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37)

그 날은 무척이나 날씨가 좋았다. 마치 봄이라도 오려는 것처럼 바람이 

차갑기는커녕 선들선들했다. 날씨가 좋은 건 사실이었으나 운문세가 가 

주인 운마연의 기분이 좋은 것 그 때문이 아니었다. 

얼마간 머리를 썩혔던 악양유가의 일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한 탓이다. 이 

제 자신의 부하 중 일부를 보내 그곳에 갇혀 있는 아들놈만 빼오면 모 

든 일은 끝난다. 신경을 좀 써달라고 했더니 단비쌍조 여험까지 나서게 

해 주었다. 

실패 할 리가 없다. 

"후후, 건방진 놈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악양유가라는 이름만 들어도 화가 치밀었는데, 이제 

는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 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토록 

기어오르지만 않았다면 아예 뿌리까지 뽑아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주제를 몰랐다. 

'어느 정도 받아주었을 때, 그때 멈췄어야지……' 

건방지게 철에 손을 댔을 때부터 이미 그들의 운명은 대충 정해진 상태 

였다. 운마연이 조용히 입가에 찻잔을 가져다 대는 순간 문을 열고 누군 

가가 들어섰다. 

"누구……!" 

막 소리를 지르려던 운마연은 그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서유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목소리를 낮췄다. 

"가주님…… 문제가 좀 벌어진 듯 합니다." 

운마연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았다. 그런데 좋지 않은 

일이라니? 운마연은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것이 말하라는 표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서유종이 말을 이었다. 

"살령대가 실패했습니다." 

"뭐야!" 

참았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실패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실패를 했 

다는 것은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운마연은 손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 

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살령대에게 부탁을……" 

"아니, 됐어. 이번엔 내가 직접 가겠네." 

차라리 단칼에 끝냈어야 했다. 애초에 자신이 갔다면 일이 이토록 커지 

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무 쉽게 보고, 일을 방치했다. 상처를 가만히 놔 

두면 곪게 되고, 그게 더 진행되면 잘라야 한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긴다는 것은 상처를 곪게 놔두는 일일지도 

모른다. 

"일을 너무 끌었어. 운문세가의 정예 중 육십여 명을 뽑고 자네도 동행 

하게. 내 악양유가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말 테니까!" 

                         변화(變化) 

             

마교의 핵심부가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무림 역사상 가장 강한 고수를 꼽으라면 검귀(劍鬼) 천일혼을 꼽을 것이 

다. 그리고 그 다음을 말하라면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고 한 사람을 꼽는 

다. 

독향미인(毒香美人) 구취향! 놀랍게도 그자의 정체는 여자다. 

그 이름 또한 검귀 천일혼에 비해서는 떨어지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다. 오히려 잔인한 손속이나 그 패도적인 검법의 위력은 검귀 천 

일혼보다 그녀가 앞선다고까지 한다. 구취향은 분명 한 세기를 풍미(風 

靡)할 절정고수였다. 그러나 구취향은 시대를 잘못 태어나고야 말았다. 

그녀는 천일혼과 동시대에 태어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하늘의 실 

수였다. 

결국 천일혼과 구취향은 하남에 위치한 동백산(桐栢山)에서 부딪쳤다. 

결과는 구취향의 참패(慘敗)였다. 

구취향을 이를 갈았다. 딱 반 수, 반 수가 밀렸던 것이다. 그 반 수라 

는 조그만 차이 탓에 그녀는 다시는 헤어 나오지 못할 구렁텅이에 빠져 

버렸다. 구취향을 그 싸움 탓에 주화입마에 빠졌다가 간신히 살아 나왔 

다. 주화입마에 빠졌던 탓에 내공을 모두 잃은 구취향은 크게 상심했다. 

그리고 그렇게 구취향은 무림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마교 쪽에서 한 가지 책을 구했다. 그 

건 바로 구취향이 죽기 직전 남긴 마지막 검법이었다. 그 반 수의 억울 

함을 잊지 못하고, 일생을 버려가면서 만든 마지막 검법인 셈이다. 

