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37)

"배상을 안 하신다면 관가에 넘기는 수밖에 없죠." 

"관가에 가기 전에 과연 너희가 이곳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 

하나?" 

"없다면…… 제가 이리 뻣뻣하게 나갈 수 있을까요?" 

운마연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 

이 여자의 말 대로다. 무엇이 있으니 이 여자가 이토록 뻣뻣하게 대응 

할 수 있는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굽히고 들어와 훗날을 도모했을 것이 

다. 이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것, 그건 믿을 수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 

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이상해 보이는 점이 없다. 

"믿는 게 있는 모양인데 너무 과신(過信)하는 것 같군." 

운마연은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들이켰다. 기분이 씁쓸했다. 왠지 모르 

게 자신이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 탓이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술 

이 뱃속에서 요동쳤다. 뜨거워졌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좋다. 아들놈은 잘못이 있으니 대가를 치르고 데려가지. 그렇지만 너희 

들이 특산물이나 종이를 팔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다."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그 말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그러기 싫다면 그렇게 만드는 수밖에." 

이들이 그러지 않겠다고 해도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힘을 쥐 

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아닌가. 물론 말로 모든 것이 해결이 됐다면 훨 

씬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운마연은 물러날 생각 

이 없었다. 

반드시 뭉개 놓고야 마리라. 피를 봐야 한다면 확실히 보겠다. 

싹은 자라기 전에 잘라내야 한다. 운마연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건 그렇다 쳐도 한 가지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있지." 

운마연은 여운휘를 바라보았다. 여운휘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물론 여운휘의 태도가 건방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운마연이 

여운휘를 노리는 것은 그 탓이 아니다. 그는 본보기가 필요했던 것이 

다. 더불어 악앙유가 가주의 한 손을 잘라내려는 의미도 있었다. 

"넌 그냥 넘어갈 수 없지. 감히 호위무사 주제에 나에게 건방지게 군 죗 

값은 받아야겠지?" 

"어떻게 받아야 하는 지 모르겠군." 

"내가 호명한 자와 비무를 벌여라." 

간단하게 자신의 손 하나를 잘라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운마연은 그렇 

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화만 돋굴 뿐 자신들에게 공포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보이려는 것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다. 

"상관없소." 

"분명 상관없다고 했으렷다? 쌍백(雙柏) 나와라!" 

한 쪽에 서 있던 무인들 중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나왔다. 

쌍백의 이름을 들은 능려운의 얼굴에 한줄기 놀람이 스쳤다. 쌍백은 능 

려운도 많이 들어본 자들이다. 그들은 산서(山西)에서 이름을 떨치는 고 

수들이다. 둘은 쌍둥이 형제이지만 검법은 극과 극이라 볼 수 있다. 

'저 자들이 왜 이곳에……' 

놀랄 수밖에 없다. 저들은 무척이나 유명한 자들이다. 단 하룻밤만에 

백 명을 죽인 일은 산서에서는 아직도 입에서 입으로 회자(膾炙)될 정도 

다. 그런 두 명이 운마연의 옆으로 다가갔다. 

'큰일이군. 저 둘은 엄청난 자들인데.' 

걱정스러운 눈으로 능려운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그리고 여전히 침착한 

여운휘의 눈을 보는 순간 능려운은 걱정을 거두었다. 그렇다. 저 둘이 

엄청난 자들이라는 것은 변함 없다. 허나, 능려운이 느끼기에 그들의 앞 

에 있는 저 남자는 그 이상이다. 

'저 놈이 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지.' 

능려운은 여운휘에게 무공 책을 받았을 때 그가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절대지지 않는다 했지. 이번에도 그 모습을 보여봐라.' 

여운휘는 유설린을 뒤에 있는 풍운조에 맡기고 가운데로 나갔다. 이미 

양쪽에 놓여져 있던 상은 뒤쪽으로 밀린 후였다. 넓은 연회장 안에는 

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호흡소리마저도 크게 들릴 정도로 고 

요하다. 

