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脫出)
나갈 수 있다. 십 칠 년이라는 긴 시간 갇혀 지냈던 이 곳에서.
유설린은 마냥 기쁘기만 했다.
"고마워."
"……"
여운휘는 말이 없다. 묵묵히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다. 교주와의
짧은 접전(接戰), 처음엔 밀렸지만 제대로 검을 맞댄 후엔 밀리지 않았
다.
아니, 제 실력을 쓰지도 않은 상태에서 엇비슷했다. 그 말은 곧 이길
수 있었다는 말이다. 교주가 혹시 힘을 숨기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화
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가 힘을 숨겼을 리가 없다.
'이길 수 있다.'
손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다. 교주의 힘은 분명 자신보다 위였다. 하지
만 힘이 전부는 아니다.
오행검법, 진정 대단한 검법이다. 단시간에 여운휘는 상상도 못할 경지
에 올라서게 됐다. 오행검법이 없었다면 오늘 여운휘는 교주에게 죽었
을 것이다.
옆에서 유설린이 신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여운휘의 머리에는 방
금 전의 일전으로 가득했다.
"듣고 있는 거야?"
"대충. 어쨌든 그동안 잠도 못 자고 달렸는데 잠이나 자도록 해. 많이
피곤할 테니까."
여운휘는 들떠 있는 유설린을 진정시키며 자리에 눕도록 했다. 들떠서
잠을 자지 못할 것 같던 유설린이었지만 쌓인 피로가 있는 탓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잠에 빠졌다.
여운휘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여운휘가 잠
에 들 수 없도록 만든다. 한 바탕 검을 휘두르지 않고서는 잠이 오지 않
을 것 같다.
유설린의 옆에서 묵묵히 앉아 있던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처에
서 벗어나려던 여운휘는 어둠 어딘가에서 들리는 듯한 작은 소리에 귀
를 기울였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 이곳이 마교 내이기도 하고 교주도 이미 물러
간 이상 문제가 될 거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기분이 좋지 않다.
왜일까? 이렇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지나 갈거라 생각했거늘 그들은 이곳을 향해 다가왔다. 문 앞에 지키던
보초는 이 곳으로 돌아올 때부터 없었다. 아무 방해 없이 그들은 이 안
으로 들어섰다.
"네가 여운휘냐."
복면은 쓴 자들이다. 이 밤에 복면을 쓰고 나타났다. 이곳에 나타난 것
이 결코 좋은 의도는 아닐 거다.
자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여운휘는 대꾸하지 않았다.
"네 놈 벙어리냐?"
"시체랑 말하면 그건 미친놈이지."
"뭐야!"
여운휘는 그들의 숫자를 샜다. 여섯, 그다지 어렵지 않은 숫자다.
"죽을 놈은 바로 네가 될 거다!"
그자의 말에서 대충 상황을 추리해 냈다. 이 자들은 자신을 죽이러 온
자들이다. 소교주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이들은 살심을 가지
고 왔다.
"죽여!"
사방을 막으며 여섯 명의 복면인들이 여운휘의 주변을 감쌌다. 엄청난
속도에 긴장도 할 만 하련만 여운휘는 아무 표정의 변화가 없다.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곽삼은 여운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나 태
연해 보이는 표정이 왠지 모르게 그의 심기를 긁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곽삼을 기분 나쁘게 하는 건 여운휘의 눈이었다.
마치 내려다보는 듯한 눈이다.
'과연 네가 죽을 때가 돼서도 그런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볼 수 있을지 보
자.'
곽삼은 질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예상외의 고수라는 말은 들었지만 여
기 있는 여섯 모두 고수다. 곽삼 혼자만 나서도 저런 새파랗게 젊은 놈
은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빨리 끝내 주지. 너희 탓에 소교주가 깨겠어."
이상하다. 분명히 이쪽이 기습을 했고, 승기를 쥐고 있는 것도 이쪽인
데 여유가 있는 것은 여운휘다. 오히려 반대로 이쪽이 여운휘 하나에게
기습을 당했다는 느낌이 든다.
"웃기는 소리 마……"
곽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몸과 분리 됐다. 전살세의 발도
다. 극쾌의 쾌검은 이곳에 있는 여섯 명의 복면인, 아니 이제는 하나가
줄어 다섯이 되어 버린 복면인들 중에 그 누구에게도 보지 못했다.
