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마치고 특별히 준비 된 연무장에서 한바탕 검무를 펼치는 남궁혁
련에게 시비 하나가 다가왔다. 남궁혁련은 검을 멈추고 짜증스러운 얼굴
로 시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냐."
"가주님께서 무엇을 보내셨습니다."
"뭐? 악양유가의 가주가?"
남궁혁련은 유설린의 얼굴을 떠올리며 반문했다. 흑심을 가졌던 여인이
무엇을 보냈다는 소리에 그는 갑작스럽게 기분이 좋아졌다. 시비와 함
께 온 두 명의 남자가 커다란 상자를 내려놨다. 꽤나 큰 상자를 보면서
남궁혁련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선물을 보낼 때는 단 한가지 이유 밖에 없다.
'나에게 관심이 있었군.'
순진하게 생겨 가지고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봤을 가주를 생각하니 웃
음 밖에 안 나온다. 그는 시비와 하인들이 사라지자 상자를 열었다.
"음?"
검 두 자루와 도 두 자루가 안에 들어 있다. 처음엔 보검이라도 주는 건
가 했는데 이렇게 검과 도를 준다는 게 이상했다. 더군다나 그 도와 검
은 모두 반으로 갈려 있었다.
그러던 중 남궁혁련의 눈에 어디선가 본 듯한 도가 들어왔다. 끝 부분
에 푸른 끈이 매여 있는 것이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내가 저것을 어디서 봤더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궁혁련은 곧 그 도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제 자신에게 도를 휘두르려 했던 그 남자의 것이다. 그 남자의 도에
도 푸른 끈이 묶여 있었다. 네 명의 남자, 그리고 이 안에 들어 있는
두 자루의 검과 두 자루의 도.
꺾어져 버린 검과 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남궁혁련을 알고야 말았
다.
뿌드득!
자신도 모르게 남궁혁련은 강하게 이를 갈았다. 꽉 쥐어진 손에서 금방
이라도 힘줄이 솟아 나올 것만 같다.
걸려 버린 것이다. 어제 자신이 그 네 명에게 악양유가의 인물을 건드리
게 했다는 사실을.
이 부러진 검과 도…… 단순히 검과 도만이 부러진 것이 아니다. 그건
악양유가에서 그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
"감히 날!"
남궁혁련은 자기도 모르고 고함을 질렀다. 멀리서 무공을 연마하던 남궁
리가 이상한 얼굴로 쳐다봤지만 이미 남궁혁련에게 그것은 보이지 않았
다.
마교가 완벽하게 정리 됐다.
교주를 향해 대놓고 욕을 하던 자들이 하나도 남김 없이 그 모습을 감췄
다. 아무 증거도 없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자는 없다.
하나 둘이 사라진 거라면 모른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다섯이나 되는 자
가 모습을 감췄다. 그것도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
이다.
말은 하지 않지만 수뇌부들은 교주가 손을 쓴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일을 가지고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자신들도 쥐
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지도 모른다.
마교는 침묵했다. 그렇게 마교는 거의 완벽하게 엄백린의 손에 들어왔
다.
마교도 손에 넣었으니 엄백린은 모든 게 태평 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
만 정작 그는 그렇지 못했다.
술을 들이키던 그는 앞에 있는 진린에게 물었다.
"유설린의 거처는?"
"…… 아직 모르겠습니다."
엄백린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진린에게 던졌다. 진린의 이마와 부닥
친 술잔이 깨져 버렸다. 술잔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진린은 고개를 숙
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 잔뜩 묻어 버린 술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도대체 왜! 왜 아직도 계집 하나 어디 있는지 모른단 말이냐! 우리 마
교의 정보망이 겨우 그거란 말이냐! 계집 하나를 찾는데 지금 일년이 넘
는 시간이 흘렀다. 네 놈이 지금 찾고나 있는 거냐?"
"죄송합니다. 너무 완벽하게 모습을 감춰 버리는 바람에 찾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게 지금……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엄백린은 진린의 뺨을 한대 치더니 재차
뺨을 치려다 손을 멈췄다.
진린 그가 없었다면 마교를 장악하는 것을 성공하지 못했을 거다. 아
니, 애초부터 계획하지도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엄백린의
옆으로 온 남자다. 그리고 그가 마교를 장악할 모든 계획을 말해줬고,
그것을 실행하기도 했다.
그런 그였기에 엄백린은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라도 진린만
은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잠시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엄백린이 말했
다.
"찾아라, 무조건."
"알겠습니다."
"그럼 가라.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마라. 찾지 못하면 네 목이 떨어질 게
야."
"그 말…… 새겨듣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진린은 다시 술잔을 들이키는 엄백린을 뒤로하고 문 밖으
로 나갔다. 거대한 장원을 지나 걷는 진린의 앞으로 검은 무복을 입은
노인이 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은가."