그 위력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런 일이 생겼으니 마교 내부가 소란스 

러운 것은 당연했다. 

엄백린은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분명 구미가 당기는 무공이다. 비록 천 

일혼에게는 졌다고는 하나 구취향 또한 그 못지 않은 고수였다. 

이 무공이 천하제일의 절학(絶學) 중 하나일게 분명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구취향이 남긴 검법의 이름은 혈루검(血淚劍)이다. 말 그대로 피 눈물 

이 섞인 검법인 셈이다. 

그런 무공을 앞에 두고 엄백린은 오히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단한 

검법이라고는 하나 그림의 떡이다. 그로서는 결코 익힐 수 없는 검법이 

었던 것이다. 

혈루검은 여자만이 익힐 수 있다. 

그 사실이 엄백린에게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하는 이유였다. 이런 절학을 

앞에 두고도 익히지 못한다는 사실에 엄백린의 마음은 심란하기만 했 

다. 

혈루검이 적혀 있는 책 앞장에는 큰 글씨로 결코 남자가 익혀서는 안 된 

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말을 어겼을 때의 부작용들이 밑에 간단하 

게 나열되어 있었다. 무공이 탐이 나는 건 사실이지만, 목숨까지 거는 

건 멍청한 짓이다. 

여자만이 익힐 수 있는 검법…… 엄백린의 수하 중에서 여자의 수는 많 

지 않다. 하물며 쓸만한 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사무린이라는 여자다. 

밤일도 밤일이거니와, 일 처리가 깔끔하다. 맡겼던 일을 실패 한 적이 

없다. 그게 그녀를 믿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자신 앞 

에 부복 해 있는 사무린을 보며 엄백린은 자신의 손에 있는 책을 내려다 

보았다. 

여자 밖에 익힐 수 없는 검법이다. 어차피 자신이 익힐 수 없는 검법, 

믿을 수 있는 수하에게 준다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무린." 

"예, 교주님." 

"이 책을 받아라." 

"그 책이라 함은……" 

그 책이 무엇인지 사무린이 왜 모르겠는가. 한참 마교의 수뇌부가 이 

일 때문에 뜨거운 이 마당에 그녀 정도 되는 자가 그 책의 정체를 모를 

리가 없다. 이미 이 안에 들어서는 순간 그 책이 무엇인지 감을 잡은 사 

무린이다. 

사무린은 엄백린이 자신에게 책을 주자 놀라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죽여서라도 뺏고 싶었던 물건이다. 하지만 힘이 없기에 꾹꾹 눌러 참고 

있었는데, 책이 그냥 굴러 들어왔다. 

책을 받으면서도 사무린은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교주를 잘 

안다. 결코 이런 무공을 남에게 줄 위인이 아니다. 그러면 왜 이 책을 

준 것일까? 

"이 귀한 것을 어찌 저에게 주신 거죠?" 

"보면 알겠지만…… 남자는 그 무공을 익힐 수 없다. 그러니 내 밑에 있 

는 여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너에게 하사한 것이지." 

"아……" 

그제야 사무린은 머리에 가득 찼던 궁금함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그 

런 이유라면 책을 주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사무린은 화사하게 웃었 

다. 

그 표정은 마치 세 살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가지고 싶던 것을 받 

았을 때와 같이 순수해 보였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는 교주 엄백린과 

진린 또한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사무린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그들은 그리 생각지 않았으리라. 

'멍청한 놈. 넌 나에게 이빨을 줬어. 아무리 부하라 해도 이빨을 준 건 

멍청한 행동이야. 넌 언젠가 내 손에 죽을 거야.' 

사무린은 이제 교주의 측근이라는 지위에 서서히 싫증이 나기 시작했 

다. 사무린, 그녀는 끝없는 욕심의 소유자다. 더불어 현명한 처세가(處 

世家) 이기도 했다. 아무도 조용히 미소짓는 그녀의 진정한 마음을 알 

지 못했으니까. 

