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유가의 건물 안에는 넓은 공터가 있다. 무공을 익히기 위한 연무장
같은 곳인데, 아직은 제대로 개방이 되지 않은 곳이다. 무인들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특별히 안 된다는 말은 없었기에 악양유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멀찍
이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봤다. 들리는 풍문(風聞)으로는 악양유가의 가
주가 나온다고 했다. 엄청난 미녀라는 소리도 있고, 엄청난 덩치의 거한
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런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기회이니 쉴 시간을 버리는 것도 아깝지 않
다. 악양유가 내부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공터에 모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앞에 모여 있는 무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이미 싸운 자들
도 있지만, 아직은 서로를 견제하는 처지다. 그런 그들이 한 자리에 모
이니 분위기는 삭막(索莫) 할 수밖에 없다.
폭탄이다.
누군가가 건드린다면 바로 터져 버릴 폭탄.
와글거리는 소란 속에서 앞쪽에 두 명이 나타났다. 한 명은 남자요, 나
머지 한 명은 여자였다. 소란이 사라졌다.
저 둘의 정체가 무엇인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저 여자가 소문의 가
주임이 분명하다. 소문대로 엄청난 미인이다.
서로를 노려보던 무인들조차 단상 위로 올라선 유설린의 모습에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귀에 스며들었다. 내공을 이용한 탓이다.
"제가 악양유가의 가주입니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일이 있어서 모두
모이라고 했습니다."
유설린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이후부터는 여운휘의 일이다.
"내가 너희들을 모은 것은 일이 있어서다."
앞에 있던 무인들의 얼굴에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
의 동생 뻘 밖에 되지 않는 놈이 반말을 뱉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그 남
자가 상급자인 이상 받아 들여야 한다. 무인들의 눈에서 이는 감정을 여
운휘가 놓칠 리가 없다.
"너희들이 요즘 안에서 소란을 핀다는 소리를 들었다. 누가 가장 강한
지 궁금하기라도 한가? 멍청한 행동들 작작해라."
만약 상관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단상 위에 올라가 두들겨 패 버렸
을 거다. 여운휘는 잠시 그들을 내려다 보다 말을 이었다.
"가장 강한 자가 궁금한가? 그러면 소개해 주지. 바로 나다."
"푸하하!"
참지 못하고 결국 능려운이 웃음을 터트렸다.
능려운은 요즘 악양유가에서 벌어진 시시한 싸움에 끼여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능려운의 이름을 아는 탓에 다른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 근방에서 그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다.
비록 뒷골목이나 전전하는 낭인 중 하나지만, 실력은 뛰어난 편이다.
"왜 웃지?"
특별히 누구를 향하지 않았던 여운휘의 시선이 능려운에게 박혔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능려운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잠시 더 웃던 능려운이
웃음을 멈췄다. 순간 그의 눈에서 싸늘한 한기가 들어찼다.
"웃을 때야 뻔하지. 우스우니까. 그러니까 웃었다."
아무도 능려운이 나섬에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는 것을 보고 여운휘는
이 남자에 대해 대충 파악했다. 분명 이 안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을 정
도로 대단한 실력을 지닌 자 일거다.
이 안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는 자, 그렇다면 해야 할 행동은 뻔하다.
결투다.
능려운은 느긋하게 앞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단상을 향해 걸어가던 그
의 입이 열렸다.
"당신이 가장 강하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군 그래."
능려운의 옆에 있던 자들이 옆으로 갈라졌다. 은연중에 분위기를 느낀
탓이다.
팔짱을 끼고 서서 능려운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올 테면 오라는 일종의
도발이다. 여운휘가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꽤나 다혈질이군 그래."
"그럴까?"
능려운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단상에서 내려오는 여운휘를 다혈질이
라 판단했다. 물론 실상은 그게 아니지만 능려운은 아직 그걸 몰랐다.
"박투가 낫겠지?"
"마음대로."
여운휘는 이 자를 죽일 마음은 없다. 이런 일 가지고 사람을 죽인다면
다른 자들도 사소한 실수만 벌여도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할 것이다. 그
렇게 되면 아무도 악양유가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 선에
서, 월등한 실력 차만 보여주면 된다.
여운휘가 팔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천천히 원을 만들며 돌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반대쪽에 서 있던 능려운도 여운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원
을 만들며 돌았다.
'착각했군.'
다혈질이라 판단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심히 자신을 쳐다보는 눈은 결
코 다혈질 적인 성격의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다혈질이 아닌데
도 불구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내려온 것은 이유가 있었을 게다.
