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37)

                        수련(修鍊) 

무인은 칼이다. 

오랜 시간 갈고 다듬을수록 빛을 발하는 것이 무인과 칼의 공통점이다. 

칼의 종류도 다양하다. 

환도(環刀), 군도(軍刀), 월도(月刀), 예검(銳劍), 쌍검(雙劍), 왜검(倭 

劍)…… 

칼의 종류가 다양하듯이 무인도 마찬가지다. 절정고수가 있다. 그리고 

그에 반해 삼류무사도 있다. 날카롭게 갈려진 보검이 있는 반면 녹이 슬 

어버린 청강검도 있다. 

녹슬어 버린 청강검이 백이 있다 해도 잘 다듬어진 보검 하나 이기지 못 

한다. 

그리고 지금 막 무림에는 하나의 보검이 탄생하고 있었다. 

공중으로 솟구친 신형의 몸에서 셀 수 없을 검광이 터져 나왔다. 그 아 

래에서 살기 위해 바둥거리던 자들은 순식간에 목이 잘리고, 몸이 터져 

나갔다. 두개골이 박살났고, 머리에서 뇌수가 흘러나온다. 

보나마나 즉사다. 사람의 피 냄새를 비롯한 여러 가지 냄새가 섞여 주변 

에 퍼졌다. 역하다. 구역질이 당장이라도 치밀어 오를 냄새다. 

그런데 웃었다. 땅에 내려선 여인은 사람의 몸에서 터져 나온 피를 덮어 

쓰고도 웃었다. 

"호호!" 

눈 깜짝하지 않고 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 놓고도 여인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웃기만 한다. 억지 웃음이 아니다. 눈까지 웃고 있다. 이 

토록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그녀는 죽어 있는 사람 

들을 내려다 봤다. 

땅에는 죽은 자들이 쏟아 낸 내장들로 가득했다. 정상적인 여자라면 당 

장이라도 혼절을 할 광경이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 속에서 그녀는 웃고 있다. 더군다나 이 광경을 만든 것 또한 그녀의 

솜씨다. 

하얀 피부와 붉은 피. 

너무나 대조적이다. 붉은 피로 몸을 덮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녀의 하얀 

피부가 감추어 진 것은 아니다. 피로 물들어 버린 미인, 그 어떤 남자 

가 봐도 넘어갈 정도로 매혹적이다. 

그녀는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신이 죽인 자들의 몸에서 빠져 나온 내 

장들을 짓밟으며 그녀는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물컹거리는 내장의 느낌이 기분 나쁘지도 않은 지 그녀의 얼굴에서는 미 

소가 걷히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항시 

자신을 내려다보던 남자. 그를 부러워했다. 그의 강함을 두려워했다. 하 

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젠 내가 널 내려다 볼 차례야. 여운휘, 넌 나한테 죽어. 호호!"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는 여인, 그녀의 정체는 사무린이었다. 

사무린은 혈루검법을 얻었다. 검귀와 유일하게 비등한 경지에 올랐던 무 

인인 구취향의 마지막 심득이 담긴 검법. 여인만 익힐 수 있던 건 사무 

린에겐 큰 행운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부교주가 혈루검법을 넘겼을 리 

가 없다. 

그녀는 혈루검법을 받자마자 사곡으로 향했다. 훈련할 장소는 많다. 하 

지만 사곡만큼 좋은 장소도 없다. 자신의 젊음을 보냈던 장소에 도착하 

니 마음이 새롭다. 

사곡은 그녀의 인생을 바꾼 장소다.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고, 지금의 사 

무린을 있게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녀는 그를 만났다. 

사무린은 겁이 없는 여인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거적때기를 들고 몸 

을 팔았다. 항시 그 광경을 보아왔고, 무식한 자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 

은 적도 많다. 세상을 보는 눈이 변했다. 

이미 사무린은 사곡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아이의 순수함을 잃었다. 

그런 그녀가 단 한 남자를 향해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처음 어른들에게 

두들겨 맞을 때 느꼈던 공포, 그 이후 다시 그런 감정을 느낄 일은 없 

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남자, 그 남자는 달랐다. 

힘으로 주는 공포가 아니다.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기만 해도 몸이 

섬뜩했다. 마치 오장육부(五臟六腑)를 다 파헤치는 듯한 그의 눈빛은 겁 

이 없는 사무린에게도 일말의 두려움을 갖게 했다. 

