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武林盟), 무림맹으로 가자."
"무림맹? 내가 알기로 그곳은……"
"그래. 정파인들이 모이는 곳이지.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벌레처럼 싫어
하는 마교의 인물들이고."
안다, 여운휘가 그것을 모를까? 정파의 소속된 자들은 사파의 인물들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들의 친우(親友)를 죽였으니 당연한 거다. 하지
만 사파 쪽도 입장은 마찬가지다.
사파의 우두머리, 그게 바로 마교다. 여운휘와 유설린이 마교의 인물인
이상 무림맹으로 간다면 보나마나 감금(監禁) 될 것이다. 그들이 활개
를 치고 다니게 놔둘 정도로 정파인들의 자존심은 녹록(錄錄)치 않다.
그렇지만 지금 가야 할 곳은 무림맹이다. 그곳이 유일하게 마교에 대항
할 수 있는 힘을 지녔으니까.
며칠 전 동굴 앞에서 죽었던 남자가 전해 주었던 종이, 이건 그들이 무
림맹 안으로 들어갈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여운휘와 유설린이 무림맹에 들어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알려지
지 않은 둘의 외모였다. 마교 소교주는 밖으로 모습을 내비친 적이 없
고, 여운휘 또한 잡혀오자마자 사곡에 갇혔던 자다. 그 둘의 외모를 아
는 자는 마교 교주였던 유백명, 사무린, 지금 교주로 등극한 엄백린, 풍
유랑 정도다.
마교에 아무리 많은 첩자가 심어져 있다 해도 그 둘의 외모는 정파 쪽
에 알려지지 않았으리라.
"힘을 길러야지. 이 종이도 건네 줘야 하고."
"하지만 정파 쪽에서 우리를 받아줄까?"
"우리가 마교의 인물이라는 소리만 안 하면 돼. 알다시피 우리 둘은 얼
굴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아……"
유설린의 잎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계획
이다. 무림맹으로 가자니…… 유설린으로서 그건 생각조차 해 본 적도
없다.
유설린은 앙증맞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아버지를 죽인 자, 이제는
외숙부라는 칭호조차 아까운 자 마교 부교주에서 교주로 등극한 엄백린!
'기다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내가 돌아갈 테니까. 그때는 당신이……'
처음 마교를 나왔을 때는 여운휘와 유설린은 무턱대고 움직였다. 그렇지
만 지금은 아니다. 방향을 약간 선회(旋回)한 그들은 무림맹 쪽을 향해
움직였다. 마교가 있던 곳과 무림맹이 있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은 당연하다.
덕분에 무림맹까지 가는 일도 보통 시일이 걸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묵묵히 걷던 여운휘가 잠시 유설린을 멈추게 한 후 주변을 둘러봤다. 주
변의 풍경이 며칠 동안 걸어온 곳과 달랐다.
"아무래도 근처에 마을이 있는 것 같다."
사람 발자국은 물론이거니와 동물들의 발자국도 찾으려 하면 너무나 쉽
게 발견된다. 이건 근처에 마을이 있다는 증거다. 더군다나 다듬어진 주
변의 풍경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위적인 것이리라.
곳곳에 사람의 흔적이 보인다. 분명히 이 근처엔 마을이 있다.
"마을이 있다고?"
"그런 것 같군."
여운휘는 주변을 둘러보며 풀이 눕혀진 방향을 살폈다.
"저쪽으로 가자."
무턱대고 유설린은 여운휘가 가자는 방향으로 걸었다. 점점 유설린의 입
이 커지기 시작했다. 마을이다, 마교에서 나온 이후 처음 도착한 마을.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유설린에게 아래쪽에서 왔다 갔다 거리는 사람
들은 마치 꽃들을 가꿀 때 보아왔던 개미 같았다. 물론 크기 면에서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거대했지만 말이다.
"…… 정신차려."
"으응."
유설린은 마교에서 마을에 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곳과는 사뭇 다
른 분위기, 그리고 마을이라는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더욱 색달랐다.