어느새 주변에는 여운휘와 능려운의 대결을 보기 위해 커다란 원이 만들
어진 상태였다. 무인들은 능려운이 건방진 남자를 흠씬 두들겨 팼으면
하며 그 둘을 바라봤다. 그리고 능려운이 저 젊은 남자를 혼을 내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정작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빈틈이 없다!'
손을 아래로 축 내린 것이 마치 쳐 달라고 하는 것처럼 비추기도 했지
만, 막상 앞에 서니 빈틈이 없다. 마치 사방을 철로 된 장벽이라도 친
느낌이다. 빈틈을 찾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니 상대가 어떤 자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짐작이 간다고? 아니, 그건 거짓말이다.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얼마만큼이나 강한 자인지. 분명한 것은 생에 최고
가는 고수라는 거다.
땀을 흘리던 능려운이 살짝 실소(失笑)를 흘렸다.
그토록 싸워보기 원했던 강호의 일류고수가 분명하다. 꿈이 이루어 졌으
니 기쁘지 아니 할 수가 있겠는가.
능려운은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가 없다. 지고
나서 생각을 해도 늦지는 않다. 그리고 질 마음도 없다.
분명히 빈틈이 없다. 하지만 없다면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닌가.
우선 부닥쳐 보자고 생각하며 능려운의 발이 여운휘의 복부를 노리고 달
려들었다. 생각은 길었지만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최대한 빠르게 발을 움직인 거지만 거리가 거리이다 보니 여운휘는 가볍
게 그 공격을 피해냈다. 실패했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능려운의 발이 옆
의 허공을 걷어찼다.
애초부터 계획된 공격이었거늘 그것마저 여운휘는 피했다.
실패했다는 것은 아쉽지만 오히려 능려운은 신이 났다. 몸을 낮게 낮춘
능려운이 여운휘를 보며 눈을 번뜩였다.
여운휘는 호기롭게 빛나는 능려운의 눈을 보고 이 자가 이 싸움을 즐기
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상보다 빠른 움직임에, 피하는 순간 바로 옆
을 차는 판단력도 높이 살만했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이 싸움을 더 끌
생각은 없었다.
몸을 낮춘 능려운이 재빠르게 다리를 놀리며 주먹으로 여운휘의 가슴을
쳤다.
분명 성공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새끼손톱
하나만도 못한 공간을 남겨 두고 여운휘에게 손목을 붙들려 버렸다. 자
신의 공격이 빨라서 가까스로 잡아 낸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내 공격이 지척까지 다가오는 것을 구경했다는 건가.'
자신 또한 이쪽에서는 이름 꽤나 날린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자기를 이
남자는 가지고 노는 게 분명하다. 지척까지 다가올 때까지 공격을 지켜
볼 정도라면 싸워보나 마나 결론은 나온 셈이다. 그렇지만 수긍 할 순
없다.
"크압!"
오른 손이 잡혔으면 어떠랴. 왼 손이 있거늘!
전체적으로 몸이 낮춰져 있다 보니 왼손을 위쪽에서 아래로 떨어트렸
다. 여운휘의 턱을 노린 일격이었다. 이것만 친다면, 이것만 성공한다
면……
능려운은 자신이 갑자기 끌려간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받기가 무섭게 주먹에서 아련한 통증이 일어났다.
'끝이다……'
더 이상은 덤빌 마음도 들지 않았다. 자신의 오른 손을 잡고 있던 손의
팔꿈치로 날아오는 주먹을 받아냈다.
패배다, 완벽한 패배.
이렇게 방어를 할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피해 내거나 손으로 쳐냈다
면 이토록 허망하지는 않았을 거다. 이 근방에서 가장 이름 있는 낭인
인 자신이 겨우 한 손에 제압 당했다. 비록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는 못
했지만 나름의 실력에 자신이 있던 능려운이다.
자부심이 산산이 무너져 버렸다.
역시 제대로 무공을 배운 자들은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능려운은 고개
를 떨궜다. 옛날에 어렸을 때 그는 무척이나 몸이 약했다. 마을에서 힘
꽤나 쓰는 아이들에게 당하고 살다가 사부를 만났다.
기본 적인 내공심법과 몇 가지 무공을 가르쳐 준 것이 다였지만 그 후부
터 능려운은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능려운은 자신이 강해
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은 무릎을 꿇고 있지 않은가.
변했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고 능려운은 생각했다.
