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37)

여운휘가 지붕 위에서 뜨는 해를 보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며 

사무린이 걸어 나왔다. 

사무린은 오랜만에 몸이 개운했다. 걱정 없이 자 본 것이 언제였는지 생 

각도 안 날 정도로 오래 됐다. 그렇지만 사곡을 벗어난 어제는 정말 마 

음 편히 잘 수 있었다. 

"여운휘, 잘 잤어요?"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운휘를 발견하고 사무린은 웃으며 말했다. 여운휘 

는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잠 못 

잤다는 것을 이야기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제가 소교주님에게 여운휘에 대해서 잘 말해뒀어요. 원래 무뚝뚝한 남 

자라서 그런 거니까 이해하라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무린은 그런 말을 유화린에게 한 적 없다. 자신 

이 잘 보여야 하는 처지에 뭐 하러 그런 말을 하겠는가. 사무린은 여운 

휘와 유화린의 불화(不和)를 기회로 만들려고 한다. 

"소교주는…… 일어났나."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어요." 

유화린은 어제 사무린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늦게 잠에 들었기 때문에 아 

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난 잠시 이 근처를 돌아보던지 할 테니 네가 알아서 소교주를 모시던 

지 해." 

갑갑한 마음과 소교주를 보기 껄끄러운 마음 탓에 여운휘는 공중으로 솟 

구치며 건물 밖으로 나갔다. 특별히 갈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 

운휘는 아무 곳으로 방향을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여운휘가 나가자 사무린은 기회다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여운휘 

가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없다면 오히려 일이 수월해 진다. 

자신이 호위무사가 될 수 있게 쐐기를 박아야 한다. 그리고 그게 바로 

지금이다. 

사무린은 소교주를 깨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유화린을 위험 

에 빠트리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험한 순간에 목숨을 구해 줄 것 

이다. 

'소교주의 호위무사는 나야.' 

사무린은 잠시 조용히 자고 있는 소교주를 바라보다 살짝 그녀를 흔들었 

다. 

"소교주님." 

"으응, 왜 그래." 

잠에 흠뻑 빠져 있던 유설린은 자신을 흔드는 사무린에게 귀찮은 듯이 

대답했다. 어제 늦게 잔 탓에 아직 유설린의 눈은 뜨일지 몰랐다. 

"밖에 나가보지 않을래요?" 

"응?" 

소교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한 탓에 손 

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는데, 사무린의 말에 유설린은 곧장 일어난 

것이다. 그럴 정도로 사무린의 말은 매혹적이었다. 

"지금 마침 여운휘도 나갔거든요. 어차피 소교주님의 얼굴을 아는 사람 

도 없을 테니까 조용히 나갔다가 들어오면 어떨까요." 

"음……" 

소교주는 자신의 아버지인 유백명이 경고했던 결코 밖으로 나가지 말라 

는 말을 잘 지켜왔다. 아무리 쓸쓸해도 유설린은 참았고, 밖에 나가도 

별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사무린에게 들은 

밖의 세계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조용히 나갔다 오면……' 

자신의 아버지와 부교주인 엄백린, 유모 이렇게 셋만 만나지 않으면 걸 

릴 이유도 없다. 유설린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유설린의 옆에는 사무린이 있다. 사무린은 유설린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제가 옆에 있다면 아무 문제없을 거예요." 

"…… 좋아. 어서 가자!" 

"이런, 소교주님 신나셨나 봐요. 하지만 유모라는 분이 오고 나서 나가 

야지요. 우리가 없는 걸 발견할 텐데 그냥 나가면 안 되죠." 

"아, 그렇구나. 그러면 점심은 오늘 됐다고 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다 

시 금방 들어와야 할 테니까." 

사무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견하다는 듯이 웃고는 있지만 속으 

로는 아니다. 이제 예전처럼 연기가 어딘가가 이상한 그녀가 아니다. 더 

군다나 상대인 소교주 유설린은 순수한 아이다. 

