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자(同調者)
차가운 겨울 바람과 함께 악양유가에 예기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문을 지키고 있던 구여수는 걸음걸이가 이상한 노인을 봤다. 그 노인은
구여수가 있는 쪽을 향해 힘겹게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악양유가
의 문 앞까지 다가온 노인의 몸에서는 독한 술 냄새가 피어올랐다. 잠
시 구여수를 바라보던 노인이 갑자기 허리를 굽혔다.
"우웩!"
"이, 이이! 갑자기 왜 이곳에서 토악질을 하고 난리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두드려 패서 쫓아내고 싶다. 그렇지만 구여수
는 차마 주먹을 날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뻘이라는 것도 주먹을 날리는
것을 망설이게 했지만, 무엇보다도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노인의 빈약
한 몸을 보니 주먹을 날리려는 마음이 싹 가셨다.
"당장 꺼지시오! 당장! 에잇, 내 더러워서."
위액까지 쏟아냈는지 냄새가 보통 심한 게 아니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자신마저도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낼 듯 하다. 냄새 탓에 구여수는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고 문 쪽으로 물러나던 구여수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자신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올린 탓이다.
"…… 뭐, 뭐요?"
구여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깨에 올리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입가를
닦는 모습을 보니 속이 울렁거린다. 당장이라도 어깨에 올린 손을 쳐버
리고 싶은데 구여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깨에 왠지 모를 한기가 느껴
진 탓이다.
"물 좀 한 잔 주게."
"여기가 무슨 노인장 같은 사람 물이나 주는 곳인 줄 아시오?
스치듯이 느꼈던 감정이었기에 구여수는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술에
취해 자기 몸 하나 간수 못하고 비틀거리는 노인이다. 그런 노인의 무엇
을 보고 자신이 이리 섬뜩한 느낌을 받은 것인가.
차라리 아무 말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이 말 없이 빤히 자신을 쳐다보니 구여수는 당혹스러웠다. 노인이
나타나기 바로 직전에 한숨 좀 자고 나오겠다며 들어간 동료가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에이, 잠시 기다리시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구여수는 문안으로 들어가
물 한잔을 떠서 밖으로 나왔다. 노인은 허리를 굽힌 채 기침을 토해내
고 있었다.
"노인장 물 떠왔소."
"쿨럭, 쿨럭!"
기침을 하면서도 노인은 손을 내밀어 물 잔을 받았다. 노인은 단숨에 물
을 들이켰다.
"됐소? 이제 그만 가시오."
가라는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노인은 그 자리에서 기침을 자꾸 반복했
다.
"후우, 내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데 이 안에서 잠시 쉬고 갈 수 없나?"
"제길, 돈 가지고 객잔 가서 엎어지란 말이오. 괜히 내 머리 아프게 하
지말고."
"이 놈아, 쉬는 것도 안 되냐? 잠시 쉬려고 객잔을 가는 게 얼마나 돈
낭비냔 말이다. 더군다나 이번에 손자 녀석 생일이라 돈도 모자란 판인
데……"
손자까지 들먹이며 나오자 구여수는 뒷머리를 긁었다. 자신의 거처에서
잠시 쉬게 해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잠시 망설이던 구여수는 그
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세가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
을 받은 것도 아니다. 크게 문제 될 일이 아니었기에 구여수는 그냥 승
낙한 것이다.
"오늘 저녁에는 나가야 하오."
"걱정 않아도 되네. 내 두어 시진만 쉬고 갈 테니."
"제길, 기다리쇼."
문 쪽을 비워 둘 수가 없기에 구여수는 안으로 들어가 막 잠자리에 들어
갔던 동료를 깨워서 밖으로 나왔다.
"그럼 부탁하네."
"아함, 어서 돌아와."
잠이 덜 깬 얼굴로 장청은 손을 흔들었다. 구여수는 노인과 함께 악양유
가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참, 크구먼. 어느 높으신 나리의 집인가?"
"높으신 나리의 집은 무슨. 세가요, 세가."