여운휘는 검을 꺼내 들고 천천히 앞에 있는 두 남자를 바라봤다. 쌍둥이 

라 해도 체형까지도 완벽하게 일치한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이 앞에 있 

는 쌍백이 그리했다. 

여운휘가 가만히 있자 쌍백이 먼저 움직였다. 

파팡! 

두 명의 손바닥에서 각기 다른 느낌의 장력이 터져 나왔다. 한 명의 장 

력은 음유한 기운을 뿜었고, 다른 한 명의 손에선 뿜어진 장력은 양강 

의 기운이 지니고 있었다. 

여운휘의 몸이 낮게 숙여 지더니 공중으로 솟았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쌍백이 여운휘에게 달려들었다. 한 명의 검이 하늘 

을 향해지며 여운휘의 목덜미 쪽을 노렸다. 동시에 다른 한 명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요동을 치며 앞으로 뻗어졌다. 

여운휘는 목덜미를 향하는 검을 쳐내며 뒤로 착지했다. 그 순간 기다렸 

다는 듯이 앞으로 찔러오던 검이 여운휘의 가슴 근처에 다가왔다. 

'끝이군!' 

검이 여운휘의 등뒤로 나타난 것을 보고 운마연은 웃음을 터트리려 했 

다. 하지만 막 웃음을 터트리려는 순간 쌍백의 한 명이 갑자기 피를 토 

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운마연은 여운휘의 몸이 비틀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관통 

된 것이 아니라 옆으로 흘렸던 것이다. 또한 그 찰나에 쌍백의 한 명은 

가슴을 두드려 맞은 것이고. 평소의 운마연이었다면 알아내고도 남았을 

움직임이었거늘, 그는 너무 흥분한 상태였다. 

여운휘는 아래로 향했던 검을 들어올렸다. 쌍백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느 

껴졌다. 

'저, 저런 멍청한 놈들……' 

운마연은 쌍백을 욕했다. 이름조차 제대로 없는 무명소졸(無名小卒)에 

게 이 무슨 창피인가. 상대가 팽산위를 일수에 이겼다고 하나 운마연은 

쌍백이라면 간단하게 상대를 제압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빌어먹을 놈들 밥값도 못하는 군.' 

엄청난 돈을 주고 고용한 자들이다. 이런데서 진다면 저자들은 쓸모가 

없는 자들이다. 

여운휘의 검이 날았다. 쌍백 중 형인 혈백은 놀라 서둘러 뒷걸음질 쳤 

다. 여태까지 본적이 없는 쾌검이다. 산서에서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과 

도 싸워봤지만 이토록 빠른 검은 처음이다. 

동생인 설백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쾌 쪽에는 자신이 있다고 

자부해왔는데 이 일수를 보고 나니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자신 

의 움직임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속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일수를 보고 나서야 운마연의 낯빛이 변했다. 그 또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무인이니 당연하다. 지금 보여준 검의 움직임은 그로 

서도 간신히 피할 정도였다. 아마 거리가 있지 않았다면 쌍백은 모두 죽 

었을 것이다. 

'저 놈은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 

산서에서 알아주는 고수인 쌍백을 오히려 주춤거리게 만드는 자다. 여태 

까지 소문이 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다. 

능려운은 이제 끝났다고 느꼈다. 아직 제대로 붙지는 않았지만 기백에 

서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다. 역시 자신의 생각대로 여운휘라는 저 자가 

진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그럴 것 

이다. 

"그만!" 

운마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계속했다가는 오히려 이쪽이 창 

피를 당할 것이라 느꼈던 것이다. 

"이대로 격돌하다가는 이쪽도 다칠 것 같아 그만 하기로 한다." 

어느 정도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할 거라 

는 것은 운마연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래야 한다. 운마연에게 자존심 

은 목숨보다 귀중하다. 졌다고 인정하느니 차라리 목을 주겠다. 

"내가 말한 대로 앞으로 힘들 거요, 유 가주." 

운마연은 처음처럼 존대를 내뱉었다. 그렇지만 그 말속에는 가시가 잔 

뜩 박혀 있었다. 운마연은 한쪽에 나열해 있는 자들에게 손짓했다. 나가 

자는 신호다. 

