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휘는 휘청거리면서도 걸었다. 정신이 없고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
가 들렸지만 다리는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도대체 자신이 왜 걷는지조
차 여운휘는 몰랐다. 그렇지만 걷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정
신이 나갔음에도 여운휘는 걸었다.
"여운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여운휘는 그 자리에
서 쓰러졌다.
차가운 기운이 땅에서 올라온다.
"괜찮아! 이, 이런…… 이 피 좀 봐……"
유설린은 도망칠 때 가지고 나온 옷 중 깨끗한 것 하나를 골라 그것을
찢었다. 옷을 찢은 유설린은 그것을 여운휘의 상처에 묶기 시작했다. 피
가 상당히 많이 나서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었다.
"여운휘! 여운휘!"
여운휘의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힘겹게 눈을 뜨니 유설린이
울면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죽지 마…… 죽지 마…… 제발……"
여운휘는 쭈그려 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유설린의 머리에 손
을 올렸다.
갑자기 머리에 닿는 감촉에 유설린은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쳐들었다.
여운휘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여, 여운휘!"
"…… 멍청하게 울기는."
말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 하지만 여운휘는 내색하지 않았다.
"누구 죽었냐. 그만 울어."
"흑흑……"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운휘는 숨을 쉬는 게 가빴다.
'제길, 죽는 건가.'
죽고 싶지 않았다. 이제 자신이 죽는다면 유설린은 누가 돌본단 말인
가. 평범한 생활이었다면 그나마 나았으리라. 지금은 무슨 일인지는 모
르겠지만 마교에서 뭔가가 벌어졌다. 결코 유설린에게 좋은 일이 아니리
라.
그런데 그런 와중에 자신 마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처지다.
여운휘는 멈추려는 몸의 기능들을 억지로 깨우기 시작했다. 그는 무상회
천진결을 운기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천천히 진기들이 움직
이며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만 멈추었을 뿐 아직도 위험한 상태다.
'하늘이여, 최초이자 마지막 부탁이다. 제발 내 목숨을 가져가지 말아다
오…… 아직 그녀에겐 내가 필요하다.'
그런 여운휘의 바램을 들어서일까 여운휘의 숨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
다. 여운휘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여운휘, 유설린을 지키는 호위무사다!"
여운휘는 울부짖다시피 외쳤다.
결심(決心)
"도망쳤다고?"
"예."
진린은 자신 앞에 놓인 보고서를 보다가 이것을 가져온 전령(傳令)을 바
라봤다.
예상외의 상황이다. 원래는 평범한 자들 몇 명을 보내려 했다. 그래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사무린이라는 여자는 그것을 극구
반대했다.
'그'가 있다며 결코 얕봐서는 안 된다며 사무린은 진린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교주 또한 그것에 대해 사무린의 말대로 하라고 명
했다. 그래서 금천멸문대도 보냈다. 밖으로 도망 칠 것을 대비해 그들
을 건물 밖에 쪽에 배치해 두었다.
예상대로 소교주와 호위무사는 장원을 넘어서 도망치려고 했고 금천멸문
대는 그들을 쫓았다고 이 종이에 써 있다. 여기까지는 완벽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이 시체로 남아 있는 것인가. 죽었어야 하는 것
은 그 호위무사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금천멸문대 전원이 몰살
된 상태였다.
"흐음…… 뭐 내버려둬도 상관없겠지. 애들을 조금 풀어서 주변을 뒤지
게 해라. 흔적을 찾다 보면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다."
진린은 고작 호위무사 하나 따위가 금천멸문대를 몰살 시켰다고는 생각
지 않았다. 다른 모종(某種)의 세력이 그들을 도왔을 거라고 진린은 생
각했다.
진린은 여운휘를 모른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다. 금천멸문대가 한 사람에게 몰살되었다는
사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훗날 이 일을 알게 되는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마지막 발악인가?"
진린이 피식 웃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마교에서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는 교주 밖
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교주가 이랬을 리는 없다.
그는 자신의 딸을 사랑한다. 더군다나 교주는 웃으며 돌아가지 않았던
가!
교주가 무슨 행동을 명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교주의 신변(身邊)에 무슨 일이 생긴 거다.
