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外出)
유설린은 멍하니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운휘는 옆에
앉은 채로 묵묵히 촛불을 응시했다.
깊어져버린 저녁은 사람들에게 휴식을 가져다 준다. 모두가 잘 정도로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운휘와 유설린은 자리에 들지 않은 상태였
다.
"운휘."
"왜."
혼(魂)이 빠진 듯한 목소리다. 유설린이 어딘가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 나가고 싶어."
"……"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의 자신과 같은 유설린,
그때 여운휘도 얼마나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는가. 결국은 밖으로 나갈
수는 있었지만,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나 원래 세상 밖이라고 해도 그렇게 많은 게 다를 거라고는 생각 안 했
거든. 근데 한 일 년 전쯤에 그…… 사무린이었던가? 그 여자가 데리고
나가줘서 한 번 구경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 되게…… 즐거워 보이더
라."
창가를 통해 시원한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여름의 밤이거늘 무덥지 않
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왜 나만 이런 곳에 있어야
하지?"
"너의 아버지의 명이겠지."
"그렇겠지. 아버지를 제한다면 이곳에서 그런 명을 내릴 사람은 없을 테
니까."
그게 문제다.
오히려 그 명을 내린 사람이 유설린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여운휘는 이
곳을 지키는 자가 얼마가 되던지 뚫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상대는 유설
린의 아버지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번 해엔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말을 마치고 유설린은 밖으로 향했던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웃으면서
여운휘에게 말했다.
"그냥 투정 같은 거였으니까 마음 속에 새겨 둘 필요 없어. 그럼 난 이
만 잘게. 너도 잘 자."
황급히 이불을 덮으며 유설린은 얼굴을 파묻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여운휘는 괜스레 씁쓸했다.
그녀의 마음을 아니까, 자신도 그랬으니까.
'바보냐.'
조용히 침대에 몸을 감춘 채 훌쩍이는 유설린을 보며 여운휘는 치미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여운휘는 조용히 걸어가 침대 옆쪽에 주저앉았다. 검을 어깨에 빗겨 새
운 채 여운휘는 말 없이 어둠 건너편을 응시했다.
어렸을 때의 자신의 모습이 환영(幻影)처럼 비친다. 어린 여운휘는 이제
는 장성(長成)해 버린 여운휘를 묵묵히 바라봤다. 생기(生氣) 없는 눈빛
이다.
'예전에 내가 저랬던가?'
분명 살아가는 이유가 없었으니까 저랬을지도 모른다. 아니, 저랬을 것
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예전보다 말수도 조금 늘었고, 왜 사느냐 등
의 상념에 빠지지도 않았다.
과거의 여운휘는 저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앞에서 꺼져라.'
여운휘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의 환영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환영은 사라졌다.
여운휘는 뒤를 돌아보았다. 울다가 지쳤는지 소교주는 조용히 잠에 빠
져 있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하얗고 고운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여운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묵묵히, 여운휘는 계속 유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운 얼굴이다. 검
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검을 익히는 시기도 많이 늦어져 아무리 검
을 익힌다 해도 마교의 일인자가 되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소교주가 교주가 된다면 아래에서 많은 자들이 치고 올라올 것이다.
'약해도 상관없다. 내가 지켜주겠다. 행복하기만 해라. 언제까지나……'
여운휘는 유설린의 얼굴에서 눈을 때고 고개를 수그렸다. 한시라도 방심
을 하지 않기 위해 여운휘는 편한 자세로 잠을 자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의 잠자리는 항상 소교주 유설린의 옆이다.
"나가자."
다음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유설린에게 던진 여운휘의 한마디였다.
유설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운휘를 바라봤다. 나가자니 어디로 나가
자는 말인가.
"이곳의 밖에 나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나가자."
"정말?"
"그래. 대신 식사를 가져다 주는 사람이 오면 몸이 안 좋으니 말하기 전
까지는 식사를 가져다 주지 말라고 부탁해."
"그냥 오늘 저녁까지만 가져다 주지 말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굳이 말하기 전까지 식사를 가져다 주지 말라고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 유설린이 물었다. 그냥 아침만 먹고 점심 저녁은 됐다고 하면 그만
일 테니까.
"마교 밖으로 나간다."
"에? 마교 밖으로?"
"그래. 며칠 동안을 밖에서 지내자는 말이다."
"그러면 아버지가 알 텐데……"
"알고 있다. 상관없으니 옷 몇 벌 챙겨. 시간을 벌기 위해 식사를 가져
다 주지 말라고 말하는 거니까 꼭 해야 된다. 이곳을 나가서는 도망칠
수 있지만 안에서는 도망치는데 상당히 무리가 생길 거다."
아버지가 알아차릴 거라는 것은 알았지만 유설린은 우선 여운휘의 말대
로 짐을 쌌다. 짐을 싼 채로 유설린은 유모가 오기를 기다렸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유모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유모."
"예, 소교주님."
"몸이 안 좋아서 그러니까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식사 가져다 주지 마.
식사가 필요하면 내 호위무사가 연락을 할거야."