다른 사람을 의심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그러한 소녀가 상대를 속이는데 

이력이 난 사무린의 마음을 알 턱이 있겠는가. 사무린이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유설린은 곧 나가게 될 바깥 세계에 대한 기대로 가득 

했다. 

유설린과 사무린이 침대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닫힌 문이 열리 

며 유모가 나타났다. 꽤나 뚱뚱한 몸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나타난 

그녀는 유설린과 사무린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식사 가져왔습니다." 

"응, 거기 두고 가. 그리고 점심은 됐으니까 가져다 줄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식사는 세 분이라고 해서 세 명분을 가져왔습니다." 

유모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꾸벅이고 뒤로 물러섰다. 유모 

가 가져온 식사를 대충 뜨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유설린과 사무린은 집 

밖으로 나갔다. 

우선 앞쪽은 무사 하나가 지키고 있으니 아무래도 빠져나가기가 힘들 

다. 사무린 혼자라면 문제도 아니지만 유설린까지 그렇다는 보장은 없 

다. 더군다나 이곳을 지키는 무인이라면 보통 내기가 아닐 것이다. 

"이곳 뒤쪽도 다른 무사가 지키고 있나요?" 

"아니, 문을 지키는 무사 하나 밖에 없어." 

"그럼 뒤쪽으로 나가죠. 어제 보니 대충 경공은 사용하실 수 있으신 것 

같은데." 

"응. 저 정도 담을 넘는 건 문제없어." 

담은 약 이 장 정도의 높이 밖에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근처에 있는 나 

무 같은 지물(地物)을 이용한다면 담을 넘는 것이 더 수월해 진다. 

사무린은 이곳을 지키던 무사가 있는 건너편 쪽에서 살짝 밖으로 넘었 

다. 주변에 무엇인가가 있는지 미리 알아보기 위해 취한 행동이다. 

'숨어서 지키는 자는 없고……' 

엄청난 고수가 숨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만 않다면 사무린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 근처에서 이 건물을 지키는 

자는 없었다. 

많은 호위가 있어야 할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무인은 하나밖에 없다. 그 

건 마교 부교주 유백명이 인간을 불신하게 된 것에서 비롯됐다. 그 일 

이후 유백명은 인간을, 그 중에서도 남자는 더더욱 믿지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유백명은 자신의 소중한 딸 곁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 

을 원치 않는다. 그래도 안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유백명은 지금 문을 

지키는 무인 하나를 놔둔 것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 넓은 곳을 무인 하나가 지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 

는 거였다. 안에서 지키는 것도 아니고 장원(牆垣) 밖에서 소교주를 지 

킨다는 건, 그저 명목(名目)상에서만 호위무사지 알고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소교주님 나오세요." 

다시 장원 위에 올라선 사무린이 아래쪽에서 기다리는 유설린에게 말했 

다. 아래쪽에서 사무린이 신호를 보낼 것은 기다리던 유설린은 재빠르 

게 담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이곳에서 나가는 순간에 들키지 않은 이 

상 유설린을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마교 교주나 부교주가 괜히 돌아다닐 사람도 아니고, 유모도 소속해 있 

는 곳이 있으니 돌아다닐 처지가 아니다. 이곳을 나온 이상 이 일은 성 

공한 거나 다름없다. 

애처럼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유설린과 자신의 계획이 이미 성공한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 탓에 웃음 짓는 사무린, 분명히 둘 다 웃고는 있었지 

만 그 뿌리는 엄연히 달랐다. 

"자, 그럼 갈까요?" 

"응!" 

소교주는 신이 났다. 왠지 모르게 답답했던 장원 안과는 다르게 이곳은 

넓게 탁 트인 것이 마음마저 가볍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사무린은 이곳의 지리를 모른다. 그 탓에 사무린은 주변에 지나가는 사 

람을 잡고 몇 가지를 물어 보았다. 

