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37)

파앙! 

여운휘가 전살세의 발도를 펼치면서 바로 공격에 들어갔다. 

공청은 그 공격을 막아내면서 웃음을 흘렸다. 손이 아릿하다. 단순히 빠 

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힘까지 실렸다. 분명 상대의 실력이 대단할수록 

공청은 위험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웃었다. 

산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 손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그에겐 쾌감이었다. 

파박! 

다시 이어지는 여운휘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면서 암기를 던 

졌다. 하늘을 빼곡이 매운 암기들이 땅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 

렸다. 

여운휘는 급히 방향을 선회하면서 검을 돌렸다. 오히려 날아들던 일부 

의 암기가 땅으로 내려서는 공청에게로 향했다. 그는 흠칫 놀랐지만 철 

판교(鐵板矯)의 수법으로 피하는 것을 성공했다. 

순간 등골을 스쳐지나 가는 전율이 좋았다. 

살수계에 몸담은 지 삼십 년이 지났다. 첫 살행을 했을 무렵엔 그 날의 

일을 반복하며 악몽을 꾼 적도 있다. 

첫 살인을 한 것은 그가 열 여섯 살 때다. 

죽여야 할 자는 호북에서 유명한 부호인 유 대인의 아내였다. 청부자는 

유 대인의 첩실. 유 대인의 아내가 자식을 낳자 깨끗하게 둘을 정리 해 

주기를 요구 밭았고, 당시 살령대의 대주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감정을 죽였다고는 하나 여인과 아이를 죽이는 것은 쉬운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이는 갓 돌이 지난 상태였다. 공청은 눈을 찔끔 감고 검을 

박아 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왔다. 

"이 멍청한 놈!" 

찰싹! 

뺨을 맞았다. 공청의 눈에 순간적으로 불똥이 튀었다. 입술이 터졌는지 입안으로 비릿한 피가 스며들어온다. 

"죽였는지 확인을 안 해? 네가 그러고도 살수야?" 

아이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도저히……" 

"아직도 모르는 모양인데, 넌 인간이 아니야. 애면 어떻고 병신이면 어때? 죽여달라는 청부가 왔으면 죽이는 거다! 그게 바로 살수다!" 

알고는 있지만 수긍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공청은 몇 차례 더 살행(殺行)을 나간 후에 그 사실을 인정해 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는 호남제일살수가 되었다. 

첫 살인에 두려워하던 공청은 이제 없다. 그가 죽인 자의 수는 공청 자 

신도 모른다. 백 명을 넘기면서부터 숫자 따위는 이미 무의미해졌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감각이 죽어버렸다. 생과 사가 순간적으로 갈리는 

살수의 세계에서 그건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순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등골에 전율 

이 흐른다. 

소매가 한 번 흔들리나 싶더니 공청의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 짧고 얇 

은 비수들이 들려있었다. 

"좋아, 바로 이거야. 네 놈은 너무 재미있어. 네 놈을 꼭…… 발기발기 

찢어 줄 테다." 

비수를 혀로 핥는 공청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여운휘는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상대를 응시했다. 

광인(狂人)이다. 그렇지만 빈틈이 없다. 

지금 오행검법을 쓰기도 그렇다. 오행검법은 필살의 검법이다.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남궁세가의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오행검법을 모른다. 그렇지만 오행검법이 남긴 흔적은 알지도 모 

른다. 

검귀는 일세를 풍미한 고수다. 그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고, 개 

중에는 오행검법의 흔적에 관해서도 남아 있을 지도 모른다. 무림맹 쪽 

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지금 괜한 덜미 잡힐 일은 피하는 

게 좋다. 

오행검법 없이 싸워야 한다. 그렇기에 상대하기가 더 껄끄럽다. 

검의 움직임이라면 분명 여운휘가 한 수 위다. 그렇지만 몸의 움직임은 

공청이 더 낫다. 

'부닥쳐 보는 수밖에.' 

오행검법이 안 된다면 다른 검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 

'그걸 써봐야겠군.' 

실전에서는 아직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무공을 펼치기 위해 여운휘 

가 검을 강하게 쥐었다. 무림맹에 잠입하기 위해 만든 신분인 무상검제 

의 후손이라는 것을 지금 보여야 한다. 남궁세가의 인물들이 봤다면 그 

것만큼 좋은 증거도 없을 거다. 

익숙지 않은 무공을 실전에서 쓴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크다. 그 

렇지만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다. 

남궁벽은 쏟아지는 암기와 검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그 

는 남궁혁련과 남궁리를 지키면서 싸워야 했다. 

'역시 살령대!' 

살령대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봤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암기의 사 

용을 제대로 익혔다. 정파 무인들은 암기 쪽에는 약하다. 암기 쪽은 제 

대로 배우지 않는 탓이다. 

'이대로 간다면…… 아! 가주!' 

남궁혁련과 남궁리를 지키려다 보니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남궁벽 

은 앞으로 달려드는 살수의 목에 검을 꼽아 넣으면서 급히 고개를 돌렸 

다. 이런 혈전이 벌어졌다면 악양유가의 가주도 결코 멀쩡하지는 못할 

거다. 

고개를 돌렸던 남궁벽은 자신의 눈에 들어온 모습을 믿지 못했다. 하얀 

색인 그녀의 옷에 단 한 방울의 피도 튀지 않은 거다. 잔뜩 피를 뒤집 

어 쓴 자신과는 극히 다른 모습이다. 

악양유가 가주의 주변에는 십 여 명에 달하는 살수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나조차 고전을 하고 있거늘……' 

그때 막 악양유가 가주를 향해 달려들던 자 하나가 그 노인의 일장에 배 

가 터져 나갔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움직임이다. 

'허어, 저 노인은 누구기에……' 

남궁벽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도 들지 않고 손으로 상대와 싸우고 있 

는데 전혀 밀림이 없다. 오히려 살수들이 그를 피해간다. 

살수들은 풍운조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아무리 살수들이라 해도 

저런 자는 피하게 되기 마련이다. 가까이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그들을 풍운조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풍운조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운휘가 있었다면 앞장서서 싸웠겠지만 지 

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가주를 혼자 둔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거다. 

피가 들끓었지만 풍운조는 참을 수밖에 없다. 그는 멀리서 공청과 검을 

겨루고 있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실력을 다 발휘하지 않고 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예부터 알 수 

없는 행동을 종종 하는 자다. 여운휘를 바라보던 풍운조는 기척을 느끼 

고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색으로 온 몸을 감싸고 눈만 빼꼼이 내 놓은 살령대의 일인이 천천 

히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풍운조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풍운조가 피식 웃는 순간 그가 검을 찔러 넣었다. 풍운조는 옆으로 비켜 

서며 검을 피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검을 날린 살수의 어깨를 부여잡 

았다. 