유모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설린은 말을 이었다.
"아,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말아 줘. 괜히 걱정 할 필요는 없잖아?"
"알겠습니다."
말하지 말라고 해도 며칠 동안 식사를 시키지 않는다면 분명히 교주의
귀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걱정이 된 교주는 이곳을 찾아 올 것이고.
유모가 물러가자 유설린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다소 걱정이 된다. 아버
지가 알면 분명히 불 같이 노할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여운휘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사내다.
표정의 변화가 정말 극히 드물다. 무뚝뚝한 얼굴로 항상 자신의 옆에
서 있기에 어떨 때는 기분이 나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가자."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 하지만 유설린은 그의 목소리가 좋았다.
"응!"
세상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기에 유설린은 심장이 두근거렸
다.
거처에서 벗어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예전과 똑같이 이곳을 지
키는 무사는 겨우 한 명뿐. 그것도 그 무사는 정문만을 지킨다. 외곽 쪽
으로 나가면 걸릴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운휘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나무 위쪽으로 올라섰다. 혹시나 해서
한 행동이지만 역시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뛰어."
예전엔 올라서는 게 약간 무리였던 유설린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
년 전에 비해 유설린 또한 실력이 많이 늘어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서
둘러 장원을 넘어 아래로 착지했다. 그 모습은 마치 고양이를 연상(聯
想)시킬 정도로 민첩했다.
"헤에……"
유설린 또한 일년 전을 기억하고 있다. 장원의 위쪽을 향해 도약을 하
고 조심해서 아래로 뛰어내렸던 그때와 지금은 엄연히 달랐다.
유설린은 자신의 실력의 변화에 놀란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뿌듯했다.
옛날에는 느껴 본 적 없는 성취감, 그녀는 그것을 느낀 것이다.
"감탄만 하고 있지 말고 서둘러. 이쪽에 괜히 있을 필요는 없다."
여운휘는 가만히 서 있는 유설린을 재촉했다.
지금 넘은 이곳은 관문도 아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마교를 넘어가는
것이다. 쉽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마교라는 거대 단체의 자존심이 걸
린 문제니까. 아무나 드나들 수 있다면 그것은 만만하다는 증거다. 사파
의 제일 가는 거두(巨頭)인 마교가 그런 모욕을 당할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 그 주변을 지키는 무사들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그런 곳을 뚫
어야 한다.
혼자라면 어렵지 않겠지만 유설린도 함께다. 유설린의 실력이 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교의 주위를 지키는 자들이라면 그녀보다 위임은 분명하
다.
힘들겠지만 해야 한다.
"우선 마교의 외곽으로 가야 될 거다."
여운휘는 유설린이 들고 있던 옷 몇 벌을 건네 받았다.
"넌 걷기나 해. 짐은 내가 들 테니까."
왼손에는 검을, 오른 손에는 짐을 든 채로 여운휘는 유설린의 옆에 섰
다. 예전이었다면 결코 했을 리가 없는 행동이다.
여운휘에게 짐을 맡긴 채 유설린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방향은 잘 모
른다. 그저 끝이 나올 때까지 걸으려 하는 것이니까.
둘은 거의 반나절을 꼬박 걸었다.
마교는 넓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먹고, 자며 생활을 한다. 크기
는 웬만한 마을과도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거대하다. 넓은 곳인 만큼
지키기도 힘든 것도 사실이다.
치밀하긴 하겠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특별한 일도 벌어지지 않은 지금, 마교의 수비는 철옹성이 아닐 것이
다. 마교를 나갈 자신이 없었다면 나오지도 않았다.
반나절 이상은 꼬박 걸으니 마교의 외곽이 드러났다. 유설린은 처음 보
는 그 웅대한 크기에 넋을 잃고야 말았다. 그녀가 본 것은 작은 장원 안
의 세상과 일 년 전 세상에 나가서 본 그곳들이 전부였다.
그런 유설린이 마교의 웅대한 벽을 보자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높이는 오 장이 넘을 정도로 높았다. 주변의 지물만 이용하면 여운휘로
서는 쉽사리 넘을 수 있는 높이다. 여운휘는 옆에 있는 유설린을 바라봤
다.
"넘을 수 있겠어."
"아니."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 정확한 높이는 모르겠지만 언뜻 봐도 무리
라 생각될 정도로 장원은 높았다. 유설린으로서는 이곳을 단숨에 넘는다
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너무…… 정말 너무 높다."
"높이는 문제가 아니지. 마교의 외곽은 많은 무사들이 지키고 있다. 나
가기 전에 걸려서는 안 돼."
저 정도 높이라면 자신이 유설린을 안고 뛰쳐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
이 아니다. 문제는 그 주변에 있는 수많은 무사들이다. 여운휘는 마교
내부에 대해 잘 모른다. 이곳을 나가면 바로 밖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우선은…… 부닥쳐 봐야지."
장원은 높다. 보통 사람이라면 주변의 지물을 이용한다고 해도 넘을 수
없을 정도의 높이다.