좌중(座中)에 있는 모든 무인들은 말이 없었다. 능려운이 특별하게 공격
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승패를 가르는 건 어렵지 않다. 너무
일방적이라 순간 뭔가 벌어졌나 할 정도다. 그저 주먹 몇 번 날리더니
대결이 끝나 버렸다. 맥없이 끝나긴 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능려운이 이름 없는 자였다면 웃으면서 욕을 했을 게다. 그렇지만 능려
운은 이 일대에선 가장 유명한 낭인이다. 그런 그가 저 정도로 손쉽게
질 정도라면 상대는 이야기 할 필요도 없다.
여운휘가 잡고 있던 능려운의 손을 놓았다.
"가장 강한 자가 누구인지 알았을 거다."
아까 처럼 불만스러운 눈빛이 많이 사그라졌다. 여운휘의 실력을 보니
그다지 틀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탓이다.
"너희들은 이곳에 고용됐다. 이 안에서 말썽을 부리는 일은 없어야 한
다. 그리고 너."
여운휘가 자신을 가리키자 능려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배를 인정하
기는 했지만 아직 마음에 와 닿지 않은 상태다.
"뭐요."
어느새 능려운의 말투는 반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네가 오늘부터 이들을 관리해라."
"……?"
"네가 이들을 관리하라는 말이 그리 이해하기 어렵나?"
"그 말은…… 내가 이들의 대장을 하란 말이오?"
"아는 군."
능려운이 채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여운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만 있는 놈은 지금 나와라."
여운휘의 말에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곳에서 능려운 만한 강
자도 없을뿐더러, 여운휘에게 반대 의사를 내세울 생각도 없었다.
"대장이 생겼다. 앞으로 싸우게 된다면 내가 아닌 이 자의 선에서 해결
될 것이다. 그리고 넌 날 따라와라. 그럼 이만 해산이다."
여운휘는 단상 위에 있는 유설린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도와 준 후에
천천히 거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멍청히 서서 머뭇거리는 능려
운을 향해 유설린이 말했다.
"어서 오지 뭐해요."
"아, 예."
자신도 모르게 능려운은 유설린에게 어른에게 하는 듯한 극존대를 해버
렸다. 능려운은 여운휘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세가 건물 중앙부에 위치한 곳.
가주가 산다고 알려진 장소에 능려운은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안은 수
수한 편이었다. 특별한 장식보다는 효율적인 것들이 안을 장식하고 있었
다.
"앉아요."
능려운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유설린의 건너편에 앉았다. 자신을 굴복시
킨 남자는 가주의 뒤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능려운이라 합니다."
"이름이 멋지네요."
"그,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엄청난 미인이 자신을 칭찬하자 능려운을 얼굴을 붉혔다. 여운휘처럼 잘
생겼다고는 보기 힘들지만 정감 있게 생긴 능려운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말해서 전 당신이 왜 이곳에 온지 몰라요."
"예? 그런데 왜 저를……"
"운휘가 당신을 오게 한 거지 제가 오게 한 것은 아니죠."
맞는 말이다. 아까 전 능려운에게 따라 오라 한 것은 가주가 아닌 남자
였다. 능려운은 유설린의 뒤에 서 있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넌 내가 말한 그 순간부터 아까 그들의 대장이 됐다."
"……"
다 아는 사실이다. 굳이 저걸 상기시키려 부른 것은 아닐 거다. 능려운
의 말대로 여운휘가 그를 부른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너도 알 거다. 나와 너의 실력차이를."
"지독하게 잘…… 알게 됐소."
"넌 강해져야 할 의무가 있다. 아까 그들을 통솔할 대장이니까. 네가 약
하다는 말은 우리가 약하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당신이 무공이라도 가르쳐 주겠다는 거요?"
"그래."
빈정거리며 말하던 능려운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단순한 빈정거림이었는
데 그렇다고 대답하니 무엇을 말하랴.
"정확히 말해서는 내가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지만 너에게 무공을 익히
게 도와줄 테니 일맥상통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며칠 안에 책을 만
들어서 주지."
"책이라니?"
"내가 아는 무공을 거기다가 적어서 주겠다는 말이다."
능려운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몇 가지 무공을 익히기
는 했지만 내세울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들이다. 그런 자신에게 지금
은 분명 호기(好期)였다.
이 남자는 분명 강호에서 일류 고수 취급을 받는 자일 것이다. 그런 자
가 주는 무공이 결코 녹록(碌碌)할 리가 없다.
"그럼 이만 나가 봐. 조만간 다시 부르지."
능려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가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그 무공을 익힌다면 당신을 이길 수 있겠소?"
"아니."
여운휘의 대답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말에 능려운은 피식 웃음
을 흘렸다. 이길 수 없다는 말에도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래, 그 정도는 돼야지. 그래야 내가 목표로 한 보람이 있지.'