"입 벌리는 놈 먼저 죽여주지. 저 녀석은 지금 피곤하단 말이다."
입을 벌려 무슨 말인가를 내뱉어야 한다. 곽삼을 죽였으니 화라도 표출
하며 달려들어야 하는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 검이 보이지도 않았
다. 언제 휘둘러졌는지, 검집에서는 언제 빠져 나왔는지 조차 모른다.
누가 저런 자를 그저 그런 고수라 칭했던가. 자신들보다 조금 나을 거라
고 들었는데 잘못된 정보였다. 조금이라고? 이게 조금이란 말인가?
당장이라도 그 말을 한 자의 앞에 다가가 주둥아리를 찢어 발겨도 시원
치 않다. 죽음은 기정사실처럼 남은 다섯 명의 무인에게 다가왔다. 솔직
히 저 검을 피할 자신이 없다. 뭔가 잡혀야 피해도 피할 것 아닌가.
아마 지금쯤이다 생각 할 때쯤 목이 잘려 있으리라.
저 정도의 쾌검이라면 피할 수 없다.
다섯 명의 무인은 서로 눈짓으로 간단하게 의사를 비췄다. 도망쳐야 한
다. 살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이 일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만약
을 위해 한 명이라도 살아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어딜."
여운휘의 검이 마치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다섯 명의 복면인 중 하나가
간신히 여운휘의 검을 보았다. 채찍처럼 휘어 날아 들어온다. 연검도 아
니고, 도대체 어떻게……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탈출을 시도했지만 다섯 명의 복면인은 모두
목숨을 잃은 채 땅을 뒹굴었다.
여운휘는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 제길, 치워야겠군."
피 냄새가 나서 소교주가 깨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여운휘는 시체를 어깨
에 맸다. 어깨에 시체를 매던 여운휘는 문 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털썩.
시체가 여운휘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일련(一連)의 무리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살기가 느껴진다. 상대
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다. 피해야 한다, 지금 당장.
여운휘는 유설린에게 다가갔다.
"일어나."
여운휘가 흔들자 유설린은 약하게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다.
"도망쳐야겠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일어나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도망치자니. 유설린은 이해가 가지 않았
다. 이곳이 밖이라면 모를까 분명히 자신이 머무는 거처다. 아무도 들어
올 수 없고, 마교 내에서 이곳에 힘을 행사할 자도 없다.
"나도 자세한 것은 몰라. 어쨌든 어서 짐을 챙겨."
여운휘는 허리에 검을 매고 품속으로 오행검법을 갈무리했다. 그에게 준
비 할 것은 그게 다였다. 유설린도 특별히 준비 할 것이 없었다. 약간
의 패물을 챙기고 검 한 자루를 들면 다였다.
유설린은 정신을 차리면서 피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가 나."
"방금 쳐들어온 놈들 여섯을 벴다. 그것보다 서둘러야겠다. 이미 앞쪽으
로는 그들이 다가왔으니 뒤쪽으로 빠져나가자."
여운휘는 유설린을 깨우면서 미리 퇴로를 생각해 두었다. 앞쪽으로 나간
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이미 앞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오
고 있다. 괜한 흔적을 남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저 쪽으로."
유설린은 무작정 여운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직도 제대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우선은 여운휘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유설린과 여운휘는 장원을 넘었다.
"달려. 마교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응."
마교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여운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도리가 없었
다. 마교에 여운휘의 세력이 있어 무엇인가 주워 들은 거라도 있다면 추
리라도 할 수 있지만, 여운휘는 오로지 소교주의 거처에만 있었다.
마교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다.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 옳은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마
교 안에 있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여운휘의 판단은 어느 정
도 정확했다.
마교가 들썩이고 있었다.
여운휘와 유설린은 저번과 같은 방법을 이용해 마교를 벗어났다.
벗어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여운휘의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뒤쪽에
추적자가 붙은 것 같다. 숫자는 많은 편이 아니지만 몸놀림을 봐서 결
코 얕볼 수 없는 자들이다.
혼자라면 확실히 도망칠 수 있었을 거다. 원래부터 거리가 벌려져 있었
으니 어렵지 않게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운휘는 유설린을 데리고
가야 했다.
거리가 좁혀졌다.
장원을 넘어 땅에 내려서는 순간 여운휘는 유설린을 안은 채로 데굴데
굴 굴렀다. 여운휘가 넘어온 그곳으로 십여 개의 그림자들이 날아 올랐
다.