"건방진 새끼……"
진린의 손에서 빠르게 빠져 나온 검이 옆에 있던 나무를 갈랐다. 순식간
에 두 개로 나뉘어진 나무는 곧 네 개로, 그리고 여덟 개로 변해 버렸
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엄청난 속도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조금만 참으면 모든 일이 끝날 게야."
"아직, 아직은 죽일 때가 아니야. 소교주를 잡는 날까지는 그 놈을 이용
해야 돼."
진린은 엄백린에게 맞은 뺨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다시 한 번 화가 솟구친다. 자신이 겨우 저 따위 자에게 맞을 인물이란
말인가. 천하에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리 대할 수는 없다. 진린은 이를
갈았다. 비록 이용해 먹기 위하라고는 하지만 무인의 자존심이 문제다.
이 놈은 도대체 억제하려고 해도 그게 쉽지가 않다.
무인의 자존심이란 게 웃긴 거다. 조금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것도 무
인의 자존심과 연계를 시킨다면 충분히 명분이 서게 된다. 죽이고 나서
저 자가 나의 무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한다면 그 누가 뭐라고 하겠
는가.
방금 뺨을 맞는 순간 엄백린의 목을 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진린
은 가까스로 그 욕망을 이겨내고 그곳에서 나왔다. 그는 자존심도 강한
자지만 상황을 볼 줄 아는 자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아직 마교 교주 엄백린은…… 이용할 자다.
진린은 앞에 있던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교주의 거처는?"
"조금만 더 파고들면 될 것 같긴 한데……"
진린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노인이 아직까지 한 여자의 거처를 찾지 못
했다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 앞에 있는 노인은 겉보기엔 그
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 누구보다 대단한 정보집단을 지니고 있
다.
그건 개방과 맞먹을 정도의 힘이다.
"대단하군. 이토록 당신이 오랫동안 찾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
는데. 평가를 조금 잘못한 것 같군."
"소교주 혼자였다면 찾아도 예전에 찾았을 걸. 아마 그 호위무사 탓일
게야. 그 놈 만만치는 않을 것 같군."
"여운휘라는 그 놈 말인가?"
"그래, 그 놈. 알아보니 사림까지 통과했다는 군. 대단한 기재인 모양이
야. 그 나이에 사림을 통과했다니."
"그래봤자…… 애송이일 뿐이야. 애송이 하나가 날뛴다고 상황은 변하
지 않지. 그저 지 명만 단축시키는 꼴이 될 거다."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 그 누가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남자에게
위협거리가 될 것인가.
세상은 진린을 마교 교주 엄백린의 오른팔이라고만 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자들을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는 결코 누구의 밑으로 들어
갈 만한 위인이 아니다.
진린은 두 얼굴을 가진 남자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얼굴을 아는 자는 거
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애송이 주제에 날뛰어 봤자지……"
진린은 중얼거리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암전(暗戰)
동지(冬至)는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네 개의 그림자가 악양유가의 담을 넘어섰다. 그
들은 상대방을 쳐다 본 후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미
리 치밀한 조사라도 한 듯 한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은밀하게 행동하던 그들이 멈춘 것은 어느 건물 앞에서다. 그 네 명 중
하나가 천천히 건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작은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
로 그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조용히 문은 열렸고, 그 안으로 네 명은 소리도 없이 들어갔다. 안에서
는 수많은 무인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머지 셋은 조심스럽게 각기 한 사람의 옆에 서더니 검을 들어 올렸
다. 문 쪽에 서서 방안에 무엇인가를 뿌리던 나머지 한 명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 순간 검이 움직였다.
번뜩!
검이 번뜩이는 순간 세 명의 무인의 목이 동시에 떨어졌다. 그런데 아무
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너무 빨랐기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미약한 신
음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게 다가 아니다. 신음이 나지 않을 수는 있다 치자. 하지만 아무리 삼
류나 이류라 해도 바람 가르는 검의 소리를 들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는 것은 이상한 거다. 지금쯤이면 한 명쯤은 일어나 비명을 질렀어야 옳
다.
아무리 삼류라 해도 그들도 무인이다.
한 명씩의 목을 완벽하게 벤 후부터는 그저 무작정 검을 휘둘러 근처에
있는 자들의 목을 베어냈다.
"으으!"
누군가가 짧게 비명을 토해냈다. 무턱대고 검을 휘두르다 완벽하게 베
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소리가 났음에도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여덟 명의 무인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소리가 났음에도 그 네 명의 인물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소리를
나게 한 자의 목에 더욱 깊숙이 검을 박아 넣은 후 다시 옆에 있는 자
의 목을 칠 뿐이다.
방안에 있던 스무 명 정도의 무인이 모두 죽었다. 잠시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던 한 명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역시 자네의 몽환약(夢幻藥)은 대단해. 자신의 목이 베이는데도 불구하
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군."
"후후, 내가 이 몽환약을 연구하느라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이 정도도
못돼서야 어떻게 하겠는가."
"미리 준비한 약을 물고 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정신을 잃었겠어. 그 누
구라도 해도 자네의 몽환약을 버텨낼 수는 없을 게야."