그런 무공 하나 익혔다고 꺾일 상대는 필요 없다. 평생을 바라만 봐야
할 상대일지도 모르지만, 능려운은 마냥 기분이 좋았다. 목표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그래야 기쁨도 커질 테니까.
"훗날, 반드시 당신보다 강해지고 말 거요."
"아니, 네가 나보다 강해져도 넌 날 이길 수 없다. 난 절대 질 수 없으
니까."
능려운은 여운휘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강한 자에게 지는
건 당연한 거다. 그런데 질 수 없으니 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해가 가
지 않는 말이다.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모르겠군. 하지만 나 또한 앞으로는 결코 지지
않을 생각이요."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단순한 헛소리에 불과할 거다."
"걱정 마시오. 확실히 강해질 테니."
능려운은 그 말의 의미를 모른다. 하지만 유설린은 여운휘의 말이 무엇
을 의미하는지 안다. 알아도 너무나 잘 안다. 예전 그녀의 앞에서 했던
맹세가 아니던가.
능려운이 문을 닫고 나가고 나서 유설린은 여운휘를 보면서 웃음을 흘렸
다.
"왜 그래."
자신을 보면서 웃는 유설린의 얼굴을 보며 여운휘가 말했다. 잠시 더 웃
음을 흘리던 유설린이 여운휘의 말에 답했다.
"아니, 그냥."
잠시 고개를 땅으로 숙였던 유설린이 고개를 들며 여운휘에게 말했다.
"운휘, 우리 술이나 한 잔 할까?"
"술은 무슨……"
말은 그랬지만, 여운휘 또한 그리 맘에 들지 않는 건 아닌 듯 싶다.
여운휘는 능려운을 위해 검법과 권법을 하나씩 준비했다.
이미 여운휘의 머리에 가르쳐 줄 무공들은 박혀 있으나, 그것을 그대로
가르쳐 줄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여운휘가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마교의 무공이다. 문제는 바로 그거다.
그걸 그대로 썼다가는 덜미를 잡힐 게 분명하다. 여운휘의 오행검법이
야 직접 견식(見識)해 본 자가 없을 테니 문젯거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운휘가 능려운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것들이다.
초식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조금의 눈속임일지라도 변형(變形)을 가해
야 한다.
비록 눈속임일지라도 초식에 변형을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
다. 그 탓에 여운휘는 며칠 동안 한 가지 권법과, 한 가지 검법에 매달
렸다.
밤이 깊었다.
유설린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여운휘는 머릿속에 있는 것들에 약간의
응용을 가하면서 비어 버린 책자에 글씨를 채어 넣었다. 여운휘가 움직
이던 붓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며칠 동안의 노력 끝에 다 끝나 가기
는 하지만 끝난 탓에 붓을 멈춘 것은 아니다.
여운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후우……
숨을 몰아쉬는 소리다. 누군가가 지붕 위에 있다.
지붕 위에서 잠시 느껴졌던 기척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여운휘가 바라보
는 것을 알아차린 게다. 공격을 할 수 있었지만 여운휘는 그리 하지 않
았다. 아직은 쓸데없는 일을 일으킬 때가 아니라는 판단 탓이다.
아직은, 아직은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할 때다.
'어디의 조무래기인가.'
여운휘는 다시 아래로 시선을 내리고 책에다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네가 누구였든 간에 네가 소속된 곳은 곧 무림에서 사라질 것이다.'
아침이 밝을 때까지 여운휘는 미동(微動)도 않고 글자만 계속 적어 내려
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 했군."
근 십여 일 동안 한 작업이 끝났다. 큰 변화는 주지 않았지만 이 정도라
면 마교의 무공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다. 유설린은 식사를 하다
여운휘가 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끝낸 거야?"
"그래. 예상보다는 조금 더 걸렸지만."
여운휘는 문을 열고 밖에 있는 당영을 불러 능려운을 불러오라고 말했
다. 명령을 내리고 난지 얼마 되지 않아 능려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앉아요."
"아, 예."
능려운은 두 번째로 대면하는 상황이지만 유설린의 외모에 익숙해지지
가 않았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유설린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다
른 세계에 있는 기분이다.
잠시 유설린을 보며 멍해졌던 능려운은 여운휘가 내미는 두 권의 책자
를 보자 눈을 크게 떴다. 여운휘가 일전에 말했던 무공이 분명하다.
"받아. 어느 정도 기초는 있는 것 같으니 이거면 충분할 거다. 우선은
시간이 없었으니 그 두 개 먼저 받아라. 추후(追後) 시간이 된다면 다
른 것도 적어서 주지."
