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37)

능려운에게 안내 된 곳은 열 다섯 명이 머물기에 충분했다. 

화가 풀리지 않은 남궁혁련은 창 밖을 보면서 화를 삭이고 있었다. 그 

런 그의 옆으로 남궁리가 다가왔다. 

"오라버니 악양 구경 좀 해요." 

"……" 

남궁리에게 지금 자신과 동년배는 그녀의 오라비인 남궁혁련 밖에 없었 

다. 그랬기에 부탁한 것인데 남궁혁련은 아무 말도 없다. 마치 정신을 

다른 곳에 둔 사람 같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궁벽이 나섰다. 

"혁련아." 

남궁리의 말에는 아무 반응 없던 남궁혁련이 고개를 돌렸다. 남궁혁련 

이 고개를 돌리자 남궁벽은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이 악양구경을 하고 싶은 모양이야. 같이 가도록 해라." 

귀찮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 특별히 힘들 여정은 

아니었지만 남궁혁련은 지금 여러모로 귀찮았다. 귀찮기만 할 뿐만 아니 

라 기분도 안 좋다. 별 같지도 않은 놈에게 모욕을 당했다. 그것도 하나 

도 아닌 둘이다. 

남궁진이 인정한 자다. 그런 자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마치 남 

궁진에게 모욕을 당한 듯 하다. 

귀찮았지만 남궁혁련은 일어났다. 남궁벽과 더 이상의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원치 않는다. 

막 남궁혁련과 남궁리가 나가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능려운이 들어섰다. 

"무슨 불편하신 거라도 있으시면 말씀하시라는 가주님의 말씀이 있었습 

니다." 

"아무것도 없네. 그보다 자네 시간 있는가?" 

"예? 뭐 시간은 있는데 무슨 일이신지요?" 

"지금 이 두 녀석이 악양을 구경하고 싶어하는데 마땅한 길손이 없어서 

말이야." 

"아, 그것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능려운은 쉽게 그 제안을 받아 들였다. 

가주에게서 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힘든 일만 아니라면 들어주라는 명 

을 받았다. 악양을 구경 시켜 주는 정도는 일도 아니다. 

비록 한 사내가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능려운은 웃으면서 남궁혁련과 남 

궁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절 따라 오십시오.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남궁리는 여전히 신이 나는 표정이지만 남궁혁련은 그렇지 않다. 지금 

자신의 기분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자 중 한 명이 자기 앞에 있지 않은 

가. 따라가지 않으려 했던 남궁혁련이 순간 이는 생각에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남궁혁련은 아무 말도 없이 능려운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남궁혁련은 웃었다. 

여태까지 찌푸렸던 표정이 장난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는 환하게 웃 

었다. 

악양만큼 사람의 종류가 다양한 곳도 드물다. 문사에서 좀도둑까지, 온 

갖 계급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능려운은 둘을 데리고 악양유가의 밖으로 나갔다. 올해로 딱 스무 살이 

된 남궁리는 세상 경험이 부족한 편이다.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철은 

막내인 그녀를 끔찍이 위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대부분을 남궁세가라는 우리 안에서 지냈다. 

남궁리는 악양의 모습이 무척이나 신기해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양하다. 장사꾼과 문사들이 같이 섞여 있는 모습 

이 왠지 이상하다. 협잡꾼 같이 생긴 자가 주사위를 굴리고 있다. 그리 

고 그 앞에서 구경하는 무사들의 모습은 우습기까지 하다. 

남궁리는 주사위를 굴리는 곳으로 다가가 남자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봤 

다. 주사위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지만 그 속도는 쫓지 못할 정도는 아 

니다. 세 개의 통 속을 번갈아 움직이던 주사위가 순간 모습을 감췄다. 

무인처럼 보이는 남자의 눈은 그 세 개의 통을 번갈아 바라봤다. 

'흐음, 그다지 빠르지도 않았는데……' 

남궁리는 그 주사위가 어디로 굴러 들어가는지 봤다. 가운데 있는 통이 

다. 그 속에서 옆으로 빠지는 듯 했지만 빠지지 않았다. 

남자는 가운데 있는 통을 손으로 가리켰다. 