마교에 산다고 해서 모두 무인인 것은 아니다. 마교에 사는 사람들도 이 

것저것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많고, 그 탓에 마교 안에는 무인도 많지 

만 생필품을 만드는 사람들도 산다. 

평범한 가게 주인인 엄덕만은 갑작스레 등장한 미녀가 자신에게 이것저 

것 묻자 마치 홀린 듯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저 쪽으로 가면 된다는 말이죠?" 

"…… 예." 

사무린은 이 뒤에 할 말을 유설린에게 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엄덕만에게 살짝 몸을 밀착시키고 조용하게 물었다. 

"저기, 혹시 마교 내에 가서는 안 될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원래 같았다면 이런 것을 묻는 것을 이상하게 봐야 한다. 하지만 엄덕만 

은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사무린 탓에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태어나서 

이처럼 미녀는 처음 본다. 더군다나 그런 미녀가 자신과 겨우 한 뼘 차 

이가 날 정도로 붙어 있다.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엄덕만은 사무린의 궁금함을 풀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저, 저쪽으로 가시면……" 

"소교주님 거처 말고요. 아주 위험한 곳, 그런 곳 없을까요?" 

머리를 살짝 넘기면서 웃음 짓는 사무린은 요사스러웠다. 사무린은 구미 

호(九尾狐) 같은 여자다. 엄덕만은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가슴이 답답 

하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 

"저, 저 쪽으로 숲이 있습니다. 무, 무인들이 수련을 하, 할 때 사용하 

는 곳인데……" 

말을 잇기가 힘들 정도로 엄덕만은 가슴이 뛰었다. 그 다음 말을 기대한 

다는 듯한 눈빛으로 사무린이 계속 엄덕만을 쳐다보자 그는 힘겹게 말 

을 이었다. 

"매, 맹수들로 가득……" 

"고마워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인 사무린은 뒤로 물러섰다. 말을 심하게 더 

듬거리기는 했지만 알아듣기는 했다. 유설린은 사무린이 지금 어떠한 행 

동을 했는지 잘 몰랐다. 

그녀는 우선 주변을 둘러보기에 바빴고, 사무린이 갈 곳을 알아보려고 

상대방에게 말을 건다고 알고 있던 탓이다. 물론 갈 곳을 알아보기도 했 

지만 중요한 것은 몸을 밀착시킨 채 은밀하게 물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가장 강한 믿음을 심어 줄 수 있는 행동은 그 사람의 목 

숨을 구하는 거다. 하지만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하물며 장 

원 안에서만 생활하는 소교주에게 그런 일이 생길 턱이 없다. 

사무린은 기회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녀는 기회를 만들어 내려는 것이 

다. 

"고마워요. 그럼 전 이만." 

엄덕만은 멀어져 가는 사무린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 

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다. 

"이게…… 사랑인가." 

집에 있을 아내가 들으면 맞아 죽을 소리를 하며 엄덕만은 다시 자신의 

수레를 이끌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사무린은 소교주에게 바깥 나들이의 즐거움을 주기 위해 번 

화(繁華)한 곳을 찾아갔다. 저녁이 아니라 먹거리가 많이 있는 것은 아 

니었지만, 유설린에게는 마냥 대단해 보였다. 그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유설린은 열린 입을 닫을 줄을 몰랐다. 

"지, 진짜 많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리고 이것도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랍니다. 저 

녁 시간이 되면 아마 이것보다 사람도 배(倍) 이상 많아질 테고, 술 마 

신 사람들이 행패(行悖)를 부리면서 더 소란스럽죠." 

"헤에……" 

유설린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보다 더 많은 사람에 술을 마시고 행패 

를 부릴 남자들이라니…… 

"그럼 잠시 이곳을 구경하다가 점심 식사를 하고 다른 곳으로 움직여 

요." 

"응! 저쪽으로 가 보자!" 

아이들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보고 있자 유설린도 궁금함이 인 것이다. 

