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연습했던 전법이다. 눈을 흐리고 다른 한 명이 기
어가 상대방의 발목을 날려 버리는 작전. 실패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
았다. 그렇기에 냉추는 다른 살수 십여 명의 목숨을 던지면서도 그 작전
을 실행했다.
그런데 실패했다. 그건 곧 그 열 몇 명이 개죽음을 당한 게 된다는 거
다.
'대주는 왜 나서지 않는 거지?'
문득 든 의문이다. 대주가 나섰다면 이 정도 피해는 없었을 거다. 그런
데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주는 나설 마음이 없어 보인다. 마치 죽
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대주가 나서지 않는다면…… 내가 나선다.'
대주에 비하면 한참은 떨어지는 자신이지만 더 이상 자신의 수하들이 죽
어 나가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냉추는 준비해 온 창을 꺼냈다. 살수
가 창을 쓰는 건 꽤나 드물다. 그렇지만 냉추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
은 창술이다.
냉추가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수하들을 스쳐 지나가며 그가 공중으
로 솟구쳤다. 아래쪽에 여운휘가 있는 것을 확인한 냉추는 아래쪽을 향
해 창을 찔렀다.
파팍!
창은 여운휘의 어깨를 스치며 땅에 박혔다.
여운휘는 창을 걷어찼고, 냉추는 창을 이용해 몸을 돌렸다. 여운휘의 공
격을 냉추는 오히려 역이용했다. 회전력을 더한 냉추는 떨어져 내리며
창을 앞으로 뻗었다.
앞에 있던 적을 상대하던 여운휘가 몸을 틀었다. 이번에는 옆구리에 얇
은 상처가 생겼다. 여운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냉추
는 옆으로 움직이는 여운휘를 향해 원을 그리며 창을 휘둘렀다.
앉으며 창을 위로 흘린 여운휘의 몸이 튕겨 올라 냉추의 뒤로 돌아섰다.
"내 뒤로는 가지 못한다."
"후우……"
기회라 생각해서 내뻗은 공격이 별다른 상처를 주지 못했다. 냉추는 여
운휘의 뒤를 바라봤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있다. 저들을 지키기 위해
이 남자는 이리 움직였다.
냉추는 강하게 창을 쥐었다. 절초를 펼치려 한다. 절초가 아니라면 이
자를 이길 방도가 없다.
"간다."
냉추는 창의 중간 부분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여운휘와 어느 정도 거
리가 생기는 순간 그의 손에 잡혀 있던 창이 움직였다.
냉추가 배운 창법인 사련창법(四連槍法)의 최후 초식 십팔회륜참(十八回
侖斬)이 그의 손에서 펼쳐졌다.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사련창
법에서도 최후 초식인 십팔회륜참은 독보적인 초식이다.
냉추의 창이 원을 그리며 여운휘의 검과 부닥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
정한 십팔회륜참이 시작됐다.
타타탕!
왼쪽을 막을라치면 오른쪽에서 들어온다. 그리고 양쪽을 다 막아내는 순
간 가운데 빈틈을 파고든다. 놀라울 정도의 연계기다.
'좋아! 이길 수 있다!'
여운휘가 공격을 막는데 급급하자 냉추는 이길 수 있다 생각했다. 누가
봐도 당장이라도 여운휘가 쓰러질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여운
휘의 눈은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명 빠른 공격이다. 그리고 중간 부분을 잡음으로 인해 크게 원을 그려
야 하는 창의 단점도 없앴다. 하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다.
'좋은 무공이야. 하지만……'
막 열 네 번째 공격을 하려던 냉추는 손에 이는 충격에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가슴을 비집고 여운휘의 검이 지나갔다.
"좋은 창법이다. 하지만 무게가 없어."
"무, 무게가 없다고?"
말을 하는 게 힘들었지만 냉추는 확답을 듣고 싶었다.
여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게가 없었다니…… 몰랐어……"
냉추는 고개를 수그리면서 간신히 몸을 지탱케 했던 창과 함께 쓰러졌
다. 냉추는 죽었다.
살령대의 살수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항시 명
령을 받으며 움직였던 그들이다. 그들은 이 일을 주관하던 냉추가 죽으
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모두의 눈이 대주에게 향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만 물러나자."
