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수가 모자라지도 않은 지금 금천멸문진의 기운이 깨질 턱이 없다.
그런데 깨지고 있다. 금천멸문진의 기운이 이상한 힘에 의해 상쇄(相殺)
되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강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갈수록 힘이 떨어진다. 힘이 나아가는
길을 중간 중간 무엇인가가 막는 탓이다.
괜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대체 어떤 수를 쓰는 거냐, 여운휘!'
저 놈이다. 저 놈이 아니라면 이런 일이 벌어질 턱이 없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진법에 이상해
서는 분명히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뿐이다.
상대가 이상한 수를 쓰는 거다.
'사술(邪術)이군!'
요사스러운 술법을 쓰지 않은 이상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 백석풍
은 여운휘가 사술을 쓰고 있다고 단정지었다. 백석풍은 공격을 조금 늦
추고 여운휘와 자신의 수하들이 부닥치는 것을 봤다.
언제부터 맥이 끊기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다.
건성건성 공격을 날리며 백석풍은 계속해서 여운휘를 주시했다.
'검이 부닥치는 순간……'
검이 부닥치는 순간 이어지던 맥이 끊긴다. 원래 막힐 것은 당연히 염두
(念頭) 해 두고 행하는 진법이라 막힌다 해서 맥이 끊길 리는 없을 텐
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백석풍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여운휘가 익힌 오행검법과 무상회천진결 탓이었다.
목(木)의 힘으로 움직이는 진법의 사이에 여운휘는 금(金)의 기운을 밀
어 넣었다. 단순하게 금의 기운만이 있다면 목의 힘으로 가득찬 진법 안
에서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하지만 여운휘는 목의 기운도 지녔기
에 안에서 행동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목과 상반되는 기운인 금의 기운
도 지녔으니 그 맥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목(木)과 금(火)는 상성관계다.
여운휘도 처음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수법이었다. 진법 안에서 움직이다
보니 여운휘는 그 진법의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상성관계인 금의
기운을 넣어 본 것이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목의 기운으로 치우쳐진 진법은 여운휘에 의해 서서히 무너지는 처지였
다.
백석풍은 언제부터 기운이 흐트러지는 알았다. 그런데 그것을 막을 방법
이 없었다. 여운휘가 익힌 무상회천진결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백석풍으
로서는 이렇게 된 이유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단순히 사술 일거라 생각할 뿐이었다.
"사술을 쓰는 것 같으니 모두들 정신 차려라! 맥이 끊기고 있다!"
모두들 알고 있다. 자신들의 공격이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
의 멍청한 자들이 아니었다. 비록 여운휘에 비해서 한참을 모자란 자들
이지만 금천멸문대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들은 뛰어난 무인들이다.
그들도 지금의 상황을 대충 느끼고 있었다.
맥이 끊기니 진법은 오히려 없느니만 못했다. 서로의 공격들이 얽히면
서, 그들 중 하나가 마침내 여운휘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땅에 바짝 붙는 것 같이 상체를 아래로 붙였던 여운휘가 뛰어오르듯이
검을 휘두른 것이다. 그 일격은 퇴로가 어긋나 버려 허둥대던 금천멸문
대의 한 남자의 목을 잘랐다.
"황만금!"
금천멸문대 중에서도 제일 가는 힘을 자랑하던 자다. 그런 그가 너무 쉽
게 죽어 버렸다. 진법에 얽혀 있지 않았다면 이토록 쉽게 죽지는 않았으
리라.
한 명이 죽었다. 호위무사 한 명을 죽이려고 하다 한 명이 죽었다. 이겨
도 이겼다고 보기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완벽한 승리만을 원했거
늘, 결국엔 한 명이 죽고야 말았다.
백석풍의 입가가 약하게 떨렸다.
