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말에 운중행은 수하 하나를 데리고 약속 된
장소로 갔다. 그곳에서는 낮에 본 세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험!"
"어서 오십시오. 여기 앉으시지요."
풍운조가 가볍게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큰 연회를 기대했던 그로서는
단출한 지금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충 분위기를 보니
이 자리가 어떠한 것인지 알만 했다.
털썩.
운중행은 의자를 잡아 빼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바로 식사하실 건가요?"
"아니, 할 말이 있…… 소."
반말을 할지 반 존대를 해야 할지 순간 고민했지만 결국 그는 후자를 택
했다. 지금은 일로 만나는 상황이다. 어차피 얼마후면 자신들에게 귀속
될 거다. 한 마디로 자신보다 아랫사람이 될 거라는 거다. 그때 지금 쌓
인 울분을 풀어 버리면 된다.
"그런가요? 그럼 식사는 말을 들은 후에 하도록 하죠. 하실 말씀이 있으
시면 어서 해 보세요."
"요즘 악양유가의 이름이 점점 알려지고 있소. 요즘 철 쪽으로 잘 나가
는 모양이오."
분명한 비꼼이다. 어투를 보면 결코 선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
낄 수 있다.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
런 말도 없다. 운중행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오, 당신들이 소금 쪽으로 손을 뻗치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
서 말이오. 아마 헛소문이라고 생각을 하는……"
"맞아요. 저흰 곧 소금에 손 댈 예정이에요."
운중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설린이 말을 가로챘다. 운중행은 어
처구니가 없었다. 발뺌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대 놓고 그렇다고 한다.
멍청한 것인가, 아니면 겁이 없는 것인가!
"지금 그 말의 의미가 뭔지 아시오! 당신은 지금 운문세가에 도전을 하
겠다는 말이오!"
"어째서 그렇게 되죠?"
"궁금해서…… 묻는 게요?"
유설린이 살짝 웃었다.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운중행은 알았다. 운
중행의 화가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콰앙!
운중행의 주먹이 앞에 놓여 있던 탁자를 후려쳤다. 내공을 담은 탓인지
탁자는 박살이 났고, 탁자의 파편(破片)이 비산(飛散)했다. 파편의 일부
가 앉아 있는 유설린을 향해 날아들었다.
팟.
소리 없이 출수 된 여운휘의 검이 유설린의 앞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
다. 여운휘는 순식간에 날아들 파편 다섯 개를 쳐내버렸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일부로 운중행의 바지를 향하게 했다.
찌익!
바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운중행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욱 붉어졌다.
피하기 위해 서둘러 일어섰거늘 그게 오히려 바지를 찢어지게 만들었
다. 파편이 바지를 뚫고 땅에 박히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탓이다.
바로 한 대 올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고수다!'
꽤나 젊어 보이고 생긴 것을 보아 그다지 대단할 거라 생각지 않았다.
가주라는 작자가 남자나 밝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
다. 단순히 얼굴 탓에 호위무사로 임명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짧은 순간에 발검을 해서 쳐낸 것도 놀라운데 하나를 일부로 자신에
게 날렸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각도가 너무나 정확했
다. 문제는 그 속도가 엄청났다는 거다. 피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 속도
는 대단했다. 날아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피하려 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제길, 믿는 게 있었군!'
어떻게 저리 뻣뻣할 수 있나 했거늘 실력이 있다. 잠시 당황했지만 운중
행은 곧 코웃음을 쳤다. 실력이라면 자신 뒤에 서 있는 염포도 만만치
않다. 한때 무림에서 이름 꽤나 날리던 쟁쟁한 인물 아닌가!
그에 비하면 저 자는 오히려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풋내기다.
그리 생각하니 운중행의 놀랐던 가슴이 천천히 진정됐다.
"호위무사 주제에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내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
구나!"
"먼저 상을 부순 건 당신이잖소!"
운중행의 말에 대답한 것은 풍운조였다. 그 또한 파편이 날아오는 순간
가주를 지키려 했지만 여운휘가 빨랐다. 알아차린 것은 동시였지만 여운
휘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건 상관도 않고 먼저 유설린을 향해 움직였다.
그 탓에 여운휘가 자신보다 빨랐던 것이다.
풍운조는 운중행과 여운휘라는 두 남자를 비교해 보았다.