대주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아무도 상상도 못한 말이었다. 수하들이 쭈
뼛거리면서 어떻게 행동을 취하지 못하자 공청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중 그 누가 저 자를 죽일 수 있겠느냐! 물러나지 않으면 모두 죽
는다! 우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서는 물러서야 한다!"
쭈뼛거리던 살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운휘의 움직임을 예
의주시하며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공청은 몸을 획 돌려서 나무들 사이
로 모습을 감췄다.
여운휘는 그들이 떠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는 여운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여운휘의 표정을 바라보던 능려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표정이 좋지 않아 보는군요."
"당연하죠. 이용당했으니까요."
"예? 이용이라니요?"
"공청이라는 자, 머리가 좋은 자예요. 지금 그는 여운휘를 이용해서 죽
여야 할 사람을 죽였어요."
능려운은 그제야 대충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우리를 동생을 죽이는 데는 쓰지 못했지만, 그 동생과 관련된 자
들을 죽이는 데 사용했군요. 지금 방금 죽은 남자, 아마 그 남자를 죽이
길 바랬던 거죠. 저 자는 지금 세상에서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렸어요. 아마 지금은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훗날 분명
오늘을 후회하게 될 거예요."
"제 생각도…… 그렇군요."
무표정한 듯 하지만 분명 여운휘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런 여운휘를
계속해서 바라보던 능려운은 곧 시선을 돌려 공청이 사라진 쪽을 향했
다. 지금은 분명 웃고 있으리라. 하지만 능려운은 공청이라는 남자가 왠
지 모르게 안쓰러웠다,.
'공청. 당신은 이 날을 후회하게 될 거야. 저 남자…… 진짜 화난 것 같
으니까.'
전면전(全面戰)
운마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유종이 이 말을 전달한 게 아니었다
면 당장이라도 일장을 날렸을 정도로 운마연은 흥분한 상태였다.
"소금의 판권을…… 가져가겠다고?"
"예. 저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이…… 이이!"
너무나 화가 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소금은 운문세가의 돈줄이다. 매
년 수입의 반 이상을 소금에서 얻었는데 그것을 잃게 된다면 운문세가
는 흔들리게 된다.
왜? 어째서 갑작스럽게 소금의 판권을 회수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
해도 이유가 없다.
"…… 어째서인 줄은 아는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가져간 판권은 악양유가에게 주겠다고 하더군요."
"뭐?"
도대체 악양유가에서 무슨 짓을 했기에 이 오래된 관계를 끊으면서 까
지 그들에게 소금의 판권을 넘긴단 말인가. 운마연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다.
소금의 판권을 잃는다면 운문세가는 망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보다 반 정도 축소 된 세력이면 이 근방의 다른 세가들과 견주어 봐도
크게 나을 게 없다. 그렇게 된다면 주변의 세가들이 동맹을 맺고 압력
을 가해 올 것이다. 그 동안의 분풀이를 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얼마나 큰돈을 주었을까? 얼마든 상관없다. 운마연은 어떻게든 소금의
판권을 되찾아 와야 한다. 설령 악양유가가 낸 돈의 갑절을 낸다 해도
상관이 없다. 소금은 운문세가의 미래다. 지금 당장 아무리 많은 피해
를 본다 해도 소금의 판권을 잃는 것보다야 낫다.
"당장 떠날 채비를 하게. 내 좌우포정사(左右布政使)이신 조무립 어르신
을 찾아가 뵈어야겠어."
조무립은 현재 호남성을 관장하는 자로, 세 개의 포정사사(布政使司)를
관리하는 인물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인물이다.
'그 분이라면 분명 이 난관을 해결 해 주실 수 있을 게야.'
자리에서 일어난 운마연은 서유종에게 말했다.
"어서 우리가 가겠다는 전갈을 드리게. 답신이 오면 바로 갈 수 있게 돈
을 넉넉하게 준비해 두고."
"알겠습니다 가주님. 제가 지금 당장 연락을 취하도록 하지요."
서유종은 알겠다고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오며 한숨을 내뱉었다.