금천멸문대(禁天滅門隊)다. 대원의 수는 이십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마
교의 힘의 일 할을 차지한다고 일컬어지는 마교 최고의 부대다. 그 금천
멸문대의 대원 중 열 네 명이 이곳으로 왔다.
여운휘는 그들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다만 풍기는 기도에서 범상치 않
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
"도망쳐."
여운휘는 유설린을 뒤로 밀었다. 아무래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너, 넌?"
"도망이나 쳐. 네가 있으면 마음껏 싸울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죽을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라고 했는데도 유설린은 머뭇거리
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다른 자들도 이쪽으로 몰려올지도 모른다. 이들
을 마교에서 조금이라도 더 떨어진 곳으로 유인해 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설린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
"난 죽지 않아. 나는 네 수호령이잖아. 수호령은…… 지켜야 할 사람보
다 먼저 죽지 않아."
"응. 나 기다릴게!"
유설린은 경공을 펼쳐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금천멸문대의 무사 중 몇 명이 그쪽으로 움직이려 하자 맨 앞에 있던 자
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빠지지 마. 저 여자는 멀리 도망치지 않을 거다. 어차피 도망친다 해
도 쉽게 잡을 수 있으니까 우선 이 놈을 격살(擊殺)시킨다. 만만한 놈
은……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우선 순위는 소교주님 아닙니까, 부대주. 겨우 일개 호
위무사 놈 하나야 저 혼자서도 충분……"
"시끄러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검을 든 놈이다. 그것도 아
까 우리가 쫓는 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텐 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소교주
를 버리지 않은 자다. 만만히 봤다가는 우리 중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
다. 금천멸문대 중 하나라도 죽는다면 설령 저 자를 죽인다 하여도 그
건 이긴 게 아니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 모두 이 자와 싸운다."
지금 이 무리를 이끄는 것은 금천멸문대의 부대주인 백석풍이다. 마교에
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인 그는 여운휘를 꽤나 높게 평가했다.
도망치려고 했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도망치지 않
았다. 죽을 거라는 것을 아는 듯 한데도 불구하고 검을 뽑았다. 호위무
사일 뿐이지만 이 자는 진정한 무인이다.
"이곳에서 대결을 원치 않는다."
"네 놈에게 장소를 선택할 권한이 있다고……"
"좋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라면."
"부대주!"
금송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겨우 이런 호위무사 하나에 자신들 열 넷
이 달라붙은 사실도 수치스러운 이 마당에 장소까지 맘대로 하게 해 주
려 한다니.
[모르면 잠자코 있거라. 소교주를 유인하기 위해서니.]
'아……!'
금송은 그제야 백석풍의 마음을 알아 차렸다. 소교주를 유인하려는 게
다. 지금도 잡으려고 하면 잡을 수는 있겠지만 도망을 치면 귀찮은 건
사실이다. 이곳은 마교에 붙어 있으니 아무리 소교주라 할 지라도 나오
는 것을 꺼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장소를 바꾼다면 소교주는 따라 올 것이다. 지금도 숨는다고
숨어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소교주니 분명히 따라올 것이다. 그냥 죽
이는 거라면 그런 번거로운 행동을 할 필요 없다.
하지만 꼭 산채로 데리고 와야 한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여운휘는 유설린이 자꾸 자신을 따라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러가
라고 말은 해야 하는데 말을 할 정도로 상황이 여의치 않다. 거리가 상
당하니 전음을 보낼 수도 없다. 도망가라 그토록 말했거늘……
여운휘는 최대한 빠르게 경공을 펼쳐 유설린과의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주변을 에워싸며 달리던 금천멸문대들은 그것을 봐 주지 않았
다. 그들은 소교주가 쫓아 올 수 있을 정도의 적절한 속도를 여운휘에
게 펼치게 했다.
'그렇게 나오겠다는 말이지.'
지금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기습적인 일격으로 앞을 막고 있는 다섯
에 가까운 자들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다면 실행하지 않는
다.
여운휘가 다리를 멈췄다.
"이곳이 네가 정한 무덤이냐?"
"웃기는 소리 마라 멍청아."
"큭, 말 한 번 재미있게 하는 친구로군."
여운휘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자리를 점하려는 것이다. 유설린이 있
는 쪽을. 그 쪽을 점한다면 고함을 질러도 상관없다. 달려가려는 자들
은 막으면 되니까. 하지만 부대주 백석풍은 영특한 자였다.