"아악!" 

손에 힘이 쫙 풀어졌는지 살수는 검을 놓쳐버렸다. 

"네, 네 놈을 죽여버리겠다." 

"악을 쓸 기운은 남았나 보군." 

"네 놈은 모를 거다, 살수의 무서움을! 내가 죽는다 해도 다른 녀석 

이……" 

"하하하!"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 앞에서 살수가 어쩌고 지껄이니 아니 우스 

울 수 있겠는가. 토끼가 호랑이한테 사냥을 잘 못한다고 말을 했다 해 

도 이토록 우습지는 않을 게다. 

풍운조의 손가락에 보다 더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악을 쓰던 살수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했다. 풍운조가 자신을 향해 검을 들이댔던 살수 

의 얼굴을 향해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가져다 댔다. 

풍운조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터져 나왔다. 상대는 두려웠지만 혈도 

가 잡혔는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 으으……" 

누군가가 봤다면 놀랐을 거다. 살수가 떨고 있다. 그것도 여태까지 살행 

에 나가서 단 한 번도 실패를 한 적 없는 일급 살수다. 그런 살수가 고 

작 노인과 눈이 마주친 탓에 떨고 있다. 

[진정한 살수가 무엇인지 보여줄까?] 

그의 귀로 풍운조의 전음이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강하게 저으면서 거 

절의 뜻을 보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점점 강해지던 안광이 터져 나오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몸이 양단되는 환 

영을 보았다. 그렇게 그는 혼절해버렸다. 

풍운조는 그 자를 땅으로 던져 버렸다. 

멍청한 놈들이다. 이 정도 수였다면 일부만 나오고 나머지는 나무에 숨 

어 기회를 틈탔어야 한다. 만약 백 명이 모두 숨어있었다면 풍운조 또 

한 승부를 장담하지 못했을 게다. 

그렇지만 이렇게 모두 모습을 들어냈다면 풍운조는 일 각 안에 모두를 

죽일 자신이 있다. 

다만 가주를 지켜야 해서 나가지 않는 것뿐이지 풍운조는 능히 그럴 능 

력이 있었다. 

'뭐 이 놈들이야 문제가 안 되겠지만 저 공청이라는 놈…… 소문보다도 

뛰어나군.' 

풍운조는 여운휘가 있는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눈에는 

결코 걱정이라는 감정이 스며들어 있지 않았다.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서다. 공청이라는 자가 소문보다 대단한 

실력자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 사내를 이길 수는 없다. 

'저 놈은 내가 본 실력을 다한다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하는 상대 

다.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공청 정도가 이길 수는 없지.' 

현 무림에서 여운휘를 이길 정도가 되는 무인은 강호십일객(江湖十一客) 

정도 밖에 없다. 

남궁혁련은 눈을 땔 수가 없었다. 

고작 살수라 얕봤던 공청의 무위에 놀랐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서 오히 

려 위를 점하고 있는 여운휘라는 존재에 놀랐다. 한 여인을 지켜주는 것 

에 모든 인생을 버렸다. 고작 사내가 그것뿐이냐고 생각하며 비웃었다. 

사내라면 의당 천하를 논해야 한다고만 생각해 왔다. 

그렇기에 얕봤다. 

겨우 여자 하나 지키며 살아가는 무인 따위가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는 

가. 

그런데 지금 모습은 무엇인가. 아무리 상대를 낮게 보려고 해도 그는 자 

신보다 위였다. 

남궁혁련이 비록 상대를 얕보긴 하지만 그 또한 무인이다. 더불어 십대 

후지기수 중 하나로 꼽히는 자다. 상대의 수준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공청의 무위는 남궁벽과 엇비슷했다. 순수하게 무공으로만 따지자면 남 

궁벽이 한 수 위지만 공청은 살수다. 단지 무공으로만 승부를 가늠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종종 번뜩이는 암기들은 그를 남궁벽과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적어도 공청은 자신이 상대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남궁혁련은 아직 

도 제 상태를 찾지 못했다. 속이 뒤틀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앞에서 

자신을 지켜 주고 있는 남궁벽이 없었다면 죽어도 이미 수백 번은 죽었 

으리라. 

누군가에게 지킴을 당하고 있는 자신과 앞에서 싸우고 있는 저 사내는 

엄연히 다르다. 

공청에게 진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가 있다. 비록 살수지만 그는 무 

림에서 유명한 자다. 그리고 자신에 비해 거의 갑절에 가까운 나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진 것은 수긍할 수가 있다. 허나, 저 사내에겐 아니다. 

많아 봤자 세네 살 차이 정도일 게다. 같은 연배의 무인이라고 봐도 무 

방할 정도의 차이다. 

이제야 왜 팽산위가 저 사내에게 졌는지 남궁혁련은 알아버렸다. 

팽산위가 방심을 했고, 그 사내의 무위가 예상보다 조금 높았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아니다. 팽산위가 방심을 하지 않았다 해도 저 사 

내를 이길 수는 없다. 백 번 싸운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리라. 

'제길……' 

남궁혁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패배감을 느꼈다. 

남궁진이 자신보다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자신보다 그를 좋아하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남궁진에게 

서는 그다지 패배감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다음 대 가주는 자신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거면 충분했기에 남궁혁련은 그를 싫어하 

기만 했을 뿐 패배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앞의 저 사내는 다르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된다는 건 저 사내에게는 별 관심거리도 아닌 듯 싶 

다. 권력을 원하는 자였다면 한 여인을 지키는 호위무사가 됐을 리가 없 

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저 사내 앞에선 무의미했다. 

꽉 쥔 남궁혁련의 손에서 조금씩 피가 세어 나왔다. 

'좋다, 내가 네 놈 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그런 그의 눈이 유설린에게로 향했다. 

'저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어 주지. 반드시!' 

그것 밖에 없어 보였다. 저 사내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는. 

한편 남궁혁련을 지키는 있는 남궁벽은 힘든 상태였다. 그에게 여러 명 

이 달라붙은 탓이다. 살령대의 살수 열 명과 운마연, 그리고 운문세가에 

서 따라 온 두 명의 무인도 달라붙었다. 문제는 그 모두가 만만치 않은 

자라는 거다. 