유설린이 서둘러 달려가는 것을 보며 뒤쪽에 있는 사무린이 천천히 따 

라 걷기 시작했다. 

소교주는 너무 순수하다. 

'나에겐 잘 된 일이지만.' 

순수한 사람은 이용해 먹기 쉽다. 지금에나, 나중에나 소교주 같은 성격 

이라면 이용해 먹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사무린은 생각했다. 

사무린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네며 소교주 옆을 따라다녔다. 

처음 접해보는 광경에 유설린은 정신을 빼앗겼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 

다가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유설린은 사무린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디 가는 거야?" 

"한 곳에만 있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아직 저녁때까지는 시간도 있으니 

까 다른 곳 좀 가 보려고요." 

"알았어. 마음대로 해." 

사무린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맡겨 버린 소교주는 그냥 무작정 따라 걷기 

만 했다. 

"아, 잠시만요." 

사무린은 유설린을 놔두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곳이 아까 그 멍청한 남 

자에게 들었던 숲인지 알아야 하는 탓이다. 

숲에 가까이 다가가던 사무린은 주변을 두른 두꺼운 나무 사이에서 팻 

말 하나를 발견했다. 사나운 맹수들이 가득하니 훈련을 받는 무인이 아 

닌 민간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을 담은 팻말이었다. 

"맞나 보군." 

팻말에 적힌 내용을 보아하니 아까 그자에게 들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 

다. 마교 내의 일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소교주다. 이곳이 그러한 곳인 

지 알 턱이 있겠는가. 

"소교주님 어서 오세요!" 

유설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며 사무린이 외쳤다. 유설린은 경공을 펼 

쳐 사무린을 향해 다가갔다. 

"저 숲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 절 잘 따라오세요." 

"응." 

사무린은 저 숲에 맹수가 있다는 사실을 일체(一切) 말하지 않았다. 극 

적인 순간을 위하여, 그리고 만약에 위험한 곳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는 

잘못을 피해가기 위한 조치였다. 

사무린은 숲으로 들어서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변에 무엇인가가 다 

가오는지를 느끼기 위함이다. 아직은 맹수가 나타나면 안 된다. 사무린 

은 기척이 느껴지면 반대쪽 방향으로 움직일 생각이다. 

그녀는 극적인 순간을 노리고 있다. 

어느 정도 숲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무린은 슬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때를 맞추어 유설린이 물어왔다. 

"우리 맞게 가는 거야? 숲이 너무 안 다듬어 진 것 같은데." 

"그러네요. 흐음…… 소교주님 제가 이 곳이 맞나 잠시 주변을 둘러보 

고 올 테니까 여기서 쉬고 계세요." 

사무린은 유설린이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몸을 날렸다. 어느 센가 사 

라지는 사무린을 보면서 유설린은 뻗었던 손을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 

다. 이 숲에 혼자 있게 된 것이 왠지 모르게 불안했던 것이다. 

'왠지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아.' 

혼자 남게 된 무서움 탓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유설린은 자신의 바로 

근처에 있는 나무에 사무린이 매달려 있을 거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사무린은 몸을 감춘 채 근처에 있는 맹수를 찾아 나섰다. 아까 기척을 

느꼈던 장소로 가자 난생 처음 보는 범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범이다!' 

늑대 정도나 생각하던 사무린으로서는 이곳에 범이 있다는 자체가 신기 

했다. 잠시 범의 모습에 넋을 잃었던 사무린은 곧 정신을 추슬렀다. 사 

무린은 아까 주워 들은 돌을 유설린이 있는 쪽을 향해 던졌다. 

타닥…… 

파악!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범의 몸이 공중을 날았다. 돌 있는 

장소에 순식간에 도착한 범은 다시 한 번 낮게 울며 주위를 둘러 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자 범의 눈이 조금 더 날카롭게 변했다. 코를 벌렁거 

리며 주변의 냄새를 맡던 범은 유설린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르릉……" 

사무린은 나무 위에서 급하게 유설린이 있는 쪽을 향해 움직였다. 사무 

린이 유설린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범도 천천히 같은 방향을 향해 달리 

기 시작했다. 