"세가? 그럼 이곳이 운문세가인가?"
"운문세가가 왜 악양에 있소! 노인장은 참 이쪽에 대해 전혀 모르시네."
"목소리를 높이긴 왜 높여!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거면 다지, 그 외
에 뭐가 필요하다고 알아야 한다는 게야!"
구여수는 됐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잠시간 그 둘은 말 없이 걷기만
했다. 노인은 이리 큰집은 처음 와봤는지 연신 탄성을 토해냈다.
"이 집 주인은 밥걱정 없이 살겠군."
노인의 말에 구여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 순박한 노인이다. 이
런 거대한 집을 보면서 밥걱정 없겠다며 부러워하는 노인인데 아까 전
엔 무엇 때문에 자신이 놀란 것일까?
"여기요, 약속한 대로 두어 시진 후에는 나가야 하오."
"속고만 살았는가?"
노인의 타박에 구여수는 문을 열어 주고는 몸을 돌려 다시 왔던 길을 되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인은 구여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선 노인은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노인의 품안에서 나온 것은 한 장의 지도였다. 그리고 그 지도에는 악양
유가 내부의 자세한 사항들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 이쪽으로 왔으니……"
노인의 손이 지도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다 한 자리에 이르자 멈췄다.
"멀진 않군."
지도를 향했던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더 이상 그 노인은 아까 봤던 그
가 아니었다. 눈빛이 변했다. 몸에서 풍기는 기도도 변했다. 아까 보였
던 순박한 모습은 사라졌다.
노인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턱에 있던 수염을 잡아 당겼다. 변장을 하고
들어온 것인지 수염은 잠시 버티다가 곧 떨어져 내렸다. 다른 부분을
몇 번 손대고 하니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한 남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
다.
그 남자는 태연히 문을 열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마치 익숙
한 것처럼 한 번의 두리번거림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두 번째에서 왼쪽.'
마지막으로 꺾이는 순간, 그 앞에 그가 그토록 찾던 장소가 나타났다.
'찾았군.'
그는 살짝 웃으며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주변을 살피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
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가주의 거처가 아닌 곳에서도 경비병이 있어
야 할 마당에 정작 중요한 이곳엔 아무도 없다. 잘못 찾아온 것인가 하
며 걸어 온 길을 되짚어 봤지만 분명 지도대로 움직였다.
이곳이 가주의 거처임은 확실하다.
'내 기억이 틀릴 리는 없어. 보초 하나 없다니 무슨 생각이지?'
궁금해하면서도 남자는 움직였다. 그가 알기로 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밖에 보초가 없다는 것
은 누가 들어와도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거다.
그는 그 자신감의 이유를 기관진식으로 꼽았다.
'어느 정도로 만들어 놨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상으로 봤을 때……'
악양유가가 만들어 진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이 장원을 미리 사두었
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기관을 만들었다 해도
그리 대단치는 않을 게다. 기관진식의 천재가 돕지 않은 이상 단시간 내
에 대단한 기관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뚫을 수 있어.'
그는 기관을 뚫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들어가는 게 어렵지는 않다. 남자는 몸을 띄우면
서 온 신경을 쏟았다. 땅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기관이 작동할 지도 모른
다고 생각한 것이다.
탁.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남자는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막 땅에 발
이 닿으면 작동할 거라 생각했던 기관이 작동되지 않는다. 더불어, 기관
을 설치해 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주변에 사물이 너무 없다. 나무와 돌, 연못이 있기는 하나 많지는 않
다. 주변에 사물이 없다는 것은 곧, 숨길 장소가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
통한다. 기관을 설치해 두기로 이곳은 너무나 부적절한 장소다.
'기관도 없는 건가? 그럼 도대체 왜 주변에 무사 하나 없는 거지?'
기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큰 무기는 불
가하나, 오히려 그 방심을 이용해 작은 암기들이 쏘아질지도 모르는 일
이다. 어떻게 본다면 무수히 많은 기관이 터져 나오는 것 보다, 방심케
한 후 튀어나오는 맹독을 바른 작은 침 하나가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가주가 머문다는 방 바로 앞까지 이르렀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없
다.