남궁벽이 대단한 고수이기는 하지만 버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그라도 이 많은 수의 무인들을 상대하기에는 벅찼다. 더군다나 그는 지 

켜야 할 두 명도 있다. 제 실력이 나오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주를 지키고 있는 노인 때문이다. 그에게 달려들 

던 살수가 모두 죽어 나자빠진 덕에 부담이 줄었다. 

쉬운 일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가 버렸다. 살령대는 계 

산 안에 있지 않았다. 그들까지 합세할 것을 알았다면 고작 열 셋으로 

오지는 않았을 게다. 남궁벽은 손을 휘두르면서도 급히 주변을 살폈다. 

남궁세가에서 온 몇은 이미 땅에 쓰러져 있다. 쓰러져 있다는 건 죽었다 

는 걸 의미한다. 다른 자도 아니고 살수다. 살수들과 싸우고 쓰러졌다. 

죽는 게 당연하다. 살수들은 마지막 숨통을 확실히 끊어 놓는다. 

살아있기를 바라는 건…… 요행(僥倖)에 불과하다. 

'허허…… 상대를 너무 얕본 겐가.' 

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들은 남궁세가의 정예들이다. 이토록 허 

무하게 죽을 자들은 결코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주변에서 당하고 있는 자들을 돕고 싶다. 그렇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과 손을 섞고 있는 상대도 문제지만 정작 중요 

한 것은 남궁혁련이다. 

바보 같은 놈이 멋대로 공청에게 달려들었다가 부상을 당해버렸다. 운신 

하기도 힘들 정도의 부상이다. 충분히 한 사람의 몫은 하고도 남았을 놈 

이 지금은 오히려 짐이 되어버렸다. 

남궁리는 그다지 무공이 뛰어나지 못하다. 더군다나 사람을 죽여 본 적 

도 없는 여인이다. 지금 이곳에서 혼절을 하지 않는 것만 해도 놀라운 

거다. 사방에서 피가 튀고 내장들이 쏟아져 나온다. 

비명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한 무인에게 적게는 네 명에서 많으면 열 명 이상이 붙어 있다. 버틸 

수 없는 건 당연한 거다. 지금 이곳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건 자신과 

저기 있는 노인, 그리고 공청과 싸우고 있는 사내 이렇게 셋 뿐이다. 

운마연의 검이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남궁벽은 무너져 내리려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다. 

공청은 연신 뒤로 물러섰다. 빠른 검이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잔영도 보 

지 못할 정도의 속도다. 

짧은 비수가 다시 한 번 여운휘의 다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비수를 쳐 

내는 순간 공청은 서둘러 목을 향해 자신의 검을 움직였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검이 막 여운휘의 목을 자를 것만 같았다. 평소에 

그가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다리를 향해 비수를 날리고 검을 내리는 

순간 목을 벤다. 

설령 안다고 해도 실력이 되지 않는다면 당할 수밖에 없다. 

쉬익! 

검이 여운휘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이 놈……'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예상보다 더하다. 검이 제대로 몸에 닿은 적 

도 없다. 살행에 나가 이토록 애꿎게 검을 휘둘러 본 적은 없다. 이 같 

은 행동을 했다면 호남제일살수라는 이름이 울었을 게다. 

허공으로 솟구쳐 여운휘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내려치면서도 공청은 소 

매 속에 있는 비수를 양옆을 향해 터트렸다. 

'또!' 

이번에도 한 호흡 늦어버렸다. 아까부터 계속 마찬가지다. 닿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한 호흡이 늦어 버린다. 

싸울 때는 몸만을 쓰는 게 아니다. 머리를 써야 한다. 머리를 쓸 줄 모 

른다면 그건 완벽한 고수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또 생각만 길어서도 

안 된다. 그랬다가는 머리통이 수박처럼 으깨져도 할 말이 없다. 

허공으로 몸을 솟구친 공청은 몸을 옆으로 뉘이며 발을 휘둘렀다. 

그리고 날카롭게 안으로 파고든 여운휘의 손이 위로 향했다. 공청은 목 

을 뒤로 꺾는 반동만으로 완벽하게 몸을 돌렸다. 여운휘의 손에서 뻗어 

나간 권풍(拳風)이 뒤에 있던 바위를 때렸다. 

우적! 

바위가 박살나 버렸다. 그대로 맞았다면 으깨진 것은 저 바위가 아닌 공 

청의 머리였을 거다. 

놀랄 시간도 없었다. 공격이 실패하는 순간 옆으로 움직인 여운휘의 검 

이 단전을 노리고 다가왔다. 

순식간에 튀어나오는 검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개구리의 혀 같다. 

움직임은 분명 자신이 위다. 그런데 당하고 있는 것도 정작 자신이다. 

'왜지?' 

쒜엑! 

검을 피하면서 다시 한 번 공청은 자신의 손으로 진기를 흘려보냈다. 그 

리고 다시 한 번 여운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공청은 그 일격으로 알 

아버렸다. 

'맥이 끊기고 있다.' 

이 상태로는 이길 수가 없다. 맥이 끊긴 다면 원래 힘의 반도 낼 수 없 

게 된다. 

맥이 끊긴 다는 걸 확인한 순간 공청은 망설임 없이 뒤로 물러섰다. 거 

리를 벌린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생 이토 

록 길게 싸운 적은 없는 것 같다. 

공청은 손을 늘어트렸다. 그리고 천천히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그의 암기술은 세상이 두려워한다. 그런 공청의 암기술의 절학이 막 터 

져 나오려고 한다. 

'수라지혈(修羅之血)!' 

공청의 들어 올려진 양손이 땅으로 향했을 때, 붉은 빛이 모든 걸 덮었 

다. 

그리고 여운휘의 손도 따라 움직였다. 

붉은 비수 서른 두 자루가 밖에서 안으로 굽어 들어갔다. 목표는 여운휘다. 마 

치 실에 묶여 있는 듯 하다. 공중에서 갑자기 방향을 튼 비수가 살아 있는 것처 

럼 뒤틀리며 여운휘를 노렸다. 여운휘의 움직인 손은 검을 직선으로 들고 있었 

다. 

비수는 퇴로마저 막았다. 움직인다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방팔방(四 

方八方)이 붉은 빛으로 가득 찼다. 

뱀처럼 날카롭게 이빨을 들이대며 날아든 비수를 위치를 파악한 여운휘가 검 

을 어깨까지 들어 올리며 횡으로 움직였다. 몸이 낮춰졌다. 그리고 검이 허공 

을 갈랐다. 

하얀 색 빛줄기가 검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쏟아진 검기들이 비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공중에서 비수와 검기가 부닥쳤다. 