사무린은 검을 휘둘렀다. 무작정 아무 초식도 없이 그저 검을 휘두른 것 

이다. 

"널 죽이고 말 거야. 널 죽이지 않으면……" 

항시 쫓기는 기분이다. 여운휘와 만약 다시 만나게 돼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 탓이다. 다시 만나서 싸운다면…… 열에 구 이상 

은 죽는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 

다. 사무린은 강하고 싶었다.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자신을 얕볼 수 없 

게 하고 싶다. 

사곡으로 온 이유는 그 때문이기도 했다. 조용히 수행하기에 이 정도로 

적절한 장소도 없지만, 모든 것을 시작한 곳이다. 여기서 다시 시작할 

거다. 

"필요하신 거라도……" 

"지금은 없어요. 끼니때마다 밥만 넣어주고 제가 부르기 전까진 접근하 

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남자는 사무린에게서 멀어졌다. 사무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 

다. 예전엔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돌아왔다. 

예전과 지금의 상황은 크게 변했다.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했던 그 

때, 지금은 아니다. 얼마든지 나가고 싶으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자신 

에게 막 대했던 교관들도 없다. 오히려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자들이 있 

다. 

우습다, 인생이라는 거. 

힘을 얻으니 세상이 변했다. 옛날엔 그토록 힘들 던 것이 지금은 너무 

나 우습다. 힘이다, 힘이 있으니까 그게 가능한 거다. 사무린은 보다 

큰 힘을 얻기 위해 움직였다. 

사곡엔 많은 장소가 있다. 얼마동안 밖에서 지냈지만 사무린은 사곡의 

곳곳이 눈에 익었다. 십 오년 이상을 살아 온 곳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 

서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다. 

사무린은 나무 아래에서 혈루검법이 담긴 책을 펼쳤다. 

처음 얼마간은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벽에 부닥쳤다. 

혈루검법은 이론만으론 부족했다. 아무리 보고 휘둘러 봐도 감이 오지 

않는다. 실전이 필요했다. 

그녀는 사곡에 들어 온 이후 처음으로 사곡을 관리하던 자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사람이 필요해요." 

"사람이요?" 

"예. 아무래도 실전 비무를 해봐야 할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가서 어느 정도 되는 놈들을 데리고……" 

사무린이 손을 들었다. 사곡을 관리하는 혁철산은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사무린이 원하는 것은 자신과 비무를 할 상대가 아니다. 

"전 죽일 수 있는 자를 원해요." 

"주, 죽일 수 있는 상대를 구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마교에 있는 지하 뇌옥에 간다면 그 정도의 사람들은 많을텐데 

요?" 

"하지만 그건 좀……" 

"당신, 잊은 건 아니겠죠? 제 말은 곧 교주님의 말이에요. 뒷일은 제가 

책임져요. 당신은 제가 시키는 것만 따라요. 알겠어요?" 

혁철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 대로다. 교주는 이 여인이 원하 

는 것을 모든 지 들어 주라고 했다. 하극상은 곧 죽음이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라진 혁철산은 그 다음 날 이십 여 명에 달하는 자들을 끌고 왔다. 모 

두가 혈도를 제압 당한 탓에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눈빛 

은 살아 있다. 일부는 앞에 있는 사무린을 찢어 죽이기라도 할 듯이 살 

심으로 가득 찬 눈을 번뜩였다. 

"히히, 예쁜데?" 

뇌옥에서 끌려온 자 중 하나가 사무린을 보며 말했다. 사무린은 그 말 

을 듣고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의 몸이 반으로 양분됐다. 

"이 자들을 방 하나하나에 가둬요." 

예전 심법을 수련했던 장소가 있다. 아이들을 가두었던 돌로 된 방에 사 

무린은 이들을 하나씩 넣기를 청했다. 혁철산은 사무린의 명대로 그들 

을 한 곳에 한 명씩 가두었다. 

"말했지만 이들은 모두 죽을 거예요." 

"혼자서 다 감당이 되시겠습니까?"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만 가 봐요." 

혁철산은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사무린의 말대로 원래 자신이 지내는 거 

처로 돌아갔다. 사무린은 잠시 앉아서 명상을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 

다. 