"그만 하고 서둘러 움직이자. 아직 두 번은 더 움직여야 한다."
한 남자가 나서면서 그 둘의 이야기를 중지시켰다. 아직 할 일이 많다.
그리고 밤도 아직 많이 남았다.
오늘은 밤이 긴 동지(冬至)다.
"허허……"
풍운조가 공허한 듯이 웃었다. 이런 보고가 벌써 네 개가 올라왔다. 보
고가 믿기 어려워 자신이 직접 현장에 가서 봤거늘 그건 사실이었다.
팔십 사 명의 무인이 죽었다. 네 군데가 당했고, 그 안에 있던 자는 단
하나도 살지 못했다.
풍운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흔적을 찾았다. 죽인 자의 흔적은 보이
지 않는다. 그리고 싸운 흔적 또한 보이지 않는다.
주변의 거처에서 있던 자들도 새벽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소리가 나지 않은 게 아니다. 반항도 하기 전에, 채 무엇을 하기도 전
에 전부 죽은 거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자신이라면……
죽일 수는 있다. 아마 이들을 죽이는데는 반각도 걸리지 않을 거다. 그
렇지만 악양유가 안에서 아무런 소란도 일지 않게 죽일 수는 없다. 단
하나, 독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다면.
"독, 독이군."
단순하게 죽이기만 하라면 이십 개에 달하는 비수를 한 번에 던져서 이
들을 죽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비수로 스무 명에 달하는 자들을 한 번
에 죽일 수는 있어도, 그들의 입까지 막을 수는 없다. 누군가가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어제 이 근방에 있던 자들이 알았을 거
다.
아무런 소란도 없게, 반항한 흔적도 없이 죽였다는 것은 독을 사용했다
는 추리 밖에 나오지 않는다. 풍운조라 해도 독을 사용했을 거다.
독을 썼다고 치자. 그런데 또 이상한 게 있다. 독에 당했다면 흔적이라
도 남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런 흔적이 없다. 피부색도 정상이고 눈을
뒤집어 봐도 멀쩡하다. 입안을 열어봤지만 또한 이상한 게 없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풍운조가 독백처럼 입을 열었다.
"호흡……"
호흡이다. 호흡을 통해 체내로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연
기일 확률이 높다.
풍운조는 독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다. 독의 사용법에 능하며 그것
을 적시적소에 잘 사용하는 자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라도 당한 것이 무
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진자자(振自自)에게 가 봐야겠어."
진자자는 최고의 의원이자 또한 독에도 능통한 자다.
잠시 시신 한 구를 이리저리 만져보던 진자자가 입을 열었다.
"흐음, 아무래도 몽환약을 사용한 것 같아. 잠에 빠져 있었으니 채 반응
도 하지 못했겠지. 죽은 시각도 대충 축시(丑時)에서 인시(寅時) 정도
야. 모두가 잠에 빠져 있었겠지."
"몽환약이라……"
풍운조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는 데 좋고 나쁘고 가 있다는 것이 우스운 거다. 어떻게 죽
이나 죽이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더군다나 풍운조는 살수였다. 독을 사
용한 적도 많고, 심지어 작은 마을을 잿더미로 만든 적도 있다.
시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 풍운조를 향해 진자자가 입을 열었다.
"풍형, 며칠 전에 정신 잃었던 그 녀석 벌써 일어났더군."
"뭐? 벌써?"
"몸 하나는 기차게 좋더군. 어제 저녁에 일어났는데 벌써 일어나서 걸으
려 하고 있어. 한달 정도면 예전처럼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더군."
풍운조는 잠시 더 그 시체들을 내려다보다가 뒤에 있던 수하들에게 명령
을 내리고는 진자자와 함께 가주의 거처로 향하기 시작했다.
풍운조와 진자자는 가주의 거처에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방 안에
는 보고서를 가져온 삼일과 유설린, 그리고 여운휘가 있었다. 풍운조가
모습을 드러내자 유설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인가요?"
"그렇더구려. 보고서대로 모두가 죽었소이다."
"휴우……"
유설린이 크게 한숨을 쉬면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마음이 여린
여인이다, 유설린은.
"흉수는?"
유설린을 대신해서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여운휘의 질문에 진자자가 답
했다.
"사인은 검이야. 목과 머리를 집중적으로 당했지. 그리고 중간에 몽환약
을 사용해서 완벽하게 잠에 빠트려 버렸고. 그 탓에 주변에서는 그들이
당했다는 사실도 몰랐지."
"몽환약?"
"몽환약도 보통 몽환약이 아니야. 이 정도라면 분명 전문적으로 그쪽을
만들던 자의 솜씨일 게야."
독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능력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제 가치의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위력을 보인다. 그렇지만 몽환
약은 일반적으로 구하는 것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분의 것이었고, 하독
실력 또한 완벽했다.
"그보다 문제가 있소이다."
