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37)

운문세가에서는 돌아온 서찰을 받았다. 예상했지만 역시나 거절이다. 다 

른 사람들로 하여금 대면케 하자는 거다. 

"역시 실패로군." 

"어차피 성공할 거라고 생각지도 않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나왔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나왔다면 분명 일은 더 쉬워졌을 거다. 하지만 애초부터 서찰을 보낼 

때 그리 될 거라는 건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운문세가 쪽에서 서찰을 

그리 보낸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서찰에서 가주끼리 만나자고 한다 

면 위험을 느껴 가주가 나오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다른 자가 나오게 

될 테고, 가주만 아니라면 어느 정도 가격을 흥정할 수 있다. 

악양유가에서는 누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운문세가에서는 서유종이 가기 

로 했다. 무공도 일정 수준 이상이고, 무엇보다 머리가 좋다. 

"꼭 반 값 이상은 받아 내야 하네." 

"악양유가의 가주만 아니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 열 명 정도를 호위로 붙여 주십시오. 기선을 제압 할 때 그것보 

다 좋은 것도 없지요." 

그 누구라 해도 일류고수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면 위축 될 거다. 그 

리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소금 가격을 흥정할 생각이다. 

"지금은 웃고 있겠지만 후회하게 될 게다. 건방진 계집." 

운마연은 자신에게 이빨을 내민 악양유가의 가주를 생각하며 주먹을 쥐 

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곧 악양유가의 가주가 자신의 발 밑으로 오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앞선다. 

대설(大雪) 아침, 그 날은 눈이 오지 않았다. 

그 대신 그 날은 살을 잘라낼 듯이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유독 이번 겨 

울은 추운 듯 싶다. 

두 남자가 걸었다. 한 남자의 키는 조막만 했고, 다른 한 남자는 약간 

키가 큰 편에 몸에도 적당히 근육이 붙은 남자였다. 그 남자의 허리춤에 

는 검 한 자루가 달려 있었다. 

보폭이 다른 탓에 키가 큰 남자가 천천히 걸음에도 불구하고 키 작은 남 

자는 쫓아가기 힘든 모양이다. 그렇지만 키 작은 남자는 숨을 몰아쉬면 

서도 뒤쳐지지 않았다. 

한 걸음을 걸을 때 그는 두 걸음을 걷더라도 작은 남자는 큰 남자를 쫓 

아 걸었다. 

대단한 근성이다. 막 숨이 넘어갈 듯 한데도 불구하고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자다. 대단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허억, 허억." 

키 작은 남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소매 

로 훔쳤다. 

산 아래까지는 말을 타고 달렸다. 하지만 산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둘은 

말을 버리고 직접 걸어야만 했다. 산의 모습은 기이했다. 

아홉 개의 골짜기로 되어 있는 산인데, 그 모습이 너무나 흡사하다. 사 

람들은 이 산을 구의산(九疑山)이라 칭했다. 

"삼일, 괜찮은가." 

"헉헉! 물론입니다, 능 소협. 다행히 약속 시간에 맞춰서 도착은 했군 

요." 

"그래. 우리가 아주 조금 일찍 도착한 모양이야." 

악양유가 쪽에서 온 두 명은 삼일과 능려운이었다. 그들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삼일은 모르겠지만 능려운은 아래 

쪽에서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운문세가의 인물들일 거다. 

능려운은 태연히 상대의 숫자를 파악했다. 

'적어도 일곱.' 

능려운이 느낀 건 그게 다였다. 분명 그 이상일 것이다. 하지만 능려운 

으로서는 그 정도 밖에 알 수가 없었다. 

삼일은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삼일은 능려운의 표정을 보고 감을 잡 

았다. 

능려운이 눈이 향하던 방향에서 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옷 

으로 몸을 감싼 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 자는!' 

혈산랑(血山狼) 좌청이다. 능려운의 놀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누가 보아도 빠져 버릴 정도의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여인이 모습을 드 

러냈다. 색기(色氣)로 무수히 많은 남자를 죽음으로 몬, 미인계로 유명 

한 색미호(色尾狐) 도미진이다. 

능려운의 표정이 굳었다. 

