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휘는 유설린을 동반하고 밖으로 나갔다. 세가를 나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봤지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 가십니까?"
서운철이다. 그는 여운휘에게 다가와 물었다.
"장염에게 가는 길이니 굳이 그에게 보고 할 필요는 없다."
"예?"
서운철은 여운휘의 말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는 여운휘
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장염에게 가는 것이니 굳이 그 정보를 건네 줄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 말은 자신이 여태까지 정보를 장염에게
물어다 준 것을 알기에 한 말이 분명하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했는데 서운철은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판
단이 서지 않았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지만 여운휘라는 남자는 자신의
뒷조사를 했을 거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정보를 가져다준다는 것
도 알았을 테고.
핑계를 대봤자 구차해 진다.
서운철은 그것을 알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정보를 준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정보가 누구에게 가는지도 알
았을 거다. 그리고 또 장염의 이름을 들먹이며 말도 했다. 여운휘는 왜
장염을 찾아가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도대체 뭐지?'
분위기 상 보복을 하러 가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인데……
장염은 그런 의문을 안은 채로 지금 여운휘와 유설린이 그쪽으로 간다
는 사실을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무림에서 가장 강한 정보력을 가진 곳은 어디일까?
물으나 마나 단연 개방이다. 각 마을에 퍼져 있는 거지들의 수는 헤아
릴 수가 없을 정도다. 모두는 아니지만 거지들 중 많은 수는 개방의 소
속이다. 여운휘가 정보를 얻어 낸 방법은 여기에 있다.
개방의 거지들이라고 하지만 정작 개방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들은
몇 없다. 그리고 나머지들은 그저 개방이라는 이름만을 지니고 정보를
물어다 주는 자들이다. 여운휘는 그들에게 돈을 주었다.
어차피 얻는 정보, 개방에게 넘기면서 그들은 동시에 여운휘에게 그 정
보를 주었다. 어차피 알아낸 것을 같이 보내는 것이기에 그다지 힘든 일
도 아니다. 여운휘는 개방의 문도(門徒) 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노렸
다.
개방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물어다 오는 것이 누구일까? 당연히 수가 가
장 많은 백의개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의결(衣結)도 지니지 못한 가
장 낮은 층의 거지다. 그들은 아무래도 개방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것
도 사실이다.
여운휘가 머리를 쓴 것은 그게 다가 아니다. 개방의 정보를 타인(他人)
이 쓴다는 것을 안다면 개방의 방주를 비롯해 다른 자들이 분노를 할 지
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분명히 무슨 조치를 취하려 들 것이다. 여운휘
는 거지들 하나하나에 돈을 주었다.
마치 그 사람에게만 부탁하는 것처럼. 덕분에 돈을 받은 대부분의 거지
들은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여운휘에게 정보를 보낸다. 거기다
가 이 일에 대해서 발설(發說)하면 앞으로는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
다.
어차피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을 거다.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정보를 준다는 소문이 나봤자 자신에게 좋을 것
은 하나 없으니까.
오랫동안 쓸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여운휘는 필요한 정보력을 얻었
다. 무림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하다. 허나, 이 마을의 거지들 중
얼마를 섭외(涉外) 한 결과 이 부근만은 빠삭한 정보를 지니게 됐다. 우
선 이걸로 됐다.
돈이 조금 더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무림 곳곳에 있는 정보를 끌어들일
수 있을 거다.
그렇지만 지금 만나는 자를 총관으로 섭외 할 수 있다면 정보를 구하는
것은 더 수월해 진다. 그 자는 재력뿐만이 아니라 이미 막강한 정보력
을 지니고 있는 자니까.
그 알 수 없는 존재를 알아 낸 것은 우연이었다.
개방의 거지로부터 악양유가의 정보가 밖으로 세어나간다는 소식을 들
은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가 향하는 곳이 바로 장염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을 더 파고들다 보니 '그' 라는 존재에 대해 나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 '그' 라는 존재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 수
가 없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여운휘는 우선 그쪽에 대한 것을 접었다. 어차피 더 파고 들어봤자 아무
것도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던 탓이다. 장염이라면 알 거다. 여운휘는
그렇게 판단했다. 정보를 마지막으로 다루는 것이 장염이라면, 분명 그
위인 '그' 라는 존재를 아는 게 분명하다.