얼굴을 숙이고 있던 유설린이 풍운조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누군지 모른다면 오늘 저녁도 똑같은 일을 당할 게 분명하오. 단 하루
저녁의 기습만으로 벌써 세가의 힘 중에서 많은 부분을 잃었소. 이렇게
가다가는 무인들이 떠날 건 불 보듯 뻔하오."
보이지 않는 적만큼 무서운 건 없다.
야전(夜戰)이 그래서 무섭다. 밤에 싸운다는 건 평소보다도 더한 압박감
을 준다. 주변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탓이다. 일류 고수라 해도 어
둠을 두려워한다. 하물며 이류나 삼류에 불과 하는 자들이야……
계속 되어 무인들이 죽는다면 그들은 모두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어
떤 무인도 이곳으로 들어오기를 꺼려할 것이다. 돈 때문에 목숨을 버리
는 바보는 없다.
"운문세가이긴 한 것 같은데 증거가 없소이다."
지금 이런 공격을 할 자들은 운문세가 밖에 없다. 생각지도 못한 계획이
다. 이렇게 일만 잘 진행되어 간다면 악양유가의 무인들은 모두 모습을
감출 것이다. 그리고 그걸 운문세가가 노리고 있을 게다.
"흉수(凶手)를 뿌리째 뽑아 내야 하오. 그렇지 않다면…… 운문세가 대
신 망하는 것은 우리가 될 거요."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삼일, 최근 들어 운문세가에 들어왔던 자들 목록 가지고 있겠지."
"물론이지요."
"어느 정도면 분석 가능한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삼일이 곧 여운휘의 질문에 답했다.
"하루면 가능합니다."
"저녁, 오늘 저녁이 되기 전까지 알아봐."
"……"
"불가능한가?"
"큭큭, 항시 무사 님은 재미있는 것을 주문하시는군요."
삼일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흥분되는 일을 하게 될 때 그가 취하
는 버릇이다. 여운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삼일이라면
저녁까지 알아 볼 수 있을 거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내기만 해도 큰 수확이다. 누군지만 안다면 지금 그
가 있는 곳도 알 수 있다.
"몽환약을 잘 다루고, 제조에도 뛰어난 자다. 설령 운문세가에 들르지
않았다 해도 그쪽과 끈이 있는 자라면 모두 알아봐. 그리고 그것에 포함
된 자들 모두의 현재 거처도 알아내. 아마 상당히 힘들 거다."
여운휘는 말을 마치고도 자신의 앞에 있는 삼일을 보며 다시 말했다.
"뭐 하는 거지? 시간이 남는 가 보군 그래."
여운휘의 그 말에 삼일은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갔다.
진자자가 종이 한쪽에 있는 자를 가리켰다.
"이 자야."
"어떻게 그리 단정할 수 있는가?"
"가루를 썼어. 삼일이 사람을 알아보는 동안 코로 스며든 가루를 분석
을 좀 했지. 이런 식으로 몽환약을 만드는 것은 이 자 뿐이야."
풍운조의 말에 진자자는 확실 어린 어투로 대답했다. 몽환약을 분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낯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자자는 이 몽환약을 만
든 자와 꽤나 악연이 깊은 편이다. 만약 그를 알지 못했다면 지금 이처
럼 확신 어린 대답을 할 수는 없었을 게다.
"몽환선사(夢幻禪師) 양무유. 몽환약으로는 이쪽 세계에서 거의 독보적
인 존재입니다. 가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 지……"
"대가를 받아야해요. 그리고 더 이상의 피해는 원치도 않고요. 삼일, 몽
환선사 양무유라는 자 어디 있는지 당연히 알아봤겠죠?"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럼 서둘러 움직이죠. 그들이 악양유가 안에 들어와서 다시 한 번 일
을 벌인다면 힘들어 질 거예요."
다시 밤이 오고 있다. 오늘밤에 그들을 잡지 못한다면 또 다시 백여 명
에 가까운 자들이 나뒹굴 거다. 더는 당할 수 없다. 유설린은 더 이상
자신의 수하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진 노야, 어제 저녁 잠입한 자의 수는 얼마 정도죠?"
"상흔(傷痕)을 보니 많아야 다섯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검을 사용합니
다."
"그럼 우리 쪽도 굳이 많은 인원이 갈 필요는 없겠네요."
"나와 저 놈이면 충분할 게요."
풍운조가 여운휘를 가리키며 말했다. 몽황선사는 분명 유명한 자다. 그
렇지만 그의 무공은 별반 볼게 없다.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무공이 아
니라 몽환약이다.
문제는 다섯 정도가 될 자들이다. 정체도 알 수 없고, 할 방도다 없다.
흔적도 없으며 지금은 시간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지금은 부닥치
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유설린에게 불안하다는 마음은 전혀 일지 않았다. 여운휘가 있
으니까. 그녀는 여운휘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마음이 놓였다.
"그럼 삼일과 가주, 나와 저 놈 이렇게 넷이 가도록 하지요."
"잠깐, 풍형 나도 좀 껴야겠어. 양무유는 꼭 한 번 만나봐야 하거든."
