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사무린, 이만 나와라."
사무린은 사 년 정도가 지나자 첫 번째 구역에서 더 이상 먹을 것을 찾
을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약 일 년 정도 전부터 사무린은 두 번째 구역
에서 생활했다. 두 번째 구역을 휘저으며 힘겹게 지내던 터에 자신을 부
르는 목소리는 너무나 반가웠다.
사무린은 살아있다. 그런데 기관이 멈추며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무인
이 내려와 나가라 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사무린
은 바보가 아니다.
이 지겨운 관문이 끝난 것이다. 오 년이나 계속 된 이 관문이.
'오래도 버텼군, 여운휘.'
어떻게 오 년이나 버텼을지 사무린은 마냥 신기했다. 두 번째 구역과
첫 번째 구역에서 생활하면서 사무린은 그 기관들의 치밀함에 이를 갈았
다. 물론 그 안에서 생활하며 사무린의 실력은 부쩍 는 것은 사실이다.
한치도 방심 할 수 없는 세월의 연속은 사무린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운휘는 오 년이나 이곳에서 버텼다.
'역시 괴물이었어.'
하지만 살아 남은 건 자신이다.
사무린은 힘든 생활 탓에 잠시 잃었던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이 지겨
운 곳에서 나가는 곳이다. 이 관문에서만이 아니라 십 육 년 간 계속 지
내 온 이 사곡이라는 곳에서도.
자그마치 십 육 년이다. 십 육 년.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긴 세월이었음은 분명하다. 이곳에 왔을 때
는 열 살의 아이였는데 지금은 스물 여섯이다.
사무린은 자신을 이끄는 무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사림을 벗어나는
순간 웃고 있던 사무린의 입이 묘하게 비틀렸다.
앞에 그가 있다. 분명히 죽어서 자기가 나오게 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랬던 그가 살아 있다.
'여…… 운휘.'
여운휘가…… 살아 있다.
그것은 곧 여운휘가 그 네 개의 구역을 모두 돌파하고 책을 가져왔다는
소리다. 말도 안 된다. 아니, 여운휘가 살아 있으니 말이 되지 않을지
는 모르지만 그건 사실일 것이다.
사무린은 사림의 기관에 대해서 잘 안다. 두 번째 구역으로 처음 넘어
갔을 때 어땠는가? 첫 번째 구역과는 비교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위협
적인 기관에 놀랐었다. 두 번째가 그런데, 네 번째 구역이라면 상상조
차 되지 않는다.
"역시 성공하셨군요. 성공하실 거라고 믿었어요."
사무린은 입바른 거짓말을 했다. 차라리 죽었으면 했지만 살아 있는 이
상 친해지면 쓸모가 있는 자다.
"약속대로…… 둘 모두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됐다. 상상도 못했지만
사림이 깨졌다."
여운휘의 얼굴은 수염으로 가득했다. 제대로 정돈을 하지 못한 탓에 머
리도 산발(散髮)인 상태였고, 얼굴에도 하얀 피부를 감추는 검은 것들
이 잔뜩 묻어 있었다. 물론 얼굴이 엉망인 것은 사무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세수 같은 것을 할 처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조금 있다가 사곡의 문이 열릴 것이다. 그 전에 얼굴들 좀 깨끗하게 씻
도록 해. 너희들은 마교 교주님과, 교주님의 딸인 소교주님을 만나야 하
니까."
"이제 슬슬 저희도 왜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알 수 없을까
요? 또 여기서 나가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거죠?"
사무린은 물었다.
십 육 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죽음을 넘나들며 사투를 벌였다. 그런데 정
작 중요한 것은 그 영문도 모른다는 거다. 사무린은 궁금했다. 또한 이
곳을 나가게 돼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무엇일까?
살수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첩자?
"한 여자를 지킬 사람이 필요한 탓에 너희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어
떻게 되다보니 둘이 살아 남게 되어서 나머지 한 명은 무엇을 하게 될
지 잘 모르겠지만, 한 명은 호위무사가 된다. 아니, 호위무사보다 더욱
근접한 것…… 뭐랄까? 아, 항상 옆에서 지켜주는 존재. 즉, 수호령(守
護靈)과도 같은 존재가 되야 한다."
사무린은 기가 찼다. 겨우 여자 한 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그런 훈련
을 받았던 거라고 생각하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졌기에 사무린은 실망했다.
"누구를 지키는 거죠?"
"마교를 이으실 소교주님이다."
"여자를 지켜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소교주님은 여자 분이시다. 무남독녀(無男獨女) 외동딸이시지."
사무린의 마음이 변했다. 겨우 한 명의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마교
의 소교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교의 소교주라는 것은 곧 마교를
잇게 될 경우가 많다. 여자라서 마교 교주가 되는 것이 힘들지도 모른
다.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소교주의 남편이 마교의 교주 자리를 잇게 된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교주의 아내라면 마교 세력의 중추에 있게 될 것이
다. 그 안에서 사무린이 조금만 머리를 쓴다면 소교주를 이용할 수 있
다.