방과 남자와의 거리는 고작 십 장도 되지 않았다. 이 상태로 천천히 다
가간다면 가주의 목도 딸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편없군. 이런 세가가 어떻게 운문세가와 그런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거지?'
운문세가의 가주 운마연이 왜 이런 자들에게 밀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
다. 보초도 없고 기관도 없는 곳에 있는 가주를 죽이지 못한 이유도 알
수가 없다. 여자라서 죽이지 않거나 할 위인은 아니다.
자신의 판단으로는 악양유가는 운문세가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악양유가가 무력은 부족하겠지만 운문세가를 철
저히 짓밟고 있다.
이유가 없다면 벌어지지도 않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분명 무엇인가가 있
다. 그렇지 않고서야 호남의 제일인 운문세가를 누를 수 있었을 턱이 없
다.
'뭔가가 있긴 할 터인데……'
잠시 주변을 살펴보며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가주가 머무는 방의 문이
열렸다. 그는 재빠르게 옆으로 움직여 나무 뒤로 몸을 감췄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남자였다.
'악양유가 가주의 호위무사라는 그 남자군.'
악양유가의 가주는 여자다. 그런데 지금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드러낸
것은 남자였다. 이미 그는 악양유가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일
전에 하북팽가의 팽산위를 어린애처럼 가지고 논 남자다.
그 남자가 나와서 조용히 앞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알아차렸을 리가 없다.
은밀히 움직였고,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일체 움직이지
않았다.
"나오란 말 안 들리는 건가?"
'말도 안 돼……'
방에서 나온 그 남자의 눈이 향하는 곳은 분명 자신이 있는 나무였다.
자신이 온 것을 안 것뿐만이 아니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알아냈다.
흔적을 남길 시간도 없었거늘 어떻게!
"마지막이다. 나와."
확실하다. 믿기 힘들었지만 분명 걸려버렸다.
"아아, 나가지. 나가면 될 것 아닌가."
여운휘는 나무 뒤에서 몸을 드러낸 자를 응시했다. 많이 젊은 자다. 겉
모습을 보니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것 같다.
"네가 팽산위를 일장에 날린 그 자가 맞지?"
"네 말대로. 그런데 요즘은 담 넘는 게 유행인 모양이야. 개나 소나 다
넘는 군."
"하하! 자넨 참 재미있는 사람 같아."
그는 웃었다. 앞에 있는 악양유가 가주의 호위무사인 남자는 자기와 비
슷한 연배로 보였다. 팽산위 정도야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다. 하지
만 아무리 자신이라도 단 일장으로라면 무리다.
"무슨 일로 온 거냐. 담을 넘긴 했지만 가주에게 해를 가하려 온 것 같
지는 않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몰래 들어올 놈이 그리 큰 소리를 내나?"
아니다, 저 자의 말대로 가주를 해할 마음으로 온 게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척을 일부러 낸 적은 없다.
"정말…… 말재간이 있는 자로군."
자신의 실력을 비웃는 거다. 그런 실력으론 설령 살수로 왔다고 해도 가
주의 손끝하나도 댈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하는 거다.
온 목적을 잊은 건 아니지만 호승심이 일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이
고, 실력 또한 대단하다고 들었다. 분명 이곳에서 할 일이 있다. 하지
만 자신을 비웃는 듯한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건 무인의 자존심이 허
락지 않는다.
"뭐 하러 왔냐고 물었다. 더 이상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좋아, 우선 일이 먼저지. 악양유가의 가주를 뵈러 왔다."
"무슨 일로."
"이번 운문세가의 일이다."
여운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바라봤다. 잠시 동안 상대를 응시하던 여
운휘가 입을 열었다.
"신분과 이름."
"남궁세가(南宮世家)의 가주께서 나의 백부(伯父)시다. 내 이름은 남궁
진이라 한다."
