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추는 여운휘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외쳤다. 지금 순간적으로 냉추
는 여운휘의 목숨을 위협했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지금이 기회
다. 잘못하면 이 후에 기회는 없다.
살수들이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능려운이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여태까지 방관만 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 없다. 살수와는 싸워 본 적이 없다. 그들의 빠른 걸음
과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암기는 분명 위협적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이 남자에게 계속해서 신세를 질 순 없지.'
능려운은 여운휘를 도우려고 마음먹었다.
"넌 가주를 지켜."
여운휘는 돕기 위해 나서려는 능려운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가주다. 나도 지금 가주를 지키며 싸우고 있지만 만약
이란 게 있다. 그리고 네가 맡은 한 쪽만 지켜 준다면 그만큼 나도 수월
해 질 거다. 할 수 있나?"
"물론이오!"
여운휘는 단순히 적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가주의 몸에 날아드는 암
기도 그는 일일이 쳐내면서 싸웠다.
유설린도 검을 꺼냈다. 비록 제대로 돕지는 못하겠지만 짐이 되고 싶지
는 않았다. 여운휘의 짐을 하나라도 덜어주려는 것이다.
살수들은 조용했다. 그 많은 수의 인원이 움직이는데 들리는 소리는 나
뭇잎 스치는 정도가 전부다. 그에 대항하는 셋은 거의 등을 맞대다시피
하고 돌고 있는 살수들을 바라봤다.
"기회가 나면 죽여."
"응."
"실패했다 싶으면 재빠르게 물러나고. 저들은 살수야."
여운휘가 유설린에게 충고했다. 무인과 살수는 다르다. 무인은 싸우는
자고, 살수는 죽이는 자다. 무인에게 공격이 실패하면 조금 맞겨루면서
기회를 보면 된다. 그렇지만 살수는 아니다. 그들에게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 살수와는 거리를 벌
릴수록 좋다.
여운휘의 검에서 하얀 기운이 뻗어 나왔다. 그리고 그 기운이 앞쪽을 향
해 날았다.
강기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늘 살수들은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몸을 움직
였다. 피하지 못한 살수는 갈기갈기 찢겼다. 재수가 없는 자는 터져 나
온 나무 파편에 몸의 일부가 찢겼다.
냉추는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살령대가 지니고 있는 여운휘의 정보는 극히 미미하다. 그들이 알고 있
는 건 무림맹에서 하북팽가의 팽산위를 꺾었다는 것뿐이다. 그 외에 여
운휘에 대해 알려진 건 아무것도 없다.
이런 남자가 여태까지 왜 소문이 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 정도
라면 어디에 가도 빠지지 않을 고수다.
'도대체 저 자는……'
용기를 얻어 움직이던 살수들은 다시 한 번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
런 위력의 강기를 몇 번만 더 쏘아낸다면 이 안에서 살아 날 수 있는 자
는 드물 것이다. 냉추는 어떻게든 흐름을 바꾸어야 했다.
그런데 방법이 없다. 도망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나아갈 수도 없
는 상황이다.
그때 방 안에 있는 한 늙은 여자가 문을 통해 비췄다. 그리고 그 순간
냉추는 승리를 자신했다.
'이 싸움은 끝났어.'
늙은 여자는 소매를 입가에 가져다 대고 기침을 토했다. 그리고 그 순
간 소매에서는 셀 수도 없을 정도의 암기가 터져 나갔다. 그것은 여운휘
의 뒷머리를 노린 채 날아들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던 능려운은 암기가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리고 그 암기가 터져 나오는 순간 외쳤다.
"이봐! 위험해!"
외침이 터지는 순간 이미 그 많은 암기들은 여운휘의 뒷머리에 바짝 닿
아 있었다. 막 머리를 꿰뚫으려는 순간 여운휘의 몸이 움직였다.
촤악!
여운휘의 몸이 미끄러지다 시피 움직였다. 미끄러지는 몸과는 다르게 손
은 공중으로 향했다. 여운휘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부르르 떨었다.