그런 일을 알 턱이 없는 유설린은 옆에서 여운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고 쌔근쌔근 자고 있다. 며칠 전에 피를 많이 흘려 피곤하기도 했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맞이할 것은 죽음뿐이다. 교주의 신변
에 무슨 일이 생겼다 해도 이토록 대대적인 병력을 움직인다는 것은 불
가능하다.
마교를 장악하기 전까지는……
마교를 장악했다는 것은 교주의 목숨이 온전치는 못할 거라는 거다.
여운휘는 마교에서 일이 벌어졌다고 판단했다. 굳건히 교주가 버티고 있
다면 유설린의 거처로 병력을 끌고 오는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다.
교주는 죽었을 게다.
유설린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겠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마교 내부의 사정(事情)을 알아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만약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면 안에다가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놨을
거다. 자신만을 위해 움직이는 비밀 적인 조직을. 그렇지만 마교 안에
있던 시간도 일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
각지도 않았다.
마교에서 벌어진 일의 전말(顚末)을 알지 못하니 여운휘는 답답했다.
사일이나 되는 시간을 무작정 달렸다. 최대한 마교와 멀어져야 한다는
일념(一念)으로 여운휘는 유설린을 이끌었다.
사곡에서의 훈련 탓에 생활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도망치는
것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도 이미 여운휘는 사곡에서 배웠다. 피
냄새가 근처에 배이게 해서는 안 된다. 가장 소홀히 할 수 있는 것 중
에 하나가 이 피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피 냄새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피가 떨어지지만
않는다고 능사(能事)는 아니다. 피 냄새가 밴다면 그건 이미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과 다름없다. 여운휘는 오는 내내 상처 관리
에 힘썼다.
덕분에 부상자인 자신과 무공을 잘 모르는 유설린이 아직까지도 발각되
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이미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마교의 주변을 모
두 뒤지려면 내부에 있는 무인 모두를 동원해야 할 테다. 그렇지만 그
럴 수는 없을 것이다.
마교의 무인 모두가 나온다는 것은 항상 그들을 예의 주시(注視) 하는
정파의 무림인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멍청한 자였다면 마교도 제압하지
못했을 거다. 그 정도도 모르고 함부로 병력을 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 자신과 유설린은 고작 철부지 어린애와 호위무사
일 뿐 아닌가. 겨우 둘을 잡기 위해 전 병력을 빼내 정파를 건드리는 짓
은 하지 않으리라.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추적하는 사람의 수도 적다.
도망 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도망을 치고 나서
는? 그 후엔 무엇을 한단 말인가.
내일 움직이기 위해서는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한다. 며칠동안 유설린
에게 쌓인 필요는 보통이 넘을 것이다. 사곡에서의 생활이 항상 이렇다
보니 여운휘에게는 지금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유설린을 쳐다 본 여운휘는 왼손에 자
신의 검을 쥐고 눈을 감았다.
감고 있던 여운휘의 눈이 떠 진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정도가 지난 후
였다. 여운휘의 눈이 어둠을 가르기라도 할 듯이 번뜩 떠졌다. 여운휘
눈이 매섭게 한 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가 다가오고 있다.
여운휘의 왼 손에 들린 검이 동굴 입구 저 편에서 다가오는 무엇인가를
향해 검날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심히 유설린을 옆으로 기대게 한 여운
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운휘는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이 쪽에 자신들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
면 저토록 소리를 내며 함부로 오지는 않으리라. 동굴 입구에 몸을 기
댄 여운휘는 무엇인가가 바로 앞에 오는 순간 몸을 돌며 검을 휘둘렀다.
'피했다!'
상대는 몸을 숙이며 공격을 피해낸 것이 아닌가!
재차 공격을 감행하려던 여운휘는 아래로 몸을 숙인 그 자가 그대로 쓰
러져 있자 휘두르려는 검을 멈췄다.
피한 것이 아니었다. 쓰러진 것이다.
온몸이 피투성이다. 숨을 허덕이는 것이 결코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다.
여운휘는 손으로 그의 맥을 잡아 보았다. 맥박이 불규칙하고 손가락에
아주 약하게 느껴질 정도로 힘이 없다. 피를 흘린 양을 보니 보통을 넘
어섰다.
살기는 힘들 것 같다.
"뉘, 뉘시오……"
"…… 지나가는 행인(行人)."
그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여운휘는 슬며시
검을 가슴 쪽으로 잡아 당겼다. 기습적인 일격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생
각 때문이다.