밖으로 나서며 운마연은 이마를 찡그렸다. 득(得)보다 실(失)이 많다. 

협박을 한 것은 자신이었고, 그러할 힘도 있는데 왠지 모르게 진 느낌이 

다. 기분이 너무나 찜찜하다. 

'제길……' 

이처럼 더러운 기분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잠행(潛行) 

검귀 천일혼. 그는 무림 모두가 인정하는 천하제일인이다. 그렇지만 검 

귀가 죽은 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 당시 천하제일인이 검귀 

였다면 지금은 일마(一魔) 쌍존(雙尊) 팔황(八皇)이다. 

그들 중 현 무림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자는 적으나, 이들은 결 

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다. 특히 이들 중 일마는 마교의 인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삼십 년이 넘은 인물이다. 

하지만 아무도 현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을 꼽으라면 서슴지 않고 그를 꼽 

을 것이다. 

일마, 그가 무림에 모습을 드리운다면 그때는 혈풍(血風)이 일리라! 

사람들은 그 열한 명을 통틀어 강호십일객(江湖十一客)이라 불렀다. 

풍운조는 객잔에 앉아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지금 그는 임무를 하기 위 

해 나온 상태였다. 현재 풍운조는 과거에 연(緣)이 있었던 사람을 찾아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별로 내키지는 않는 발걸음이다. 

대충 이럴 거라 예상은 했다. 하지 못했다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여운휘가 소금을 사오라고 시켰을 때부터 풍운조는 알고 있었다. 그 다 

음에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여 

운휘가 풍운조에게 누군가를 찾아가라 했다. 

여운휘의 말은 곧 가주의 말이다. 물론 풍운조가 원치 않는다면 거부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악양유가는 망할게 분명하 

다. 사활(死活)이 걸린 일이다. 거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풍운조는 지금 황제(皇帝)의 측근이자 황궁(皇宮) 내에서도 막강한 권력 

을 지닌 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 자의 이름은 내종종. 환관(宦官) 

이다. 

'망할. 살아 생전에 또 그 내시 자식을 만나게 될 줄이야.' 

무림과 마찬가지로 황궁 또한 보이지 않는 암투로 가득하다. 서로를 죽 

이고, 모략하고 하는 것은 궁내에서도 드물지 않은 일이다. 풍운조가 한 

창 살수로 지낼 때 그는 내종종의 연적을 죽이는데 나섰던 적이 있다. 

물론 일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황궁 안에 잠입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내 

종종이 도운 탓에 어렵지 않게 들어왔다. 그 후에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 

행됐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선수금은 받았지만 끝난 후에 받을 나머지 

돈을 받지 못했다. 

풍운조를 무림에서 몸을 감추게 했던 우가의 사건이 터진 탓이다. 몸을 

감추는 바람에 받지 못했던 나머지 돈을 받으러 가는 것이다. 다만 그 

게 돈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변했지만. 

'예전에 그 통로가 없다면 힘들텐데……' 

아무리 은신술과 잠행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황궁은 만만한 곳이 아니 

다. 만약에 넘다가 잡히게 되면 그건 바로 사형이다. 예전 내종종의 수 

하로부터 안내 받은 길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일은 쉬워질 것이다. 

"자네 그 이야기 들었는가? 운문세가와 악양유가가 일전을 벌일 듯 하 

단 말 말이야." 

풍운조는 술잔을 내리다가 들린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의 말에 악 

양유가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탓이다. 

그때 그 남자의 옆에 앉아 있던 자가 말을 받았다. 

"악양유가? 그게 뭔가?" 

"이런 멍청한 친굴 봤나. 요즘 떠오르고 있는 세가를 모른 단 말인가." 

"참네, 먹고살기도 힘든데 그딴 건 알아서 뭣하나. 그나저나 이름조차 

못 들어본 세가가 운문세가와 싸운다니 결과는 뻔하군." 

"뭐 아무래도 그렇지. 악양유가에 젊은 고수 하나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 

게 얼마나 변수가 되겠는가. 강호십일객 정도 되는 자라면 모를까 말이 

야." 