허나, 여운휘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 한 번 더 도약할 순간 밟을
것이 있다면 넘을 수 있다.
장원은 높이도 높지만, 길이도 길다. 곳곳에 무인이 배치되어 있긴 하겠
지만 어딘가는 분명히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무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꽤 높다란 나무가 있어야 한다는 거
다.
유설린을 안은 채로 오 장이 넘는 높이를 넘을 순 없다.
'셋, 아니 넷이군.'
여운휘는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의 숫자를 알아챘다. 그쪽에서
이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봤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 그들은 마
교 소교주의 외모를 모른다.
태연하게 움직여야 한다. 수상한 모습을 보인다면 저들이 따라 붙을 것
이다. 그렇게 되면 밖으로 넘는 것은 들키게 된다.
"저쪽으로 가자."
"이 곳에서 넘으려는 거 아냐?"
"쉿. 저쪽으로 어서."
만약을 대비해 입 단속을 시키며 여운휘와 사무린은 이동하기 시작했
다. 움직이면서 여운휘는 뒤쪽을 향해 신경을 곤두 세웠다.
'따라오는 자는 없군.'
그다지 수상하게 보이지 않았는지 따라오는 자는 없었다. 여운휘는 긴장
을 늦추지 않았다. 아니, 이런 순간이 아닌 어느 때라도 마찬가지다. 사
곡에서의 생활이 몸에 베어버린 지금 여운휘는 긴장을 놓는 순간이 없
다.
무서운 것이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밥을 먹을 때
나, 잠을 잘 때, 소피(小避)를 볼 때 등 사람들은 긴장을 늦추기 마련이
다.
여운휘는 그렇지 않다.
잠을 잘 때도 선잠을 잔다. 밥을 먹을 때도 한 손으로는 검을 들고 있거
나 잡기 쉬운 곳에 놔둔다. 눈도 먹을 것을 향하고는 있지만 항상 주변
을 살핀다.
무인들을 검이라 친다면 여운휘는 검 중에서도 날카롭게 갈아진 예검(銳
劍)이다.
"주변에 누구라도 있는 거야?"
유설린은 여운휘에게 물었다.
"지금은 없어. 어쨌든 위험한 말을 하지 마. 고수가 있다면 들을 지도
모르니까. 그냥 태연하게 움직여. 내가 나가는 것은 알아서 할 테니까."
여운휘는 예검이지만 유설린에 한해서는 부드럽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딱딱하게 대한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여운휘로서는 정말 신경을 쓰는 편
이다. 유설린도 여운휘의 말수가 적은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
그녀는 떠든다. 그리고 여운휘는 듣는다. 유설린은 이걸로 만족했다.
"날씨 좋다."
"여름치곤."
"그렇지? 바람이 꽤 선선하네. 아, 나 없으면 꽃은 어쩌지? 다 죽는 거
아닐까?"
"죽을지도. 하지만 비는 올 테니 물 걱정은 안 해도 될 듯 하군. 곧 비
가 쏟아질 시기가 되었으니까."
유설린은 뒤늦게 자신이 기르던 꽃들에 대해 생각했다. 세심한 손길이
없으면 죽기 쉬운 꽃들도 많은데……
잠시 걱정이 일었지만 유설린은 곧 그 사실들에 대해 잊기로 마음먹었
다. 그녀에게는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흥미 있었던 것이다.
여운휘가 걸음을 멈췄다.
"저기, 저기가 좋겠군."
좋은 곳을 발견했다. 문제는 근처에 무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지리적 조
건이 좋은 곳을 마교 쪽에서도 모를 리는 없다. 밖에서 들어오는 적도
조심해야 하지만 안에서 나가는 첩자도 조심해야 한다.
주변을 둘러보던 여운휘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잎이 무성하다. 그
리고 위치도 장원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 감시도 허술해 보인다. 문제
라면 거리가 상당해서 여운휘조차 간신히 성공할 수준이라는 것이다. 물
론 그 기준은 예전의 여운휘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겠군.'
유설린을 안고도 넘어설 수 있을 거리라 여운휘는 판단했다.
"저 나무까지 최대한 몸을 숨긴 채 가야 해."
"저 나무?"
유설린은 여운휘가 가리키는 나무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여운휘는 고개
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최대한 말을 아껴야 한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어 감시하는 자들의 눈이 소홀(疏忽)하긴 하겠지만 떠들면서 가도 될
정도는 아니다.
신중해야 한다.
이번에도 유설린이 앞장서게 하고 여운휘가 뒤를 따랐다. 빠르게 보다
는 기척을 죽인 채 유설린과 사무린은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호흡(呼吸)마저 줄인다. 사람의 호흡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
출되게 한다. 하지만 숨을 쉬지 않고 사람은 살 수 없다. 당연히 숨을
쉬는 횟수를 줄이면 줄일수록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워진다.
여운휘는 호흡을 줄였다. 아니, 줄였다고 하기보다는 거의 쉬지 않는다
고 해야 정확하다.
유설린은 나무에 도착하자마자 바짝 몸을 붙여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
옆에 따라 붙은 여운휘를 보고 유설린이 물었다.
