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37)

"클클, 한 번 움직였더니 목이 타는구먼." 

"서운철, 차 세잔 부탁해요." 

"사람은 넷인데 차는 왜 세잔 인고?" 

서운철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차를 타던 와중에 답했다. 그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저 분께서는 호위 중엔 항시 가주님의 뒤를 지키십니다." 

"호오……" 

노인은 더욱 더 흥미가 일었다. 호위무사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막상 손 

을 섞어 보니 믿을 수 없었다. 저 정도나 되는 인물이 여자 한 명이나 

지키는 호위무사라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직접 보니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으로 날아 온 차를 들어 올리며 유설린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르신의 존함도 모르는군요." 

"노부의 이름말인가? 헐헐, 별로 대단한 이름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나 

를 풍운조라 불렀다네." 

"앗, 뜨거워!" 

유설린과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서운철은 들 

고 있던 차를 다리에 쏟을 정도로 놀라 버렸다. 풍운조라 함은…… 

"서, 설마 노부가 백면귀황(百面鬼皇) 풍 대협이십니까?" 

"날 아는 군." 

서운철은 다리에 차를 쏟았다는 사실도 잊어 버렸다. 이미 그의 모든 정 

신은 앞에 있는 한 노인에게로 쏠려 버렸다. 

백면귀황 풍운조! 

백 개의 얼굴을 가진 귀신들의 황제(皇帝)라는 별호답게, 그는 역용술 

과 인피면구 제작에 능한 자다. 물론 서운철이 놀란 것은 그가 역용술 

(易容術)과 인피면구 쪽으로 유명한 자라서가 아니다. 

백면귀황이 살수(殺手)인 탓이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살수. 

이제는 세상에 나서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을 지는 모르 

나, 분명 서운철은 그 별호를 기억했다. 

서운철이 어렸을 때 부모님은 종종 '자꾸 울면 백면귀황이 잡아간다.' 

는 말로 울던 그의 울음을 멈추게 하곤 했다. 그 정도로 이름이 있던 자 

다. 백면귀황이 노렸다면 목은 이미 떨어졌다고 봐야 할 정도로 그 노인 

은 유명한 자였다. 

그런데…… 

그런 노인을 이긴 여운휘는 무엇이란 말인가. 노인이 백면귀황이라는 사 

실에도 놀랐지만, 그런 그를 여운휘가 이겼다는 것까지 떠올리자 소름 

이 돋았다. 

"백면귀황이라니요?" 

"이 쪽하고 저기 서 있는 저 놈은 모르는 모양이군." 

풍운조는 유설린과 여운휘가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처구 

니가 없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자신이 활동을 접은 지는 꽤 오래 됐다 

고 하나, 그래도 저기서 놀라고 있는 자처럼 기억하는 자가 많다. 

나이가 어린 탓인가. 아니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가. 

"네가 설명해라." 

"제, 제가 말입니까?" 

"그럼 너말고 누가 있느냔 말이다!" 

아까와 마찬가지의 반응에 풍운조는 목소리를 높였다. 막상 지목을 받 

게 되자 서운철은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 

는 바대로 그대로 말했다가는 저 노인의 화를 살게다. 그랬다가는 좋은 

꼴은 결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한참을 끙끙거리던 서운철이 간단하게 풍운조를 설명했다. 

"전직 살수이십니다." 

"살수?" 

"예." 

"그게 다야?" 

"아니, 그게……"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었다. 안 좋은 말로 심기(心氣)를 건드렸다가는 

바로 저승 행이 분명하다. 서운철의 뜨뜻미지근한 모습을 보던 풍운조 

는 참지 못하고 나섰다. 

"이 젊은 놈은, 남자 새끼가 왜 이리 겁이 많아? 난 말이야, 아까 이 놈 

이 이야기했던 대로 백면귀황 풍운조라는 살수야. 이제는 일선에서 벌어 

났으니 살수였다는 것이 정확하겠지. 역용술과 인피면구에 관련해서는 

귀신도 못 따라올 정도야. 그래서 백면귀황이라는 별호를 얻었지." 

풍운조는 유명한 자다. 하지만 유설린과 여운휘가 모르는 것은 당연했 

다. 둘 다 그런 쪽으로는 아는 게 별로 없는 탓이다. 