저번 가주가 소금을 산다고 했을 때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던 것이 생각
났다. 여전히 악양유가라는 이름은 서유종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돈을 준 것 같지는 않은데 이번엔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돈을 준거라면 그 갑절이라도 내면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상당히 문제
가 생긴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냐는 거다.
'신경통이 도지겠군. 제길.'
오늘밤도 편히 자기는 그른 모양이다.
서유종이 서찰을 보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답 서신이 왔다. 서유종은
다급한 마음으로 서신을 펼쳤다.
"불래(不來) 무언(無言)?"
오지 말라는 소리다. 할 말이 없으니 오지 말라는 것이다. 좌우포정사라
는 높은 위치에 있는 그가 무엇이 무섭기에 이런 답장을 보낸단 말인가!
서유종은 서찰 끝에 작게 적혀 있는 세 글자를 보았다.
내종종(柰種種).
"아……"
누가 개입을 했는지 몰랐는데 내종종이었다. 황제의 측근인 이 자라면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조무립이라 해도 나설 수 없다.
누가 개입했는지의 궁금증은 풀렸다. 그렇지만 그 궁금증이 풀리자 다
른 생각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왜 그가 개입한 거지? 그리고 그가 개입했다면 황제가 아닌 이상 그 누
구도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
답신이 왔지만 서유종의 머리는 더욱 복잡해지기만 했다. 넘을 수 없는
벽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만 같다. 아니, 차라리 넘을 수 없는 벽이라
면 깨기라도 하겠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방도가 없다.
소금의 판권은 이제 잃은 거다. 내종종과 비견 될 정도의 힘을 가진 자
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힘을 지닌 자라면 내종종과 싸우려
하지 않을 거다. 내종종보다 월등한 힘을 가진 자가 있어야 한다. 하지
만 현 조정에 그런 자는 없다.
내종종이 돈으로 움직였을 리가 없다.
'소금은…… 우리 손을 떠났어.'
서유종은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문제는 소금의 판권을 되찾는 게
아니다. 세가의 앞날을 모색해야 한다.
"가주님!"
"연락이 온 건가!"
마침 가주인 운마연은 자신의 세 아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운마연은 서유종의 등장을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조무립만 만난다면 이
일이 해결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자신을 반갑게 맞아들이는 운마연을
보자 서유종은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장담컨대 자신이 할 말은
가주가 원했던 대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거다.
"가주님 연락이 오긴 왔는데……"
"오긴 왔는데?"
"……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찻잔을 든 운마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방안은 정적으로 가득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운마연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그 분도 해결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조무립 어르신이 알려주셨는데 이
일에 개입된 자는…… 내종종이라고 합니다."
"그 환관 새끼가 왜!"
운마연의 몸에서 생사대적을 앞에 두었을 때나 터질만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눈앞에 내종종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기세다. 그 정도
로 운마연은 화가 치밀었다.
분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운마연은 치솟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그 환관 놈이 어째서 악양유가를 돕는 건지 아는가."
"내종종 정도 되는 자가 돈으로 움직일 일은 없을 테니 다른 이유가 있
는 것 같습니다. 소금의 판권은……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잠시 억눌렀던 화가 배가되어 돌아왔다.
콰앙!
부들거리던 손이 탁자를 부쉈다. 손에 잡혀 있던 찻잔은 이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난지 오래였다. 운문세가의 가주가 된 지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적절한 판단으로 일을 헤쳐 나가 지금의 운
문세가가 있다. 그렇지만 지금 같은 일은 처음이다.
길이 없다. 소금의 판권을 빼앗기게 됐는데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속
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랬기에 더욱 분했다.
처음 자신들에게 이빨을 들이밀었을 때 어땠는가. 비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랬는데 상황이 어떻
게 됐는가. 그토록 비웃던 자들에게 물려 버렸다. 그것도 너무나 깊이
물려 회복 될 수 없는 상처를 남겨둔 채.
"얼마 전에 사들인 소금도 문제입니다."
악양유가를 흔들리게 하겠다고 엄청난 소금을 사들였다. 그런데 그 소금
이 오히려 지금은 짐이 되어버렸다. 팔 수도,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다. 계륵(鷄肋)이다.
"소금이 왜."
"이제 저희는 소금을 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저 소금을 썩힐 수
도 없고……"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악양유가에 팔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 안 돼!"