장염의 거처를 지키는 문지기인 산요는 익숙한 한 쌍의 남녀를 보고 고
개를 숙였다. 많은 손님들이 이곳을 찾아오지만 이 남녀만큼 뇌리에 각
인 된 자들은 드물다.
"장염, 안에 계시죠?"
"그렇긴 합니다만……"
그의 기억으론 오늘 이들의 방문은 예정되지 않았다.
"그럼 저희는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죠."
"저기 제가 알기론 오늘 찾아뵌다는 말씀은 없으신 걸로 압니다만."
"급한 일이 생겨서요."
신원(身元)이 확실치 않은 자라면 어떻게든 쫓아내겠지만 이 둘은 그렇
지 않다. 그다지 친한 관계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신원은 확실하다. 그
리고 이 일대에서 서서히 급부상하는 세력이기라는 사실도 안다. 잠시
망설이던 산요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씀을 드리고 오겠습니다."
"예.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죠."
마음만 먹는다면 힘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이 마당에 힘을 쓸 필요는 없다. 안으로 들어왔던 산
요가 나왔다.
"들어오셔도 된다고 하십니다."
이 부근에선 꽤나 힘을 쓰는 자이건만, 집은 그다지 크지 않다. 유설린
과 여운휘는 짧은 길을 지나 장염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어둡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조차 모두 막은 방은 온통 어둠
뿐이다. 문이 열림으로서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빛은 장염을 비췄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장염이 얼굴을 들었다.
"오랜만이라 해야 하나?"
"뭐 나름대로 오랜만이네요."
"하지만 별로 좋은 일 탓에 온 것 같지는 않군."
장염은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한 상태였다. 여운휘가 어둠 속에서 앞으
로 한 발자국 나서며 입을 열었다.
"네가 우리 세가 내부의 정보를 빼간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지?"
"물론.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지? 내 알기로 당신 둘에게 이렇다 할
정보망은 없는 걸로 아는데."
"개방. 그들의 힘을 빌렸다."
"무, 뭐? 개방?"
말도 안 된다. 개방의 정보망을 개방의 문도가 아닌 자가 어떻게 이용
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장염은 그걸 인
정한다. 개방이 아니라면 자신이 정보를 빼돌린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
었을 거다.
믿을 수는 없지만 은연중에 장염은 여운휘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고 있
다.
"허……"
놀랍다. 놀랍고 허탈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개방의 거지들을 이용할
생각을 그 누가 해 보았겠는가. 실로 뒤통수를 치는 행동이다.
"그래, 날 죽이러 온 겐가."
개방의 거지를 이용한다는 말을 해 주었다. 이건 결코 남에게 밝혀서는
안 될 일이다. 이것을 가르쳐 줬다는 것은 곧 장염이 그 소문을 낼 수
가 없게 될 거라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이 있을까?
가장 완벽하게 소문을 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란.
간단하다! 그건 살인멸구(殺人滅口)다!
죽은 사람은 입이 없다. 입이 없다는 말, 곧 말을 할 수 없다는 거다.
장염의 눈에 여운휘는 결코 약한 자가 아니다. 더군다나 들은 바로 이
름 꽤나 날리는 고수들조차 눈 깜짝할 사이에 벴다고 하지 않던가. 무공
은 조금 배웠지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미 이 곳으로 둘이 찾아 왔다는 것을 들은 순간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
했다.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아마 자신을 죽이고 자신이 가졌던 이 막대한 세력을 어떻게든 흡수를
하려 할거다. 하지만 장염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 라는 존재 탓
이다. 뒤처리는 '그' 가 알아서 다 해줄 것이다. 복수도, 그리고 자신
의 식솔들의 미래도.
불을 꺼 놓은 것은 검을 볼 용기가 없어서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그지
만 떨어지는 검을 보고 있을 만큼 용기는 없다. 눈을 감으면 된다고 하
지만 막상 검이 뽑히는 것을 본다면 주저 앉아서 빌지도 모른다.