카카캉!
검이 요동쳤다. 낮추었던 몸이 폭발하듯이 튀어 올랐다. 그 순간 날아들
던 암기들은 모두 땅으로 떨어졌다. 모두가 말을 잃었다. 심지어 소리
를 지른 능려운마저도 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멍하니 여운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도 여운휘는 조금의 당황스러운 감정도 내비치
지 않았다. 여운휘는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려 뒤를 바라봤다.
'알고 있었어. 저 늙은 여자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여운휘는 자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했던 진고산을 죽이고 누워 있던 나이
든 여인에게 다가갔다. 능려운이 조심스럽게 그 늙은 여인의 혈도를 만
졌고, 혈도는 점혈 된 상태였다. 그래서 믿었다.
혈도를 제압 당했었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살려줬다. 그게 실수였다.
한 수 앞까지 바라본 계획이었다. 만약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일부로 혈
도를 점혈 해 둔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편이라는 의심은 받지 않았을
테니까.
분명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여운휘는 어떻게 안 것일까?
"이제야 꼬리를 내밀었군. 늙은 여우."
기침을 토하던 늙은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이 없어서 제대로 움
직이지도 못했던 아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 진고산처럼 나도 실수를 한 건가?"
"아니, 늙은 여우 당신은 너무 완벽했어. 그래서 걸렸지."
"완벽해서 걸렸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완벽하다면 걸리지 않았어야 한다. 그런데 걸렸
다. 그건 곧 완벽하지 않았다는 소리가 된다. 늙은 여인은 여운휘의 말
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걸린 거지?'
완벽했기에 걸렸다는 여운휘의 말은 애초에 새겨듣지도 않았다. 늙은 여
인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자신의 몸 상태를 훑었다.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늙은 여우, 당신의 행동은 너무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어. 마치 짜 두어
둔 각본처럼. 물론 완전하게 믿지 않은 건 아니야. 다만 의심을 가졌
지. 그리고 저 앞에 있는, 저 놈의 표정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여운휘는 냉추를 가리켰다.
냉추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문가로 늙은 여인이 보이는 순
간 자기도 모르게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실마리를 주었던 거다. 순
간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드러났다.
'실수를 했군.'
늙은 여인은 자신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찌이익!
종이가 찢어지는 것처럼 늙은 여인의 얼굴이 찢어졌다. 늙은 여자가 남
자로 변했다.
'역시 인피면구.'
암기를 날릴 때부터 짐작했다.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피면구다.
여운휘는 의심 탓에 늙은 여인의 전신을 자세히 살폈었다. 그런 그가 가
까이서 봤을 때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재미있는 놈이군."
목소리도 변했다. 힘이 없던 목소리는 어느새 남자답게 변한 상태였다.
체형은 작았지만 풍기는 기도만큼은 그 누구도 범접(犯接)하지 못할 정
도로 매서웠다.
"난 살령대의……"
"혈리추검(血釐追劍) 공청."
"…… 허, 그것 참."
혈리추검 공청!
'저, 저 자가!'
혈리추검 공청이라는 말에 능려운은 놀랐다. 호남에서 그 이름을 무시
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청, 호남에서만큼은 사
신(死神)이라고 불리는 자다. 그의 암기는 놓치는 자가 없고, 그가 목표
로 한 상대 치고 산 자도 없다.
그는…… 살령대의 대주다.
"암기를 날렸을 때부터 알았다."
"……?"
"한 손으로 이렇게 많은 암기를 던질 수 있는 자라면 살령대 내에서도
대주인 공청 밖에 없지."
"눈썰미 하나 뛰어나군."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눈썰미 하나는 대단한 자다.
'아니, 내 기습을 피했으니 무공도 대단하겠군.'
대주 공청의 등장에 살령대의 살수들은 다시 용기를 얻었다. 방금 전까
지는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대주가 왔으니 이야기가
달라진다.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음!"