예상과는 달리 그자의 품에서 나온 것은 하나의 종이였다. 부들부들 떨
리는 손으로 그자는 여운휘에게 그 종이를 넘겼다.
"이, 이 종이를 무림맹에 있는 종리회연이라는 사람에게 전해 주시오.
부탁이오…… 종리회연이라는 사람이 후하게 사례를 해줄게요…… 이 종
이를 주면서 사살 중 삼살이 전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시오."
여운휘는 넘겨주는 종이를 받았다. 한 가지 생각나는 바가 있는 탓이다.
"혹시 마교에서 왔나? 이 쪽은 마교 방향인데."
"……"
말이 없다. 이 종이를 건네주고 나서 죽은 것이다. 이 자의 정체를 대
충 추리한 여운휘는 망설임 없이 건네 받은 종이를 펼쳤다.
일반적으로 이런 중요한 전서는 밀봉(密封)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밀
봉조차 되어 있지 않다. 얼마나 급박한 순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
충 접혀 있는 종이 펼쳐 봐도 티가 나지는 않는다.
"마교 교주 사(死), 부교주 엄백린…… 교주로 등극(登極)……"
그 밑에 있는 내용들은 이미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교주가 죽었을 거
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를 죽인 자가 부교주였던 것이다.
예상대로 이 자는 정파 쪽에서 마교 쪽에 심어 둔 간자(間者)였다.
여운휘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유설린을 깨웠다.
방금 이 종이를 가져 온 자는 마교 쪽에서 왔다. 피를 이토록 흘리고 왔
으니 분명히 이쪽으로도 사람들이 몰려 올 것이다. 이곳에 있다면 방금
그 자가 여기까지 온 거구나 하고 물러갈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자신들
이 있다면 또 싸워야 할 테고 그러면 그들을 여운휘는 죽여야 한다.
그건 곧 이쪽에 자신들이 있다고 광고하는 것이 아닌가.
격돌해서는 안 된다. 방향을 가르쳐 줘서는 도망치기가 힘들어 진다.
여운휘는 유설린을 흔들었다. 곤히 잠에 빠져 있던 유설린이 눈을 떴
다. 약간은 흐리멍덩한 눈이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증명
해 줬다.
"가야겠다. 누가 이곳으로 피를 흘리며 와 버리는 바람에 움직이지 않으
면 안 될 것 같군."
유설린은 그제야 주변에서 동하기 시작한 피 냄새를 맡았다.
여운휘가 동굴 입구에서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준비를 마친 유설린은 그
의 옆으로 다가왔다. 앞쪽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자를 보며 유설린은
순간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아직 피 냄새에 익숙하지 않
다.
"가자."
여운휘는 유설린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이는……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그때나 보여
줄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 유설린은 분명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렇기
에 여운휘는 지금 이 사실을 말해 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여운휘는 유설린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추적하는 자들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물론 거리가 예상보다
멀어 아직까지 못 알아차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여운휘에게 종이를 건넨 알 수 없는 무인, 그가 죽은 곳에서 서둘러 빠
져 나온 둘은 그 이후 사일 동안 제대로 쉬지도 않고 걸었다. 분명 그
시신(屍身)이 있는 장소까지는 마교에서도 사람들이 왔을 것이다.
그들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걸리지 않을 수 없다. 아예 따라오기라도 하
라는 듯이 그 남자가 피를 줄줄 흘리며 걸었으니까.
물론 그 남자도 훈련을 받았을 테고, 그 피 때문에 다른 자들이 쫓아
올 거라는 기본적인 것을 모를 리는 없다. 다만 그 상황이 급했을 게
다. 상처를 감쌀 틈도 없을 정도로.
그건 멍청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다급하다 해도 상처는 처리했어야 했
다. 아마 그 상처에서 흐른 피 탓에 더 많은 자들이 따라 붙었으리라.
우선은 무작정 피해야 한다는 생각 탓에 걸었지만 이제는 슬슬 거처를
정해야 한다. 평생을 떠돌며 살수는 없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여운휘
는 아직 유설린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안다면 그녀는 어떻게 행동할까?
분명히 불편 할텐데 유설린은 아무런 투정이 없다. 먹을 것들이 익숙지
않을 것이다. 잠자리도 불편해 잠도 제대로 오지 않을 거다. 그런데 유
설린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웃고 있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건 말도 되지 않는다.