단순히 던진 비수가 아니다. 겨우 그런 거였다면 공청의 절기가 되었을 리가 없 

다. 방위만 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비수 하나 하나에 엄청난 내력이 실렸다. 

그렇기에 지금 사용하는 비수는 특별히 주문한 물건이다. 

일반 적인 비수는 내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박살이 나 버린다. 

여운휘가 날린 검기도 그 내력만은 막아내지 못할 듯 했다. 그런데, 

탕! 타앙! 

비수를 날린 공청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들릴 리가 없는 소리다. 

모든 것을 벨 것만 같던 비수가 공중으로 치솟더니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문 

제는 그 서른 두 개의 비수 중 대부분이 그랬다는 거다. 여운휘는 일말의 미동 

도 없었다. 그렇지만 검기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날아간 비수들은 그 양옆으로 틀 

어 박혔다. 

수라지혈은 살령대의 대주에게만 내려오는 절세의 암기술이다. 절정으로 익히 

게 되면 일 수에 오십 개의 비수가 날아든다. 아직 공청은 오십 개의 암기를 던 

질 수가 없다. 그리고 그건 살령대의 대주 중 수라지혈을 만든 단 한 명만이 가 

능했다. 

서른 두 개만해도 대단한 거다. 그런 암기술이거늘 너무나 맥없이 막혀 버리자 

공청은 일순 할 말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상처라도 줬다면 이토록 허무하지는 않았을 게다. 자신이 던진 서른 두 개의 비 

수가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여운휘가 검을 집어넣지도 않고 공청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공청은 이런 상 

황이 왔음에도 피식 웃었다.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대일의 대결으로 이 앞에 있는 사내를 이길 자신이 없다. 강한 자라고는 생각 

했지만 수라지혈을 단 일수에 무마시켜 버릴 정도의 고수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대단해, 아주 대단해." 

"시끄러워." 

여운휘의 검이 솟구쳤지만 공청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면서 공세에서 벗어났 

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공청은 여유가 넘쳐 보였다. 여운휘가 앞으로 

다가오자 뒤로 몸을 날린 그는 나무를 발로 밟으면서 몸을 비틀었다. 

공중에서 공청의 발이 움직였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이 연속적으로 움직였 

다. 여운휘는 두 팔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땅으로 내려서기가 무섭게 공청의 

몸이 다섯 장 정도 뒤로 물러났다. 

여운휘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뭐 하는 거냐." 

"뭐가? 지금 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궁금한가?" 

지금 공청은 여운휘를 자꾸 피하고 있다. 자잘한 공격으로 물러서게 하면서 자 

신은 더 뒤로 물러난다. 

"솔직히 말하지. 네가 나보다 강하니까." 

"그래서?" 

"넌 너보다 강한 놈을 만나면 싸울 거냐?" 

"지켜야 한다면." 

"호오, 겁도 없으시군 그래. 하지만 난 너와 달라. 난 살고 싶거든." 

싸움터에서 말이 길어지고 있다. 여운휘는 공청의 태도에 짜증이 치밀었다. 말 

을 하면서도 여운휘가 다가가면 물러나고 있다. 공청의 움직임은 여운휘보다 

한 수 위다. 이렇게 끌면 그를 제압하게 된다고 해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게다. 

"그렇지만 그냥 갈 수는 없지. 난 너를 묶어야겠어. 네가 없다면 지금 저 싸움 

터는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을 테니까. 또 운문세가와 악양유가의 일선의 격돌 

의 피해도 더 늘어날 테지." 

"네가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군. 일선은 결코 밀리지 않을 거다. 밀릴 거라면 

애초에 이런 작전을 실행하지도 않았지. 그리고 또 하나. 네 놈은 한 가지만 생 

각했지 둘을 생각하지 못했다." 

여운휘의 신형이 공청의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움직인 여운휘 

의 검이 살수 한 명의 배를 뚫고 지나갔다. 남궁벽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던 살 

수는 불의의 일격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재차 여운휘의 검이 움직였다. 남궁벽과 싸우고 있던 운마연이 급히 검을 들어 

올려 여운휘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순간 양옆으로 살수 둘이 짧은 검을 들고 

다가왔지만 그들은 일장에 나가 떨어져 버렸다. 

여유 있던 공청의 얼굴이 싹 변했다. 자신이 상대를 묶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나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자신이 오히려 묶인 상태다. 다가갈 수 

도 없고, 그렇다고 보고 있을 수도 없다. 

저 자를 상대할 자는 살령대 내에 아무도 없다. 대주인 자신조차 막지 못한 자 

를 그 누가 막는단 말인가. 더불어 저 무리에는 남궁세가의 인물들도 있다. 다 

른 자들은 어떻게 우습게 넘길 수 있지만 남궁벽만은 다르다. 

천뢰삼검 남궁벽은 남궁세가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다. 그런 자를 상 

대로 살령대의 살수들이 버틸 수는 없다. 

'제길,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 가다가는 살령대와 운문세가 모두 궤멸 될 거다. 

다음 작전을 펼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건 다소 위험한 방법이긴 하지만 차 

라리 지금 보다는 나을 거다. 

"운 가주 뒤로 빠지시오!" 

공청의 외침과 동시에 여운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운휘는 

몸을 비틀면서 공청의 검을 받아냈다. 

"이제야 싸울 마음이 생긴 건가?" 

"물론!" 

검을 맞댄 채로 말을 건네는 여운휘를 향해 공청이 일갈을 내지르며 힘차게 밀 

어붙였다. 뒤로 밀리는 듯 하던 여운휘의 발이 순식간에 공청의 아랫배를 노렸 

다. 

그는 뒤로 물러나면서 다시 한 번 여운휘와 거리를 벌렸다. 그 짧은 시간에 운 

문세가 가주인 운마연과 그의 세 아들, 그리고 서유종이 뒤로 몸을 뺐다. 공청 

은 그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십시오. 얼마 막지는 못하겠지만 시간을 조금 벌어드리겠소." 

"그 말은……" 

"사전에 이야기가 되지 않았소. 시간이 없으니 어서 움직이시오." 

운마연은 서유종과 둘째 아들인 운금종을 바라봤다. 그 둘은 짜기라도 한 듯 동 

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의 모습을 본 후 운마연은 공청을 바라보며 고개 

를 끄덕였다. 

"가자!" 

운마연의 외침에 운문세가 쪽의 두 무인까지 뒤로 몸을 빼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쫓지 못했다. 그 앞을 살령대의 살수들이 모두 막고 있었 

다. 