이번은 진정으로 놀랐다. 공청은 자신의 마음을 읽힌 것 같아 기분이 좋
지 않았다. 젊은 남자의 눈이 자신의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공청이 이곳에 온 것은 자신의 양아들인 여험을 죽인 탓이 아니다. 대외
적으론 그리 발표했지만 속내는 그것과는 전혀 무관했다. 공청에게 양아
들 여험의 죽음은 그다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공청이 여운휘의 옆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유설린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악양유가의 가주요?"
"네, 제가 악양유가의 가주입니다."
"소문보다 더 아름다운 외모요."
"칭찬은 감사히 받아들이지요. 그나저나 저에게 하실 말씀이 계신 듯 한
데 어서 하시지요."
공청은 냉추를 바라봤다. 냉추는 대주의 눈에서 물러나라는 신호를 읽었
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물러나라니……
대주가 저들에게 볼 일이 있어 만나자고 했다는 것도 그에겐 금시초문이
었다. 다만 양아들인 여험의 복수를 하려는 줄 알았는데…… 대주에겐
자신에게도 말하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있다.
"냉추, 못 알아들었나?"
"…… 아닙니다. 모두 물러서라! 반경 십 장 뒤로 물러선다!"
냉추의 한 마디에 살령대의 살수들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거리가 냉추가 말한 대로 십 장 정도 떨어지기 전까지 공청은 입을 열
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공청이 진지한 얼굴로 말문을
텄다.
"저들은 내가 이곳에 온 것이 양아들인 여험의 죽음 때문인지 알고 있
소. 그렇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라 저들을 물릴 수밖에 없었소. 양해하시
오. 이 사실은 세어 나가면 안 될 일이요."
"수하까지 물리면서 제게 할 이야기가 뭐죠?"
"청부요."
살수가 청부를 한다고 했다. 누가 듣는다면 코웃음을 치며 믿지 않을 거
다. 그것도 평범한 살수도 아닌 살령대의 대주인 혈리추검 공청이 그랬
다면 더욱 그랬다.
"청부…… 요?"
"그렇소, 청부요."
"당신이 남에게 청부를 한다니 이상하군요."
"내가 죽일 수 없는 자요."
"당신이 죽일 수 없는 자를 저희가 어떻게 죽이죠?"
무공이라면 분명 여운휘가 앞선다. 그렇지만 사람을 죽이는 능력만으로
치자면 공청도 떨어지지 않을 거다. 더군다나 그에겐 숙달 된 살수들이
있다. 어느 모로 보나 공청이 할 수 없는 일을 악양유가가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죽여야 할 자는…… 내 동생이요."
"친동생을 죽이라는 말인가요?"
"그렇소."
그제야 유설린은 왜 공청이 죽이지 못하는 지 알 수가 있었다. 공청은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을 퍼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수하들을 사용할 수도 없다. 같은 살령대의 소속이라
면 이미 서로 알고 아는 사이일 게다. 소문은 퍼지게 될 거다.
"왜 그런 일을 우리에게 시키는 거냐. 그딴 일이라면 운문세가에……"
"그럴 순 없어요. 운문세가는 살령대와 연줄이 있으니까. 만약 가주가
다른 마음이 있다면 저 사람은 죽어요. 그리고 가주가 저 자의 편을 든
다 해도 그 누군가가 말을 하지 않으라는 보장도 없지요. 그래서 저 사
람은 우리를 택한 거죠."
능려운의 말을 가로챈 유설린은 세세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말 대로다. 공청은 자신의 동생을 죽여야 했다. 하지만 죽일 세
력이 없다. 그러던 차에 악양유가의 힘을 봤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자신
의 동생을 죽이고도 남는다. 더군다나 이들이라면 뒤탈도 없을 듯 했다.
우선 그는 악양유가의 힘을 실험해 봤다. 어설프게 하다가 잡히게 되면
곤란하다. 그건 안 하니만 못하다. 이들의 실력은 충분했다. 아니, 다
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저기 있는 저 한 남자로도 충분했다.