판을 벌이고 있던 남자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통을 들었다. 

'어, 얼래?' 

분명 있어야 할 주사위가 없다. 남궁리는 자신의 눈이 잘못 되지 않았 

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저 통 안에 주사위가 있어야 한다. 그런 

데 주사위가 나온 것은 오른쪽 통이었다. 

"가시죠." 

남궁리의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능려운이 그녀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능려운을 본 남궁리는 다시 한 번 그 세 개의 통을 봤다. 못내 아쉽다 

는 표정으로 그녀는 몸을 돌려 능려운에게 다가갔다. 

다시 걸어가던 와중 능려운이 입을 열었다. 

"놀라신 모양입니다." 

"예?" 

"남궁 소저가 보신 것과 다른 곳에서 주사위가 나온 것 말입니다." 

"아…… 그래요. 분명 제 눈으로 똑바로 봤는데 이상하게 주사위가 다 

른 곳에서 나왔어요.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 

죠?" 

"저 자는 도곤입니다. 소저가 무공을 익힐 때 저 남자는 손재주를 배웠 

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저 움직임은 아무리 소저라 해도 따라갈 

수 없을 겁니다." 

남궁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남자의 손 

이 무공을 익힌 자신의 눈보다 빠를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 

다. 

"어디를 가보고 싶으십니까?" 

"악양루요." 

남궁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다. 악양하면 사 

람들이 떠올리는 것이 악양루다. 악양루,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발길 

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악양제일의 명소다. 

동정호의 경치를 보는 데 이만한 장소는 없으리라. 

남궁혁련은 아무런 말도 없다.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걷는 모습이 

그저 유람을 온 어느 대갓집 공자(公子)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남궁혁련 

은 곁눈질로 살짝 살짝 능려운을 보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이제 곧 피눈물을 흘리게 될 테니까.' 

남궁혁련은 자신의 여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 능려 

운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결코 자신을 건드린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악양루는 일전에 몇 번 온 적이 있다. 가장 최근에 능려운이 이곳에 온 

것은 가주와 여운휘와 함께 왔던 그때였다. 

"삼층으로 가죠." 

삼층은 돈 많은 자들만 갈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악양루의 일층 

도 버겁다. 한 층 위로 올라갈수록 돈은 비싸진다. 

일층과 삼층은 대우가 다르다. 간단한 절차를 거치고 그들은 삼층으로 

올라섰다. 

능려운은 창가 근처로 다가가 앉았다.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동정호의 

경치는 장관이다. 남궁리의 시선 또한 밖으로 향했다. 겨울인 탓에 약 

간 얼음이 내려앉은 동정호는 무척이나 아름답다. 

삼층에는 아무도 없다. 식사시간도 조금 이르거니와 가격도 비싸니 평소 

에도 삼층은 사람이 드문 편이다. 

"제대로 무공을 익힌 지 반년 정도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 전에는 역시 파락호였겠지?" 

"뭐, 낭인이었지요." 

낭인이나 파락호나 거기서 거기다. 말이 달라서 뿐이지 무능력한 자라 

는 건 마찬가지다. 남궁혁련은 입가를 묘하게 비틀었다. 마치 비웃는 듯 

한 표정이다. 그렇지만 능려운은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그래 반년 정도 훈련을 해서 얼마나 대단해 지셨나?" 

"운이 좋았는지 얼마 전 혈산랑 좌청을 죽였습니다." 

"혈…… 산랑 좌청을 죽였다고?" 

남궁혁련은 놀랐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겨우 반년이다. 반년이라 

는 시간 동안 무공을 익힌 자가 혈산랑 좌청을 죽였다니 기가 찬다. 비 

록 엄청난 고수는 아니지만 혈산랑 좌청이라면 남궁혁련 또한 몇 번 들 

어본 자다. 최소한 낭인 따위에게 죽을 자는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하다. 아무리 혈산랑 좌청에 대한 소문이 과 

장 됐다 해도 이 자는 무공을 익힌 지 반년 밖에 안 된 낭인이다. 혈산 

랑 좌청 같은 자가 질 리가 없다. 그렇지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 거 

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사실일 거다. 남궁혁련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침묵 

에 잠겼다. 