사무린에게서 시선을 땐 교주가 진린에게 말했다. 

"아직도 유설린의 행방을 찾지 못한 거냐?" 

"이상하게도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마교의 정보망으로도 유설린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우선 적으로 그녀 

의 외모를 아는 자가 없다. 물론 그림을 그려 뿌릴 수도 있지만, 그랬다 

가는 정파 쪽에서도 이 일에 대해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지만 엄백린은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람인 이상 반드시 흔 

적을 남길 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유설린의 목을 낚아 챌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흔적이 없을 리가 없다. 찾아라!" 

"예." 

진린은 순순히 대답했다. 

천천히 여운휘의 다리가 움직였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능려운은 바 

짝 긴장한 채로 여운휘를 바라봤다. 어느 정도 거리는 확보한 상태지 

만, 이 정도로 안심할 상대가 아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눈 깜박하면 다 

가올 수 있는 거리다. 

파파팍! 

능려운의 검에서 검기가 뻗어 나왔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경지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간단하게 그 공세에서 벗어나 능려운에게 다가왔다. 

허겁지겁 뒤로 물러서던 능려운의 다리가 꼬여버렸다. 

"앗!" 

그는 뒤로 넘어졌고, 그 사이에 여운휘의 검은 목에 닿아 있었다. 

"뭐 하는 거냐." 

목소리 높낮이의 변화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타박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능려운은 잘 알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긴박한 순간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게 보법이 흐트러진다. 

"이리 와 봐." 

여운휘가 옆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유설린을 불렀다. 그리고 다가온 

그녀를 능려운의 앞에 세웠다. 

"칠야검법(漆夜劍法)을 펼쳐." 

기본이 튼실한 검법으로 예전에 마교에서도 유설린이 자주 익히던 무공 

이다. 유설린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곧 칠야검법을 펼치기 시작 

했다. 

능려운은 놀란 눈으로 유설린을 바라봤다. 검을 휘두르는데 소리가 나 

지 않는다. 거기다가 보법을 비롯한 모든 움직임이 절제되면서도 깔끔하 

다. 한 마디로 기초가 충실하다는 거다. 

능려운은 왜 여운휘가 이것을 보여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넌 가주보다도 약하다. 내공은 둘째치고, 기초에서 큰 차이가 난다. 

넌 기초를 갈고 닦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힘들 거다." 

여운휘는 능려운에게 유설린이 검법을 펼치는 것을 계속 보라고 말하고 

는 옆에 있는 나무에 몸을 기댔다. 능려운은 묵묵히 유설린을 응시했다. 

아름답다. 

검법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펼치는 인간 자체가 너무나 아름답다. 능려운 

은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여태까지 보아온 여자와는 그 궤를 달 

리 할 정도로 미인이다. 유독 외모만이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이 아니다. 

가주의 몸에서 풍기는 그 모든 것이 맘에 든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왠 

지 모르게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우스운 소리다. 대결을 펼친다면 오히려 자신이 질 거다. 그런 여자를 

지켜주겠다니 당연히 우스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래도 지켜주 

고 싶다. 

자신도 모르게 가주에 대한 연정(戀情)을 가지게 되었지만 숨길 수밖에 

없다. 능려운은 옆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 

다. 

가주가 운휘라고 부르는 인물. 남자인 자신이 봐도 대단한 남자다. 

'후우……' 

한숨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과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능려 

운은 천천히 연정을 가슴 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유설린을 주시했다. 연 

정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설린은 아름다워만 보였다. 

그 후로도 유설린은 약 일각(一刻) 동안 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검을 멈추자 여운휘는 아무 말도 없이 능려운을 돌려보냈다. 그 

리고 돌아가라는 말에 능려운은 묵묵히 따랐다. 

유설린과 여운휘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거처로 돌아왔다. 거처로 돌 

아오자마자 여운휘는 서운철을 불렀다. 그는 요즘 다른 일에서는 일체 

손을 때고 여운휘가 명한 일만 하고 있는 처지였다. 

