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37)

                    추혼객(錘魂客) 엄백린 

엄백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린이냐." 

엄백린의 뒤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귀검사영(鬼劍死影) 진린이라고 불 

리는 자다. 진린은 엄백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금천멸문대(禁天滅門隊)의 수장(首長)을 회유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수상한 움직임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워낙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터라 아직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수고했다. 하지만 아직 쉴 때는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는 

다. 우리 쪽 세력이 더 많긴 하지만, 만약을 위해 이 할을 더 손에 넣는 

다." 

검은 색 옷을 입음으로써 마치 어둠과 동화(同化) 된 것 같이 서 있던 

진린은 포권을 취했다. 진린이 사라지자 창문을 통해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던 엄백린의 입이 열렸다. 

"일 년…… 일 년 후엔 내가 마교의 주인이다." 

마교 부교주 엄백린은 간특(奸慝)한 자다. 

'넌 모든 걸 가졌잖아. 내 여동생도, 그리고 마교라는 힘도…… 이제 네 

가 가졌던 모든 것을 내가 가져가겠다.' 

엄백린은 자신의 배다른 여동생이었던 엄여홍을 사랑했다. 

마교에는 엄여홍이 죽은 것이 전 부교주였던 혈무린이 소개시켜준 호위 

무사가 그녀를 겁탈하는 바람에 자진했다고 알려져 있다. 허나, 실상은 

그게 아니다. 엄여홍을 겁탈하려고 했던 것은 호위무사가 아니라 엄백린 

이었던 것이다. 

그때 엄여홍은 자진했고, 호위무사는 엄백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천하를…… 손에 넣겠다. 나, 이 엄백린이 말이다." 

마교뿐만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천하다. 

'사무린이라고 했던가.' 

엄백린은 몇 달 전부터 자신의 수하로 들어오게 된 사무린을 떠올렸다. 

이용해 먹을 만한 자다. 강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성품이 사갈(蛇蝎) 같 

다. 앞으로 일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수많은 자들을 죽여야 한다. 그 일 

에 사무린은 적합한 인물인 것이다. 

아직까지는 사무린에게 특별히 자신의 속마음을 내 비춘 적은 없지만, 

그녀가 정말 쓸만하다 싶으면 자신의 계획에 동참시킬 예정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우선 마교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 유설린도.' 

그는 두 가지 이유로 유설린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힘으로 해 버리면 

그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정통성의 문제다. 소교주인 유설린을 내세운다 

면 있을 반발도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엄백린은 엄여홍을 닮 

은 유설린을 사랑했다. 

'그러고 보니 유설린을 찾아간지도 오래구나. 내일은 한 번 찾아가 봐야 

겠군.' 

엄백린은 침대 쪽으로 움직였다. 

기이잉…… 

유설린은 듣지 못했지만 여운휘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이곳에 들어온 자는 유백명과 유모뿐이다. 유모는 방금 

전 식사를 주고 갔으니 들어올 때가 아니다. 

'교주인가.' 

여운휘는 검병(劍柄)에 조용히 손을 가져다 댔다. 아직 상대가 파악되 

지 않은 이상 방심은 금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설린은 앞에 놓여져 있는 밥을 먹을 뿐이다. 그 뒤 

에 서서 문 쪽을 노려보고 있던 여운휘는 반대편에 상대가 나타나자 전 

살세의 발도를 준비했다. 덩치를 보니 교주도, 유모도 아니다. 

그렇지만 뭔가 이상한 뜻으로 이곳에 온 자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저 

렇게 당당하게 소리까지 내면서 걷지는 않았을 테니까. 

"설린아." 

밥을 먹던 유설린은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봤다. 유설린은 문 밖에 누 

가 왔는지 알아 차렸다. 여운휘가 이곳에 온 이후로는 아직까지 한 번 

도 오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종종 오던 부교주 엄백린이었던 것이다. 

"누군지 아나." 

"부교주 엄백린." 

유설린은 여운휘가 궁금해했던 것을 풀어준 후에 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예. 안에 있어요." 

문을 열고 엄백린이 들어왔다. 여운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곡에 

있을 때 그는 마교 부교주 혈무린을 만났던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앞 

에 나타난 것은 외모도 전혀 다를뿐더러, 이름도 엄백린이라고 한다. 