그런 추잡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장염은 모든 빛을 차
단한 채로 여운휘와 유설린을 맞이한 거다.
하지만 여운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죽여? 죽이긴 누가 죽여? 그리고 누굴? 내가 널 죽이러 온 거라고 착각
하는 가?"
"날 죽이러 온 게 아니었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것뿐이다."
이상하다. 분명 해서는 안 될 비밀을 말해 놓고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지킬지, 안 지킬지도 모르는 이 마당에 그런 판단을 한다면 그
건 바보이거나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탓이다.
장염은 후자를 택했다.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다. 개방을 이용할 생각은 여태까지 그 누구도
해 본 적이 없으리라.
"그에 대해서 알려고 왔다."
"그라니? 누굴 말하는 거냐."
"네 위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자."
"……"
여운휘가 말하는 자가 누군지 장염은 알아버렸다. 절대로 말해 줄 수 없
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결코 그자에 대해선 말해 줄 수가 없다.
"무슨 소린가. 내 위에서 정보를 받는 자라니."
"이미 알아보고 왔다."
결연(決然)한 태도다. 어떤 말을 해도 이 자에겐 먹혀 들어가지 않을 거
라고 장염은 판단했다. 모른다고 시치미를 때려던 생각이 사라졌다.
"…… 가르쳐 줄거라 생각하나."
"안다는 사실을 좀 더 숨길 줄 알았는데 순순히 인정하는 군."
"상대에 대해 감을 잡았으니까."
"난 그 존재에 대해서 알고 싶다."
"죽여라."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말이다. 자신을 죽인다 해도 결코 그것만은 말하
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거다. 이런 자는 어떠한 고통을 가해도 말
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 전에 혀를 깨물어 죽거나 할거다.
"내일 다시 찾아오지."
"언제 찾아오던 내 말은 같을 거다."
"우선 그 자에게 내가 찾아왔다는 사실이나 알려라. 된다면 내일 이곳으
로 왔으면 한다고 전하고. 아니, 굳이 전할 필요도 없겠군."
여운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더니 유설린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장염
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아마
바로 쓰러졌을 거다.
자신의 말을 전하라는 여운휘의 말은 이해가 갔지만, 그 뒤에 붙은 말
은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전하라고 했다가, 굳이 전할 필요가 없
다니.
"그 분이 널 만날 리가 없지……"
탁.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장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란
나머지 앞으로 몸을 굽힌 장염은 의자에서 볼썽사납게 굴러 떨어지고 말
았다. 황급히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어둠 탓에 의자 건너편이 보
이지 않았다.
천천히 누군가가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저 자의 이름이 뭐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장염은 갑자기 나타난 상대의 정체를 알았다. 이 목
소리는 여운휘가 그토록 찾던 '그' 라는 존재다.
여운휘가 덧붙여 했던 말이 이해가 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 안으
로 들어온 '그' 의 존재를 알아 차렸던 것이다.
"흥미가 이는 친구 군 그래. 나를 알아차린 것도 그렇고…… 개방을 움
직인 것도 그렇고 말이야."
방문자
악양유가라는 현판 앞에 두 명의 노인이 나타났다. 한 명의 옷은 호화스
러운데 비해 다른 한쪽은 남루하기 그지없다.
"악양유가라……"
좋게 옷을 빼 입은 노인이 현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잠시 현판에 시선
을 주었던 노인은 문으로 다가갔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문지기인 왕무
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자 황급히 눈을 떴다.
"아, 무슨 일이십니까?"
자신이 졸지 않았다는 것을 항명(抗命)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는 목청을
높였다.
"가주에게 찾던 사람이 왔다고 전해주겠는가."
"가주 님께 말입니까?"
"그렇다네."
가주는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건 가주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 탓이다. 그런 가주에게 말을 전하려면 다른 사람을 통해야 한다.
왕무는 보초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서운철에게로 찾아갔다. 그는 가주
와 만나는 사람 중 하나다.