서운철은 두 사람의 움직임을 읽는 임무를 맡았다. 

그 두 사람이란 풍운조와 운마연이다. 지금 풍운조도 근방에 이르렀고, 

운마연 또한 수하 육십여 명을 이끌고 이곳으로 다 와 가는 상황이다. 

계산대로라면 풍운조가 조금 더 일찍 도착할 것이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무엇을요?" 

"운문세가의 가주가 직접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냥 이대로 있다가 

는……" 

서운철은 태연한 척 말했지만 말끝이 은근히 떨렸다. 지금 운문세가가 

오는 것이 결코 좋은 목적은 아닐 것이다. 비록 수는 육십여 명 정도라 

고는 하나 악양유가에 있는 무인들과는 달리 훈련 된 자들일 것이다. 

무력으로도 상대할 수 없고, 그렇다고 세가의 세력으로도 월등히 밀리 

는 상대다. 이런 자들이 다가오는데 가주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다. 차라리 가주가 무능한 자였다면 도망을 쳐버리면 될 일이다. 

허나, 결코 가주는 우둔하지 않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애매하다. 도망 

칠 수도, 그렇다고 안 치기도 그런 상황이다. 서운철은 가주를 바라봤 

다. 저 조그마한 몸으로 여태까지 여러 가지 일들을 아주 간단히 해결 

한 여인이다. 

유설린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믿고만 있어요. 일은 잘 풀릴 테니까요." 

서운철은 그녀의 능력을 믿고 싶었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풍운조가 돌아왔다. 그는 종이를 유설린에게 내밀 

었다. 소금을 산 내역이 적힌 종이다. 유설린은 잠시 종이에 시선을 던 

졌다고 곧 그것을 내려놓았다. 

"수고하셨어요." 

"필요한 일이라니 해야지 어쩌겠소." 

풍운조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유설린의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여운휘 

의 눈과 풍운조의 눈이 만났다. 

"그나저나 지금 운문세가의 사람들이 온다고 들었는데 어찌 되었느냐." 

"그들도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추었군." 

풍운조의 말에 서운철이 대답했다. 이미 악양유가 내부는 분주하게 움직 

이고 있다. 

정면격돌은 어렵다. 아무리 여운휘와 풍운조가 있다고는 하지만 상대의 

수도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어느 정도 검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다. 그 

대로 부닥친다면 이쪽도 피해가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정면격돌은 피하면서도 최대한 이 기회를 유연히 넘겨야 한다. 그리고 

정작 운문세가에게 먹일 큰 일격은 준비해야 한다. 여운휘는 이미 운문 

세가에 날릴 일격을 준비한 상태였다. 풍운조가 그 일을 해냈다. 

소금이다. 그 소금. 

문제는 아직 터트릴 때가 아니라는 거다. 소금을 지금 터트렸다가는 오 

히려 당할 것은 이쪽이 된다.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자도 풍운조다. 그가 아니라면 이 일은 성공할 수 없다. 

"슬슬 나가야 할 듯 합니다." 

서운철은 문을 열며 말했다. 나가야 한다는 말, 그건 곧 운문세가가 대 

충 도착했을 시간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유설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여유 있게 한 걸음씩 움직였고, 

그 뒤를 그림자처럼 여운휘가 따라 붙었다. 

문 부근에 다다르니 이미 양쪽으로 이십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일렬 

로 서 있는 상태였다. 서운철은 한쪽을 바라보다가 손을 마구 흔들었 

다. 문을 열라는 신호다. 

장정 둘이 달려들어 문을 양쪽으로 잡아 당겼다. 문이 열리며 건너편에 

서 다가오는 일련의 무리가 보였다. 그 무리가 전부 안으로 들어오자 문 

을 열었던 두 명은 다시 문을 닫았다. 분위기는 고요했다. 