"이제 어떡해?"
"위."
유설린은 고개를 들었다.
유설린은 당황했다. 여운휘의 말을 들어보니 이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는 것 같은데 그녀는 솔직히 무서웠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장원까지의
길이를 보면 결코 단숨에 뛰어 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어, 어떻게 하려고."
"올라가서 저쪽으로 뛰어 넘는다."
"난 못해."
"그런 걱정은 마. 내가 알아서 해 줄 테니까."
무작정 올라가라는 여운휘의 말에 겁이 치밀긴 했지만 유설린은 나무를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밟을 곳이 많아 올라서는 것은 어렵지 않았
다. 유설린이 대충 올라가자 밑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여운휘도
나무로 올라섰다.
여운휘가 도약(跳躍)했다. 유설린이 힘겹게 올라간 그곳을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여운휘는 올라선 것이다.
단 한 번에 유설린의 옆에 도달한 여운휘는 옆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
다. 유설린이 입을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여운휘가 말했다.
"왜?"
"대단해서……"
"이 정도로 대단하긴. 이번엔 저기를 넘어야 될 텐데 벌써 놀라면 안 되
지."
우려(憂慮)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 곳에서 저기 까지 뛰어야 한단다. 길
이가 이렇게도 먼데 이곳을 뛰어야 한단다. 불가능하다. 멀어도, 너무
멀다. 성공할 확률을 높게 쳐줘도 일 할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네가 뛸 필요 없으니 걱정 마라. 네
가 못할 거라는 것 정도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내가 안 뛰면 저곳을 어떻게 넘어?"
여운휘는 유설린의 등에 왼 손을 대더니, 남은 오른손으로 다리를 들며
그녀를 안아 올렸다.
"소리 같은 거 지르는 멍청한 짓은 마라."
"응."
유설린은 만약을 대비해 입에다가 자신의 소매 부분을 쑤셔 넣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든 비명을 질러서는 안 된다. 비명을 지르고도 걸리지
않을 리가 없다.
여운휘는 유설린이 입 속에 소매를 쑤셔 넣는 것을 묵묵히 바라봤다. 유
설린은 다 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
조용히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말한 여운휘는 나무 위에서 가지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지는 그다지 두껍지 않았기에 부러질 수도 있
는 상황이었다.
여운휘는 가지를 밟으며 달리다가 가지가 더 이상 무게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얇아지는 순간 장원을 향해 박차 올랐다.
유설린은 눈을 찔끔 감았다. 입에 소매를 쑤셔 넣은 것을 잘했다고 그녀
는 생각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비명을 지르고도 남았으리라. 귓가
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너무 무서웠다.
유설린은 눈을 감고 무서움에 떨었지만 여운휘는 공중으로 솟구치는 순
간 성공했다는 것을 느꼈다. 순간은 찰나(刹那)다. 공중으로 솟구쳤다
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장원이 자신의 아래에 있었다.
확실한 성공이다.
여운휘는 마교 건너편에 착지했다. 착지하는 순간 여운휘는 재빨리 주변
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안 쪽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나가는 것을 들키지도 않은 것 같다.
"어이, 눈떠도 돼."
유설린은 여운휘의 말을 듣고도 반정도 살짝 눈을 떴다.
"눈떠도 된다니까."
"헤…… 성공한 거야?"
유설린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 거리가 얼마였는데 그곳을 넘었단 말인
가. 더군다나 혼자도 아니고 자신을 안은 채로.
눈을 뜨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을 텐데……
유설린은 방금 까지 무서워서 눈을 감고 있던 것에 대한 후회가 일었
다.
"안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우리를 보지 못한 모양
이야. 걸리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괜히 오래 있어봤자 좋을 일은 없을 거
다. 서둘러서 가자."
"응! 어서 가자!"
유설린은 신이 났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이 환하게 트여 있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안력을 최대한 돋구어 봐도 나무 밖에 보이지 않
는다.
해방감이다.
말도 하지 않았거늘 유설린은 경공을 펼쳤다. 무작정 달려도 끝이 보이
지 않는다.
"신났군."
뒤에 서서만 있을 순 없다. 여운휘는 유설린의 호위무사다.
유설린은 그냥 달렸다.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끝
이 어디일까? 유설린은 끝을 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달렸다.
유설린의 옆에는 여운휘가 달라붙어 있다. 여운휘는 유설린에게 속도를
맞춘 상태다.
세상의 끝까지 달리려는 백마(白馬)처럼 질주(疾走)하던 그녀가 멈췄
다. 지친 것이다. 유설린이 멈춰 서자 여운휘도 멈췄다.
"헥헥, 더는 못 뛰겠어……"
유설린의 말이 늘어진다. 너무 오래 달려 호흡이 가빠진 탓이다. 반면
여운휘는 너무나 태연하다. 산책이라도 나갔다 온 것처럼 여운휘의 호흡
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여운휘에게 이 정도 달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곡에서 지낼 때 하
루 종일 달리고도 지치지 않은 여운휘다. 겨우 이 정도 달린 것 가지고
지칠 리가 있겠는가.
