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37)

종이를 받아 든 풍운조의 안색이 변했다. 

그건 방금 전 근처 마을로 날아 든 전서였다. 그 안에는 결코 좋지 않 

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옆에서 순간적으로 구겨지는 풍운조의 표정을 

보고 유설린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죠?" 

"야밤을 틈타 그들이 이동속도를 올렸소. 전서가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에 많은 시간이 지나 버렸으니……" 

"예상 도착 시간이 언제죠?" 

"…… 한 시진 후입니다." 

다른 행동은 할 것도 없다. 우선은 잠에 빠져 든 자들을 깨워야 한다. 

풍운조가 급히 주변에 있는 몇 명에게 사람들을 깨우라고 명령했다. 그 

리고 유설린, 여운휘, 풍운조는 급히 남궁벽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남궁세가의 인물들의 반 정도는 이미 잠이 든 상태였고 나머지 반 정도 

는 자신만의 일을 하고 있었다. 

남궁벽은 갑작스럽게 악양유가의 가주가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오?" 

"그들이 한 시진 후쯤에 도착 할 것 같다는 전서가 날아왔어요." 

"음? 아까 까지만 해도……" 

"속았어요. 그들은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던 모양이에요. 우리 쪽으로 

연락이 되려면 전서가 두 번이 와야 해요. 그들의 행동을 본 자가 삼일 

에게, 그리고 삼일이 우리에게 보내죠. 그 전달 과정 탓에 빨라야 네 시 

진 정도 후에야 상황을 알게 되죠." 

남궁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유설린에게 다시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그 작전 그대로 나가도 되겠소?" 

"예, 문제없어요. 하지만 빨리 모두를 준비 좀 하도록 해 주세요. 아마 

준비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움직여야 할 거예요." 

"얼갰소. 그럼 내가 이쪽은 알아서 할 테니 가주께서는 그쪽에 무사들 

을 모두 준비케 해야 하오." 

달빛 아래에서 유설린이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남궁벽은 자신이 여태까지 했던 걱정이 싹 사라지 

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여인이다. 웃음 하나로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버렸 

다. 저건 배운 게 아니다. 배워서 인위적으로 그런 미소를 지었다면 이 

토록 자연스럽지는 못했을 게다. 악양유가의 가주는 천성(天性)적으로 

그러한 관상인 게다. 

'허어, 그 녀석 힘들겠어.' 

남궁벽은 남궁리를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감상에 젖어들었지만 남궁벽의 다음 행동은 번개와도 같았다. 

"깨워. 그리고 어서 무기들 챙겨. 우리는 기습을 감행한다. 한치라도 실 

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남궁세가다." 

남궁벽이 남궁세가의 인물들을 독촉하는 사이 유설린도 수하들을 시켜 

자고 있던 모두를 깨웠다. 내일 오전쯤에 올 거라 생각하고 너무 안이하 

게 행동했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기에 또한 방심했다. 

"우 대협." 

"예, 가주님." 

우문학은 조용히 부복한 채로 유설린을 바라봤다. 그런 그에게 유설린 

이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말씀드린 거 꼭 성공하셔야 해요." 

"걱정 마십시오. 고수들만 먼저 죽이면서 시간을 지연시키도록 하죠. 싸 

울 때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않겠습니다." 

"부탁해요. 운문세가의 가주를 기습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에요. 

밀린다면 저희도 끝나요. 꼭 버티세요. 그럼 이만 가보세요." 

"존명(尊命)." 

우문학이 몸을 일으키며 1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1조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고 있는 남자가 있 

는 가 하면 아직도 잠이 덜 깨서 해롱거리는 자도 있다. 어떤 자는 창대 

를 땅에 박아 놓고 그곳에 턱을 올려놓고 졸고 있다. 

군기라고는 전혀 잡히지 않은 군인들을 보는 듯 하다. 무인의 혼이라고 

는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 볼 수 없는 자들 같다. 

사람들이 그들을 오합지졸로 본다. 그렇지만 그러한 그들이…… 악양유 

가의 모든 것이다. 