사무린이 문 하나를 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린 후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안에 있던 자는 죽었 

다. 사무린은 그 후로도 문을 열었고, 그때마다 그 방에 있던 자는 죽어 

버렸다. 

점점 검에 묻히는 피가 늘어나면서 사무린은 강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사곡에 들어간 지 채 반년이 되지 않아 열 개의 방에 갇혀 있던 모든 자 

들이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베어 넘겼다. 

뇌옥에서 삼십 삼 인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한 여인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그들은 쓰러졌다. 마침내 어느 정도 수준 

에 도달했다고 이르자 사무린은 걷기 시작했다. 

엄백린을 찾아가는 거다. 

사곡을 나왔을 때 그녀는 달라져 있었다. 색기는 한층 더해졌고, 검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실력은 전과 비교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발전했 

다. 

그녀는…… 보검이 되어 버렸다. 

"몸은 어떠냐." 

"좋아요." 

"성과는?" 

"역시 구취향의 검법이더군요. 열심히 한 덕분에…… 오성까지 성취를 

봤어요." 

거짓말이다. 

사무린은 엄백린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벌써 오성까지 성취를 봤다는 말에 엄백린의 눈에서 이채(異彩)가 일었 

다. 

"지하 뇌옥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간 것으로 아는데…… 그 자들은 어떻 

게 됐지." 

"다 죽었어요." 

엄백린은 지하 뇌옥에서 데려간 자들을 모두 죽였다고 하는데도 불구하 

고 일언반구 없었다. 지하 뇌옥에 있는 자 모두가 죽는다 해도 엄백린 

은 눈 하나 깜짝 안 할 거다. 열이 죽던, 백이 죽던 엄백린에게 그들은 

쓸모 없는 짐승들일 뿐이다. 

그들은 짐승이다. 

인간? 인간이란 이용해 먹을 수 있어야 인간이다. 이용가치가 없어졌거 

나, 능력이 부족한 자들…… 살아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죽어야 한다. 

"보여줄 수 있겠지?" 

"물론이죠. 하지만…… 상대가 없이는 펼칠 수가 없어요." 

엄백린은 옆에 있던 자신의 수하를 바라봤다. 그가 나오려 했다. 그런 

데 사무린이 나오려는 그를 막았다. 

"이 자 죽여도 되나요?" 

"무슨 소리냐." 

"제가 혈루검법을 펼치면 상대는 죽어요. 이 자 죽여도 되나요?" 

사무린이 똑같이 다시 물었다. 엄백린의 얼굴에 맺힌 표정이 전혀 변화 

가 없다. 

"네 말, 책임 질 수 있나?" 

"예. 저 자는 예전에도 저보다 아래였어요. 지금이라면 공격을 받지도 

못할 거예요." 

"어떠냐?" 

엄백린의 눈이 향한 곳은 사무린이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말한 남 

자가 있는 곳이었다. 그 남자는 태연한 척 하고는 있었지만 눈빛은 결 

코 곱지 않았다. 

"해 보겠습니다."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겠느냐?" 

"물론입니다." 

무인의 자존심이다. 비록 자신의 실력이 사무린보다 부족하다는 것은 알 

지만 물러설 순 없다. 적면이라 불리는 그는 검을 들고 사무린의 건너편 

에 섰다. 

'감히 날…… 나 또한 너에 못지 않은 진흙탕을 걸었다. 너만 강한 척 

하지 말란 말이다!' 

검이 수직으로 날았다. 검이 채찍처럼 움직이며 사무린의 얼굴을 노리 

며 다가갔다. 사무린의 몸이 움직였다. 적면의 검이 애꿎은 허공을 가르 

며 잔상을 벴다. 

순간 베었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느낌이 오지 않는다. 손에 아무런 느낌 

이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느낀 순간 등이 오싹 

했다. 

'자, 잔상! 그렇다면……' 

퍼억! 

앞가슴이 벌어지며 몸 안에 있던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적면은 그대로 쓰러져서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음……!" 

엄백린은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엄청난 속도다. 예전의 사무린과 달라 

도 너무 다르다. 시간을 계산해 보자면 비약적인 발전이다. 과연 구취향 

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그것이…… 혈루검법 오성에 이른 네 실력이냐?" 

"예." 