서운철은 자신을 찾아 온 왕무의 말에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 가주를 찾아왔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일에 쌓인 듯이 아
무런 정보도 없던 가주에게 손님이 찾아 온 것이다.
"노인이라고?"
"예."
"흐음……"
궁금함이 치밀었지만, 알리는 게 우선이다. 서운철은 유설린과 여운휘
가 있는 곳으로 급히 움직였다. 그들이 머무는 곳은 장원 안의 장원이
다.
악양유가라는 큰 장원 안에 유설린과 여운휘가 머무는 작은 장원이 하
나 있다. 그곳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다. 서운철은 그곳
의 출입이 가능한 자다. 여운휘에게 특별히 그것을 허락 받은 것이다.
자기가 정보를 넘겼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에게
아무 말도 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더군다나 정보를 가져갔던 장염에게도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은 모양
이다.
장원 안으로 들어간 서운철은 방 앞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손님이요?"
"예. 두 분의 노인이라 하시는데 찾던 사람이 찾아 왔다고 하더군요."
"그 두 분을 이쪽으로 모셔요."
서운철은 그 두 노인에 대한 어떠한 것도 물을 수 없었다. 자신이 한 행
동을 그들이 알았는데 그럴 순 없는 일이다.
'혹시 본다면……'
서운철은 어느 정도 발이 넓은 편이다. 혹시 본다면 아는 노인일 지도
모른다. 서운철이 보기에 가주와 그녀의 호위무사는 결코 평범한 인물
이 아니다. 그런 자들과 관계가 있는 자라면 어느 정도 이름이 있는 자
일 확률이 높다.
묻지 못하니 보는 수밖에 없다.
수하를 시켜 이쪽으로 오게 할 수도 있었지만 서운철은 굳이 자신이 가
는 수고를 행했다. 직접 자신이 그 두 노인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다.
악양유가의 정문 쪽으로 가서 본 두 명의 노인의 외모는 생소(生疎)하
다.
한 쪽은 귀티가 흐르는 반면 다른 자는 땟국물이 줄줄 흐른다. 귀티가
있어 보이는 쪽은 어느 부유한 집의 노인일 테고, 남루한 노인은 그의
하인 정도 일 거라 서운철은 지레 짐작했다.
"가주 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허허, 고맙네."
화려한 옷을 입은 노인이 뒷짐을 진 채로 문안으로 들어섰다. 서운철을
따라 두 노인은 유설린과 여운휘가 있는 장원으로 향했다.
서운철을 걸으면서 두 노인의 발걸음을 살폈다. 역시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는 무림인 인 것 같다. 보법이 상당히 안정적이고 호흡도 일정하
다. 반면 남루한 노인은 따라오기에 급급하다. 호흡도 마치 오랫동안 달
린 것처럼 거세다.
갑작스럽게 왜 무인이 찾아 온 것일까?
서운철은 이리 저리 머리를 굴렸지만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
었다. 유설린과 여운휘,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자들이
다. 자신이 만약 그들이었다면 어제 즉각 처분했을 거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로 서운철은 가주의 거처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건물 앞에 유설린과 여운휘가 서서 기다리고 있다.
'중요한 손님인가.'
오랜 시간을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서운철은 그 둘의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다. 그런 그 둘이 이리 나와서 기다릴 정도라면 이 노
인은 분명 중요한 자다.
"만나 뵐지도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찾아오시다니 감사하네요."
"허어, 별 말을 다 하는 구려."
"제가 어제 찾아간 것은 당신의 힘이 필요해서입니다."
"노부(老夫)의 힘이 말이오? 거참, 이런 늙어빠진 노인이 뭘 할 수 있다
고."
서운철은 그제야 이 노인이 뭘 하러 이곳에 온 건지 알 수 있었다. 가주
는 이 노인에게서 힘을 빌리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런 힘을 지니고 있
는 자라면 서운철이 모를 리가 없다. 멀리서 온 자라면 모르겠지만 이
근방에서 온 자 같은데 전혀 본적도, 들어 본적도 없는 노인이다.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저 노인이 가주가 나오면서까지 반길만한 인
물인지 서운철은 의문이 생겼다.