사무린은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수호령(守護靈)……"
여운휘가 중얼거렸다.
"기다리실 지도 모르니 어서 사곡의 밖으로 나가자. 소교주님을 지키게
될 사람이 둘 중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우선 나가서 결정하도
록 하지."
여운휘가 사림을 벗어나자마자 이곳의 감독관 중 하나였던 사혼을 교주
에게 보냈다. 지금 서둘러서 가야지 시간대가 대충 맞을 것이다.
"서둘러라! 교주님은 한가하신 분이 아니다!"
풍유랑은 이곳에서 함께 생활했던 무인들 모두에게 소리쳤다. 약 오십
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사곡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곡의 입구에 도착해서 문을 보니 감회(感懷)가 새롭다. 이곳을 통해
서 들어간 것이 벌써 십 육 년 전의 이야기이다. 지나갈 때는 어린 아이
였는데, 나갈 때는 어른으로 변해 있다. 쇠끼리 마찰을 이는 소리가 울
리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콰광!
문이 완전히 열리며 무거운 것이 바닥에 떨어질 때나 내는 소리를 뱉어
냈다. 문이 열리며 건너편 쪽에 있는 몇 명의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
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마교의 무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서 있는 기백
만으로 모두를 압도하는 남자, 현 마교의 교주 냉철거도(冷徹巨刀) 유백
명이다. 보고를 해야 하는 풍유랑만은 반정도 무릎을 굽힌 상태였고, 사
무린 또한 풍유랑의 행동을 보고 그대로 따라했다.
사곡에서 벗어난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운휘
만은 꼿꼿하게 서서 유백명을 바라보았다.
"명하신 대로 훈련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왜 둘이나 살아 남은 거지."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변해도 너무 변했다. 풍유랑은 변해버린 교주의
모습을 절감(切感)했다. 아내였던 엄여홍이 죽었다는 것은 사곡 안에서
정보를 가져다 주는 수하에게 들은 적이 있다. 변했다고는 들었지
만…… 이렇게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달라졌을 줄은 몰랐다.
예전에 교주였다면 미소를 지으면서 수고했다는 말을 먼저 건넸을 것이
다.
"둘 중 한 명이 사림을 깨버렸습니다."
"사림을? 호오……"
교주의 얼굴에 놀란 빛이 어렸다. 교주 또한 어렸을 때 사림에 도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세 번째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포기했지만. 그랬는
데 그것을 통과했다니, 교주는 내심 놀랐던 것이다.
유백명은 여운휘를 바라보았다. 둘 중 하나가 통과했다고 했으니 이 남
자 아니면 저기 있는 여자일 것이다.
'이 놈이군.'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기에 죽여 버릴 까도 생각해 버렸지만 사림
을 통과했다니 호기심이 인다. 물론 풍유랑에게 이 남자가 통과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유백명은 이 녀석이라고 아예 확정했다.
단지 감이다. 성격이 변했다고 해도 무인으로서의 감은 죽지 않았다. 눈
빛을 보면 그 사람의 그릇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둘 중 누구에게 호위무사를 시키실 생각이십니까."
"두 명이 모두 지키는 게 낫기야 하겠지만…… 노옹이 한 예언에서는
단 한 사람이 지켜야 한다고 했으니 이 둘 중 하나만을 선발해야 할 텐
데. 난 개인적으로 저 여자가 맡았으면 좋겠군. 남자 놈을 내 딸 곁에
둘 생각을 하면 치가 떨려서 말이야."
유백명은 예전 일을 상기했다. 딸 옆에 두었던 그 무인은 자신 가족을
망쳐 버렸다. 딸 옆에 또 다시 남자 호위무사를 두었다가는 마치 과거
가 반복 될 것 같다. 유백명은 여운휘가 아닌 사무린을 자신의 딸 옆에
두려고 했다.
"제 생각엔…… 소교주님께 두 명을 모두 맡겨 보고 선택하게 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교주님."
교주의 바로 옆에서 말을 하는 남자는 쫓겨난 마교 부교주 혈기린의 자
리를 대신한 추혼객(錘魂客) 엄백린이다. 죽은 엄여홍과는 달리 엄백린
은 볼품 없는 외모를 지녔다. 하지만 엄백린은 외모가 부족한 대신 머리
가 빼어난 인물이다.
"내 딸에게 맡기자고?"
"예. 아무래도 소교주님이 마음에 들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것도 그렇군. 좋아, 풍유랑 저 둘을 내 딸에게 데려다 줘라. 내 딸이
알아서 결정하겠지."
풍유랑은 굽혔던 무릎을 피고 여운휘와 사무린에게 손짓했다.
소교주는 이곳에 오지 않고 자신의 거처에 있다. 마교 교주 유백명은 자
신의 딸을 과보호한다. 자신의 아내가 죽은 그 순간부터.