풍운조는 내렸던 술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들의 말에 의의를 제기할 

마음 따위는 없다. 그들의 말에 틀린 게 없으니까. 만약 지금 풍운조 자 

신이 하는 일이 실패한다면 저들의 말대로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저 사람들은 모르는 한 가지가 있 

다. 악양유가에 있는 젊은 남자가 단지 무인이 아니라는 것을. 

'너희가 여운휘를 알았다면 그 일에 대해 그리 쉽게 답을 내리지는 못했 

을 것이다.' 

풍운조는 술잔을 내려 놈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풍운조는 인피면구의 제작과 역용술에 뛰어난 자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 다른 것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풍운조의 은신술과 잠 

행술 또한 절정에 다다른 상태다. 무림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움직임은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 그가 황궁에 들어서기 전에 긴장한 것은 다름 아닌 한 단체 때문이 

다. 

동창(東廠)! 

비밀경찰기구로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상상을 불허한다. 아무리 풍운조 

라 할지라도 그들과 마찰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풍운조는 황궁과 어느 정도 떨어진 관제묘에 들어섰다. 그는 그 중 하나 

의 석상을 조용히 만졌다. 그리고 살짝 웃었다. 최근에도 사용한 흔적 

이 있다. 그건 곧 아직 이 길이 남아 있다는 거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일부로 축시(1~3시)에 온 탓도 있지만 사 

람의 왕래도 드문 곳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에 

비밀 통로가 있다면 사용하기 어려운 거야 당연하다. 풍운조는 내공을 

이용해 석상을 천천히 뒤로 밀었다. 석상이 밀려나며 아래쪽에 작은 통 

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풍운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풍운조는 

석상 아래쪽을 만졌다. 그러자 밀렸던 석상은 저절로 다시 원위치로 돌 

아갔다. 풍운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풍운조는 맨손이다. 화섭자(火攝子)를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 

았다. 분명 불이 있다면 이동하기가 쉽다. 앞이 잘 보일 테니까. 하지 

만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만약 반대쪽에서 이곳으로 누가 온다면 풍 

운조의 모습은 들키지 않을 수가 없다. 

풍운조는 불을 포기했다. 대신 안력을 높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품 

안에는 하루 정도 먹을 건량이 있다. 빠르게 간다면 두시진 안에는 도착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밝다. 황궁 안으로 들어가야 할 순간 

은 내일 이 무렵이다. 

풍운조는 몸을 낮추고 걷기 시작했다. 건너편 쪽에서 누군가가 온다면 

피할 방도가 없다. 길이 외길인 탓이다. 격렬히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식은땀이 잔뜩 흐른다. 

'제길, 힘든 일은 다 내가 하는 군. 늙은 사람을 이리도 부려먹다 

니……' 

투덜거림과는 다르게 풍운조의 눈은 고요히 가라앉았다. 

급할 것도 없었기에 풍운조는 천천히 걸었다. 몸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 

우고 걸으니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다. 작은 소리 하나에도 움찔하며 

걷던 풍운조가 출구 근처에 도달한 것은 약 네 시진이 흐른 후였다. 

'정오쯤 되었군.' 

출구의 옆에는 약간의 공간이 있다. 그곳에 주저앉은 풍운조는 품안에 

서 건량을 꺼냈다. 그리고 입안에 넣고 천천히 돌렸다. 우선 부드럽게 

하기 위함이다. 풍운조는 조그만 소리를 내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게 하물며 건량을 씹는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풍운조는 많은 시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잠을 자지 않았다. 그는 눈 

을 부릅뜨고 출구 쪽을 노려보았다. 

풍운조는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준비해온 인피면구다. 예전에 무림에 

서 활동할 때도 본 모습을 보이고 살행을 한 적은 드물다. 지금은 더하 

다. 만약 본 모습을 드러냈다가 일이 벌어지면 악양유가에도 피해가 갈 

것이다. 그렇기에 풍운조는 인피면구를 준비해 왔다. 