"모두들 자리를 흩트리지 마라. 소교주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여운휘는 검을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자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지
는 않는다. 몇 명이라면 모를까 자그마치 열 넷이다. 웬만한 상대라면
열 넷이 아니라 백이 몰려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상대해 보지는 않았
지만 이자들은 고수다.
"너희들은 교주보다 강한가."
"무슨 소리냐 그게."
"너희들은 교주보다 강하냐고 물었다."
"개개인은 교주님 보다 약하다. 하지만 일곱에서 여덟 정도가 모인다면
교주님도 이길 수 있었을 거다."
대충 계산한다면 저들과 싸운다는 것은 교주 정도 되는 실력자 둘과 싸
운다는 말이 된다. 여운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이길
수 있을까?
비슷하다. 아니 저쪽이 아주 조금 우세한 상황이다.
차라리 저들을 합쳐 놓을 정도의 고수였다면 여운휘는 이길 수 없다. 하
지만 저들은 열 넷이다. 하나를 죽인다면 그 힘이 줄어들게 된다.
몇 명만 수월하게 쓰러트린다면 이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저들이 진법을 쓴다면?
진법을 쓴다면 아무리 여운휘라도 이길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진법
을 쓴다 하여도 여운휘는 질 수도 없다. 이게 무슨 어폐(語弊)인가.
이길 수 없는데 져서도 안 된다니.
유설린 탓이다. 그녀가 있는 한 여운휘로서는 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운휘가 지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유설린도 위험에 처하게 될 거
다. 여운휘는 질 수 없다.
"약속하지. 이곳에서 너희들 중 단 하나도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거다."
"미친……"
"이긴다는 말은 않겠다. 하지만 아무도 무사히 이곳을 벗어 날 수는 없
다."
백석풍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들을 막겠다고 한다. 그것도 단신으로 열
넷이나 되는 금천멸문대를 막겠단다. 마교에 있는 장로들이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이런 호위무사 따위가 자신들을 막겠다니 웃음 밖에 나오
지 않는다.
표정이 진지하니 더욱 우습다. 겁에 질리지도 않았고, 너무 당당하다.
마치 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진 것 같다.
"죽여."
이 이상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소교주도 유인 됐고, 이제 슬슬 마교
내부도 정리되었을 것이다. 부대주의 명령에 열 세 명의 금천멸문대의
대원들이 움직였다.
열 명은 여운휘를 감싸고 셋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세 명이면 여운휘를
상대하고도 남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여운휘는 검을 아래로 내렸
다. 검과 땅과의 간격은 겨우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일 뿐이다.
끌 듯이 여운휘는 걷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땅에 있는 자잘한 돌들이 바람이 부는 것처럼
한 쪽 방향을 향해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여운휘가 향하는 쪽으로
돌들이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백석풍은 구르기 시작한 돌들을 봤다. 바람은 불지 않고 있다. 아니 아
주 약하게 불고는 있지만 눈을 감아야 간신히 느낄 정도로 약하다. 이
돌들은 바람 탓에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저 놈……'
아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걷기만 할 뿐인데, 돌들이 움직인다.
등뒤로 문득 식은땀이 흐른다는 사실을 느꼈다. 왠지 아까 저 남자가 했
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운휘의 몸에서 하얀 색 양염(陽炎:아지랑이)이 일었다. 점점 불안해
지기 시작한다. 여운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왠지 모르게 백
석풍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두 명, 아니 다섯 명 더 붙어!"
백석풍은 그것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자신도 원 안으로 들어섰다. 찜찜
한 기분은 빨리 해결해 버리는 게 낫다.
'착각이야. 겨우 이 따위 호위무사 하나가……'
백석풍은 방금 전에 잠시 느꼈던 공포를 애써 부인했다. 자존심의 문제
다. 마교에서도 알아주는 자신이 이름조차 없는 호위무사에게 공포를 느
꼈다면 그건 창피한 일이다.
부대주의 갑작스러운 명이었지만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행했다.
그들도 여운휘의 몸에서 뻗어지는 기세에서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다섯 명은 주변을 에워쌌고, 아홉 명은 여운휘에게 검을 들어 올렸다.
백석풍은 머뭇거리는 자신의 수하들을 봤다. 언제 머뭇거림이라는 것이
있었던 자들인가. 막히는 것이 있다면 베어 넘기며 그 무엇에도 망설이
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망설이고 있다. 겨우 한 남자에게 검을 들이
미는 것을 망설이는 거다.
