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이 발에 차여 옆으로 밀려났다. 검에 찔려 흔들릴 거라 생각했지만 착
각이었다. 여운휘의 눈은 상처를 받은 맹수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날카
로웠다.
"멍청이들치고는 꽤나 괜찮았다."
여유가 있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가 여운휘의 얼굴에서 비친
다. 상황이 점점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는데 여유를 보인다. 상처가 나
면서 움직임이 아까보다 둔해졌다. 더군다나 방금 전 등 쪽을 검에 찔렸
다.
그런데 오히려 내려보는 듯한 여운휘의 태도에 백석풍은 위축(萎縮)되
는 자신을 느꼈다.
땅을 적시는 피의 양을 봐서는 결코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
표정의 변화가 없다. 억지로 표정을 유지(維持)하려는 것이 아니다. 마
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여운휘의 표정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이 거
짓으로 느껴질 정도다.
여운휘가 한 걸음 다가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금천멸문대의 대
원들은 모두 뒤로 물러섰다.
여운휘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가슴 쪽에 길게 베인 상처가 어깨까
지 이어진 탓에 손으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피가 흥건히 손을 적신
다.
'출혈이 심하군. 빨리 끝내야겠어.'
내색은 않지만 조금 어지러운 것은 사실이다. 아까에 비해 조금 더 혼란
스럽기도 하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검을 잡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
다.
'바다…… 꼭 보여줄게.'
여운휘는 묵묵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한 이상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상책(上策)이다.
금천멸문대의 대원 중 손이 잘리는 바람에 땅에 주저앉아 있던 자가 일
어났다. 오른손잡이인 그는 왼손에 자신의 검을 잡았다. 다리에 상처가
벌어지면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던 다른 한 명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가 더 벌어지면서 피가 솟았지만 그자는 개의치 않았다.
이까짓 다리 하나 날아간다면 어떤가.
금천멸문대! 그건 그의 자존심, 아니 여기 있는 모두의 자존심이었다.
무인으로서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금천멸문대라는 이
름이다.
지금은 금천멸문대의 위기다. 지켜야 한다. '불패(不敗)'라는 이름을 지
키기 위해서라면 다리나 팔 하나쯤은 없어져도 상관없다. 독하게 마음먹
은 그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백석풍은 안다.
왜 아니 고통스럽겠는가. 한 명은 팔이 날아갔고 다른 하나는 다가도 깊
이 베여 조금만 과장하면 덜렁거린다고 해도 될 정도다. 당장이라도 치
료를 받고 싶겠지만 그들은 움직인다. 다 금천멸문대라는 이름 때문이
다.
순간 겁에 질렸던 금천멸문대의 대원들은 그 둘의 모습을 봤다.
"제길……"
금송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창피했다. 순간적으로 상대의 기백에 눌려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다니,
그건 금천멸문대의 이름에 먹칠을 한 거다.
금천멸문대 내에서도 대주와 부대주 다음이라고 손꼽히고 있는 자신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한 것인가. 상대에게서 피했다는 것은 졌다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다.
자신에 비해 저 둘은 얼마나 멋진가. 얼마나 무인다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금송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살아 남은 대원들 모
두 그 둘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며 스스로 부끄러워했다.
'왜 두려워했던가.'
비록 부상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 쪽은 열, 저 쪽은 하나다. 더군다나 부
상까지 당한 자다. 이길 수 있다. 금천멸문대는 패배를 모른다.
"가라!"
마음을 다잡은 백석풍은 크게 외쳤다.
아까 같이 겁이 나지는 않는다. 이길 수 있을 거다. 상대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숫자가 월등하지 않은가!
달려드는 금천멸문대를 향해 여운휘도 달려들었다. 기회를 노리던 여운
휘에게 이들이 달려오는 것은 오히려 노리던 바였다.
오행검법이 시작 됐다.
여운휘는 오행 중 수(水)의 힘을 끌어냈다.
수(水)는 변검이다. 현란한 변화로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변검.
달려들던 상대들은 여운휘의 검이 갑자기 변하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
다. 더군다나 오행검법의 변검은 아까 백석풍이 썼던 변검과도 수준이
다르다.
앞서서 달려오던 자가 여운휘의 변검에 가슴 쪽에 깊게 상처를 입으며
뒤로 쓰러졌다. 그렇지만 뒤따라오던 다른 자는 전우를 넘어서면서 자신
의 도를 움직였다.
사혼도법(死魂刀法)이라고 알려진 이 도법은 마교에서도 이름 있는 무공
이다. 사혼도법은 지금 도를 휘두르는 이 자가 가장 자신 있어 하며, 오
랫동안 갈고 닦은 무공이다.
'다았……"
귀신마저 죽인다는 이름답게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도법, 여운휘의 목
쪽에 바짝 붙는 것을 보며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가 닿기 전
에 여운휘의 검이 이미 그의 가슴을 꿰뚫고 나간 후였다.
쾅!
또 한 명이 쓰러졌다. 하지만 금천멸문대는 공격을 늦출 생각이 없었
다. 몇 년 이상을 같이 지내온 그들이다. 슬프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위로는 나중이다. 금천멸문대의 이름을 위하여 지금은 검을 휘
둘러야 한다.