"가요, 남궁벽 어르신." 

"준비는 다 끝난 거요?" 

"물론이죠. 남궁세가 쪽은요?" 

"허허, 완벽하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남궁세가의 십 오 인과 악양유가의 삼 인이 언덕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 

했다. 그들은 언덕에 서서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운문세가가 나타나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이쪽도 기습을 준비해야 한다. 

"오는 군." 

여운휘가 언덕에 올라온 지 약 반 시진이 지난 후에 짧게 말했다. 그 말 

에 풍운조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 

을 지어 보였다. 아직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남궁벽은 여운휘와 풍운조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자신만이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궁세가의 쟁쟁한 고수들도 알아 

차리지 못한 사실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두 명이 먼저 알아차렸다. 

'대단하군. 남궁진의 말대로라면 뛰어난 고수라고 하던데 오늘 그 실력 

을 볼 수 있겠군. 남궁진 네 녀석이 탄복(歎服)했다는 자의 실력, 내 눈 

으로 봐야겠다.' 

남궁벽은 잠시 여운휘를 바라보다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먼 곳에 

서 일련의 무리들이 다가오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 다경 후 행동을 시작합니다." 

유설린에 말에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천천히 어둠 속으로 그들은 몸을 감췄다. 

운문세가의 인물들은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다가오는 속도대로 악양유 

가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우문학은 조용히 전방을 응시했다. 맨 앞에는 1조가 서 있다. 다른 자들 

은 모두 그들이 앞에 선 것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가주의 명이다 보니 특 

별한 불만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우문학, 괜찮겠습니까?" 

"훗, 능 소협은 걱정말고 뒤에서 몸이나 간수하시오." 

"지금 운문세가의 일선에는 고수들이 섰을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1조로 

는……" 

"왜? 막는 게 불가능하다고 보이시오?" 

능려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곧 긍정이다. 우문학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하지 못하 

고 있는 능려운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보시오 능 소협. 가주님이 언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계획을 짜 

는 걸 본 적이 있으시오?" 

"물론 그런 적은 없지만……" 

"그럼 이야기는 다 됐군. 믿으시오. 그럼 되는 거요." 

능려운은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 또한 1조에 대해서 많이 들어봤다. 무 

공 훈련이 있을 때 항시 농땡이를 부리는 것이 1조였고, 사고를 일으키 

는 것도 1조였다. 

길거리에서 파락호에게 맞고 돌아온 자도 있을 정도니 그들의 실력을 믿 

는 게 힘든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우문학의 말 대로다. 

가주는 결코 우둔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사람의 피를 보는 걸 

원치 않는다. 최소한의 피해를 위한 계책일 게다. 그리고 이 계획이 애 

초부터 불가능했다면 가주의 옆에 있는 그 사내가 그대로 따랐을 리가 

없다. 

능려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습니다. 그 분의 인성(人性)을 알기에 믿을 수밖에 없군요." 

"말한 대로요. 슬슬 격전이 벌어질 듯 하니 능 소협은 뒤로 물러나시 

오." 

"아닙니다. 저도 앞에서 싸워야지요." 

"다친 사람의 손까지 빌릴 정도로 우리 1조는 약하지 않소." 

우문학은 능려운을 바라봤다. 몸을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이지 

만 무공을 펼친다면 이야기는 달라 질 거다. 진자자의 말을 들어보니 아 

직 뼈도 채 붙지 않은 상태다. 이런 상태로 움직여 봤자 별 도움도 되 

지 못할 게다. 

능려운이 고개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일 조를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믿는다면 뒤에 계시도록 하시오. 괜히 다친다면 가주님 뵐 면목이 없어 

지니." 

"그래도 전 앞에 서겠습니다." 

"허어, 왜 이렇게 고집이 강한 거요? 지금 능 소협은 간신히 몸이나 가 

눌 수 있는 수준이란 말이오." 

"…… 수문장이어서 입니다. 수문장은 문을 지키는 무인입니다. 맨 앞 

에 서서 싸우지요. 수문장이 맨 뒤에 서 있다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겁 

니다." 