아니, 비교할 수조차 없다.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면 조용히 처박히시지 노인장."
"허어, 이거야 원……"
흥분했던 마음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살심(殺心)이 이니 오히려 침착
해 진다. 평소에 풍운조는 조금 다혈질적이다. 그렇지만 상대를 죽이고
자 마음먹는다면 세상 그 누구도 그처럼 침착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살수다. 사람들은 정작 죽이기 직전에 흥분을 한다. 그리
고 그건 종종 치명적인 실수를 일으킨다. 반면 풍운조는 그 반대다. 평
소에는 잘 웃고, 흥분도 잘 하는 남자다. 그렇지만 살행(殺行)을 나가
면 그는 결코 웃지 않는다.
그 뿐만이 아니라 죽이는 바로 그 순간 풍운조는 가장 침착하다. 마치
자신은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그는 무덤덤 하게 상대를 죽인다. 풍운조
의 마음이 식었을 때, 그때가 그는 가장 위험할 때였다.
그건 곧 상대를 죽일 마음이 생겼다는 거니까.
풍운조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운중행은 풍운조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마자 놀라 기겁하고 말았다.
이건 분명 무형지기(無形之氣)다! 절정 검객들이나 가능하다는 무형지
기 말이다.
'뭐, 뭐야 이 놈들은!'
여운휘의 실력을 봤을 때 그는 염표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 없다. 하지만 이 노인까지라면 이
야기는 달라진다. 자신이 데려온 모두를 동원해야 한다. 이 상태로 싸우
게 된다면 이곳에 뼈를 묻는 것은 분명 자신들이 될 것이다.
"풍 노야. 괜찮아요. 어차피 다치지도 않았는걸요."
무섭게 운중행을 감싸 안았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풍운조가 유
설린의 말을 듣고 살기를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제야 운중행은 숨을 제
대로 들이 쉴 수 있었다.
살짝 뒤돌아서 본 염표의 표정이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자,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저희가 소금에 손을 댄다는 것이 어
째서 운문세가에 도전을 하는 게 되는 거죠?"
"그, 그거야 당연히 우리 세가가 오랫동안 하던 일 아니오. 그러니 그
일에 뛰어 든다는 것은……"
운중행은 자신이 이런 모습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
지(高地)를 점하고 있는 게 운문세가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지
금은 오히려 자신이 부탁을 하러 온 것 같지 않은가!
"그렇게도 보실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희는 운문세가와의 충돌은 피
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 일에 대해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걱정 할 수 없겠습니까……"
운중행의 어투가 더욱 높이 변했다. 지금 그는 상당히 급했다. 유설린
이 전혀 굽히지 않는 탓이다.
운문세가는 아직 소가주가 정해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세 아들 중 능력
이 가장 좋은 자가 운문세가를 이어 받게 되는 것이다. 운중행은 이 일
을 자처했다.
그는 이 일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어렵지는 않으면서도 확실하
게 점수를 딸 수 있는 기회다. 마침 출타(出他) 중인 두 형을 젖혀 두
고 운중행은 이곳까지 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성격으로 이런 곳까지 올 이유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일이 운중행 본인의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애초에 와서 살
짝 눈살만 찌푸려도 끝날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말을 해도, 운문세가
의 이름을 들먹여도 요지부동이다.
만약 저 뒤에 있는 노인과 젊은 남자가 없었다면 무력을 썼을 거다. 더
군다나 가주는 여자였다. 더욱 일은 쉽게 풀릴 수 있었다.
문제는 가주를 지키는 두 명이 너무나 강하다는 거다. 지금으로는 도저
히 이길 수가 없다.
"저희 쪽에서 알아서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럼 슬슬 식사나 할까요?"
"……"
운중행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여자는 말로 한다고 그
렇게 하겠다고 포기할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탁자가 바
뀌고 그 위에 음식이 올라왔지만 운중행은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식사 내내 운중행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를 대충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거처로 걷기 시작했다.
완벽한 실패다. 섭외는 여기서 끝나 버렸다. 일말의 타협의 여지도 남
겨 놓지 않고 유설린은 그것을 자른 것이다.
실패했지만 물러설 수는 없다. 점수를 딸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실패한
다면 그 이상으로 손해를 볼 거다. 겨우 이런 세가 하나 어떻게 하지 못
하고서야 어찌 운문세가를 물려받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던 운중행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문을 텄다.
