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포기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객잔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창문이 작은 탓에 한 번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층에 들어서자마자 나가떨어진 곽산 곽괴 형제를 보았다. 부서
진 문 조각과 함께 나뒹구는 곽산, 곽괴를 보며 그들은 상황을 어렴풋
이 나마 짐작했다.
부서진 문 조각을 발로 걷어차며 방 안 쪽에서 천천히 여운휘가 걸어 나
왔다.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악귀(惡鬼)가 내려온 듯 섬뜩했다.
여운휘가 다가오자 곽산, 곽괴는 앉은 채로 뒷걸음질 쳤다. 꽤나 자존심
이 있던 그 둘로서는 상상도 못할 행동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기에……'
이들을 이끌고 온 고적산은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압도되는 자신들을
느꼈다. 이건 거물(巨物)이다. 거물도 보통 거물이 아니다.
고적산은 오늘 이 일에 말려든 것에 후회가 치밀기 시작했다. 여운휘의
눈빛은 마치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사신(死神)의 눈빛, 그 자체였
다.
여운휘가 이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 이들을 죽이려 했다면
굳이 유설린을 깨게 하지 않고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운휘가 유설
린이 깨게 하면서도 그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결코 동정 때문이 아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 꺼림칙한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
이 없지도 않다. 아까 객잔에 난입(亂入)하기 전에 공격했다면 그들은
소리도 없이 죽어 나자빠졌을 거다.
관부(官府) 탓이다. 이곳은 무림인이 많은 곳도 아니니 관이 개입하는
게 어렵지 않다. 관이 개입하면 일이 귀찮아 진다. 더군다나 관이 나선
일이라면 마교 쪽에서도 냄새를 맡은 거다. 도망치는 건 일도 아니지만
사람을 죽인 자들이 남자 하나에 여자 하나라면 마교 쪽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쪽으로 손길을 뻗칠 거다.
그래서 살려주는 것이다.
탁.
여운휘가 약하게 발을 움직이자 나뒹굴던 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파악!
주먹으로 공중으로 날아오른 문을 가격했고, 그 문은 그대로 침입자들
을 향해 날아갔다.
"어어!"
당황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길은 양쪽으로 막혀 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그들은 모두 넘어지고야 말았다.
"뭐 하는 놈들이냐."
창문을 통해 들어온 놈들과 마찬가지로 이 자들 또한 형편없는 자들이었
다. 어디서 무공을 익힌 것 같긴 한데 대단치는 못하다.
"저, 저기……"
여운휘가 죽일 거라 생각했는지 고적산이 나섰다. 방금 날린 문을 다섯
명이나 달라붙었는데 막지 못했다.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가 분명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들을 죽이는 것은 순식간이리라.
여운휘의 눈이 고적산에게로 향했다.
"방에 계신 소저가 진귀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에……"
"돈이나 노리는 잔챙이였군."
혹시나 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마교의 인물이라 보기에는 너무 약하다
생각했거늘, 남의 짐이나 노리는 도둑에 불과했던 것이다.
"데리고 사라져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고적산은 여운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격돌했다면 대부분이 죽거나 병신이 되었을 거다. 고적산은 옆에
있는 두 명의 수하에게 살짝 눈짓했다. 곽산과 곽괴를 데리고 오라는 신
호였다.
그들은 곽산과 곽괴를 서둘러 부축하고 그 객잔을 빠져 나왔다.
큰 소란이 일었지만 객잔 주인인 유태만이 미리 손을 써놔서 아무도 나
오지 않았다.
여운휘는 도망치는 그들을 창문을 통해 내려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
다. 유설린이 멀뚱하게 여운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좀도둑이야."
"헤에…… 그나저나 문이 부서졌네."
"상관없어. 물어달라고는 하지 못할 테니까."
"왜?"
"그런 게 있어. 넌 어서 잠이나 자."