범이 다가오는 소리를 사무린이 다가오는 소리로 착각한 유설린은 반가 

운 얼굴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무 뒤에서 나타난 것 

은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이 아닌가. 

유설린의 얼굴 표정이 굳어 버렸다. 실제로 본 건 처음이지만 책에서 읽 

은 적이 있다. 

'버, 범이다……' 

범은 사람마저 잡아먹는 흉악한 맹수다. 유설린은 다리가 굳어 버리고 

야 말았다. 재빠르게 경공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도 머리 속에서 맴돌았 

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범의 기세에 유설린이 완벽하게 눌려 버린 것이다. 

'어, 어떻게……' 

유설린은 두려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을 정도로. 

범이 천천히 유설린을 살피며 도는 것은 사무린은 위에서 바라보고만 있 

는 중이다. 달려드는 순간 뛰어 내리며 범의 목덜미를 꿰뚫을 것이다. 

'어서 달려들어! 어서!' 

범의 다리가 순간적으로 움츠려 드는 것을 사무린은 발견했다. 도약을 

하려는 순간인 것이다. 아래를 향해 뛰어 내리려던 사무린은 반대편 쪽 

에서 갑자기 나타나 소교주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남자를 발견했다. 

'여운휘!' 

소교주의 거처에서 나온 여운휘는 복잡한 곳이 싫어서 근처에 있는 숲으 

로 몸을 감췄다. 큰 나무에 올라간 여운휘는 두꺼운 가지에 앉아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여운휘는 아래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소교주……' 

거처에서 나올 수 없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소교주와 사무린이 왜 여기 

에 있는 것인가. 둘이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사무린이 한쪽 

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혼자 남은 소교주는 두려운 듯이 주변을 두리 

번거렸고. 

'사과할까.' 

내려가서 어제 했던 말이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 

지 않는다. 태어나서 사과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는 탓에 여운휘는 어떻 

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던 것이다.   

만약 사과를 한다고 쳐도 무엇을 사과해야 한단 말인가. 바보라고 했던 

점? 아니면 친구가 필요해서 한 행동을 그토록 무시했다는 거? 

여운휘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도저도 못하고 나무에 앉아 있는데 뒤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며 무엇 

인가가 나타났다. 여운휘마저도 처음에 그것이 방금 전에 잠시 사라진 

사무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얼굴을 드러낸 것은 사무린이 아니 

었다. 

'범이군.' 

범이 모습을 드러내고 유설린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런 

데 도망치거나 어떻게 할거라고 생각했던 소교주는 얼굴을 굳힌 채로 딱 

딱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뭐 하는 거야! 도망치던지 아니면 싸울 태세를 갖춰야지!' 

답답한 마음에 외치고 싶었지만 여운휘는 끝내 속으로만 삭혔다. 범은 

유설린을 만만한 상대라고 인식 한 것 같았다. 조심스러웠던 태도가 한 

층 대범해졌고, 혀까지 내미는 것이 소교주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 같 

았다. 

소교주의 얼굴이 울 것처럼 변했다. 가뜩이나 꽤 큰 편인 눈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달려서 더 커지고, 입도 약간 벌어지는 게 툭 건드리면 바 

로 울음을 터트릴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제길……' 

범이 앞다리와 뒷다리를 움직이려는 순간 여운휘는 소교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소교주의 뒤쪽에 있었던 탓에 백호에게 다가가는 것보다는 유설린의 앞 

에 도달하는 게 빠르다는 판단 탓이었다. 

범이 이빨이 소교주에게 닿으려는 순간 여운휘는 유설린의 앞에 간신히 

도착했다. 여운휘는 팔에 내공을 모은 채로 내뻗었다. 그 탓에 범의 입 

은 유설린이 아닌 여운휘의 팔을 물고야 말았다. 