"……"
남궁진, 들어본 적이 있다. 예전엔 무림에 있는 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
랐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보를 얻게 되면서 중요한 무인들에 대해 많은
것을 들었다. 그 중에서 남궁진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 안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무림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자라
는 거다.
'남궁비룡(南宮飛龍).'
남궁세가에서 차후의 가주가 될지도 모른다고 칭해진 자다. 직손의 자식
들을 제치고 가주가 될지도 모를 정도라면 보통의 인물이어선 안 된다.'
"들어 와."
신원을 확인 한 여운휘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는 여운휘를 보며 남궁진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따라
서 움직였다.
안으로 들어간 남궁진은 앞에 있는 두 명의 모습을 보았다. 한 명은 여
인이고, 다른 한 명은 노인이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궁진은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일전에 세가의 가주가 여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자라고는 들었지만 어느 정도는 나이가 먹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보다도 어리다. 그 뿐만이 아니라
생긴 것 또한 남궁세가에서 제일 미녀라 불리는 자신의 사촌 누이인 남
궁려희에 비해서도 월등히 아름답다.
'려희 누님 보다 나은 여자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천하삼절(天下三絶)이 있다. 천하에서 알아주는 세 미녀를 칭하는 말이
다. 남궁세가의 남궁려희도 천하삼절의 하나다. 그런 그녀이거늘 이 여
자 앞에 선다면 그 미모가 빛을 바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말하는 게 실례인 줄은 알지만…… 대단히 아름다우시군요. 아,
이 말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말씀하십시오. 당장이라도 사과하겠습
니다."
"아니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기분 상할 말이 아니었으니까요."
얼굴뿐만이 아니라 목소리도 절색이다. 먹은 것이 얹혔다가 그것이 쑥
내려갈 때의 기분이랄까? 악양유가 가주의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끌었다.
'미인계를 배운 건 아닌 것 같은데 대단하군.'
이 여자가 미인계를 배웠다면 무림에 풍파(風波)가 일었을 게다. 아니,
아직은 모른다. 이 여자가 미인계를 배우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다. 내공
을 쓰지 않고도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여인이다. 미인계까
지 쓴다면…… 아무리 남궁진이라 해도 버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남궁세가의 가주이신 남궁철 어르신이 저희 백부가 되십니다. 그리고
저는 별로 대단치는 않으나 분에 넘치게 남궁비룡이라고 불리는 남궁진
이라 합니다."
"남궁세가에서 저희에겐 어쩐 일로……"
남궁세가는 악양유가와 인연이 없다.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세가라는 것
뿐이다. 면식(面識)도 없을뿐더러 오대세가의 하나인 남궁세가가 신경
쓸 정도로 악양유가는 아직 대단치도 않다.
"운문세가의 일 때문에 왔습니다. 이번에 운문세가와 일전을 겨루실 듯
한데……"
"저희 쪽은 원치 않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겠지요."
"그래서 왔습니다. 저희가 도우려고 하는데 어떠신 지요?"
"남궁세가에서 저희를요?"
"예, 눈에 띌 정도로의 도움은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의 도움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유설린이 잠시 입을 닫자 옆에 있던 풍운조가 나섰다.
"무슨 일로 남궁세가가 우리를 돕겠다는 건가?"
"남궁세가도 운문세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명분이 없
어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악양유가와 운문세가의 일
이 터졌지요. 지금 그대로 격돌한다면 악양유가가 질 승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도우면 확실히 이길 수 있습니다. 악양유가에게도 나쁜
조건은 아닐 거라고 봅니다."
"분명 좋은 조건이긴 하네……"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남궁세가라면 지금 악양유가에 부족한 어느 수
준 이상의 고수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자 얼마만
을 도움 받는 것으로도 악양유가엔 큰 힘이 된다.
그렇지만 풍운조는 망설이고 있었다. 분명 좋은 조건이다. 그렇지만 상
대를 무조건적으로 믿을 순 없는 일이다. 상대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
지 모르는 이상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다.