"쉬었다 갈까?"
아직은 안전하다. 내일이 되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모르나, 아직
까지는 자신들이 빠져 나온 사실을 마교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를 것이
다.
유설린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냐, 어서 가자."
지치긴 했지만 유설린은 멈추지 않았다. 비록 걸을지라도 유설린은 움직
이기 시작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다.
여운휘는 유설린을 따라 다닐 때 거의 뒤에 선다. 기습(奇襲)이란 것이
원래 뒤나 옆쪽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왼쪽에 서 있는 다면
오른쪽으로 날아드는 공격을 막기 어렵고, 반대로 오른쪽에 서 있다면
이번엔 왼쪽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여운휘는 뒤에 섰다.
만약 앞쪽에서 공격이 날아든다면 여운휘는 유설린을 뒤로 잡아당길 것
이다.
여운휘가 판단하기에 호위(護衛)를 할 때 가장 좋은 위치는 뒤다.
물론 이것은 상황을 앞뒤좌우로만 국한(局限) 되게 하여 간단하게 생각
한 것이다. 상황이 변한다면 여운휘는 앞에도 서야 하고, 좌우에도 서
야 한다. 여운휘는 모자란 사나이가 아니다. 무공을 익히는 데는 천부적
인 재질(才質)만으로는 안 된다.
여운휘는 무골(武骨)이다. 또한 뛰어난 머리가 있다. 그래서 여운휘가
무공을 성취하는 속도가 빠른 것이다. 단지 절세 무공을 얻었다 하여 최
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받쳐 주는 머리가 없다면, 최고가 될 수
는 없다.
절정고수나 조화경(造化境)에 들어 설 수는 있어도, 그 위는 무리다.
"흐음, 네가 뒤에 있으니까 왠지 말을 해도 혼자 하는 것 같아."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해."
지금은 뒤에 있어야 한다. 마교 쪽에서 있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
해서는 지금은 뒤가 최적(最適)이다.
유설린은 여운휘가 뒤에 있으니 말을 해도 왠지 혼자 하는 것만 같은 기
분이 들었다. 더군다나 여운휘는 특별히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해 주지도
않는 성격이다. 간간이 '그래' 라는 말을 내뱉기만 하니 없는 기분이 들
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여운휘와 유설린은 한참을 걸었다. 한참을 걷던 유설린은 강을 보았다.
강, 생전 처음 보는 것이다. 놀라 벌어진 그녀의 입이 다물려 질 줄을
몰랐다.
"갑자기 서서 뭐해."
뒤에서 따르던 여운휘는 유설린이 멈추자 덩달아 멈췄다. 처음엔 그냥
서서 기다렸지만 계속해서 움직임이 없어 재촉을 한 것이다.
"저게…… 뭐야?"
그제야 여운휘는 유설린이 왜 멈췄는지 알았다. 여운휘로서는 예전에 많
이 보아온 광경들이라 아무 감흥도 일지 않았지만 유설린은 아니었다.
시원하게 부서지는 하얀 물거품들이 하늘로 솟구치고, 햇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나는 강은 처음 본다면 분명히 신비 자체일 것이다.
"강이라고 하지."
"강? 저게 강이야? 그럼 도대체 바다는 어떤 거야?"
"저런 강들이 몇 십 개가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게 바다지."
"되게…… 크겠지?"
"비교도 안 될 정도랄까."
"꼭…… 보고 싶어. 바다라는 거."
바다를 보여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이곳
과 바다와는 너무나 거리가 있다. 밖으로는 나왔지만 그 시간이 너무 길
어도 안 되는 일이다. 마교 교주의 성격으로 추측컨대 자신의 딸을 위
해 뛰쳐나오고도 남을 것이다.
자신들의 행동 때문에 정파와 사파의 대결까지 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
적당한 선에서 여운휘는 마교로 돌아갈 생각이다. 바다까지 간다면 큰일
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보여주지. 지금은 안 되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바다를 보여주겠다."
"정말?"
"약속은 지켜."
약속을 했다. 단순히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약속이
다. 유설린 또한 여운휘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여운휘는 그런 남
자다.
무뚝뚝하지만 믿을 수 있는 남자, 그게 여운휘다.
"그만 가자."
"알았어."
유설린은 강에서 눈을 땔 줄을 몰랐다.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
다. 책에서 읽은 강이라는 것은 그저 물이 있는 웅덩이일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세상이라는 것은 유설린이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자기 딴에는 크게 상
상한 것이었거늘, 실제로 보니 자신의 생각은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랐
다.
해가 천천히 지기 시작하면서 여운휘는 근처에 잘 자리를 찾기 시작했
다. 사방이 트인 곳보다는 나무가 조금 있는 곳이 잘 때 좋다.
"저쪽으로 가서 오늘은 쉬자."
"저기서 자는 거야?"
"그렇지."
"아, 근데 침대(寢臺)는?"
"있을 턱이 있나."