그건 안 된다. 악양유가에게 팔라니. 분명히 제값도 받지 못할 게 분명
하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마음은 없다. 운마연은 결코 악양
유가에 소금을 팔 생각이 없었다.
서유종은 흥분해서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가주의 모습이 못내
한심해 보였다. 지금 팔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에 세가를
운영하기 위해 돌릴 돈도 부족한 형편이다. 소금을 싼값에라도 넘기면
비록 손해를 본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돈을 들어올 것이다. 창고에 처
박아 두고 썩힐 바에는 그게 낫다는 것을 흥분한 가주는 생각지도 않고
있다.
"아버님, 소금을 팔아야 합니다."
"지금 소금을 팔면 그 놈들에게 제 값도 받지 못할 게 분명한데 어째서
팔라는 말이냐."
운마연은 다소 누그러트린 어조로 물었다. 그건 지금 그 말을 한 것이
운마연의 둘째 아들인 운금종이었던 탓이다. 운마연은 자신의 세 아들
중 둘째인 운금종을 가장 신임했다.
큰아들은 운산천은 무공은 뛰어나지만 너무 머리가 없다. 막내인 운중행
은 특별히 뛰어난 것도 없으면서 바람만 잔뜩 들었다. 둘째인 운금종은
머리가 있다. 그리고 무공 또한 큰아들인 운산천에 비해 부족하지 않
다.
"아버님 전 반대입니다. 지금 소금을 팔면……"
"시끄럽다! 너에게 물은 게 아니다! 그래, 왜 지금 소금을 팔아야 한다
는 거냐."
운산천의 말을 눌러버린 운마연은 대답을 재촉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운금종이 말했다.
"제가 알기로 지금 세가를 운영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곧 겨울입니다. 들어갈 돈은 많은데 지금 세가에 있는 돈만으로 움직였
다가는 망할 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손해를 본다고 해도 소금은 파는
게 나을 듯 합니다."
"하지만 지금 소금을 팔면 그들에게……"
"어차피 가지고 있어 봤자 입니다, 아버님. 소금은 이미 저희 손을 떠났
습니다."
운마연은 눈을 감았다.
집착이 긴 것은 좋지 않다. 그건 잘 안다. 하지만 운문세가 수입의 반
인 소금이다. 집착이 가지 않을 수는 없다.
운마연은 운금종의 말대로 손해를 보더라도 소금을 팔아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
"아버님 이번이 끝이 아닙니다. 소금의 판권을 되찾을 방법이 있으니까
요."
"되. 되찾을 방법이 있다고!"
"물론입니다. 저희가 관부에서 결정한 일에 끼여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
만 그 반대이기도 합니다."
"반대라니?"
"관부는 저희의 움직임에 대해 관여하지 않습니다."
운마연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유종은 운금종의 말을 이해했다.
평소에도 머리가 좋은 자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건 서유종도 생각지 못
한 생각이다.
관과 무림은 서로에 관여하지 않는다. 운금종은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었
다.
"악양유가를 치는 겁니다."
"아……"
운마연은 그제야 자신의 둘째 아들은 운금종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
다.
"악양유가가 사라지면 소금의 판권을 저희에게 돌아올 겁니다."
운마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엔 함박만한 웃음이 피어있
었다.
그렇다. 악양유가가 사라지면 된다. 관에서는 다시 소금을 판매할 세가
를 찾을 거고, 당연히 그 판권은 운문세가가 다시 차지하게 될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양유가가 사라져야 한다. 이제는 결코 두 세가는 양
립할 수 없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내가 한 말을 놓치지 말고 잘 들어라. 우리는 소
금을 파는 즉시 그 돈으로 무인들을 사들인다. 그리고 아는 한도 내에
서 우리의 일에 합류할 무인들을 모두 모아라!"
잠시 뜸을 들이던 운마연의 입이 열렸다.
"악양유가와 전면전(全面戰)이다."
거래(去來)와 무력(武力)
삼일은 재미있는 자다. 조그만 키에, 그렇다고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것도 아니다. 작은 키로 웃음을 흘릴 때는 소름이 돋는다. 그가 무공을
제대로 익혔다면 아마 그 웃음 하나로 웬만한 자들은 오금이 저려 주저
앉을 게다.