어느 정도 남궁세가가 도움을 주려는 이유는 짐작했다. 남궁세가는 호남
에 자신들의 힘을 뻗고 싶은 거다.
"좋아요. 남궁세가에서 도와주겠다면 오히려 저희 쪽에서 환영이죠. 그
러면 이제 조건을 말하세요. 그냥 무조건적으로 도움을 주는 건 아닐 테
니까요."
"운문세가가 무너지면서 비어버릴 장사 중에 이 할을 저희가 가지고 싶
습니다. 나머지 팔 할은 악양유가가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 할이라…… 좋아요. 이 할을 주도록 하죠. 하지만 호남에서만큼은
악양유가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세요."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도록 하겠습니다."
남궁진은 품에서 두개의 종이를 꺼내서 유설린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안에는 방금 남궁진이 말했던 것과 관련된 것들이 적혀 있었다. 유설린
은 붓을 들었다. 그리고 그 밑에 자신이 방금 말했던 것을 적어 넣었
다. 두 장에 똑같이 글을 넣은 유설린은 그 밑에 인장(印章)을 꺼내 찍
었다.
그리고 유설린은 그 두 개 중 하나를 남궁진에게 넘겼다.
"백부님의 인장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엔 제가 찍도록 하지요."
남궁진은 유설린이 찍은 인장 바로 옆에 남궁세가 가주의 인장을 찍었
다. 그리고는 유설린이 다시 건네 준 다른 종이에도 인장을 찍고는, 그
것을 유설린에게 건넸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하셨을 텐데 며칠 쉬다 가세요."
"아닙니다.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려면 쉴 시간이 없군요. 남궁세가로
가야하고 그쪽에서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테니까
요. 아, 그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이건 개인적인 일인데……"
남궁진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일은 끝났다. 이제 개인적인 일을 해결해
야 할 때다.
"저 남자와 겨루어 보고 싶습니다."
"……?"
무슨 일이냐는 듯이 유설린이 여운휘를 바라봤다. 유설린이 가주이기는
하나 이런 일을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다. 여운휘가 고개를 끄덕였
다.
"하지."
"좋아, 화끈해서 맘에 드는 군."
그동안 몸이 근질근질했다는 것을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이 남궁진은 벌
떡 일어났다. 남궁세가와 악양유가의 일을 해결하는 내내 눈은 여운휘에
게 향했었다. 겨루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몸 아래에서부터 끓어올랐다.
남궁진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악양유가의 삼 인이 뒤따랐다.
유설린과 풍운조는 위에 그대로 있고 여운휘는 아래로 내려섰다. 남궁진
은 웃었다.
오랜만에 상대할 만한 적수를 만난 기분이다.
"말은 필요 없을 테니 가도록 하지."
검도 빼지 않고 남궁진은 여운휘를 향해 움직였다. 몸이 순간 서너 개
로 보이다가 급기야 여운휘의 앞에 이르는 순간 그 수가 거의 열 개에
달했다. 손이 움직였다.
파앙!
남궁진은 손에 느껴지는 충격에 입술을 깨물었다. 천풍신법(天風身法)
을 극성으로 펼치며 다가갔다. 허상이 무엇인지 구분하는 것도 힘들었
을 터인데 자신의 손과 다 버린 상대의 손에서 터져 나온 힘은 결코 허
둥지둥 대다가 내뻗은 것이 아니다.
남궁진은 두 걸음 물러서며 바로 천뢰삼장(天雷三掌)을 펼쳤다.
천뢰삼장은 세 개의 장력이 연달아 터져 나가는 남궁세가의 무공이다.
그 빠르기가 가히 번개와도 같다.
처음 것이 땅을 쳤는지 흙먼지가 심하게 올라왔다. 그렇지만 남궁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한 남자가 묵묵히 서서 남궁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진은 그 모습을 보며 몸에 이는 한 줄기 전율을 느꼈다.
'…… 강하다.'