"이 일을 해준다면 이후부터는 악양유가를 도와주겠소. 죽여야 할 사람
이라면 모두 죽여 줄 테고, 돈도 지원해 줄 수 있소. 이 정도면 괜찮다
고 생각하는데……"
유설린의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운휘가 나섰다.
"거절한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공청은 여운휘를 보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비록 무공 실력은 대단하지
만 저 여자의 수하로 보인다. 수하인 자가 자신의 주인이 이야기를 하
는 도중에 끼어 들어 자신의 의견을 내놓다니, 그것도 반대의 의견을!
"미안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겠네요."
"…… 왜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불리한 조건을 내건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저쪽에
선 유리한 일이다. 그런데 기회를 차버린다. 왜? 도대체 이유를 알 수
가 없다.
"자기 양아들을 죽인 자를 보면서도 자신의 이득이나 먼저 챙기려는 자
와 거래할 마음은 없다."
"큭큭, 뭔가 모르는 모양인데 거절하면 너흰 죽어. 너희는 내가 하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
"그렇게 된 것 같군. 거래는…… 끝났다."
거래가 실패했다.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패한 것은 이외다. 동생
을 죽일 일은 미뤄지게 됐다. 하지만 지금 확실히 하나를 해결해야 했
다.
이들을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밀이 세어 나갈지도 모른다.
거래가 끝난 이상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분명 저 남자는 강하다.
하지만 자신까지 움직이게 된 이상 이길 수 있다.
"마지막이다.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다."
"그럼 죽어."
공청의 양손에서 새하얀 비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엔 위협을 하기 위해 날린 게 아니다. 죽이기 위해 날린 거다. 암기
도 아까와 달랐다. 아까는 비수만 튀어나온 방면에 이번은 각양각색의
암기들이 날아들었다.
'치면 안 돼.'
치면 안 된다. 저 중에서 어떤 암기는 치는 순간 무수히 많은 비침을 토
해낼 것이다. 여운휘는 유설린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능
려운은 여운휘가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이미 물러선 후였다.
땅에 떨어진 어떤 물체에서 비침이 터졌다. 아슬아슬하게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여운휘는 유설린을 뒤에 세웠다.
공청의 이번 공격은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
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상황을 파악한 살령대의 인물들이 다시 이쪽으
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능려운."
"왜 부르시오."
"가주와 함께 조금 더 뒤에 있어."
"혼자 상대하겠다는 거요?"
"그래."
"그건 무리요!"
여운휘는 손을 들어 한 쪽을 가리켰다.
"저 쪽으로 가 있으면 뒤로 돌아가서 공격당할 일도 없고, 암기가 터져
나갈 수도 없을 거다. 앞은 내가 막는다. 넌 만약을 대비해 가주를 지켜
라."
능려운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포기했다. 말을 들은 상대가 아니다. 한다
고 했다면 하는 남자다. 여기서 입 아프게 다시 말하는 것은 시간을 죽
이는 행동이 될 뿐이다.
능려운은 가주와 함께 여운휘가 가리켰던 곳으로 움직였다. 집을 방패
로 쓰고 있어서 암기에 당할 위험은 없어 보였다.
공청은 알면서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차피 여운휘만 죽이면 쉽게 죽
일 수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히려 힘을 세 개로 분산하는
것 보다 한 명을 먼저 해결 한 후 나머지 둘을 상대하는 것이 낫다.
"죽여. 한 놈도 남김없이."
공청의 명령이 떨어지자 냉추가 손짓했다.
살수들의 몸에서 살기가 터져 나왔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굳이 기척
을 숨길 이유를 느끼지 못한 탓이다. 살기는 매서웠다. 몸이 굳을 정도
의 매서운 살기였거늘, 여운휘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와라."
살령대의 살수들은 동그랗게 섬으로 인해 도망칠 길을 없앴다. 몸으로
만든 벽이다. 이 길을 뚫으려면 적지 않은 피를 흘려야 할게 분명했다.
사십 대 일에 가까운 상황, 백이면 백에게 물어도 대답은 똑같으리라.