잠시 여운휘 때문에 멈칫 했던 사무린은 그제야 뛰어 내리며 범의 목덜 

미에 칼을 박아 넣었다. 

그냥 팔을 들이밀었더라면 잘리고도 남았을 상황이다. 하지만 다행스럽 

게 여운휘는 그 짧은 순간에 내공을 팔로 움직였고, 그 탓에 이빨이 박 

히기는 했지만 살점이 찢겨나가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여운휘는 범의 얼굴을 강하게 밀어 올리며 팔을 꿰뚫은 이빨을 뽑아냈 

다. 피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소교주님 괜찮으……" 

사무린은 소교주를 붙잡고 괜찮냐고 물었지만 유설린은 그런 그녀를 밀 

치고 여운휘에가 서둘러 달려갔다. 

"괘,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겠는가. 여운휘의 팔을 타고 땅을 적실 정도로 많은 피 

가 떨어졌다. 

"이 정도 상처쯤이야 금방 낫는다. 걱정 할 필요 없어." 

"하지만 이렇게 피가 많이 나는데……" 

유설린은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소매로 닦던 유설린은 갑자 

기 자신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이야." 

유설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찢은 옷으로 여운휘의 팔을 감기 시 

작했다. 유설린은 울면서도 꿋꿋하게 여운휘의 팔에 자신의 옷을 감았 

다. 

여운휘는 자신의 팔에다가 입고 있던 옷을 찢어서 붕대를 매주는 유설린 

을 내려다보았다. 눈에 눈물은 그렁그렁 달려서 참으려고 애쓰는 모습 

에 여운휘는 웃음까지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여운휘는 유설린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가식(假飾) 따위는 없 

는 그녀의 눈빛에 여운휘는 마음이 흔들렸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유설린은 자신의 옷을 찢었다.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은 없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여운휘의 어 

린 시절이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따뜻한 대우에 여운휘는 어렸을 적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친구가 떠올랐다. 

"어젠…… 미안했다." 

힘들지만 말하는데 성공했다. 여운휘는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사력을 

다 짜냈다. 붕대로 전락(轉落)해 버린 찢겨진 옷의 매듭을 지으며 유설 

린은 대답했다. 

"뭐가?" 

"…… 꼭 말해야 되나." 

유설린은 매듭은 마무리짓고는 약하게 툭 치고 뒤로 약간 물러났다. 그 

녀는 대답을 요구하는 얼굴이다. 

"뭐, 여러 가지……" 

여운휘는 얼버무렸다. 그렁그렁하게 눈물을 달은 채로 유설린은 살짝 웃 

었다. 

"헤에…… 용서해 줄게.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말 해봐." 

"나랑 친구하자." 

친구(親舊)…… 정말 간절히 원했던 이름이다. 어렸을 적 친구라는 것 

을 얼마나 원했던가. 그토록 갈망했던 것을 이 앞에 있는 여자아이가 해 

결해 주려고 한다. 

'친구라……' 

하지만 여운휘는 고개를 흔들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안 돼." 

생각지도 못하게 거절을 당한 유설린의 얼굴에 다시 그렁그렁하게 눈물 

이 매달렸다. 하지만 여운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운휘가 무릎을 꿇었다. 마교 교주에게도, 세상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했던 여운휘가. 여운휘의 입에서 존댓말이 튀어 나왔다. 

"항상 당신의 옆에 있겠습니다. 언제나 함께 하는 그림자처럼……" 

"그림자처럼 영원히…… 곁에 있어 준다고?" 

여운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 당신의 수호령(守護靈)이 되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영원히 곁에 있어 주겠다는 말에 유설린은 울음을 터트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외로웠다. 긴 세월동안 곁에서 말벗 하나 해 주는 사람이 없었 

다. 항상 친구를 갈망했다. 물론 여운휘가 말을 한 것이 친구는 아니 

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친구보다 더 가까운, 언제나 옆에서 같이 지내 

주는 존재가 되겠다는 말이다. 