지금 같이 나가서는 이길 싸움도 이길 수 없다.
백석풍의 검은 빠르다. 목덜미를 향해 날린 검이 여운휘의 목에 닿으려
는 찰나 백석풍은 성공했다고 느꼈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피할 수 없
다. 그건 상대가 누구라도 마찬가지일거라 백석풍은 믿어 의심치 않았
다.
팟!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검은…… 빗나갔다.
'이 거리에서 피하다니!'
백석풍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가 공격한 탓에 눈치를 보던 다
른 자들도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여운휘는 몸을 뒤로 젖혔다. 각종
병기들이 여운휘의 몸을 노렸지만 그 중에서 정작 닿는 병기는 아무것
도 없었다.
여운휘의 검이 움직였다. 다른 검법은 애초부터 펼 생각이 없었다.
여운휘는 오행검법부터 시작했다. 몇 개의 병기들이 여운휘의 검과 부딪
혔다. 여운휘의 검이 밀려 나가야 정상이거늘 정작 퉁겨 나가는 것은 오
히려 반대였다.
엄청난 힘을 가진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퍼억!
여운휘의 주먹이 금천멸문대의 대원 중 한 명의 어깨를 후려쳤다. 여운
휘에게 정권을 맞은 자는 뒤로 쭉 밀려났다.
"파상권(破狀拳)!"
마교에서 모습을 감췄던 권법을 어떻게 저 자가 익힌 것인가. 단 하나
의 정권이지만 그 위력만큼은 얕볼 수 없다. 뼈가 박살나는 것은 이해
가 가지만 살이 찢겨 나간다. 마치 병기에 베인 것처럼.
맞은 자의 옷에 빠른 속도로 피가 베었다. 살이 찢긴 탓이다.
"이 놈!"
백석풍은 검을 내리쳤고 여운휘는 그것을 받아냈다. 힘을 실었거늘 너무
나 간단히 여운휘는 백석풍의 검을 흘렸다.
마교 교주에 비하면 여운휘에겐 이 정도 힘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백석풍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공격
들이 너무나 쉽게 무너진다. 분명히 내력을 깃들인 공격들인데 어처구니
가 없을 정도다.
퍼엉!
여운휘의 장이 백석풍의 가슴을 쳤다.
"쿨럭!"
급하게 내공을 모아 목숨이 왔다갔다할 정도의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백석풍은 피를 토해냈다.
실수다. 싸움 중에 방심을 하고야 말았다. 공격이 막혔다는 생각에 다음
에 이어질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몸을 맡겨 버렸다. 예전 같았다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으리라.
백석풍은 다리가 휘청거렸다.
상대를 얕봤다. 너무 만만하게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상대를 얕본 것은 당연하다. 겨우 호위무사다, 그것도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런 자를 상대하기 전에 바짝 긴장하는 자는 오히려 없을 거
다. 그것이 이름이 쟁쟁한 마교의 고수라면 더더욱.
패배란 것은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일 대 일의 비무라면 모를까, 금천멸문대에게 패배란 없다. 그런데 지
금 그 불패(不敗)의 전설이 무너지려 한다.
"…… 목표를 바꾼다. 소교주는 뒤다. 남은 다섯 모두 이 싸움에 끼여들
어라. 이 자를 죽이는 것이 최우선이다."
더 이상의 방심은 없을 거다.
믿을 수 없지만 일개 호위무사인 이 자는 금천멸문대를 위협(威脅)할 존
재다.
교주가 온다 하여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겨우 이런 호위무사
하나에게 금천멸문대의 십 사인은 전력을 다 해야 한다. 창피한 일이다.
이 자를 이긴다 해도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말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만약 대원 중 하나라도 이 자에게 죽는 다면 그건 금천멸문대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恥辱)으로 남을 것이다.
완전한 승리, 금천멸문대는 그래야만 했다.
"이름이 뭐냐."
"…… 여운휘."
"인정하지. 넌 강하다."
백석풍은 상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敬意)를 보였다. 그 말
에 금천멸문대의 대원들은 놀랐다. 언제 백석풍이 저런 말을 한 적이 있
었던가.
그가 강하다고 인정한 것은 오로지 대주뿐이다. 그런 그가 인정했다. 그
것도 호위무사일 뿐인 이름도 없는 무인을……
"하지만, 끝까지 서 있는 것은 우리다."