"염포."
"예."
"근방에 있는 힘 좀 쓰는 놈들을 모두 모아라. 저 놈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서둘러야 한다. 축시(丑時)에 일을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염포는 운중행의 명을 받고 바로 장원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좋게 이야기로 해결 할 수 없다면 무력을 쓰는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방금 본 그 둘의 실력이 범상치 않아 보였기에 운중행은 밖에서도 사람
을 끌어 들었다.
'기회를 버린 건 너희들이다! 후회하게…… 해 주마. 큭큭!'
운중행이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 유설린과 여운휘, 풍운조는 저녁을 먹
었던 장소에 그대로 있었다.
닫혔던 문이 열리며 조그만 키의 삼일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왔군. 그래, 어떻게 움직이더냐."
"밖에 쪽으로 아까 뒤에 있던 남자를 내보내더군요. 근방에 깔려 있는
정보망에서 날아온 소식들을 보니 낭인이나, 힘 꽤나 쓰는 장정들을 모
으는 모양입니다."
"훗, 이곳을 치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 합니다. 헤헤."
삼일은 신이 난다는 듯이 웃었다. 조그마한 키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모
험을 좋아했다. 이처럼 위험한 일이 닥쳐도 삼일은 항상 웃는다. 조그
만 키와는 다르게 대단한 자다.
"가주, 이곳을 치려고 하는 모양이오. 어찌 하시겠소?"
"이미 예상한 바 아닌가요? 대응해 줘야겠지요."
운중행은 큰 실수를 해 버렸다. 낭인이나 힘 좀 쓴다는 자들을 모은다
고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악양유가는 약하지 않았다. 설령 운문세가의 모
든 힘이 총 집결 된다 해도 이기기 힘든 상대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
운중행의 가장 큰 실수는 상대를 너무 얕봤다는 거다.
"그럼 당영에게 아까 지시해 두었던 것을 행하라 하세요."
"알겠습니다, 가주님."
삼일은 유설린의 말을 당영에게 전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제 곧 준비
된 무인들이 장원을 둘러싸게 될 것이다.
악양유가와 운문세가의 첫 싸움이 시작됐다.
가을 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스산하다. 늦은 가을 바람이 무척이나 차
다. 아마 옷깃 사이로 파고들면 당장이라도 소름이 돋으리라.
악양유가 장원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운중행의 명을 받
은 염포가 끌어들인 무인들이다. 물론 대단한 자들은 없으나 그 수가 무
려 이백여 명에 이르렀다. 반나절도 되지 않은 시간에 끌어들인 것치고
는 상당한 수다.
물론 저 중에 무공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반의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허나, 염포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알기로 이 안에 있는 무인
의 수는 백여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 안에 있는 자들이 지금 자신이 이끌고 온 이들에 비해서 강한
건 사실이다. 비록 이백 대 백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저 안에 있는 자들
이 이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들이 이기고 지는 것은 그리 큰 문제
가 아니다.
그 동안 함께 온 서른 명과 운중행, 그리고 자신이 그 두 명의 고수와
가주를 제압하면 된다. 머리를 잃는다면 이미 그건 끝난 싸움이다.
염포는 조용히 사람들을 둘러봤다. 소리를 낼 수 없어서 눈짓으로 간단
하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염포는 살짝 고개를 비틀며 들어가라는 신호
를 보냈다. 신호를 받은 무인들이 손살 같이 장원을 넘는 동안 염포는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이들의 일은 내부를 교란(攪亂)시키는 일이다. 소란을 일으킨다면 자연
다른 곳은 약해질 테니까. 그 빈틈을 노려야 한다.
염포는 다른 위치에서 장원을 넘었다. 안은 예상외로 조용하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소란이 일어야 하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직 조우(遭遇)하지 않은 모양이군.'
염포는 편하게 생각했다. 마침 고함 소리가 들리기에 그는 슬슬 시작
된 것이라고 판단했고. 땅으로 내려선 염포는 서둘러 운중행이 있는 거
처를 향해 내달렸다. 방비가 너무 허술하다고 생각은 했으나 좋은 게 좋
은 거라고 그는 그 사실을 금방 뇌리에서 지웠다.
염포가 도착하니 이미 운중행이 서른 명을 대기 시켜 놓고 그를 기다리
던 중이었다.