유설린은 여운휘의 재촉에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옆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설린의 발걸음에서 조급함이 느껴졌다. 빨리 가보고 싶은 것이리라.
마을 안으로 들어선 유설린은 다시 한 번 마을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뒤
에서 묵묵히 그녀를 지키고 있는 여운휘도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유설린은 마을의 풍경을 보지만 여운휘는 혹시나 위험한 것이 있을까 하
는 마음에 주변을 살피는 것이다.
수상해 보이는 자들은 없다. 그렇지만 여운휘의 손은 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객잔 먼저 찾자."
"아, 객잔 먼저 잡아야 하는 거야?"
"식사도 해야 할 테고, 잠도 자야 할 테니까."
식사만이 아닌 잠 잘 수 있는 공간도 딸린 객잔을 찾아야 한다. 귀찮게
밥은 이곳에서, 잠은 저곳에서 자는 번거로운 행동을 할 필요는 없으니
까.
그렇지만 현재 시중에는 돈 한 푼도 없는 상황이다. 유설린이 값비싼 패
물(佩物)들을 가져 나와 그것들을 처분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만져 볼
수도 없을 큰돈이 생기긴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무일푼이다.
근처에서 패물을 팔만한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이상 우선은 객잔 먼저
찾아야 한다. 객잔의 주인에게 묻는다면 근처에 패물 파는 곳 정도는 가
르쳐 줄 테니까.
유설린은 그제야 힘들다는 사실을 상기(想起)했는지 주변에 한눈을 팔
지 않고 여운휘와 함께 객잔을 찾는 데 열중했다.
찾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여운휘는 객잔을 발견했다. 사람들의
왕래(往來)가 잦은 탓인지 객잔은 꽤나 큰 편이었다.
유설린이 앞장서서 객잔 안으로 들어섰고, 여운휘가 바로 그 뒤를 쫓았
다.
객잔은 늦은 시간 탓인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유설린과 여운휘가 들어서
자 사람들의 시선은 그 둘에게 쏠렸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과 옥
을 깎은 듯한 깔끔한 외모의 남자가 나타나니 당연한 결과다.
꽤나 대단한 미녀들을 봐왔다고 자부하는 장백조차 저런 미녀는 처음 본
다. 이 동네 기루(妓樓)의 제일미인인 취옥 조차 저 여자 앞에 선다면
평범하다고 보일 정도다. 장백은 손에 든 술잔을 들이킬 생각을 않고 멍
하니 그 여자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여운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구석자리를 가리켰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유설린은 여운휘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여
운휘는 유설린의 뒤에 섰다.
앞에 의자가 있지만 여운휘는 그곳에 앉을 마음이 없다.
점소이는 남자가 서 있자 왠지 불안해서 그곳으로 다가가야 하나 말아
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 주문."
"아, 예!"
점소이는 허겁지겁 여운휘에게로 다가왔다.
"팔보채(八寶菜)."
"예 팔보채 곧 대령하겠습니다. 저기 그런데 불편하신 거라도 있으신
지……"
"그딴 거 없으니까 가서 음식이나 가져와."
"뭔가 불편하신 게 있으셔서 서 있으신 듯 한데…… 의자가 더럽다 하시
면 말씀이라도 주십시오. 제가 당장……"
"없다고 했다."
여운휘의 말에 점소이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허겁지겁 사라졌다. 무뚝뚝
한 여운휘의 말에 지레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여운휘는 특별한 것 때문에 서 있던 것이 아니다. 마교에 있을 때도 유
설린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한 적은 드물다. 하물며 지금에야 말해서 무엇
하랴.
"힘들텐데 앉지 그래?"
"됐다. 앉으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힘들어."
"하지만 너도 힘들텐데……"
"괜찮다. 네 예상보다는 훨씬 멀쩡하니까 마음 쓸 필요 없어."