분명히 다른 인물이다. 그렇다면 혈무린은 어떻게 된 것인가. 

"오랜만이구나. 요즘 좀 바빠서 내가 너에게 신경을 별로 못 썼단다." 

"괜찮아요. 요즘엔 심심하지도 않거든요." 

"그런가. 뒤에 있는 네 호위무사 탓이겠구나. 이름이…… 여운휘라고 했 

던가?" 

잠시 혈무린에 대해 생각하던 여운휘는 자신의 이름이 상대의 입에서 나 

오자 엄백린을 쳐다봤다. 여운휘의 눈빛과 부교주 엄백린의 눈빛이 부닥 

쳤다. 

'맘에 안 드는 눈빛이군.' 

여운휘의 부교주에 대한 감상이다. 엄백린의 괴상한 외모가 문제가 아니 

다. 눈빛에서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드는 자다. 눈빛이 저런 것을 보니 

좋은 자는 아닐 것 같다. 

"예, 여운휘라고 해요." 

"어쨌든 설린이를 잘 보살펴 주길 바라네." 

"그러지." 

엄백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겨우 호위무사 따위가 자신에게 반말을 

지껄인 것이다. 자신은 마교의 부교주다. 교주조차도 엄백린에게 저런 

식으로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겨우 호위무사 따위가…… 

"말이 짧군." 

"난 원래 그래." 

"너는 호위무사다! 나는 그리고 마교의 부교주고." 

"어쩌라는 거냐. 내 주인은 유설린이지 네가 아니야. 유설린이 존대를 

하라고 한다면 힘들지만 할 의향(意向)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까 

지 그럴 마음은 없다." 

여운휘의 말에 엄백린은 기가 찼다. 나이뿐만이 아니라 직위조차 한참 

은 낮은 자가 자신에게 반말을 지껄이니 참기 힘든 건 당연했다. 당장 

쳐죽여도 시원치 않은 기분이었지만 엄백린은 우선 참았다. 앞에 유설린 

이 있는 탓이다. 

"내가 너보다는 나이로 보나 뭐로 보나 위인 것 같은데." 

"외모는 내가 위지." 

엄백린은 주먹을 날릴 뻔했다. 여운휘가 비꼬기 위해 한 말에 엄백린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어렸을 때는 못생긴 외모 탓에 놀림까지 받 

던 그다. 그 당시에는 힘이 없어서 참았지만, 지금은 힘이 있는데도 참 

아야 한다. 

'건방진 놈! 나중에 두고 보자. 내 앞에서 목숨만 살려 달라고 설설 기 

게 될 테니까!' 

훗날 마교를 손에 넣게 되면 바로 저 놈부터 죽여버릴 거라 마음먹으며 

엄백린은 화를 참아냈다. 지금은 괜한 일을 만들어 소교주의 눈 밖으로 

벗어 나가선 안 된다. 자신의 수하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맘에 들어하 

는 상관은 없을 테니까. 

"후우, 나와 같이 꽃밭이나 한 바퀴 돌자꾸나. 그 동안 어찌 지냈는지 

도 들어볼 겸 해서 말이다." 

"예, 나가죠." 

유설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설린이 움직이자 뒤에서 묵묵히 서 있 

던 여운휘도 그 뒤를 바짝 따라 걷기 시작했다. 

유설린과 단 둘만의 시간을 원했던 엄백린은 여운휘를 떨구려 했다. 

"넌 안 따라와도 된다. 내가 있는데 그 무엇이 걱정이냔 말이다." 

"호위무사는 나다." 

더 이상의 말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여운휘는 엄백린의 말에 싫다고 

답한 것이다. 

"…… 네 멋대로 해." 

엄백린은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유설린과 엄백린은 이야기를 나누며 정원(庭園)을 걷기 시작했다. 엄백 

린은 그 동안 밖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유설린에게 해 주었고, 

유설린은 거의 듣는 입장에서 웃음만 지었다.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 

지 않는다. 할 말도 없고, 굳이 말을 할 생각도 없다. 

걷던 중에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이 나오자 엄백린은 기회라고 느꼈다. 이 

것은 자연스럽게 유설린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유설린이 

향하는 방향과 반대쪽으로 몸을 비틀며 엄백린은 손을 뻗었다. 

"그 쪽 말고 이……" 

팍! 