도합 사람의 수는 열 둘. 그 중에 저 둘만 해도 능려운으로서는 상대하 

기 힘든 고수다. 

색미호의 눈과 능려운의 눈이 부닥쳤다. 그녀의 눈 꼬리가 살짝 올라가 

며 초승달 모양을 그렸다. 

'과연 요녀(妖女)!' 

자신도 모르게 그 눈웃음 하나 때문에 속이 흔들렸다. 과연 이라는 말 

이 입 밖으로 막 세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악앙유가에서 오신 분이요?" 

서유종이 말문을 텄다. 서유종은 능려운의 얼굴을 모른다. 하지만 능려 

운은 서유종의 얼굴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저 자 

가 나올 거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풍운조의 판단은 정확했다. 

"서 총관이시군요. 전에 한 번 악양유가에서 얼굴을 뵌 적이 있습니다." 

"하하, 이런 절 알아주시니 고맙소. 그대는 내 이름을 아는데 나는 당신 

의 이름을 모르는 구려. 그래 이름이 뭐요?" 

"능려운이라 합니다." 

"능려운?" 

들어 본 적 없다는 듯이 서유종은 말꼬리를 올렸다. 모르는 것은 사실이 

다. 하지만 속으로 삭일 수도 있는 것을 이토록 소리를 낸 것은 기선 제 

압을 위해서다. 상대방에게 넌 그토록 변변치 못한 자라는 것을 상기 시 

켜 주기 위함이다. 

"허어, 인원이 참 적습니다. 겨우 하인 하나 데리고 오셨구려." 

서유종은 삼일의 외모를 보고 그를 하인이라고 판단했다. 능려운이 그 

오해를 풀기 위해 막 말을 하려는 찰나에 삼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건방진 놈. 감히 누구에게 하인이라고 하는 거냐." 

"…… 지금 네놈 나에게 지껄인 거냐?" 

목소리가 깔렸다. 하지만 삼일은 거침없이 다음 말을 내뱉었다. 

"오늘 너랑 거래를 할 것은 능 소협이 아니라 바로 이 몸이다. 알겠느 

냐?" 

"이 말이 진짜요?" 

서유종은 대답을 구하기 위해 능려운에게 물었다. 능려운은 말 없이 고 

개를 끄덕였다. 서유종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런 중요한 일 

에 겨우 이런 남자를 보낸 악양유가 가주의 생각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항상 그랬다. 악양유가의 가주는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 

게 변수가 되어 결국 일이 망쳐지곤 했다. 

이번에도 무슨 꿍꿍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내가 실례를 했구려." 

"알긴 아는 군. 부탁하러 온 처지에 약속 시간도 늦고. 아주 건방져." 

서유종이 말을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삼일은 여전히 반말을 내뱉었다. 

'보통 놈이 아니다.' 

서유종은 직감했다. 이 자는 보통을 넘어선다. 자기가 물러났음에도 불 

구하고 이빨을 들이밀고 앞으로 다가왔다. 

"인원이 많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소. 화 푸시게. 하하, 그럼 저쪽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는 게 좋을 듯 하려고 하는데 어떻소?" 

"아무 대에서나 하던 상관은 없지." 

삼일은 능려운과 함께 서유종이 가리켰던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특별 

한 장소가 있는 건 아니다. 삼일이 걸음을 멈추고 괜찮은 바위 위에 엉 

덩이를 걸쳤다.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하는데……" 

"오분 지 일." 

서유종이 말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삼일이 말을 내뱉었다. 잠시 가만히 

삼일을 바라보던 서유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오분 지 일이라니 무슨 소리요?" 

"너희들이 사 들일 때 쓴 돈의 오분 지 일로 사겠다는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서유종은 처음부터 이리 나올 줄 몰랐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하다가 가 

격을 적당한 선에 흥정하려고 할거라 생각했다. 그때 서유종은 자신의 

수완(手腕)으로 그 돈을 최대한 올릴 생각이었다. 애초에 낮게 부를 거 

라고 생각은 했지만 오분 지 일은 낮아도 너무 낮다. 

"이건 완전히 거저 먹겠다는……" 

"육분 지 일." 