무모하게 달려들며 몇 명이 더 쓰러졌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으아악!"
그건 기합이 아닌 비명과도 같았다. 마음 속에 쌓이는 울분을 토해내며
금송은 여운휘의 다리쪽을 노렸다. 단 일격에 숨통을 끊는 것이 어렵다
고 판단해서다.
'다리를 다치게 한다! 움직임이 둔해지면 다른 누군가가……'
쓰러지는 전우를 방패삼아 금송은 검으로 여운휘의 무릎을 찔렀다.
여운휘의 다리가 무너졌다.
'성공이다! 이젠 된 거……'
무릎을 찔리는 순간 여운휘는 아래쪽을 향해 검을 박아 넣었다. 금송은
머리 중앙에 검이 들이박힌 채 숨을 거뒀다. 여운휘는 금송의 머리에 박
힌 검을 뽑아냈다.
무릎에 상처를 입었다. 움직이기 조금 더 버거워졌다.
이제 남은 수는 두 명이다. 한 명은 이미 한 손이 없는 자, 나머지 하나
는 이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다.
눈앞이 침침한 것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흐릿하기도 하고 붉은 것
같기도 한 것이 눈에 피가 스며 든 것도 같다. 힘이 들지만 여운휘는 다
시 검을 쳐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실수였다. 금천멸문대는 이곳에 와서는 안 됐다.
금천멸문대의 반수 이상이 죽어 버렸다. 이곳에 오지 않은 몇 사람을 제
하고 금천멸문대는 모두 죽은 것이다. 그것도 한 남자에게……
애초부터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몰랐던 자신의 죄가
컸다. 자신이 이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 몬 것과 다름없다.
"부대주……"
"…… 가자."
말은 필요치 않다. 열 네 명이 왔거늘 아마 살아 돌아갈 사람은 없을 거
다.
여운휘는 휘청 이는 몸의 균형을 잡았다. 피가 너무 빠져나간 탓에 모
든 것이 꿈 같이 멀게만 느껴진다.
여운휘의 피와 금천멸문대의 대원들이 흘러 만든 조그마한 웅덩이에 달
빛이 비친다. 하얀 달빛마저 붉게 물들고, 여운휘의 소매를 타고 피 한
방울이 그 가운데 잔잔한 파문을 만든다.
톡……
달이 일그러졌다.
방어를 포기한 일격이다. 부교주와 여운휘가 스쳐지나갔다.
여운휘의 오른쪽 어깨 쪽이 터지며 피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여운휘를
스쳐 지나간 백석풍은 무릎을 꿇었다.
가슴을 손가락 마디 하나 이상 깊게 베였다. 장기들까지 손상을 입은 그
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애초부터……'
불패를 모른다고 자부하던 금천멸문대다. 그런데 패배를 한 거다. 한 남
자에게 그들은 패했다. 금천멸문대가 만들어진 이후 단 한 번도 있지 않
았던 패배……
'여운휘…… 라고 했지?'
땅에 몸을 맡겨 버린 백석풍은 여운휘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대단한
무인이다. 저 정도 나이에 저런 경지라니……
'만약 내가 금천멸문대가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너의 부하가 됐을 거
다……'
백석풍은 눈을 감았다. 다시는 깰 수 없는 긴 잠에 그는 빠져들었다.
"부대주!"
팔 한 쪽을 잃은 조상찬은 부대주 백석풍의 죽음에 울부짖었다. 여운휘
는 오열하는 조상찬을 바라봤다. 어차피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상대
다. 더군다나 지금 여운휘도 별로 남아 있는 힘이 없었다.
여운휘는 몸을 돌렸다.
조상찬은 눈물을 흘리다가 여운휘가 몸을 돌리고 돌아가자 소리를 질렀
다.
"어딜 가느냐!"
여운휘는 말 없이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
힘들다. 솔직히 하늘과 땅이 어딘지도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정신이 없
는 상태다. 땅이 당장이라도 달려 들 것 같은데 힘겹게 서 있는 거다.
"날 두고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느냐!"
"그 녀석한테…… 바다를 보여주려 간다."
자신의 전우와 상관을 죽인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던 조상찬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저 남자가 잘못이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안다. 달려든 것
도 자신들이고, 저 남자로서는 살기 위한 당연한 반항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저 남자는 자신들과 다를 바가 없다.
여운휘는 조상찬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
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 같다. 유설린이
갔던 쪽으로 여운휘는 용케 방향을 잡아내서 걷기 시작했다.
'졌습니다, 부대주.'
검뿐만이 아니다. 저 자는 지금 자신의 주군인 소교주를 찾아가는 것이
리라. 저렇게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주군에게로 가고
있다.
자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아마 쓰러지고 말았을 거다. 그런데 저 남자는 그렇지 않다.
'저 남자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저 또한 충성은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
까?'
조성찬은 잘려버린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검을 들어 자신의 배 앞에 가
져다 댔다.
'멍청히 죽었다고 문전박대(門前成市)나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배를 갈랐다.
'뒤를…… 부탁합니다, 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