수는 대략 오십 명 정도다. 반 수 정도가 죽었다. 이곳에서 이들이 모두 살아 나 

간다 해도 살령대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게다. 몇 년은 몸을 숨기고 힘을 회 

복해야 할 정도의 큰 타격이다. 

"이곳은 지나갈 수 없다." 

공청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남궁벽은 마음이 급했다. 이미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그런데 운문세가의 가주 

가 도망을 가기까지 했다. 쫓는다 해도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 상태라면 악양유가의 무인들이 전멸하는 건 시간 문제다. 

마음이 비가 오지 않은 논바닥처럼 바짝 말라가거늘 정작 당사자들인 악양유가 

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남궁세가에서 온 열 셋 중 여섯이 죽었다. 남궁벽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남궁혁 

련과 남궁리 또한 목숨을 잃었을 게다. 그런 희생을 가지고도 이 일을 실패하 

게 된다면……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낯으로 가주를 뵙는단 말인가.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하늘 아래 고개도 들고 다니기도 부끄러울 거다. 자신의 수하들이다. 그 

리고 자신이 모자라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수확도 없다면…… 그건 개죽음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고 싶 

었다. 지금 실패를 할 수는 없다. 

남궁벽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움직이지 마." 

막 움직이려는 남궁벽을 가리키며 공청이 말했다. 남궁벽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재차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는다." 

"……?"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싸워야 할 마당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건드리지 않겠다니.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은 공청이 금방 밝혔다. 

"난 너희들을 이곳에서 일각 정도만 묶어 두면 돼. 그것으로 내가 할 일은 다 

한 거니까.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우리도 공격하지 않아. 하지만 움직인다 

면…… 싸워야겠지. 싸우는 건 쌍방에 좋지 않을 거야. 우리 모두가 달려든다 

면 너희도 피해를 입을 거다." 

"허허, 그럼 너희들이 우리를 일각 이상 묶어 놓을 자신이 있다는 게냐?" 

풍운조가 나섰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보는 공청은 왠지 모를 떨림을 느끼면서 

말을 이었다. 

"물론."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 한 번 해 볼까?" 

풍운조의 눈에서 터져 나오는 새파란 안광을 보면서 공청은 순간 움찔했다. 보 

통 노인이 아니다. 살수인 자신에게 공포를 줬다. 저 젊은 사내도 자신에게 공 

포를 주지는 못했다. 

'누구지?' 

상대에게 이토록 공포를 줄 수 있는 자는 흔치 않다. 저 노인의 몸에선 알 수 없 

는 공포가 세어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공청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안 

다. 

'저 노인은…… 살수다.' 

공청은 살수다. 직감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게 살수다. 그런 그가 예감했 

다. 틀릴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제는 살수라서가 아니다. 물론 공청에게 가장 꺼려지는 상대를 꼽으라 한다면 살수 

를 꼽을 게다. 그들은 몸을 숨길 줄을 안다. 그렇기에 싸움이 길어지게 된다. 반면 

가장 상대하기 쉬운 상대를 꼽으라면 살수다. 

이 무슨 어폐인가? 

그 어폐는 모두 공청이 강하기 때문이다. 상대 살수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공청은 그 

보다 뛰어났다. 몸을 감춘다고 감쳐도 그에겐 장난으로 보일 뿐이다. 숨을 장소가 보 

이고, 기척이 들린다. 위치를 들킨 살수는 차라리 일반 무인만도 못한다. 

그런데 문제가 벌어졌다. 저 앞에 있는 노인은 그냥 살수가 아니다. 

공청은 최악의 상대를 만나 버렸다. 항시 쉽게 죽일 수 있던 살수가 지금은 자신이 

되어버렸다. 

공청이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 세 개를 폈다. 그 신호에 살령대의 살수들 

은 순간 멈칫했다. 갑자기 내려진 명령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다. 

살령대의 살수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비록 이해할 수 없는 신호 

였다고는 하나 그들의 망설임은 말 그대로 한순간이었다. 

살수들은 재빠르게 뒤로 솟구치면서 나무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땅에는 유일하게 공 

청만이 서 있었다. 

"물러나지." 

"좋은 선택이야." 

공청의 말에 풍운조가 대답했다. 

옆에서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던 남궁벽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드시 막겠다고 눈 

을 빛내던 공청이 갑작스럽게 물러간다고 한다. 그것도 아무런 일도 없었음에도 불구 

하고 말이다. 

"운문세가가 망하던 말던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거든. 난 최선을 다해서 도왔어. 다 

만 힘이 모자랐을 뿐이지." 

싸우려고 한다면 싸울 수는 있다. 비록 풍운조의 몸에서 짙은 피 냄새가 풍긴다고는 

하지만 일 각 정도 버틸 수는 있을 게다. 문제는 그 정도가 되면 이곳에 있는 살수들 

은 궤멸 될 거다. 잘못하면 자신조차 목숨이 위험할 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울 이유가 없다. 

운문세가와는 계약 때문에 돕는 관계지 정(情)에 의해 움직인 게 아니다. 그들이 망 

한다면 돈을 많이 주던 협력자 하나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너희들이 우릴 그냥 보내준다면 우리도 건드리지 않겠어. 좋은 제안 아닌가?" 

"허허, 가주 어떻게 하겠소?"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지금 우리가 제압해야 할 상대는 살령대가 아니니까요." 

"후후, 유 가주 고맙소이다." 

공청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태연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몸을 돌리고 몇 발자국 정 

도 걸은 후 공청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검이 다가온 것은 알았지만 피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피하지 못했다. 

주륵. 

어느새 스쳐 지나간 검 탓에 볼 쪽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피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검이 자신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엄 

청난 쾌검이다. 

"이게…… 무슨 검법이지?" 

"무상검제의 검법이다." 

공청은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른 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마 

치 땅에 발이 달라붙기라도 한 듯이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공청을 향해 여운휘 

가 말했다. 

"지금은 보내준다. 하지만 다음에 나를 만난다면…… 살 생각을 버려라." 

"후후, 경고인가? 아까 나와 싸울 때 전력을 다하지 않았군. 싸울 때는 이런 쾌검을 

본 적이 없으니까." 

"너 따위에게 보여 줄 검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재미있군. 그리고 네 말대로 앞으로 널 만나는 것은 고민해 봐야겠어." 

몸을 빙글 돌린 공청의 손에서 두 자루의 비수가 여운휘의 미간과 단전을 노리고 날 

아들었다. 그리고 그 공격을 여운휘는 단 일수에 쳐냈다. 