이 객잔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닌 듯 하면서도 이들의 말에 신경
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탓에 먼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익숙하다. 더군다나 객잔에 있는 사람의 반 정도는 이곳에 일
이 있어서 온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그들이 여운휘와 유설린의 말에 신경을 기울이는 걸까?
첫 번째는 출중한 외모 탓에 눈이 가는 것이오, 두 번째는 그들의 허리
에 차져 있는 검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 둘의 관계는 왠지 이상했다.
저 남자가 부하 같기도 한데 대하는 것을 보면 또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음식이 곧 나왔고 유설린은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유설린이
식사를 하는 동안 점소이를 불렀다.
"주인을 불러와."
"아, 알겠습니다."
강압적인 어투에 어느 정도 불만이 생기기도 하련만, 정작 당사자인 점
소이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 따위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 천안객잔(闡岸
客棧)의 주인인 유태만을 부르러 움직였다.
한참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던 유태만은 짜증이 솟구쳤다. 객잔에서
일하는 점소이 한 놈이 다가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이 확 깨
버렸다. 침까지 흘릴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가 깨어나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뭐냐!"
"어떤 손님이 주인님을 찾으셔서……"
"이런 멍청한 새끼! 찾는다고 그냥 와! 그냥 없다고 하거나 하면 될 것
아니냐!"
"하, 하지만 상대가 그럴 만한 자가……"
이 녀석은 이 천안객잔에서 일한 지 오래 된 자다. 그만큼 눈치가 있고
해서 평소에 유태만도 아끼는 점소이다. 유태만은 혹시나 자신을 불렀
던 자가 갑부 같은 자가 아닐까 싶어 되물었다.
"혹시 그 날 부른 손님이 옷이 좋거나 했느냐?"
"아니요. 검은 색 상의와 하의로 간단하게 입은 게 오히려 없어 보이던
데요."
"이런 썅! 그럼 왜!"
"무, 무인입니다."
"무인?"
유태만은 무인이라는 말에 오히려 코방귀를 꼈다.
마교의 인물들은 마교 안에서나 생활하지 이곳까지 올 일이 없다. 더군
다나 마교와 근접했으니 정파의 인물들이 이곳에 올 리도 없다. 온다해
도 그건 갓 강호에 출두한 애송이다. 한 마디로 무인이라고 이곳에서 뻐
기는 자들 중에서 제대로 된 놈은 없다는 거다.
알량한 무공 조금 익히고 까부는 정도라면 유태만은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었다.
물론 이 근처에는 마교의 생활을 참지 못하고 나온 몇몇의 무림인이 있
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그들과는 낯을 튼 사이가 아니던가. 유태만은
지금 자신을 찾는 무인이 애송이일거라고 생각했다.
"감히 내 단잠을 깨웠단 말이지?"
유태만은 문을 열고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당장이라도 고함을 지르려
던 그는 여운휘와 눈이 마주쳤다.
'헉……'
고함을 치려고 열렸던 입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딴에는 마교 근처에 살다 무공을 주워 배운 그다. 비록 대단한 실력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객잔을 운영하다보니 고수들과도 만나 본 적이 있
고, 눈치도 빠르다.
유태만이 본 여운휘는 고수다.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엄
청난 고수.
만약 고함을 쳤다면 바로 목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유태만은 등줄기
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그는 조심히 여운휘에게 다가갔다.
"절 부르셨습니까?"
"그래."
새파랗게 어린놈이 찍찍 반말을 내뱉었지만 그것가지고 뭐라고 할 용기
가 유태만에게는 없었다.
'제길 운 한 번 더럽게 없군.'
이런 자를 만나면 좋은 일이 일어나기보다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 쉽
다. 그 남자의 앞에서는 이 일에 관심도 없다는 듯이 한 여자가 먹을 것
을 먹고 있다. 이 남자와 동료인 것 같은데……
"패물 중에서 가장 작은 거."
여운휘가 말하자 유설린을 먹던 것을 멈추고 품안에서 작은 가락지 하나
를 꺼냈다. 유설린은 고개를 돌려 여운휘에게 그것을 건네주려고 손을
뻗었다.