"당신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저희를 도와주세요."
"거참, 이 노인의 뭘 보고……"
말을 끌던 노인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
다.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소. 다만 당신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인지 모르는 이 마당에 무작정 도와줄 수는 없는 법 아니오?"
"그럼 제가 어찌 해야 되죠?"
"비무요."
"비무를 하자고요?"
"그렇소이다."
노인이 원하는 것은 비무다. 그리고 그것은 유설린으로서도 자신이 있
는 것이었다, 유설린에겐 여운휘가 있다. 처음엔 여운휘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유설린은 여운휘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다.
같은 나이 대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무림에서 여운휘를 이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미 여운휘는 마교의 교주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유
백명과 호각(互角)을 이룬 적이 있지 않았던가.
유설린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여운휘의 고개가 약
하게 움직였다. 승낙한 거다.
"좋아요. 받아들이도록 하죠."
"허허, 당연히 저 젊은 소협이 나서겠구려."
"예."
"그럼 우리는 나와 이 친구 둘이서 나가겠소이다."
둘이 나가겠다는 말에 유설린은 다시 한 번 여운휘를 바라봤다. 아무리
그라도 정체를 모르는 두 노인은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잠
시 가만히 있던 여운휘가 아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이군, 그래!"
노인은 신이 나는 어조다. 당장이라도 붙어 보자는 듯이 노인은 급하게
소매를 팔뚝 위쪽으로까지 걷어 올렸다. 노인은 다리를 벌리고 여운휘
를 노려봤다.
"오게, 젊은 친구."
호기로운 그 노인과는 다르게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은 조심스럽게 옆에
서서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 모습이 마치 맹수 앞에서 떨고 있는 토끼
처럼 연약해 보였다.
"오지 않겠다면 내 먼저 감세!"
노인의 양손이 머리통을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강하게 여운휘에게 떨어
져 내렸다. 여운휘가 고개를 비트니 자연스럽게 쌍 장은 어깨로 향했
다. 막 당할 것 같은 긴박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손은 여운휘의
어깨 앞에서 정지해 버렸다.
노인이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은 결코 아니다.
"큭!"
노인의 손이 어깨에 닿기 전에, 여운휘의 손이 노인의 팔 근육을 잡아
버린 것이다. 노인은 신음성을 뱉어내는 것과 동시에 발로 여운휘의 정
강이를 걷어찼다.
빠르다!
그 말이 아니라면 표현 할 말이 없다. 노인은 여운휘가 자신의 팔을 잡
고 있어서 피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확실히 성공할 거라 생각했던 공격이 무위로 돌
아가 버렸다.
여운휘가 팔을 잡은 채로 빙글 돌며 공중으로 올라선 것이다. 살이 뒤틀
리며 노인의 입가에선 참으려 했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으으……"
팔은 잡혀있는데다가, 여운휘는 공중에 거꾸로 서 있다. 다리도 닿지 않
는다. 공격하기 상당히 난해(難解)한 상태다.
여운휘는 완벽하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실력이 대단할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싶다. 아직 승패가 완벽하게 가려진 것은 아니지
만, 이 상태라면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겼군. 그런데 너무나 쉬웠어.'
이긴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예상보다 낮은 무공에 여운휘는 실망을 금
치 못했다. 총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머리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무공
이 낮다면 아랫사람을 통솔하기 힘들다.
'무공을 가르쳐 주기엔 너무 늙었는……'
파악!
여운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운휘는 순간 적으로
느껴진 오싹한 기분을 무시하지 않았다. 분명히 완벽한 기회였음에도 불
구하고 여운휘는 지체 없이 손을 놓고 공중에서 몸을 비틀었다.
여운휘는 땅에 내려서고서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잘못 느낀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여운휘의 눈이 한 쪽에서 멍청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루한 노인에게
로 향했다. 분명히 그 알 수 없는 기운의 근원지는 저곳이었다.
처음부터 그저 하인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호오, 내 살기를 느꼈단 말이냐?"