풍운조는 유설린을 쳐다봤다.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 그의 시선에
유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지만 너는 무공을 모르니 뒤에 물러나 있도록 해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 그나저나 지금 이렇게 떠들 시간은 없을 텐
데?"
진자자의 말대로 시간이 없다. 이미 사방이 어둑해진 지금 그들은 서서
히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을 게다.
삼일이 앞장서고 그 뒤로 나머지 인원들이 늘어섰다.
"미리 말을 준비시켜 놨습니다."
삼일은 경공을 펼칠 줄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이미 이곳에 올 때 말을
몇 마리 준비시키도록 해 놓은 상태였다. 악양유가 밖으로 나간 그들은
그 앞에 있는 몇 마리의 말 중에서 체력이 좋아 보이는 놈들을 골라 올
라탔다.
모두 말에 올라탔지만 유설린만은 그렇지 못했다. 아직 그녀는 단 한 번
도 말을 타 본 적이 없다. 그때 유설린의 옆으로 다가온 말 위에서 손
이 하나 내려왔다.
"잡아."
"응."
유설린은 손을 뻗어 손의 주인인 여운휘의 앞에 올라탔다.
"간다."
여운휘는 짧게 말하고는 말의 배를 걷어찼다.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삼일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는 작은 키와는 달리 말타
기에 능했다. 삼일은 악양유가에서부터 말을 타고 이각 정도 걸리는 거
리에 이르자 멈추어 섰다.
"저쪽에 있는 집입니다. 저기 몽환선사가 있습니다."
"객잔이 아니고 저 집이라고?"
"돈이 없었나 보죠. 큭큭."
풍운조에 말에 삼일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집은 초라해 보였다. 평생 농사나 지은 노부부가 머물 것만 같이 허름
한 집에 그 많은 사람을 죽인 살귀(殺鬼)들이 있다.
"여운휘와 내가 앞에 서지. 가주를 모시고 나머지는 몇 보 뒤에 서 있어
라."
여운휘는 어느 정도 유설린과 거리를 유지하며 건물을 향해 다가가기 시
작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집의 문을 풍운조가 살며시 열었
다. 그러자 몸을 뉘이고 있던 노인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잠에
서 깼는지 그는 눈을 비비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이렇게 일찍 들어 온 거냐. 아직 시간이……"
노인은 머리카락이 없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으니 마치 중 같
은 느낌이다. 그런 노인이 말을 멈추고 문을 연 풍운조를 응시했다.
"뉘시오?"
"몽환선사(夢幻禪師) 양무유, 네 놈이 한 일의 대가를 받으러 왔다."
"몽환선사? 그게 누구요? 당신 뭔가 단단히 착각을……"
"낄낄! 그 이상한 머리통은 여전하구나."
진자자가 풍운조의 옆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진자자의 얼굴을 본 대머
리 노인은 일순 말을 멈췄다.
"네가 몽환선사 양무유가 아니라고? 날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 산 속에 처박혀 있는 줄 알았는데?
"요즘 악양유가에 몸을 맡기고 있지. 어쩌다 보니 또 만나게 되는 구
나. 아무래도 우린 정말 악연인가 봐? 그렇지?"
진자자가 나타나자 노인은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풍운조의 말대로 그 대머리 노인은 몽환선사 양무유였다.
자리에 앉아 있던 양무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 치고 꽤나 큰 키
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다. 양무유는 밖으로 걸
어 나왔다.
밖으로 나온 그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사람의 수를 파악했다.
"어떻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
"그건 알 것 없고, 나머지 놈들은 어디 있느냐."
"하하하!"
양무유가 웃었다. 미쳐서 웃는 웃음이 아니라 자신감에서 베어 나오는
웃음이다.
양무유는 자신이 있었다.
젊은 남자 둘에 여자 하나, 그리고 노인 둘이다. 비록 자신은 하나고 무
공도 별반 대단하지 않지만 양무유는 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소도 한적하니 죽여도 아무 증거도 없겠군."
"허허."
풍운조가 그냥 웃었다. 양무유가 무엇을 믿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대충 감을 잡은 상태였다.
양무유는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양무유의 옆으로 두 명
의 무인이 나타났다.
"너희는 운이 참 나빠. 네 놈들이 누군 지는 모르겠지만 이들과 싸우게
됐으니까."
그때 양무유를 향해 여운휘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움직이는 여운
휘를 보면서 양무유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여운휘는
별반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양무유와의 거리를 좁힌 여운휘
가 다리를 멈췄다.
"뭘 믿나 했다. 그런데 네가 믿은 게 고작 저거냐?"
"하하, 애송이가 말 한 번 우습게 하는 구나.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
는 네 놈에게 고작이라고 불릴 자들이 아니다."
"해 볼까? 누가 이길지."
여운휘의 태도에 양무유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저 아무 것도 없
이 저토록 당당하기는 힘든 법이다. 아까 자신도 이 두 명이 숨어 있지
않았다면 그토록 당당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때 양무유는 한 가지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 네 놈이 악양유가 가주의 호위무사냐?"