한 명이 죽었다는 사실 탓도 있지만 지금 내려야 할 명령 탓이다. 내리
긴 해야 하는데 내릴 수가 없는 명령이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내릴
수 없는 명령, 백석풍은 지금 그런 명령을 내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상
당한 고민에 빠졌다.
백석풍이 망설이는 사이 한 명이 더 여운휘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다. 대주가 안다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 아
니, 그 전에 금천멸문대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대가(代價)로 죽음을 택
할 거다.
더 이상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백석풍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금천멸문진을 멈춰라! 금천멸문진은…… 깨졌다. 더 이상 펼쳤다가는
모두 죽고 말 것이다!"
금천멸문대의 대원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진법이 깨졌다. 허나, 문제는
그게 아니다. 진법이 깨진 것은 상관이 없다. 하지만 금천멸문진이 깨졌
다는 것은 그들의 명예가 깨진 것이다. 그들을 지탱하게 해 주던 하나
의 기둥이 무너진 거와 다를 바가 없다.
불패를 자랑하던 금천멸문대,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들에게 불패를 가져
다 주었던 진법인 금천멸문진이 깨졌다.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깨졌다
면 차라리 낫다. 단 한 명의 검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끝났다.
진법이 깨지며 그들을 지탱하던 거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
"…… 이 일에 대한 추궁(追窮)은 내가 모두 받겠다. 금천멸문대의 수치
는 내가 안고 가겠다."
"부대주!"
"우리는 졌다. 저 자를 죽인다 해도 우리는 이긴 게 아니다.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내 줄 마음은 없다. 전우를 죽인
자다. 반드시 그 대가를 받으려 한다. 부대주로서의 마지막 명이다. 살
(殺)……!"
"존…… 명!"
평소 부대주와 친밀했던 금송은 눈물을 삼키며 말을 받았다.
진법이 아닌 개인으로 나눠진 금천멸문대는 천천히 여운휘를 향해 다가
오기 시작했다. 어둠을 등지고 걷는 그들, 그들은 패배를 모르는 금천멸
문대다.
예상보다는 상황이 좋다. 진법을 펼친다면 밀릴 거라고 판단했는데 운
이 좋았다. 그렇지만 단순히 이 상황을 좋게만 볼 수도 없었다.
아직 열 두 명이 남았다. 그들에게서 더 이상의 방심은 없으리라. 어떻
게 본다면 이제까지의 싸움보다 힘들어 질지도 모른다.
우선은 유설린이 도망치게 만들어야 한다. 여운휘는 검사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호위무사다. 아직은 유설린에게 도망치라고 말할 기회가 아니
다. 지금은 자신보다 저들이 거리가 가까운 상태니까.
십 이 인의 무기는 검과 도가 대부분이었다. 개중에도 도보다는 검이 많
다. 일반적이며, 위력적인 탓이다. 여운휘도 검을 사용한다. 실력자들답
게 금천멸문대의 대원들의 검은 일반적인 검이 아니다. 그에 반해 여운
휘의 검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검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백석풍의 눈에 여운휘의 검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금천멸문대는 움직였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여운휘의 목숨이다.
장소가 꽤나 넓었기에 여운휘를 포함해 열 셋이 움직이는데 아무런 무리
가 없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여운휘였다.
파팡!
한 명의 도를 쳐내며 여운휘는 그자를 감싸 안 듯이 타고 돌았다. 뒤에
서 기회를 노리던 다른 금천멸문대의 대원은 갑자기 자신에게 날아든 공
격에 놀라고 말았다.
"큭!"
금천멸문대의 대원중 하나인 추대산은 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검이 자
신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며 빛을 뿜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단 한 순
간이라도 판단이 늦었다면 이미 죽었으리라 생각하니 당연했다.
다음 공격이 이어질거라 추대산은 생각했다. 그런데 여운휘가 그냥 몸
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왜 그냥 가는 거지?'
바로 옆에 있던 동료가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왜…… 그렇게 보는 거……'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추대산의 숨이 끊어졌다.