이런 저런 생각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밖으로 표출(表出)하지 않
을 뿐.
여운휘는 자신의 옆에 앉아 먹을 것을 먹고 있는 유설린을 바라봤다. 힘
든 내색은 않고 있지만 얼굴에 피로가 가득하다.
당연하다. 항상 편안하게 지내왔던 그녀다. 천천히 여행을 다녀도 피로
할 이 마당에 유설린은 무리해서 경공을 펼쳤다. 힘든 것이 당연하다.
먹을 것을 대충 먹은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처에 동굴이 많아서
괜찮은 곳 한 군데를 정해야 한다.
조금 높은 곳 중 사방이 환히 트인 곳을 여운휘는 찾았다. 주변을 보기
쉽고, 또한 퇴로(退路)도 있는 동굴을 찾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도망을 칠 수 없다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진다.
잠시동안 주변을 돌다가 여운휘는 적당한 곳을 찾아냈다. 유설린과 함
께 동굴에 들어선 여운휘는 우선 안을 살폈다.
오래되지 않은 동물의 대소변도 없다. 이곳은 동물이 사는 곳이 아니
다.
"여기가 좋겠군."
"후아!"
좋겠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설린이 주저앉았다. 이제 드디어 쉴
수 있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 먹을 것을 먹느라 앉아 있기는 했지만 그
때는 왠지 쉰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잘 장소를 정하고 나서
야 유설린은 몸에 힘이 쫙 풀린다.
동굴은 그다지 깊지도 않았다. 오 장이 될까말까 할 정도로 한 대여섯
명이 들어온다면 딱 맞을 정도의 크기다. 그렇지만 절벽 앞 부분이 튀어
나온 바람에 햇빛은 잘 스며들지 않는다. 물론 지금은 저녁이라 들어올
햇빛도 없긴 했지만 말이다.
쉴 곳을 정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유설린에게 여운휘는 이 종이를 줘
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상당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말해줘야 한
다. 이제 슬슬 갈 곳을 정하지 않는다면 안 될 시기이기도 하다.
"이거 받아."
"이게 뭔데?"
"며칠 전에 동굴 앞에 죽어 있던 그 남자가 주고 죽은 거다."
"헤에? 그런 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펴봐. 그럼 알 거다."
유설린은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급하게 그 종이를 펼쳤다. 무슨 종이일
까 궁금해하던 유설린은 첫 문장을 보는 순간 짓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마교 교주…… 사(死)란다. 그리고 부교주가 마교 교주로 등극했다고 한
다. 유설린은 영특한 아이였다. 가슴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도, 머리로
는 상황 판단이 되었다.
죽인 것이다. 부교주가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자신의 여동생의 남편이었다.
그건 곧 가까운 인척(姻戚)이었단 이야기다. 그런 자가…… 배신을 했
다.
"이게…… 사실이야?"
"그래.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일 거다."
"죽었다고? 우리 아버지가? 그것도…… 외숙부(外叔父)에게?"
자신에게 너무나 잘 대해주어 좋아했던 사람이다. 여운휘에게 상처를 입
혔을 때 순간 밉기도 했지만 그건 한순간이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자신에게 잘 해 주었으니까.
뒤통수를 맞았다. 그렇게 잘해줘서 믿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죽이고 교주
로 올라섰다. 너무나 허탈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다른 자들은 몰라
도 그만은 아버지를 지켜줘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자가 앞장을 섰다.
입가로 실소(失笑)가 흘러나온다. 어이없게 되어 버린 상황에 도저히 미
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괜찮나."
미쳤을 게다. 지금 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니, 이 목소리의 주
인공이 없었다면 이곳까지 올 수도 없었겠지만 설령 왔다고 해도 미쳤
을 게 분명하다.
지금 유설린에게 여운휘라는 존재는 유일한 기둥이었다. 그가 없다면 분
명 유설린은 땅에 꼬꾸라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처참히 땅을 구
르며 온 몸을 더럽히다가 숨이 막혀 죽을 거다. 그것을 막아주는 존재
가 여운휘다.
"…… 하하. 너무 웃기네."