여운휘는 다시 침대 옆쪽에 주저앉았다. 한바탕 움직이긴 했지만 여운휘
는 금새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음 날 여운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짐을 챙겼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마교의 세력권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수 있다. 짐
을 챙긴 여운휘는 유설린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가, 가시려고요?"
점소이가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응, 지금 갈 거야."
유설린은 그렇게 답하고는 객잔을 나서려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
걷던 여운휘가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다리를 멈췄다.
"아, 객잔 주인에게 전해라. 부서진 문에 대한 돈은 주지 않겠다고. 이
유는 본인이 알 거다."
여운휘는 말을 마치고 어느 한 쪽을 쳐다보았다. 잠시 그곳을 바라보던
여운휘는 몸을 돌려 유설린과 함께 객잔 밖으로 나갔다.
여운휘가 바라 본 곳, 그곳 뒤편엔 객잔의 주인인 유태만이 벽에 기댄
채 떨고 있었다.
이곳에 숨어서 그들이 나가는 것을 봤다. 그런데 분명 그 남자의 마지
막 눈빛, 벽을 뚫어지게 보던 그 눈빛은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아
는 눈치였다.
그 눈빛을 받는 순간 유태만은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단단히 포박(捕縛) 된 것처럼.
몸 곳곳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돈은 주지 않는 이유를 안다는 것도 무슨 의민지 유태만은 안다.
자신이 꾀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
게 알아차린 것일까? 고적산에게 들은 바로는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 이
야기도 없었다고 했는데.
그 남자가 나갔지만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린다. 참지 못한 유태만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 저 놈은 도대체……'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
로 마력(魔力)적인 눈이다.
'인간이 맞는 걸까?'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생각 밖에 나지 않는다. 방
금 그 남자가 인간이 아니라 해도 믿을 것이다. 그 정도로 유태만에게
여운휘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여운휘가 있는 곳으로부터 며칠 정도의 거리가 떨어져 있는 마교.
마교에 일었던 혈풍이 서서히 잠잠해 지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웠던 마교
는 부교주에서 교주로 등극한 엄백린에 의해 천천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
기 시작했다. 고위직에 있던 수많은 무인들이 바뀌었다.
옛 고위직에 있던 쓸만한 자들은 회유(懷柔)를 해 보고 안 되면 가두거
나 죽였다. 마교의 핵심 세력에는 엄백린의 수하들로 차기 시작했다.
마교의 주인이 바뀌었다.
마교를 손에 넣었지만 엄백린의 마음은 심란했다. 아직 유설린을 찾지
못한 탓이다.
"아직도 못 찾은 거냐."
그 일을 전적으로 위임(委任)받은 진린은 고개를 숙였다. 아직 꼬리조
차 잡지 못한 것이다. 중간에 핏자국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듣고 다 잡았
다고 생각했다. 한데 피를 따라가 보니 마교 내부에 있던 첩자가 죽어
있었다.
"도대체 왜 아직까지 못 찾는 거냐!"
쨍그랑!
엄백린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진린의 얼굴을 스쳐 지나
간 찻잔은 땅과 부닥치며 그 모습을 잃어버렸다. 진린의 뺨에서 실같은
얇은 상처가 생기더니 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
"…… 후우, 그럼 금천멸문대를 죽인 자들은 알아봤느냐?"
"……"
조사는 해 봤다. 그렇지만 믿기 힘든 결과가 나와버렸다.
"왜 대답이 없느냐?"
"……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한 명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검법은 다르지만 진린 정도 되면 상처를 봐서 이것저것 알아내는 건 어
려운 일도 아니다. 믿기 힘들지만 금천멸문대 십 사인이 한 명에게 당했
다.
"한 명?"
"예. 상처를 보니 같은 것 같습니다. 몇 명이 똑같은 무기를 쓴걸 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한 명인 듯 합니다."
엄백린은 눈을 찡그렸다. 그 정도 고수가 유설린이 도망을 치는데 도와
준다면 일이 귀찮아 진다. 그런데 그런 고수가 누가 있을까. 마교의 장
로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지 오래다. 그렇다고 이 근처를 정파의
절정고수들이 다닐 리도 없다.