"어떻게 됐지?"
"이백여 명을 끌고 반대편을 쳤습니다. 오는 와중에도 쥐새끼 하나 안
보이던 것을 보아, 모두 그 쪽으로 몰려간 모양입니다."
"그래? 좋다. 그러면 우리도 움직인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이미 사전에 대충 이야기를 들은 터라 삼십 여 명은 아무 말도 없이 무
기를 들었다. 애초부터 무력을 쓸 일이 있을까봐 엄선 된 자들을 데리
고 왔다.
"가자."
운중행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이미 누군가가 안내해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주의 거처로 가는 길은
머리 속에 외워뒀다. 앞을 막는 자가 있다면 단숨에 베어 넘기며 가려
고 했거늘 아무도 없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분명 의심했을 거다.
그렇지만 운중행이나 염포는 그다지 머리가 좋은 자들이 아니었다. 오히
려 자신들의 작전이 잘 먹혀들어 간 거라 판단하며 그들은 희희낙락(喜
喜樂樂)했다.
가주의 거처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지키는 자가 없다. 운중행은 작게 웃
음을 터트렸다. 곧 자신에게 빌게 될 한 여인을 생각해서이다. 그리고
건방졌던 두 놈.
감히 자신에게 불순한 태도를 보였던 자들에게 그는 지옥을 보여줄 생각
이다. 운중행의 옆에 있던 염포가 강하게 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문이 떨어져 나갔다.
"달려!"
도망가기 전에 포위해야 한다는 생각에 운중행은 외쳤다. 운중행의 명
을 받든 염포를 비롯한 삼십 일 명은 서둘러 가주의 거처로 달렸다.
운중행은 도착하기가 무섭게 문을 열어 제쳤다. 도망치기 위해 분주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가주는 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 신지요."
"킥킥…… 왜일까?"
"이 늦은 밤에 함부로 여인의 방에 들어서시다니 결코 좋은 의미는 아
닌 것 같군요."
못 배웠다고 비꼬는 거다. 이런 늦은 저녁에 여인의 방에 들어선다는 것
은 결코 배운 자가 할 행동이 아니니까. 운중행은 그래도 웃었다. 뭐라
고 지껄이던 무슨 상관인가. 곧 자신에게 빌게 될 터인데.
방이 꽤 크기는 했으나, 운중행이 데려 온 삼십여 명도 안으로 들어서
니 이제는 방이 오히려 좁게 느껴졌다.
"아직도 뒤에 있는 그 둘을 믿는 모양인데, 우습구나."
운중행과 염포를 비롯한 삼십이 인의 병장기(兵仗器)가 빛을 뿜어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오금이 저릴 터인데 유설린은 계속해서 웃었다.
"이, 건방진 계집이……"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저런 계집일수록 고분고분하게 만드
는 재미가 있을 테니까.
"저, 저기 바, 밖을 보십시오!"
누군가가 외쳤다. 굳이 뒤돌아 서서 밖을 볼 필요도 없었다. 유설린 뒤
편에 있는 창문 바깥쪽에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운중행
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운중행의 표정에 예의주시 하던 유설린은 그가 미소를 거두자 그제야 입
을 열었다.
"함정에 빠진 건 당신들입니다. 문을 부수고 함부로 한 가문의 가주에
게 검을 들이 댄 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운중행은 그제야 자신들이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는 염
포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된 거냐! 저 놈들이 왜 여기에 있어!"
분명 저들은 염포가 데리고 온 이백여 명의 무인들과 싸우고 있어야 정
상이다. 그래야 할 이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도저히 설명할 방도가 없
었다. 이백여 명을 놔두고 왔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그 짧은 시간에 제
거 할 정도로 이들 전원이 고수일리는 없다.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던 염포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아까 자
신이 데리고 온 무리를 통솔하는 자였다. 그런데 그게 이상했다. 그런
그가 왜 저 무리 안에 섞여 있는 것인가!
"아니 저 자가 왜 저기……"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이 정도라면 대충 상황을 짐작하게 된다. 운중행
도 마찬가지였다.
염포가 데리고 온 모두에게 이미 악양유가 쪽에서 손을 써 놓은 것이
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일순 두려움이 밀어닥쳤다. 자신이 오기 전
부터 준비를 해둔 것이다. 이미 사전에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했
다는 의미다.