마교 내에서도 최근 십 년 정도 동안 교주의 딸을 본 사람은 단 셋뿐이
다. 마교 교주 유백명과 부교주 엄백린, 마지막으로 밥을 가져다 주는
유모 이렇게 단 셋.
그 외에는 그 누구라도 본 적이 없는 교주의 딸은 마교 내에서도 추녀라
느니, 아니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느니 말들이 많았다.
모두에게 얼굴조차 내 비춘 적 없는 그녀의 이름은 유화린(柳花吝)이라
고 알려져 있다.
"아, 교주님. 소교주님이 호위무사를 선택하면 다른 한 사람이 남지 않
습니까? 그 남는 자를 저에게 좀 주십시오."
"맘대로 하게."
유백명은 장포를 펄럭이며 자신이 머무는 거처로 돌아섰다.
"멍청한 놈."
부교주가 중얼거리는 멍청한 놈은 과연 누구를 칭하는 말일까. 추혼객
(錘魂客) 엄백린 그는 결코 좋은 남자가 아니다.
교주가 가는 방향과 반대쪽에는 널따란 장원이 둘러져 있다. 그곳은 마
교 내에서도 몇몇을 제하고는 결코 들어설 수 없는 장소인 성역과도 같
은 장소였다. 이곳이 바로 마교 소교주인 유화린이 머무는 곳이다.
"누구냐!"
그 앞을 지키던 무인은 칼을 뽑았다.
"귀도, 풍유랑이다. 교주님께 대충 말을 들었을 것이다."
문을 지키던 무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 문을 지키고 있는
처지였지만 이 무인조차도 이 문 건너편으로 들어서 본 적은 없다. 안
내 따위는 해 줄 처지가 아닌 건 마찬가지다.
"수고하게."
풍유랑은 문을 지키는 무인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고 그 뒤를 여운휘와 사무린이 뒤쫓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넓게 펼쳐진 꽃들이었다.
"어머나, 소교주님께서는 꽃을 가꾸는 취미가 있으신가 봐요?"
"잘은 모르겠군. 나도 소교주님을 뵈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마교 내
에서도 소교주님을 뵌 사람은 세 명 정도 밖에 안 되니까."
"어머, 왜……"
팍!
사무린이 반응하기 전에 여운휘가 먼저 날아오는 것을 잡아챘다. 여운휘
는 자신의 손을 펴 봤다. 안에는 돌멩이 네 개가 낚아채어져 있었다.
한 번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던졌지만 여운휘는 그것을 단 한 번에 낚아
챈 것이다. 돌멩이가 날아오는 것 보다 손이 더 빨리 움직였기에 가능
한 행동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 번에 날아오는 돌멩이를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낚아 챌 수는 없었을 테니까.
"어, 어? 잡았네?"
멀리 있는 나무의 뒤쪽에서 여자 한 명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붉은 색
옷에 머리는 양쪽으로 묶은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보이는 여자아이였
다.
"혹시 소교주님이십니까?"
"응, 내가 소교주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문처럼 소교주는 추녀가 아니다. 오히려 귀여운 외모에 하얀 피부가
어딜 가도 빠지지 않을 미녀라고 봐야 했다. 어머니인 엄여홍보다 빼어
난 미모를 지닌 소녀는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녔다.
"그런데 넌 왜 무릎을 꿇지 않아?"
교주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은 여운휘다. 그런 여운휘가 이런 아이에
게 무릎을 꿇을 턱이 있겠는가.
"왜 무릎을 꿇지 않느냐니까? 다른 사람들을 다 꿇는데 너만 안 꿇는 이
유는 뭐야?"
"세상에 내가 무릎을 꿇으면서까지 대접해 줘야 할 상대는 없다."
"여운휘! 입 조심해라! 어리셔도 소교주님이시다!"
풍유랑은 여운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여운휘가 맘에 드는 건 사실이
지만, 이런 것까지 봐줄 수는 없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소교
주는 상관이다. 상관에게 무례한 것은 그냥 보고 넘길 수 없다.
"네 이름이 여운휘야?"
"그래."
"난 유화린이야. 근데 있잖아 너…… 되게 잘생겼다."
풍유랑은 화가 났던 마음이 식는 것을 느꼈다. 웃고 있던 사무린의 표정
도 딱딱하게 굳었고, 평생동안 표정이 바뀐 적이 없는 여운휘마저 할 말
을 잃은 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왜들 그래?"
유화린이 봐 온 남자라고는 자신의 아버지와 부교주인 엄백린뿐이다. 그
리고 오늘에야 풍유랑과 여운휘를 본 것이다. 젊은 남자는 난생처음 보
는 유화린은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던 것뿐이다.
"기가 차는 군."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교주님."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마교 소교주 유화린과, 하늘 아래 아무것에도 굴
하지 않는 남자인 여운휘는 이렇게 만났다.
아직도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유화린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다.
이 둘의 만남은 훗날, 무림을 바꾼다.