떨어지는 비수를 바라보며 공청이 말을 이었다. 

"그 검을 피할 자신이 없으니까." 

만약 아까 싸움을 하던 도중 이런 쾌검이 터졌다면 몇 번은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르 

나 결국 저 검에 먹혔을 게다. 

두 자루의 비수를 잠시 바라보던 공청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 

로 초목(草木) 사이로 몸을 감췄다. 

많은 사람이 놀랐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놀란 자를 꼽으라면 남궁벽과 남궁혁련 

이다. 

'과연 무상검제라는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구나!' 

남궁벽은 순순하게 여운휘의 무공에 놀랐다. 뒤에서 보고 있던 자신조차도 저 사내 

가 다가가는 것은 보았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약관에 이른 사 

내의 실력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과연 남궁진이 헛것을 보고 온 것은 아니로구나.' 

남궁벽이 여운휘를 보면서 감탄을 하고 있을 때 남궁혁련은 놀람과 더불어 살의를 불 

태우고 있었다. 남궁혁련은 이를 갈면서도 나설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저 검을 피할 자신이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남궁혁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간 

신히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는 자신이 못내 초라해 보였다. 

'머, 멋지다……' 

무공에 놀란 둘과는 다르게 남궁리는 여운휘의 모습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외모에 

반했고, 그의 무공에 다시 반했다. 그리고 여운휘의 사내다운 모습에 그녀는 아예 넋 

을 잃고야 말았다. 

여운휘는 남궁리가 꿈에서 그리던 사내다. 

"그럼 가도록 할까요?" 

"그러도록 합시다, 유 가주." 

시간이 길어질수록 귀찮아진다. 

"남궁세가에서 온 자들은 여기들 남게. 부상자도 많고 와봤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네." 

남궁혁련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기껏 이곳까지 와서 짐이 되어버렸다. 평소였다 

면 그냥 넘겼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럼 우리 넷이서 가도록 합시다." 

남궁세가 쪽에선 남궁벽 혼자였고, 악양유가 쪽에서는 유설린과 풍운조, 여운휘가 움 

직였다. 운문세가가 도망친 방향 쪽으로 네 명은 경공을 펼쳤다. 비록 살령대가 쉽 

게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지금 서둘러 따라잡지 못한다면 도망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무슨 계책이 있는 듯 했다. 살령대 하나만으로 그렇게 자신을 부렸을 리는 

없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도망칠 때 그들의 표정은 절망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급하 

다는 표정은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에 절망이라는 단어는 새겨져 있지 않았다. 

믿는 게 없었다면…… 그런 표정을 짓지는 못했을 거다. 

점점 초목이 주변을 메워 간다. 이런 장소라면 검을 휘두르기도 힘들 거다. 불규칙적 

으로 놓여져 있는 나무는 진로를 방해했다. 

공간을 잔뜩 채운 가지들이 몸을 스쳐지나갔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맨 앞에 서 

서 달리는 것은 풍운조였다. 그는 살수답게 흔적을 찾는 데 뛰어났다. 여운휘 또한 

사곡에서의 생활 탓에 흔적을 찾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렇지만 살수인 풍운조가 그 

런 면에선 여운휘보다 한 수 위다. 

앞장서서 달리던 풍운조의 눈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온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운휘가 유설린을 감싸 안 듯이 검을 휘둘렀다. 

콰앙! 

풍운조의 손에서 피가 솟구쳤다. 더불어 앞쪽에 있던 나무가 터져 나갔다. 순간적으 

로 내공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아마 손이 뭉개졌을 게다. 

벽력탄(霹靂彈)이다. 

풍운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앞을 바라봤다. 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전방을 

응시하던 풍운조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수십 개의 검이 풍운조를 노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타앗!" 

옆에 있던 나무를 밟아 다시 한 번 도약한 풍운조는 자신에게 다가온 검을 모두 밑으 

로 흘렸다. 

파파팍! 

검은 뒤편에 있는 나무에 박혔고, 그 검이 박히는 순간 나무 위에서 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여운휘가 재빨리 유설린의 허리를 손으로 두르며 뒤로 뛰어올랐다. 풍운조 

와 남궁벽 또한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그 가루를 피해냈다. 

"아무래도 우리는……" 

"함정에 빠진 모양이네요." 

풍운조의 말을 유설린이 이었다. 이건 지금 준비 한 것이 아니다. 이토록 정밀하게 

준비 시켜 놓는 건 하루 이틀만에 되는 게 아니다. 

아마 악양유가와 싸우려고 한 순간부터 준비했을 게다. 

악양유가의 정보망을 완벽하게 피해버렸다. 이곳은 사람의 출입이 뜸한 구역이다. 더 

군다나 지금 있는 이곳은 더욱더 그랬다. 나무만 가득하고 겨울이라 특별히 구해갈 

것도 없다. 사람의 침입이 뜸할 테고 이것을 설치 한 자들도 전문적인 자들일 게다. 

소문이 세지 않게 엄청난 주의를 가한 모양이다. 

더군다나 악양유가의 정보망은 이토록 작은 곳까지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지 못했다. 

만약 악양유가의 정보망이 완벽했더라면 아무리 전문적인 자들이 준비를 했다 해도 

몰랐을 리는 없다. 하늘을 속이고, 땅을 속였다 해도 사람은 속이지 못한다. 

아무리 은밀히 움직였다 해도 결국은 누군가는 알게 된다. 

"그나저나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 

쉽지 않다. 준비해 둔 것이 꽤나 치밀하다. 그렇지만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문세가가 이런 수법을 쓴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아마 이곳에서 악양유가의 수뇌부들이 헤매는 동안 본진이 당할 거라고 생각했을 게 

다. 운문세가가 악양유가의 저력을 모르는 탓에 행한 행동이다. 만약 알았더라면 이 

런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을 거다. 

풍운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다. 다행히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그의 머리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후후, 재미있게 하는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풍운조의 눈이 어느 한 곳에 이르는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 장력이 터 

져 나왔다. 

퍼엉! 

나무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 근처로 암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이 진법을 파해하도록 하겠소. 천천히 뒤따르시오." 

말을 마친 풍운조는 대답도 듣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사방에서 암기들이 비처럼 쏟아졌 

다. 붉은 빛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곧 하얀빛이 하늘을 덮었다. 

그리고 그러한 혼전 속에서 풍운조가 번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양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막 날아든 비수가 풍운조의 목을 꿰뚫으려는 순간 그의 몸이 지면에 닿을 듯이 

눕혀졌다. 