능려운이 음식을 시키는 동안 그를 바라만 보던 남궁혁련은 점소이가 내 

려가자 다시 말을 걸었다. 

"그 남자, 가주의 호위무사라는 자를 알겠지?" 

"물론." 

"강하냐?" 

"……" 

능려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남궁혁련은 피식 웃었다. 남궁혁련 

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서 대답을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먼저 올라온 백화로(百花露)를 한 잔 들이킨 능려운이 뜸을 들 

이다 말했다. 

"그 남자를 적으로 둔다면 설령 그게 누구라 해도 살 수 없을 겁니다." 

"에에? 그렇게 강해요?" 

"강합니다. 그리고……" 

남궁리의 말에 대답을 하던 능려운은 끝까지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겠는가. 남궁혁련은 아무 말도 없었다. 

오히려 남궁리가 궁금하다는 듯이 능려운을 계속 바라봤다.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그 남자가 두렵습니다." 

"하하!" 

남궁혁련이 웃어 젖혔다. 

두렵다고? 설령 그 남자가 남궁진의 말대로 강하다 한들 자신의 아버지 

이자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철보다 강할 것인가. 남궁세가에 있는 수많 

은 은거 기인에 비해 그자가 강할 리가 없다. 그런 자들을 보면서 자신 

은 두려움을 느꼈는가? 아니다, 경외감은 느꼈을지 모라도 두려움은 느 

낀 적 없다. 

역시 낭인이다. 무공을 익혔다 해서 본질이 변하는 게 아니다. 

이 자는 겁쟁이다. 겁쟁이에 불과했던 거다. 그런 자를 향해 화가 났던 

자신이 우습다, 겨우 이 정도에 불과한 겁쟁이일 뿐이 아닌가. 

남궁혁련은 자신의 앞에 놓인 백화로를 단숨에 들이켰다. 

콰앙! 

남궁혁련이 술잔을 단숨에 내리쳤다. 

"겁쟁이군.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넌 겁쟁이야." 

"남궁 소협은 그 남자를 모릅니다. 만약 그 남자가 황제를 죽인다고 한 

다면…… 전 믿을 겁니다." 

"킥킥! 겁쟁이일 뿐만 아니라, 멍청이로군." 

능려운은 남궁혁련의 비웃음을 그냥 받아넘겼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 

각했다. 상황이 달랐다면 자신 또한 저랬을 게다. 

"그 남자가 강하다고 했지? 그래, 어느 정도 강하냐?" 

"모릅니다." 

"몰라? 그토록 강하다고 자신하면서 실력을 모른다니 우습군. 다 개소 

리 아니냐?" 

"남궁 소협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의 끝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실 수 있 

습니까?" 

"…… 웃기는 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는 말이다. 물론 낭인의 말이다. 그런 

자의 눈으로 본 강함이란 거 자신의 눈으로 보면 우스울 게다. 그렇지 

만…… 자신에게 그토록 대했던 자가 누군가를 이처럼 띄어준다는 게 맘 

에 들지 않는다. 

"네 놈 눈에 강해봤자 다른 사람의 눈엔 우스울 거다." 

"그럴 지도." 

능려운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만 대단하다고 생 

각하는 자가 남의 말에 귀 기울일 리가 없다. 그리고 이런 자에게 자신 

의 말을 납득시킬 이유도 없다. 

남궁혁련 또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남궁리는 계속 호기 

심이 일었다. 아까 전에 스치듯이 보긴 했지만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 

았기에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능려운의 말을 들으니 

호기심이 인다. 

어떤 남자이기에 이토록 까지 말하는 걸까? 

그 이상의 말을 기대했건만 능려운은 아무 말도 없다. 곧 시시해진 남궁 

리는 고개를 돌려 동정호의 전경을 바라봤다. 

남궁혁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아래 좀 내려갔다 오지. 음식이 나오면 먼저들 먹고 있으라고." 

남궁혁련은 계단 아래로 내려가서 일층으로 도착하자 주변을 두리번거리 

며 사람을 찾았다. 칼을 차고,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 보이는 자. 저런 

놈 하나 혼내 주는 건 쉬운 일일 줄 알았건만 혈산랑 좌청을 이겼다면 

쉽게만 생각할 순 없다. 