"이보시오 말 좀……" 

"칠분 지 일!"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서유종은 직감적으로 더 말을 해 봤자 이 자는 숫자만 높일 거라 직감했 

다. 

서유종이 삼일을 노려보는 동안 색미호 도미진은 능려운을 바라보고 있 

었다. 살짝 꺼낸 혀가 입술을 핥고는 다시 입 안으로 들어갔다. 색기 어 

린 눈빛으로 도미진은 능려운은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바라만 보고 있는데 능려운의 손은 땀으로 가득했다. 

'예전이라면 버티지도 못했겠군.' 

능려운이 버틸 수 있는 건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내공 탓도 있지만 그 

것 뿐만은 아니었다. 이미 능려운의 마음엔 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 

을 생각하니 도미진의 외모도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인다. 

도미진은 그녀 나름대로 놀라고 있었다. 능려운이라는 이름 들어 본 적 

이 있다. 낭인들과 이래저래 관계가 얽혀 있는 도미진은 능려운의 이름 

은 안다. 그리고 실력에 대해서도 안다. 

낭인 중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는 자다. 그렇지만 그건 낭인에 한정해서 

였다. 그 위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던 자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니다. 

'버티고 있어.' 

눈을 마주보면서도 버티고 있다. 자신이 들었던 능려운은 이 정도의 실 

력을 지니지 못했다. 혹시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인물일까 생각 해 봤지 

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낭인 주제에……' 

은연중에 도미진과 능려운의 눈싸움을 계속 됐다. 

삼일을 바라보던 서유종은 결심했다. 

'무력을 보이는 수밖에.' 

지금 악양유가보다 나은 게 있다면 뒤에 열 한 명의 무인이 있다는 거 

다. 

"지금 당신이 큰 소리 칠 때는 아니라고 보이는데……" 

서유종은 살짝 손을 들어 신호를 줬다. 미리 이야기 해 두었던 바가 있 

는지라 혈산랑(血山狼) 좌청이 움직였다. 좌청의 손에서 뻗어진 검이 서 

유종의 어깨 쪽을 지나 삼일의 앞에 꼽혔다. 

"큭큭, 뭘 믿고 그리 뻣뻣한가 했지." 

'웃어?' 

삼일이 웃었다. 그것도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짓는 웃음 같아 보 

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까보다 생기 있는 눈빛으로 삼일이 서유종을 바 

라봤다. 

'귀찮게 됐어.' 

무공은 모르는 자 같다. 좌청이 검을 날렸을 때 한치의 움직임도 없다. 

겁이 없다고 봐도 되지만 그러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더불어 이곳 

에 맨 처음 도착했을 때 그의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무공을 익힌 건 아니다. 그렇지만 독종인 건 확실하다. 

"지금의 위협으로 팔분 지 일로 올라갔어." 

서유종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좌청이 다시 한 번 검을 움직였다. 

이번엔 목쪽을 향해 날아드는 공격이었다. 

카앙! 

아까는 주춤하는 바람에 반응하지 못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서유종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 능려운은 삼일의 앞을 가로막았고,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건방진…… 놈!" 

좌청이 입을 열면서 재차 공격을 날렸다. 좌청 또한 아까 도미진에게 상 

대의 정체를 들었다. 낭인 따위에게 검이 막혔다고 생각하자 좌청은 화 

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능려운은 선 채로 좌청의 검을 받았다. 손이 아릿하다. 검의 당장이라 

도 뒤로 밀려 날 것 같다. 그렇지만 능려운은 다리에 힘을 주며 버텼 

다. 

처음엔 당장이라도 뒤로 날아갈 것 같았지만 조금 버티니 그럭저럭 손목 

이 버텨준다. 훈련의 효과다. 능려운은 자신감이 붙었다. 

"혈산랑 좌청이 겨우 이 정도요." 

"낭인 주제에……" 

"당신은 그토록 얕보는 낭인에게 큰 코 다칠 거요." 

능려운이 호기롭게 외쳤다. 

혈산랑 좌청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좌청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 

금 이 상태가 그가 가장 화가 났을 때라는 것을 안다. 

검을 막 움직이려는 순간 서유종이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만해라." 