사무린은 또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아직 혈루검법의 오성에 들어서지 

못했다. 아무리 자질이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그건 불가능하다. 가까스 

로 그녀는 이성의 성취를 얻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실력을 숨기는 거다. 사무린은 이미 교주인 엄백린을 자신의 적으로 생 

각하고 있다. 밑에 있는 것은 사무린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 

거의 반 이상의 실력을 그녀는 숨기고 있다. 그리고 또한 지금도 모든 

실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다. 무림에 나가면 십 중에서 삼은 숨겨야 한 

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사무린은 오 이상을 감췄다. 그만큼 그녀를 상대해야 할 적수 

는 더 위험해 지는 거다. 

사무린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엄백린의 눈빛을 마주 봤다. 엄백린의 눈빛 

을 조용히 응시하던 사무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아차리지 못했어. 지금 못 알아차렸으니…… 넌 죽을 거야.' 

엄백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정도면 굳이 다른 자를 시킬 필요 없 

다. 이번에 해야 할 일에는 오히려 사무린이 적격이다. 그렇지만 실력 

이 부족했기에 엄백린은 그녀에게 그 일을 맡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엄백린의 착각이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보다 적합 

한 자는 없다. 

"사무린, 명령을 내리겠다. 지금부터 너는 살수가 되야 한다. 내가 지정 

하는 놈들을 깨끗이 죽여. 아무런 흔적도 남겨선 안 돼. 다른 자들을 대 

동(帶同)하는 것도 물론 안 돼. 오로지 네가, 너 혼자의 힘으로 해야 

한다." 

마교는 정리 됐다. 한동안 소란이 일던 마교는 지금 완벽히 조용하다. 

그렇지만 속까지 완벽히 그런 건 아니다. 몇몇은 아직도 부교주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교주를 따랐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과 비슷한 

위치에 있던 부교주 엄백린에게 그들은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았던 거 

다. 

교주의 위엄의 문제다. 저런 자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대놓고 

죽일 수는 없다. 그래서 엄백린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사무린이 온 지금 그는 그녀에게 그 일을 맡기기로 했다. 

사무린만큼 완벽하게 이 일에 맞는 자는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사무린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거다. 잡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설령 자신의 수하라는 것이 들킨다 해도 사무린은 출신이 불분 

명한 자다. 모른다고 발뺌을 빼면 그만이다. 이런 속셈으로 다가왔었나 

하면서 탄식을 내뱉으면 끝날 일이다. 

진린 같이 자신의 오른팔이 잡히면 그때는 문제가 된다. 완벽히 상대를 

죽일 수 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자…… 

엄백린이 종이에 몇 명의 이름을 적더니 사무린에게 던졌다. 

종이는 마치 밑에서 무엇인가가 받치고라도 있는 것처럼 천천히 사무린 

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사무린은 뜬 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종이를 낚 

아챘다. 

"죽이고 돌아와라. 잡히면…… 그때부터 너와 나의 인연은 끝이다. 잡히 

면 죽어, 살려고 바동거리지 말고 차라리 자결해라. 알겠느냐?" 

"걱정하지 마세요. 이 정도 일…… 실패 할 리가 없으니까요." 

인사를 꾸벅한 직후 사무린의 몸이 사라졌다. 

엄백린은 조용히 사무린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도대체 어디 있는 게냐." 

아직까지 유설린에 대한 아무 소식이 없다. 엄백린은 의자에 주저앉았 

다. 일이 이렇게 틀어진 것은 다 그놈 때문이다. 그 놈만 없었다면 소교 

주의 탈출은 불가능했다. 

그때, 비무를 했던 그때 죽였어야 한다. 

"네 놈은 결코 곱게 죽이지 않을 거다. 여운휘……!" 

어두운 넓은 대청 안에서 엄백린의 두 눈이 빛났다. 

사무린이 걸었다. 굳이 숨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그녀는 태연히 주 

변을 둘러보면서 걷고 있었다. 살짝 미소지은 얼굴이 무슨 재미있는 것 

을 본 아이와도 같이 순수하다. 

그렇지만 그런 외면과는 달리 내면은 복잡한 상태다. 죽여야 할 자가 생 

겼다. 그것도 결코 얕볼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분명 이길 수는 있다. 

만약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교주는 사무린 

을 이곳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다. 완벽히 승리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 

기에 교주는 그녀에게 임무를 맡겼다. 

'흔적도 없이, 아무에게 들키지 않고 죽여야 해.' 