두리번거리던 남궁혁련의 눈에 한 상을 차지하고 있는 네 명의 무인이 

보였다. 

'찾았어.' 

남궁혁련은 씨익 웃으며 그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봐." 

"뭐 하는 새끼냐?" 

술을 들이키던 사인 중 하나가 자신의 옆에서 말을 거는 남궁혁련을 보 

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 비해 반정도 밖에 안 되 보이는 놈이 

건방지게 상을 발로 툭 치니 화가 솟구치는 게 당연하다. 

"너희들 일 좀 해야겠다." 

"이 건방진 새끼가 감히 어디서……" 

"셋째야! 앉아라!" 

이 넷 중 큰형으로 불리는 오문적의 말에 셋째라 불린 청삼은 자리에 앉 

았다. 

"저 건방진 놈의 행실 못 보셨습니까 큰형님! 저 놈을……" 

"조용해라!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남궁혁련은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가장 나이 많은 값은 하는 군 그래. 좋아 다시 말하지. 너희가 

할 일이 있다. 돈은 줄 거야.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그냥 한 놈을 조금만 패 주면 돼. 그다지 무공이 대단한 놈은 아니야." 

"그런 일을 왜 우리가 해야 하는 거요. 우리가 하는 것보다는 당신이 하 

는 게……" 

"난 그 자를 건드릴 수 없거든. 조금 있다가 내가 내려올 거야. 남자 

한 명하고 여자 한 명이랑 같이 내려올 텐데 따라와서 그 남자 놈을 좀 

건드려." 

남궁혁련이 품속에 있던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주머니를 받은 오문적 

은 살짝 그 안을 들여다봤다. 그 액수를 확인한 오문적은 놀라서 자신 

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마어마한 액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남 

궁혁련을 바라봤다. 

"보수야. 그럼 지금부터 너희와 난 전혀 모르는 사이야. 돈만 가지고 도 

망가거나 할 생각은…… 하지 않을 거라 믿지." 

다시 한 번 돈과 남궁혁련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오문적은 다시 입 

을 열었다. 

"알겠소.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넌 누구기에 나한테 말을 거는 거지?" 

"……" 

이미 일은 시작됐다. 

네 명의 남자에게 일을 맡긴 남궁혁련은 악양루의 삼층으로 다시 올라섰 

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창 밖을 바라봤다. 

슬슬 저녁이다. 겨울의 밤은 이르다. 아직 음식이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주변은 서서히 어둑해지고 있다. 

대설(大雪)을 지나 벌써 동지(冬至) 무렵이다. 그런데 아직 눈이 내리 

지 않았다. 

"이번 겨울은 눈이 오지 않네요." 

"날씨가 추운 걸 보니 곧 오긴 할 것 같은데…… 뭐, 조만간 소식이 있 

겠지요. 눈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네. 눈을 밟을 때 느낌을 좋아하거든요. 새하얀 것도 마음에 들고요. 

꼭 순백의 느낌을 주잖아요." 

능려운은 남궁리를 바라봤다. 아직 때묻지 않은 것이 마치 첫눈 같은 느 

낌이다. 

'새하얗다 라……' 

능려운은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며 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순백 

에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여인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후후, 저도 순백을 좋아합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원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한 여인을 생각하며 능려운은 다시 한 

번 백화로를 입에 가져다 댔다. 취하고 싶은데, 취하기가 힘들다. 취하 

지 않는 게 괴로운 밤이다. 

능려운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기운은 내공으로 날려버렸다. 그 

랬기에 취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기분에 취했다. 왠지 모르게 어질어질 

한 것이 꼭 술에 취한 기분이다. 

"그만 일어나죠." 

능려운의 말에 앉아 있던 남궁혁련과 남궁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시(亥時)즘 됐을 게다. 지금쯤은 슬슬 움직여야 할 때다. 

남궁혁련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일층에 있는 무인들을 훑어 봤다. 구석에 

서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전 자신이 돈 

을 건넸던 그들이다. 

'훗.' 