그 누구의 눈에도 여운휘가 이길 거라고는 보이지 않을 거다. 허나, 여
운휘를 아는 자가 본다면 대답을 달라진다.
'저들을 이긴 다는 건 분명 불가능한 일이야. 그렇지만 저 남자라
면……'
능려운은 확실히 어느 쪽이 이길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저기 있는
것이 저 남자가 아니었다면 능려운은 대답할 수 있었을 게다.
능려운은 그제야 자신이 저 남자의 이름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
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이름을 모른다. 가주가 운휘라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성은 모른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남자다. 그런데 그런 남자한테서 이 정도로 믿음
이 나올 수 있다니……
여운휘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먼저 움직였다.
진기가 용천혈(湧泉穴)을 휘감고는 양손으로 퍼져 나갔다. 여운휘의 양
손에서 장력이 뿜어졌다.
콰앙!
피했다. 단 한 사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런데 몸이 굳었다. 거대
한 나무가 마치 도끼에 수백 번 찍힌 것처럼 단숨에 넘어갔다. 다행히
넓게 퍼져 있던 탓에 피할 수 있었지만 뭉쳐 있다가 저 장법에 맞았다
면?
'저게 장법이란 말인가!'
냉추는 이 자를 만난 후부터 자꾸만 놀라는 자신을 발견했다. 벌어진 입
을 닫았다. 냉추는 더욱 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적당하게 상대했다가
는 많은 피를 보게 될 거다.
"전력을 다하라!"
냉추가 외침과 동시에 손에 있던 짧은 비수를 던졌다.
탕!
여운휘가 검으로 쳐냈다. 그것이 신호였다. 냉추가 살수들을 바라보며
일갈을 내뱉었다.
"필살(必殺)!"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살령대의 살수들이 움직였다. 필살은 살령대 내
의 최고의 명령이다. 상대가 죽던, 자신이 죽던 둘 중 하나다. 누군가
가 죽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말라는 명령이다.
그 명령이 내려진 이상 앞에 있는 자는 철천지원수다. 이자를 왜 죽여
야 하는 지 따위의 생각을 할 여유는 없다. 기회를 만들어야 하고, 기회
가 생기면 쑤셔야 한다. 망설였다가는 죽는다.
스슥!
여운휘에가 다가든 다섯 명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사이 한 명이 기척을
죽이고 땅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땅과 바짝 붙어 있었지만 소리는 들리
지 않았다. 제대로 훈련 된 일급 살수다. 풀과 닿는 소리마저 죽일 정도
라면 어디 가도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능력 있는 자다.
'세 발자국.'
평범한 보폭으로 따지자면 다섯 발자국 정도의 거리가 남았다. 잠시 숨
을 가다듬은 그는 다시 천천히 다가갔다.
'둘…… 하나.'
소리도 없이 다가감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무척 빠르다.
여운휘의 검에 살수들 몇이 쓰러졌지만 다른 자들이 그 틈을 채웠다. 이
제 막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깝다. 그렇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
다. 한 사람이 더 죽더라도 확실히 해야 한다. 지금 죽이지 못한다면
한 사람이 아니라 몇십 명이 더 죽을 지도 모른다.
'단숨에 발뒤꿈치를.'
자신이 이곳까지 다가오게 하기 위해 죽은 살수의 수는 언뜻 봐도 열이
넘는다.
'실패 할 수 없지.'
자연과 동화라도 된 듯이 미동도 없던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기회였다.
허리에 놓여 있던 손이 움직였다. 목표는 상대의 발목이었다. 허리춤에
서 빠져 나온 단도가 나오기가 무섭게 여운휘의 발목을 향해 움직였다.
그 누구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어?'
갑작스럽게 손이 허하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은 것처럼. 잠시 자신의 손
을 바라보던 살령대의 살수는 원래 있던 것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깨
달았다. 손이 없다. 별반 고통도 없이 잘렸기에 그는 이것이 사실이라
고 생각되지 않았다.
'꾸, 꿈이겠지?'
그런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이 잘려 버린 손목에서 피가 솟
구쳤다.
"아악!"
그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