"……"
대답하지 않았지만 양무유는 이미 상황을 파악했다. 저기 있는 저 처음
보는 노인이 총관이라는 자일 테고 저 여자가 악양유가의 가주일 거다.
이런 일에 가주가 직접 올 줄은 몰랐다. 순간 당황했지만 곧 양무유는
다시 웃음 지었다.
이건 분명히 기회다. 가주를 잡는 다면 운문세가와 악양유가와의 싸움
은 완벽하게 끝난다. 전력을 최대한 감소시키는 게 목적이었지만 가주
를 잡아 준다면 받기로 약속한 돈의 크기가 달라질 거다.
멍청한 자들이다. 가주가 오면서 겨우 이 정도의 인원으로 오는 멍청한
짓을 했다.
"악양유가의 가주라…… 오늘 내가 봉(鳳)을 잡는 구나."
"잡히는 건 네가 될 거다."
"건방진……"
양무유는 자신의 양옆에 있는 자들을 보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
그 말에 그 둘은 여운휘를 향해 동시에 검을 출수 했다.
앞을 향해 한 명이 검을 날리는 순간 뒤쪽으로 돌면서 한 명의 피할 길
을 점한다.
'끝났어!'
양무유는 단 일수에 모든 게 끝날 걸 확신했다. 그 순간 여운휘의 검이
검집에서 뽑혔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그 둘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무, 뭐야?'
양무유는 놀라고 말았다. 그 두 명의 검이 교차 된 채로 여운휘의 검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양무유는 어떻게 일이 이
렇게 돌아간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입을 벌린 채 그 셋의
엉켜 있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게 다냐?"
그리고 그런 양무유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운휘가 말했다.
범상치 않은 자라는 말은 들었다.
사람들은 양무유를 무공이 뛰어 나지 않은 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양무유의 이름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뿐이지 그 또한 일류고수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일이 돌아간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방심하고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내 눈으로 저 애송이의 검을 쫓지 못했다는 것인가!'
당황한 건 양무유 뿐만이 아니다. 그들에게 공격을 가했던 두 명의 무인
도 너무나 수월하게 자신의 검을 받는 여운휘에게 놀람을 금치 못했다.
팡!
검이 양쪽으로 튕겨 나갔다. 채 반응도 하기 전에 여운휘의 검이 옆에
있던 자를 향해 쏟아졌다. 여운휘는 한 상대를 향해 자신의 몸을 밀어붙
였다. 그 모습은 마치 투계(鬪鷄)와도 같았다.
비록 당황은 했지만 그들 또한 무인이다. 그것도 어디에 가나 쉽사리
볼 수 있는 삼류무사들이 아니다. 놀라긴 했지만 그저 무턱대고 당할 정
도로 어수룩하지는 않다.
한 명이 빠르면서 정확하게 검을 찔러 넣었다. 여운휘가 몸을 비트는 찰
나 다른 하나가 움직였다.
그 둘은 합공술에 능한 자들이다. 한 사부의 밑에서 무공을 사사 받았
고, 애초부터 합공술을 위주로 배웠다. 그 둘은 같은 때 호흡하고, 같
은 때 잠을 잔다.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항시 같이 있다. 그랬기에 그 둘
의 합공술은 만만치 않다.
서로의 눈만 봐도 맘을 읽을 수 있는 사이다. 그 만큼 무서운 건 흔치
않다.
처음 검은 여운휘의 얼굴 옆을 스치면서 지나갔다. 여운휘가 다리를 뻗
어 앞에서 검을 휘둘렀던 자의 무릎을 밟았다. 뒤로 다가온 자의 검이
닿으려는 찰나 무릎을 이용해 여운휘는 다시 한 번 도약했다. 몸을 한
바퀴 돌리자 등이 보인다.
여운휘의 손바닥이 앞으로 뻗어졌다.
파앙!
둘은 급하게 검을 교차시키면서 여운휘의 장력을 받아냈다. 둘이거늘 밀
려버렸다. 뒤로 물러난 그 둘은 서로의 눈을 쳐다봤다. 말을 하지 않지
만 둘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그 둘이 좌, 우로 나뉘며 여운휘의 양옆을 치며
들어왔다. 왼쪽에 있던 자의 손에 들린 검이 여덟 개로 변했다. 오른쪽
으로 다가오던 자의 검도 여덟 개로 변했다. 좌우에서 열 여섯 개에 달
하는 검광이 밀어 닥쳤다.
여운휘는 우선 오른쪽으로 다가오는 자의 검을 받았다. 그리고 발을 움
직이며 그자의 뒤로 몸을 움직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운휘에게 막혔
던 자가 고개를 숙였고, 그 순간 다른 하나가 검을 찔러 넣었다.
쒜엑!
소리가 소름을 돋을 정도로 매섭다. 무엇인가를 베지 않으면 멈출 수 없
을 것만 같다. 그런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상대가 피해버렸다. 너무
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 둘은 허공에 검을 휘두른 것이다.