지금 서유종은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상대방이 너무 뻣뻣하게 나오기에 

경고를 주기 위해 검을 날렸다. 하지만 상대방은 알고 있을 거다.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분하다……' 

또한 창피했다. 저런 조막 만한 자에게 밀렸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물 

론 상황이 반대였다면 자신이 승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진 건 진 거다. 만약 반 값 정도만 받았다면 승자는 자신이었 

다. 그렇지만 팔분 지 일이다. 

그 무슨 말을 해도 저 숫자는 용납 될 수 없다. 

서유종은 자신이 패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날카로운 눈을 

번뜩였다. 

'나는 졌다. 하지만 운문세가는 지지 않을 거다.' 

더 이상 얼굴을 맞대고 있어 봤자 화만 날 뿐이다. 서유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마 후 소금을 보내겠소. 그때 가는 사람에게 돈을 줘서 보내시오." 

서유종이 움직이자 무인들도 몸을 돌려 그의 뒤를 따랐다. 무인들이 떠 

나가는 데도 불구하고 도미진은 능려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미인계를 버텼고, 혈산랑 좌청의 검을 받았어. 결코 그냥 낭인은 아 

냐. 예전이었다면 별 볼일 없는 낭인이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도미진은 흥미가 일었다. 죽이려 한다면 아무리 능려운이 강해졌다 해 

도 죽일 수 있다. 그건 도미진에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 

금은 때가 아니다. 도미진이 궁금한 것은 누가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능려운을 저 정도의 고수로 만들었냐는 거다. 

'아무래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될 것 같군, 능려운." 

도미진은 발걸음을 돌렸다. 도미진까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삼일이 

입을 열었다. 

"능 소협,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삼일 자네가 더 고생했지. 솔직히 난 운문세가의 서유종 

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 어떻게 된 사람 

이 그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나. 대단한 용기야." 

"무슨 소리이십니까? 방금 전까지 다리가 막 후들후들 떨리는 것 못 보 

셨습니까? 아마 저 자들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바지에 오줌 

을 지렸을 겁니다. 이거야 원, 무서워서 이런 일 다시는 못할 듯 합니다 

요."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삼일을 보며 능려운 또한 미소를 지었다. 삼 

일은 결코 겁을 먹지 않았다. 겁을 먹었다면 그토록 당당할 수 없다. 

능려운은 몰랐다. 삼일이 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항시 정보나 분석하 

고 앉아 있는 키 작은 남자라는 게 삼일에 대한 능려운의 인상이었다. 

그렇지만 오늘 부로 그 생각은 대폭 수정 될 수밖에 없다. 

'키는 작지만 대단한 남자다.' 

능려운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삼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땅으로 내려선 그는 능려운에게 말했다. 

"이제 슬슬 돌아가죠. 가주님께 이 소식을 알려 드려야지요." 

"자네가 이토록 수완(手腕) 있게 일을 해결 한 걸 아신다면 무척이나 좋 

아하실 게야." 

능려운은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검으로 혈산랑 좌청을 막았다. 그리고 

가주에게서 명 받은 일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 

능려운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흐릿한 게 눈이 올 것도 같은데 소식이 없 

다. 

"내려갑시다." 

하늘을 바라보던 능려운은 고개를 내려 삼일을 바라봤다. 

"그래, 어서 가세." 

"으이고, 좀 쉬나 했더니만 너무 일이 빨리 끝나 버려서 쉰 것 같지도 

않구먼." 

투덜거리면서도 삼일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운문세가의 사람들 

이 사라진 곳과는 반대 방향이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크기가 큰 탓에 산에서 밤을 맞이해야 했다. 

삼일이 불을 지피고 준비를 하는 동안 능려운은 사냥에 나섰다. 동물이 

보이지 않는다. 겨울인 탓이다. 산에서 사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몸을 숨 

기고 깊은 잠에 빠졌을 거다. 

바스락. 

'음?' 

능려운은 소리를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소리는 그다지 먼 곳에서 

들리지 않았다. 여기까지 다가온 것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 아주 작은 

소리를 들은 거다. 멧돼지 같은 동물이 그렇겠는가? 

"오호, 저기에 구멍이 있군." 