'엄청난 쾌검이다!'
백석풍은 놀라고야 말았다. 빙그르 돌면서 여운휘는 검을 움직였다. 문
제는 너무 빨랐다는 거다. 분명 추대산은 피해냈다. 그런데 피하는 순
간 이미 베였던 것이다. 자신의 눈에는 분명 피했는데 몸이 양단 돼서
피 분수를 만들어 냈다.
자신이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른 대원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저 놈은 괴물이야……'
백석풍은 여운휘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외모를 보니 자신보다 어려
도 한참은 어리다. 자신의 반 정도 살았을까 말까 한 놈이 마교에서 제
일 간다는 금천멸문대를 단 일격으로 베어 넘기고 있다.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거다. 누가 약관(弱冠)의 나이 밖에 되지 않
은 자가 금천멸문대를 이토록 궁지로 몰 거라고 상상하겠는가.
'내가 아닌 대주가 와야 했다. 그렇다면 일이 이토록 되지는 않았을 터
인데…… 아무래도 오늘은 길(吉)보다는 흉(凶)이 많은 날이 되겠군.'
백석풍이 잠시 넋을 잃고 있는 사이에도 금천멸문대와 여운휘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백석풍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강하게 쥐었다. 벌
써 세 명이 죽었다. 더 이상 무엇에 연연(戀戀)하랴?
마음을 비우니 몸이 가볍다.
손끝에서 돌던 백석풍의 검이 여운휘에게로 향했다. 여운휘는 빠르게 뒤
로 물러서며 검을 휘둘렀다. 여운휘가 노렸던 자는 아슬아슬하긴 하지
만 검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성공할 거라 생각했던 공격이 막히자 여
운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앞에서 다가온 백석풍 탓이다. 그 자 탓에 다리가 어긋나면서 속도가 떨
어져 버렸다.
다리가 멈추니 사방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병기들이 날아왔다. 여운휘를
뒤로 몰아붙인 백석풍은 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아까 와는 달리 빈
틈이 없다. 도저히 피할 곳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피해냈다.
'마, 말도 안 돼!'
일보(一步) 일보(一步)가 마치 짜여져 있는 것 같다. 누군가가 이쪽으
로 피하면 죽지 않는다고 일일이 설명해 줘도 저처럼 움직이지는 못하리
라. 하늘에서 모두를 내려다봐도 할 수 없을 움직임을 여운휘라는 존재
가 보이고 있다.
금천멸문대 사람들은 한 가지 사실을 몰랐다. 여운휘는 사곡을 통과한
자다. 그 긴 시간 동안 여운휘는 한치의 방심도 없이 사방에서 날아드
는 무기들을 피해냈다. 여운휘는 지금의 이 공격들을 예전에 당했던 진
법이라 생각하는 거다.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예전이 날아드는 무기의 수는 더 많았다.
여운휘가 낮게 몸을 낮추며 검으로 원을 그렸다. 황급히 물러서기는 했
지만 여운휘의 검이 워낙 쾌검이다보니 완벽하게 피하지 못했다.
"크윽……"
다섯 명이 베였는데 하나는 무기를 잡고 있던 손을 잃었다. 검을 잡은
손은 땅에 떨어진 채로 미동도 않았다. 손을 잃은 그자는 자신의 오른손
은 부여잡았다.
이마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고통스러운 탓이다.
방금 까지 있던 손이 땅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지만 바로 그것이 현실이
라고 인식(認識)되지 않았다. 넋을 잃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그는 마
침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 아악!"
무인으로서 오른 손을 잃었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고통도 고통이거니
와, 마음에 이는 충격은 보통이 아닐 것이다. 다른 대원들은 그에게 응
급조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아니다.