문 옆에 서 있던 이십여 명의 무인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그들도 지 

금 운문세가와 악양유가의 일을 모르지 않았다. 지금 악양유가에서는 가 

주의 아들인 운중행과 그의 수하 삼십여 명을 포박한 상태다. 

더군다나 악양유가에서 온 자들은 모두가 무공이 빼어난 자들이다. 그들 

이 분위기를 잡고 노려보니 위축되는 게 당연하다. 

운마연은 주변을 둘러봤다.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은 무인들이 양옆에 

서 있다. 내부는 꽤 깔끔한 편이다. 그렇지만 그 크기는 자신들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승률은 십에 십.' 

싸운다면 반드시 이긴다. 운마연은 그리 생각했다. 아는 바로는 이곳의 

무인의 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최근 

들어 조금 더 영입(迎入)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하류 잡배(雜輩)다. 

그런 놈은 백이 늘어도 상관없다. 

"누군가 다가옵니다." 

"음……!" 

서유종의 말에 고개를 앞으로 돌렸던 운마연은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대단한 미모다. 그리고 그 양 옆에 있는 자들 또한 왠지 모르게 무엇인 

가 있어 보인다. 운마연 또한 운중행과 마찬가지로 색(色)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그는 운중행과 다르게 먼저 해야 할 것을 안다. 

운마연은 그 여인이 누군지 감을 잡았다. 별 말은 없지만 몸에서 풍기 

는 기도가 다르다. 그리고 들은 바로 악양유가의 가주는 여자라고 했 

다. 그것도 미모가 대단한. 

이 앞에 있는 여인은 그 모든 것과 일치했다. 

"악양유가의 가주시구려. 내가 운문세가의 가주 운마연이라 하오." 

"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 젊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토록 젊을 줄은 몰랐소." 

운마연은 순식간에 유설린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살폈다. 어떤 인물인 

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속마음과 운마연의 입은 따로 놀고 있 

었다. 

"그래, 유 가주의 아버지의 존함은 어찌 되시오. 유 가주 같은 딸을 두 

신 분이라면 내가 분명 알았을 터인데……" 

교묘한 화술(話術)이다. 유설린을 띄어 주는 듯이 말하지만 그 속내는 

다르다. 유설린에 대한 내역을 알아보려는 것이다. 유설린은 웃으며 말 

했다. 

"개인 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군요. 어쨌든 시간도 시간인데 

저녁 식사를 하셔야겠지요?" 

"조금 허기지기는 하는데……" 

"그럼 두 분께선 저희를 따라오시지요. 연회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몇 

분 더 모시고 오실 거면 그래도 됩니다." 

운마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조용히 있던 서유종이 

급히 말을 받았다. 

"가능하면 저 인원 모두를 데려 가고 싶습니다만." 

"예, 얼마든지요." 

서유종은 유설린이 거절할 거라 생각했다. 말은 연회지만 그 뒤로는 분 

명 머리 싸움이던 무엇이던지 간에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 곳에서 무 

력은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다. 그런 곳에 전 인원을 데려간다는 

데 반대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유설린은 너무나 쉽게 허락해 버렸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가 없어지니 당연하다. 차라리 안 된다고 했다면 데리고 온 육십 명 중 

에서도 뛰어난 열 명 정도만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도 이들 정도 

는 충분하리라 서유종은 생각했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허락을 했다. 분명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 

을 의미한다. 

왔던 그대로 짐만 악양유가의 하인들에게 맡긴 채로 그들은 유설린의 뒤 

를 따라 걸었다. 유설린의 옆에 선 운마연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명 

의 모습을 살폈다. 

가주의 측근이 분명하다. 한 명은 젊은 남자고, 나머지 한 명은 나이 꽤 

나 먹은 노인이다. 노인은 종종 자신에게 무엇인가 말도 걸고 했지만 젊 

은 남자는 말 한마디가 없다. 

'벙어리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무공을 익힌 듯 하면서 

도 아닌 듯도 하다.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는 듯한 것이 악양유가 가 

주를 보는 듯 하다. 생긴 건 여자 꽤나 홀리게 생겼다. 