그 네 명은 쌍도쌍검(雙刀雙劍)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두 명은 도를 쓰고, 나머지 둘은 검을 쓴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고수 

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일류무사 정도는 되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한 남자의 말 때문에 도망치지 않았다. 아니, 도망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놀랄 정도의 돈을 쉽사리 던진 자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라면 자신들을 추적할 수도 있을 게다. 그렇게 되어 

뒷덜미가 잡힌다면…… 죽을 게 확실하다. 

남궁혁련이 던져 준 것은 돈이 아니다. 그건 돈이기도 했지만 목숨이기 

도 했다. 

자신들을 힐끗 바라본 그 젊은 남자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문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그의 말에 나머지 셋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났다. 

내려오는 도중에 눈여겨봤다. 그 남자가 두들겨 패라고 지명한 자는 마 

치 술에 취한 듯 비틀거렸다. 무인이 아니거나, 무인이라 해도 별 볼일 

없는 자일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오문적은 발걸음이 내키지 않았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 

자 정도 두들겨 패 주는 건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이 일을 시킨 그 남자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켰으 

니 두들겨 패야 한다. 그리고 그때 저 남자는 그 옆에 있을 거다. 

나설지도 모른다. 지금 비틀거리는 남자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라면 구해 

주는 것처럼 자신들을 때려눕힐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게 다라면 이토 

록 걱정은 되지 않을 거다. 문제는 시켰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자신들 

을 살인멸구 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만약 자신들이 손봐줘야 할 자가 그 남자에게 

중요한 자라면…… 

'우린 죽어.' 

차라리 도망 갈 걸하며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해야만 

한다. 

사 인은 악양루의 밖을 나가는 능려운의 뒤로 따라붙었다. 

남궁혁련은 뒤에 그들이 따라 붙은 것을 알면서도 태연히 걸었다. 샛길 

로 들어서는 순간 쌍도쌍검이 앞의 길과 뒤를 막았다. 남궁혁련은 검을 

뽑으려는 남궁리의 손을 잡았다. 

"여, 형씨 돈 좀 많아 보이는 군." 

둘째인 용유관이 계획된 말을 내뱉으며 능려운에게 다가갔다. 남궁리는 

뒤에 있는 자들과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남궁혁련을 번갈아 바라봤다. 

"오라버니 왜……" 

"우리가 지금 검을 휘두르면 안 된다. 알지 않느냐, 지금 우리가 이곳에 

서 일을 일으키면 어떻게 될지." 

말은 남궁리에게 했지만 능려운이 들으라고 한 소리다. 

바보가 아닌 이상 남궁세가의 무공을 쓸 수는 없다. 남궁세가의 무공을 

쓴 흔적이 남게 된다. 그리고 소란이 커진다면 자연 자신들의 정체도 드 

러나게 될 거다. 그렇게 되면 운문세가에서 알게 되는 건 금방 이다. 더 

군다나 남궁혁련과 남궁리는 남궁세가 가주 남궁철의 아들딸이다. 운문 

세가가 결코 쉽게 넘기지 않을 거다. 

"두 분은 옆으로 피해 계시도록 하십시오. 내가 상대할 테니." 

능려운은 남궁혁련의 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남궁혁련의 입가에 맺 

힌 미소를 보지 못한 능려운은 쌍도쌍검을 향해 손을 뻗을 준비를 했다. 

자신을 둘러 싼 그들을 경계하던 중 쌍도쌍검의 막내인 태태우가 움직였 

다. 

능려운은 공격을 피해내려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저 길거리에서 푼돈이 

나 뺏는 건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틀린 모양이다. 

'이 놈은…… 제대로 무공을 익혔어.' 

그 순간 다른 방향을 차지하고 있던 삼 인도 능려운에게 달려들었다. 처 

음 자신에게 달려든 자도 상대하기 버거운 자다. 그런데 그만한 실력자 

들이 넷으로 늘어나니 감당할 재주가 없다. 

더군다나 능려운은 술에 취한 것처럼 멍한 상태였다. 

'피해야 돼!' 

다른 건 모르지만 오른쪽에서 다가오는 남자의 일장은 반드시 피해야 한 

다. 방금 전 간신히 피했는데 그 손에 맞은 벽에 금이 갔다. 그대로 맞 

는다면 갈비뼈 한두 개는 우습게 부서질 거다. 