마음은 그랬지만 여전히 여운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팔을 잃은 그와는 다르게 네 명은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
서 그들이 멀쩡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옷은 피에 젖을 대로 젖어 있는
상태다. 상처가 벌어지며 옷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다리가 베인 자는 이제는 움직이기도 힘들다. 절뚝거리며 자신의 도를
휘두르는 그자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여운휘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점점 움직이고 있었다. 백석풍은 모르고 있
었다. 여운휘가 유설린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목
숨이 달린 상황에서도 그렇게 행동할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이미 백석풍을 비롯한 금천멸문대의 대원들 머리 속에서 유설린은 사라
진지 오래였다.
스윽!
여운휘에게 검을 내뻗다가 오히려 다가오는 검에 황급히 피한 백석풍은
옷소매가 잘려 나간 것을 느꼈다. 손목 바로 아랫부분이었다. 늦었다면
팔목이 날아갔을 거다.
잘려버린 옷소매 사이로 바람이 들어온다.
"크악!"
여운휘의 검이 한 명의 다리에 박혔다 나왔다. 주저앉는 그자의 어깨를
밟은 여운휘가 도약했다.
"창월(彰月)!"
아래쪽을 향해 휘두른 여운휘의 검에서 새파란 빛이 터져 나왔다. 창월
이라면 금계검법의 초식 중 하나다. 여운휘의 검에서 터져 나온 빛은 검
기다.
문제는 그 크기가 보통을 넘는다는 거다. 무모하게 받기보다는 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백석풍은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행
동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짧은 순간에 금천멸문대 전원이 옳은
판단을 한 것이다.
분명 그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공중에서 세 명이 목숨을 잃었다. 떨어져 내려오던 여운휘의 검
이 세 명의 배를 그어 버린 것이다.
땅으로 셋에서 여섯으로 변해 버린 몸뚱이들이 떨어졌다.
쿵!
거의 맞추기라도 한 듯이 여섯으로 나뉘어진 몸은 동시에 떨어졌다.
여운휘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런 여운휘
가 남은 자들을 쳐다봤다. 금천멸문대의 대원들은 그 모습에 알 수 없
는 공포를 느꼈다.
백석풍은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저런 강자가 이름조
차 없었던 걸까. 더군다나 저런 실력자라면 마교의 고위층(高位層)에 있
고도 남을 자다. 겨우 호위무사일 뿐인데……
"후우……"
여운휘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어느 한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설린이
있는 쪽이다.
여운휘가 달려들자 그쪽에 있던 자들이 각자의 병기를 들었다. 죽은 사
람은 죽은 사람이고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넋 놓고 죽어 줄 정도로 그
들은 호락호락한 자들이 아니었다.
"나머지는 뒤로 간다!"
백석풍도 서둘러 명을 내렸다. 세 명을 향해 여운휘가 달려드니 뒤쪽을
막으려는 것이다. 이미 살아 남은 자의 수는 한 자리로 줄어 있었고, 상
처도 없는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여운휘는 세 명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 뒤로 네 명이나 되는 수의 대원들
이 따라 붙었다. 사방에서 검이 다가온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방향을 틀
지 않았다. 재빠르게 앞쪽으로 다가간 백석풍은 여운휘의 다리를 노리
고 검을 찔러 넣었다.
뒤쪽으로 피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바로 다음 초식으로……
예상이 빗나가 버렸다. 뒤로 피할 거라고 생각했던 여운휘가 공중으로
뛰어 오른 것이다. 순간 당황했지만 백석풍은 위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높게 뛰어 오른 탓에 완벽하게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검 끝에는 분명 느
낌이 있었다.
뒤로 떨어진 여운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백석풍의 검 끝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 분명…… 벴다.
대단한 놈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 같은
상황에 위로 뛰어 오르다니 아예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 아닌가. 뒤로 물
러섰다면 다음 초식을 전개하긴 했겠지만 성공할거라고는 생각지 않았
다.
차라리 옆으로 뛰었어야 옳았다. 그런데 무모(無謀)하게 앞쪽으로 뛰어
올랐다. 결국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공격을 성공해 냈다.
