 소리냐?"
"상대에게 죽여달라고 목을 내밀고 있을 바보는 아니라서 말이오."
여운휘는 검을 가슴 근처로 들어올렸다.
수황은 상대가 결코 허언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 눈을 보면 안다. 진심이 담긴 눈과 그렇지 않은 눈은 판이하게 다르다.
지금 저 눈은…… 한다면 하는 자의 눈빛이다.
'장난이 아니군. 정말 날 베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수황은 우스웠다. 저런 새파란 애송이에게 당할 자신이 아니다. 그런데 우
스우면서도 대단하다. 자신을 향해 최근 검을 들은 무인이 그 누가 있단 말
인가. 대부분의 무인은 자신의 이름만 들어도 내빼기 일수다.
그에 반해 저 자는 용기가 있다.
'멍청한 놈이지만, 용기가 있는 놈이군.'
출수를 하려던 수황은 손을 내리더니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보였다.
"난 용기 있는 놈이 좋아."
"?"
"내가 안내해 주지."
수황의 말에 누남천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누남천은 수황을 안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만나본 적도 있다.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
었다. 결코 남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자는 아니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결코 거짓이 아닐 거다. 무엇이 무서워 수황이 거짓말
을 하겠는가.
수황이 등장하자 배에 있던 자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분명 자
신의 상관은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인 혁련우(赫連宇)다. 그렇지만 상대
는 그보다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 않은 자다. 더불어 수황은 자신들의
상관인 혁련우마저 스승으로 모시는 자다.
그가 나섰다면 자신들은 죽은 듯이 처박혀야 한다.
그들은 급히 강을 돌면서 사람들을 건져내기 시작했다. 이미 누남천에 관
한 일은 자신들의 손을 떠났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황의 몸이 물을 박차면서 솟구쳤다.
공중에서 한 번 빙글 돈 그는 누남천이 있는 배에 착지했다.
옆에서 수황이 배에 발을 딛는 순간 누남천의 입가가 살짝 씰룩였다. 그 먼
거리에서 도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미동도 없다.
'과연 수황.'
강호십일객이라는 이름은 결코 누가 가져다 준 것이 아니다.
수황이 배에 올라서자 멀리 있던 여운휘도 마찬가지로 몸을 날렸다. 이번에
는 수황이 반응을 보였다.
단순한 애송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 사내의 움직임을 보니 결
코 그렇게 치부할 수가 없다. 십대후기지수 중 하나인가 하고 생각도 해봤
지만 저런 자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뱃전에 내려서 천천히 다가오는 여운휘를 향해 수황이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진군휘요."
"진군휘?"
들어봤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그런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진군휘? 진군휘라……'
무엇인가 알 듯도 한데 그게 장막에 가려진 것처럼 애매하게 생각이 나지
않는다. 수황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자신도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모
양이다. 그런 것 하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실제로 수황은 거의 백수에 들어선 노인이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는 갓 육십 대 정도로 보인다. 백수에 들어선 노
인과는 어울리지 않은 주름살 없는 얼굴, 쭉 펴진 등과 어깨는 그를 육십 대
로 보이게 만들었다.
"분명 들어는 봤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군."
"특별히 무림에서 움직인 적은 없소."
"분명 들어본 이름이거늘……"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수황을 보고 누남천이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수황."
"나를 아는가?"
"누남천이오."
"허! 그 젊었던 사내가 벌써 이토록 늙었단 말인가?"
수황은 그제야 누남천을 알아봤다. 약 이십 년 전 수황은 누남천을 만난 적
이 있다. 그 당시 누남천은 수황을 향해 자신의 검을 뽑았었다. 자신이 수황
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한 수 가르침을 청하며 검을 뽑았던 사내다.
결코 잊었을 리가 없다.
이런 패기를 지녔던 사내는 흔치 않았으니까.
"그럼 저 아이는 네 제자냐?"
"아니오, 저 사내는 무상검제(無常劍帝) 진군악의 후손이요."
"지, 진군악의 후손?"
수황은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여운휘를 바라봤다. 진군악이라는 이름은 그
정도의 힘을 가질 자격이 있다.
"진군악의 후손이라면 지금쯤 무림에서 널리 알려졌어야 할 터인데……"
"저 사내는 악양유가라는 곳에서 지냈소. 그리고 이름도 어느 정도 알려진
편이오. 다만 진군악의 후손이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수황은 누남천의 입에서 나온 악양유가라는 이름을 듣자 여운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분명 들어봤다. 이길 수 없을 거라고 했던 악양유가와 운문세
가의 일전에서 승리는 예상과 다른 쪽으로 가 버렸다.
그곳의 가주를 지켜주는 절정의 무사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봤다.
그 사내의 이름을 사람들은…… 진군휘라 칭했다.
"너로구나! 엄청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한 여인만을 지킨다던 무사. 들어봤
다, 그리고 꼭 한 번 보고 싶었지."
누남천은 청삼에게 살짝 눈짓했다. 맨 처음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삼은 곧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
으며 그는 노를 젓기 시작했다.
"저쪽으로 가라."
수황은 간단하게 손으로 한 곳을 가리킨 후에 배 위에 주저앉았다. 그가 앉
자 그 앞에 있던 여운휘와 누남천 또한 자리에 앉았다.
"실력을 보아하니 십대후기지수들에 비해 나았으면 나았지 부족함은 없어
보이는 군."
"솔직히 말해 십대후기지수들은 이 자에 비하면 한참은 모자라오. 하북팽
가의 팽산위 또한 일장에 날렸던 전적이 있는 사내니."
"요즘 십대후기지수라는 자 중에서 쓸만한 자는 몇 없지."
그때 굳게 닫혀있던 여운휘의 입이 열렸다.
"남궁진."
"음?"
"남궁진 그 자는 꽤 강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