유설린은 생각도 못했다. 항상 잘 때는 침대가 있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집이 아니다. 침대가 있을 턱이 있겠는
가. 침대가 없다는 말에 유설린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침대 없으면 잠 잘 못 자는데……"
유설린의 말에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객잔이 있는 것도 아
닌데 침대에서 잘 방도가 없었다.
유설린은 여운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냥 여운휘가 가리켰던 방
향을 향해 걸었다. 여운휘는 걸으면서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점심은
건너뛰었지만 저녁까지 그럴 수는 없다.
여운휘는 유설린의 호위무사다. 그녀를 놔두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처
지, 가는 길에 동물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근처에 강도 있고, 나무가 있는 곳이 이 곳 밖에 없으니 동물을 발견하
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동물들이 살아갈 장소로 이 근처에서 이곳만큼
적격(適格)인 곳이 없었던 것이다.
여운휘는 품안에 넣어 두었던 비수를 던졌다. 목표는 사슴이다.
단숨에 여운휘는 사슴에게 죽음을 선사했다. 여운휘의 성격 탓도 있지
만 유설린에게 피를 보이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여운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사슴에게 다가가 재빨리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거 뭐 하려고?"
"오늘 저녁이야."
"에? 그걸 먹는다고?"
"어. 원래 네가 평소에 먹던 것들도 이것과 다를 바가 없어. 네가 하는
광경을 못 봐서 그렇지."
"하지만……"
유설린은 약간 꺼려졌다. 사슴의 눈을 보니 먹을 마음도 싹 가셨다. 도
대체 저런 것을 어떻게 먹으려는 것일까.
여운휘는 유설린의 마음을 알았다. 유설린처럼 지내온 사람이라면 이런
것을 먹는 것이 꺼려질지도 모른다.
"이대로 먹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저 쪽에 자리나 잡자."
여운휘는 자신이 말했던 장소에 도착하자 사슴을 내려놓고 재빠르게 검
을 휘둘렀다. 나뭇가지들이 잘려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쾌검이다. 너무나 빨라 유설린으로서는 도저히 눈으로 쫓을 수조차 없었
다. 언제 베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여운휘의 검은 쾌검이다.
"나뭇가지는 괜히 왜 자르는 거야?"
유설린은 기본을 모른다. 불을 일으켜야 음식을 구울 수 있다는 것은 안
다. 하지만 그것을 접목시키지는 못하는 것이다.
여운휘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여운휘가 나뭇가지들을 모아놓
고 비비기 시작하자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의아스러워하던 유설린은 불
이 붙기 시작하자 다시 한 번 놀랐다.
"와, 불이 붙는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거지."
"그래? 그럼 나도 해 볼래!"
여운휘가 건네주는 나뭇가지를 받고 유설린은 한참을 비벼대기 시작했
다. 하지만 불이 붙지 않았다. 그녀가 너무 엉성한 탓이다.
"이씨! 왜 안 붙는 거야?"
"하다보면 될 거다. 어려운 게 아니니까."
여운휘는 유설린에게서 나뭇가지를 다시 건네 받고 계속해서 비비기 시
작했다. 이제는 됐다 싶었는지 여운휘는 나뭇가지를 내려놨다.
나뭇가지를 내려놓기 무섭게 여운휘는 사슴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유설린으로서는 그것 또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녀는 여운휘가 하
는 모든 행동이 신기했다.
불을 붙이는 것에서부터, 동물을 굽는 모든 행동을 유설린은 처음 접했
다. 불쌍해서 이걸 도저히 어떻게 먹느냐 는 생각이 들게 했던 사슴이
불 위에 올라가서 한참이 지나자 평소에 자신이 먹던 고기와 다를 바 없
는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먹어."
여운휘는 일부분을 잘라내서 유설린에게 건넸다. 여운휘가 건네준 고기
를 먹어보니 간이 맞지 않았다. 당연하다. 향신료(香辛料)는커녕 조미료
(調味料)도 없는데 제대로 된맛이 나올 턱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유설린은 사슴 고기를 계속해서 먹었다. 분명히 부족한 음식이
었지만 느낌이 색다르다. 밖에서 이렇게 음식을 먹어 보는 것은 난생 처
음이다.
이미 주변은 어둑어둑해 졌고 유설린은 할 일 없이 불 사이로 나뭇가지
를 쑤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일도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테니까 자도록 해."
"응."
유설린은 자리에 누웠다. 서둘러 나오느라 모포 같은 것도 챙기지 못했
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름이라 날씨가 춥지 않다는 것. 유설린은 자
리에 누웠지만 여운휘는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한 손에는 검을 잡은 채 여운휘는 고개를 숙였다.
유설린은 오늘의 긴 행군이 힘들었는지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곯아
떨어진 상태다. 여운휘는 유설린을 바라보았다. 아마 내일 일어난다면
비명을 지를 것이다.
'허리가 상당히 아플 거다.'
허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쑤실 것이다. 노숙을 자주 해 본 사람은 그렇
지 않지만 저런 초보는 다음날 아침 일어나면 심한 근육통에 시달린다.