옷이 검은 색이니 피가 얼마나 흘렀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별 이상은 없
어 보이지만 검 끝에서 흘러내리는 피의 양을 보니 제대로 베인 건 분명
하다.
"도망쳐."
백석풍은 여운휘가 한 말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도망을 치라니? 왜 도망을 치라는 것인가? 그것도 그들은 같은 편도 아
니고 대립(對立)한 상태다. 그런데 도망을 치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아……'
백석풍은 한 가지 사실을 상기(想起)했다. 이곳에는 여운휘와 자신들만
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교주…… 그녀를 잊고 있었다니.'
왠지 아까부터 여운휘가 이쪽으로 뚫고 오려고 했다. 싸움이 격렬해져
서 잊고 있었다. 자신들은 소교주 대신 여운휘를 먼저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여운휘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부터 여운휘에게 자신들은 안중에 없었다.
"거기 있는 거 이미 이 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어. 어서, 도망쳐. 네
가 거기 있으면 싸울 수 없을 테니까."
유설린이 고개를 내밀었다.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도 대충 짐작한 상
태였다.
"미안."
"어서 가."
"하지만……"
"하지만 이고 뭐고 어서 가."
여운휘는 뒤도 보지 않는다. 유설린은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는 있었지
만 차마 발을 땔 수가 없었다.
"나 가지 않을래!"
"어서 가!"
여운휘가 목소리를 높였다. 유설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지금가면 왠지 네가 사라질 것 같단 말이야."
"멍청한 소리…… 약속했잖아. 너에게 바다를 보여준다고. 지킨다, 어떻
게든 지키겠다. 그러니 도망쳐."
유설린은 그래도 움직이지 않고 미적거리고 있었다. 여운휘는 안 되겠
다 싶어 유설린에게 말했다.
"좋아, 이곳에서만 좀 떨어져라. 내가 데리러 갈 테니 이 싸움터에서는
떨어지도록 해. 그 정도면 되겠지?"
"알겠어. 바다…… 보여주는 거야?"
유설린에게 바다가 중요하겠는가. 유설린은 여운휘가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 쐐기를 박듯이 말한 것이다.
여운휘는 뒤도 보지 않았고, 그런 그를 바라보다 유설린은 뒤쪽으로 움
직였다. 멀리 떨어지지는 않을 생각이다. 여운휘가 데리러 온다고 했으
니까, 유설린은 그것을 믿기로 했다.
백석풍은 기가 찼다.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이 행동했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했다.
"여태까지 우리는…… 안중에도 없었군."
"내겐 그녀가 최우선이니까."
"큭큭, 우습군 그래. 그런 네 놈에게 우리는 벌써 반 수 이상이 죽거나
다쳐 자빠졌다."
"물러난다면 쫓지는 않겠다."
"닥쳐라! 네 놈도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 것이다. 네 가슴의 상처……
내색은 않지만 깊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백석풍의 말처럼 여운휘의 가슴은 크게 베인 상태다. 그렇지만 여운휘
는 아무 거리낌없다는 듯이 자세를 잡았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이제 아까 처럼 상황이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멍청한 놈. 팔 하나가 없다 해도 너희들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해."
건방지다. 너무나 건방져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또한 허
투루만 볼 수도 없다. 분명 자신들은 여운휘에게 밀렸다.
왠지 모르게 유쾌하다. 검을 든 이후로 상대가 이토록 두려웠던 적이 있
었던가. 몸이 떨린다. 여운휘의 상처가 깊은 건 확실하다. 표정의 변화
는 없지만 분명히 상처는 심할 것이다.
승부는 이제부터다.
여운휘의 볼품 없는 검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다시없을 보검처
럼 보인다. 백석풍은 숨을 몰아 쉬었다. 다음 숨을 내뱉기 전까지 수십
번의 공격을 토해 내려 한다.