"…… 뭐 하는 노인네냐."
여태까지 바보처럼 한 마디 말도 없던 남루한 노인이 갑작스레 입을 열
었다. 여태까지 어수룩했던 모습은 사라졌다. 같은 인물임은 분명한데,
다른 사람이다.
"네가 맞춰보지 그래."
"너였구나."
여운휘는 확신했다. 자신이 그토록 찾던 '그' 라는 사람이 바로 저 노인
이었다는 사실을.
"맞췄어, 젊은 친구."
여운휘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렇지만 뭐라고 탓할 수도 없다. 귀티 나
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던 노인이 자신이 유설린과 여운휘가 찾던 '그'
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 한 마디로 겉보기만 보고 지레 짐작한 자신들
의 실수였다.
그제야 여운휘는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의 모습이 자세히 들어왔다. 여태
까지 신경도 쓰지 않아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눈빛이 살아 있다. 신기
한 것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노인의 눈이 살아서 움직인다.
실수다. 행색만 보고 상대를 무시해 버리는 초보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
았다.
'아직 나도 멀었군……'
만약 저자가 자신이 아닌 유설린을 노렸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막을
수 없었을 게다.
생각이 거기까지 치밀자 여운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질책(質責)이
다. 자신에 대한 강한 질책.
먼저 들어온 것은 노인이었다.
노인의 주먹이 여운휘의 앞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기회라고 생각한 여운
휘는 재빠르게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그런데 노인이 갑자기 바짝 붙어
버렸다.
'쳇!'
이 상태론 주먹을 휘두를 수가 없다. 여운휘는 뒤로 물러서며 일격을 가
하려 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다리를 노인이 다리가 감고 있던 것이다.
'제길!'
쾅!
여운휘는 내장이 진탕(震 ) 되는 느낌을 받았다. 노인은 자신의 움직임
을 막고 그 짧은 간격 안에서 장으로 가슴을 후드 린 것이다.
순간 다리가 풀렸다.
'이 상태로 일격을 당하면 끝이다!'
위치가 너무 안 좋다. 무너지는 이 마당에 위에서 강력하게 한 방이 더
가슴으로 터진다면 버텨 낼 자신이 없다. 여운휘는 입술을 깨물고 손을
뻗었다.
막 일장이 여운휘의 가슴을 강타하려는 순간 노인의 옷깃을 잡은 여운휘
가 몸의 방향을 틀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탓에 노인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호오……"
놀란 나머지 노인은 탄성을 내뱉었다. 여운휘가 노인의 뒤를 점해 버렸
다. 움직일 수가 없다. 움직이려 한다면 바로 공격할 것이다. 저 정도
로 젊은 나이에 이 정도의 실력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
다.
과연 저 남자는 누굴까?
정보라면 자신 있는 자신조차도 전혀 알지 못하는 자다. 이 남자뿐만이
아니다. 저기 서 있는 여인에 대한 것도 전혀 없다. 저 정도 미모라면
소문이 나지 않으려 해도 날 수밖에 없을 텐데 전혀 들은 게 없다.
이렇게 만나지만 않았다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한 존재들이다.
뒤를 잡혔음에도 노인은 태연했다. 뒤를 잡힌 것은 자신이지만 위에 올
라서 있는 것 또한 자신이다. 여운휘가 자신에게 살수를 펼칠 수 없다
는 사실을 아는 탓이다. 하지만 자신은 살수를 펼칠 수 있다.
큰 차이다. 한 쪽은 죽이지 않아야 하지만 다른 한 쪽은 죽여도 아무 문
제가 없다.
"어제부터 느꼈지만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야."
"이쯤 하면 된 것 같은데."
"아니,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어."
노인은 뒤도 보지 않고 냅다 발을 뒤로 뻗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한 듯
해 보이는 그 공격도 결코 아무런 생각도 없이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여운휘에게 말을 걸며 노인은 거리 계산을 했다. 그리고 완벽하게 계산
이 끝나는 순간에야 움직인 것이다.