하물며 항상 침대에서 편히 자온 유설린이라면……
'내일 아침 비명 소리를 듣겠군.'
유설린은 허리를 손으로 감싸고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 뒤를 여운휘
가 바짝 쫓았다. 유설린의 입이 열렸다.
"으어……"
아침부터 계속 되어 온 신음소리다. 여운휘의 예상대로 아침에 일어난
유설린은 고통을 호소(呼訴)했다. 하지만 그것이 호소한다고 해결 될 일
인가?
유설린은 잠자리에서 일어 난 지 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음을 토해내고 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몸이 쑤셔 오는 거다. 항상 편안한 자리에서 잠
을 자던 그녀로서는 당연한 결과다. 여운휘는 아무렇지 않았다. 여운휘
는 언제나 불편한 자리에서 잠을 잤다. 사곡에서의 생활 때도 긴장을 늦
추지 않기 위해 편안한 자세로 자지 않았다.
사곡을 나온 후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노숙에 익숙해 진 탓도 있지만 여운휘는 언제나 어제처럼 간단히
몸을 기댄 채 잠들었다. 여운휘는 항상 긴장을 놓지 않는다. 호위무사
란, 자신의 편안함보다는 지키는 사람의 안위(安危)를 우선시 해야 한
다.
"…… 허리 아파."
"항상 부드러운 곳에서만 자다가 딱딱한 곳에 등을 대고 자서 그래. 익
숙해 져야 할거다. 아니면 고생할 테니까."
유설린은 내일 아침에도 오늘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아미(蛾眉)를 찡그렸다. 점점 나아지고는 있지만 맨 처음 일어났
을 때는 걷기도 힘든 상태였다. 만약 내일 아침도 그렇다면…… 상상만
해도 끔직하다.
여운휘는 유설린의 마음을 안다. 내일 아침도 이럴지 모른다는 말에 그
녀는 지레 겁을 집어먹었으리라. 지도는 없지만 여운휘는 오늘 안에 마
을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래서 여운휘는 유설린에
게 말하지 않았다.
괜한 불확실한 것으로 마음을 들뜨게 했다가 만약 아니라면 어쩔 건가.
애초에 기대를 가지지 않았을 때와 기대를 가졌다가 그것이 깨졌을 때
는 엄연히 다르다.
지도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여운휘는 단지 지형을 본 것이다. 이 정
도 마교랑 거리가 있다면 사람이 살만도 하고, 오는 길에 발자국과 수레
자국, 그 외 소 같은 가축들의 발자국도 봤다.
확실한 건 사람이 산다는 점이다.
마교인도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여러 가지 즐길 것은 즐기며 살아간
다. 그렇기에 마교 내부에 무인이 아닌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밖에서
물품을 구해 와야 한다.
지금 여운휘와 유설린이 온 거리는 보통 사람으로는 이 삼일은 족히 걸
어야 할 정도의 거리였다.
이 정도라면 이 근처에 마을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아직
여운휘의 눈에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힘든 탓인지 유설린은 어제보다 말수가 많이 줄은 상태였다. 여운휘는
한 손에 유설린의 짐과 어제 잡아 둔 고기를 들고 있었다.
유설린이 고기의 양이 많은 게 아니냐고 물었지만 많은 게 아니었다.
유설린은 점심만을 생각하고, 여운휘는 내일 아침까지 생각한 탓이다.
저녁 즈음 도착할 곳에 먹을 것이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만약을 위
해 여운휘는 고기를 넉넉하게 준비한 것이다.
여운휘는 유설린에게 서두르라고 말했다. 오늘이나 내일, 늦어도 내일
모래면 자신들이 나갔다는 사실을 마교 쪽에서도 알아차릴 것이다.
'그 전에 마을엔 한 번 들려야 할 텐데.'
마교의 정보망이라면 자신들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다만 마교 쪽에서 유
설린과 여운휘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 여운휘가 믿
는 점이었다. 마교 교주가 유설린을 위해 뛰쳐나올 거다.
가능하면 마교 교주가 뛰쳐나오기 전에 여운휘와 유설린은 돌아가야 한
다.
오늘 마을을 찾지 못하면 구경은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 돌아가는 데 하
루 반에서 이틀 정도 걸린다고 계산하면 오늘까지가 한계다. 그 이상 시
간을 소모하면 마교 교주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뭐, 오늘은 마을에 도착 할 수 있겠지.'
여운휘는 그 날 안으로 마을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해
가 저물 때까지 걸은 여운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넓게 펼쳐진 들판뿐이
었다.
"마을은…… 훗날 보여 줘야겠다."
여운휘는 유설린에게 마을을 보여 주지 못했다.
"괜찮아. 이곳까지 데려와 준 것만 해도 고마운 걸."
유설린은 순수한 여자지 멍청한 여자는 아니다. 유설린은 지금으로도 여
운휘에게 충분히 고마웠다. 여운휘는 모르지만 유설린은 마교에서 마을
에 가 본 적이 있다.
강을 봤다. 또 바다를 보여 주겠다는 약조(約條)도 받았다.