황궁 내의 지도는 이미 오래 전에 외웠다. 한 번 외웠던 이상 그것은 죽 

기 전까지 잊지 않는다. 

조용히 앉아 있던 풍운조가 움직인 것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도 약 세 시 

진이 흐른 후였다. 그토록 몸을 사리며 기다리던 축시가 온 것이다. 여 

태까지는 일이 순조로웠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문제다. 지도를 외운 것 

은 오래 전이다. 

기억력은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내부가 바뀌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 

풍운조는 출구 바로 밑에 서서도 문을 열지 않고 한참을 기다렸다. 출구 

가 외곽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약 일 각 정도 조용히 있 

던 풍운조가 마침내 인피면구를 쓴 후에 문을 열고 나갔다. 

풍운조는 나가기가 무섭게 왼쪽으로 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움 

직여야 한다. 만약 동창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그건 실패라고 봐도 무 

방하다. 

풍운조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공중에서 네 번의 변화를 보 

이며 건물 위로 아슬아슬하게 착지했다. 놀라운 것은 그토록 격렬하게 

착지했거늘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높은 곳에서 보니 주변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외웠던 지도 

에서 보았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샤샥! 

풍운조의 몸이 앞으로 움직였다. 달빛마저도 피하기 위해 그는 몸을 낮 

췄다. 

늦은 밤인 탓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 늦은 시간에 함부로 황 

궁을 돌아다니다가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기 십상이다. 

다행인 것은 통로와 내종종의 거처가 그리 멀지 않다는 거다. 내종종은 

일부로 자신의 거처와 가까운 곳에 비밀통로를 만들었다.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도망가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인 셈이다. 도망을 치기 위 

한 비밀통로가 가깝지 않다면 어찌 되겠는가? 

체온을 없애고 숨소리도 죽인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하게 되는 행동들 

을 없애야 한다. 고수는 체온을 느끼고도 누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 정도 

다. 숨소리는 말할 나위도 없다. 

풍운조는 지붕 위에서 조심히 귀를 가져다 댔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좋아.' 

내려가려던 풍운조는 섬뜩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달을 뒤로하 

고 한 무인이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자의 눈은 정확하게 풍운조 

를 향하고 있었다. 

'이런…… " 

걸렸다. 그것도 자신도 모르게 이 정도로 접근한 걸 보아 정체가 뭔지 

느낌이 왔다. 

"누구냐." 

"동창이냐?" 

풍운조와 그 남자는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풍운조는 천천히 다리에 

공력을 집어넣었다. 내종종도 동창에 관련되었다는 건 알았다. 호위무사 

가 어느 정도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게 동창의 일인일지는 

생각도 못했다. 

다행인 것은 이 근방에 저 남자를 제하고는 아무도 없다는 거다. 풍운조 

는 다리에 몰은 공력을 폭발하듯이 밀어냈다. 

죽여야 한다. 죽이지 못하면 일은 실패한다. 풍운조의 몸은 어느 때보 

다 민첩하게 움직였다. 

풍운조의 다리가 동창의 인물에게 날아갔다. 그런데 그 공격을 너무나 

쉽게 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운조는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맞추려고 한 공격이 아니다. 

발로 공중을 차는 동시에 아래쪽으로 내려졌던 풍운조의 소매 속에서 짧 

은 비수가 튀어 나갔다. 상대의 얼굴에 일순 당황스러움이 스쳐지나갔 

다. 처음의 발길질을 보고 비웃었다. 너무나 엉성했던 탓이다. 그런데 

그 후에 이어지는 소매 속에서 터져 나온 암기. 

처음의 헛발질은 속임수였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 이 자를 발견한 순간 소리쳐야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소리를 칠 

수 있는 순간이 아니다. 우선은 이것을 피해야 한다. 동창의 일인인 금 

종은 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가슴을 스치며 비수가 코앞을 지나갔다. 

분명히 피했다. 그런데 가슴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어, 얼마나 빨랐기에……' 

그 순간 금종은 아혈(啞穴)과 마혈(麻穴)을 제압 당했다. 채 다른 반응 

을 보이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풍운조는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일이 있어서 말이야. 조금 있다가 네 상관에게 말을 전하고 나서 풀어 

주도록 하지." 