여태까지 남궁진은 강한 자를 많이 보아왔다. 남궁세가의 가주만 해도
그렇고, 지금은 세상에 몸을 드러내지 않는 은거기인도 많이 만나 보았
다. 남궁진은 그들에게서도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강함과 지금 이 앞에 있는 남자의 강함을 달랐다.
그들의 강함은 나이 차와 연륜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저 나이
대가 된다면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남자는 다르
다. 자기와 동년배의 남자다. 그런 남자인 탓일까?
그의 강함은 피부에 절실히 와 닿았다.
'평생의 내 호적수(好敵手)가 될 거다, 이 남자는.'
우스운 얘기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남궁세가에서 가장 미래를 촉망받
는 자신이 이름조차 없는 호위무사 하나를 호적수로 인정했다.
남궁진은 왜 가주가 있는 이곳을 무인들이 보초를 서지 않는지 알아 버
렸다. 그런 무인들 수십 보다 저기 앞에 있는 저 남자가 더 낫다.
"하하!"
남궁진은 웃었다. 천하에 자신의 동년배 중엔 자신의 적수가 될 자는 없
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남궁진은 검을 빼들었다.
일검이 천하(天下)를 가른다!
남궁세가의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가 펼쳐졌다.
남궁세가의 검법은 중(重)을 중시한다. 허나, 섬전십삼검뢰는 이름에서
알 수 있다 시피 쾌검이다.
파파팍!
출수를 하자마자 무섭도록 빠르게 검이 움직였다. 검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대단한 쾌검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검은 여운휘를 건드리지 못하고 애
꿎은 허공만 연신 갈랐다.
'닿을 듯 하면서도…… 닿지 않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건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움직임에 여유가 있
다.
'완벽하게 파악했어.'
속도를 안다. 이 남자는 섬전십삼검뢰의 속도를 몸으로 느끼고 피하고
있다. 전혀 쩔쩔맴을 보이지 않는다. 이 상태로는 아무리 휘둘러도 헛고
생이다. 힘만 낭비하는 꼴이다.
남궁진은 뒤로 물러서며 검을 거두었다.
자신이 펼친 검법은 분명 위력적이었다. 주변에 있던 나무가 갈렸고, 땅
에서 잔뜩 흙먼지가 인다. 이 정도라면 자신의 검법이 약한 건 아니다.
검을 잡자마자 성난 폭풍처럼 몰아쳤지만 소득이 없다. 이거야 힘을 뺀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완벽했는데 상대에겐 먹히지 않았다.
생각은 길어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실
패했다면 다시 한 번 부닥쳐 보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목숨을 건 싸움
이라면 모를까 비무다. 비무와 결투는 다르다.
다시 한 번 남궁진이 움직였다. 검이 아래에서 위로 그어지며 여운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여운휘의 검도 움직였다. 검집에 꼽혀 있던 검이 빠
져 나오는 순간 남궁진은 급히 머리를 틀었다.
휘잉!
바람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바람 소리? 아니다! 이건 바람 소리가 아니다. 갑작스럽게 이런 바람이
불 턱이 없다. 이건 검이 바람을 가르면서 난 소리다. 고개를 틀지 않았
다면 얼굴에 긴 검상이 났을 거다.
'어떻게 거의 다다랐던 나보다, 지금 막 뽑힌 저 자의 검이 더 빠르단
말인가!'
거의 두 배의 거리 차이가 났다. 또한 남궁진이 펼친 검술 또한 쾌검이
다. 그런데 그런 거리와 속도를 매울 정도의 빠르기로 상대의 검을 다가
왔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속도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만약 순간적으로 날아드는 검을 보지 못했다면 남궁진은 졌을 거다. 만
약 싸움이었다면 이 일격으로 승자와 패자가 갈릴 수도 있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남궁진은 거세게 몰아붙였다. 방금 전 같은 일을 또 당
할 수는 없다.
여운휘의 몸이 뒤로 움직이기가 무섭게 검이 허공을 그었다.