'허억!'
아까는 이 남자 탓에 놀랐는데 이번엔 여자 탓에 놀랐다. 대단한 미녀
다. 무림인 중에서는 미녀가 많다. 한때 세상을 돌아다녔던 유태만은 예
쁘다고 소문난 세가의 여인들을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
다.
여운휘가 묵묵히 손을 내밀었다. 잠시 넋을 잃고 유설린을 바라보던 유
태만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여운휘가 건네준 것을 건네 받은 유태만
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운휘가 준 것은 가락지다. 그런데 이걸 어쩌라는 말인가.
"이 가락지를 좀 처분해 줬으면 하는 군."
"아, 예."
유태만은 가락지로 고개를 내렸다. 옥색 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것이 결
코 평범한 가락지는 아니다. 가장 작은 패물이 이 정도라면……
유태만의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지금 바꿀까요?"
"그래."
유태만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개를 숙이는 것을 봤을 텐데 그 남자
는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 천상(天上)의 미모를 지닌 여인의 뒤
에 서서 조용히 있기만 할 뿐이다.
'건방진 놈……'
화는 나지만 참아야 한다.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고수니
까.
유태만은 객잔 밖으로 나가 받은 가락지를 돈으로 바꾸기 위해 걷기 시
작했다.
"어, 얼마라고?"
"은 오백냥."
"이 조그마한 게?"
"나도 놀라울 정도의 상등품(上等品)이야. 그나저나 어떻게 이런 귀한 물건
을 구했나."
"아니 난 그저 돈으로 좀 바꿔 달라고 해서 가지고 온 건데……"
객잔 주인은 그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외모에서도 귀티가 나는 것이 분
명 부잣집 딸 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부잣집 딸로 치부할
수준이 아니다.
'분명해. 그 계집애는 대부호(大富豪)의 딸일 게야.'
어쩐지 입고 있던 옷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더군다나 생긴 것 또한 어디
가도 빠질 것 없는 양갓집 규수 같지 않던가. 그렇다면 그 남자는 호위무
사일 것이다.
그 여자는 철없이 가출을 하였을 테고, 그 호위무사는 중간에 고용되었거
나 아니면 처음부터 따라왔을 거다. 유태만은 자신 멋대로 이것저것 예상
을 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맞는 것도 있었지만 틀린 것도 많았다.
'겨우 호위무사였던 주제에 내게 눈을 부라렸어?'
유태만은 자신을 쏘아 봤던 젊은 남자의 얼굴을 상기했다.
잠시 넋을 잃고 있던 그는 이곳의 주인인 고적산이 돈을 건네자 퍼뜩 정신
을 차렸다. 아주 조그마한 가락지였을 뿐이거늘, 손에 들어온 돈은 객잔의
몇 달 수입과 맞먹는다. 꽤나 돈을 버는 편인 자신에게 그 정도라면 다름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정도라면 넷 정도 되는 가정에서는 일 년 정도는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리라.
'이게 가장 작은 패물이라……'
유태만은 욕심이 일기 시작했다. 돈을 눈앞에 두고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평소에 돈 욕심이 많던 유태만은 더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유태
만은 마침내 결심했다.
그는 고적산에게 다가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왜 그래."
"쉿, 입 다물고 이리 와 보게."
고적산은 귀를 가져다 댔고, 유태만은 아까 들었던 말을 그에게 전했다. 말
을 듣고 난 후 고적산의 입은 커졌다.
"이게 가장 볼품없는 거라고?"
"내가 그렇게 들었다니까 그래."
작은 거라고 말했지 볼품없는 거라고 말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유태만은
자신이 멋대로 말을 만들어 냈다. 크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다
른 물건은 이 가락지보다 가격이 약할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다 해도 결
코 싸구려 물건은 아닐 게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말인데 사람 좀 모아줬으면 해서 말이야."