처음엔 짜증이 일었다. 자기 주제도 모르면서 까부는 애송이로만 봤다. 

그런데 끝까지 말을 들어보니 그건 아니다. 무인 중에서도 이런 자는 드 

물다. 얼마 전까지 낭인이었다는 것이 믿어져지지 않는 패기다. 

우문학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빛으로 능려운을 바라봤다. 

"수문장은 죽어도 문 앞에서 죽습니다." 

"허……" 

능려운의 마지막 말에 우문학은 탄성(歎聲)을 내뱉고야 말았다. 

목숨을 건다는 거,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거다. 그것도 살 기회를 주었 

는데 불구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걷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자네 마음에 드는 군. 세가에 돌아간다면 술 한잔하세." 

"예,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능려운은 이제는 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운문세가의 인물들을 보 

면서 중얼거렸다. 

"살아서…… 돌아간다면 말이지요." 

무슨 방법이 있을 거라는 건 알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자신 할 

수 없다. 적어도 밀려서는 안 된다. 일선이 밀린다면 그 뒤는 추풍낙엽 

처럼 쓰러질 거다. 

사기라는 게 있고, 분위기라는 게 있다. 비록 실력이 부족하다고 하는 1 

조지만 그들이 밀리면 뒤에 있는 자들도 자연스럽게 겁을 먹게 될 거 

다. 

능려운은 우문학을 바라봤다. 수많은 무인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일 텐데 

도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변화가 없다. 더불어 그의 뒤쪽에 서 있는 1조 

의 조원들도 마찬가지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코를 후비는 위인과 능려운의 눈이 마주쳤다. 

'두려움이…… 보이지 않아.' 

능려운은 놀라버리고 말았다. 

이들이 비록 파락호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지만 바보는 아니다. 지 

금 운문세가의 일선에서 다가오는 것이 고수라는 것은 분명히 알 거다. 

그런데 눈빛을 보아하니 전혀 긴장을 하지 않았다. 

"일 조 앞으로!" 

1조 무사들을 바라보던 능려운은 우문학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우문 

학은 검을 어깨에 빗대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당당해 보였다. 

파락호처럼 건들거리는 걸음이다. 누가 본다면 술에 취한 게 아닐까 오 

해할 지도 모를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걸음이 당당해 보이는 

건 왜일까? 

1조의 조원들이 움직이자 뒤에 있던 다른 자들도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본 능려운은 확실한 차이를 알았다. 

1조의 대원들은 웃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자들은 오히려 표정이 굳은 

상태다. 약하다고 생각했던 1조의 대원들을 결코 약하지 않다. 

정신력만이 높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을지도 모르는 싸움 앞에서 

저토록 의연할 수 있다는 건 무서운 거다. 

어깨에 검을 올린 채로 걸어가던 우문학이 검을 뽑은 후 검집을 허리에 

꼽았다. 

검을 땅에 박아 넣은 우문학이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멍청한 돼지들아! 올 거면 어서 오고, 무서우면 당장 꺼져라!" 

그 말은 격돌하려던 양 세가의 무인들 모두의 귀로 스며들었다. 

악양유가 무인들의 안색을 파래졌다. 그렇지만 그 말에 1조의 조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저, 저 개 잡종만도 못한 놈이 어디서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 게냐!"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한 노인 하나가 운문세가 쪽에서 우문학을 향해 달 

려왔다. 달려오는 노인을 바라보며 검을 땅에 꼽은 채 우문학이 피식 웃 

었다. 

막 검이 우문학을 꿰뚫으려는 순간 땅에 박혀 있던 검을 뽑으며 그가 노 

인을 향해 일검을 휘둘렀다. 

노인의 손이 검을 잡은 채로 땅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우문학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노인장, 이제 밥 먹기 힘들겠어. 물론 그 전에…… 이곳에서 살아서 돌 

아갈 수 있느냐가 문제겠지만." 