'은거기인(隱居奇人)?'
은거기인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은거(隱居)라 함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곳 주변은 은거할 만한 조건을 지니지 않았다.
여태까지 쭉 말이 없던 사무린이 입을 열었다.
"여운휘, 그 자일 거예요."
"여운휘?"
진린은 생소한 이름에 되물었다.
"소교주의 호위무사의 이름이에요."
"아아, 자네가 말했던 '그'라는 자의 이름이 여운휘인가 보군. 그런데
그 남자일 거라니?"
"금천멸문대를 죽인 자요. 분명 그 자예요."
"하하!"
진린은 웃기 시작했다. 이 여자가 능력이 뛰어 난 것은 알지만 역시 다
소 미흡하다. 금천멸문대가 누구인가? 마교의 전설이다. 그런 자를 혼
자 벤 자가 아직 젊은 나이의 호위무사라고 생각하니 어찌 우습지 않을
까?
"좀 과장이 심한 듯 하네. 예전에도 자네 때문에 금천멸문대를 보내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별로 내키지 않았지."
"내가 얼마 전에 싸워 본 적이 있는데 금천멸문대 십 사인을 이길 정도
는 아니었다. 반 년 정도 밖에 안 됐는데 그 동안 그토록 실력이 급상승
했을 리는 없고."
"솔직히 말해서 금천멸문대의 실력은 자세히 몰라요. 그렇지만 제가 아
는 여운휘로서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정도는 확실하죠. 저도 여운휘
가 그들을 이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여운휘 그
남자는……"
여운휘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지만 금천멸문대의 십 사인을 이길
수 있을 수준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 다른 사람이라
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운휘라면 왠지 모르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남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남자니까요."
초석(礎石)
해야 할 것이 많다. 마교를 손에 되찾기 위해선 우선 힘을 가져야 한
다. 문제는 힘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힘도 여러 가지가
있다.
무력, 권력, 돈 등.
무력 하나로 마교를 되찾는다는 건 무리다. 그렇다고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돈은 당장 쓰기에는 넘칠 정도로 많지만 이 정도 돈으로 거사
는 무리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일까?
여운휘는 세력(勢力)을 꼽았다.
세력이 있어야 한다. 무림맹으로 가는 것도 좋지만 세력이 없다면 그 안
에서 강한 발언권(發言權)을 가지는 것은 힘들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
다. 묵살(默殺) 될 정도의 약한 발언권이라면 없으니 만 못하다.
물론 여운휘 정도 되는 고수라면 무림맹에서도 반가이 맞아들일 것이
다. 신분이 약간 불확실하긴 하지만 기인의 제자라고 생각할 테니까. 문
제는 그게 다라는 거다. 그 정도 가지고는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회의 같
은 것에 참석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정파 무림인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겨우 떠돌이, 그것도 한 여자의 호위
무사일 뿐인 여운휘에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가르쳐 줄리 없다.
여운휘는 소모품으로 전락 될 생각이 없다.
힘이다.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개인의 힘이 아닌, 무리의 힘이.
여운휘는 초석을 쌓으려 한다. 기초가 되는 초석이 있다면 그들도 함부
로 못할 것이다. 그 초석으로 여운휘는 세가를 꼽았다.
돈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조그마한 세가 하나 만들 정도는 된다. 유설린
이 가지고 있는 패물은 보통 가격이 아니었다.
다소 값이 나갈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객잔에서 작은 가락지 하나를 바꾸
었을 뿐인데 들어온 돈을 보고, 겉으로 내색은 안 했으나 조금 놀란 건
사실이다.
당연히 그것은 값비쌀 수밖에 없었다. 유설린의 어머니인 엄여홍의 패물
들이 싸구려일 리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유설린의 패물 또한 교주 유백
명이 신경 쓴 만큼 좋은 물건들이었다.