어느새 여운휘는 검을 찔러 넣은 자의 뒤로 와 있었다.
도대체 언제!
등을 보인 자는 급히 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 복부에 엄청난 충격이 가
해졌다. 진기(眞氣)가 실린 주먹이 번개와 같이 복부를 때린 것이다. 몸
이 공중으로 들렸다가 내려왔다. 숨이 막힌다. 입을 통해 며칠 전에 먹
었던 것까지 모두 쏟아질 것만 같다.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운이 좋다면 내장이 비틀
렸을 게고, 잘못됐다면 내장이 완전히 망가졌을 게다.
그는 다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주먹을 봤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몸
은 이미 자신의 머리가 내리는 명령을 듣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코와 입에서 피를 토하며 그 남자는 쓰러졌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거다. 지금 상황을 보아선 즉사다.
양무유는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 그가 와야 해! 그 자가 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예상이 너무 빗나가 버렸다. 만만하게 봤던 남자는 자신의 눈으
로는 도저히 추측도 할 수 없는 고수다. 둘이 합공을 해서도 이길 수 없
던 상대다. 하물며 지금은 그 둘 중 하나가 죽어 버려서 혼자가 되어 버
렸다.
합공이 전문인 자들이다. 나머지 하나가 죽어 버렸다는 건 이미 끝났다
는 말이다.
'도망을 쳐야 해. 이대로 있다가는 죽어.'
양유무는 자신의 반쪽을 잃어버린 채로 허망하게 여운휘를 응시하는 그
를 바라봤다. 도망치기 위해선 저 자를 이용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질 것은 확실하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벌 수 있을 거다.
양유무가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뒤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
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양유무의 입가에 갑작스럽게 미소가 걸렸다.
풍운조와 여운휘의 시선도 그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토록 가까이 다가왔
는데도 불구하고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여유
가 넘친다.
사십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다. 턱 밑에 까뭇까뭇하게 자리잡고 있는 수
염이 그를 더욱 강인해 보이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분위기지? 저기 누워있는 저 녀석…… 아무래도 죽은 것 같
은데?"
"왔는가!"
"이 상황이 도대체 뭐요? 몽환선사."
"저 자들은 악양유가의 수뇌부네."
"호오? 수뇌부라고요?"
그 남자가 고개를 돌려 이곳에 온 다섯 사람을 쳐다봤다. 잠시동안 다
섯 명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 왜 웃지?"
그 남자가 웃자 여운휘가 물었다. 남자는 웃음을 멈추고 여운휘를 바라
봤다.
"젊은 애송이 하나가 어떻게 검 좀 제대로 익혔다고 자랑스럽게 서 있는
데 우습지 않나? 충분히 웃을 이유가 될 것 같은데?"
"네 놈은 누구냐."
"나? 현문철이라고 한다."
여운휘는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선가 분명 들어
본 이름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군."
"내 이름을 알았으니 네 이름도 말해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
현문철의 말에 여운휘가 대답했다.
"나는 말이야, 한 가지 철칙을 지니고 있지."
"?"
"죽을 놈에겐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아. 그러니까 넌 내 이름을 들을 이
유가 없어. 넌, 나한테 죽을 테니까."
"정말…… 웃긴 놈일세 그려."
현문철은 살짝 웃었다. 그 순간 현문철은 진각을 밟으면서 주먹을 여운
휘의 앞가슴으로 찔러 넣었다. 순식간에 그 긴 거리를 도약하며 여운휘
에게 다가온 것이다. 여운휘의 건너편에 있던 자는 황급히 옆으로 몸을
던졌고 정권이 정확하게 여운휘에게 다가갔다.
여운휘가 살짝 뒤로 물러섰다.
"어쭈?"
현문철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주먹은 여운휘의 가슴에 닿은 듯 하
다. 하지만 보이기만 그럴 뿐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의 주먹의 사
정권 바로 앞까지 여운휘는 움직였다. 주먹이 닿은 듯 하지만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공간이 있다.
파악!
주먹이 위로 방향을 틀며 이번엔 턱을 노렸다. 주먹은 머리카락을 스치
며 지나갔다.
독기(毒氣)가 인다. 지금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건지 아니면 간신히 피하
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주먹을 피하고 나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을 보아서는 전자임이 분명하다.
당장이라도 쓰러트릴 수 있는 만만한 애송일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리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웃으면서 싸움에 임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현문
철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난 현문철이 여운휘를 응시했다.
"네 놈,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눈, 반드시 뽑아 버리겠어."
여운휘의 대답을 원해서 한 말이 아니다. 그리고 대답을 원치 않다는 것
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을 함과 동시에 주먹을 내질렀다. 평권
(平拳)이 여운휘의 명치를 노렸다.
발은 팔보다 길다. 몸을 빙글 돌린 여운휘가 몸을 낮춘 채로 배를 향해
발을 내질렀다. 그 공격에 오히려 공격을 하던 현문철은 뒤로 물러나야
만 했다.