"……"
"아버지가 죽었데? 그것도 외숙부한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네 외숙부라는 자는 욕심이 많은 자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
일이 이렇게 까지 될 줄은 몰랐지만 여운휘는 처음 봤을 때부터 부교주
의 눈에서 탐욕(貪慾)을 읽었던 적이 있다. 그 탓에 여운휘는 부교주 엄
백린이 너무나 맘에 들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그가 이런 일을 할거라고
는 여운휘도 예상치 못했다.
"행선지(行先地)를 정했으면 하는 군. 무턱대고 걸을 순 없으니까."
"행선지?"
지금에 와서 행선지가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 어디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금은 그런 것도 생각할 겨를도 없다.
반문하듯이 되물은 유설린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
져 내렸다. 땅에 완전히 몸을 붙이게 되자 그녀는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여운휘는 더 이상 행선지에 관해서나 다른 무엇에 관해서 말
을 걸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진실을 밝혔으니 혼란이 이는 것도 당연하다. 유설린은 더군
다나 마음이 강하지도 않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유설린을 무척이나 괴롭게 할 것이다. 혼자 이겨내야 한다.
여운휘는 유설린이 어디를 간다고 해도 따라갈 생각이다.
비록 마교와 상관없는 사람이 됐다고 봐도 무방했지만 그런 건 상관없
다. 어차피 마교에서 하라고 해서 맺은 관계가 아니다. 그런 관계라면
애초부터 목숨을 걸고 유설린을 구하려 하지 않았을 거다.
유설린이 천국을 가던, 지옥을 가던 여운휘는 따라간다. 그녀의 곁에 항
상 있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여운휘는 그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어두운 하늘을 씻기기라도 하려는지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
비가 바람 탓에 동굴 안 쪽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왔지만 크게 문제가
될 거는 아니었다. 여운휘는 유설린의 옆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설린은 머리가 복잡했다. 아버지가 죽었다니 아직도 실감이 가지 않는
다. 아버지가 죽은 것만으로 그녀가 슬픈 건 아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 그건 아버지가 죽은 것보다는 못하지만 큰 충격을 가져
다 줬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언제나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던 유설
린이었거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행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운휘의 말대로 이제 행로를 정해야 한다.
아버지가 죽고 외숙부였던 엄백린이 마교를 장악(掌握)한 지금 그곳으
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도 죽인 자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리도
없고, 아버지를 죽인 자와 상종(相從)할 마음도 없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유설린이 아는 곳은 마교뿐이다. 그렇지만 그곳은 이미 돌아갈 수 없
다.
억울했다. 왜 아버지가 죽어야 했으며 자신이 쫓겨야 하는 걸까.
생전 처음 사람을 미워해 본 적이 없었던 유설린의 마음에 처음으로 증
오(憎惡)라는 감정이 치밀었다. 용서 할 수가 없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
버지를 죽인 외숙부를……
그렇지만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없다고 치자. 그렇지만 용서 할 수 없으
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복수(復?), 그래 복수를 하는 거야!'
무작정 복수를 하고자 마음은 먹었는데 방법이 없다. 아직 유설린은 마
교에 대해 잘 모른다. 그 엄청난 세력을 홀로 싸워서 이길 턱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자?"
"…… 아니."
잠시 눈을 붙이기는 했지만 잔 것이라고 보기도 뭐했기에 그리 답했다.
더군다나 여운휘가 잔다는 것은 잔다고 말하기도 뭐할 정도의 얕은 잠
이 대부분이다.
"나 있잖아 복수할래."
"복수?"
어느 정도 예상은 한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복수를 하려는 것일까? 마
교 부교주, 아니 이제는 교주로 등극한 엄백린. 단순하게 그만 꺾으면
되는 것이라면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거다.
이제 엄백린은 개인이 아니다. 엄백린은 마교요, 마교가 곧 엄백린이
다. 엄백린과 싸운다는 것은 마교와 싸워야 한다는 거다.
"어떻게."
"지금 당장 마교로 돌아가자."
"돌아가면 개죽음일텐데."
"넌 이길 수 있잖아. 엄백린을……"
외숙부라는 칭호(稱號)가 이제는 이름으로 변해버렸다.
여운휘는 유설린의 말에 어이없음을 느꼈다. 이건 무턱대고 쳐들어가자
는 소리 아닌가. 비록 고수이기는 하지만 열 넷이라는 숫자에 허덕인 자
신이다.