자신이 있는 부분이다. 사곡에서 몇 년간이나 해 온 훈련이다. 기척을 

죽이는 일 따위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 죽이는 건 문제가 아니 

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그 죽이는 것까지 가는 과정이다. 

'완벽한 작전이 필요해. 이건 분명 시간이 많은 일이 아니야.' 

적어도 하루 밤에 한 명씩은 죽여야 한다. 아니, 그것도 너무 길다. 죽 

여야 할 자는 다섯이다. 그런데 하루에 한 명씩 죽이다 보면 오일이나 

걸린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교주가 손을 쓴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지만 하룻밤에 두 명 이상은 무리다. 우선 그들이 사는 곳이 떨어 

져 있는 것도 문제고, 그들이 만만한 자들도 아니다. 하룻밤에 모두 죽 

일 수는 없다. 

하룻밤에 모두를 죽일 수는 없지만 일을 해결할 방법은 있다. 

세상에서 그들의 존재 자체를 지우면 된다. 

시체도 찾을 수 없게 완벽한 처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라진 것이 의문 

사가 아닌 무슨 이유가 있다면 된다. 의심을 하게 될 때쯤, 그들은 모 

두 죽을 거다. 그거면 충분하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죽게 되면 그 

걸로 모두 끝인 거다. 

사무린이 사람을 죽이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당당하게 걷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증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무린은 증인 

을 만들어야 했다. 

'저기 있군.' 

남자답게 떡 벌어진 어깨로 술병을 들이키고 있는 남자, 산적에 가까운 

외모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자다. 

귀랑도(鬼浪刀) 탁천.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자. 그렇지만 그보다…… 

'자신의 무기에 피를 묻히지 않는 자.' 

물론 그건 다소 과장이 있다. 사람을 베었는데 어떻게 피가 묻지 않을 

까. 그렇지만 그의 도는 기이하다. 도뿐만이 아니라 탁천의 도법 또한 

기이하다. 

묻어버린 피가 흘러내리는 도신, 분명 좋은 도다. 그리고 탁천의 도법 

은 쾌를 위주로 한다. 일전에 어떤 자는 자신의 배 아래쪽과 위쪽이 잘 

린지도 모르고 걸으려 했다는 소문이 들 정도로 쾌도를 구사한다. 

탁천의 베기는 가히 일품이다. 

'강한 자, 그렇지만…… 죽을 자.' 

탁천은 강한 자다. 그렇지만 그는 사무린에게 큰 약점을 보이고만 말았 

다. 탁천은 여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사무린은…… 대단한 미녀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죽게 해 주지. 그럼 죽어서도 어느 정도는 행복할 

테니까.' 

사무린은 살살 웃으며 천천히 탁천을 향해 다가갔다. 

탁천은 자신의 수하들과 술을 마시다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탓이다. 그리고 그곳을 바라본 탁천은 순간 탄성 

을 내지를 뻔했다. 

미녀다, 그것도 대단한 미녀. 

'저, 저 같은 미녀라니……' 

사람의 마음은 순식간에 진탕으로 만들어 버리는 외모다. 

탁천은 자신의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수많은 여인을 취했던 자다. 그 

렇지만…… 이토록 마음이 뛴 적은 없다. 

눈을 돌려야 한다. 주변에 있는 다른 자들이 눈치를 채기 전에 고개를 

서둘러 돌려야 한다. 그런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도저히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잡히는 순간 탁천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옆을 지나가는 여인의 어깨를 잡았다. 

깜짝 놀란 얼굴로 여인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봤다. 

놀라는 모습 마저 앙증맞다. 탁천은 확 껴안아 버리고 싶은 마음은 간신 

히 억누르며 말문을 텄다. 

"수상한 자는 아니오. 그리 놀라실 필요는 없소." 

"저, 저기 이 어깨에 올리신 손 좀…… 아, 아파요." 

"아!" 

탁천은 급히 손을 땠다. 자신도 모르게 덥석 잡는 바람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다. 여인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어깨를 문질렀다. 

"이거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모양이오. 그 점 사과 드리외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무슨 일이시죠?" 

"내 술을 마시고 있는데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막 피어나더구려. 그런 

데 꽃이 피어난 장소가 너무 척박해서 말이오, 너무 안타까워 내 그 꽃 

에게 말을 걸었소." 