풍운조의 목소리가 얼굴에 맞추어 꽤 젊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 금종을 

지붕 위에 눕혀 놓고 풍운조는 아래로 내려섰다. 역시 엄청난 건물이 

다. 다행히도 풍운조는 이 건물 안의 구조를 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상 

당히 힘들었으리라. 

안은 고요했다. 풍운조는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그 안을 약 일 각 

정도 걸었다. 그 일 각 동안 풍운조는 온 몸에 있는 땀을 모두 흘린 기 

분이다. 물론 실제로 풍운조는 한 방울의 땀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느 

낌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인간의 땀은 몸의 온도를 높인다. 그것은 곧 살수로서 실격이다. 주변 

과 동화가 돼야지 변화를 주어서는 안 된다. 풍운조는 뛰어난 살수다. 

아니, 살수였다. 그 정도 조절은 능히 할 수 있는 자다. 

내종종의 거처 바로 앞에는 두 명의 무인이 서 있었다. 

'또 동창이로군.' 

특별히 표식을 나타내는 옷이나 장신구를 지니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풍 

운조는 직감했다.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만 보면 알 수 있다. 

그냥 일반 무인이었다면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창이라 

면 힘들다. 그들은 구파일방이나 마교에 있는 자들처럼 정규적인 훈련 

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간부급을 지키는 것을 보니 실력도 있 

을 게 분명하다. 

단순히 죽이는 거라면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죽여서는 안 된다. 그렇기 

에 지붕 위에서 만났던 자도 죽이지 않고 아혈과 마혈만 제압한 것이 

다. 저들을 죽인다면 동창과 적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대가 

를 받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 

풍운조는 발로 벽을 약하게 툭 쳤다. 

아주 미약한 소리였지만 훈련된 무인들이 그것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 

다. 

"……" 

"내가 가 보지." 

한 명은 침묵했고, 다른 한 명은 말문을 열었다. 성공한 것이다. 도박이 

었거늘 말문을 연 자가 다가오고 있다. 풍운조는 더욱 몸을 깊숙이 숨겼 

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그 순간을 놓친다면 이 일은 실패한다. 

풍운조의 공력이 손가락 끝에 집중됐다. 

길을 꺾여서 들어온 상대를 보는 순간 풍운조의 손가락에서 두 개의 지 

풍이 뻗어져 상대의 마혈을 쳤다. 마혈을 제압 당하면 몸의 힘이 쫙 빠 

지고 혈도에 따라 정신도 잃게 된다. 지금 풍운조가 친 혈도는 비유혈 

(臂儒穴)이다. 

쓰러지기도 전에 풍운조는 그 자의 몸을 손으로 받쳤다. 

"무슨 이상한 거 있나?" 

다른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때맞추어 풍운조가 대답했다. 

"이리 와 보게. 이상한 게 있네." 

풍운조의 목소리는 어느새 방금 쓰러진 남자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동료가 한 말인 줄 알고 다가오던 다른 한 명 또한 길을 돌기가 무섭게 

마혈을 제압 당했다. 풍운조는 너무나 손쉽게 두 명을 제압한 것이다. 

막는 자가 아무도 없으니 풍운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호화로 

운 방이다. 이곳에 놓여 있는 저 꽃병 하나만으로도 몇 사람의 굶주림 

은 막을 수 있을 정도다. 풍운조는 침대로 다가갔다. 휘장 건너로 한 인 

영의 모습이 비춘다. 

내종종이 분명하다. 

막 휘장을 걷으려던 풍운조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누워 있던 내종종 

이 갑작스럽게 검을 휘두른 것이다. 

"누구냐!" 

"오랜만이오." 

"음?" 

내종종은 상대가 단순한 침입자인 지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신을 

아는 듯한 말투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네 놈은 누구냐." 

"백면귀황 풍운조요." 

"백면귀황! 죽지 않았던가!" 

내종종은 내심 놀랐다. 그는 풍운조가 죽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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