"당연하지! 그나저나 낮에는 힘들 테니 역시 새벽에?"
"그렇게 해 주게. 알다시피 나도 장사는 해야 하는 처지니 신용(信用)을 잃
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알겠네, 알겠어. 이 근방에서 무공을 아는 녀석들을 모두 끌어 모으지. 걱
정 말고 가서 그자들 비위(脾胃)나 맞춰 주고 있게."
유태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 봄세."
유태만이 객잔에 도착할 무렵에야 유설린도 먹던 것을 끝냈다. 여운휘는
묵묵히 손을 내밀었고, 그 손에 유태만은 가락지와 바꾼 돈을 건넸다.
여운히는 유태만에게서 건네 받은 돈 중에서 일부를 그에게 다시 돌려주었
다.
"이건……"
"하루치 숙비와 식비다. 모자라지는 않을 거다."
"아, 예."
하대(下待)가 너무 자연스러운 남자다. 호위무사 주제에 라고 순간 깔보기
도 했지만 아무리 봐도 평범한 자가 아니다. 기운이 안으로 갈무리 된 것
이 결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삼류 무사는 아닌 게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호위무사나 할 남자는 아니라는 거다.
새벽에 있을 거사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자다.
'상당한 실력자 같긴 한데……'
솔직히 일말의 불안도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이리라. 하지만 한 손은 열 손
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유태만은 지금 이는 불안을 단순히 일을 벌이기
전의 떨림이라 치부(置簿)했다.
"절 따라 오시죠. 가장 경치가 좋은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유태만은 여운휘와 유설린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섰다. 그는 오늘밤을 위
해 가장 잠입하기도 쉽고, 소리도 차단할 수 있는 구석진 곳으로 둘을 이
끌었다. 유태만이 다리를 멈췄다.
"이 방에 무사님께서 묵으시고, 저기 끝 방에 이 소저가 묵으시면 됩니다."
남자였다면 방 두 개를 주는 게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남자와
여자였다. 하물며 주인과 호위무사라면 더더욱 한 방에서 머물기를 꺼려할
것이다. 유태만은 그것을 이용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남자 무사가 여자의 방으로 지정해 준 곳으로
쓱 들어간 것이다. 처음엔 방에 무엇이 있나 조사를 하려나 했지만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짐을 풀었다.
"저, 저기 이 방은 이 소저께……"
"우리 둘은 이 방을 쓸 거다."
"예?"
여운휘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문을 닫아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객
잔 주인은 유태만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버렸다.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남자와 여자 단 둘이 한 방을 쓰는 일도 그렇거니와
신분의 차이도 있지 않은가.
'끄응……'
둘을 각기 다른 방에 머물게 하면 쉽게 해결 할 수 있었을 텐데 일이 귀찮
아 졌다.
한편 안으로 들어온 여운휘는 유설린의 짐을 구석에 가져다 놓았다.
유설린은 여운휘가 짐 정리를 하는 것을 옆에 침대에 앉아서 빤히 쳐다보
고 있었다. 여운휘는 짐 정리를 끝내고 허리를 폈다.
"나가고 싶어?"
"응."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늘 여운휘가 먼저 물어온다. 유설린은 솔직하게 대
답했다.
"지금은 안 돼. 어차피 앞으로는 많이 돌아다니게 될 테니까 한 동안만 참
아. 오늘 쉬지 않으면 앞으로 여행이 더 힘들어 질 거야."
"알아. 그래서 조르지도 않은 거고."
유설린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바로바로 말하는 여인이다. 예전 같
았다면 밥 먹는 내내 나가자고 졸랐으리라.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
니라는 것은 유설린도 알고 있다.
투정을 부려야 할 때가 있고 부려서는 안 될 때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부
려서는 안 될 때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침대에 올라가서 자라. 그동안 그토록 침대에
서 자고 싶어했잖아."
자려고 하니 쌓여 있던 피로가 갑자기 몸을 급습했다. 유설린은 손을 하늘
로 향하게 하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난 잘게."