자꾸 공격이 이렇게 되니 짜증이 솟구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
어 하는 권법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일권(一拳)이 바위를 부술 정도
로 위력적인 권법이다. 뒤로 물러섬과 동시에 앞으로 몸을 날린 그가 주
먹을 내질렀다.
여운휘가 양손을 교차하면서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 위력이 만만
치 않은 탓인지 여운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회다!'
지금은 분명 절호의 기회다. 지금을 놓친다면 후회할 게 분명하다. 뒤
로 밀려나는 여운휘를 향해 현문철이 달려들었다. 거리가 조금 벌려져
있지만 지금 바로 다가붙는다면 피하기 힘들 게다.
그때, 여운휘의 소매가 펄럭였다.
피잇!
갑작스럽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현문철은 급히 몸을 최대한 웅크렸
다. 몸의 아래에서부터 얼굴을 감싼 팔까지 고통이 올라왔다.
"크윽!"
고통이 인다. 서둘러 뒤로 물러서면서 고개를 내려보니 몸에 십여 개에
달하는 짧은 비수가 박혀 있다. 단지 소매를 한 번 펄럭인 것뿐이다.
언제, 어떻게 이 많은 비수를 던진 것일까? 소매를 펄럭인다고 비수가
쏟아져 나왔을 리가 없다. 아니, 쏟아져 나왔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비수가 모두 몸에 박혔다. 그냥 소매에 장치 된 비수들을 발사한 것은
아니다.
직접 던진 게다. 그것도 그 짧은 순간에.
"뿌드득!"
현문철이 이를 갈았다. 손과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는
다. 그에겐 오직 앞에 있는 한 사내에 대한 분노만으로 가득했다.
더 이상 할 말이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는다. 말 같은 것을 싸우기 전에
구구절절 읊는 것은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이 이
렇게 되자 머리가 획 도는 느낌이다.
현문철은 자신의 몸에 박힌 비수를 빼기 위해 손을 내렸다.
"으윽!"
이상하다. 비수가 뽑히는 순간 살이 찢겨 나가고 있다. 독이 묻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예상치도 못한 일이다. 현문철은 인상을 구
기면서 단숨에 비수를 뽑아냈다. 순간 비수가 빠져나간 장딴지의 살이
찢겨졌다.
비수에 살이 찢겨서 같이 올라왔다.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비수의 모양이 단순하지가 않다. 비수의 끝 부분이 동그랗게 말려 있
다. 이런 비수라면 몸에 박힐 리가 없다. 만약에 박혔다 해도 뺄 때는
이렇게 살이 찢겨 나갈 리가 없다. 이런 비수를 몸에 박았다는 건 회전
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문철은 비수를 뽑는 것을 포기했다. 하나를 뽑았음에도 등에서 이토
록 식은땀이 흐른다. 또 상대가 이 비수를 다 뽑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는 보장도 없다.
처음엔 그저 화가 치밀 뿐이었다. 저 젊은 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
겠다는 생각만으로 머리가 가득했다. 그런데 비수를 뽑아내면서 느낀 고
통 탓인지 그는 상황을 냉정히 살피게 되었다.
눈이 고요하다. 하나의 망설임도 없어 보이는 눈이다. 그런데…… 아니
다.
고요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섬뜩함이 보인다.
더 이상 망설이면 검을 휘두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문철은
검을 뽑아들며 바로 움직였다. 지척가지 다가간 그는 재빠르게 검을 내
려쳤다. 그리고 여운휘가 그것을 막는 순간 좌로 이보 움직이며 이번엔
옆구리를 벴다.
여운휘는 검을 막지 않고 옆으로 흘렸다. 그 검에서 변화를 느낀 탓이
다.
막았다면 순식간에 검을 쏟아냈겠지만 여운휘가 그냥 물러서니 공격을
이을 수가 없다. 공격은 끊겼지만 이어지는 검은 번개와도 같았다.
카앙! 캉캉캉!
검이 부닥치는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공격을 막기만 하던 여운휘의
검이 움직였다. 현문철은 뒤로 물러나면서 여운휘의 검을 받았다. 여운
휘가 특별히 위협적인 공격을 날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문철은 점
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보법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초식을 펼치려 하면 그 직전에 차단되
고 만다. 진기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검을 휘두르며 궁지에서 벗어나
려 해도 헛손질하기 일쑤다.
타앙!
현문철의 상반신이 흔들렸다.
'진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질게 뻔해.'
자신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문철은 가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답
답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한 번 자신의 빈틈을 노리
고 날아드는 여운휘의 검을 보며 생각을 접었다.
잠시 뒤로 물러났던 여운휘의 검법이 바뀌었다.
그리고 검법이 바뀌는 순간 현문철은 아예 검을 눈에 보지도 못했다. 순
식간에 검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빠
르기다. 무엇인가가 자신의 가슴을 벴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는 무릎
을 꿇었다.
여운휘의 오행검법은 현문철이 쫓기엔 너무 빨랐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