유설린의 손에 거의 손이 닿는 순간 엄백린의 팔이 위로 퉁겨졌다. 여운 

휘가 검을 검집에 넣은 채로 아래에서 위쪽으로 쳐버린 것이다. 

"뭐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던 엄백린이 목청을 높였다. 여운휘의 표정은 일 

말(一抹)의 변화조차 없다. 엄백린은 다시 외쳤다. 

"뭐냐고 묻지 않았느냐! 감히 내 손을 치다니!" 

"호위무사의 본분을 지킨 것뿐이다. 어떤 남자가 손을 잡으려 했다, 그 

래서 쳐냈다. 왜? 뭐 이상한 거라도 있나?" 

여운휘는 호위무사로서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자신이 호위하는 여자 

를 남자가 손을 잡으려고 해서 쳐내는 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네 놈…… 쓴맛을 한 번 보여줘야겠구나." 

"된다면 얼마든지." 

"당장 나를 따라 와라!" 

엄백린은 여운휘를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안 된다. 자신의 수하도 

아니거니와, 마교 교주도 호위무사로 인정한 자다. 하지만 참을 수는 없 

었기에, 엄백린은 여운휘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려고 한다. 

비무다. 

비무라는 이름을 덮어 쓴 폭력을 여운휘에게 행하려는 것이다. 엄백린 

은 여운휘라는 호위무사를 가뿐하게 패 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의심치 

않았다. 강하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봤자 마교 부교주인 자신에 비한다 

면 한참은 애송이라고 생각했다. 

"설린, 비무 정도는 해도 되겠지?" 

"응. 네가 원한다면 해도 돼." 

유설린의 말투가 왠지 자신을 대할 때와는 다르다는 생각에 엄백린은 더 

욱 화가 났다. 

'반병신을 만들어 주마. 여운휘!' 

옷이 휘날릴 정도로 '획' 하니 돌아선 엄백린은 소교주가 머무는 거처 

안에 있는 널찍한 장소로 향했다. 

익힌 무공을 연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넓은 장소에 여운휘와 엄백린이 

마주섰다. 추혼객(錘魂客) 엄백린, 마교 내에서도 한 손으로 꼽을 수 있 

는 절정고수다. 그리고 그에 비해 여운휘는 아무런 이름도 없는, 하찮은 

호위무사였다. 

"검이 아닌 권각지(拳脚指) 등을 이용한 박투(搏鬪)로 대결하자. 상관없 

으렷다?" 

"마음대로." 

엄백린은 검의 고수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이점을 버린 이유는 검으로 

는 상대를 두들겨 팰 수 없는 탓이다. 죽일 수 없는 이상 검으로 상대하 

기보다는 주먹이나 발로 두들겨 패 주는 것이 몸 속에까지 충격이 가서 

좋다. 

'고작 호위무사 주제에 감히 나에게 기어오른 대가를 받게 해 주지.' 

죽지는 않겠지만 몇 달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들게 만들 생각이 

다. 그렇게 된다면 그 후부터는 고분고분해질 터, 유설린에게 접근하는 

것이 보다 수월해 질 것이 분명하다. 

"싸울 준비 됐나." 

"준비는 당신이 이곳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되어 있었다." 

여운휘는 거치적거리는 검을 옆쪽으로 던졌다. 마교 부교주라면 실력이 

대단할 것이다. 그렇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다. 오히려 강한 자라서 더욱 

싸워보고 싶다. 여운휘는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사곡에서만 생활하다보니 사람들과 싸워본 경험이 적다. 그건 호위무사로 

서 치명적인 문제일지도 모르는 점이다. 여운휘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過 

信)하여 쓴잔을 들이키고 싶지 않았다. 

엄백린이 한 발 내딛는 순간 그의 상체가 흐릿해졌다. 순간 여운휘는 상 

체를 비틀며 발을 휘둘렀다. 여운휘가 휘두른 발을 피해내기는 했지만 엄 

백린은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신법을 펼쳐 엄청난 속도로 여운휘의 등 쪽으로 움직였다. 분명 

히 시야에서 놓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운휘는 그것을 피해내면서, 발 

을 휘두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움직임을 봤다는 이야기다. 아니면 순 

간적인 감각으로 피해낸 것이거나. 