그 일격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운문세가의 일진에 있던 자다. 그리 

고 풍채나 움직이던 모든 것이 고수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 자게 베였다. 그것도 일수에 너무나 쉽게 무너져 버렸다. 더군다 

나 그 노인을 벤 것은 1조의 조장 우문학이다. 세가 내에서도 실력이 없 

기로 유명한 1조다. 

그들이 했다. 그럼 자신들도 할 수 있는 거다. 

악양유가의 무인들의 마음 속에서 어느 정도 불안이라는 감정이 사라졌 

다. 

반면 운문세가에서 온 자들은 멈칫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먼저 움직 

였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렇 

지만 곧 운문세가의 무인들은 자신들의 병기를 쥐고 악양유가가 있는 쪽 

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팔이 잘렸던 노인은 피를 흘리면서도 서둘로 뒤로 물러섰다. 

'혈전이 시작됐다.' 

과연 이 싸움의 끝에 몇 명이 살아 남을지 능려운은 알지 못했다. 자신 

의 앞날도 모르는 마당이다. 능려운은 검을 빼들었다. 

분명 무공을 펼칠 몸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앉아서 구경 할 수는 

없다. 아까 우문학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는 수문장이다. 상황이 어떻든 

맨 앞에 서서 검을 휘두를 거다. 

'난 과연 이 싸움의 끝에서 살아 남아 있을까?' 

"일 조는 옆으로 길게 포진하라!" 

우문학의 목소리가 약해지려는 능려운의 마음을 다잡게 했다. 

'난 살아 남는다. 반드시 살아 남고야 말겠다!'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다. 아직 그토록 원했던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 

했다. 아직 인정도 받지 못했다. 가주에게가 아니다. 능려운은 그 사내 

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우문학은 옆에 있는 능려운을 힐끔 쳐다봤다. 방금과는 다르게 갑자기 

눈빛이 변했다. 

'좋은 모습이야. 저런 무골을 그냥 썩히기에는 아깝지. 이번 싸움이 끝 

나 세가로 돌아가면……' 

우문학은 능려운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마음먹었다. 세가 

로 돌아가게 되면 능려운에게 자신의 무공을 전수 해 줄 생각이다. 

'후후, 죽지 마라. 죽게 되면 넌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셈이니까.' 

우문학은 능려운에게서 눈을 돌렸다. 약 십여 장 건너에서 운문세가의 

인물들이 다가오고 있다. 

"길을 터주지 마라! 우리 악양유가의 힘을 보여줘라!" 

그의 혈풍구룡검법(血風九龍劍法)은 뛰어난 무공이다. 그리고 그의 기백 

은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검을 잡았다면 죽을 각오를 했겠지!" 

…… 그렇기에 우문학은 강하다. 

 혈리추검(血釐追劍) 공청 

푸스슥. 

조그만 소리가 인다. 이미 동물은 살기 힘들 정도의 추위다. 토끼일 리 

는 없다. 

소리가 난 후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한쪽 방향을 가리 

키며 간단하게 고갯짓으로 의사를 전달하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달리고 있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들은 평범한 자들이 아니 

다. 엿 다섯 이상 되는 이 인물들은 모두 무공을 익혔다. 

거대한 나무가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하자 그들은 모두 몸을 감췄다. 

"뭐가 보이세요?" 

유설린은 나무 뒤에 숨어 아래쪽을 보기 위해 허리를 굽힌 풍운조에게 

물었다. 풍운조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겨울의 매서움 칼바람만이 소매를 흔들었다. 

"조금 더 가야겠소이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풍운조는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다. 예상대로라면 이 곳에 있었어야 한 

다. 물론 이곳보다 조금 더 들어가면 좋은 곳이 나온다. 그렇지만 애초 

부터 그 장소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좋은 장소인 건 분명하다. 이 근방에서 상대에게 그만큼 안 좋은 장소 

는 없다. 나무가 우거지고 해서 들어오다가 기습을 당하기 쉬울 게다. 

문제는 배수의 진이라는 거다. 

상대에게도 좋지 않지만 그쪽에게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뒤가 막혀 있 

어 도망을 칠 수도 없다. 두 패거리 모두에게 나쁘지만 굳이 찍으라면 

오히려 그들 쪽에 불리하다. 