부처님 손바닥 안의 오공 꼴이 나버렸다.
"당신들은 가주를 죽이려 한 혐의로 잡아들여야겠소."
"감히 너희 따위가 운문세가의 직계 손인 나를 잡아들이겠다고!"
"당신이 설령 무림맹주라 할지라도 잡아들이는 게 당연하오."
풍운조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지르던 운중행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
다. 이 인원으로 삼백에 달하는 자들을 이길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저 자
들은 밖에 있다. 안에 있는 사람의 수가 셋이라는 건 변하지 않은 것이
다.
'가주를 제압한다!'
가주를 제압하면 저들이 어쩔 셈인가. 머리만 없다면 그 밑에 몸뚱이가
강해도 상관없다. 이미 죽은 무인의 몸이 강해봤자 무엇을 할 수 있겠는
가.
"제길! 살려면 가주를 잡는 수밖에 없다! 나머지 둘은 죽여도 상관없
다! 가주를 잡아라!"
주춤거리고 있던 무인들은 운중행의 외침에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태라면 모두 잡히게 된다. 운중행의 말대로 지금이 아니면 모
든 게 끝나 버린다.
수적으로 우세하니 그리 불리하지는 않을 거라 그들은 생각했다.
서른 명이 넘는 자들이 달려들었으나 여운휘는 유설린의 옆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 서른 명을 향해 풍운조는 홀로 움직였다. 검을 앞으
로 향하게 하고 있었으나 풍운조는 거침없이 걸었다.
상대는 혼자다. 하지만 너무 당당하니 오히려 공격할 마음이 사라졌다.
시간이 없다는 사실은 알지만 공격을 할 수도 없다. 노인의 몸에서 풍기
는 기도가 소름이 끼치게 만드는 탓이다.
"멍청이들아 뭐 하는 거냐! 상대는 노인 하나다!"
염포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머뭇거리던 무인들이 풍운조에게 달
려들었다. 그리고 그 혼란을 틈타 운중행과 염포는 유설린을 인질로 잡
기 위해 움직였다. 풍운조를 제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
은 가주를 사로잡는 것이다.
앞에 젊은 호위무사 하나가 있기는 하나 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
다. 운중행은 오히려 여운휘를 풍운조보다 몇 수 아래의 인물이라 판단
했다.
염포의 검이 검집에서 빠져 나오며 여운휘의 미간을 노렸다. 그리고 때
를 맞추어 운중행의 검은 여운휘의 다리를 베어 나갔다. 시간차가 절묘
했기에, 공격이 성공할거라 생각했다. 아니, 그랬어야 옳다.
그런데 실패했다. 어떻게 피해냈는지 운중행은 보지도 못했다. 그랬기
에 자신의 공격이 실패한 지금이 마치 꿈만 같았다.
놀란 건 염포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검이 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닿았
다고 생각한 순간 모습이 사라졌고, 손에 아무런 감촉도 없었다. 스치지
도 않은 게 분명하다. 염포는 운중행보다 판단이 빨랐다.
실전 경험이 운중행보다 많았던 탓이다. 실패했다면 서둘러 거리를 벌려
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뒤로 서둘러 물러섰지
만 아랫배에 극심한 통증에 몰아 닥쳤다. 다리가 땅에서부터 무려 두
척 이상 떨어져 올랐다.
"컥……"
숨이 막혀서 비명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엄청난 충격이다. 힘 꽤나
쓰는 무인은 염포였지만 그 한 대에 더 이상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
는 무릎을 꿇고 가쁘게 숨을 몰아 쉬었다. 염포가 당하는 순간에야 운중
행을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뭐가 뭔지 이제는 모르겠다. 정신이 멍한 게 마치 꿈속의 세계
에 와 있는 기분이다. 그런 운중행은 턱에서 느껴지는 충격을 느끼며
이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멀어져 가는 정신 끝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말했다.
"아프겠소?"
존대였지만 비꼬는 듯한 어투 탓에 오히려 화가 난다.
'찢어 죽일 새끼……'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운중행은 정신을 잃었다.
순식간에 운중행과 염포가 쓰러지자 풍운조에게 달려들던 무인들도 멈췄
다. 더 이상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무나 쉽게 자신들의 대장을 꺾
는 자에게 어떻게 함부로 덤빌 수 있겠는가.