'사곡을 돌파했다고 하기에 대단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어렸을 때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이라면 엄백린은 어렵지 않게 사곡을 뚫 

을 수 있다. 사곡을 뚫었다고 해서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않은 것은 사실 

이다. 하지만 만약 방금 자신의 움직임을 어렴풋이 나마 본 것이라면…… 

'생각을 바꿔야 할 지도 모르겠군.' 

애송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닐지도 모른다.   

우선은 다음 공격을 해 보자고 생각한 엄백린은 여운휘의 정강이를 향해 

발을 휘둘렀다. 여운휘는 아래쪽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다리를 들어서 피 

했다. 

'지금이다!' 

애초부터 발은 정강이를 노렸던 것이 아니다. 빈 공간을 지나가던 다리 

가 땅에 닿으며 엄백린은 상체를 잡아 당겼다. 팔꿈치가 정확하게 여운휘 

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빡! 

가까스로 막았다. 하지만 완벽한 방어를 하기에는 엄백린의 움직임이 너 

무 빨랐다. 

여운휘는 팔에서 느껴지는 얼얼함을 느끼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팔꿈 

치를 막는 건 성공했지만 충격이 상상이상이다. 급하게 막느라고 얼굴과 

팔이 닿았다. 그 상태에서 충격을 받자 머리가 흔들렸다. 

그 탓에 정신은 없었지만, 여운휘는 최대한 여유 있게 행동했다. 상대에 

게 약하게 보이면 바로 공격이 이어질 것이다. 여운휘가 거리를 벌리자 

엄백린은 지법을 날렸다.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지법에 맞을 정도로 여운휘는 바보가 아니었다. 여 

운휘는 지법을 피하면서 엄백린에게 주먹을 날렸다. 여운휘의 손이 닿으 

려는 찰나 엄백린은 금나수(擒拏手)의 수법을 사용했다. 

근접 박투에서 금나수는 중요한 공격 수법의 하나다. 

손목이 낚아 채이자 여운휘의 가슴이 비어버렸다. 

슈욱! 

엄백린의 손이 날아들었다. 여운휘의 비어 있는 가슴을 향해서. 절체절명 

(絶體絶命)의 순간 여운휘는 피해를 줄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손을 뻗었 

다. 

퍼억! 

서로가 서로의 가슴을 쳤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여운휘는 한참이나 뒤 

로 밀려났다는 것과 얼굴 표정이 구겨졌다는 점. 반면 엄백린은 멀쩡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게 바로 나와 너의 차이다. 그럼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설린아, 나 

중에 보자." 

유설린은 급하게 여운휘를 향해 달려갔고, 엄백린은 몸을 돌려 걷기 시작 

했다. 여운휘는 상대가 사라지자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엄청난 일격……' 

여운휘는 멀어져 가는 엄백린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손바닥에 감각이 있 

었다. 결코 엄백린이 그 공격을 흘리거나 하지도 못했다는 것은 여운휘 

는 알고 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괜찮으니 소란 떨지 마." 

여운휘는 자신의 몸 상태를 뭍은 유설린에게 쏘아 붙였다. 잠시 조용히 

있던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만약 이게 비무가 아니었다면 네가 죽었을 지도 모르니까. 더 강해지 

지. 세상 그 누구도 네게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최고의 호위무사가 되 

겠다." 

유설린은 맨 처음에는 미안하다는 여운휘의 저의(底意)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호위무사는 지면 안 된다. 호위무사의 패배는 곧 그가 지키는 사람의 죽 

음과도 이어지는 탓이다. 여운휘는 이것을 실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 

면 유설린은 죽었을 테니까, 여운휘는 사과를 했던 것이다. 

"다시는 패배 따위는 하지 않겠어. 호위무사는 져서는 안 돼." 

"흐음…… 운휘, 나 좀 따라와." 

"왜." 

"앞으로 패배를 하기 싫다면서. 그러는데 도움이 될 것들을 보여줄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여운휘는 유설린의 뒤를 따랐다. 유설린이 멈춘 곳 

은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크기는 웬만큼 크지만 겉이 초라해 보이 

는 검은 색 건물이었다. 

'패배 하지 않는데 도움이 되는게 여기 있다고?' 

아무리 봐도 그저 빛 바랜 오래된 건물일 뿐인데, 여기서 유설린이 자신 

에게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여운휘의 궁금증을 알 리가 없 

는 유설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걸 봐." 