어머니의 유품이지만 유설린은 신경 쓰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유품은
하나 뿐이라며 그것만 항상 품에 지녔다. 다른 패물들은 어찌 하든 유설
린은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 또한 마교를 되찾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거대한 집 한 채와 무기를 사야하고, 사람들을 받아 들여야 한다. 집은
사면 끝이지만 무기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속적으로 돈이 나갈
것이다.
더군다나 세가를 만든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단순히 세가의 주인
이라고 무림맹에서 발언권을 지닐 수는 없다. 중원에는 수많은 세가가
있다. 그 많은 세가 중에서 정작 이름 꽤나 있는 세가는 스무 개도 되
지 않는다.
개중 무림맹에서 발언권이 있는 세가는 그 반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 세가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 세가가 힘이 있어야 하는 것
이다.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선 세가에 부를 축적(蓄積)해야 한다. 거
기다가 무림에 이름을 날릴 만한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된다.
부가 축적되면 사람수도 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당연히 무림맹 쪽에서
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비로소 움직여야 할 때다.
지금 같은 상황으로 무림맹에 무턱대고 들어가 봤자 이용만 당할 뿐이
다.
'세가라……'
머리가 다소 복잡하다. 세가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사람들을 모으는 것
은 힘든 일이 아니겠지만 정작 중요한 돈벌이를 정하는 것이 쉽지 않
다.
여운휘의 옆에서 조용히 모닥불을 바라보는 유설린 또한 이것저것 생각
중이었다. 이미 여운휘에게 대략적인 계획을 들었다. 세가를 만들자는
여운휘의 말에 유설린은 좋은 생각이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악양(岳陽)으로 가자."
"악양에서 무엇을 하려고."
악양은 호남성에서 가장 큰 성시(成市)를 이루는 곳이다. 전혀 어울리
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며 수륙교통의 중심지다.
유명한 곳이고, 사람도 많은 건 사실이지만 이곳에 가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예전에 책에서 봤는데 주주(株州)라는 곳 근처에서 철의 산출(産出)이
많데. 철을 가공하자."
"철이라……"
분명 좋은 생각이다. 철이나, 소금만큼 돈이 되는 것은 별로 없으니까.
문제는 철의 가공에 있다. 가공이란 것이 초보자가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전문가를 구해야 하고 만약 철의 가공을 못해
낸다면 망하고 말 것이다.
"세가의 본 건물은 사람의 왕래가 잦은 악양에 만들고, 다른 사람을 고
용해서 주주에서 철을 생산해서 가공하는 거야."
해볼만한 도박이다.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근처에 있는 다른 세가
의 압박을 받긴 하겠지만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힘을
써 오던 여운휘는 막아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어차피 지금 호남에 있다. 악양도 방향만 조금 돌린다면 며칠 걸리지 않
을 것이다.
잠시 말이 없던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악양……"
이미 여운휘의 마음은 굳혀졌다.
"파실 거죠?"
선녀 같은 여인이 나타나 묻는 말에 장염은 대답하지 못했다. 벌써 육
십 줄에 들어선 나이 탓에 이제는 어떠한 여자를 봐도 아무렇지 않을 거
라 생각했던 그이거늘 지금만은 분명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살아오면서 본 여인 중 가장 미녀다. 그런 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
니 어찌 정신이 나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염은 대답하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 여인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아, 아아…… 충분하고 말고."
제 정신을 차린 장염은 그제야 그 여인의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있었다.
고개를 잠시 들었던 장염의 눈에 여인의 뒤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들어왔
다. 여인보다는 몇 살 많아 보이는 남자인데,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대단한 미남이다.
약간 차가운 듯 한 것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남자였다.
'에잉, 남자가 있었구먼……"
아쉬워 할 이유가 없을 터인데도 괜스레 기분이 찜찜하다. 남자가 없었
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었거늘 아쉬운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이 넓은 집을 사서 도대체 뭘 하려는 건가. 소저 같은 사람이 살기엔
커도 너무 크다고 생각되네 만."
"저만 살 게 아니거든요."