여운휘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유설린의 침대 옆에 주저앉아 있던 여운휘도 침대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
았다.
잠에 빠져 있던 여운휘의 눈이 살며시 열렸다.
눈을 가리고 있던 눈꺼풀이 벗겨지면서 드러난 여운휘의 눈은 주변의 어둠
마저 흡수할 듯 했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어떤 자들 때문
인지 깨버리고 말았다.
여운휘는 창 옆에 서서 살며시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저
건너편 쪽에 몇 명이 숨어 있다.
'마교에서 보낸 자들 같지는 않고……'
삼류무사나 간신히 면한 자들이다. 마교에서 저런 자들을 보낼 턱이 있겠
는가. 아직 이쪽을 노릴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분명 신경에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들을 노리는 자일지도 모르지만 여운휘는 별 감흥이 일지
않았다.
여운휘는 올 거면 오라는 듯이 다시 유설린의 옆에 가서 주저앉았다.
숨어 있던 그자들이 천천히 움직이나 싶더니 역시나 이 건물 벽을 타고 오
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주변의 움직임에 신경을 쏟아 붇던 여운휘는 검
을 오른손으로 옮겨 쥐었다.
끼이익……
아주 작은 소리지만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쉿."
이어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 지금 들린 창문 열리는 소리 탓에 주의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운휘는 이미 일어난 지 오래였다.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침대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헉!"
시선을 던졌던 남자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한 쌍의 눈.
언제부터 잠에서 깨었던 걸까. 어둠 속에서 그 한 쌍의 눈은 창문을 넘어
서 들어온 남자에게 공포를 가져다주기 충분했다.
"왜 그래?"
조용히 속삭이듯이 말하며 뒤 따라 들어온 남자도 여운휘의 눈을 보는 순
간 굳어 버리고 말았다. 여운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인가."
우선적으로 들어온 그 둘은 자리에서 굳은 그대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여
운휘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음부터는……"
여운휘는 굳어 있는 두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두 남자를 손으로 들어
올린 여운휘는 그 둘을 문으로 던져 버렸다.
쾅!
문이 보기 좋게 반으로 부서지면서 그들은 밖으로 퉁겨 나갔다. 여운휘가
말을 이었다.
"…… 이곳으로 들어와."
유설린은 이곳으로 들어온 자가 놀라 외치는 순간 깬 상태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채 상황을 보고 있었다. 굳이 일어날 마음은 들
지 않았다.
여운휘의 손에 날아간 자들은 자신이 봐도 우스울 정도의 무공 실력을
지녔으니까.
여운휘 탓에 문을 부숴 버린 그 둘의 곽괴와 곽산 형제였다. 외공을 익
힌 탓에 이 부근에서 힘 꽤나 주고 사는 처지다.
그런데 너무나 우습게 당해 버렸다.
겉보기에 여운휘는 한 주먹거리도 안 될 남자 같아 보인다. 키는 큰 편
이지만 그다지 거대하다고는 느껴지지 않는 여운휘와 대조적으로 곽괴
곽산 형제의 덩치는 엄청났다. 저토록 호리호리한 몸에서 어떻게 이 정
도의 힘이 나오는지 곽괴는 놀라운 뿐이다.
"끄응……"
곽산이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토했다. 여운휘에게 던져질 때 머리부
터 문과 닿아 버린 것이다. 이런 소란을 들었으니 아래쪽에 있던 자들
도 올라올 것이다.
'이길 수 있을까?'
분명히 몇 명의 사람이 더 나타날 거다. 그렇지만 곽산의 머리에 떠 오
른 것은 상대에 대한 증오가 아닌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공
중으로 들려 버릴 때 멍청하게 있지 않았다.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
고 있던 여운휘의 손을 때내려 했다.
불가능했다.
말도 안 되지만 양손으로도 여운휘의 한 손을 때 낼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힌 탓에 힘이 줄어든다고 쳐도 상대를 제압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하
지 못했다.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