운문세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수뇌부를 제압하려고 기습을 해 올 거라 

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런 배수의 진이라 

니……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뭔가가 있지 않았 

다면 할 수가 없는 행동인 건 분명하다. 

뭘까? 지금 운문세가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두릅시다. 여기서 시간을 버리다가 본대가 위험하오." 

남궁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풍운조는 우선 걱정을 접었다. 그리고 그 

들은 비탈을 타고 아래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휙휙! 

그들은 바람을 안고 무작정 달렸다. 역풍(逆風)이다. 하필이면 지금 역 

풍이 불고 있다. 

앞장서서 달려가던 남궁벽이 먼 곳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한 남자를 발 

견했다. 운문세가의 가주인 운마연이다. 

운마연은 이들을 발견하고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웃었다. 

'역시 올 줄 알았다는 건가!' 

무슨 수를 써놨겠지만 멈출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준비해 둔 수작을 부 

리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운마연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마음은 급했지만 남궁벽은 차마 출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도인이다. 무방비인 상대에게 무턱대고 일장을 

날릴 수는 없다. 하물며 그가 누구인가. 남궁벽, 그 이름의 무게는 결 

코 가볍지 않다. 

그의 행동은 곧 남궁세가의 명예로까지 이어질 게다. 

"운 가주님, 오랜만에 뵙네요." 

유설린이 웃으면서 말했다. 운마연의 옆에는 그의 세 명의 자식과 서유 

종, 그리고 무인으로 보인는 무사 둘이 서 있었다. 

숫자로 보나, 무공의 수위로 보나 압도적이다. 

그런데도 운마연은 태연한 얼굴이다. 운마연은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유 

설린에게 화답했다. 

"오호, 잘난 악양유가의 가주님이 아니신가. 한두 달 정도 전에 봤으니 

꽤나 오랜만이군 그래. 그나저나 못 보던 얼굴도 몇 있는데……" 

운마연은 남궁벽을 비롯한 남궁세가의 인물들과 일면식이 없다. 그 탓 

에 그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운 가주시오?" 

"노인은 누구지?" 

"남궁벽이라 하외다." 

"음!" 

웃고 있던 운마연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하지만 곧 그는 다시 웃음 

을 찾았다. 

"천뢰삼검(天雷三劍) 남궁벽이라는 위명(威名)은 많이 들어봤지." 

"허허." 

남궁벽은 자신에게 하대를 하는 운마연을 보면서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만 운마연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 잘난 그 남궁세가의 분들이 왜 여기에 온 거지? 여기 무엇 먹을 

게 있다고." 

"저 놈이!" 

흥분을 잘 하는 남궁혁련이 발끈해서 나서려 했다. 막 뛰어나가려는 그 

의 앞을 남궁벽이 손을 들어올려 막았다. 

"가만히 있거라." 

"하지만 저 놈이……" 

"이 노옴! 상대가 예를 차리지 않는다 하여 너도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 

느냐!" 

남궁벽의 호통에 남궁혁련은 찔끔하고 뒤로 물러났다. 남궁벽은 다시 고 

개를 돌려 운마연을 바라봤다. 

"우리는 악양유가를 도우러 왔소이다. 운 가주께서 다른 곳에 원조를 받 

으신 것처럼 우리는 악양유가를 돕기로 했소." 

"그래 악양유가가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던 모양이지? 악양유가 

의 편에 선 것을 보니." 

"지금 봐도 알지 않겠소이까. 당신들로 우리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막을 

수 없소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물러선다면 쫓지는 않을 게요." 

"그래, 물러나면 내게 이득이 되는 게 뭐지? 난 이득 없는 행동은 안 하 

거든." 

"목숨은 건질 수 있지 않겠소." 

남궁벽은 자신이 있었다. 