능려운은 앞을 바라보며 검을 뽑았다. 신경은 뒤로 쏟고 있지만 말은 전 

혀 다르게 내뱉었다. 마치 굴을 발견해서 검을 뽑아 든 것처럼 능려운 

은 태연히 움직였다. 모든 신경이 뒤로 집중 됐다. 

'분명 사람이다. 동물이었다면 바로 이렇게 기척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거다. 뒤로 몰래 따라 붙었다면…… 결코 좋은 인연은 아니겠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당장이라도 검이 심장을 뚫어 버릴 것 같다.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능려운은 땀을 닦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땀을 닦는 

다면 상대편이 알아차릴 것이다. 여름이라면 가볍게 넘어갈지도 모르지 

만 지금은 겨울이다. 땀을 흘릴 이유가 없다. 

'언제냐. 언제 들어오는 거냐.' 

침이 바짝 바짝 마르면서 능려운은 힘겹게 침을 삼켰다. 

보이지 않는 적은 두렵다. 보인다면 이토록 두렵지는 않았을 거다. 상대 

편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언제 들어올지 알 수도 없다. 어떤 방법으 

로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 

상대가 누구인지 안다면…… 

'잠깐, 이곳에서 내 뒤를 잡을 자라면……' 

그자밖에 없다. 이토록 기척을 죽일 수 있다는 건 산에 능숙하다는 거 

다. 산에 능숙하면서 자신의 뒤를 잡을 자 한 명을 능려운은 알고 있다. 

'혈산랑 좌청!' 

조심히 앞을 살피던 능려운은 상대편의 정체를 알자 입을 열었다. 

"혈산랑이라는 이름을 지닌 자가 이름도 없는 사람의 뒤를 잡고 뭐 하 

는 거요? 혈산랑이라는 별호가 울겠소." 

"……"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대방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더 이상 기척 

을 죽이지 않았다. 이제는 안전하다고 생각한 능려운은 몸을 돌렸다. 

"역시, 당신이었군. 그런데 당신이 왜 내 뒤를 쫓은 거요?" 

"…… 널 죽이려." 

물론 좋은 말이 나올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죽이 

려 왔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신이 날 죽이면 그건 곧 운문세가와 악양유가의 전쟁으로 변할텐데?" 

"난 방금 운문세가를 떠났다. 그러니 내가 널 죽인다고 그런 일은 벌어 

질 일이 없지. 그리고 난 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죽일 거야. 아무도 모 

르게 말이야." 

능려운은 잠시 느슨하게 풀었던 손을 꽉 쥐었다. 이 자는 정말 죽이려 

왔다. 풀어졌던 긴장이 다시 한 번 강하게 몸을 옥죄었다. 

"죽어." 

좌청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사선으로 능려운에게 날아들었다. 집중을 

하고 있었던 탓에 능려운은 그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했다. 완벽하게 피 

했다고 생각했는데 가슴 바로 앞으로 검이 스쳐지나갔다. 

어느 정도 자신이 붙어 있던 능려운은 바짝 긴장했다. 아까 일검을 막아 

낸 것을 가지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자만했군.' 

쉬지 않고 좌청의 검이 움직였다. 쳐냈거늘 검은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 

다. 능려운은 머리카락이 곤두섬을 느꼈다. 바로 옆으로 베어 들어올까 

싶어 능려운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완벽하게 밀리고 있어.' 

이번에는 앞머리를 베며 검이 스쳐지나갔다. 완벽하게 밀리고는 있는데 

당하지는 않는다. 능려운은 자신이 피하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분명 실 

력은 자신이 밑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다음 공격이 조금 일찍 보인 

다. 

그 탓에 능려운은 아직도 당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거다. 이번엔 능려운 

이 반격했다. 

평소에 하던 대로 빈틈으로 검을 밀어 넣은 건데 혈산랑 좌청은 크게 당 

황해서 뒤로 물러났다. 

'겨우 이 정도 공격에 왜……' 

능려운의 머리에 한 남자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 남자다! 

능려운은 지금 자신이 당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가주의 심복 

인 운휘라는 남자. 그 남자 덕분이다. 그 남자와 오랜 시간동안 비무를 

했다. 그 남자의 공격은 도저히 다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와 비무를 하며 능려운은 실전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배웠다. 