백석풍은 검을 가슴 바로 앞까지 들어 올렸다.
방심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밀리지 않았으리라. 다시는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에 다시없을 호적수(好敵手)를 상대할 때처럼 백석풍
의 마음이 날카로워졌다.
여운휘에게 중요한 것은 유설린이었다. 어떻게든 저기 숨어서 이쪽 상황
을 살펴보는 유설린에게 도망치라는 말을 전해야 한다. 지는 게 두렵지
않다. 예전이라면 아무 걱정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게다.
지금은 아니다.
자신이 죽으면 유설린이 위험하다. 유설린이 위험한 이상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없다.
거리가 벌어져 있어도 이들은 유설린을 찾아 낼 수 있을 실력자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숨어 있다면, 여운휘가 지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끝난다.
이제는 열 넷으로 변해버린 인원은 여운휘를 감쌌다. 열 넷으로 만들어
진 원은 빈틈이 없다. 서로의 틈은 손을 뻗으면 닿고도 남을 정도의 거
리다. 이 정도라면 한 번에 세 명을 베지 않는 이상 유설린이 있는 쪽
을 점할 수 없다.
"금천멸문진을 펼친다."
금천멸문진은 금천멸문대의 진법이다. 사람 수가 넷 이상만 된다면 펼
칠 수 있는 진법인데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위력은 대단해진다. 금천
멸문대에서 상대하기 껄끄러운 상대를 상대할 때 펼치는 진법이 바로 금
천멸문진이다.
자신들의 이름을 따 왔다는 것만 봐도 그들의 금천멸문진에 대한 믿음
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금천멸문대에게 패배가 없게 하는데 일
조(一助) 한 금천멸문진.
문제는 여태까지 금천멸문진을 단 한 사람에게 펼쳤던 적은 없다는 점이
다. 수가 적었던 적은 있지만 겨우 한 사람에게 금천멸문진을 펼친 적
은 없다.
확실한 결말(結末), 백석풍은 그것을 원했던 것이다.
진로(進路)도 막혔고, 퇴로(退路)도 막혔다. 사방이 온통 검이 가득 찬
것처럼 움직일 자리가 없다. 사방이 검이다. 움직였다가는 바로 꼬치에
꿰이듯이 죽을 것만 같은 공간에서 여운휘는 태연했다.
여전히 검은 땅과 바짝 붙어 있다. 어떻게 보면 허점으로 가득해 보이지
만 웬만큼 이상 검을 익힌 자들이 보면 그건 결코 허점이 아니다.
끌어들이는 거다. 자기를 향해 병기가 날아오기를. 용기가 없다면 결코
취할 수 없다.
여운휘는 무기가 오기를 기다렸고, 상대들을 무기를 넣으려 했다. 격돌
은 금세 이루어졌다.
캉!
앞에서 다가오는 검을 치는 순간 여운휘는 팽그르 돌았다. 뒤로 검이 다
가오고 있다. 여운휘는 검쪽을 향해 오히려 몸을 밀어 붙였다. 검날의
옆을 스치듯이 돌면서 피한 여운휘는 검을 들어 다리 쪽을 향하는 공격
을 막아냈다.
무기를 막아낸 후 아래쪽을 향했던 검을 바로 반원을 그리도록 만들며
어깨 쪽으로 끌어올렸다. 어깨 쪽으로 검이 올라오는 순간 마치 맞추기
라도 한 듯이 검이 어깨쪽을 때렸다.
여운휘의 빠른 행동 탓에 검은 중간에 막혔다.
안도의 한숨을 쉴 만도 하련만 여운휘는 고개를 숙였다. 등을 스치며 지
나가는 검의 한기가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금천멸문진에 당했다. 그건 공격을 피해내고 쉬었던
단 하나의 호흡 탓이다. 이 진법에 당한 많은 자들이 피했다는 생각에
안심을 하면서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호흡
이 되었다.
여운휘는 검을 피하고 나서 숨을 들이마시지 않았다. 아니, 숨을 쉬기
는 하지만 반 정도만 들이켰다. 그 찰나의 순간이 목숨을 살리고, 죽인
다.
금천멸문진에서 쏟아지는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그런데, 이미 당해서
죽어 자빠졌어야 할 여운휘가 멀쩡하다.
거기다가 이상하게 금천멸문진의 기운이 깨지고 있다. 이게 무슨 조화
(造化)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