상대방의 수는 일곱이다. 그에 반해 자신들의 수는 남궁세가의 무인의 

수만 해도 열 셋이다. 거의 갑절에 차이가 날 정도다. 운문세가의 가주 

인 운마연은 무공으로도 어느 정도 유명한 자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가 

강하다 해도 자신에 비하면 한참 아래다. 

운마연의 세 아들 중 첫째와 둘째는 어느 정도 무공에 재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남궁혁련과 남궁리에 비하면 우스울 거다. 그럼 남은 

건 넷 뿐이다. 

넷을 열 명이서 제압하면 된다. 질 리가 없는 싸움이다. 아무리 상대를 

높게 봐준다 해도 이건 일방적인 싸움이 될 거다. 

"내 목숨이라고? 하하! 웃기고 있군. 목숨을 구걸해야 할 것은 내가 아 

니라 바로 네놈들이다! 내 장담하지. 네 놈들 중 단 하나도 이곳에서 살 

아 나갈 수 없을 거다." 

"아무래도 말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구려." 

남궁혁련이 검을 뽑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 

다. 시간이 많았다면 더 설득을 해봤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 

금 악양유가의 무인들과 운문세가의 무인들이 격돌했다. 빠르면 빠를수 

록 사람의 목숨을 구하게 되는 셈이다. 

"내 손을 원망치는 마시오 운 가주." 

막 운마연을 향해 움직이려던 남궁벽은 갑자기 검의 방향을 선회했다. 

타앙! 

짧은 비수 하나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져 내렸다. 천천히 남 

궁벽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명의 남자가 나무 

틈 사이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역시 천뢰삼검이군. 이름이 아깝지는 않아." 

여자와 같은 체형을 지닌 사내다. 대단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다가오고 

는 있지만 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범상치 않다. 

남궁벽은 짙은 피 내음을 맡았다. 

"이거였군." 

여운휘의 갑작스러운 말에 남궁벽은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고 묻는 듯한 남궁벽의 표정에 여운휘가 말을 이었다. 

"운문세가의 가주가 믿던 게 네 놈이었군." 

"하하, 오랜만이야. 저번엔 아주 고마웠어." 

사내는 친근하게 여운휘에게 말을 걸었다. 여운휘의 눈이 평소보다 더욱 

더 차갑게 변했다. 

다른 자들은 갑작스러운 전개에 의아해 하고 있었지만 유설린만은 이 일 

의 전말을 알고 있었다. 

"도움을 받았으면 갚아야지." 

"난 그 도움에 고마워서 그때 너희의 목숨을 살려주지 않았나. 그거 

면…… 충분하지 않아? 지금도 살려 달라고 하면 곤란해. 난 이미 네게 

진 빚을 확실히 갚았거든." 

남궁벽은 앞에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여인 같은 체형을 가지고 있고 비 

수를 잘 던지는 자…… 

"혀, 혈리추검(血釐追劍) 공청!" 

"이런, 천뢰삼검이 알아주다니 영광이로군." 

공청은 웃고 있었지만 남궁벽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못했다. 

혈리추검 공청이라면 남궁벽 또한 잘 아는 자다. 살령대의 대주이자, 호 

남의 살수들을 관장하는 자. 호남제일살수를 꼽으라면 그 누구도 서슴 

지 않고 공청을 꼽을 게다. 

아무리 남궁벽이라 해도 공청이라면 쉽사리 볼 수 없다. 무공 실력은 분 

명 남궁벽이 위일 게다. 그렇지만 그건 정정당당한 비무에서였다. 공청 

은 살수다. 

살수는 암기를 사용한다. 그리고 주변의 그 모든 게 무기다. 승부를 장 

담할 수는 없다. 

남궁벽은 그의 등장에 놀랐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도 하나 있었다. 

'이건 기회다!' 

남궁혁련은 순간 공청이라는 이름에 놀랐지만 곧 그의 왜소한 체구를 보 

고 피식 웃었다. 척 봐도 별반 대단한 게 없어 보인다. 그리고 예부터 

남궁혁련은 살수라는 자들을 얕봤다. 

대단해 봤자 몇 백년의 전통이 이어지는 남궁세가의 검술에 비견 될 리 

가 없다. 남궁혁련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슬쩍 내려봤다. 