악양유가에 대단한 고수가 하나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북팽가 팽산위 

를 단 일수에 꺾어 버린 자. 

'이자다.' 

운마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 또한 꽤나 유명한 무인이다. 운마연의 

눈에 여운휘는 특별히 강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해 보이지 않는다 

고 해서 모두 무시할 수는 없다. 이 같은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진짜 약한 자거나,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안으로 숨길 수 있을 정도의 

고수. 운마연이 느끼는 바로는 이 남자는 후자다. 

잠시 동안 악양유가의 인물을 분석하는 동안 그들은 연회장에 도착했 

다. 문이 열리며 그 안에는 넓은 연회장이 나왔다. 그와 더불어 그 안 

에 있는 약 사십여 명의 무인들이 유설린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 안 

에는 능려운도 있었다. 

"저쪽으로 가시지요. 그리고 다른 분들은 이쪽에." 

유설린은 양쪽에 늘어선 악양유가의 무인들을 한 쪽으로 보냈다. 그리 

고 비어버린 다른 한 쪽에 운문세가의 무인들이 설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되니 마치 양쪽은 대립한 것 같아 보였다. 

운마연은 끝에 쪽에 있는 두 개의 의자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위치 

나 모양 같은 것이 완전히 똑같다. 이건 악양유가의 가주와 운문세가의 

가주인 자신이 똑같은 위치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행동이 분명하다. 

"허허, 준비도 많이 하셨구려." 

반쪽으로 나눈 듯한 이곳의 시설이 완벽히 같다는 것을 보며 비꼰 것이 

다. 아는지 모르는지 유설린은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앞쪽 

으로 풍운조가 앉았다. 여운휘는 여전히 유설린의 뒤에 서 있는 상태였 

다. 

"허, 저 젊은 무인은 어째서 앉지 않는 겐가." 

"제 호위무사입니다." 

"여태 오면서 말 한마디도 않더군. 혹시 벙어린 겐가?" 

"말수가 적을 뿐이오." 

이번엔 여운휘가 대답했다. 

여운휘의 존댓말을 들은 풍운조는 예전에 자신이 들은 것이 환청이 아니 

었다고 확신했다. 자신이 말해준 충고대로 여운휘가 상대방을 향해 존대 

를 사용한 것이다. 

풍운조는 아무도 모를 정도로 살짝 미소지었다. 왠지 모르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여운휘의 모습이 우스워 보인 탓이다. 

운마연은 웃으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그의 귓가로 누 

군가의 전음성이 들어왔다. 

[가주님, 슬슬 시작 하셔야 할 듯 합니다.] 

전음을 듣고 나서 서유종을 바라보니 그가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 

마연이 갑작스럽게 헛기침을 토해냈다. 

"흠흠, 그나저나…… 어쩌다 보니 이리 만나게 되었는데 내가 온 이유 

는 알거라 믿소." 

"운 소협 일이군요." 

"그것도 있고, 뭐…… 굳이 말 안 해도 알지 않소." 

"그거말고 다른 게 또 뭐가 있죠?" 

"허어! 이거야 원! 이리 나오시면 나 또한 대우가 달라지게 될 수밖에 

없잖소." 

정확히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알아서 기라는 얘기다. 그리고 말을 안 들 

으면 바로 무력을 쓰겠다는 협박이기도 했다. 그런데 유설린이 웃었다. 

운마연이 알기론 악양유가의 힘으로는 운문세가에서 지금 온 육십여 명 

도 막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의 이 여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바보라면 

이만큼 세가를 키울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역시 좋게 이야기하기 힘든 상대다. 운마연은 방금 까지 썼던 가면을 벗 

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렇게 되면 이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죽거 

나 자신에게 귀속 될 것이다. 

운마연은 가면을 벗었다. 

"건방진 년. 내 말이 그토록 우습더냐?" 

큰 목소리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이 안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는 있을 정 

도였다. 모두의 눈이 운마연에게 쏠렸다. 유설린은 계속해서 웃기만 했 

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운마연의 화를 돋구었다. 