또 다, 또!
허깨비와 싸우는 기분이다. 검이 닿는 느낌도 별로 없다. 분명 자신이
밀리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유효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남궁진은 허공을 다시 한 번 가르는 순간 앞으로 몸을 날렸다. 더 이상
의 헛손질은 없다. 대연십구식(大衍十九式)이라는 금나수가 펼쳐졌다.
옷소매를 잡으려는 순간 여운휘는 손을 뒤로 뺐다. 그리고 그 순간 남궁
진의 다른 손이 허리로 가 있었다.
여운휘는 발로 손을 쳐냈다. 쳐냈다 싶은 순간 다른 손 하나가 여운휘
의 소매를 잡으며 비틀었다. 여운휘는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옷소매를 꼬듯이 잡는 바람에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가 않던 것이다.
근거리에서 천뢰삼장이 터졌다.
퍼엉!
거의 하나의 소리처럼 들렸지만 세 번의 연속적으로 터져 나간 장력이
가슴을 친 거다. 여운휘의 몸이 허공으로 떴고 남궁진은 어깨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여운휘를 쳐버렸다.
'정확히 들어……'
뻐억!
순간 머리가 돈다. 앞이 까매졌다가 한순간에 하얗게 변했다. 균형이 앞
으로 쏠렸지만 급히 몸을 젖히며 뒤로 물러섰다.
남궁진은 멀쩡하게 서 있는 여운휘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천뢰삼장은
분명 제대로 들어갔다.
천뢰삼장을 맞는 순간 비무인데 좀 과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정
확했다. 그런데 상대방의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이겼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는 순간 머리를 맞았다.
호적수라 생각했다. 평생동안 그럴 상대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
다.
'…… 나보다 강해.'
남궁진이 몸을 추스르자 여운휘의 손이 움직였다. 남궁진은 옆으로 몸
을 틀며 검을 휘둘렀다. 날카롭게 쇄도하던 지력이 검에 휩쓸려 옆으로
밀려났다. 비록 머리는 울렸지만 이 정도 공격에 당할 정도로 남궁진은
녹록치 않다.
"치잇!"
남궁진의 몸이 눈 깜작할 사이에 몇 바퀴 돌면서 여운휘를 향해 검을 휘
둘렀다. 몸을 회전시키는 남궁진의 몸에서 붉은 빛이 뿜어졌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느끼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탓에 남궁진
은 무리하게 초식을 운용했다.
지고 싶지 않다. 여태까지 수많은 비무를 해오면서 패해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리고 자신을 패하게 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보다 높
은 연배의 사람들이었다. 지고 나서도 크게 마음에 남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이 앞에 있는 남자는 다르다.
진다면 두고두고 이 날을 기억하게 될 거다.
'지지 않아!'
남궁진의 몸이 속도가 붙으며 빠르게 회전했다. 여운휘는 회전하는 남궁
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이 위태위태하여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유
설린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여운휘의 몸이 사라졌다.
'어디냐!'
회전을 하면서 사방을 응시하던 남궁진은 상대가 어디 있는지 알아차렸
다.
'아래!'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여운휘를 보며 남궁진의 검이 무섭게 내리 꼽혔
다. 비무라는 것을 잊었는지 남궁진의 검은 사정이 없었다.
미미한 바람이 불었다. 봄에 살짝 부는 바람처럼 한 줄기 바람이 불었
다.
남궁진은 바람처럼 자신의 가슴에 다가온 손을 느꼈다. 그다지 굳세지
도 않은, 남자답다기 보다는 여자에게나 더 어울릴 듯한 손이다. 그런
데 그 손이 가슴에 닿는 순간 남궁진의 몸은 공중으로 떠버렸다.
목구멍을 타고 피가 솟구쳐 오른다.
이어지는 손이 이번엔 옆구리를 만졌다.
솟구쳐 오른 피가 뇌까지 역류하는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손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부드럽게 남궁진의 배를 어루만
졌다.
"커억!"