몸을 일으킨 풍운조의 눈은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다. 언제 

이 진법이 깨질지 모른다 해도 풍운조는 멈추지 않을 거다. 손에 난 상처에서 아직도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다. 

풍운조는 옷소매를 찢더니 손을 감쌌다. 하얀 색이었던 옷이 순식간에 붉은 색으로 변했 

다. 손에서 찜찜한 축축함이 밀려왔지만 풍운조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신형이 하늘을 나는 듯이 나무를 박찼다. 반동으로 옆에 나무로 이동한 풍운조의 양 

손바닥이 다시 한 번 바람을 가르며 휘둘렸다. 

그의 양손에서 음유한 장법이 뿜어졌다. 풍운조는 앞장서서 모든 기관을 망가트리고 있었 

다. 기관이란 무릇 시작점이 있는 거다. 아무런 것도 없이 기관이 되는 건 아니다. 그 시작 

점을 파괴한다면 그 기관은 무용지물이 되게 된다. 

물론 그 시작점을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쉽다면 그 누가 진법을 이용 

할 것인가. 진법은 상상 이상의 시간과 돈이 들게 된다. 아마 운문세가와 악양유가가 부닥 

치는 것에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기관은 보다 치밀해져 있었을 게다. 

운문세가는 기관을 설치하면서 두 가지의 실수를 범했다. 

시간이 없었기에 기관이 단조로워졌다. 그것은 곧 기관을 아는 자가 본다면 쉽게 뚫렸을 

거라는 거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들은 풍운조의 존재를 몰랐다. 

풍운조는 기관의 전문가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살수다. 설치하는 쪽은 문외한이지만 기 

관을 보는 눈 정도는 충분하다. 

기관이 파해되고 있었다. 애초에 시작하는 점이 부서지면 그 기관은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 

지 못한다. 그 탓에 뒤에서 따르고 있는 나머지 셋은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서 산책 

을 하듯이 걷고 있었다. 

"유 가주에게는 대단한 자들이 많구려." 

"제가 인복은 있는가 봅니다. 모두 저에겐 과분한 사람들이지요." 

"허어, 못난 사람의 밑에는 못난 사람만 모이는 법이요. 유 가주가 그만한 그릇이 되기에 

이만한 자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겠소." 

남궁벽은 진정으로 감탄했다. 

가주의 두 측근 모두 엄청난 실력을 지녔다. 젊은 사내야 어느 정도 무림맹에서 이름이 회 

자되고 있지만 저 노인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그런 노인의 실력이 남궁벽 또한 

놀랄 정도다. 저 정도 수준이라면 자신마저도 승부를 장담할 수는 없다. 

남궁벽은 풍운조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피하시오!" 

여운휘는 외침을 듣는 순간 다시 한 번 유설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뒤로 움직였다. 아니, 

이번엔 움직였다기 보다는 뒤로 치달렸다고 해야 옳다. 

콰앙!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박살났다. 소리가 귀를 때리는 순간 여운휘는 유설린을 

감싸안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흙먼지가 하늘을 덮을 정도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흙먼지 

가 가라앉을 때쯤 남궁벽은 혀를 찼다. 

'미친…… 아예 산 하나를 날리려고 작정을 한 것인가.' 

이백여 장에 달하는 넓은 장소에 있던 나무가 흔적도 없이 박살나 버렸다. 이 정도라면 벽 

력탄 몇 개를 퍼부은 것인가. 남궁벽은 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도 간신히 사정 

거리에서 벗어났지만 날아든 나무파편에 온 몸에 상처들이 생겼다. 옷은 찢어져 너덜거렸 

고, 얼굴에는 꽤나 깊은 상처가 생겼다. 

자신도 이렇거늘 한 여인을 데리고 달린 그 사내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자신과는 다른 방 

향으로 달렸던 그 사내를 찾기 위해 남궁벽은 움직였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남궁벽뿐만 

이 아니었다. 풍운조 또한 급하게 나무 아래로 뛰어 내려와 여운휘가 달렸던 방향으로 향 

했다. 

이런 기관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까도 벽력탄 하나가 날아오긴 했지만 그건 

겨우 한 개였다. 그 충격은 반경(半徑) 사, 오장 정도 밖에 이르지 않았을 거다. 

풍운조와 남궁벽은 얼마 달리지 않아 그 둘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마치 목석처럼 그대로 

굳어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풍운조는 차마 무슨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여운휘의 등이 만신창이로 변해 있었다. 나무파편들이 셀 수도 없이 등에 박혀 있다. 그나 

마 다행이라면 머리를 숙였던 탓인지 목 위는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혼자였다면…… 분명 

피할 수 있었을 게다. 

"괘, 괜찮은가?" 

남궁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석처럼 굳어 있던 여운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 

다. 옷이 검은 색인데도 불구하고 붉은 빛이 보인다. 이 정도라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 

지 알만도 하다. 

일어난 여운휘의 말은 남궁벽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괜찮아?" 

"응." 

남궁벽은 자신의 질문이 먹혔음에도 불구하고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저토 

록 상처를 입어 놓고 상대방의 몸을 먼저 생각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정파의 무인들이 협의(俠義)를 외친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의 몸을 버리면서 다른 사 

람을 구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많지 않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가 흔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거다. 누구나 자신의 목숨이 최우선이다. 

"빨리 갑시다. 선물을 준 대가를 받아야겠으니." 

"이봐 너는……" 

"……" 

무리라고 쉬고 있으라 말하려 하던 풍운조는 여운휘의 눈을 보는 순간 말을 멈췄다. 자신 

의 말이 통할 상대는 애초부터 아니었다. 결코 물러날 눈이 아니다. 말해봤자 먹혀 들어갈 

상대도 아닌데 굳이 시간만 축낼 필요는 없다. 

여운휘가 유설린을 일으켜 주면서 말했다. 

"앞에 서." 

여운휘는 자신의 등을 유설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등을 본다면 

분명 그녀가 슬퍼할 것을 알기에. 

그렇지만 유설린은 이미 풍운조와 남궁벽이 오자마자 보냈던 시선을 보고 어느 정도 상황 

을 파악한 상태였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상처 치료 먼저 하고 가자." 

"그러면 도망갈지도 몰라." 

"상관없어. 나한테는 휘가 우선이니까." 

유설린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느꼈는지 여운휘는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 

다. 

"간단하게 파편만 빼. 그 정도로도 지금은 충분하니까." 