풍운조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쳤다. 일정한 간격으로 손가락이 탁자 

를 치면서 만들어 내는 '퉁'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마치 악기의 

현(絃)을 퉁기는 것처럼 풍운조의 손가락은 음(音)을 만들어 냈다. 

탁. 

마지막으로 탁자를 손가락으로 치고 나서 풍운조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그 쪽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실까?" 

"저희요? 저희는 풍 노야 와 같은 화려한 경력은 없어요. 저희는 이제 

야 강호에 나왔으니까요." 

"그래, 너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 그건 사실이겠군. 그러면 말 

이야 너." 

풍운조는 여운휘를 가리켰다. 그의 눈이 살며시 가늘어지는 것이 마치 

웃는 것 같다. 

"무공은 어디에서 배운 거냐." 

"왜 묻는 거지." 

"아까 그 검법의 정체가 궁금해서다. 구파 일방의 제자냐?" 

"난 그런 것에 얽매여 본 적이 없다." 

독학으로 익힌 무공이 아님은 분명하다. 기본도 확실히 잡혀 있고, 막바 

지에 펼쳤던 검법은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형태였다. 그렇지만 도저히 

어디의 무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파일방이나 마교 같은 곳과는 수 차 

례 부닥쳐 봤지만 저런 검법은 본 적이 없다. 

풍운조는 물을 게 더 있었지만 그만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는 것을 그다 

지 원치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제대로 대답도 해 줄 것 같지 않다. 

"그나저나 날 부른 것은 이유가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이지? 내 힘이 필 

요하다고 했는데 그것이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궁금하군 그래." 

"아마 풍 노야 라면 지금 악양유가의 상황에 대해 대충 아실 겁니다." 

"그래. 저기 있는 저 서운철이라는 녀석이 물어다 준 정보 덕에 이곳의 

속사정도 대충 알기야 하지." 

서운철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이 언급(言及)되자 풍운조를 바라봤 

다. 자신이 정보를 물어다 주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의 

정보를 빼서 장염에게 넘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서운철은 풍운조의 얼 

굴을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아, 넌 모르겠군. 장염은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 그가 정보를 모 

으는 까닭도 나에게 주기 위해서야." 

"제가 여태까지 풍 노야 에게 정보를 주었군요……" 

처음 듣는 말이다. 여태까지 장염의 밑에서 십 년 이상을 일했지만 풍운 

조에 대해서는 일체의 말도 들은 기억이 없다. 장염의 주변의 일이라면 

모두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서운철이 장염의 주변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몰랐다는 것은, 장염 본인 

이 숨기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 십 년 이상을 완벽하게 속였다. 대단 

한 일이다. 어떠한 비밀을 감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 

데,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하나인 자신에게조차도 꼬리조차 잡히지 않았 

다. 

그럼 또 다시 의문이 생긴다. 

그 정도로 치밀하게 숨겼거늘, 이들은 어떻게 풍운조의 존재를 안 것인 

가? 

서운철이 알기로 이들에겐 아무런 정보망도 없다. 물론 그 정보망이 없 

다고 생각하다가 뒤통수를 맞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십 년 이 

상 자신 마저 속여온 일을 얼마 되지 않은 시간 안에 알아낸 사실은 정 

말 놀랍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저희는 풍 노야를 저희 악양유가의 총관으로 영입(迎入)하고 싶습니 

다." 

"날 영입하겠다고? 끌끌!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지? 난 지금처럼 조 

용히 초야(草野)에 묻혀 지내는 것이 좋은 사람이야. 괜한 사람 건드리 

지 말고……" 

"웃기는 소리." 

여운휘가 풍운조의 말을 끊었다. 끊은 것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도 

발까지 했다. 성격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닌 풍운조가 참을 턱이 없었 

다. 

"죽고 싶나?" 

방금 싸움에선 풍운조가 졌다. 하지만 그건 풍운조의 전부가 아니었다. 

풍운조는 살수의 비기 들을 쓰지 않은 상태로 여운휘와 싸웠다. 살수의 

기술들을 쓴다면 이길 수 있을 거라 풍운조는 생각했다. 

"초야에 묻혀 지내고 싶다고? 그런데 왜 아직도 무림에서 발을 빼지 못 

한 건가?" 