"꽃에게 말을 거셨다고요? 꽃이 말을 하던가요?" 

"지금 내 앞에서 말하고 있지 않소." 

"호호! 참 재미있게 말을 하시네요." 

탁천은 여인이 웃는 것을 보고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자신이 수상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인 거다. 가장 중요한 일이 끝났다. 그 후 

부터는 일사천리다. 

"탁천이라 하오." 

"혹시……" 

뭔가 안 것이 있는 듯한 여인의 표정을 보며 탁천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 

음 말을 내뱉었다. 

"무림의 친구들은 나를 귀랑도라고 부르더구려." 

"제 생각이 맞았네요. 유명하셔서 존함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탁천은 기분이 좋았다. 관심이 가는 여인이 자신을 안다고 한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여인의 눈은 놀람과 경외로 가득 찼다. 

"시간 있으면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는 게 어떠시오?" 

"저도 그러고 싶긴 하지만……" 

여인이 우물쭈물하자 탁천은 속이 끌어 올랐다. 좋다는 말인가 싫다는 

말인가! 

"아버님이 아프셔서 지금 바로 집에 가 봐야 해요. 차는…… 힘들 것 같 

네요." 

"그럼 소저를 집까지 모셔다 드리도록 하려는데 상관없겠소? 아무래도 

이런 밤에 소저 같은 미인이 홀로 다닌다면 위험하지 않겠소." 

"하지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 걱정하실 필요 없소." 

탁천은 여인의 옆에 서서 어서 걸으라는 듯이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잠 

시 머뭇거리던 여인이 탁천과 함께 있던 수하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탁천과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던 그들은 곧 말문을 열었 

다. 

"하하, 대장님은 좋겠어." 

"저런 미녀를 안을 수 있다니 부럽군." 

"주둥이들 닫고 술이나 마셔. 여자가 궁하면 기녀들이나 찾아가서 궁둥 

이나 주무르던지." 

"궁둥이 만질 돈은 네가 줄 거냐?" 

여인과 멀어지는 탁천을 보며 그들은 웃었다. 이런 일은 아주 흔한 일이 

었다. 이렇게 술을 마시다가 맘에 들어가는 여인을 보면 대장은 항시 저 

랬다. 그랬기에 이 광경을 보며 그들은 아무런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익숙한 것, 그것이 가장 두려운 거다. 

태연히 무리 속에 숨겨져 있는 살수는 찾기가 힘들다. 오히려 숨어 있 

는 살수를 찾는 게 더 쉬울 게다. 그들은 놓쳐 버렸다. 자연스러움 탓 

에 쉽게 알 수 있었던 몇 가지 의문들을. 

"하하! 마시라고!" 

그들은 한 점의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가질 리가 없었다. 

너무나 익숙했기에 그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역시 같이 와 주기를 잘했구려." 

탁천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무척이나 험한 길이다. 무공도 모르는 

여인이 이런 길을 왔다 갔다 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다. 길만 험한 

게 아니다. 사방이 나무 탓에 어둡다. 그리고 사람 또한 없다. 

탁천은 사무린을 바라보며 숨죽여 웃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쉽게 올 리가 없다. 

앞장서서 걷던 탁천이 몸을 돌렸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걷던 

사무린은 탁천이 갑작스럽게 멈추자 따라서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탁천은 사무린의 몸을 안았다. 더 이상 참고 있을 정도로 탁천은 인내 

심 있는 자가 아니다. 탁천의 손안으로 사무린의 허리가 알맞게 들어왔 

다. 

"조금만 참으면……" 

참으라 말하려 했다. 금방 끝난다고, 여인으로서의 즐거움을 주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탁천의 몸은 마음과 달리 사무린과 떨어지게 만들 

었다. 

아무리 여인을 좋아한다 해도 무인이다. 직감적으로 그는 위험을 느꼈 

다. 그리고 그건 사무린이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네, 네 년은 누구냐." 

"귀령도 탁천, 감히 내 몸을 건드렸으니 죽어야 해." 

"누구냐 묻지 않았느냐!" 

"죽을 놈이 알 필요 없어." 

방금 자신을 품안에 안았을 때 벨 수 있었다. 죽이려 했다면 완벽하게 

죽일 기회도 오는 내내 몇 차례 있었다. 그렇지만 사무린은 살수를 펼치 

지 않았다.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탓이다. 사무린은 자신의 실력을 보고 싶었다. 