"이건……" 

무수히 많은 책들이 꼽혀 있다. 분류도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 

하다. 

"여기 있는 이 책들이 무공 책이야." 

유설린이 가리킨 곳에는 정말 몇 권이라고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무 

공 책들이 진열(陳列)돼 있었다. 

"뭐가 좋은 거고 나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아직 무공을 제대 

로 익히지 않았거든. 무공을 왜 익히는 지도 오늘까지는 알지 못했어. 하 

지만 이제 무공을 익히는 이유를 알았어." 

유설린은 웃었다. 여태까지 무공은 그냥 시간 때우기 용으로 배웠던 그녀 

였지만 오늘 무공의 의미를 알게 됐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유설린 

이 생각하게 된 무공의 의미는 이랬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무공을 배우는 거라는 것을." 

무공을 익히는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유설린에게는 그것이 

전부였다. 

"여기 있는 무공 책 중에서 익히고 싶은 거 빼서 다 익혀. 내가 아버지에 

게 들은 바로는 정말 대단한 무공도 몇 개 있다던데." 

무엇을 희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운휘는 유설린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 

다. 하지만 여운휘의 성격 답게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묵묵 

히 서서 책장을 바라보던 여운휘는 책을 한 권씩 빼서 보기 시작했다. 여 

운휘는 검법은 익혔지만 그 외에 장법이나 지법 같은 것은 깊이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이곳에 있는 무공 책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절기들로 가득 찬 책장 

은 무인에게는 보물과 다름없다. 

여운휘가 이것저것 빼서 보는 동안 유설린은 다른 책을 찾고 있었다. 아 

버지가 항상 '이 무공만 익히면, 이 무공만 익힌다면……' 이라고 중얼거 

렸던 무공 책을 찾는 것이다. 

아버지의 손에 자주 들렸던 책인 터라 유설린은 그것을 찾는 것이 어렵 

지 않았다. 유설린은 그 책을 들어 올렸다. 

"여운휘, 이것 좀 와서 봐봐." 

유설린의 손에 검붉은 색 표지로 덮여 있는 책 하나가 들렸다. 

그것은 전설로 남아버린 검귀(劍鬼) 천일혼의 검법이다. 

한편, 엄백린은 태연스럽게 걸어서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한참을 걷던 엄 

백린이 갑자기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우, 우욱!" 

간신히 참았던 피가 터져 나왔다. 

만만하게 보고 그냥 몸으로 받은 게 실수였다. 호위무사 따위가 이만큼이 

나 강할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 자신의 몸으로 침투한 여운휘의 힘 

이 속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보다 약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엄백린이 저 나이일 때는 상상도 

못한 경지다. 

이 놈은 위험하다. 

약관(弱冠)의 나이 밖에 되지 않는 자가 마교의 부교주인 자신과 이 정도 

로 대결을 펼쳤다. 

그렇다면 오 년 후엔? 

엄백린은 자신 있게 이길 수 있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운휘가 검귀 

의 심법인 무상회천진결을 익혔다는 사실을 모르는 엄백린으로서는 그의 

알 수 없는 내공을 단지 운 좋게 영약을 얻음으로서 성장했다고 판단했 

다. 

영양을 먹지 않고선 그 나이 대에 이 정도 내공은 불가능했으니까. 

예상외의 전개였다. 그저 건방진 호위무사를 혼내려고 했던 것뿐인데 자 

신 또한 당했다. 여운휘에게 더 강력한 일격을 날리긴 했지만, 엄백린과 

여운휘는 상황이 다르다. 

엄백린은 마교의 부교주고 여운휘는 겨우 호위무사일 뿐이다. 

여운휘는 진다 해도 잃을 것이 없지만, 엄백린은 그렇지 않다. 천하를 손 

에 넣으려는 자신이 호위무사 하나에게 쩔쩔 맸다고 생각하니 씁쓸했다. 

엄백린은 입 주변에 묻어 있는 피를 훔쳐냈다. 

'여운휘…… 호위무사로 있기는 아까운 자군.' 

아까운 자다. 고작 한 여자의 호위무사로 있기에는. 엄백린은 여운휘를 

자신의 수하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쪽같은 성격을 보니 우리는 같이 할 수 없을 것 같군.' 

아까운 자지만 적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