"후후." 

자신도 모르게 능려운은 웃음을 흘렸다. 능려운을 주시하던 좌청은 그 

가 웃음을 흘리자 검을 다시 한 번 들어 올렸다. 좌청은 그 웃음을 자신 

을 향한 비웃음이라 생각했다. 

좌청의 손에서 장력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몸을 공중으로 띄웠 

다. 

슈욱! 

그 긴 거리가 단숨에 손에 닿을 듯이 가까워 졌을 때 좌청의 발이 움직 

였다. 

능려운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뒤로 물러났다. 

퍼억! 

피하긴 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능려운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고서 

야 얼굴을 감쌌던 손을 풀었다. 

"…… 부족해." 

"?" 

"그 남자에 비하면 당신은 너무 부족하단 말이야!" 

능려운은 소리를 지르며 좌청을 향해 달려들었다. 왼손이 교묘하게 움직 

이며 좌청의 옆구리를 노렸다. 좌청 또한 그대로 당할 위인은 아니었 

다. 그는 손을 내려 능려운의 손을 쳐냈다. 왼손이 막히는 순간 오른쪽 

에 들린 검이 움직였다. 하지만 예측을 하고 있던 좌청은 검을 옆으로 

흘리며 능려운에게 다가왔다. 

양손을 모두 쓸 수 없게 되는 순간 좌청은 승리를 직감했다. 

그의 손이 능려운의 가슴을 움켜쥐려는 순간 좌청은 머리에 느껴지는 강 

한 충격에 휘청거렸다. 

좌청의 머리를 감싸 쥔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능려운이 상대가 파고든 순간 박치기를 해 버린 탓이다. 

"이제 내 차례다!" 

능려운의 검이 움직였다. 

검은 분명 하나인데 보이는 검날의 수는 네 개다. 

'헛것인가, 아니면……' 

좌청은 머리에 인 충격 탓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뒤로 움직였다. 혈산랑이라는 별호는 그의 동물적 감 

각 탓에 붙여진 것이다. 

제 정신이 아니었음에도 피했다. 검이 배 부근을 스쳐 지나가며 상처를 

만들어 내긴 했지만 큰 상처는 아니다. 

'견딜 만 해. 그보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지금은 운 좋게 피해내긴 했지만 다음도 그럴 거라 

는 보장이 없다. 좌청은 뿌옇게 변한 시야를 회복하기 위해 고개를 도리 

질 쳤다. 

검이 다시 날아들었다. 

정수리를 쪼갤 듯이 다가온 검을 좌청은 받아내지 않고 피했다. 머리에 

온 충격 탓에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자신은 머리에 인 충격 탓에 힘들게 허덕이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다. 

'돌 머리 자식!' 

선천적으로 머리가 단단한 거다. 그 외에는 답이 없다. 시야는 어느 정 

도 돌아왔지만 몸 상태는 아직 정상이 아니다. 뇌를 울린 충격은 몸의 

균형감각을 상실케 만들었다. 

그렇지만 좌청은 검을 들어 올렸다. 더 이상 끌려 다닐 수는 없다. 하물 

며 상대가 낭인에랴! 

"날뛰지 못하게 해 주마." 

위기에 직면하자 그의 동물적 감각이 살아서 움직였다. 눈이 밝아졌고, 

감각도 천천히 되살아났다. 

쒜엑! 

혈산랑이라는 별호를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쾌검 덕분이다. 순간적으로 

움직여 상대방의 목덜미를 잘라내는 그의 검은 마치 이리와도 같았다. 

산에서 특히 강하다고 알려진 그에게 사람들은 혈산랑이라는 별호를 줬 

다. 

그런 그가 검을 뻗었다. 여태까지의 그를 있게 한 쾌검이다. 

능려운도 쉽게 당할 마음은 없었다. 분명 혈산랑의 검을 빠르다. 능려운 

이라도 피할 수 없는 속도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능려운은 피할 수 없 

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아무리 빨라도, 그 남자에 비한다면……' 

이미 능려운은 혈산랑의 쾌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빠른 검과 수십 

차례 부닥쳐 본 적이 있다. 