반면, 풍운조는 놀랐다.
여운휘가 존대를 한 탓이다. 물론 제대로 된 존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어, 어?"
풍운조가 놀란 사실에 아랑곳도 않던 여운휘는 밖에 있던 수하들에게 손
짓했다. 이미 안에 있던 서른여 명의 무인들은 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밖에서 들어 닥친 그들은 안에 있던 무인들을 묶었다.
거창하게 벌린 것과는 달리 일은 너무나 간단히 끝나 버렸다.
이 싸움으로 인해 악양유가는 두 가지를 얻었다.
우선적으로는 명성이다. 호남 제일세가인 운문세가에게도 힘으로 대항했
다. 소문이 나지 않으려 해도 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완벽하게 이겼
다고 한다면 당연히 이름은 퍼질게 분명하다.
두 번째로 운문세가와 거래할 패를 얻었다.
그 패의 정체는 운문세가 가주의 막내 아들인 운중행이다.
폭풍전야(暴風前夜)
"망할!"
운문세가의 현 가주인 거력참산(巨力斬山) 운마연은 솟구쳐 오르는 화
를 참아내지 못했다.
콰과광!
그의 손에서 뻗어져 나간 장력이 앞에 놓여 있던 모든 것을 박살냈다.
그런데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화만 더 싸인다.
실수를 했다. 자신이 있다고 해서 보냈는데 이건 오히려 일을 크게 만들
어 버렸다. 실패를 했어도 화가 날 판인데, 잡히기까지 했다. 그것도 파
렴치한 행동으로.
이건 혹 때러 갔다가, 오히려 더 큰 혹을 붙여서 온 꼴이 아닌가.
호남의 패자라고 까지 칭해지는 운문세가의 셋째 공자가 악양유가에 잡
혔다는 사실은, 비밀 측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알려져 버렸다. 물론 풍
운조가 힘을 쓴 탓에 그 소문은 더욱 빨리 퍼져 나간 것이다.
운중행을 포로로 잡았지만 그 누구도 악양유가에게 욕을 하지 않았다.
이유가 타당했던 탓이다. 아무리 운문세가의 공자라 해도 밤에 여인의
방에 칼을 들고 들어간 것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
다.
사람들은 오히려 운중행을 욕했다.
악양유가와 운문세가의 격돌이 있어도 이상치 않을 일이다. 그렇지만 정
작 두 세가는 조용하기만 했다.
악양유가가 조용한 것은 그렇다 쳐도 운문세가가 조용히 있는 다는 사실
에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물론 성격이 급한 운마연이 가만히 있고 싶어
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다.
명분(名分)이 없다. 당장이라도 건방진 콧대를 꺾기 위해 공격을 하고
싶은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잘못한 것은 분명 자신이 보낸 운중행이
다. 악양유가로서는 당연한 행동을 취한 것이니, 그것 가지고는 공격을
할 수가 없다.
악양유가도 조용했다. 잡아 둔 운중행을 가지고 거래를 나설 수도 있었
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멍청한 놈!"
운마연의 고함 소리가 방안을 가득 울렸다. 내공이 실린 음성 탓에 방안
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색을 찌푸렸다.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
한 둘째 아들 운여민은 가뜩이나 하얀 피부색이 더욱 창백해 졌다.
"우리 세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다니 이 찢어 죽일……"
아들이지만 지금 운마연의 눈에 운중행은 찢어 죽일 놈일 뿐이었다. 별
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갓 일어난 세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런데 실패를 했다.
이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근 육십여 년 동안 호남 제일가라
는 명성을 지켜왔다. 그런데 겨우 막 일어난 세가 하나에 당하다니……
"겨우 그따위 세가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가주님. 그렇게만 생각하실 게 아닐 듯 합니다."
운문세가의 머리라 불리는 서유종이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영특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다만 성격이 사갈 과도 같아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
았다. 그렇지만 머리 하나는 정말 대단한 자로, 현재 운문세가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총관의 위치에 있다.
"무슨 소리인가 그게."
운마연 또한 그에게만은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가 있기에 운문세가
가 더욱 커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던 탓이다. 서유종이 말을 이었
다.
"얼마 전 무림맹에서 하북팽가의 팽산위가 꼴사납게 패한 적이 있습니
다. 그리고 그 팽산위를 꼴사납게 만든 자가 바로 악양유가 가주의 수족
과도 같은 자라 합니다."