"……"
능려운은 두 권의 책자를 받아 들고 아무 말도 없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이 저 남자에게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능려운은 너무
도 잘 안다.
여운휘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일 끝났으면 나가."
"알겠소. 그런데 가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려고 하오. 이 권법과 검법의
이름은 뭐요? 자신이 익히는 무공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소?"
"이름이라……"
마교에서 불리는 이름으로 가르쳐 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애써 초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겠는가.
"네 멋대로 불러라."
"흐음, 뭐 알겠소."
굳이 물을 마음은 없다. 능려운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
다.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능려운은 책을 펼쳤다. 안에서는 흥분한 자신
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 했다. 하지만 능려운은 아까 책
을 받는 그 순간부터 이미 펼쳐 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상태였다.
이곳에서 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능려운은 연신 책장을 넘겼다. 가
슴이 두근거린다. 이건 결코 삼류 무인들이 배우는 무공이 아니다. 아
직 몸을 움직여 보지는 않았지만 능려운은 그냥 느꼈다.
'당장 실험해 봐야겠군.'
능려운은 책을 들고 황급히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이제야 갔군."
문 건너편에서 능려운이 책을 보며 내내 서 있는 동안 한 마디 말도 하
지 않았던 여운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두 가지의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또는 그것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다.
능려운은 후자다. 능려운이 후자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토록 원했던 것
이니 갈구(渴求)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저 남자가 얼마나 강해질까?"
"하기 나름이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분명 무골(武骨)이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유설린은 여운휘를 무턱대고 믿는다. 어떤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여
운휘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 것이다. 물론 그런 믿음이 무턱대고
생겨 난 것은 아니다. 유설린은 순수하다고는 해도 멍청한 여인은 결코
아니다.
누구에게 이용이나 당할 정도로 유설린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가를 세
우는 데 필요한 것 중에서 반 수 정도는 유설린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
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총관에 대해서는 알아봤어?"
"대충."
총관으로 적합한 사람을 알아 봤다.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기인이다. 무공도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은 그의 정보를 모으는 능력이다. 더군다나 그 자는 막강한 재력도 지니
고 있다.
지금 악양유가의 정보도 이미 그 자의 손으로 들어갔다. 결코 소문을 흘
리지 않았는데 정보를 알아 낼 수 있던 원인은 간단하다. 이 안에 첩자
를 심어 놨다. 아니 첩자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정보만 가져다주는 사람
을 심어 놨다는 것이 정확하다.
세가를 세우고 철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구입하다 보니 그 많던 재산도
거의 밑천을 드러내는 형편이다. 이 와중에 그 자를 잡는다면 일거양득
(一擧兩得)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그의 막대한 재산, 그의 능력 모두를 가질 수 있다.
"그 자를 잡는 다면 다른 사업 하나에도 더 끼여들 수 있을 거다. 큰 재
력가거든."
"정말? 그런 사람이 있었단 말이야?"
유설린도 현재 사정이 그다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패물들이 엄청난 고가품이라고는 하나 세가를 세우는 것은 한 두
푼 드는 일이 아니었다.
"섭외하기 힘든 사람이지?"
"물론."
이 부근의 돈과 정보를 움직이는 자지만 막상 그 자의 실체를 아는 자
는 드물다. 여운휘도 며칠 전에야 간신히 꼬리를 잡아 정체를 알아냈
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자를 알 만한 자를 알아냈다는 것이 정확
하다.
알려졌다면 이미 다른 곳에서 눈독을 들이고도 남았을 자다. 이쪽으로
오라는 말을 그냥 받아들일 자가 아니다.
"나도 그 자에 대해선 아직 아무 것도 몰라. 하지만 난 그 자를 아는 자
를 알지."
"누군데?"
"너도 알 거야."
여운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장염."
"장염? 그 사람?"
장염, 서운철과 당염, 삼일을 소개 시켜 준 남자다. 그다지 특출 난 것
은 없어 보이는 남자라는 것이 그의 첫 인상이었다.
이 근방을 움직이는 손, 그것을 지닌 자를 아는 남자 장염.
"오늘 만나 보러 가야겠군."
가서 물어본다고 말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쉽게 알 수 있었
다면 여태까지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그 자를 끌어 들여야 한다. 실패한다고 해
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겠지만, 굳이 지름길이 있는 마당에 돌아갈 필
요는 없다.
"좋은 꿈꾸었나."
아직 떠오른 지 얼마 안 된 해를 바라보며 여운휘가 중얼거렸다.
오늘은 손님을 만나야 한다. 아주 중요한 손님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