"……" 

"내가 보기엔 아직도 당신은 무림에 마음이 남아 있어. 무슨 이유에선 

지 떠나긴 했지만 아직도 마음만은 무림을 향하고 있지. 내 말이 틀렸 

나?" 

"큭큭, 지레 짐작하고 나서는 꼴이란! 우습구나……" 

말은 그랬지만 뒤로 갈수록 풍운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풍운조는 살수들의 사이에선 아주 유명한 자였다. 그런 풍운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살행(殺行)을 저지르다가 오히려 죽었다는 소리도 

있고, 피를 보기 싫어 산으로 들어갔다는 소리도 있다. 

개소리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다. 

사람들은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부풀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 탓에 사실 

은 왜곡되고, 또한 묻혀 버리기 부지기수(不知其數)다. 

풍운조는 분명 살행에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를 잘못 건드린 것 

이다. 건드렸다고 해도 정체를 걸리지 않았다면 그나마 나았다. 

풍운조가 죽인 자는 산동(山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알려진 우 

가창법(羽家槍法)의 청강산(淸江産) 이라는 남자였다. 밤에 야습을 타 

서 단숨에 죽이려 했거늘, 실패했다. 

살수에게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행히 풍운조는 뛰어난 

무공 실력을 지녔고, 간신히 청강산을 베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풍운조 

또한 심한 상처를 입어 제대로 운신(運身)을 할 수 없었다는 거다. 

도망은 쳤지만 정체가 걸려버리고 말았다. 산동에 있는 우가(羽家)의 모 

든 인물들이 풍운조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몸이 나은 후라고 해도 혼 

자서 그들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도망쳐야 했다. 

풍운조는 몸이 다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볼썽사납게 도망쳤다. 피할 수밖 

에 도리가 없었다. 몸을 감춘 풍운조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가 없 

었다.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첫째로 자신에 대한 환멸(幻滅)이다. 그 누가 와도 두렵지 않다고 하던 

자신이 살기 위해 추한 모습으로 도망을 쳤다. 다음으로 우가 때문이 

다. 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 감시의 눈을 풀지 않고 있 

다. 

그렇지만 나가고 싶다. 이제는 늙어 버린 자신의 피를 끓게 해 주는 것 

은 오로지 무림뿐이다.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다. 술을 마시는 것도, 여 

자를 품는 것도 안 해본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으로는 도저히 가슴 

에 비어 있는 구멍을 메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림에 알려져 있는 정보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그런 행동을 취했다. 그나마 자신이 무림 

에 몸을 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다. 

솔직히 지금 유설린이 한 제안은 너무나 끌린다. 오늘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풍운조가 계속 숨었다면 그 누구도 찾지 못했 

을 거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거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는 

왔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풍운조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이곳으 

로 오고야 말았다. 

무림에 다시는 나서지 않겠다고는 마음먹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그리 

운 곳이다.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겠지?" 

유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희망적인 대답에 유설린은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운휘의 말에 화를 낼 듯해서 끝났다고 생각했는 

데, 한동안 말이 없던 풍운조의 입이 열리니 오히려 희망적인 말이 튀 

어 나왔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유설린은 앞에 있는 차를 마셨다. 그녀가 찻잔 

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풍운조가 말했다. 

"하지." 

"예?" 

"하겠다고. 너도 저기 있는 서운철이라는 놈 닮아 가는 거냐?" 

"생각하실 시간을 달라고……" 

"난 충분히 생각한 거다." 

풍운조는 당당했다. 

그렇지만 유설린은 당황스러운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생각할 시간 

을 달래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한다 

는 말이 튀어 나왔다.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이렇게 빠른 대답을 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니까. 

풍운조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가슴에 얹혔던 무엇인가가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낼 정도면 결코 만만한 자들이 아닐 것이다. 그 정도 

라면 자신을 맡겨도 될 거다. 

오랫동안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었지만 풍운조는 은연중에 기다리고 있었 

다. 

자신을 무림으로 이끌어 줄 그 누군가를…… 

그리고 그 사람을 풍운조는 앞에 있는 이 한 쌍의 남녀로 결정했다. 

"난, 비싸다." 

풍운조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찻잔에 남아 있는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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