"팽산위라면……"
팽산위라는 남자를 본 기억이 있다. 다소 건방지기는 했지만 실력만큼
은 대단한 자였다. 그런 자를 쉽게 이겼다는 소리는 곧 절정의 반열(班
列)에 이르렀다는 거다.
그렇게 된다면 상당히 일이 난처해진다. 어느 정도의 고수인지는 모르겠
지만, 팽산위를 가볍게 꺾을 정도라면 무시할 수 없다.
운마연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생각에 잠겼다. 손을 오므렸다 폈다 하
는 것은 고민에 빠졌을 때 그가 하는 버릇이다.
공격한다면 이길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공격할 명분이 없다. 어느 정
도 트집잡을 거라도 있다면 명분이고 뭐고 무시하겠지만 지금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그건 운마연의 자존심이 용서치 않았다.
그의 머리에 퍼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
에 운마연의 입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악양유가는 평화로운 상태였다. 소란이 일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고
요하다.
"무슨 소리냐. 갑자기 소금을 사라니."
"쓸데가 있다."
"소금 사업에 곧 뛰어 들 건 알겠지만 굳이 그 먼 곳까지 가서 소금을
사올 이유가 없지 않느냐."
풍운조는 여운휘의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꽤나 많은 양을 그곳에서 산
다면 운반하는 것도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닐 거다. 결코 실용적이지 못
한 일이라 풍운조는 생각했다.
"이곳에서 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러니 그곳에서 사오는 수밖에."
"도대체 그 많은 소금을 사서 어쩌려고……"
"우선 사오라고. 나중에 차차 알게 될 테니까."
도통 생각을 모르겠다. 투덜거리긴 했지만 풍운조는 자리에서 일어났
다. 결코 허튼 짓을 시키려는 게 아닐 거다. 여운휘의 말대로 지금은 도
저히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훗날 알게 되리라. 오늘 이 행동
이 어떠한 의미였는지.
"소금이라……"
"가능하면 서둘러 줬으면 하는 군. 그리고 소금을 구해서 이쪽으로 오
게 하면 서둘러 움직이고. 그쪽에서 노닥거리다가 잘못하면 꼬리가 잡
힐 거다."
"걱정 마라. 그럼 네 말대로 바로 움직이도록 하지. 가주, 그럼 얼마 후
에 뵙도록 하겠소."
고개를 약간 숙이고는 풍운조는 손살 같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무 말
도 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설린은 풍운조가 나가자 말문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곧 알게 될 거다."
"흐음, 이번 일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지 모르겠는데."
"그리 궁금해 할 일은 아닐 거다. 당영! 밖에 있나!"
여운휘는 당영을 불렀다. 거의 이 밖에서 생활하다시피 한 당영은 문 앞
에 서서 인기척을 냈다. 밖에 있다는 신호다.
"능려운을 이곳으로 불러 와라."
얼마 동안 능려운은 연무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잠을 잊고 그는 미친 듯
이 검만 휘둘렀다. 여운휘에게 책을 받은 이후 연무장에서 나오지 않았
던 능려운이 처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어서 와요."
"예. 오랜만입니다."
능려운은 문이 열리자마자 자신을 향해 웃는 유설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
다.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미모다. 능려운은 옆에 있는 여운휘를 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쿡쿡 쑤시는 느낌을 받았다.
능려운은 입을 열었다.
"당신도, 오랜만이오."
"진전(進展)은."
"정확히 어느 정도라 말할 수는 없소. 그렇지만 강해진 건 확실하오."
능려운은 여운휘를 조용히 내려다 봤다. 여운휘는 능려운의 눈을 가만
히 바라보다가 다리를 움직였다.
"나와라."
여운휘는 능려운의 눈을 보고 그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겨뤄보고 싶은
거다. 자신을 꺾었던 여운휘와 다시 한 번 대결을 겨루어 보고 싶어하
는 것이다. 물론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 엄청난 차이가 이
리 짧은 시간 내에 메워 질리는 만무하다는 것을 능려운은 잘 알고 있
다.
여운휘와 유설린이 함께 나갔고, 그 뒤를 능려운이 바짝 쫓았다.
여운휘는 유설린을 옆에 서 있게 하고 능려운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럼 시작하지."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시오!"
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