지금 말을 하는 틈에 기습적으로 검을 휘두른다면? 

'좋아. 할 수 있다. 호남제일살수라고? 웃기지 마라. 살수 따위가 감 

히……' 

남궁혁련은 잠시 남궁벽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취 

하려 하는 지 모를 게다. 더군다나 공청은 남궁벽의 몸에 가리워 자신 

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게다. 

호흡을 길게 들이마신 남궁혁련이 누가 말리기도 전에 공청을 향해 몸 

을 날렸다. 

남궁벽은 순간 누가 자신을 스쳐지나가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정 

체가 남궁혁련인 것을 아는 순간 재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반응 

이 너무 늦었다. 

남궁벽과 공청의 거리는 그다지 길지 않았고, 이미 남궁혁련은 쏘아진 

화살이었다. 

남궁혁련은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를 펼쳤다. 

"타앗!" 

일검이 공청을 벨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거라 남궁혁련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벨 거라고 생각했던 검에 아무런 느낌이 없 

다. 

작은 체구답게 안으로 파고드는 것도 순식간이다. 

재빠르게 다음 검으로 이어지는 순간 남궁혁련은 입에서 피를 토해냈 

다. 안으로 파고든 공청의 손바닥이 정확하게 가슴을 쳤다. 

막 공청의 공격이 이어지려는 순간 뒤에서 달려가던 남궁벽이 남궁혁련 

의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비수가 남궁혁련을 스치면서 땅에 박혔다. 

"헉헉……" 

남궁혁련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 

르겠다. 섬전십삼검뢰를 펼치자마자 곧 가슴으로 폭풍 같은 힘이 몰아쳤 

다. 

"이 멍청한 놈!" 

지금 남궁혁련에게는 남궁벽의 일갈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 정도 

로 그는 정신이 나가버렸다. 그렇지만 남궁혁련은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 

고 눈을 부릅뜬 후에 공청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너 이리 와. 방심을 해서 내, 내가 이렇게 됐지만 이제 제대로 상 

대해 주겠어." 

"죽기 싫으면 거기서 조용히 있거라 아가야. 넌 내 상대가 아니야. 이곳 

에서 내 상대가 될 수 있는 놈은……" 

공청의 눈이 향한 곳은 남궁벽이 아니었다. 그는 여운휘를 바라보고 있 

었다. 

"나와야지? 네가 아니면 이곳에서 누가 날 막겠어." 

"걱정 마라." 

여운휘가 풍운조에게 유설린을 맡기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나오지 말라고 해도 나갈 테니까." 

남궁벽은 조용히 뒤를 바라봤다. 공청 하나만을 믿고 운문세가의 가주 

라 거리 행동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바로 맞아 

떨어졌다. 

공청이 왔다. 그리고 그는 살령대의 대주다. 

굳이 더 이상 말을 할 필요도 없다. 풍운조와 남궁벽을 제하고는 아무 

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두 검을 뽑아라." 

남궁벽의 말에 막 붙으려는 여운휘와 공청에게 시선을 던지던 자들이 의 

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곧 남궁벽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는 두 

말 없이 검을 꺼내들었다. 

사방에 있던 나무에서 일련의 무리들이 떨어져 내렸다. 수는 거의 백여 

명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했지만 지금모습을 들어내기 전까지 대부분 

은 이들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들이라는 거다. 

이 정도라면 운마연이 자신 있어할 만 했다. 

"상대는 살령대다! 긴장을 놓치지 마라!" 

검은 복면을 뒤집어쓰고 눈만을 드러낸 자들이 천천히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덩달아 운문세가의 인물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문세가의 인물들 중에서는 운마연을 제하고는 그다지 큰 문제는 없 

다. 그렇지만 살령대는 그렇지 않다. 개개인의 무공은 떨어질지 모르나 

살수다. 살수라면 방심을 할 수가 없다. 

예상치 못한 한 수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남궁벽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일이 어려워지겠어. 잘못하면…… 모두 죽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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