노인의 공격은 빨랐다. 그렇지만 노인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
집중을 하고 있던 여운휘가 그 공격을 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
다.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노인에겐 그다지 상관없었다. 애초부터 상대
를 가격하기 위한 공격이 아닌 자세를 잡기 위한 행동이었으니까. 노인
은 그 공격을 하면서 몸을 돌릴 수 있었다.
자세를 돌리기가 무섭게 노인의 몸이 허공(虛空)으로 솟아올랐다.
"구퇴(九腿)!"
여운휘는 어깨로 발을 막으면서 상대방의 혈도(穴道)를 잡으려 했다. 그
런데 그것이 실수였다. 여운휘는 구퇴의 위력을 몰랐다. 구퇴는 한 번
의 공격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홉 번의 발 차기, 그것이 구퇴다. 그
렇지만 단순히 아홉 번의 발 차기 였다면 문제되지는 않았을 게다.
구퇴의 무서움은 처음 일격이 들어선다면 뒤에 이어지는 후속타인 여덟
번은 고스란히 맞게 된다는 거다. 여운휘는 그 사실을 몰랐기에 구퇴를
몸으로 받으려 했다. 만약 알았다면 그런 실수는 범하지 않았으리라.
처음 일 격을 어깨로 받으며 여운휘는 아미를 찡그렸다. 손만 뻗으면 잡
힐 정도의 가까운 거리, 여운휘는 성공을 직감했다.
'끝……'
퍽!
"윽!"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후속타를 맞았다. 순간 놀랐지만 여운휘
는 서둘러 다음 공격을 막으려 했다. 그렇지만 무너진 균형은 여운휘에
게 그것을 가능케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후속(後續)타가 들어왔다.
차라리 쓰러진다면 피할 수도 있으련만 쓰러질 기회도 주지 않는다. 그
게 바로 구퇴의 무서운 점이다.
아홉 번의 공격이 모두 끝났다.
"이거야 원……"
우위를 점한 건 분명 노인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노인이 놀랐다. 구퇴
를 받고도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은 생전 처음이다. 여태까지 이 퇴법으
로 저 세상으로 보낸 사람의 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외상은 있지만 눈빛은 오히려 아까보다 빛난다.
여운휘는 검을 뽑았다.
그냥 박투로는 이 노인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다. 멀쩡해도 힘든 이 마당에 부상까지 당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서 있
었지만 실상(實相)은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이런 상태로 노인을 완벽하게 제압할 방법은 하나 뿐이다.
오행검법.
'허어, 이것 보세.'
여운휘가 검을 들자 기도가 변했다. 노인은 여운휘의 기도가 변하는 것
을 느끼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서운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운휘도 들어 본 적이 없지만 저 노인 또
한 마찬가지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숨겨진 고수들이 쏟아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제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분명 절정고수들
의 싸움이다.
잘 벼르러진 칼 위를 걷는 것처럼 서운철의 몸은 땀으로 가득했다. 정
작 싸우는 것은 서운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에 흥건한 땀을 느
꼈다. 이런 대결은 아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정도의 대단한 것이
다.
서운철의 눈이 그 둘에게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여운휘의 검이 빠르게 노인에게 다가갔다. 오행검법이 아닌 엄청난 속도
를 자랑하는 전살세(電殺勢)다. 피하긴 했지만 순간 섬뜩했다. 이 정도
속도의 검은 살아 생전 몇 번 본적이 없다.
이번에도 여운휘의 검은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노인은 아까와 마찬가
지로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똑같이 쾌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그것뿐이었다. 뭔가 다르다
고 느꼈고, 그 순간 가슴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아까 보다 더욱 빠르
게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피하지 못했다.
터져 나온 피 탓에 옷이 천천히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분명 똑같은 쾌
였는데 아까와 지금이 엄연히 다르다.
여운휘가 지금 펼친 것은 오행검법의 목(木)이었다. 목의 힘은 근육을
발달시킴과 더불어 눈도 발달시킨다. 똑같은 쾌라도 엄연히 다를 수밖
에 없다.
노인이 처음으로 뒤로 물러섰다.