충분하다, 그거면.
이번이 끝이 아니다. 약속한 대로 여운휘는 자신을 데리고 다시 나올 것
이다. 지금 보지 못한 것은 그때 보면 된다.
유설린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지금?"
유설린의 말에 여운휘는 반문했다. 이미 해가 지고 슬슬 잠자리에 들어
야 할 시간인데 돌아가자니?
"최대한 빨리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네 뜻이 그렇다면……"
여운휘는 지금 돌아가든 내일 아침 돌아가든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도
착하기 전에 마교 교주가 알아차릴 것이고, 조금 일찍 도착하느냐 늦게
도착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아무 생각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생각은 하고 있었나 보군.'
여운휘는 유설린이 자신의 아버지 탓에 그렇게 말했나 보다 생각했다.
여운휘가 몸을 돌리자 유설린은 그의 등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오늘은 땅에서 안 자도 되겠네.'
안 됐지만 여운휘의 예상이 두 번째로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단
지 땅에서 자기 싫었을 뿐이다.
이틀 째 소교주가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하루 정도야 그렇다 쳤지만
이틀이 지나니 유모인 린린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약 소교주가 잘
못 된다면? 자신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린린은 슬슬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게 쉬운 일인가. 더군다나 평소에는 거의 식사를 거른 적 없던 소교주
가 이틀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다니……
왠지 이상했다.
안 되겠다 생각한 린린은 유설린의 거처로 갔다.
"무슨 일이냐."
"소교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린린을 막아선 것은 소교주의 거처를 지키는 무인은 진고림이었다. 이
미 미시(未時)가 지난 지금 린린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던 것이다. 린린
은 항상 식사시간에만 잠시 들려서 밥을 가져다 주고 떠나곤 했다.
그런 그녀가 이 시간대에 오니 아무리 허락된 자라고 해도 경계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시간이 다소 늦은 것 같은데."
"이틀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아서요. 한 번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
다."
"꼭 지금 해야겠나."
"왠지 좋지 않으신 일이 생기신 듯 해서요."
"안에는 소교주님의 호위무사가 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말했겠
지."
진고림은 린린이 들어가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들어갔
다가 일이 생기면 그건 자신의 책임이 될 게 아닌가. 다른 것에 관해서
는 모두 무관심한 교주이지만, 자신의 딸에 한해서는 누구보다 치밀(緻
密)하다.
일이 생긴다면…… 죽는다.
진고림은 막으려 하지만 린린은 들어가려 한다. 진고림은 일이 생기는
것을 꺼려했지만, 유모인 린린은 일이 벌어졌다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
한 처지였다.
진고림은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린린은 들어가서 확인을 해 봐야
했다. 진고림은 한 발 물러섰다.
"들어가라. 대신 나도 같이 가마."
"고마워요."
진고림이 문을 열자 린린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린린의 뒤에 진고림
은 바짝 붙었다. 아주 만약이지만 지금 앞에 있는 이 여자가 인피면구
(人皮面具)를 쓴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마교의 움직임이 왠지 모르게
흉흉(洶洶)한 것이 예전 같으면 하지도 않았을 상상까지 하게 만들었
다.
"소교주님."
방 앞에 선 린린이 소교주를 불렀다. 대답이 없다. 린린은 다시 한 번
목청을 높였다.
"소교주님."
여전히 대답이 없다. 소교주가 자고 있어서 대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
지만 소교주는 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호위무사인 그 남자라면 듣고도 남
았을 것이다. 항상 음식을 가져 올 때마다 칼을 손에 가져다 댄 채 자신
을 응시하는 그 남자는 린린에게 날카롭게 다듬어진 칼 같은 느낌을 줬
다.
그런 남자가 이런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린린 뿐만이 아니다. 진고림 또한 안에서 아무
런 기척도 없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목구멍을 타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소리 마냥 크게 들렸다. 불안
한 탓이다.
린린은 문을 살짝 열었다. 안에 소교주가 있다면 분명히 실례 된 행동이
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린린은 이 외에 다른 행동을 취할 수
가 없었다.
"소교주님?"
아예 문을 열어제친 린린은 침대에 아무도 없자 다시 소교주를 불렀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어, 없다!"
"뭐?"
놀란 건 린린 뿐만이 아니다. 아무도 없다는 말에 진고림은 방안을 살폈
다. 하지만 텅 비어 버린 방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놀
라서 주저앉은 린린과는 다르게 진고림은 밖으로 나가 근처를 샅샅히 뒤
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잠이 오지 않아서 산책이라도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기를 바랬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
진고림은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린린에게 다가갔다.
"없어."
"어, 어쩌죠?"
"…… 교주님에게 말씀 드려. 소교주님은 실종 됐다."
"하지만 소교주님이 사라지셨다는 사실을 알면……"
불똥이 튈게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진고림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감췄다는 것을 알면 결코 살 수 없
다. 지금이라면 아직은 살 희망이 있다.
"때를 놓치면 죽어. 잘하면 지금이 우리가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
도 몰라."
죽는다는 말에 린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