싸웠던 자들이 고수이기는 하지만 마교 내부에는 그들보다 강한 자들이
허다하다. 둘이서 마교로 들어가자? 그건 미친 짓이다.
여운휘도 마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설린처
럼 무턱대고 싸워서 이길 수 있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교에 돌아갈 순 없다."
"왜? 온 길을 되돌아가면 되잖아."
"넌 그들을 몰라. 며칠 전에 나와 싸웠던 자들 기억해? 그 자들보다 강
한 자들도 많을 거다. 그리고 숫자는 천 여명은 가뿐히 넘어설 테고."
"처, 천 명?"
유설린은 그 숫자가 어느 정도를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느낄 수 없었다.
엄청난 숫자라는 것은 알지만 언제나 갇혀 살던 그녀로서는 도저히 상상
조차 하지 못할 숫자……
그 이후 유설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운휘도 그랬고, 유설린도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비 떨어지는 소리만이 그들의 적막의 틈에서
유일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아침이 서서히 밝아오면서 쏟아지던 빗줄기도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해가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내자 비는 언제 내리기라도 했냐는
듯이 땅에 스며들었다.
유설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혼자 갈게."
"뭐?"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가야 될 것 같아. 그들도 날 생포(生捕)하려는
것 같던데 아마 죽이지는 않을 거야. 안으로 들어가서 생각해 볼래. 그
동안 고마웠어, 친구가…… 돼줘서."
"혼자…… 가겠다고?"
유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휘는 기가 막혔다. 그동안 고작 생각한
것이 혼자 가겠다는 것이었던가. 혼자 간다면? 안으로만 들어간다고 일
이 다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우선적으로 부교주는 유설린에게 당할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유설린의 실력을 아무리 좋게 봐도 엄백린에게 이길 수 없다. 삼 초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유설린과 엄백린의 실력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무
작정 들어가서 기회를 보겠다고? 말도 되지 않는다. 그건 복수를 하려
가는 게 아니라 죽으려고 가는 거다.
"멍청한 소리하지 마."
"말려도 소용없어! 난 꼭 복수를 해야 하니까!"
"지금 마교로 돌아가 봤자 넌 개죽음을 당할 뿐이야. 복수를 위해서는
우선은 물러서야 한다."
"그렇지만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세월이 흘러도 그 많은
수를 내가 이길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이 마지
막 기회야! 지금은 그래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있잖아?"
"내가…… 도와주마."
여운휘가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유설린은 힘든 길을 걸으려고 하는 것
이다. 복수라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상대는 마교의 교
주다. 마교에 비할 정도의 세력이 없는 이상 죽이는 것은 상당한 무리
다.
"네가 도와준다고?"
"알 거다. 난 네 수호령, 결코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다. 지금 네가 마
교로 간다면 나도 따라 갈 거다. 그렇지만 난 괜한 죽음을 맞이하기는
싫다. 지키는 사람의 목숨도 반드시 지키고 싶다. 내가 널 도와주겠다.
그러니 지금은 우선 물러서자."
여운휘는 힘든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힘들겠지만 마교에 대적할 힘
을 만들어야 한다. 여운휘의 머리로 몇 가지 계책(計策)들이 스쳐지나갔
다. 힘들고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지금 무작정 달려드는 것보다
는 백 배 낫다.
"하지만 너에게까지 괜한 짐을 주고 싶지는……"
"예전에 약조(約條)했지. 언제나 함께 하는 그림자처럼 네 곁에 있어주
겠다고. 그 생각은 아직까지 변함 없다. 아니, 앞으로도 영원할 거다.
난 네 수호령이니까."
세상 모두가 믿을 수 없다 해도, 여운휘만은 믿을 수 있다. 세상이 자신
에게 등을 돌렸다고 느끼는 지금 유설린에게 여운휘는 유일한 빛 같은
존재였다.
아무런 이득도 없거늘 항상 옆에서 여운휘는 자신을 지켜준다. 예전부
터 고맙게는 느꼈지만 이런 절박한 상황에 이르니 그런 감정은 더해졌
다.
"마교를 네 손에 쥐어주마. 나 여운휘가."
여운휘, 그는 유설린을 위해서라면 하늘을 향해서라도 검을 휘두를 남자
다.
그들이 향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