오문적의 무공인 철혈장(鐵血掌)이다. 

능려운은 반대쪽에서 움직이는 청삼을 향해 몸을 던졌다. 능려운의 발 

이 청삼의 복부를 노렸다. 완벽한 기회였기에 성공할 거라 생각했다. 그 

때 옆구리 쪽에서 싸한 고통이 일었다. 

"크윽!" 

어느새 옆쪽으로 다가온 용유관의 발이 능려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능 

려운은 입술을 깨물며 몸을 비틀었다. 그의 발이 한 바퀴 돌면서 용유관 

의 머리를 찼다. 

균형이 무너진 상태였던 탓인지 그 공격은 용유관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공격이 끝나자마자 태태우의 손에 능려운은 그대로 

얻어맞고야 말았다. 

순식간에 몇 십 개로 바뀐 그의 손이 능려운의 몸을 두드렸다. 손을 교 

차시켜 중요한 부분만을 막은 능려운은 태태우의 공격이 멈추자 바로 주 

먹을 휘둘렀다. 

기다렸다는 듯이 태태우는 그 공격을 피했다. 아니, 피했다고 생각했다. 

쾅! 

어깨에 맞았는데 태태우는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고야 말았다. 자신이 주 

저앉았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처럼 그는 멍 하니 능려운을 올려다봤다. 

"막내!" 

용유관의 목소리 탓에 정신을 차린 그는 급히 양손으로 얼굴을 막았다. 

막았지만 내력이 실린 탓인지 그는 몇 바퀴 구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 

났다. 

어깨에서 뭔지 모를 시큰함이 느껴진다. 태태우는 자신의 어깨로 손을 

가져다 댔다. 따끔한 기분과 함께 손가락에 액체가 만져졌다. 

피가 터져 나왔다. 스치듯이 맞은 주먹에 피가 터져 나온 거다. 

오문적은 상대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인지 모르게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고는 있지만 분명 무공을 익힌 자다. 그리고 오문적이 

보기에 그 자는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일대일이었다면…… 졌다.' 

왠지 모르지만 상대는 지금 취기가 올라 있다. 내공으로 충분히 몰아낼 

수 있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취해 있다. 

"어서들 돌아가십시오!" 

능려운은 싸우다가 외쳤다. 자신은 조금 두들겨 맞으면 그만이다. 그렇 

지만 저들이 있다면 일이 달라진다. 어서 도망가라는 말에 남궁리는 어 

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기 시작했다. 

지금 저 상태라면 분명히 크게 다칠 것 같다. 

망설이고 있는 남궁리를 향해 남궁혁련이 입을 열었다. 

"가자." 

"하지만 오라버니……" 

"우리가 있다면 일만 커져. 가서 알리는 게 나을 것 같다." 

남궁혁련은 남궁리의 손을 잡고 악양유가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순 

간 세 명에 둘러 쌓여 고전을 면치 못하던 능려운의 가슴에 오문적의 철 

혈장이 박혔다. 

입술을 꽉 깨물고 버틴 능려운이 다시 한 번 외쳤다. 

"어서!" 

능려운은 고개를 돌려 외치다가 남궁혁련의 얼굴을 봤다. 옆에 있는 남 

궁리의 걱정스러운 얼굴과 남궁혁련의 표정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즐겁 

다는 듯한 남궁혁련의 눈꼬리를 보며 능려운은 퍼뜩 한 가지 생각을 떠 

올렸다. 

'이 놈, 설마……' 

방심을 하는 사이 철혈장이 다시 한 번 능려운의 복부를 때렸다. 

그 순간 능려운은 보았다. 남궁혁련의 입가에 맺히는 미소를. 

'쳐죽일 놈!' 

능려운은 이를 꽉 깨물고 앞에 있던 오문적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남궁혁련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남궁리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 

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적어도 보름 이상은 움 

직이기도 힘들 거다. 

'킥킥, 그러기에 천한 놈이 기어오르긴 어디를 기어올라. 그럼 다음 

은…… 그 놈인가?' 

남궁혁련은 여운휘를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웃었다. 

'그 놈은……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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