여운휘의 뒤에 앉은 유설린이 조심스럽게 파편을 하나씩 빼냈다. 처음엔 풍운조가 하겠다 

고 나섰다. 그렇지만 그녀는 풍운조의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이 하겠다는 의사를 내비 

쳤다. 

"아프지?" 

"별로."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 않고서는 이토록 태연할 수는 없을 거다. 남 

궁벽은 감탄 할 수밖에 없었다. 

'파편을 뽑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터인데……' 

여인으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다. 파편을 뽑는 사람이나, 그럼에도 태연한 사람이 

나…… 

파편을 다 뽑자 여운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 멀지 않은 곳에 운문세가의 인물들이 있을 듯 하구려. 방금 본 그 벽 

력탄은 아마 최후의 발악으로 보이오."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긴 하오." 

풍운조의 짐작을 들은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이토록 큰 일을 벌인 것은 그들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럼 빨리 가도록 하죠. 그들이 도망칠 지도 모르니까요." 

도망쳤다 해도 이제는 상관없다. 남궁세가는 이제 운문세가를 공격할 명분을 얻었다. 벽력 

탄은 무림에서 사용을 금기시한 물품이다. 그런 물건을 운문세가가 사용했다. 

공격할 명분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남궁세가가 이 싸움에 끼여 든 것을 밝혀야 한다. 그건…… 그다 

지 내키지 않는다. 가능하면 지금 끝내야 한다. 그게 남궁세가나 악양유가에게는 최선의 

방법이다. 

여운휘는 상처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묵묵히 유설린의 옆을 

지키면서 달릴 뿐이다. 

경공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넓은 공터가 눈앞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는 약 삼십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맨 앞에는 운마연과 서유종, 그리고 운문세가 

의 둘째인 운금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잘 왔다!" 

운마연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유가 있다. 무엇인가 믿는 게 있는 

모양이다. 풍운조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주변을 살폈다. 넓은 공터라 특별히 기관 

을 설치 할 장소가 없다. 설령 있다 해도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못할 거다. 

'혹시 독질려(毒疾藜)를?' 

독질려는 도깨비 풀 형태의 암기다. 날카롭게 되어 있는 침 4개에서 6개 정도를 교차 시켜 

서 꼬아 놓은 암기로 땅에 뿌리게 되면 어느 한쪽이 반드시 하늘로 향하게 하는 암기다. 

그리고 그 끝에 극독을 묻혀 놓았다면 무서운 살인병기가 된다. 

"하하! 넷을 제하고는 모두 죽은 모양이지?" 

"운 가주, 미안하지만 아까 그 이후로 단 하나도 죽지 않았소이다." 

"분명…… 터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무슨 거짓말이냐! 나잇살만 쳐 먹어 가지고는 벌써 정 

신이 오락가락하는 거냐?" 

옆에 있던 운중행이 나섰다. 그의 이죽거리는 말투에 풍운조가 살며시 손을 움켜쥐었다. 

일전에 악양유가에 왔을 때도 흠씻 패고 싶었던 적이 있다. 악양유가에서 꽤 오랜 시간 감 

금(監禁)을 당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가 살아 있다. 

그때는 포로였어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운중행을 건드 

렸다하여 뒤탈이 날 이유가 없다. 

"운 가주.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오." 

"너희들은 지금 우리를 쫓느라 한 가지를 잊고 있었어. 지금 우리 두 세가가 부닥치고 나 

서 얼마의 시간이 지난 줄 아나? 무려 한 시진이야. 한 시진이면 운문세가의 무인들이 너 

희 악양유가의 잔챙이들을 쓸어버리기 충분한 시간이지." 

운마연이 자신이 있던 이유는 이거였다. 반 시진이라면 충분할 정도의 상대다. 그런데 벌 

써 한 시진 이상이 흐른 상태다. 반 시진이라면 근처까지 다 다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운 가주님." 

"호오, 왜 그러시나 유 가주?" 

운마연이 능글맞게 웃었다. 웃음을 터트리자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유설린도 마주 웃음 

을 흘렸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운마연의 마음에 일순 불안이 몰아닥쳤다. 

억지 웃음이 아니다.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웃음이다. 그리고 저런 웃음을 지은 후 

엔 항시 자신들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 불안한 건 옆에 있던 서유종 또한 마찬가지였 

다. 그는 가주를 대신해서 열리지 않는 입을 띠었다. 

"뭐가 그리 좋은 거지? 너희들은 이미 끝난 거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지금 운문세가 쪽에서 한 예상은 틀렸어요. 지금 그들은 이곳으로 

오지 못할 테니까요." 

"건방진 소리! 무엇을 믿고 그런 허튼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기다려 볼까요? 올지…… 아니면 아무도 오지 않을지." 

무슨 말인가를 내뱉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운마연과 운금행, 그리고 서유종 셋 

은 머리가 있다. 그런 그들이기에 왠지 뭔가가 꺼림칙했다. 그렇지만 운중행은 이겼다는 

생각과 유설린을 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신이 나서 외쳤다. 

"이 계집애야! 시끄럽게 주둥이 나불거리지 말고 오늘 밤 걱정이나 해라!" 

"오늘밤을 걱정해야 할 것은 제가 아니라 운 소협일 겁니다." 

"미친……" 

그때 옆쪽에서 약 이십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등장에 운마연 

은 가슴에 얹혔던 걱정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왔는가!" 

"가주님!" 

맨 앞에 있던 자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나머지 무인들도 모두 마찬 

가지의 행동을 취했다. 운마연은 당황했다. 

"왜, 왜 그러는 가? 다른 자들은 다 어디 있느냐!" 

"죄송합니다 가주님!" 

더 이상 말이 무엇이 필요하랴. 죄송하다는 말에 운마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운중행과 큰아들인 운산천만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무엇이 죄송하고 무엇 때문에 자신의 아비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가. 

"아버지 왜 그러시죠? 저 계집년이나 잡아서……" 

"닥쳐라!" 

찰싹! 

운마연의 손이 운중행의 뺨을 올려붙였다. 

끝났다, 모든 게. 

운중행은 아직도 왜 자신이 뺨을 맞았는지 모르는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인 운마연을 바라 

봤다. 

서유종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 쪽의 수는 오십에 달한다. 그리고 저쪽은 고작 네 명이다. 

그렇지만 승산은 이미 뻔하다. 이쪽에 있는 무인들도 그다지 대단한 자들이 아니다. 그렇 

지만 저쪽의 네 명은 정예 중에 정예다. 싸워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운마연이 입을 열었다. 

"…… 졌다." 

완벽하게 졌다. 아주, 완벽하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