능려운은 움직였고, 좌청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피하다니!' 

'피했다!' 

한 가지 상황이었지만 생각은 엇갈렸다. 

좌청은 당황하면서도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당한다. 

좌청이 예상한대로 능려운이 달라붙었다. 능려운이 여운휘에게서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기회를 잡는 것이었다. 이러한 순간을 놓칠 

리가 없다. 

물러서면서도 좌청은 검을 휘둘렀다. 이대로 따라 붙으면 안 된다고 생 

각한 것이다. 능려운은 좌청의 검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안으로 파고들 

면서 어깨로 가슴팍을 쳤다. 

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에 어깨에 몸을 뒤로 떠밀린 좌청은 몸을 틀었 

다. 한 바퀴 돈 좌청의 발이 능려운의 얼굴을 걷어찼다. 

"큭! 

능려운의 입술이 터졌다. 그리고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좌청의 발이 능 

려운의 복부를 걷어찼다. 능려운은 아래쪽으로 손을 내려 공격을 막아냈 

다. 순간 좌청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치며 능려운의 턱이 무릎으로 쳤다. 

빠악! 

능려운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맞는 순간 고개를 뒤로 젖혀 충격을 줄이 

기는 했지만 단 한 번에 정신이 확 나감을 느꼈다. 능려운은 휘청거리다 

가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땅으로 내려서던 좌청의 검이 움직였던 탓이 

다. 

좌청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궁지에 몰렸다가 몰아쳤다. 무릎으로 턱을 

때렸고, 상대방은 비틀거렸다. 이 상태에서 검을 휘두른다면 웬만한 자 

들은 비틀거리다가 당하곤 했다. 그런데 피했다. 제 정신이 아닌 건 분 

명했다. 

머리가 몸을 움직이게 한 게 아니다. 몸이 습관처럼 움직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고 자부하는 좌청 조차도 방금 같은 

순간이었다면 당했으리라. 

방금 일격으로 인해 능려운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인 안에서 쉬 

지도 않고 피가 흘러 나왔다. 입 안쪽으로 큰 상처를 입은 게 분명하 

다. 온통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능려운을 보며 좌청 

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내가, 혈산랑 좌청이라 불리는 이 내가 겨우 낭인에게 두려움을 느낀 

건가?' 

인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 상대를 얕봤다. 처음엔 그저 예상외의 실력을 지닌 게 놀라 

웠다. 그렇지만 그게 다였다. 어느 정도 실력을 지닌 건 인정했지만 위 

협이 될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 이기는 게 당연했다. 상대에게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다. 

좌청은 자만을 버렸다. 여태까지 상대를 경시하던 마음도 버렸다. 

그렇지 않다면…… 죽을지도 모른다. 

"넌 죽을 거다." 

능려운의 말에 좌청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까 전이라면 비웃음이라 

도 날렸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능려운의 말을 그저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던 탓이다. 잘못하면 뼈를 묻어야 한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죽을 거다." 

좌청은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능려운의 말에 대꾸를 했다. 그만 

큼 긴장한 것이다. 서로가 검을 움켜쥐었다. 능려운도 좌청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려운이 먼저 움직였다. 

카앙! 

능려운의 검이 수십 차례 좌청의 검과 부닥쳤다.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 

고 날아드는 공격에 좌청이 밀리는 듯 했다. 

'이 놈, 빈틈이 있다!' 

좌청은 능려운의 검의 빈틈을 찾아냈다. 빈틈이 있다. 역시 급조 된 무 

인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좌청은 수십 차례 검을 받으면서 내내 그 빈 

틈만을 확인했다. 능려운의 공격이 끝난 후 좌청은 확신했다. 

'이겼어.' 

좌청은 공격을 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능려운이 공격해 들어오기를 기다 

렸다. 그리고 능려운은 좌청이 원하는 대로 다시 한 번 검을 움직였다. 

두어 걸음 물러서며 밀리는 듯 한 행동을 취한 좌청의 검이 순간 움직였 

다. 그는 능려운의 검법은 맥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능려 

운의 검법은 한 가지 초식이 끝나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순간 빈틈이 있 

다. 그건 치명적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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