그나마 멀쩡한 것은 여덟 명이고 두 명은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
다. 백석풍이 아니라면 지금 이 질 것 같은 판세를 뒤집을 수 없다. 여
덟 중에서도 멀쩡한 것은 다섯 명, 나머지 셋은 상처 때문에 평소의 실
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조차 의문이다.
모든 실력을 쥐어 짜내서 폭발시킨다. 그리고 그 뒤는 나머지 자신의 수
하들에게 맡기려 한다.
여운휘에겐 쾌검도, 중검도 통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여운휘가 그 두 개
에 한해서는 한 수 위라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변검(變劍)이라면? 아
직 여운휘가 변검을 사용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현란한 변화가 위주인
변검은 상대의 눈을 현혹시킬 때 적합하다.
문제는 여운휘라는 존재가 그토록 쉽게 넘어 갈 것은 아니라는 거다.
백석풍의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더 이상 생각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
다. 숨을 들이쉬었으니 터트려야 한다.
백석풍은 여운휘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검이 꽃을 찾아 헤매는 나비의
날개처럼 흐느적거렸다. 사방에 꽃잎이 휘날리는 것 같다. 사람의 눈을
현혹시킬 정도로 매혹(魅惑)적인 움직임이다. 그렇지만 매혹적인 것은
독을 품기 마련이다.
예측하기 힘든 움직임을 보이던 백석풍의 검이 마침내 그 끝을 향해 움
직였다. 나비가 내려앉는 곳은 꽃의 위, 허나 백석풍의 검의 끝은 여운
휘의 사혈을 노렸다.
백석풍의 검은 나비의 날갯짓같이 여운휘에게 다가왔다. 변검에는 익숙
하지 않은 여운휘였지만 신경을 늦추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만큼 더
욱 신경을 집중했다.
단숨에 여운휘의 목숨을 앗아갈 것 같던 백석풍의 검이 여운휘의 손에
의해 퉁겨 나갔다. 백석풍은 검이 퉁겨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초식을 응용했다.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 탓이다. 이번 공격도 실패한다면 이기기 힘들어
지리라.
퉁겨 나간 검이 제자리를 되찾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백석풍의 검이 성
난 파도처럼 여운휘의 몸을 향해 쏟아졌다.
날렵하게 여운휘는 뒤로 물러나며 백석풍의 검을 받아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검,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여운휘의 사방으로 다가온
다른 대원들도 자신의 병기를 움직였다.
'치잇!'
여운휘는 옆으로 날아드는 도를 피하다가 백석풍에게 뒷덜미를 잡혀 버
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꼬치에 꿰이듯이 죽게 된다. 여운휘는 뒤로 공중
제비를 돌며 백석풍을 넘었다. 준비 된 듯 한 여운휘의 움직임은 민첩했
다.
바로 뒤쪽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던 여운휘는 착지하려는 위치에서 자신
에게 검을 들이미는 한 남자를 보았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받아라!"
아래에서 기다리던 그자가 외쳤다.
여운휘는 상대의 검을 막기 위해 자신의 검을 움직였다. 앞쪽에서 날린
일검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런데…… 뒤가 비어버렸다. 백석풍
이 이런 기회를 놓칠 턱이 있겠는가.
여운휘도 뒤가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
을 취한 거지만 등뒤를 비운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여운휘는 뒤도 보
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행동은 찰나였지만, 이미 준비하고 있던 백석풍에게서 안전하게 빠져나
갈 수는 없었다.
등뒤부터 천천히 화끈한 감각이 밀려 올라왔다. 검이 박혔다가 나갔다.
움직임이 조금 빨랐던 탓에 찔러 들어오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걸로 그
쳤지만 상처는 결코 얕지 않다.
백석풍은 몸 속에 박혔던 검이 빠져나오자 여운휘를 향해 재차(再次) 검
을 휘둘렀다.
여운휘가 땅을 축으로 하며 몸을 돌렸다.
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