간신히 참고 있던 피가 터져 나왔다. 피가 입에서 족히 한 사발은 될 정
도로 뿜어졌다. 남궁진은 뒤로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나다 결국은
주저앉았다.
'이, 이게 인간의 주먹이란 말인가?'
살짝 가져다 댄 것 같은데 그 위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다시 한 번 목구멍으로 피가 올라왔다. 고개를 숙인 남궁진은 다시 한
번 피를 토해냈다. 두 차례나 피를 토하니 머리가 어지럽다.
"그만, 그만 하자. 헉헉."
남궁진은 더 이상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설령 일어난다 해도
또 한 번 저 손에 맞는다면 몸이 박살이 날 거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남궁진의 모습이 위태해 보였다.
"이거 이거 제 몸 하나 못 가누니 꼴사납군."
남궁진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가능하면 태연한 척 하면서 말은 하고
있지만 실상은 당장이라도 눕고 싶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후들
거리는 것을 억지로 고정했다.
남궁진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상대에게 패한 건 패한 거다. 그렇지만 동정까지는 받고 싶지 않다. 당
당하게 걸어 온 것처럼 그는 돌아갈 때도 그리 할거다.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가주. 그리고 가주의 호위무사 덕분에 한 수
잘 배우고 갑니다."
"몸이 별로 좋지 않으신 듯 한데……"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 발로 걸어왔으니 제 발로 나가야지요."
남궁진은 애써 웃었다. 고통스러울 텐데도 억지 웃음을 지으니 표정이
구겨진다. 남궁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중히 포권을 취
한 그는 몸을 돌려 힘겹게 한 발 한 발 걷기 시작했다.
도와준다면 쉽게 나갈 수 있겠지만 그 안에 있던 삼인 중 그 누구도 그
러한 행동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남궁진의 마음을 아는 탓이다.
남궁진은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동안 힘겹게 걸
어서 나갔다.
그는 나가기가 무섭게 벽을 문에 기대고 무너져 내렸다.
오기였다. 오기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잡고 여기까지 걸었다. 주저앉는다
면 그거야말로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남궁진은 벽에 몸을 기댄 채로 하
늘을 올려다봤다.
"빌어먹을, 왜 이렇게 맑은 거야."
가주의 방안에 삼 인이 앉아 있었다.
"가주, 굳이 그 계약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는데……"
남궁세가는 큰 도움을 주지는 않을 거다. 남궁세가에서는 악양유가가
이 계약을 반드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계약을 하게
는 되었지만 악양유가는 거절 할 수도 있었다.
남궁세가가 자신들의 조건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것은 고수가 없다
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풍운조와 여운휘의 존재를 몰랐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고수가 많다면 그 만큼 많은 사람이 살 수 있
잖아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사람의 목숨이 더 귀해요."
"가주의 말씀도 맞기는 하지만……"
풍운조는 그리 석연치 않았다. 가주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여운휘라면 운문세가에서 고수들을 데리고 와도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앞장서서 싸우게 될 악양유가의 무인들은 다르다. 고수가 많아
지면 그들이 살 확률도 높아진다. 그 탓에 유설린은 남궁세가의 조건을
덥석 받아들인 거다.
'너무 순수해.'
가주는 너무 순수하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지금은 남궁세가의 제의를 거
절해야 옳다. 조건이 없었다면 모를까 조건을 들은 후 풍운조는 가주가
거절 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조건을 듣고도 그녀는 그 계약을 받아 들였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몇
명의 사람을 더 살리기 위해서.
풍운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세가가 도와줄 테니 일이 보다 쉬워질 듯 하긴 하구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풍운조가 나가고 나서야 유설린은 여운휘에게 물었다.
"나 잘한 거 맞을까? 풍 노야의 표정을 보니 별로 석연치 않아 하시는
것 같은데……"
"아니. 난 네가 옳다고 생각한다."
"정말?"
"내가 언제 허튼 소리 하는 거 본적 있나?"
유설린은 그 말에 강하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