예전이라도 이길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단순히 이기기 위한 싸 

움을 하는 게 아니다. 

사무린은 검을 뽑았다. 

"애초부터 목적이 있었군. 네가 누군 지는 모르겠지만…… 후회할거다." 

"웃기지 마. 넌 여기서 죽어. 내가 네가 안겼을 때 죽이지 않은 이유를 

알겠어? 넌 죽이려 하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거든." 

"계집!" 

귀령도가 울었다. 매서운 속도로 움직이는 귀령도를 보면서 사무린은 웃 

었다. 검이 보인다. 보여도 너무나 확연하게 보인다. 쾌검으로 유명한 

그의 검이 너무나 우습게 보인다. 

'이게 쾌검이라고?' 

웃기지도 않은 소리다. 이게 쾌검이라면 자신의 검은 무엇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에겐 쾌검일거다. 그렇지만 사무린의 눈에는 그 움직임이 굼벵 

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검이 보인다는 건 죽는다는 걸 의미한다. 

사무린은 귀령도를 피해냈다. 흔적 없이 죽여야 한다. 주변에 피 냄새 

가 베지 않게 빠르게 끝내야 한다. 

탁천은 놀랐다. 가냘프게 생긴 여인이었다. 그리고 나이 또한 자신 보 

다 한참 아래로 보였다. 그랬기에 여인이 한 말을 모두 무시했다. 죽일 

수 있는데 죽이지 않았다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탁천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여인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 

을. 

'너무 쉽게 피했다. 내 도를 읽지 않았다면…… 불가능해.' 

탁천은 뒤로 물러나면서 강하게 도를 휘둘렀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무 

린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도를 피하면서도 사무린의 검은 빈틈을 노리 

고 기어 들어왔다. 

가까스로 몸을 비튼 탁천의 도가 사무린의 검을 쳐냈다. 

'좋아! 당장……' 

튕겨 나간 검이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탁천의 

몸이 팽이처럼 돌면서 사무린의 가슴을 베어왔다. 

'베어야 해! 그렇지 못하면 내가 죽어.' 

직감적으로 느꼈다. 벤다면 이기지만 이 절호(絶好)의 기회를 놓친다면 

죽는 건 자신이 될 거다. 

온 몸에 있는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여태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 빠 

른 속도다. 목숨이 걸린 문제니 당연하다. 온 몸에 있는 근육들이 비명 

을 토하며, 도는 바람과도 같이 사무린을 향해 다가갔다. 

부웅! 

'어?' 

도가 분명 목덜미 바로 옆까지 다가갔다. 그랬기에 성공이라고 생각했 

다. 그런데 이 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손에 아무런 것도 느껴지지 않 

는다. 도는 아무것도 베지 못했다. 

푸욱! 

도에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은 순간 이미 예상했다. 탁천은 고개를 내 

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뱃가죽을 찢고 안으로 들어간 검이 하 

얀 이를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콩알만한 구멍이 가슴에 만들어지며 그 틈으로 피가 흘 

러나오기 시작했다. 사무린은 검으로 배를 관통하는 순간 손가락으로 지 

력을 날렸고, 그것이 탁천의 가슴에 구멍을 만들어 낸 것이다. 

탁천은 쓰러졌다. 심장에 구멍이 뚫리고도 살 수는 없다. 

땅에 드러누운 탁천에게 사무린은 화골산(化骨散)을 뿌렸다. 

화골산은 뼈조차 남기지 않는다. 탁천은 화골산에 의해 천천히 사라져 

버렸다. 마교 내에서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탁천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 

은 한 여자에게 당했다. 

사무린은 조심히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완벽해. 화골산, 처음 써 보는 거지만 정말 대단하군.' 

사무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옷을 정결케 하고 걷기 시작했다. 

한 명을 죽였다. 그렇지만 여유가 있다. 이 자의 죽음은 근 시일 내에 

는 마교에 퍼지지 않을 거다. 

이 남자가 자신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았으니까. 평소 탁천의 행실대 

로라면 며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해도 여자와 무슨 일을 벌이겠거 

니 하고 넘어갈 거다. 

완벽하게 계획이 맞물려 간다. 

'살아 있다는 건…… 좋은 거야.' 

사무린은 이를 드러내며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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