"흐음……"
도대체 이 어린 여자가 무엇을 하려는지 장염은 궁금했다. 척 보니 귀하
게 자라온 어느 대갓집 여식 같은데 왜 이렇게 직접 오면서까지 건물을
사는 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례인 줄은 알겠지만 무엇을 하려는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어차피 얼마후면 아시게 될 거예요. 그럼 전 이만…… 아,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 두어 명 좀 제가 산 건물로 보내주세요. 그 사람들을 고용할
때 쓸 돈은 제가 지불할게요."
여인이 일어나자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그녀의 뒤로 돌아섰다.
장염은 그 아리따운 여인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코를 벌름거렸다. 떠나
가 버린 선녀 같은 여인의 향기를 단 한 번이라도 더 맡기 위해서……
밖으로 나온 유설린이 여운휘에게 말했다.
"이제 세가가 될 건물은 해결이네?"
여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가가 될 건물을 사느라 돈이 만만치 않게 나갔다. 악양의 중앙에 위치
해 있으며 큰 건물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틀 이상을 소비해서
야 지금 산 곳을 겨우 찾은 것이다.
우선 집을 관리할 사람 두어 명을 고용해야 한다. 그건 아까 만났던 장
염이라는 노인이 해결해 줄 것이다.
유설린과 여운휘는 무림맹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머물러 가는 것이
아니다. 건네 받은 종이를 주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
니다.
가는 김에 그들의 머리 속에 이름하나를 심어 줄 생각이다.
악양유가(岳陽柳家)!
이제 막 시작이지만 그들의 머릿속에 심어 둔다면 훗날 스쳐가듯이 듣는
다 해도 주의를 기울이게 될 거다. 여운휘는 그것을 노렸다.
무림에서 이름께나 날리는 자들의 입을 타는 것만큼 좋은 홍보는 없다.
번거롭긴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이 탓이다. 무림맹을 갔다가 바로 주주
로 가야 한다. 좋은 곳을 알아도 봐야 하고 기술자도 구해야 한다. 작
업 환경도 만들어 줘야 하고 일꾼들도 사야 한다.
할 것이 많다. 하지만 사람 수는 단 둘이다.
더군다나 둘은 언제나 같이 움직이니 하나라 봐도 무방했다. 둘은 천천
히 걷기 시작했다.
"먼저 주주로 내일 오는 사람 중 하나를 보내 사전 답사를 하게 해야겠
어. 뛰어난 기술자랑 좋은 철광을 알아봐야 할 테니까."
"그래야겠지. 그럼 우린 바로 주주로 가서 둘러만 보고 괜찮다 싶으면
돈만 지불하면 되니까."
"그럼 내일 무림맹으로 떠나는 거야?"
"특별한 일이 없다면."
여운휘는 앞으로 자신들의 거처가 될 건물 앞에 서서 묵묵히 그것을 바
라봤다. 유설린은 천천히 걸어가더니 닫혀 있는 문을 밀어 젖혔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드러난 건물 안의 풍경을 보며 여운휘는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모든 것이 시작될 장소다. 이 집, 이곳으로부터 여운휘의 일보는 시작
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건물로 낯선 사람들 세 명이 찾아왔다.
"장 대협이 보내셨나 보군요."
"아, 예……"
힘 꽤나 쓰게 보이고, 또한 보이는 바대로 힘은 자신 있는 서운철은 유
설린의 외모를 보는 순간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장염에게 미인이
라는 소리를 듣고 왔지만 이 정도일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잠시 여인의 모습에 넋을 잃고 있는 서운철의 몸에 일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오싹한 기분이 스쳐지나갔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것만
같은 기분에 서운철은 정신을 차렸다.
한 남자였다. 여인의 뒤에 선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꿀꺽……
서운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자리에서 한 발이라도 움직였다면
바로 죽을 것만 같았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하던 서운철로서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름 꽤나 있는 고수와 만났을 때도 이토록 두
렵지는 않았다.