이곳에 와서 젊은 놈의 실력에 놀랐지만,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
다. 아무리 그래도 새파랗게 어린 자가 아닌가. 그렇지만 이번 공격을
받고 나니 그런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애초에 목을 노렸다면 이 싸움은 끝났을 지도 모른다.
극쾌(極快)다.
이 말 밖에 방금 그것을 표현할 말이 없다.
노인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자 마음먹었다. 쾌검을 쓰는 자라면 거
리를 벌려야 한다. 그것도 자신이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의 쾌검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거리가 먼 탓에 검을 움직이기 위해서 다리가 먼저
움직일 테고, 그것을 이용하면 피하기가 수월해 질 테니까.
예상외로 거리를 벌리는 데 상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다.
여운휘의 다리가 움직이자 노인은 검이 날아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했
다. 재빠르게 피하려 했던 노인은 황급히 방향(方向)을 틀었다. 이번엔
쾌검이 아니다.
'제길! 변검(變劍)!'
방향이 예측이 가지 않는다. 마치 나비가 날개를 팔랑거리듯이, 여운휘
의 검이 흔들렸다. 순식간에 검이 수십 여 개로 변했다. 마치 수십 명
이 한 번에 검을 쏟아내는 것 같다.
노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것을 받아 낼 수는 없다. 받아 낼 수
없다면 피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괜한 집착은 후회를 부를 뿐이다.
노인이 물러서는 길을 따라 검도 움직였다. 마치 노인이 검을 끌어들이
는 형상이다.
노인의 손에서 권력(拳力)이 뻗어져 나왔다. 검의 움직임을 멈출 수 있
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판단 착오(錯誤)였다.
쐐엑!
검은 간단히 자신의 권력을 갈라 버리며 날아들었다. 도저히 피할 방도
(方道)가 없다.
도저히 피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가온 검이 멈췄다.
자신과 바짝 붙은 젊은 남자의 눈에 노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눈
은 본 적이 없다. 사람의 눈이라고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눈이다. 그 눈
을 보는 순간 생각나는 것은 맹수였다. 그것도 상처가 난 맹수.
그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힘은 둘째 치고라도 지금 이
남자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물러서고만 싶다.
"…… 인정하지. 내 패배야."
노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여운휘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노인은 검
에 바짝 닿아 있던 목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잘못했다면 방금 세상과 영
원히 이별을 할 뻔한 것이 아닌가.
여운휘는 입가를 흐른 핏자국을 손으로 쓰윽 문지르고는 유설린의 뒤로
돌아갔다.
"그럼 이제부터 이야기가 제대로 되겠지요?"
"뭐, 그래야 되려나?"
유설린의 말에 노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비록 자신이 한 약속은 아니었
지만, 애초부터 흥미가 없었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리고 지
금 그 감정은 더 했다.
자신이 누구인가. 지금은 이렇게 모습을 감추고 살지만 한 때는 이름 꽤
나 날리던 고수가 아니던가. 그런 자신을 부상당한 몸으로 너무나 쉽게
꺾었다.
흥미가 일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안으로 드시죠."
"그러지. 아, 넌 여기 남아 있거라."
"예, 어르신."
아까 와는 달리 귀티 나 보이는 노인은 고개를 숙였고, 남루한 옷차림
인 노인은 어깨를 쫙 펴고 유설린이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서려 했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노인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어이, 너도 들어와."
"예? 저 말입니까?"
멍청히 서 있던 서운철은 자신을 부르자 황망히 답했다.
"그럼 너 말고 또 누가 있냐?"
"아, 예……"
서운철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재빠르게 노인에게 다가갔다. 정체
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런 고수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장염에게
알려야 한다. 이건 여태까지 전했던 정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
로 커다란 것이다.
서운철은 장염과 이 노인이 아는 사이임을 몰랐기에 그리 생각하고 움직
였다.
서운철까지 들어오자 유설린은 문을 닫았다.
방안에는 유설린과 여운휘, 이름도 모르는 노인과 서운철만 남았다. 잠
시간 조용히 침묵이 일었다.
"차라도 한잔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