"널 죽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나? 지금 이 안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 나 

서 너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은 일도 아니야!" 

운마연의 말 대로다. 관가 쪽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일은 더 쉬워진다. 

뒤에서 수근덕 거리는 소리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 할 수 있다. 어차피 

그런 것 정도야 어느 정도 지나면 다시 기억에서 지워지기 마련이다. 

"죽일 수…… 있다면 그렇겠죠." 

유설린의 말에 운마연은 검을 뽑으며 옆을 향해 바로 휘둘렀다. 죽이려 

는 것이 아니라 위협을 하기 위함이다. 

캉! 

금속들이 부닥치며 나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운마연은 아미를 찡그렸 

다. 금속성이 났다는 자체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은 곧 그의 검을 

막았다는 말이니까. 

"건방진……" 

시선도 돌리지 않고 휘두른 검이었다. 금속성이 나는 순간 대충 상황은 

짐작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운마연은 예상했던 상황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고 욕을 내뱉었다. 자신의 검이 유설린의 목 옆 쪽으로 

다가가기가 무섭게 막혀 버린 것이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운문세가의 가주라는 걸 잘 알고 있소." 

"그런데 그 건방진 태도는 뭐냐!" 

"난 가주의 근처로 다가오는 검을 막은 것뿐이오. 그게 내 임무이기도 

하고." 

여운휘의 태도를 보니 운마연은 더욱 화가 치솟았다. 겨우 호위무사 주 

제에 자신에게 하는 말투가 이게 무엇인가. 

"네 놈 말투가 상당히 거슬리는 군. 호위무사 따위가 그따위로 말하니 

내 자존심이 아주 뭉개지는 구나."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당신의 자존심이 아니라 이 여자의 안전이오." 

여운휘의 말에 운마연의 화가 폭발했다. 

"다, 당신?" 

어처구니가 없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자기가 누구인가. 비록 오대 

세가에는 끼지 못한다고는 하나 호남제일가인 운문세가의 가주다. 그런 

데…… 저 놈은 뭐란 말인가. 겨우 이제야 일어난 세가의 가주를 지키 

는 호위무사일 뿐이다. 

운마연은 당장이라도 출수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 그때 유설린이 나섰 

다. 

"그만하시지요." 

"……" 

마찬가지다. 호위무사나, 그의 상관인 이 계집이나 똑같이 건방지다. 마 

치 자신을 어린아이인 냥 타이르는 모습에 운마연은 더욱 화가 났다. 그 

렇지만 운마연은 손을 거두었다. 거래를 하던, 협박을 하던 가장 중요 

한 것이 침착함이라는 것을 상기한 탓이다. 

"잘 들어라. 당장이라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곳을 어떻게든 쓸어버 

리고 말 테니까. 너희는 당장 내 아들을 풀어 주고 우리가 하려는 사업 

에 나서지 마라. 너희가 가져갔던 철 부분도 다 내놓아라." 

"그럼 저희는 무엇을 하고 먹고살라는 소리죠?" 

"특산물이나 팔아. 아니면 종이나 팔던지." 

"농담도 잘 하시네요." 

운마연은 내리 눌렀던 화가 다시 치솟았다. 여태까지 여러 세가를 굴복 

시켰다. 힘으로든 이렇게 찾아와서 협박을 했던 간에. 자신이 이 정도 

로 말한다면 다른 세가의 가주는 두려움에 떨곤 했다. 심지어는 빌기까 

지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터무니없는 만용(蠻勇)을 부리고 있다. 믿을 것이 무 

엇이 있다고 이리도 당당한가. 

"저희는 운 가주의 요청 중 단 하나도 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 우선 막 

내 자제(子弟) 분이신 운 소협을 찾아가시려면 마땅한 배상을 하셔야지 

요." 

"배상? 기가 차는 군! 감히 내 아들을 잡고 있겠다고? 과연 그럴 수 있 

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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