악양유가의 장원을 살 때 관리인으로 딸려 준 세 명 중 가장 능력이 없
어 보인다. 그렇지만 풍운조는 삼일의 재능을 알아봤다.
삼일은 천재다.
정보를 분석하는 데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
그는 난쟁이 같은 키와 좋지 않은 가정 환경 탓에 항시 주변에서 구박
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 탓에 삼일은 눈치가 빠르다. 그리고 주변이 돌
아가는 정세를 읽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네댓 명이 달라붙어 오일 동안 일을 하는 것 보다 삼일 하나가 하루 동
안 처리하는 정보가 더 정확하고 양도 많다.
풍운조는 삼일을 보며 항시 이렇게 말했다.
"넌 검을 쥐었다면 천하에서 알아주는 검객(劍客)이 되었을 테고, 붓을
잡았다면 천하에서 알아주는 문인(文人)이 되었을 게야."
"아이고, 어르신도."
삼일은 그리 웃으며 넘겼다.
그렇지만 풍운조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다. 삼일의 집중력은 진정으로
감탄할 만 했으니까.
운문세가에서 서찰이 날아왔다.
소금을 거래하자는 내용이다. 풍운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이미 운문세가에서 막대한 양의 소금을 사들였다는 것을 들었
던 탓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거라고 예상을 했다고 해야 옳
다.
"가주,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뭐가요?"
"가주와 직접 만나 거래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 뭐 뻔한 계책이 보이
는 구려."
이런 일에 가주끼리 만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서로의 얼굴을 본다는
게 고역인 마당에 무엇 때문에 가주끼리 만나겠는가.
가주를 잡으려는 거다. 심지어는 죽이려 들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운문
세가는 소금을 빼앗기고는 더 이상 호남제일가로 유지 될 수 없다. 심하
면 다른 세가들의 공격을 받아 있으나 마나한 세가가 될지도 모르는 일
이다.
그들로서는 물러 설 수 없을 테니 무슨 일을 벌인다 해도 이상할 게 없
다.
풍운조는 그들이 택할 수법으로 두 개를 꼽았다.
전면전과 기습.
우선 전면전은 피해를 볼 테니 기습을 먼저 행할 확률이 높다. 그렇지
만 악양유가 내부에 있는 가주를 공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
나 저번 살령대 대원들도 악양유가에 침입했다가 죽어 나간 적이 있다.
그들은 악양유가 내에 가주가 있다면 죽이기 힘들 거라고 판단했을 거
다. 그럼 어떻게 행동해야겠는가? 말하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진다. 가주
를 악양유가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기습에 성공할 수 있을 거
라 그들은 생각한 거다.
"가도 상관은 없지만…… 굳이 피를 볼 이유는 없겠죠?"
"나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곧 전면전은 벌어지는 건 변함이
없을 듯 싶소이다."
이미 운문세가가 사방으로 무인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을 접했다. 그들
은 숨기려 했겠지만 곳곳에 퍼진 정보원들의 눈까지 모두 속일 수는 없
다. 그건 곧 운문세가의 행동이 그만큼 노출되었거나, 악양유가의 정보
력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알아요. 아마 지금 소금을 사는 돈도 그들의 병력을 모이는 데 쓰이겠
죠."
"소금을 사 들이겠습니까?"
"사야죠. 저희가 비록 외부에서 소금을 들여왔다고는 하지만 그 양이 넉
넉한 편은 아니잖아요."
"그럼, 가주 대신 다른 누가 가야 할 텐데……"
"서운철을 보내죠."
"아니, 삼일이 나을 듯 하오. 삼일을 보냅시다."
유설린은 잠시 생각에 빠지기라도 한 듯이 아무 말도 없었다. 삼일을
못 믿어서가 아니다. 삼일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혹시나 위험해 질
까 유설린은 걱정이 앞선 것이다.
"제 한 몸 정도는 간수할 수 있는 놈이오. 걱정 않으셔도 될 거요."
"풍 노야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삼일을 보내요."
"그럼 내가 가서 그에게 간단한 말을 전하도록 하겠소."
풍운조는 가주의 거처에서 나갔다.