상대방의 눈을 보면 어느 정도 의중(意中)을 파악하겠는데 저 남자는 아
니다. 오히려 눈을 바라보니 한없이 그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다.
"저희는 급히 어디를 나가야 해요. 그렇지만 며칠 동안 쉬지는 못하실
거예요. 이름들이 어찌 되시는지……"
"제 이름은 서운철이고, 이 날카롭게 생긴 녀석은 당영, 그리고 저기 있
는 이 중 가장 조그마한 저 녀석이……"
"삼일이라고 하죠."
서운철의 말을 가로채며 삼일이 나섰다.
그들의 모습을 주시하던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서운철, 너는 이곳에 남아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 놔라. 그리고 당영과
삼일, 너희 둘은 주주로 가서 우리가 시키는 것을 알아봐라."
서운철은 기가 찼다. 자신도 어느 정도 존대를 해주는데 상대방은 완전
한 하대를 한다. 한참은 어린놈이 반말을 하는데도 서운철은 함부로 뭐
라고 할 수가 없었다. 고용주기도 하지만 아까 이 남자에게서 풍겼던 기
도가 내심 마음에 걸리는 탓이다.
아주 짧은 순간 표정을 굳혔지만 여운휘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서운철, 내가 반말을 해서 불만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아, 아니오."
신분이 높은 자들 같다는 말을 들었는데 괜히 밉보였다가는 큰일이다.
배알이 뒤틀려도 참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난 너뿐만이 아닌 누구에게도 존대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의 주인
인 이 여자에게 마저."
"……"
여운휘는 품속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 한 장은 서운철에게 나머지 한 장
은 당영에게 건넸다.
"너희가 해야 할 일들이다. 당영과 삼일, 너희는 그냥 알아만 보면 된
다. 우리가 어디를 갔다가 바로 뒤따라 갈 테니 며칠동안만 기다리면
될 거다. 그리고 서운철 너는 그곳에 적힌 것을 준비해라."
말수가 적은 여운휘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유설린으로서도 처
음 보는 것이었다. 옆에서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유설린의 반응을
알면서도 여운휘는 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서운철 네가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현판(懸板)을 만드는 거다."
"무슨 현판 말입니까?"
"몇 십 년이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을 정도의 좋은 나무에 음각으로 파
넣어라. 악양유가라는 네 글자를."
"설마 지금……"
장염으로부터 겨우 두 명이 살기엔 너무나 큰 건물을 사갔다는 말에 의
아해 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이제는 알았다.
"세, 세가를 세우시려는 겁니까?"
"그래. 그것도 오대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견줄만한……"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가 없는 말이다. 오대세가와 어깨를 나란
히 견줄만한 세가를 만들겠다니 그게 말이나 될성싶은가. 몇 백년의 전
통이 살아 내려오는 오대세가를 이제야 만드는 세가로 어깨를 나란히 한
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우선적으로 힘이 없다. 돈은 꽤 있나 보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오대세
가는 몇 백년이라는 긴 세월을 흘러 내려온 가전(家傳) 무공들을 지니
고 있다. 무공을 익혀 무림에 이름 쟁쟁한 고수들도 많이 배출했다. 그
들의 입김이 무림에서 강하게 먹혀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세가
와 나란히 어깨를 견주겠다고?
좋게 봐 주면 꿈이 큰 거고, 솔직하게 말하면 미친 거다.
"우리는 오늘 이곳을 떠난다. 돌아오기 전에 모든 것을 해결해 놓길 바
란다. 가자."
아무 말은 없지만 서운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운휘는 알고 있다. 분
명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렇다. 당금(當今) 무림에서 누가 이 말을 듣고 경계하겠는가. 서운철
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단순한 헛소리로
치부될게 분명하다.
'하지만 말이야……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그 일은 불가능
한 일이 되어 버리는 거다. 가능성을 버리는 것은 인간의 한계(限界)가
아닌 바로 그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이다.'
일일이 말해서 무엇하랴. 입만 아플 뿐이고 귀찮기만 하다.
훗날 보여주면 된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이 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