"고마워. 정말……" 

여운휘는 자신이 밝힌 적 없는 속마음을 너무나 잘 알았다. 유설린은 모 

르지만 여운휘 또한 그녀와 별로 다르지 않은 과거를 지닌 탓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혼자 떨어져 있던 사무린은 당황했다.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자신이 짠 계획 탓에 오히려 여운휘가 점수를 받게 됐다. 이건 아니다. 

애써 한 행동이 자신이 아닌 여운휘에게 좋은 결과를 낳을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니야! 아직, 아직은 희망이 있어……' 

둘의 모습을 보면서 사무린은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며칠 후 교 

주가 소교주의 거처를 찾아 왔을 때 사무린의 소망은 부서졌다. 

"아버지, 저 여운휘로 정했어요." 

"음……" 

교주는 자신의 딸이 정한 호위무사가 남자라는 사실이 맘에 들지 않았 

다. 하지만 모두에게 포악한 교주라도 자신의 딸에게만은 예외였다. 

"정한 것을 바꿀 생각은 없느냐. 아무래도 너는 여자인데 남자 호위무사 

라면 항상 곁에 있어야 될 테니 많이 불편할 게다." 

"괜찮아요." 

"정 네 뜻이 그렇다면 더 이상 말은 안 하마." 

교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서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사 

무린에게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표시다. 

'망할!' 

사무린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게 다 여운휘라는 존재 탓 

이다. 언제나 그랬다. 여운휘는 항상 사무린이 나아가야 할 길에 걸려 

있는 걸림돌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여운휘는 강했다. 사무린보다 여운휘가 약했다면 여태까지 살아 

있을 턱도 없었고, 문제 거리가 될 리도 없었다. 

'정말 너라는 존재는 항상 내 앞을 막는 구나.' 

분했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미 결정 된 이상 차라리 

깨끗하게 물러나는 것이 낫다. 

"여운휘, 수고해요. 그럼 소교주님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개를 한 번 꾸벅하고는 사무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 사무 

린은 지나간 일을 후회하며 얽매이지 않는다. 그것이 가장 그녀다운 행 

동이다. 

그렇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서 잊는 것은 아니다. 

소교주의 호위무사가 되려던 꿈은 깨졌지만,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지 

않는가.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다. 

'오늘의 이 일, 훗날 갚아주겠어. 여운휘, 그리고 소교주.' 

사무린은 야망은 아직 건재(健在)하다. 

사무린과 교주가 사라지자 남은 것은 여운휘와 유설린뿐이다. 유설린은 

여운휘를 보면서 실실 웃었다. 

"뭐야." 

"아니,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게 좋아서." 

유설린의 마음을 이해하는 여운휘는 특별히 토를 달지 않았다. 여운휘 

는 며칠 전부터 질질 끌었던 것을 확실히 하고자 말했다. 

"난 존댓말을 잘 못한다. 내 성격을 보면 알겠지만 존댓말과는 거리가 

멀거든. 이해해 줄 수 있겠나. 정 안 되면 노력을 해서 존댓말을 써 보 

긴 하겠다만……" 

"아니야, 반말을 써. 그게 나도 편하거든. 친구 같고 좋잖아?" 

"전에도 말했지만 난 네 친구가 아니라……" 

"알아! 넌 나의 수호령이야. 항상 곁에서 지켜주는 존재." 

그 날 범에게서 구해준 후부터 자꾸 친구라고 말하는 탓에 여운휘는 유 

설린에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자기는 수호령이라고 말했었다. 그리 

고 지금 그 말을 유설린이 미리 가로채서 해 버린 것이다. 

유설린이 천천히 꽃들이 있는 쪽으로 다리를 움직였고, 그 뒤를 여운휘 

가 조용히 쫓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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