풍운조가 나가고 나서 유설린이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여운휘에게 물었
다.
"운휘는 누굴 보냈어야 한다고 생각해?"
"삼일."
"왜?"
"서운철은 여러 가지 뛰어나긴 하지만 담력이 없어. 상대의 기세에 잘
위축되지. 이번 소금 건은 상대방을 눌러야 해."
"서운철이 담력이 다소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무공을 익혔잖아. 오히
려 그러면 그를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일반적으로 그렇다. 유설린이 나가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쪽도 준비해
둔 무인들을 보내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그들은 이 소금을 가능한 돈
을 받아서 팔려고 할거다. 그 만큼 뛰어난 자가 올 거다. 무공을 전혀
모른다면 불리 할게 뻔하다.
"서운철 정도 되는 어중간한 자가 가는 건 오히려 좋지 않아. 삼일은 담
력이 있지.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데도 탁월하고. 무공을 모르면
오히려 건드리기도 그렇고 말이야. 삼일이라면 상대방이 무공으로 협박
을 해도 웃어 넘길 위인이야. 여러 가지 조건을 봐도 삼일이 나."
"뭐, 운휘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게 맞겠지."
"운문세가를 무너트리고 나면 바빠 질 거야."
바빠 질 거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호남제일가가 될 테니 이래저래 가야
할 곳도 많아질 거다. 그리고 그때부터가 악양유가가 도약할 순간이다.
호남제일가를 넘어서야 한다. 천하제일가는 무리라 해도 오대세가에서
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만한 힘을 모은 후에……
"모든 게 성공했을 때, 우리는 마교로 돌아간다."
한편 풍운조는 집무실에 들어앉아 정보를 불리하고 있는 삼일을 찾아갔
다.
"삼일."
"어르신 오셨습니까?"
악양유가 내에서도 풍운조와 삼일은 매우 사이가 좋다. 실제로도 삼일
은 풍운조를 자신의 아버지처럼 모셨다. 그러한 마음을 알았던 탓에 풍
운조 또한 삼일을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다.
"지금 뭐하고 있느냐."
"요즘 이래저래 정보들이 많이 날아들어서 말입니다. 아래쪽에서 몇 번
이나 치고 올라오는데도 이토록 일거리가 많습니다. 전 쉬는 날 좀 없습
니까? 다른 사람들을 보면 허구한날 노는 구만 난 도저히 쉬는 날이 없
으니……"
"이번 일이 끝나면 며칠 푹 쉬게 해 줄 테니 그때까지만 수고해라."
운문세가와의 일이 끝날 때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다. 운문세가와
의 일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삼일은 꼭 필요한 자다. 풍운조는 이런저
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곳에 온 목적을 털어놓았다.
"일이 생겼다."
"일이요?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소금을 사러 가야 하는데 네가 가야겠다."
특별한 설명이 없었는데도 삼일은 풍운조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
다. 정보를 담당하는 그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아이고, 그런 큰일을 어찌 제가 하겠습니까. 취소해 주시지요, 어르
신."
"이 놈아, 취소해 달라면서 왜 그리 눈을 빛내는 게냐."
"누가 눈을 빛냈다는 말이십니까. 전 그저 재미가 있겠다 싶은 것뿐이
지 할 마음은 없습니다요."
"장난치지 말고 어서 내 말이나 새겨듣거라."
풍운조는 서신의 내용부터 말해주며 가주와 이야기했던 것을 간략히 설
명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삼일의 눈은 반짝거렸다.
"소금의 가격은 최대한 떨어트려. 우리가 주는 돈은 그들의 칼이 될 게
야. 칼이 무디면 무딜수록,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에겐 유리하겠지."
"걱정 붙들어 매고 계십쇼. 제가 아주 헐값에 사들일 테니."
"그래, 너라면 할 수 있을 게다."
풍운조는 진정으로 그리 믿었다.
"이거야 원 재미있는 일을 하게 생겼군요."
"그 일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마 네 놈 뿐일 게다."
"큭큭, 놀리지 마십쇼."
풍운조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만날 날짜까
지 적어서 보냈다.
거래 일시가 정해졌다. 이십사절기 중 눈이 가장 많이 내릴 무렵이라는
대설(大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